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17:6-19) 이재현목사(25.06.01)
제자들을 위한 기도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요한복음 17:6-19 2025.06.01. 主日禮拜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6-19)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월은 애국의 달입니다. 국가와 가정과 교회는 하나입니다. 특별히 21대 대통령 선거에 모두 참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 장소는 감람산Mount of Olives입니다. 더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감람산 서편 기슭에 위치한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에서입니다(참고/마26:36;막14:32). 감람산은 감람나무가 많이 자라는 산인데요. 그 열매에서 감람유, 올리브 오일olive oil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유용한 열매인데요. 이 감람 열매에서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틀에 넣어서 짜야 하지 않습니까. 그 뜻이 겟세마네인데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감람 열매에서 기름을 짜듯이 처절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이 기도가 얼마나 애절한 기도였는지,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하였습니다(눅22:43-44).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 겟세마네 기도를 드리기 직전 주님의 또 다른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입니다. 17장을 지나 18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기드론 시내’Brook of Kidron가 나옵니다. ‘기드론 골짜기’Valley of Kidron로도 불리는 곳인데요. 이스라엘의 건기인 여름에는 바싹 말라 있고, 비가 내리는 우기인 겨울에만 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하천이라고 할 수 없는 조그마한 내천입니다. 이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이 자리 잡고 있는 성전산약743m 동쪽과 감람산약814m 사이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거쳐,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18:1).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고 하였고요(요18: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라고 말씀합니다(요18:12). 겟세마네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하신 곳이자, 결박 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 직전인, 요한복음 17장에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로 시작하는 기도가, 17장 마지막 절인 26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연결되는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도일까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1-5절까지이고요. 6-19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고요. 20-26절까지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두 번째 기도인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이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십자가 죽음 앞두시고 기도하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큰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드린 두 번째 기도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본문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는 말씀입니다(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그들은 아버지의 것’,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를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17:20). 이 말씀에서 ‘이 사람들’은 앞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고요(요17:6).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란 복음 증거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이들은 성도 곧 교회를 일컫습니다. 그럼으로 본문 요한복음 17장 6-19절까지 이어지는 이들은 하나님께 ‘세상 중에서 내게(예수님께) 주신 사람들’로 지칭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기 직전, 이 자리에는 마지막 만찬을 나눈 제자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제자들을 위해 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따라 주님의 일을 감당할 자이고요. 이 제자들을 통해 주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행20:28).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은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기도는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자로서, 어떤 삶의 질을 가져야 하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소유
제자는 첫 번째로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7장 6절을 다같이 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이 누구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토기장이’란 찬양이 있습니다.
토기장이 작사곡 조영준
내가 너를 빚었단다 나는 너의 토기장이 내가 너를 만들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너의 눈을 만들면서 너에게 눈을 못 뗐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지금도 기억 한단다
너의 손을 빚으면서 하나하나 세어봤지 이 세상 너밖엔 없는 지문을 넣어주면서
너의 심장을 빚으며 호흡을 불어 넣어줬지 너의 첫 심장 소릴 들은 그날을 잊을 순 없지
너를 다 빚은 그날에 누구에게 널 맡길지 한참을 돌아본 후에 너를 보낼 수 있었지
오늘 내가 널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 것 같니
나는 널 단 한 순간도 사랑치 않은 적 없지
나는 널 단 한 순간도 손에서 놓은 적 없지
나는 널 단 한 순간도 눈에서 땐 적도 없지
내가 너를 빚었단다 나는 너의 토기장이
“야곱아(‘야곱아’ 이 말은 모든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이스라엘아’ 이 말도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너는 누구의 것이라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지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애비 없는 호로 자식이 아니에요”. 자기를 낳아준 분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자신의 신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 누구세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지었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십니다(사43:7). 그리고 그 만드신 이유에 대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 때, 우리는 그 분에게 영광 돌리는 삶이, 인생이 첫 번째임을 심령에 각인하고, 인생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면 어떤 삶을 삽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라고 하십니다(요8:44). 하나님이 아버지인지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인간의 본성 그대로 아비 마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엡2:3). 그러한 사람들은 마귀를 아비로 둔 사람들은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한다’고 하십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십니다(요8:44). 그러므로 이 마귀를 아비로 둔 사람들은 마귀를 따라 진리가 없습니다. 거짓을 말합니다. 즉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짓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하십니다(엡2:3).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함이, 인생이 첫 번째임을 심령에 각인하고, 인생의 발걸음을 내딛고 살아야 하는데요. 육체의 욕심,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불쌍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소유임을 모르기 때문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기를 위해 살아간다고 하나, 실상은 마귀를 아비로 두고 진리를 모르게 하고, 거짓을 따르게 하는 거짓말쟁인 아비 마귀를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고 하십니다(요17:6,8). 하나님이 아버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말쟁인 마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된 제자들은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달콤하지만 마귀는 ‘온 천하를 꾀는 자’로서, 마귀를 따르는 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계12:9;마25:41). 그러므로 누구를 아버지로 모시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최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아비로 둔 자는 마귀가 처할, ‘예비된 영원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제자는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10). 주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는 말씀과 동일하지 않습니까?(사63:7)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모신 자는 자신의 소유가 누구인지 바로 알고 그 분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
제자 두 번째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나는 아버지께 가옵나니’란, 이제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부활과 승천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는 제자들은 이 세상에 남겨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따르다가 남겨진 제자들을, ‘우리와 같이’,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하게 ‘그들도 하나게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와 누구의 관계 같이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하나인 것 같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고 예수님은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과 하나이라니 말입니까? 그러함에도 제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한 없는 부끄럼을 가져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려야합니다. 주님 앞에 인간의 자존심이란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서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8). 모든 자존심을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당하신 고통과 모멸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 만 들어 봅시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8).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벗겨지셨습니다. 완전히 발가벗기셨어요. 그 앞에 있는 무리, 그 무리 안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신 분입니다. 왜 그렇게 당하셨습니까? 바로 우리가 당할 지옥의 고통과 모멸을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인간적인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영혼을 위하는 일이라면 머리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버려야 하지만, 부끄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해요. 자존심과 부끄럼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자존심은 말 그대로 인간적인 행세입니다. 맹구 아세요. 영구 심형래 말고요. 맹구 이창훈이요. 맹구가 그러잖아요. “나는 죽어도 리바이벌은 안 해”. 맹구도 절대로 자기가 안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자존심은 그런 것입니다. “이것만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믿었지 절대 할 수 없어”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존심 때문에 신앙의 발전이 저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끄럼은 다릅니다. 부끄럼은 말 그대로 내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아버지인지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면 그분이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면서도, 부끄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심령에 각인하고, 내 인생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는데, 육체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디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는 말씀만 암송하고 위안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 제자로서 부끄럼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간적인 자존심은 내세우지, 내가 어떤 존재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끄럼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빌2:1).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 된 제자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고,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요17:12). 하나님과 하나된 예수의 제자는 ‘하나도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 하나 된 제자들 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제자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제자는 입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쁨
제자 세 번째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당연한 영적 순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영광으로 살아가야 함을 심령에 각인하고, 인생의 발걸음으로 내딛어야 합니다. 그러한 제자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과 같이 영원합니다. 마지막까지 책임지십니다.
이러한 제자의 삶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기뻐하시는 것도, 그냥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충만하다고 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과 하나인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그들 안에서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곧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의 기쁨을 따라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살전2:4).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세요. 우리 심령에 무엇이 각인 되고 있는지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가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교회를 섬기다 보면, 한 교회 공동체 가족들과 늘 대면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좋은 거지”라는 생각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옳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도, 권면이나 충고나 책망할 수 없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징계가 사라졌다는 말을 합니다. 징계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거역하고, 성도들에게 부덕을 행했을 때, 교회에서 내리는 책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상 폐지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징계하면, 받아 줄 다른 교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가서 하소연합니다. 먼저 있던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요. 그 말을 들은 교회는 이분이 먼저 교회에서 바르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면을 받은 것인데,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가뜩이나 전도가 어려운데 그렇게라도 오게 된 성도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징계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징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렇다고요. 같이 한 교회를 섬기는 성도이기에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거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면이나, 충고나 책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징계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곳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회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징계를 해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라면,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신적인 징계, 물리적인 징계, 신앙적인 징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징계가 되어야 합니까? 권면하고 충고하고 책망하기 전에 그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사53:12).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혼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자기 영혼을 스스로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범죄자 중 한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라고 하였습니다(사53:1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죄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어려분이 범죄자 아닙니까? 지옥의 형벌이라는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아야 범죄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참고/히7:24-25).
오늘 징계 받아야 할 성도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징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권면과 충고와 책망을 하기 앞서, 예수 믿기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무시무시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범죄자였습니다(롬6:19). 그러나 주님은 범죄자인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고, 범죄자인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도들의 부정에 대해 권면, 충고, 책망하는 신앙적, 정신적, 물리적 징계에 앞서, 그 성도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기쁨이요. 다른 성도님도 제자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그 일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은 물론 다른 성도를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구별
제자 네 번째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7:14-16). 주님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주님의 제자들을 ‘미워’한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세상과 구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매 주일예배 축도 전 공동체 고백에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본문에서도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요17:18). 즉 우리의 필드Field는 교회 만이 아닙니다. 세상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우리의 필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제자로 세상에 보내시는 것을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0:3).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나간 제자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동화同化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향락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향락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향락’에 대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하십니다(벧전4:3). ‘이방인’은 안 믿는자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 추구하던 향락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구별되라는 것이지요.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계18:22). 세상 향락을 쫓던 자들의 마침입니다. ‘다시 네 안에 들리지 아니하고’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즉 세상의 모든 향락은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십니다(요일2:17). 우리는 세상에 보냄 받은 자이지만,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별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3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라고 말씀합니다(잠5:3-4). 향락을 상징하는 음녀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상과 ‘Equal'인 향락, 세상이 화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 화려함 속에 감춰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감추어져 있습니까? ‘쑥’ 같이 쓴 향락의 유혹에 육체는 중독되고, 향락이라는 ‘날카로운 두 날을 가지 칼’에 영혼이 난도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강남의 한 클럽 시비에서, 촉발된 이 사건은 마약. 성상납과 성매매 알선, 유명연예인과 그들이 속한 소속사와 기업 그리고 비호세력인 모 총경은 청와대 근무까지 한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관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업체, 회사, 경찰과 청와대까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습니다. 세상의 향락이라는 화려함 속에 감춰진 ‘쑥’ 같은 향락의 유혹에 육체가 중독되고, 향락이라는 ‘날카로운 두 날 가진 칼’에 영혼이 난도 당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들은 세상에 보냄을 받았지만,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
제자 다섯 번째는 거룩입니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7-19).
주님은 하나님께 ‘그들을’ 즉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어서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기도합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구별을 살펴보았는데요. 구별과 거룩은 의미에서 접점接點도 있으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별은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세상과 차별을 말합니다. 반면에 거룩은 신앙에서 차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닌다고, 신앙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고 하십니다(요17:6). ‘그들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고 하였습니다(요17:8).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요17:15).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악에 빠지지 않고 보존됩니다. 이 말들을 연결해보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예수님 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악에 빠지지 않고 보존되는 신앙을 갖게 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만을 구원자로 믿는가입니다. 예수님 만을 구원자로 믿는 것에 어떤 중요함이 있습니까?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십니까? 예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으로 병든자의 고침을 선포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자이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으로 도고의 응답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으로 축복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논란이 되고 있는 WEA WCC Lausanne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신인합일神人合一입니다. 신이 인간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홍익사상이 하는 얘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중 성경을 읽고, 깨닫고, 따른 모범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말씀을 준행했다는 상징이지,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신인양성神人兩性,Christology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고, 죄가 있거나, 인간화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WEA 제14차 서울총회조직위원회에서는 자신들은 오직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말고 구원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손을 잡느냐는 것을 말하는 덧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중보자요 치유자요, 응답을 주시는 분이며, 복을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보존되는 신앙을 갖게 되는 제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WEA WCC Lausanne 거룩을 인간의 행위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일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2-23).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심판을 누구의 손에 맡기셨어요.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일입니다. 내가 보기에 목사님이, 내가 보기에 다른 성도님이 예수님이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기 전에,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차별입니다. 거룩은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지, 자기 생각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진리, 진리인 예수 안에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정리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올려드렸던 장소는 감람산Mount of Olives의 겟세마네Gethsemane,올리브유 골짜기 동산입니다(참고/마26:36;막14:32;눅22:42-44). 그런데 이 겟세마네를 가시기 위해 ‘기드론 시내Brook of Kidron로 불리는 ‘기드론 골짜기’Valley of Kidron를 지나셨는데요(요18:1).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하신 곳이자, 결박 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 직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로 시작하는 기도가, 17장 1-26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연결되는 기도인데요. 첫째는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요17:1-5), 둘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17:6-19), 셋째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요17:20-26). 이 중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제자들을 위해 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따라 주님의 일을 감당할 자이고요. 이 제자들을 통해 주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참고/행20:28).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이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자로서, 어떤 삶의 질을 가져야 하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소유
제자는 첫 번째로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요17:6).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43: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지었고 내가 만들었다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하셨습니다(사43:7). 이렇게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임을 바로 알 때, 그분에게 영광 돌리는 삶이, 인생이 첫 번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 ‘너희는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라고 하셨습니다(요8:44). 하나님이 아버지인지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너희 아비 (마귀)의 욕심을 너희도 행한다’고 하십니다(요8:44;엡2:3).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그러므로 마귀를 아비로 둔 사람은 마귀를 따라 진리가 없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하십니다(엡2:3). 거짓을 따르는 다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고 말씀합니다(요17:6,8). 하나님이 아버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달콤하지만 마귀는 ‘온 천하를 꾀는 자’로서, 마귀를 따르는 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계12:9;마25:41). 그러므로 누구를 아버지로 모시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최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요17:10).
하나
제자는 두 번째로 하나님과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제자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요17:11).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중보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함에도 제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한 없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제자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려야합니다.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셨으며, 낮고 낮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8).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무리 앞에서 다 벗겨지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지옥의 고통과 모멸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인간적인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영혼을 위하는 일이라면 누구 앞에서도 머리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존심은 버려야 하지만 부끄럼은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믿었지 절대 할 수 없어” 이런 행세가 자존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존심 때문에 신앙의 발전이 저해될 때가 많습니다. 부끄럼은 내가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심령에 각인하고, 생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는데, 육체를 따라 발걸음을 내디디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구절로 위안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마26:41). 하나님과 하나 된 제자로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자존심은 내세우지, 내가 하나님과 하나로서 살지 못하는 부끄럼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빌2:1). 하나님과 하나 된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고, ‘하나도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17:12). 이 말씀은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 하나 된 제자들 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기쁨
제자 세 번째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과 하나인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기쁨을 그들 안에서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십니다(요17:13). 우리는 예수님의 기쁨 곧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사람의 기쁨을 따라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가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살전2:4).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도와 교제를 하게 되고, 그런 관계가 형성되면, 옳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도, 권면이나 충고나 책망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더욱이 한국교회에서 징계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징계하면, 받아 줄 다른 교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징계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는 생각이 보편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징계를 해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라면,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징계를 해야 합니까? 먼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혼을 스스로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한 사람’과 같이 되신 이유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사53:12). 우리는 지옥의 형벌이라는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아야 범죄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히7:24-25). 징계 받아야 할 성도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함을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기에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징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범죄자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기도하신 주님을 따라, 그에게 권면, 충고, 책망하는 신앙적, 정신적, 물리적 징계에 앞서, 그 성도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롬6:19).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기쁨이요. 다른 성도님도 제자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인 우리에게 주님이 맡기신 일입니다.
구별
제자 네 번째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으므로, ‘그들도’ 즉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해야 한다고 하시며, 세상은 주님의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17:14-16). 제자가 세상과 구별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고백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는 본문에서도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고 하십니다(요17:18). 우리의 필드Field는 교회 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동화同化되어서는 안 됩니다(참고/눅10:3). 이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향락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향락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향락’은 ‘이방인’ 즉 예수 믿기 이전 추구하던 향락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하십니다(벧전4:3). 구별되라는 것이지요. 세상 향락을 쫓던 자들의 마침에 대하여 ‘다시 네 안에 들리지 아니하고’입니다(계18:22).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즉 세상의 모든 향락은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십니다(요일2:17). 우리는 구별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향락을 상징하는 ‘음녀’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쑥’ 같이 쓴 향락의 유혹에 육체는 중독되고, 향락이라는 ‘날카로운 두 날을 가지 칼’에 영혼이 난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잠5:3-4). 주의 제자들은 세상에 보냄을 받았지만,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
제자 다섯 번째는 거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들을’ 즉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어서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기도합니다(요17:17-19). 구별은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세상과 차별을 말합니다. 반면에 거룩은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말씀과 같이 신앙에서 차별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17:6). ‘그들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이 말들을 연결해보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예수님 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악에 빠지지 않고 보존되는 신앙을 갖게 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제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면 예수님 만을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도 중보자이신 예수 이름로 병고침 선포도 치유자 예수 이름으로 간구에 응답도 예수 이름으로 축복도 예수이름으로 합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논란이 되고 있는 WEA WCC Lausanne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신인합일神人合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중 성경을 읽고, 깨닫고, 따른 모범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말씀을 준행했다는 상징이지,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인양성神人兩性,Christology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고, 죄가 있거나, 인간화가 된 것이 아닙니다. WEA 제14차 서울총회조직위원회에서는 자신들은 오직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말고 구원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손을 잡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중보자요 치유자요, 응답을 주시는 분이며, 복을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보존되는 신앙을 갖게 되는 제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WEA와 같이 거룩을 인간의 행위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심판까지도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맡기신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예수님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요5:22-23).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차별입니다. 거룩은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지, 자기 생각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 정리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 장소인 겟세마네로 가기 직전 세 가지를 기도하셨습니다. 그 중 자신이 떠난 후 세상에 남겨진 자들, 앞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할 자들인 제자들을 위해 가장 많은 분량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는 바로 우리를 위한 기도이십니다.
제자를 위한 기도 첫째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 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거짓쟁이인 마귀를 아비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모신 자로서 자신의 하나님의 소유임을 바로 알고, 그 분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님임을 아는 제자들은 쓸데없는 인간의 자존심을 버려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임을 망각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된 예수의 제자는 ‘하나도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 하나된 제자들 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충만한 기쁨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기쁨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함에도 한 교회 성도들이 옳지 않은 길에 들어설 때, 권면, 충고, 책망은 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거지”라는 생각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징계도 하나님 말씀이기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징계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셨습니다. 스스로 범죄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도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지옥의 형벌이라는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아야 할 범죄자인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의 잘못을 볼 때, 어떻게 징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여, 하나님이 기쁨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넷째 하나님 것으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나간 제자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별입니다. 세상의 향락이라는 화려함 속에 감춰진 ‘쑥’ 같은 향락의 유혹에 육체가 중독되고, 향락이라는 ‘날카로운 두 날 가진 칼’에 영혼이 난도 당하는 것을 세간의 사건들을 통해서 봅니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들은 세상에 보냄을 받았지만,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 속한 자로서, 거룩해야 합니다. 구별은 세상에 보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세상과 차별을 말합니다. 거룩은 신앙에서 차별입니다.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예수님 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요, 중보자요. 치유자요, 응답을 주시는 분이며, 복을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보존되는 신앙을 갖게 되는 제자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차별입니다. 거룩은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지 자기 생각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를 위해 기도한 다섯 가지 소유, 하나, 기쁨, 구별, 거룩을 심령에 각인하고 삶의 질이 다른 신앙의 발걸음을 내딛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마28:20). 이 축복이 주님의 제자인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 공동체를 찾은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 하겠습니다.
①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를 드리러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소유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마귀를 아비로 따릅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② 둘째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로서 살지 못한 부끄럼을 알고, “믿어도 이것만은 할 수 없어” 자존심을 버리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③ 셋째는 기쁨입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성도들 권면, 충고, 책망의 징계를 하기 전,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범죄자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기도하신 주님을 본받아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이끄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④ 넷째는 구별입니다.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능력과 결단과 행함을 주옵소서. 세상으로 보낸 받은 제자이지만 세상에 동화되지 않게 하옵소서.
⑤ 다섯째는 거룩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진리는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이름만이 구원자, 중보자, 치유자, 간구에 응답하시고, 복을 주심을 믿고,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