"부할의 증인이라"(행3:15) 부활주일 이재현목사(25.04.20)
부활의 증인이라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3:15 25.04.20. 부활주일예배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5)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이 열’렸다고 하였습니다(마27:51-52). 팔레스타인의 무덤들은 대개 천연 동굴이나,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조동굴에 유해를 안치安置하고, 그 출구에 큰 돌을 굴려놓아 봉함으로써, 의식적 부정을 방지하고, 야수에게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들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즉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마27:52).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났는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27:53). 여기서 ‘거룩한 성’이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은 당시 예루살렘에 국한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2천 여 년 전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의 땅인 이스라엘에 오셨지만, 그들이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성도인 죽은 조상들이 살아나 “예수님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날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은 부활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죽었던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마9:18-26;막5:41-43;눅7:14,8:40-56;요11:43-44). 그들이 부활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소생한 것입니다. 부활은 죽을 육체인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입니다(고전15:53). 영생체가 되는 것입니다(참고/빌3:21). 부활의 ‘첫 열매’는 에수님이시고 그 전후로 아직 부활한 사람은 없습니다(고전15:23).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무덤을 열고 살아난 자들은 소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예수님을 메시아, 구원자로 자신의 가족들에게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전파했음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통해서도 살리셔서, 예수님이 부활했음을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대적자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도다’고 하신 후(요19:30), ‘영혼이 떠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마27:50).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은 그 후에도, 크게 염려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부활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을 확인했지만, ‘그 이튿날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기억하노니’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였고,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고 하였습니다(마27:62-66). 그런데 ‘안식 후 첫 날’ 주일 새벽 무덤 주변에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천사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무덤을 ‘지키던 자들 (경비병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1-4).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하였습니다(11-15). 주님은 부활하셨고, 부활한 주님의 증인 가운데는 ‘아이러니’irony하게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적자를 통해서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상한 자가 치유 받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그리고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 (주일)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마28:1).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천사에 의해 돌이 굴려지고 빈 무덤을 보게 됩니다(마28:2-4).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말을 듣고,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하였습니다(마28:5-8). 병행 본문에는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에게 달려가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전하자, ‘베드로와 그 (요한이)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요20:2-5).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요20:6-7).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사도 요한)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하였습니다(요20:8). 그러나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고, ‘두 제자(는) (낙담한 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요20:9-10).
그러나 모두가 떠난 뒤 홀로 무덤 앞에 섰던 사람이 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주님을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요20:11). 그리고 ‘뒤로 돌이켜’ 한 분을 보게 됩니다(요20:14). 누구시겠어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요20:14). 이에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말하는 순간,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선생님 이라고 답했습니다)’(요20:15-16). 지난 3년 여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항상 자신을 불러 주시던 따뜻한 음성 그대로였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제야 주님인 것을 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평안하냐’ 물으시고,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마28:9-10.참고/막16:1-8;눅24:1-12;요20:1-10).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한걸음)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리쳤습니다(요20:18).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고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영광을 얻게 된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었습니다(눅8:2).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악귀를 쫓아내심과’ 악귀로 인한 심신의 중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눅8:2).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몸도 맘도 영도 강건해졌습니다. 그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을 치유하신 주님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그녀에게 이제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던 막달라 마리아만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었다고 했습니다(눅8:3). 이것은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이고, 열거되지 않은 다른 많은 여인도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를 따랐습니다. 그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게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자,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온 많은 여인, ‘여자의 큰 무리’가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7:55-56).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안식 후 첫날, 주일에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와 살로메’였습니다(막16:1;눅23:55-56). 이 여인들 가운데도, 빈 무덤을 보고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무덤 앞에서 울며 주님을 찾았던 것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그녀에게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찾아가 ‘내가 (부활의) 주를 보았다’ 증언하였습니다(요20:18). 하나님은 일곱 귀신으로 상한자를 살리셔서, 그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자를 통해서도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다
‘안식 후 첫날 (주일) 저녁 때에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갈까 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있던)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요20:19). 그러나 부활하시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예수께서’ 닫힌 문 안으로 들어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안부를 전하셨습니다(요20:19). “이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하신)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20:20.참고/마27:35;막15:25;눅23:33;요19:18,34).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성경에 기록만 11번 나타나셨습니다(행1:3.참고/막16:9;요20:1,14-18;마28:1-10;막16:1-2;눅24:34;고전15:3-5; 막6:12;눅24:13-35;눅24:35-40;요20:19-24;행1:13;요20:26-29;요21:1-23;마28:16-20;막16:14-18;고전15:6;고전15:7;막6:3;막16:19-20;행1:1-12;눅24:50-53).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기도 하셨습니다(고전15:6). 그럼에도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마28:16-17). 그러나 이 의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The Great Commission’ 대사명을 맡기십니다.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참고/막16:14-18;눅24:36-49;요20:19-23;행1:6-8).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대사명을 받았음에도 제자들은 곧바로 증인되지 못했습니다.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을 때,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디베랴, 갈릴리 호수)가노라’고 하였습니다(요21:1-3). 이때까지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두 번 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며 나타나셨습니다(요20:19.참고/마28:16-20;막16:14-18;눅24:36-49). 그런데 이 자리에 ‘도마’가 ‘함께 있지 아니하’였습니다(요20:24). 이 말씀을 빗대어 우리가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라고 합니다. 주일 저녁에 도마는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때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공예배 출석을 잘해야 합니다. 자기가 나오지 않고 받지 못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지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요20:25). ‘여드레’후,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부를 전하시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자, ‘도마가 대답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하였고, ‘예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요20:26-29).
이렇게 두 번씩이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베드로는 부활의 증인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어부의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요21:2). 그리고 돌아가면 혼자 조용히 가지 다른 제자들을 부추기라도 하듯이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과 (빌립과 안드레일 것으로 추측되는) 또 다른 제자 둘’ 등 여섯 명의 제자들이 있는데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하였습니다(요21:3). 그러자 이 여섯 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고 하였습니다(요21:3). 3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광경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습니다(눅5:3). 주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자, 베드로가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눅5:5). 3년 전 그날의 ‘데자뷰’deja vu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올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여섯 명의 제자들은 지난 밤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새벽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요21:4). 빈손인 그들에게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21:6). 이 또한 3년 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던 그 음성과 같았습니다(눅5:4).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요21:6). 이 또한 3년 전 주님 말씀대로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와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눅5:6-7). 그렇다면 3년 전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해야 해야 맞지 않겠습니까?(눅5:8).
뒤늦게서야 바닷가에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안 베드로는 염치가 없어서 그랬는지, 주님이 직접 숯불에 구운 생선과 떡으로 만든 조반을 먹으며 아무 말도 못 하였습니다(요21:9-12). 이때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입니다(요21:14). 아무 말도 못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반복해서 물으셨고, 그제야 ‘베드로가 근심하여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답하자,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요21:17). ‘내 양을 먹이라’ 이 또한 3년 전 ‘나를 따라오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과 표현만 다를 뿐 동일한 명령을 하셨습니다(마4:9).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였음에도,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시며,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눅24:48-49). 그리고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눅24:50-51).
부활의 증인 앞에서, 사람이 감동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나타나셔서, 내 증인이 되라,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간절히 간구했습니다(행1:8,14). 열흘이 지나서, 그 자리에 모였던 제자들을 포함한 120 문도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행2:1-4). 120 문도 가운데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일어서서, 오순절인 맥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소리 높였습니다(행2:14).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2:23-24). 유대인, 너희들이 가장 자랑하는 왕 ‘다윗이 (예수를) 가리켜’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2:25,31.참고/시16:8).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32).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을 주님을 만났다는 외침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하자,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행2:21,37-38). 그날에만 회심한 자가, ‘삼천이나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2:41). 지난 3년 동안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지만, 마지막에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따라,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고,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난 역사입니다.
오늘 부활주일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기도 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구하는 것이 있나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날에 삼천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요. 여러분이 지금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 실상은 사람이 감동되어야 풀릴 일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매달려 힘입어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하루에 삼천이 더 회심하였습니다. 부할의 증인 앞에서, 사람이 감동됩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의 역량을 얻는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에서,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외쳤습니다(행3:15).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때 가장 경계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였습니다(행3:2). 그들은 더 이상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지 못하도록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어 버렸습니다(행3:3). 그러나 베드로는 위축되지 않고, 성령에 충만하여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3:10). 소리를 높였습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변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이 후에는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였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자,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고 하였습니다(행4:17-21). 감옥에서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고,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행4:23,33). 유대인들이 무서워 벌벌 떨던 제자들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권능을 입은 것입니다. 권능은 주님의 제자로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의 역량을 얻게 됩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인생이 결정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냥 무덤만 하나 남겨놓고 가셨다면, 그분이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사람이시지만, 또 참 하나님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지만,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마1:1,17;요1:14,10:30,33,20:28;골2:9).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롬6:9.참고/요5:24;롬8:2).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여기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분명하니까 믿습니다. 그것마저 부인한다면 그건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으로 갈라지는가 하면,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만, 비크리스천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에 확증하기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말로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득시킬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시면, “아, 그렇구나.’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성령에 충만하여 부활의 증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과학적인 설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증거만 주셨습니다. 아무리 거짓말 같은 일이라도, 세 사람 내지, 네 사람이 직접 보았다고 하면, 그것은 과학적인 증명이 없어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잘 증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후 무려 사십 여일 동안 계시면서, 한 사람, 열 사람, 백 사람이 아니라, 오백 명에게 보이셨습니다(고전15:6.참고/행1:3). 이런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에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앞서 말씀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지 못해서, 대제사장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을 막고,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하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8:12-13). 부활이라는 주제로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 사복음서를 대조하여 보면, 마태복음에는 무덤에 천사가 한 사람만 나타났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는 천사가 두 사람이 나온다고 하고,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마28:1-2;막16:1-5;눅24:2-4). 어떤 사람들은 이 일관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부활의 증거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붙잡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 판사라고 한다면, 그 범죄 현장을 봤다는 증인, 네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범인이 파란 옷을 입었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그가 윗도리는 파란색이었지만, 바지는 까만색이었다고 대답을 하고, 조금씩 맞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은, 그 사람이 틀림없이 범죄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한다면, 네 사람 증인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범행의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면, 증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조금의 차이도 없이 네 사람이 다 똑같이 진술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사전에 모의한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만약 거짓말로 쓰인 것이라면, 사 복음서를 동일하게 만들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실을 기록한 것은 목격한 사람에 따라, 그 각도가 다를 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한번 자세히 보아야 하는데요. 성경 한 장도 안 읽고서, 막연히 생각만으로 “아, 그건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어”라고 합니다. “벤허”Ben-Hur라는 영화를 본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다인 11개 부문을 석권하여, 현재까지도 전설적인 영화로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영화이어서, 1959년 개봉 이후에도, 수없이 재개봉에 재개봉되었습니다. 저는 다섯 번 보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살던 촌구석에도, 예산 읍내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포스터가 붙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복수하려고 칼을 들고 날뛰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그 손에서 칼이 떠나고, 원수를 사랑으로 받아 주었다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이 영화 대본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이 루이스 월리스Lewis Wallace,1827-1905란 분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군이고,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아니꼽기 짝이 없습니다. 거짓말 같은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속고 있는데, 내가 연구를 좀 해서, 예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친구 잉거슨Ingerson과 둘이서, 유럽과 미국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부 모아가자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반박 논문을 쓰려면, 무엇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합니까? 성경을 제일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 내가 도무지 이 진실을 거짓말이라고 할 자신이 없구나” 하고, 펜대를 집어 던지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여, 나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의 구원자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크리스천이 되어 쓴 작품이 바로 “벤허”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정리
죽은 자가 살아나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그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27:51-53).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왜 일어 난 것은, 죽은 성도들이 살아서, 자신의 후손과 가족에게 예수님이 기다리던 메시아이고, 죽음을 이기신 분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부활한 것은 아닙니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나사로’와 같이 소생한 것이고, 주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마9:18-26;막5:41-43;눅7:14,8:40-56;요11:43-44). 부활은 죽을 육체인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입니다(고전15:53). 영생체가 되는 것입니다(참고/빌3:21).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시고 그 전후로 아직 부활한 사람은 없습니다(고전15:2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전파했음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부활했음을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대적자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고도, 주님이 생전에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을 염려하여, 총독에게 경비병을 더욱 강화하여, 무덤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마27:62-66). 그러나 안식 후 첫날, 주일 새벽에 무덤 주변에 큰 지진이 나고, 형상이 번개 같고 눈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내자, 경비병들이 무서워 죽은 자들처럼 되었고, 몇이 성에 들어가 이 사실을 대제사장에게 고하니, 그들이 돈을 주면서, 제자들이 예수의 유해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일렀고, 이 말이 오늘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하였습니다(2-4,11-15). 부활의 증인 가운데는 ‘아이러니’ irony하게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적자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부활했음을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상한 자가 치유 받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 (주일)이 되려는 새벽에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마28:1). 그런데 천사가 큰 돌을 옮기고, 빈 무덤인 것을 보게 됩니다(2.참고/막16:5;눅24:2;요20:1). 천사는 여자들에게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말을 듣고,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하였습니다(마28:5-8). 그녀들에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때까지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알지 못하고, 낙담한 체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요20:2-10).
예수님이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서, 모두가 떠난 뒤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홀로 무덤 앞에 섰습니다(1-2, 5-8, 11, 참고/마27:55-56,60-61;막16:5;눅8:1-3,23:27,55-56,24:2;요19:25,20:1-10). 그립고 그리운 주님을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요20:21). 그녀에게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요20:4). 그러나 동산지기로 알고 있던 그녀에게 ‘마리아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랍오니’(선생님)라고 화답하며, 주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요10:15-16). 지난 3년여 동안 자신을 불렀던 따뜻한 음성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평안하냐’ 물으시고,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마28:9-10.참고/막16:1-8;눅24:1-12;요20:1-10).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한걸음)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리쳤습니다(요20:18).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고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전에 ‘일곱 귀신’에 사로잡여, 피폐한 삶을 살았었습니다(눅8:2).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악귀를 쫓아내심과’ 중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눅8:2) 그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부던 막달라 마리아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많은 여인도 있었습니다(눅8:3.참고/마27:55-56).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안식 후 첫날, 주일에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와 살로메’였습니다(막16:1;눅23:55-56). 이 여인들 가운데도, 빈 무덤을 보고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무덤 앞에서 울며 주님을 찾았던 것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그녀에게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곱 귀신으로 상한 자를 살리셔서, 그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저녁, 주일 밤에 자신들도, 잡힐까 봐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전하며, 못 박혔던 손과 창에 찔리신 허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20:19-20.참고/마27:35;막15:25;눅23:33;요19:18,34).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성경에 기록만 11번 나타나셨습니다(행1:3).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기도 하셨습니다(고전15:6). 그럼에도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16-17). 그러나 이 의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The Great Commission’ 대사명을 맡기십니다.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참고/막16:14-18;눅24:36-49;요20:19-23;행1:6-8).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대사명을 받았음에도 제자들은 곧바로 증인되지 못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은 디베랴, 갈릴리 호수로 가서, 이전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자 하였습니다(요21:1-3). 이 때까지 제자들은 두 번이나 부활의 주님을 뵈었던 때이었습니다(요20:19,26). 3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광경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이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자,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눅5:3-5).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올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밤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새벽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요21:4).
빈손인 그들에게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21:6). 이 또한 3년 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던 그 음성과 같았습니다(눅5:4).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요21:6). 이 또한 3년 전 주님 말씀대로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와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눅5:6-7). 그렇다면 3년 전과 같이 베드로는 ‘8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해야 해야 맞지 않겠습니까?(눅5:8).
뒤늦게서야 바닷가에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안 베드로는 주님이 직접 숯불에 구운 생선과 떡으로 만든 조반을 먹으며 아무 말도 못 하였습니다(요21:9-12). 이때가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날입니다(요21:14). 침묵을 깨시고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반복해서 물으셨고, 그제야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답하자,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요21:17). 이 또한 3년 전 ‘나를 따라오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과 표현만 다를 뿐 동일한 명령을 하셨습니다(마4:9).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였음에도,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시며,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눅24:48-49). 그리고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눅24:50-51).
부활의 증인 앞에서, 사람이 감동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나타나셔서, 내 증인이 되라,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눅28:48-5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간절히 간구했습니다(행1:8,14). 열흘후,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소리 높였습니다(행2:1-4,14).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3-24). 너희들이 가장 자랑하는 왕 ‘다윗이 (예수를) 가리켜’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행2:25,31.참고/시16:8).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부활을 주님을 만났다는 외침입니다. 이날 회심한 자가, ‘삼천이나 더하’였습다(행2:41).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에 나타난 역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요. 기도하고 있는 제목들 실상은 사람이 감동되어야 풀릴 일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매달려 힘입어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사람이 감동됩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의 역량을 얻는다.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의 증거를 싫어한 종교지도자들이 감옥에 가두었지만, 위축되지 않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이름’을 당당하게 전하였습니다(행3:2,3,10,15). 종교지도자들이 ‘이 후에는’ ‘경고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였지만, ‘너희의 말을 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행4:17-19). 석방된 ‘사도들이 동료에게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고,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행4:23,33). 유대인들이 무서워 벌벌 떨던 제자들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권능을 입은 것입니다. 권능은 주님의 제자로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의 역량을 얻게 됩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인생이 결정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냥 무덤만 하나 남겨놓고 가셨다면, 그분이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사람이시지만, 또 참 하나님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지만,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마1:1,17;요1:14,10:30,33,20:28;골2:9).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롬6:9.참고/요5:24;롬8:2).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여기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분명하니까 믿습니다. 그것마저 부인한다면 그건 무식한 사람입니다.
영화 “벤허”Ben-Hur,1959는 아카데미 역대 최다인 11개 부문을 석권한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영화로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복수하려고 칼을 들고 날뛰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그 손에서 칼이 떠나고 원수를 사랑으로 받아 주었다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이 영화 대본을 쓴 루이스 월리스Lewis Wallace,1827-1905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장군이고, 스타이었던 그는 원래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아니꼽게 보았습니다. 내가 연구를 해서 부활이 거짓말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반박을 하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 내가 도무지 이 진실을 거짓말이라고 할 자신이 없구나” 하고, 펜대를 집어 던지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여, 예수님은 나의 구주입니다. 나의 구원자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크리스천이 되어 쓴 작품이 바로 “벤허”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그동안 마태복음 말씀을 보았습니다. 총 28장은 예수님 3년 공생애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21-28장까지, 여덟 장에 걸쳐, 주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1/3이 예수님 이 세상에서 끝, 7일에 대한 상세입니다. 무엇을 알게 합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핵심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사람이 마음이 움직입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의 역량을 얻게 됩니다. 부활의 증인 앞에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5)
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성도들이 무덤을 열고 살아나서, 예루살렘에가서, 예수님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자를 살리셔서,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분임을 보이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② 대제사장들은 경비병들로부터 빈무덤 보고를 듣고, 그들에게 돈을 주어 제자들이 예수의 유해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적자를 통해서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그 어떤 세력이라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③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전에 일곱 귀신들려 고통았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영혼을 살리셔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영육에 강건함을 얻게 하옵소서.
④ 베드로와 사도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 충만을 받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자, 하루에만 회심자가 삼천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 될 때, 기도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부활의 증인되어서, 사람이 감동되게 하옵소서.
⑤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었던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자, 권능을 얻었습니다. 권능은 주님의 제자로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제자의 역량을 얻게 하옵소서.
⑥ 불신자 월리스가 성경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벤허를 쓴 대문호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고 중보하는 이들이 부활의 증인 앞에서, 주님이 주인되는 인생을 결정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