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목습 다른 선택"(막 14:51-52) 이재현목사(25.06.08)
같은 모습 다른 선택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마가복음 14:51-52 2025.06.08. 主日禮拜
“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14:51-52)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월은 애국의 달입니다. 국가와 가정과 교회는 하나입니다. 특별히 새로 선출된 제 21대 대통령을 위해 많은 기도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통령에게 국가의 안보, 경제, 외교 등 국가의 경영에 지혜와 능력과 인재를 허락하시고, 교회의 복음, 선교, 진리 등 교회의 영역에 믿음과 신실과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국가의 질서를 위해 순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각자의 신념과 판단과 지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선거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는 성숙한 시민이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시33:12).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찬양,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성민의 나라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청년
마가는 마가복음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군데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청년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청년은 아름다운 모습으로는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14:51-52). 지금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의 청년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구절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14:50). 그렇다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갖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기록한 후, 다음 절에 한 청년이 예수를 따르다가 도망쳤다는 것은, 앞서 도망친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다른 이 임을 알게 합니다(막14:50-51).
또 ‘한 청년’으로 기록된 이 청년의 전후 사정을 보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둘렀다’고 하였습니다(마14:52). 그렇다면 옷을 벗고 있던 상태에서, 갑자기 몸에 베 홑이불을 걸쳤다는 말인데요. 앞서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고, 그 뒤 겟세마네 동산에도 동행했기에, 열두 제자들 가운데 이렇게 경황없이 옷을 입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고, 다른 어떤 곳에 있다가,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잡히신 시각이 목요일 저녁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잡으로 온 무리들이 ‘횃불’을 가지고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8:3).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전기 시설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나라도 예전에 그랬듯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지요. 본문의 이 청년도 잠을 자려고 준비 중이었거나, 혹은 막 잠에 들려고 할 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경황없이 베 홑이불로 벗은 몸을 두른 체, 예수님이 잡혀 가신 길을 쫓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혹은 집에 있다가, 예전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았을 때, 예수님이 자신이 잡히신다는 말이 생각나서, 왔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뒤늦게라도 뒤따르지 않겠습니까? 그가 바로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칠십 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마가입니다.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부끄러웠던 과거,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도망쳤던 자신의 이름 대신 ‘한 청년’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다른 사복음서에는 없고 마가복음에만 이 스토리가 삽입된 것을 볼 때도 그 이유를 더 뒷받침합니다.
어쩌면 마가는 집에 있다가 주님이 잡히셨다는 소문과 함께 그의 열 두 제자들이 모두 주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도 들었을 줄 모릅니다. 그렇기에 뒤늦었지만 잡히신 예수님을 뒤 따라가면서, 앞서 도망쳤던 제자들에 분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렇지 스승을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쳐 나쁜 사람들”.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결박하고 끌고 가던 무리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 순간 마가도 도망치게 되는데요.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 급하게 도피하였던지, 본문은 그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최초의 바바리맨이 마가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지만, 얼마나 다급했으면 자신이 두른 베 홑이불을 잡은 무리의 손길을 뿌리치며, 옷이 벗겨지면서까지 그 자리를 떠났겠습니까?
이렇게 본문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열두 제자만 아니라, 칠십 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마가가 있었으며, 그도 역시 도망쳤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만 없고 유일하게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기록은 그저 한 에피소드Episode로만 보면 되는 것일까요? 성경의 기록은 단지 재미있는 사건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증언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본문을 관찰하면 예수님과 마가는 비슷한 입장에 있지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벗기심
예수님과 마가의 같은 모습 다른 선택 첫 번째는 ‘벗기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가가 황급하게 벗은 몸을 두른 옷에 대하여, 베 홑이불이라고 말씀합니다. 베 홑이불의 원료는 아마亞麻Linen, Flax입니다. 아마는 지중해 연안에서 자라는 식물로 3-4월이 개화기입니다. 아마는 ‘리넨’linen으로서 섬유가 가늘면서도 보푸라기가 없고 매끄럽습니다. 흡수와 통풍이 잘 되어 속옷으로 좋습니다. 오늘까지도 지폐나 캔버스 재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훗 날 총리가 된 요셉이 입은 옷도 아마로 만든 것입니다(창41:42). 성막 휘장을 만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출38:16).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자신의 무덤에 안장할 때, 예수님 몸에 입혀드린 옷이 아마로 만들 ‘세마포’입니다(마27:59).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마가가 황급히 자신의 벗은 몸을 두른 ‘베 홑이불’도 아마도 만든 것이요. 예수님의 육체에 마지막으로 싸드린 ‘세마포’도 아마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 그런 말 하지요. 같은 옷 다른 느낌, 똑같은 옷인데도, 입은 사람에 따라, 그 맵시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달랐습니다.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벗은 몸으로 수치도 생각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가벗겨진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스스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벗겨지셨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22:18). 이미 구약에 다윗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당할 수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벗겨지셨습니다. 완전히 발가벗기셨어요. 그 앞에 있는 무리, 그 무리 안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육체에 어떤 것도 걸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수치를 겪으신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당하셨습니까? 바로 우리가 당할 지옥의 수치와 모멸과 고통을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인간적인 수치를 버려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영혼을 위하는 일이라면, 수치를 마다하지 않고, 머리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과 같이 한 영혼을 위해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자 수치를 생각지 않고 도피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셨습니다. 마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가벗겨지심을 우리를 위함이지만, 마가의 벗은 몸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요. 이것이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발가벗겨지셨지만, 마가는 살기 위해 벗은 몸이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어떤 어려운 순간에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특정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신 분들도 있을 것이지만요. 그분들은 경제적이든 다른 것이든, 크게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사신 것이고요. 정말 어렵고 어려운 순간 간절히 어려움을 호소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움을 청한 사람이 당장 해결해주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애를 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 너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다.”하고 뒤돌아섭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도 힘든 지경에 있으면, 부탁을 하고 사정을 하고 애원을 합니다. 수치도 잊은 체요. 이런 체험이 있는 분도 있고 없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힘겨운 나머지, “내 체면이 어디 있어 한 번 도움을 구해볼까”라고 수치까지 버려버리려는 생각은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내가 살기 위해 어떤 특정인에게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혹은 그럴 생각까지 해보았음에도,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치를 겪은 적이 있는가? 저는 적지 않게 있습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치를 겪은 적이 있는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한 번쯤 고민이라고 해 보아야 하지 않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치를 겪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듯이,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당하는 수치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부터인가? 전도 대상자들에게 “이래도 저래도 안 믿고 예수 믿는 것도 지 팔자지”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고요,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마가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벗은 몸으로 까지 수치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 벌거벗겨지신 수치를 스스로 당하셨다는 말씀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님들 가운데 청라이외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자신들 오는 것도 준비하기에 벅차지만, 혼자 교회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올 수 있어도 대중교통으로는 너무 먼 분들을 카풀Carpool해서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교회 권사님이 청라에서 송도로 이사 가셔서, 직접 가서 모셔오곤 했습니다. 예전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는 승합차로 차 운행 많이 했습니다. 그때 경험적으로 볼 때, 참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입니다. 타시는 분들은 자기 몸 하나 준비해서 나오면 되지만, 운행하는 분들은 예배 시간에 맞추어서 와야 하므로 더 일찍 준비해야 합니다. 떠날 때 “떠난다.” 전화해야 하고,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서, “거의 다 왔으니 나오세요.”라고 전화 드려야 해요. 참 번거롭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운행을 하면서, 그런 힘든 점이 있는데, 성도님들은 얼마나 힘드세요.
타시는 분들 가운데는 차 운행한다고, 음료수라도 준비했다고 주시기도 하고, 주유비도 가끔 챙겨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차 운행하는 제가 대접하는 경우가 사실 더 많습니다. 그리고도 좋은 말 듣는 것이 아닙니다. 늦으면 좀 “일찍 오지”하고요. 빨리 오면 “서두른다.”라고 하고요. 운전을 빨리하면 “급하다”라고 하고, 천천히 하면 “굼벵이 같이 느려터져서”라고 하고, 정지선 지나치면 “신호 지키지 않는다”라고 하고, 간혹 도로 방지턱을 넘다가 덜컹하면, “운전 잘못 배웠다.”하고 참말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고 번거로운데도 차 운행을 하고 카풀을 합니까?
한 분이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때로는 좋은 일 하면서도 핀잔을 받아도, 수치를 개의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하기가 얼마나 어렸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간과 쓸개도 다 빼야 할 때도 잊지 않습니까? 이런 섬김 하나 하나가 바로 벗기심을 당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신, 스스로 수치를 받으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 옷이 벗겨지면서까지 도피했던 수치를 마다하지 않은 마가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벌거벗기신 스스로 수치를 당하신 주님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잡히심
예수님과 마가의 같은 모습 다른 선택 두 번째는 ‘잡히심’입니다. “48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막14:48-49).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로 나왔느냐’, “내가 강도냐”면서 호통을 치십니다. 누가 잡으러온 자인지 누가 잡힐 자인지, 분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어서 주님은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시면서, 무리에게 자신의 몸을 스스로 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물리치실 능력이 없으셔서 스스로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으신 분입니다(마26:53). 당시 로마 군대는 보병과 기병을 합쳐 5-6천 여명의 병사로 1개 군단을 구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열 두 군단이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사를 동원해서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를 물리칠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 즉 하나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잡히셨습니다(막14:49). 이에 대하여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고 말씀합니다(시22:16). 이렇게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잡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던 무리에게 잡히매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자신의 몸을 두룬 베 홑이불이 벗겨져 알몸이 되면서까지 벗어났습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길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잡히셨지만, 마가는 벗어났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시는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잡히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잡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잡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예를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지금 예배드리는 곳으로 청아비전교회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 잡힌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교회 가운데 청아비전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 우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똑같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도, 기쁨으로 자원하여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는지 몰라요. 지금 예배드리는 분 가운데는 그런 분은 한 분도 없는 줄 믿습니다.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을 드릴게요. 여러분 한 가정의 부모이고, 배우자이고, 자녀이기도 한데요. 나의 가정이 좋은 일들만 가득해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있는가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아내를 만나서, 가정을 갖게 되고, 또 자녀를 두게 되어서, 특별히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있으세요? 후자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러한 부모님, 왜 이런 자녀를 만나게 되었을까? 고개가 갸우뚱하고, 한숨을 지을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을 보내면서, 아, 이래서 저 신랑 저 신부를 배우자로 만나게 하시고, 아들과 딸로 두게 하셨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면, 죄송한 표현으로 철이 아직 안 난 것이지요. 여러분 지금 배우자와 왜 결혼하셨어요. 속아서 혼인하고, 속을 모르고 혼례하고, 여러 말을 하지만, 결혼할 당시에는 “그래도 이 사람하고 살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반은 할 수 있겠다”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나에게 그렇게 구애를 하는데, 속는 셈치고 같이 살자, 혹시 모르지 뭐 팔자 한 번 피게 될지” 생각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그런 예견이 허상이었다는 것이, 하나 하나 알아가게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붙잡혀서 오게 되었건, 자원해서 오게 되었건, “그래도 교회를 섬기다 보면 나도 덕 보는 것이 있겠지”하는 인간적인 기대할 수 있다고 봐요. 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그런 기대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이 교회에서 나를 잡히게 하신 것이 맞는가? 내가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행5:12). 백성들이 교회를 칭송하였고, 헤아릴 수 없는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5:14). 교회에 성령 충만한 역사 병든자들이 고침 받고 귀신들려 괴로움을 받던 자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행5:16).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물과 소유한 집과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드리고, 교회는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유무상통하였습니다(행2:45,4:32). 무엇하나 흠 없이 교회가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유치하다고 할 수 있는 전혀 생각지 않은 일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회에서 과부 등 소외 계층을 돕는데요. 해외에 살다가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대인이 있었습니다(행6:1). 이들을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원래 예루살렘 토박이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보기에 히브리파 유대인들 과부들에게 더 많은 구제가 배정되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컴플레인’Complain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알게 합니까? 초대교회와 같이 모든 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임에도, 무엇 하나 흠 없이 부흥과 역사와 은혜로 세워진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문제라고 보기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사도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회의를 했습니다. 결과는 이제 성도들이 많아져 사도들이 일일이 구제 등을 챙길 수 없으니, 교회 안에 성도들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즉 덕이 되고, 본이 되는 집사를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 등의 일을 맡기도록 하였습니다(행6:3). 이에 우리가 잘 아는 스데반 집사 등을 선출하게 됩니다(행6:5). 이후 교회의 살림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본연의 사역인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습니다.’(행6:4).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고’, 심지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섰던,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예수님이 구원자임)에 복종’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6:7).
이를 통해 볼 때, 무엇 하나 흠 없이 부흥과 역사와 은혜가 그득한 초대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교회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사도일 집사는 집사의 일을 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는 목사의 일을 하는 것이고, 성도면 성도, 제직이면 제직, 맡은 직분자이면 직분을 감당할 때, 문제는 없습니다.
이를 간접적으로 적용할 때,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있는 것,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잡아 맨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내가 잡혀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우리들은 다른 생각보다, 내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가를 성령님을 의지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교회에 매이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잡히기 싫어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의 마가를 통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만약 마가가 예수님과 같이 잡혔다면 그에 대한 기록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잡을 때, 잡힌바 되어야지 벗어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께 잡힌바 되어서,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 각입니다. 성령의 인도함 데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교회에 와서 자리나 채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분에게는 할 일입니다. 세상 어느 곳, 어떤 화려한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배의 자리에 비교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요. 그럼으로 자리에 채우는 것이 그분이 일이면, 그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지런히 자리를 비우지 않고 앉으면 됩니다. 1년 52주가 있는데요. 한 해 주일성수 아무런 말없이 해주는 성도만 있어도, 그것이 목사에게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제직으로서 그리고 맡은 부서의 직분자로서 해야 할 있다면, 그 누구 눈치 보지도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하면 됩니다. 어떤 분은 사업하는 은사를 하나님께 받았으면, 기도로 철저히 준비하고, 경영을 바로 해서, 많은 물질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사도들의 발 앞, 즉 교회에 드리세요. 그것은 그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 판단과 정죄하지 말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복을 주세요. 그러면 아! 하나님이 왜! 우리 교회에 잡히게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무리가 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은 물리치실 능력이 있었지만,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잡히셨습니다. 그러나 그 무리에게 잡혔을 때 마가는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대적자 들의 손에 잡히도록 하셔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여러분들을 가정에서 잡히시게 하셨는데, 청아비전교회에 잡히시게 하셨는데, 왜!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지 않겠어요. 우리 안에 자꾸 벗어버리려는 생각이 혹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버리심
예수님과 마가의 같은 모습 다른 선택 세 번째는 ‘버리심’입니다. 본문에 마가는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였습니다. 베 홑이불은 마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유일한 옷입니다. 그것을 버리면, 자기의 알몸이 다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도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버리셨습니까?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 육체의 옷을 버렸지만, 예수님의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셨습니다. 똑같이 버렸는데, 완전히 다르죠. 마가는 살기 위해 버린 것이고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단호합니다. 확고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 보좌, 그 영광의 옷을 버렸듯이.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용규 선교사님은 “내려놓음”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어 보신 분이던, 읽지 않으신 분이던, 또 간증을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줄 아는데요. 이용규 선교사님에 대해서는 한번쯤 모두 들어 보았을 것으로 압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은 서울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도미 유학,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중동 지역학 및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만치 않은 이력을 가진 그는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대학교수나 연구원 등 안락한 미래의 보장과 인간의 기대를 전부 내려놓고, 가족을 모두 동반한 체 몽골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여러분 몽골이 어떤 나라인지, 대략 아실 것입니다. 몽골 사람들은 손 등만 하얗다는 것 아세요. 무슨 말씀이냐면 몽골은 아직도 상하수도가 미비해요. 물이 너무나도 귀해요, 목욕은 고사하고 세수도 물이 없어 못해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쌀을 씻어야하고요. 그러니 아낙네들이 쌀을 씻을 때, 물에 담그는 손 등만 하얗다 그 말이에요. 그럼 다른 곳은 어떻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어요. 이런 후진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 나라에 국내 최고 대학 서울대를 나오고, 세계 최고 대학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선교사로 갔어요. 미국 보스턴 케임브리지 연합 장로교회로부터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의 오병이어선교회가 몽골 울란바토르Ulaanbaatar에 설립한 ‘이레교회’를 담임목회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몽골의 크리스천 대학인 ‘몽골국제대학교’Mongolia International University 내 ‘칭기즈칸연구소’의 소장 겸 동 대학 교수로서 몽골제국사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 직함들이 좋아보이는 것 같지만, 한국 유수의 대학 세계 명문 대학에서 교수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2005년부터는 전 세계 어디든 마다 않고, 강사로 섬기면서, ‘내려놓음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 유학생과 청년들 앞에 설 때마다 시종일관 “인생의 모든 편안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늘로부터 채워지는 평안의 진정한 특권을 깨닫고 누릴 것”을 말하고, “내려놓음의 결심과 실행만이 진정한 행복을 택하는 크리스천의 덕목인 것”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대명사처럼 쓰여지는 내려놓음은 주님의 버리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 그 영광의 옷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서 버릴 것을 생각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입으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입으려는 생각을 버릴 때, 주님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아직도 입으려고 하는 것 즉 얻으려고 하는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버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서 내가 지금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릴까에 앞서,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얻을 까 아직도 입으려는 그 생각을 없앨 수 있다면, 오늘 말씀 통해서 바른 가르침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설교 중에 혹은 직접 당사자를 통해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헌신에 대해 간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얻은 것은 무엇인데”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더니, 외형적인 큰 복을 받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음에도, 그로인해 받은 복이 드러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참석한 제70주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런 모습을 보고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얻은 것은 무엇인데”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해요. 그런 분들로 인해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습니까?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천하지 천한 인간의 몸, 종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어도 자기에게 외형적인 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분의 버리심의 헌신으로 예수 믿지 않은 자가 구주를 영접하고, 잃었던 신앙이 회복되었다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그러한데 우리가 “저 분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저렇게 헌신했는데 왜 자기는 물리적인 복이 없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려”라고 한다면, 지금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예수 믿었는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신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천하지 천한 인간의 몸, 종의 옷을 입으신 주님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린 헌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헌신자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청아비전교회가 있고, 한국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독립운동한 분들이 계시기에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를 이룬 유일한 국가, 세계 10대 교역국, 5위 군사 강국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정리
한 청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벗은 몸으로 도망’ 사람에 대해 마가로 봅니다(막14:52). 당시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했고, 별도로 기록된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둘렀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가,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시각이 밤이었고, 잠을 자려고 준비 중 경황없이 베 홑이불로 벗은 몸을 두른 체, 달려왔을 것으로 보입니다(막14:50-52.참고/요18:3).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뒤 늦게라도 뒤 따르지 않겠습니까? 마가는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칠십 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부끄러웠던 과거,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도망쳤던 자신의 이름 대신 ‘한 청년’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쩌면 마가는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말을 듣고 분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을 결박하고 끌고 가던 무리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순간 도망 치게 되었는데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 급하였던지, 자신이 두른 베 홑이불을 잡은 무리의 손길을 뿌리치며, 옷이 벗겨지면서까지 그 자리를 떠났겠습니까? 다른 복음서에만 없고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기록은 그저 한 에피소드Episode로만 보면 되는 것일까요? 성경의 기록은 단지 재미있는 사건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증언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본문을 관찰하면 예수님과 마가는 비슷한 입장에 있지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벗기심
예수님과 마가의 같은 모습 다른 선택 첫 번째는 ‘벗기심’입니다. 마가가 황급하게 벗은 몸을 두른 ‘베 홑이불’의 ‘아마’亞麻, ‘리넨’linen Flax입니다(참고/창41:42;출38:16).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자신의 무덤에 안장할 때, 예수님 몸에 입혀드린 옷이 아마로 만들 ‘세마포’입니다(마27:59). 이렇게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달랐습니다.
마가는 벗은 몸으로 수치도 생각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가벗겨진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같이 한 영혼을 위해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자 수치를 생각지 않고 도피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셨습니다(참고/시22:18). 마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가벗겨지심을 우리를 위함이지만, 마가의 벗은 몸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요. 이것이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발가벗겨지셨지만, 마가는 살기 위해 벗은 몸이 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신 분들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인생 가운데 어떤 어려운 순간에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특정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한 사람이 당장 해결해주지 않으면, 뒤돌아서기도 하지만, 너무도 힘든 지경에 있으면, 부탁을 하고 사정을 하고 애원을 합니다. “내 체면이 어디 있어”라고 수치까지 버려버리면서요.
그러면 우리를 위해 수치를 버리신 주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치를 겪은 적이 있는가? 한 번쯤 고민이라고 해 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주님이 우리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듯이,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당하는 수치를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승합차로 차 운행 많이 했습니다.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예배 시간 이전에 와야 하기에 일찍 준비해야고, 집 근처와서는 나오시라고 전화드려야 하고, 힘든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때도 많습니다. 늦으면 일찍오라, 빨리오면 서두른다. 운전을 빨리하면 급하고, 천천히 하면 굼벵이 같이 느려 터진다. 이렇게 신경 쓰이고 번거로운데도 차 운행을 하고 카풀을 합니까? 한 분이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때로는 좋은 일 하면서도 핀잔을 받아도, 수치를 개의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하기가 얼마나 어렸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간과 쓸개도 다 빼야 할 때도 잊지 않습니까? 이런 섬김 하나 하나가 바로 벗기심을 당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신, 스스로 수치를 받으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 옷이 벗겨지면서까지 도피했던 수치를 마다하지 않은 마가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벌거벗기신 스스로 수치를 당하신 주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잡히심
예수님과 마가의 같은 모습 다른 선택 두 번째는 ‘잡히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로 나왔느냐’, “내가 강도냐”면서 호통을 치시면서, 스스로 잡히시며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14:49).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던 무리에게 잡히매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길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잡히셨지만, 마가는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잡히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잡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청아비전교회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 잡힌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교회 가운데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 우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똑같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도, 기쁨으로 자원하여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는지 몰라요. 지금 예배드리는 분 가운데는 그런 분은 한 분도 없는 줄 믿습니다. 교회에 억지로 붙잡혀서 오게 되었건, 자원해서 오게 되었건, “그래도 교회를 섬기다 보면 나도 덕 보는 것이 있겠지”하는 인간적인 기대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기대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을 때, 이 교회에서 신앙을 계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초대교회 때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고, 헤아릴 수 없는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 나왔’으며, 성령 충만한 역사 병든자들이 고침 받고 귀신들려 괴로움을 받던 자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행5:12-16).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물과 소유한 집과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드리고, 교회는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유무상통하였습니다(행2:45,4:32). 이렇게 흠 없이 교회가 성장해 나갔는데 전혀 생각지 않은 일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회에서 과부 등 소외 계층을 돕는데, 원래 예루살렘 토박이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해외에서 이주한 ‘헬라파 유대인’들을 우대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행6:1). 이에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집사’로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 등의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본연의 사역인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습니다.’(행6:3-5).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행6:7). 무엇 하나 흠 없이 부흥과 역사가 이루어진 초대교회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때 사도는 사도일 집사는 집사의 일을 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는 목사의 일을 하는 것이고, 성도면 성도, 제직이면 제직, 맡은 직분자이면 직분을 감당할 때,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나를 잡아 맨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의를 가질 때, 우리는 다른 생각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가를 성령님을 의지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분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배당 자리만 체운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년 52주가 있는데요. 한 해 주일성수 아무런 말없이 해주는 성도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각 각의 반든 사명과 은사와 재능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교회에 매이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잡히기 싫어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의 마가를 통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잡히시게 하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잡을 때, 잡힌바 되어야지 벗어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버리심
예수님과 마가의 같은 모습 다른 선택 세 번째는 ‘버리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마가도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살기 위해 버린 것이고, 주님은 죽기 위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단호합니다. 확고합니다. 우리에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저서 “내려놓음”을 일어보지 않았더라고, 한번 쯤 모두 들어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분은 서울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미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수나 연구원 등 안락한 미래의 보장과 인간의 기대를 전부 내려놓고, 가족을 모두 동반한 체, 가난한 나라인 몽골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미국 한인교회의 파송을 받아 몽골의 한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대학의 강의도 맡았지만, 한국 유수의 대학 세계 명문 대학에서 교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2005년부터는 전 세계 어디든 마다 않고, 강사로 섬기면서, ‘내려놓음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강의하면서, 시종일관 “인생의 모든 편안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늘로부터 채워지는 평안의 진정한 특권을 깨닫고 누릴 것”을 말하고, “내려놓음의 결심과 실행만이 진정한 행복을 택하는 크리스천의 덕목인 것”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대명사처럼 쓰여지는 내려놓음은 주님의 버리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 그 영광의 옷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버리기 위해 선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입으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아직도 입으려고 하는 것 즉 얻으려고 하는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버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릴까에 앞서,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얻을 까 아직도 입으려는 그 생각을 없앨 수 있다면, 오늘 말씀 통해서 바른 가르침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설교 중에 혹은 직접 당사자를 통해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헌신에 대해 간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얻은 것은 무엇인데”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음에도, 그로 인해 받은 복이 드러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한 것은, 주님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어도 자기에게 외형적인 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들의 버리심의 헌신으로 예수 믿지 않은 자가 구주를 영접하고, 잃었던 신앙이 회복되었다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신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천하지 천한 인간의 몸, 종의 옷을 입으신 주님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린 헌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최종 정리
마가는 열두 제자는 아니어, 칠십 인의 제자 반열에 있었던 자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버렸을 때, 자신은 뒤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도 무리들에게 잡히자, 몸에 두른 베 홑이불이 벗겨지면서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한 말씀이 기록된 본문을 관찰해보면, 예수님과 마가의 유사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선택을 하였음을 또한 알게 됩니다.
첫 번째 ‘벗기심’입니다. 마가는 자신이 살기 위해 몸에 두른 베 홑이불이 벗겨지면서까지 도피했습니다. 살기 위해 수치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가가 입은 베 홑이불과 같은 재료인 아마로 만든 세마포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 장례 때 그 몸에 입혀 드렸습니다.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옷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벗겨지심을 알고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스스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지옥의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 특정인에게 하소연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수치의 경험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치를 생각해 본적조차 있는 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마가는 자신이 살기 위해 옷이 벗겨지는 수치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벗겨지셨습니다. 스스로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잡히심’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같이 무리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을 물리칠 수도 있음에도 스스로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왜 많은 교회 중에 청아비전교회에 하나님의 잡힘을 당했을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맞는 것일까 의구를 품고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할 일을 돌아보고 충실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가 할 일이 있고, 성도는 성도로, 제직은 제직으로, 직분자는 직분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길을 인도받고, 복을 받습니다. 아! 하나님이 왜! 나를 우리 교회에 잡히게 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버리심’입니다. 마가는 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두른 베 홑이불 육체의 버렸습니다. 그러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셨습니다. 이 주님의 버리심을 이용규 선교사님은 “내려놓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았습니다.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릴까 생각하기 전,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적인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입으려고 하는 생각을 먼저 버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헌신자가 모든 것을 버렸는데도, 자신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복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고,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 분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주님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한 성도 한 영혼을 위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얻는 것이 없는데, 내가 왜 다 버려 라는 생각 그것을 예수님의 보혈이 지우개가 되어 지우시기를 바랍니다. 헌신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분이 있기에 내가 있고. 청아비전교회가 있고, 한국교회가 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벗기심’, ‘잡히심’, ‘버리심’ 이 세 가지가, 오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은, 마가처럼 예수를 따르다가 도망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따라 승리하는 제자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반드시 살아계신 역사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결론
다같이 기도합니다.
①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죽으시고자, 십자가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못하고 벗겨 지졌습니다. 마가는 살기 위해 베 홑이불을 잡는 자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벗겨졌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수치를 당하신 주님과 같이 한 영혼을 위한 일이라면, 수치마저 영광으로 받들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잡히게 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이 시간 동안 교회를 섬겼음에도,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해 회의가 들 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과 같이 잡히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옵소서.
③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를 죽으시기 위해 버렸습니다. 마가는 베 홑이 불을 살기 위해 버렸습니다. 주님을 따른 분들 가운데 외형적인 복이 적더라도, 그분들이 버림을 통해 믿지 않는 자가,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이 회복되었다면, 고귀한 일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버림으로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