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1) 가정주일 이재현목사(25.05.18)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전도서 3:1-11 2025.05.18. 家庭主日禮拜
“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1)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 달 교회의 표어는 ‘생명의 달’입니다. 가정의 중심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또 하나의 가정인 교회, 가정과 교회에 생명의 환희가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범사의 기한과 때
오늘 본문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총 14가지가 대조되어 있는데요. 각 각의 대비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 우리들은 좋은 때를 원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먼저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는 말씀에서, 날 때가 죽을 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전3:2) 제가 예전에 살던 동네, 가까운 곳에 상암월드컵 경기장 내, ‘스칼라티움 웨딩 예식장’이 있었는데요. 참 호황을 누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계약을 포기했습니다.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잖아요. 그로 인해 연이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 신생아 출산율인데요. 이미 오래전에 한 가정 자녀 출산 수가 1명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두 가정이 합해져야 한 명 이상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 또한 잘 아실 것입니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너무도 많은 재정이 지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어려운 가운데도, 복잡 복잡하게 사는 중에도, 아이들 낳아 힘들게 키우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쁜 일인가 하는 것, 우리는 인생 경험상 아는 사실입니다.
친구 목사님 위임식에 다녀왔을 때 일입니다. 행사를 마친 후, 식사를 하는 자리에 한 목사님과 같이 앉게 되었는데요. 목회지가 깊은 시골이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20년 목회하면서 아이 태어나는 울음소리 한 번 듣지 못했다고요. 사람들이 죽으면 산소하기 위해 찾고 곡소리만 들린다고요.”.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죽을 때보다는 어찌 되었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힘들어도 날 때가 좋은 것입니다.
이어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전3:2). 파종할 때와 추수할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보리를 재배했었는데요. 보리는 늦가을에 뿌려지고, 추운 겨울에 보내고, 봄을 지나, 초여름인 6월 말경에 추수를 하지 않습니까? 그때 참 힘들어요. 보리를 베는 것이요. 그 무더운 날에 베어야 하니까요? 날이 너무 무덥기에 상의는 런닝 하나만 입고 추수를 하는데요. 아버지 여기 계시지만, 아버지 등 전체에 엄지 손톱 만한 물집이 덮을 정도였습니다. 가을에 벼를 벨 때보다, 더 힘들어요. 그럼에도 추수라는 기쁨이 있기에 힘듦이 힘든 일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심을 때보다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좋은 것입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신3:3). 죽일 때보다는 치료할 때가 좋습니다. 한 번은 전도 대상자가 입원하셨다고 해서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 분이 복통을 호소하는데, 얼마나 아프신지, 제 손을 꼭 잡으면서, “목사님 제발 살려주세요.”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전도하러 갈 때는 그렇게 외면하더니, 저에게 그토록 애절한 눈빛으로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얼마나 아프시면, 저렇게 하실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완쾌되어 퇴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이 장사하는 음식점에 갔습니다. 점심도 먹을 겸해서 찾아갔더니, 저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병문안 와주어서 기도해주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기 이전, 제가 전도하러 방문했을 때, 보였던 반응과 같이, 쌀쌀하게 대하면서, 주문한 음식만 식탁에 탁 내놓더니,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보듯이, 사람은 어찌 되었건 죽일 때보다, 치료할 때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팠을 때는 이전에 쳐다보지도 않던 목사 손을 잡으면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고침 받고 나서는 다시 아는 체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은 죽일 때보다 치료할 때가 더 좋은 것입니다.
이어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라고 합니다(전3:3). 우리 교회가 있는 청라국제도시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바다 갯벌을 매립하여 조성한 신도시입니다. 그러나 구도시를 전면 재개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기존 가옥과 상가들을 헐고, 멋지고 번듯한 아파트와 빌딩을 세웁니다. 이런 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합니다. 기존에 낡고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지요.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는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나아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개개인의 삶도 더 윤택한 쪽으로 발전해가면 좋은 일일입니다. 교회적으로도 아름다운 성장을 더해가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일입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전3:4). 여기에는 더 부연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상처와 눈물과 슬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애통에도 많은 사연이 있는데요.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애통이 제일 크다고 하지 않습니까?
선배 목사님 가운데 사모님이 먼저 소천하셨습니다. 참 가슴 아팠습니다.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시 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중미 온두라스 지방도시 그라시아스에서 실제 있었던 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라몬 멤브레뇨’(69), 아내 ‘실비아 가바레테’(70)는 결혼 후 42년을 해로했습니다.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둘 다 평생 교사로 일하면서, 수천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평소에도 잉꼬부부로 소문난 두 사람은 은퇴 후에도 여행과 취미생활을 함께하며 부부애를 과시했습니다.
이날도 부부가 함께 외출을 했는데요.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심한 두통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서둘러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그게 부부에겐 마지막 외출이 됐습니다. 아내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지고 말았습니다(2019.1.18). 서둘러 빈소를 차려야 했고요. 남편은 심신이 무너진 듯했지만, 아내가 누워 있는 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를 본 자녀들이 걱정이 돼 “아버지 제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라"고 권했습니다. 자녀들의 간곡한 부탁에 떠밀리듯 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은 잠시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그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잠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내가 숨진 지, 8시간 만의 일입니다. 아마도 남편에게는 지난 42년간 함께 했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컸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배우자 먼저 떠나보낸, 스트레스가 그렇게 극심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에게는 한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어야 하는 큰 아픔이겠지만, 부부가 한 날에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케이스가 얼마나 되요. 앞에 노회 선배 목사님의 사모님이 소천 하셨다고 하셨는데요. 부부가 한 날에 같이 떠날 수 없고 따로 간다면, 남편이 먼저 가는 것이 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모님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드리게 되었어요. 1년 전 암이 발견되었을 때, 불과 한 달 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대학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암을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그 후 몸이 좀 안 좋아서 동네 병원에서 진료 받다가, 아무래도 암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고, 다시 다른 종합병원에서 정밀 진단 검사 결과, 암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여 뒤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나이 이제 육십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년입니다. 지난 목회 30년 동안 예배당을 세 번 건축했어요. 세상 적으로 말하면, 이제 기반 잡을 것 다 잡고, 손주들 재롱 보아가면서, 한 참 재미있게 살 때입니다. 다른 장례 같으면, 빈소에만 가서 조문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알기에 조문한 다음 날 부평에 있는 인천가족공원에까지 찾아 갔습니다. 답례 문자가 왔어요. 찾아 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다고요. 그러시면서 자기는 아직도 아내의 떠난 뒤 마음을 추스르는 중이라고요.
울음과 슬픔을 이야기 하면서,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목사님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요. 이러한 울음과 슬픔보다. 웃을 때와 춤출 때가, 사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전3:5). 이 말씀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로 생각하실 분은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6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6-8). 이 말씀에 등장하는 ‘건축자의 버린 돌’은 공사장에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부딪히는 돌’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입니다. 이 돌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안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용도에도 필요 없는 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부딪히고 걸려 넘어 지게 하는 돌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보배요. 예수님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안 믿는 자와 같이 예수님을 버린 돌이 아닌, 예수님을 보배의 돌로 믿는 자는 좋은 일입니다.
이어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라고 합니다(전3: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눅13:34). 여러분도 함께 읽어 주시겠어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13:34). 아멘!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입을 막고, 감옥에 가두고, 채찍을 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를 비유로 예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는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은 번번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자기 아들을 보내셨지만,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눅13:35).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는 이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안으실 때, 안기는 자는 좋은 일입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전3:6). 어떤 것이건 잃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잃는 것보다는 찾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잘 묵상해 보세요.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찾았다는 말이에요. 자기 것인데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후자이죠. 그러면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영적으로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영생을 주셨습니다. 천국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구원, 영생, 천국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잃어버린 체로 살아가야하는 안타까운 삶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사는지를 모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찾을 때가 있고’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잃을 때 있으며’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잃을 때가 아니요, 찾을 때 우리는 좋은 일입니다.
이어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강남의 한 클럽에서 발생한 폭행으로 시발되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요. 재벌 3세 그리고 그의 진술로 공범이 된 한 연예인은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이 추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수이자 배우였던 그는 앞서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마약을 한 사실이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탄로 났습니다. 그로 인해 소속사에서 퇴출당하고, 그를 사랑했던 팬들에게서도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거짓 기자회견을 한 이유에 대하여, “나 자신을 내려놓기 힘들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연예인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주체할 수 없어서 즐기고 쓰느라 그렇게 된 것인지, 그 연예인이라는 자리가 그토록 힘겨운 것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인지, 그 진실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말 “나 자신을 내려놓기 힘들었다.”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버릴 때를 놓치면, 마지막 지킬 수 있는 것까지, 지키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자회견에서 사실을 고백하고, 사랑해준 분들에게 깊인 사죄를 드리고,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했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을 줄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버릴 때 아쉽더라도, 버릴 것이라면 버려 버릴 때, 나에게 비로소 지켜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더 더욱 체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버릴 것을 알 때 지킬 것을 얻게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전3:7). 하나님의 일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찢을 때보다는 꿰맬 때가,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이어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전3:7). 우리가 침묵할 때와 반론할 때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요. 양자 어느 경우가 되었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전3:8). 미움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 개인의 희비를 넘어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말씀과 같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대치와 적대로 인한 전쟁보다.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평화가 더 좋은 것입니다.
어느 때이든 끝이 아니다
지금까지 대비되는 두 가지 때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는 그중 좋은 때를 선호함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웃을 때와 춤출 때 기억은 없고, 울 때와 슬퍼할 때의 기억과 상처와 앙금만 남아 있을까?”하는 생각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본문의 관점은 “나에게 언제 좋은 때가 올까”가 아니라, 지금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때는 “끝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른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좋은 때에 있다고, 마냥 좋아만 할 것도 아니고, 나쁠 때라고, 한숨짓는 날만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이왕에 내가 당할 상황이 좋은 때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내가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이 좋은 때이든 나쁜 때이든, “그 때가 끝은 아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배워야 할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관한 말씀 시작하면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전3:1). 그리고 때에 관한 말씀을 다하신 후, “9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전3:9-10). 인간은 자신이 어떤 때를 겪게 될지 모르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다 좋은 때를 원하지, 나쁜 때를 원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어떤 때를 겪게 될지 모르며 살아가기 때문에, 결론은 그 인생들의 노고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내가 어느 때를 당하던, 쉽게 들뜨지도, 낙담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지금 내가 설사 나쁜 때에 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닌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나쁜 때를 좋은 때로 바꿀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는 말씀과 같이, “일생 동안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전3:9-10) 가슴에 멍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느 때가 되었던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전도서를 기록한 기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전7:14). 성도 여러분도 함께 읽어 주시겠어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에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이 올 수 도 있습니다. 그때는 원망이 아니라, ‘되돌아 보아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시면서 이 두 가지, ‘형통’과 ‘곤고’를 하나님은 병행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형통한 날이 항상 형통한 것이 아니요. 지금 나의 곤고한 날이, 항상 곤고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장래 일’인 ‘형통’과 ‘곤고’는 사람이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본문 후반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고 하십니다(전3:11). 그렇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주권과 섭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는 지금의 내가 어떤 때가 되어도 희비하지 않습니다. 좋은 때라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쁜 때라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좋은 때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쁜 때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더 철저히 내려놓습니다. 이것입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지금 내가 어느 때에 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는 지금 나의 때로 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것입니다. 지금 나의 때를 보고, 인생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때는 “끝이 아니다”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인생의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아멘! 거기까지만 읽겠습니다. 인생의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에게 좋은 때 이건 나쁜 때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때를 주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믿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요 지금 나에게 좋은 때이건 나쁜 때이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때인 것을 깨닫는 자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난 것에 대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여러분들이 지금 내가 어느 때에 있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때”야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 역사를 믿는 사람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앞서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목사님은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작정했습니다. 얼마를 했을까요? 1억을 작정했습니다. 물론 사모님 돌아가시기 전 작정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아내를 고쳐달라는 마음도, 그 감사예물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병원에서는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1년 전 암을 발견한 의사는 앞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하심이 없는 한, 사모님이 돌아가실 줄 몰랐겠어요. 그런데 감사헌금 1억을 작정했습니다. 아니 30년 동안 교회 개척하면서, 그렇게 고생 고생한 아내가 죽게 되었는데, 감사헌금을 해요.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그 목사님이 돈이 그렇게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였나요. 아닙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자기가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사례비와 퇴직금에서, 갚아 나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에게 어떤 때가 되었건,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마음에 무슨 마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때에 내 인생을 좌우도 평가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이 아름다운 때임을 믿고, 그때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지금 이 세상의 때가 아니라, 저 천국 영원을 사모하는 자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가정
오늘은 가정주일입니다. 가정 주일에 우리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영원을 사모하는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족들 모두 영원을 사모하는 가족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가정의 주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청아비전교회 성도들 모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모두 영원을 사모하는 교회와 가정이 되라”. 아멘! 가족들 모두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과 그의 자녀들
사무엘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사사로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이 삼중 직 대제사장, 선지자, 왕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한 후, 마지막 고별 설교에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2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3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삼상12:2-3).
사무엘은 자신의 일생,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누구의 소와 나귀를 빼앗은 적도, 누구를 속이거나 압제하지도,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런 행위가 있었다면, 다 갚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삼상12:2-4). 이에 백성들은 우리를 속이지도 압제하지도 빼앗은 적도 없다고 화답합니다.
그런데요 참 이상한 것은 사무엘의 두 아들들의 행악입니다. “1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8:1-3). 사무엘은 일생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도, 백성들에게 착취도, 압제도, 리베이트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두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하였도다 말합니다.
“4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8:5).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엘에게 당신은 늙고 두 아들들은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격이 없으니 우리에게 이방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왕정 정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삼상8:7). 하나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정치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지 않은 왕정 정치를 하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사무엘의 두 아들의 패악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사, 지금의 때가, 자기들 팔자 필 기회로 생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뇌물을 받고 착복을 한 것입니다. 왜! 우리의 집안의 부모와 자녀 모두가 영원을 사모하는 가정이되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도 중요한 자리에 함께 했던 대표적인 세 제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마17:1-8,26:36-46;막5:37). 이 중 요한과 야고보는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로 형제입니다(마17:1,27:56;막1:19,3:17,5:37,15:40;행12:2).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도록 예수께 간청하다가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눅9:53-55). 그래서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예수님의 정치적 메시야 되심을 믿고 세속적인 지위를 구하기도 했으며, 예수님이 잡히실 때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망쳤습니다(마20:20-28;막3:17,14:50;요21:1-2;고전15:5). 이렇게 별다른 일을 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열두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요21:1-2;고전15:5;행1:13,12:2;갈2:9.AD44).
야고보의 형제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으로부터 마리아 봉양을 명 받았습니다(요19:26-27). 요한은 그날로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전승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이 부활 했을 때 요한의 나이가 서른 살 정도이었고, 마리아가 예수님 부활 후 삼십 년 이상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순이 될 때까지 마리아를 봉양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한은 평생 마리아 뒷바라지한 셈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인 일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자’ ‘사랑의 사도’로 불리던 요한이었습니다(요13:23,21:20;요일2:9-10,3:14-18,4:7-8,20). 이렇게 예수님께로부터 가장 사랑받던 제자가 삼십 년씩이나 마리아 할머니 봉양에 자기 생을 걸었을 때, ‘쟤 인생은 끝났네’, ‘저런 일만 하고도 예수 제자야?’, ‘정말 사도 맞는 거야?’ 등등 온갖 헛소문이 들여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중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예수님이 잡하시기 전날 함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신 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요한은 가슴에 담았습니다(요13:34). 이렇게 요한은 주님이 주신 삶의 자리를 말씀을 믿고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 요한의 삶의 자리를 옮겨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대적에게 목숨을 잃지 않고, 형제인 야고보보다 66년을 더 살다가, 94세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AD100).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명하고 장수하고가 아니라, 형제 중 한 명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 다른 한 명 요한은 마지막 하나님을 말씀까지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집안의 형제와 일가가 영원을 사모하는 가정이되기를 소망합니다.
호세아와 고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이었습니다(호1:3). 그녀는 ‘음란한 여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호1:2). 호세아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다음 돌아온 아내는 누구로 인지, 알 수 없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옵니다(호1:2-9). 그리고 출산하고 몸조리를 한 후, 호세아가 다시 말씀을 전하러 나가면, 아내 고멜은 또 다시 가출합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를 임시하여 돌아옵니다.
음란한 여자 고멜은 그러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포주에게 팔려가는 신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멜이 잡혀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간 호세아는 아내에게 연가를 부르며, 사랑을 전하고, 포주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아내로 맞이합니다(호3:1-2). 물론 이러한 호세아의 결혼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훗날 고멜이 믿음의 여인으로 변화되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상대 배우자가 그 믿음에 부합하지 못하면,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반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한 믿음과 한 섬김과 한 비전으로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초대교회 평신도 지도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행18:2-3,18:18-19,24-26;롬16:3;고전16:19). 왜! 우리의 집안의 부부가 영원을 사모하는 가정이되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가족인 목사와 성도 그리고 성도와 성도
우리가 가정이라고 할 때, 교회 또한 가정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요. 한 주님을 섬기는 형제요 지체들로서, 한 가족입니다(엡4:16).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혈육만이 가족이 아니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3:35).
그러므로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인 목사와 성도 그리고 성도와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교회 공동체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동질성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한 마음으로 한 섬김으로 신앙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 각이 한 독립된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기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각 각의 은혜와 분량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각 각의 독립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섬김과 함께, 교회 공동체 가족으로서, 함께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참고/엡1:21,5:30).
이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마지막 시대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대하여.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행2:46;히10:25).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어떤 경우에는 힘을 모아서 협력하여 섬겨야 합니다. 협력하여 섬기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전4:12).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18:20). 혼자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공동체 가족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요4:23). ‘예배하는 자들’이란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지금의 때가 전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각 각의 한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만나 섬기는 것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협력의 섬김을 갖추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일이면, 할 수 있는 한, 힘을 모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이 역사하심이 있습니다(행2:43).
뿐만 아닙니다. 우리 가족들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비전도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물, 성구, 악기 등을 드리고 싶을 때, 그러한 것 하나 하나 한 가정의 이름으로 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난 된 가족들이 하는 일이면, 금상첨화인 것입니다. 그 외 섬기고 싶은 마음에 있을 때, 전부가 아닌 일부라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난 된 가족들이 하는 일이면,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일을 위해 드리는 것에 가족들이 하나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에 하나 되는 가족 진정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족 되기를 축복합니다.
최종정리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이 대비되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좋은 때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좋은 때가 계속 좋은 때가 아니고, 지금 나쁜 때가, 이후로도 매일 한숨을 지어야 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의 때에 좌우되거나 인생을 평가하지 말고, 때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지를 모르며 일생을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의 주관과 섭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즉 지금 나의 때가 좋은 때이던 나쁜 때이던, 가장 아름다운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만난 성도이고, 그 성도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내가 어느 때를 당하던, 쉽게 들뜨지도 낙담하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지금 내가 설사 나쁜 때에 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닌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나쁜 때를 좋은 때로 바꿀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성도는 지금의 내가 어떤 때가 되어도 희비하지 않습니다. 좋은 때라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쁜 때라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좋은 때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쁜 때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더 철저히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특별히 5월 가정의 달에 맞은 가정의 주일에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영원을 사모하는 가족들로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의 예를 통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지 못할 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았습니다. 또한 형제와 일가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 영원을 사모는 마음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도 하나님 안에서 가족인바, 목사와 성도 그리고 성도와 성도 모두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뜻에는 교회 일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각 각의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한 가족으로서 협력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주님의 일에 할 수 있는 한을 넘어 힘을 모아야합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 가족들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큰 영광 받으십니다. 이러한 은총이 깃드는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된, 우리의 가정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인, 우리 교회 공동체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가 되었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때로 믿고, 영원을 사모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②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에게는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한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부모인 우리도 우리의 자녀도 어떤 유산을 받건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영원을 사모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③ 야고보는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로 그의 형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계시록을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형제와 일가가 되게 하옵소서.
④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한 믿음과 한 섬김과 한 비전으로 사도 바울의 동역자요 초대교회 평신도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부부가 되게 하옵소서.
⑤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인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각각 독립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서김과 함께 영원을 사모하는 동질성을 가진 공동체로 함께 협력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가정도 영원을 사모하는 가족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일에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언제가 좋은 때가 올까가 아니라. 지금이 끝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때가 되었던 인생의 노고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좋은 때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쁜 때이면 자신을 더 철저히 내려놓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