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영원한 영광"(딤후2:9-13) 순교자기념주일 이재현목사(25.06.22)

이재현목사 2025. 6. 22. 20:07

영원한 영광

 

하나님말씀 : 디모데후서 2:9∼13 2025.06.22. 主日禮拜

 

“9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913)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금주는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총회는 매년 6월 넷째 주일을 순교자기념주일로 드리고, 그 주간을 순교자기념주간으로 지정하여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참수터

 

사도 바울의 순교 직전, 2차 투옥 장소는 로마 시에서 약 5km 떨어진 오스티안 가도’Ostian Way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가 수감되었던 감옥 터가 있고, 지금은 이를 기념하는 천국의 계단’Scala Coeli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형장으로 걸어갔던 길은 아직도 보존 되어 있고요. 그 길을 따라 가면 바울이 참수를 당한 장소를 기념하여 지어진 트레 폰타네’Tre Fontane 교회가 있습니다. ‘트레 폰타네는 이탈리아어로 세 개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이 참수를 당했을 때, 그의 머리가 세 번 튀었고, 그 자리마다 작은 분수가 솟아올라, ‘트레 폰타네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바울의 순교에 대하여 AD 67년 혹은 68년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요. 이때 바울이 순교 직전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서신서가 디모데후서입니다. 저는 성지탐방을 갔을 때, 바울이 편지를 썼다는 감옥을 잠시 주목했습니다. 땅을 파서 만든 협소하고 음습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드로아의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져달라는 말씀이 있는데요(딤후4:13). 왜 그러한 부탁을 했는지 현장을 보고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매우 무더운 일기입니다. 한 여름에는 체감 온도가 영상 50도에 달합니다. 그런데 나무 그늘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시원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한 기온의 특성상 땅속으로 들어가면 한기를 느끼게 됩니다. 한 겨울에는 한없이 추운 곳이고요.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그 작고 빛이 차단된 감옥에서 추위에 떨면서, 디모데에게 외투를 가져오도록 당부한 것이지요. 그토록 위대한 사도의 마지막 일생에 따뜻한 겉옷 하나 없었다는 것,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생각되게 하지 않습니까?

 

의의 면류관

 

이렇게 바울의 순교 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서신인 디모데후서에는 곳곳에 죽음을 예견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의 죽음과 죽음 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6-8)

 

전제는 제물을 드릴 때 마지막에 붓는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마지막임을 예견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말씀이 이를 더욱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씀은 그의 인생에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바울의 일생은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주를 위해 산 싸움인 것이지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이 말씀에서 죽음을 앞둔 바울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살아온 날들에 아쉬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아멘! ‘이제 후로는죽음 후를 말씀합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즉 사도 바울은 저 영원한 나라에 자신을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순교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인생의 후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더욱이 이 의의 면류관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의로운 면류관을 예비하여 주신 다고 하셨으니, 이보다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도전이 되세요.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

 

어떻게 바울은 죽음을 예견하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고 의의 면류관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의의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고,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2-13)

 

이 말씀에 부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마지막에는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미쁘시니’, ‘항상 신실하시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신실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신실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 살려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에 넘겨졌을 때, 재판장이었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18:37). 이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라고 위엄있게 답하셨습니다(18:37). 누가 재판장이고 누가 죄수의 신분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근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권위가 있음을 내비치며,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답하라고 하였습니다.(19:10). 그러나 예수님은 위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라며,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과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19:11).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도 바울의 순교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의의 면류관을 확신할 수 있었을 까요? 그 힘의 원동력은 부인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구원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위해 내 일생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가질 것을 도전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2:12).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심령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말씀이 아니요. 그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강조입니다. 명령입니다. 모두에게 부인 당해도 예수님에게 인정받으면 살지만, 모두에게 인정받아도 예수님에게 부인당하면 끝입니다. 최종적인 심판자는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10:32-33). 이때는 제자들과 함께 활동을 하셨을 때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수제인 베드로는 이 말씀을 아주 가까이서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날 밤,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26:34).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호기롭게 장담하였습니다(26:35). 그러나 결과는 여러분이 잘 아는 데로 저주하며 맹세하여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씀합니다(26:75).

 

그 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까지 건너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AD 63년 경 인데요. 폭군 네로가 로마를 지배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로의 핍박이 극심해졌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박해에 피해 로마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회심한 후에도 베드로는 또 다시 자신의 살기 위해 핍박을 피한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을 부인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승에 의하면, 도피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전 성지탐방에서 베드로가 도피하여 걸었던 길을 찾아 갔었습니다. 베드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 물었습니다(참고/13:36). 이때 예수님은 네가 나의 백성을 떠나므로 내가 한 번 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로마로 간다.”고 답하십니다. 이에 자신의 비겁함을 뉘우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네로에 의해 십자형에 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죽음의 순간 감히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내 머리가 땅 아래로 오도록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베드로의 순교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부인했지만, 결국은 시인으로 돌아 섰습니다. 베드로는 회신 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고요. 회심 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돌아섰습니다.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돌아서서 순교한 베드로에게도 의의면류관이 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분문에서 사도 바울이 순교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의의 면류관을 바랄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았던, 그 신앙을 바울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이 회심한 후에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돌아 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가리키면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부인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 내가 좀 돈을 보려고, 유익을 얻으려고, 잠시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에 있을 지라도, 돌아서서 마지막에는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번 믿음을 잃어버리다가 나는 안돼는 구나하고 포기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도하는 모든 분들이 그러한 길에 들어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살 것이요

 

바울과 같이 순교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의의 면류관을 바랄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았던, 그 신앙을 바울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주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목숨을 잃으면은 죽으면이라는 말이고요. ‘구원하리라는 말은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살면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풀면, 여러분 신앙생활하면 죽지 않아요. 손해 보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 많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출석도 해야지요. 땀 흘려 봉사도 해야지요. 피 같은 헌금도 해야지요. 그와 같은 모든 믿음 안에서 행위들을 손해로 생각해요.

 

그러면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기 이전에요. 시간 내에서 예배 출석도 안하고, 땀 흘려 봉사도 않고, 피 같은 헌금도 안하고, 다 나를 위해 사용했어요.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어요. 생각을 한 번 잘 해보세요. 예수 믿기 이전에요. 그때 모든 것은 나와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을 때, 여러분에게 유익했어요. 여러분 가정이 행복했어요. 여러분 삶이 기뻤어요.

 

우리는 인생의 경험으로 압니다. 나를 위해 나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쓴다고, 그것이 내게 가정에 유익으로 행복으로 기쁨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에게 행복은 그런 것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행복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만날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는가? 이 해답을 찾아야, 인간은 비로소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인간은 외롭고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쓰고 써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은 완공하는데 50여 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규모, 장식품, 회화들, 조각상 그리고 그 유명한 베르사유 정원은 감탄을 자아 낼 만했습니다. 전체 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인데요. 각 종 방들 가운데 가장 화려한 방은 거울의 방입니다.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천장은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루이 13Louis XIII,1601-1643의 사냥용 별장을 아들인 루이 14Louis XIV,1638-1715의 명령으로 대대적으로 증축한 곳인데요.

 

루이 14세는 대왕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리며,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 왕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법률과 같은 존재였고, 스스로 짐朕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였습니다. 모든 것을 쟁취하고, 누리고, 자신의 명성을 위해 쌓고, 세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임종하기 닷새 전인 1715826, 증손자이자이자, 다섯 살의 어린 후계자인 루이 15Louis XV,1710-1774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가,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물에 탐닉했던 짐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점도 닮지 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석하게도 짐은 그러지 못했느니라.”

 

그는 아들과 손자까지 다 죽고 난 이후까지, 생존하여, 당시로서는 장수인 77세를 살며, 72110일 동안 재위하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왕위를 지켰지만, 그의 삶은 탐욕의 절정인 베르사유궁의 건축과 끝없이 이어지는 참혹한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양왕이라 불리는 국왕이 빛나는 영광을 추구하는 동안 2,000만 명의 프랑스 국민은 캄캄한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아가,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물에 탐닉했던 짐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점도 닮지 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석하게도 짐은 그러지 못했느니라.”

 

그의 유언에 그 강대하고 찬란했던 삶이 행복한 것으로 보이세요. 아니면 후회, 후회, 후회로 보이세요. 인간의 행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세상에서 오는 것들이 자신을 위해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도 결국 후대에 프랑스 혁명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끌려 내려지게 되지 않습니까?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 이라고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왕 노릇 권세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끝까지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주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왕 노릇의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딤후2:12).

 

함께라는 말은 주님과 함께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왕이시라는 것이고요. ‘왕 노릇이라는 것은 왕은 아닌데 왕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왕 노릇할 자인가? 왕권을 받을 자인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1-12). ‘주와 함께 죽었으면을 상징적으로 보면, 끝까지 믿음을 지킨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과 같이 순교한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주와 함께 왕 노릇 할 자는 순교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에게 하나님은 왕 노릇하는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순교자에게 왕권이라는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급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일생을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간 성도들과 주를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하지 않는 순교자들이 천국에서 상급이 동일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에게는 왕 노릇의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교자에 대하여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하였습니다(20:4). 이 말씀 중간에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란 당연히 순교자를 가리키는 것이고요. 이어서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도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되요. ‘짐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 자는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일컫는데요.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종말시대 7년환난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 교회시대의 순교자와 적그리스도가 지배한 후 종말시대의 순교자들 두 부류의 순교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순교자들에게는 살아서부활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왕권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 군대로 임하여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와 마지막 심판대인 하나님이 좌정하신 흰 보좌 좌우에 있는 보좌들에 앉아 악인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참고/19:28;22:30;4:4,19:14,20:11).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마지막 심판대인 하나님이 좌정하신 흰 보좌 좌우에 있는 보좌들에 앉아 악인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것은 순교자에게 주는 특권이 아니라 상급의 차이입니다. 평범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에 간 성도와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며 충성한 순교자가 같은 상급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도 바울 뿐만 이겠습니까? 바울는 자신의 받은 의의 면류관은 자신 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4:8). 주를 믿는 모든 자에게 순교를 도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라고 할 때,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기거나, 죽음의 위협이 내 앞에 오면, 나는 그 자리를 피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를 쓴 장소가 감옥이라고 말씀을 드렸고요. 그 자리를 기념하여 천국의 계단 교회이 세워졌다고 했지 않습니까. 이 교회 지하에 가면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 10대 황제, 가장 그 정도가 심한 왕 중 한명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85-312가 자신의 목욕장 공사에 징집되었던 기독교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각 지역에 산재했던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킨 후, 이곳에서 무려 1203명을 죽였습니다. 1203명 중에는 어쩌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릅니다. 즉 순교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 나에게 맞이하게 될 줄 모릅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예화를 들려드릴까요? 지금 미국에서 총기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학교에서 벌어져 많은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1999420일에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오래전 사건임에도 다른 총기사건과 다르게 오늘까지 기억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의 놀라운 증언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인 트렌치코트마피아단원이었던 에릭딜란이 총기를 휴대하고, 학교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고 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마피아단원 학생 중 한명이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는 물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믿냐?” 만약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캐시의 이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의 크리스천 십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 주의 한 도시에서는 25백 명의 십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캐시 바넬은 어린 소녀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이름과 하나님 말씀을 증거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교의 자리에 찾아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교는 어느 순간, 어떤 자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찾아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부인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으며, 순교 후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생각할 때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살아서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도 순교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순교하지 않는 제자도 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마지막을 밧모섬에 유배당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종말에 있을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소망과 축복의 말을 남기고 편안히 주님이 계신 천국에 안식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았지만 성경학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놓습니다. 그 이유는 나 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1:9). 사도 요한은 일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증언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평생에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산다는 신앙을 잃지 않고. 그 또한 의의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하였고요(2:10).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주리라고 하였습니다(2:26). 이 또한 순교자에게 주시는 왕 노릇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에 속하는 저와 여러분도 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설 은혜가 있을 줄로 압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논란이 되고 있는 WEA는 자칭 국가와 교파와 단체를 초월해 공동의 관심사를 논의하는 기독교 리더들의 모임 글로벌 크리스천 포럼GCF:Global Christian Forum를 통해 로마 가톨릭 등 종교는 물론 UN과도 협력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平和는 순교殉敎를 망각忘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종파의 평화 화해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만 가지면, 성경과 신학과 신앙과 관계 없이 일치를 추구삽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인류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룩한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러한데 모든 종교가 구원, 지복至福, 평화라면, 생명 걸고 예수 유일 구원을 증거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지난 2천년 교회시대 동안 예수 전파하다 죽임당한 순교는 무엇인가? WEA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0년 형을 선고받고, 7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다, 잠시 풀려난 19392월 첫째 주일 죽음을 목도하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8:35). 19391219일 배교한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했고, 1944년 주 목사님은 마흔 일곱 젊은 나이에 소양, 어린양이라는 자신의 아호와 같이 차가운 감방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동시대 목회자로 추양秋陽, 가을의 햇살이라는 자신의 아호과 같이 백수에 가까운 연세까지 한국교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한경직 목사님1902-2000은 억압받던 일제에는 신사를 참배와 부역(또는 순응?)하고, 자유했던 군사정권에는 유착(또는 축복?)하였습니다. WCC를 한국교회에 가져오신 분 가운데 한 분이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손에는 오직 예수가, 신사참배하고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장수하신 한경직 목사님 손에는 종교다원주의 추진 기관인 세계종교의회의 창립 멤버였던 영국의 템플경이 제정한 템플상이 들려졌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날을 사모하며, 손에 무엇을 들어야 할지를 기도해야 겠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개신교 ‘Protestant’의 뜻은 저항하는 자이다. 복음을 복음 되게 하고, 복음이 변질하지 않게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파의 일치를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에 저항이라는 단어가 있습니까? 저항의 끝은 순교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고, 바울과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종교개혁가들이 그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버리고, 평화로 위장하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WCC, Lausanne, WEA가 추구하는 평화는 순교를 망각하게 합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고 지복이고 평회라면 생명을 바쳐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로 증거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 생명은 순결, 순결은 예수, 예수 위한 순교가 순결입니다. 순교를 망각하는 것은, 순결의 옷, 세마포, 그리스도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8:18). 영광의 최상은 순교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인 순교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정리

 

의의 면류관

 

바울이 순교 직전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서신서가 디모데후서입니다. 제가 본 그곳은 땅을 파서 만든 협소하고 음습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드로아의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져달라는 말씀이 있는데요(딤후4:13). 왜 그러한 부탁을 했는지 현장을 보고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매우 무더운 일기입니다. 한 여름에는 체감 온도가 영상 50도에 달합니다. 그런데 나무 그늘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시원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한 기온의 특성상 땅속으로 들어가면 한기를 느끼게 됩니다. 한 겨울에는 한없이 추운 곳입니다. 햇빛이 비치지 않은 곳은 싸늘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 그 작고 빛이 차단된 감옥에서 추위에 떨면서, 디모데에게 외투를 가져오도록 당부한 것이지요. 그토록 위대한 사도의 마지막 일생에 따뜻한 겉옷 하나 없었다는 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은 디모데후서에는 곳곳에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대하게 죽음과 죽음 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전제는 제물을 드릴 때 마지막에 붓는 포도주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했다는 것입니다(딤후4:6). 이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바울의 일생은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악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주를 위해 산 싸움인 것이지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딤후4:7). 그렇기에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이 말씀에서 죽음을 앞둔 바울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살아온 날들에 아쉬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후로는죽음 후를 말씀합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즉 사도 바울은 저 영원한 나라에 자신을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순교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었습니다(딤후4:8).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인생의 후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더욱이 이 의의 면류관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고 하엿습니다(딤후4:8). 이보다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말씀합니다(딤후4:8). 저와 여러분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

 

사도 바울은 죽음을 예견하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고 의의 면류관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또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의의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고,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부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고, 마지막에는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딤후2:12-13). ‘’, 예수님은 항상 미쁘시니’, ‘항상 신실하시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신실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신실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딤후2:13).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을 언도한 총독 빌라도에게도 내가 왕이라며 위엄있게 답하셨습니다(18:37.참고/19:11).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의의 면류관을 확신할 수 있었을 까요? 그 힘의 원동력은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구원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위해 내 일생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2:12). 우리의 심령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말씀아 아니요. 그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강조입니다.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26:34).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호기롭게 장담하였습니다(26:35). 그렇지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씀합니다(26:75).

 

그런데 베드로는 부인이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AD 63년 경 폭군 네로가 지배하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핍박이 극심하자 로마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 또한 주님을 부인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피의 길에서 만난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었습니다(참고/13:36). 이때 주님은 네가 나의 백성을 떠나므로 내가 한 번 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로마로 간다.”고 답하십니다. 이에 자신의 비겁함을 뉘우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네로에 의해 십자형에 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부인했지만, 결국은 시인으로 돌아 섰습니다. 베드로는 회신 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고요. 회심 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난 결국은 돌아섰습니다.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돌아서서 순교한 베드로에게도 의의면류관이 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의의 면류관을 바랄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았던, 그 신앙을 바울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이 회심한 후에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돌아 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가리키면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부인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 내가 좀 돈을 보려고, 유익을 얻으려고, 잠시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에 있을 지라도, 돌아서서 마지막에는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고 기도하는 모든 분에게 이 은혜를 축복합니다.

 

함께 살 것이요

 

두 번째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딤후2:11).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5).이 말씀은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살면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쉽게 적용해서 신앙생활하면 죽지 않아요. 손해 보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 많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출석도 해야지요. 땀 흘려 봉사도 해야지요. 피 같은 헌금도 해야지요. 그와 같은 모든 믿음 안에서 행위들을 손해로 생각해요. 그러면 예수 믿기 이전에 그와 같이 안하고, 다 나를 위해 사용했어요.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어요. 그때 여러분에게 유익했어요. 행복했어요. 기뻤어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은 무려 50년 동안 건축되었습니다. 그 규모, 장식품, 회화들, 조각상 그리고 그 유명한 정원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 궁전을 중축한 루이 14세는 대왕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리며, 스스로 짐朕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였습니다. 72110일 동안 재위하며,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랜 왕위를 지켰지습니다. 모든 것을 쟁취하고, 누리고, 자신의 명성을 위해 쌓고, 세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임종하기 닷새 전 증손자이자이자, 다섯 살의 어린 후계자인 루이 15세에게 아가,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물에 탐닉했던 짐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점도 닮지 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석하게도 짐은 그러지 못했느니라.”고 유언했습니다.

 

그의 유언에 그 강대하고 찬란했던 삶이 행복한 것으로 보이세요. 아니면 후회, 후회, 후회로 보이세요. 인간의 행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세상에서 오는 것들이 자신을 위해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도 결국 후대에 프랑스 혁명에 의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끌려 내려지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경험으로 압니다. 나를 위해 나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쓴다고, 그것이 내게 가정에 유익으로 행복으로 기쁨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에게 행복은 그런 것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행복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만날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는가? 이 해답을 찾아야, 인간은 비로소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 이라고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왕 노릇 권세

 

세 번째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2). ‘왕 노릇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말은 예수님은 왕이시고, 왕은 아닌지만 왕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 왕 노릇할 자인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을 상징적으로 보면, 끝까지 믿음을 지킨 모든 성도를 가리키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과 같이 순교한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딤후2:11-12). 순교자들에게 하나님은 왕 노릇하는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교자에게 왕권이라는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급의 차이입니다. 일생을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간 성도들과 주를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하지 않는 순교자들이 천국에서 상급이 동일하겠어요.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자에 대하여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란 당연히 순교자를 가리키는 것이고요(20:4). 이어서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도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되요(20:4). ‘짐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 자는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일컫는데요. 지금 교회시대의 순교자와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종말시대 7년환난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한 후, 종말시대의 순교자들 두 부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순교자들에게는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말씀합니다(20:4).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왕권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 군대로 임하여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와 마지막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에서 순교자들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참고/:19:14).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4:8).

 

순교라고 할 때,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기거나, 죽음의 위협이 내 앞에 오면, 나는 그 자리를 피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총기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학교에서 벌어져 많은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1999420일에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오래전 사건임에도 다른 총기사건과 다르게 오늘까지 기억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의 놀라운 증언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인 트렌치코트마피아단원이었던 에릭딜란이 총기를 휴대하고, 학교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고 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마피아단원 학생 중 한명이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는 물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믿냐?” 만약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캐시 바넬은 어린 소녀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이름과 하나님 말씀을 증거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교의 자리에 찾아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교는 어느 순간, 어떤 자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찾아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부인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으며, 순교 후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생각할 때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살아서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도 순교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순교하지 않는 제자도 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마지막을 밧모섬에 유배당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종말에 있을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소망과 축복의 말을 남기고 편안히 주님이 계신 천국에 안식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았지만 성경학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놓습니다. 그 이유는 일생동안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산다는 신앙을 잃지 않고. 그 또한 의의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하였고요(2:10).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주리라고 하였습니다(2:26). 이 또한 순교자에게 주시는 왕 노릇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에 속하는 저와 여러분도 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설 은혜가 있을 줄로 압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인류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룩한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러한데 에큐메니컬Ecumenical Movement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만 가지면, 성경과 신학과 신앙과 관계 없이 일치를 추구합니다. 이 운동을 주도, 동조, 참여하는 것이 WCC, Lausanne, WEA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모든 종교가 구원, 지복至福, 평화라면, 생명 걸고 예수 유일 구원을 증거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지난 2천년 교회시대 동안 예수 전파하다 죽임당한 순교는 무엇입니까?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0년 형을 선고받고, 7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다, 잠시 풀려난 19392월 첫째 주일 죽음을 목도하면서,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19391219일 배교한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했고, 1944년 주 목사님은 마흔 일곱 젊은 나이에 소양, 어린양이라는 자신의 아호와 같이 차가운 감방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동시대 목회자로 추양秋陽, 가을의 햇살이라는 자신의 아호과 같이 백수에 가까운 연세까지 한국교회 성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한경직 목사님1902-2000은 억압받던 일제에는 부역(또는 순응?)하고, 자유했던 군사정권에는 유착(또는 축복?)하였습니다. WCC를 한국교회이 가져오신 분 가운데 한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손에는 오직 예수가, 신사참배하고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장수하신 한경직 목사님 손에는 종교다원주의 추진 기관인 세계종교의회의 창립 멤버였던 영국의 템플경이 제정한 템플상이 들려졌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날을 사모하며, 손에 무엇을 들어야 할지를 기도해야 겠습니다.

 

교회 생명은 순결, 순결은 예수, 예수 위한 순교가 순결이다. 순교를 망각하는 것은, 순결의 옷, 세마포, 그리스도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8:18). 영광의 최상은 순교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인 순교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최종 정리

 

사도 바울은 순교 직전 감옥에서 마지막을 예견하며,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딤후4:7-8). 그 인생에 후회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움이 아니라, ‘의의 면류관을 믿었습니다(딤후4:8). 그 누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말씀합니다(딤후4:8).

 

바울의 이러한 죽음 앞에서, 담대함은 십자가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딤후2:12). 살기 위해 주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회심하기 전에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하고 회심 후에도 네로의 핍박을 피해 로마에서 도피한 베드로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지막에 돌아섰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체 순교 당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것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신앙을 말합니다. 또한 인간의 연약함으로 살기위해 돈을 좀 벌어 벌려고 부인하게 될 때,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한두 번 부인했다고 나는 안돼라고 돌아서지 않는 자가 되지 않기를 나와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주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1).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8:35). 신앙생활은 손해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드려 예배를 드리고, 땀 흘려 봉사를 하고, 피 값은 헌금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경험으로 압니다. 나를 위해, 나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쓴다고, 그것이 내게, 가정에, 유익으로 행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그런 것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행복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만날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는가? 이 해답을 찾아야 인간은 비로소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인간은 외롭고 공허하며 슬픔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쓰고, 써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님을 만난 것보다, 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바울처럼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세 번째 왕 노릇의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딤후2:12). 주와 함께 왕 노릇 할 자는 순교한 성도에게 하나님은 왕 노릇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순교자에게 왕권이라는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급의 차이입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는 왕 권자가 됩니다. 마지막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에서 순교자들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는 어느 순가 어떤 자리에서도 찾아 올 수 있음을 한 고등학교 소녀의 예화를 통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사도 요한을 들어 일생동안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는 사람도 순교의 반열에 들어 설 수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9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2:9-10)

 

바울의 몸은 감옥에 가둘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자들이 구원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오늘도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는 신앙과 순교자로서 왕 노릇하는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음을 소망하는 자가 받을 의의 면류관영광입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과 함께 이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다같이 기도합니다.

 

① 사도 바울이 죽음을 예견하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의의 면류관을 확신하고, 우리에게 도전을 줄 수 있었던 첫 번째,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지 않으셨던 주님을 따른 사도 바울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구원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위해, 일생 동안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 물질을 얻기 위해, 유익을 갖기 위해, 신앙을 저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혹 연약하여 저버리더라도, 마지막에 돌아서서,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② 두 번째,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나를 위해 산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 이르러 주님과 함께 사는 그 날까지 이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③ 세 번째, 왕 노릇(왕권자)의 권세입니다. 순교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멸하시고 세우실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왕권자가 되고,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와 마지막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에서 악인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최상은 순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영원한 영광 순교를 바라 볼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