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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타 천년설의 대비(1)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03)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3. 26. 19:08

3.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타 천년설의 대비(1)

 

1)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의 구별점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타 천년설1)과 구별점을 대비하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세대주의 전 천년설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세대를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라고 여긴다.2) 그러나 세대마다 상이한 구원론, 교회의 환난 전 휴거로 요한계시록 4장 이후는 유대인에게 해당된다는 주장, 공중과 지상 이중재림설, 유대인들의 지나친 특권, 이스라엘 회복을 종말의 완성으로 보고, 이를 실현하기위해 물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인 종말론 사상, 장차 메시아가 세계의 왕으로 등극하고, 예루살렘을 왕성王城으로하여, 이스라엘이 인류를 지배한다는 메시아 왕국관, 지상 천년왕국에서 구약의 제사제도 복원 등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설명에도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 포괄적 의미에서 역사적 전 천년설이라고 하면,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과 연속 선상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간극의 차이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구조화 하는 원리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성경을 언약신학으로 푼다. 계약신학 관점을 가진다는 말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언약사적으로 보느냐 세대적으로 보느냐의 관점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언약사는 개혁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 언약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에 통일성과 일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역사 섭리가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 언약사적 관점이다.3)

 

반면 세대주의적 관점은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와 이방인을 향한 역사 섭리를 분리시킨다. 하나님 역사의 주류는 이스라엘이고,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삽입되었다고 세대주의는 본다. 고전적 세대주의Classical Dispensationalism자들은 사실상 교회시대를 인정하지 않는다.4)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배격함으로 왕국시대가 연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언약사적 관점은 물론 구속사적 관점으로도 용인될 수 없다. 이렇게 세대주의는 교회가 중심이 아니다.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교회가 중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포함한 교회를 중심으로 섭리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언약사적 흐름이다. 언약사적 흐름을 따라가는 면에서는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오히려 무 천년주의와 같다. 무 천년주의의 개혁주의 신학 라인의 언약사적 관점과 개혁주의 전 천년설의 언약사적 관점은 공명共鳴하고 있다.5)

 

세대주의의 핵심은 유대인 우월주의환난 전 휴거. 특히 그들의 환난 전 휴거에는 고난의 신학이 없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휴거하면 그만이다. 교회가 수난과 고난을 당한다는 인식이 약하다. 그로 인해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세대주의의 유대교 우월주의속성 때문에, 이스라엘 회복운동이나 신사도운동 같은 건전하지 않은 흐름에 세대주의자들은 쉽게 끌려갈 수 있다. 유대교 중심의 시오니즘Judaism Zionism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유대근본주의자들로 선민사상에 젖어 타민족을 배척하고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이다. 이들은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과 같다. 이 운동을 미국에서는 세대주의자들이 하고 있다. 그들은 친이스라엘, 극우주의자들이다.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하자”,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이런 표방은 그럴듯하게 기독교적이다. 그러나 속을 보면 완전히 정치적이다. 이들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숭배, 곧 우상숭배로 나아간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제3성전을 건축하여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세대주의 사상에 기인한다.6)

 

세대주의 전 천년설에서 천년왕국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유대인이 중심이 되어 이방인을 다스리는 시대라고 말한다.7) 그러나 개혁주의 전 천년설의 천년왕국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이 없다.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4-16). 이 말씀이 완성된 곳이 천년왕국인 것이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9:6.참조/7: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특권도 차별도 없이 한 새 사람이 되어 한 분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곳이 천년왕국이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는 유대인들의 우월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약사적 관점으로 그들은 이방인들과 똑같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단 구원의 시기에 차이가 있다. 이방인은 교회시대인 지금 구원받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 다음 종말의 때에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갖는다. 물론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 세대주의 전 천년설과 일맥하는 경우가 있다.8) 이러한 부분적인 해석을 동의한다고 세대주의로 공격하는 이들이 있다.

 

박윤선 박사는 요한계시록 주석 머리말에서, “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할 때에 어떤 문구에 있어서는 혹시 신학 처지가 다른 주석가들에게서 인용한 바도 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사상 체계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신학 사상이 정통이 아닌 그들까지도 별 수 없이 그 문구 해석에 있어서는 우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이다.”9)고 하였다.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노선과 다른 종말론을 펼치면,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필찬 박사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세대주의자이면서 자칭 개혁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면서, “세대주의가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에 세대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하였다. 그러면서 세대주의자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예루살렘내가 본 천국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100% 세대주의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고 단언했다.10) 그 이유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2절과 219절에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명시돼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도 219절에서 225절의 말씀을 소위 내가 본 천국으로 생각하고…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11)고 하였다.

 

그러나 이 논지는 저자가 볼 때 더욱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의 논조와 다르다고 백 퍼센트 세대주의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가? 세대주의에서 연구된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 중 성경적인 근거가 분명한 것이라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과 위배되지 않는다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너 넓은 개혁주의 틀에서 다른 견해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상기와 같은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친다면 과연 누구와 같이 갈 수 있겠는가?

 

민병석 목사는 칼빈이 종말론에서 무 천년설을 취했다고 해서 개혁주의 신학의 종말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신학은 어느 시점에 머물러 멈춰 있는 신학이 아니다. 오늘까지 계속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성경과 완전한 합일점을 이룰 때까지) 더 낳은 신학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혁주의 신학은 종말론에 대해 아직 결정적인 결론을 내린바 없다. 개혁주의 신학의 깊은 안목과 넓은 시야로 볼 때 무 천년설은 완성품도 모범답안도 아니다. 역사적 전 천년설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개혁주의 신학에 어긋나는 이론이 너무나도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자라 할지라도 칼빈의 신학을 비판할 수 있다. 칼빈이 취한 무 천년설을 반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12)

 

박윤선 박사는 철저한 칼빈주의 자였으면서도 무 천년설을 따르지 않았다. 역사적 전 천년설을 주장한 그는 “전 천년설의 올바른 형태는 칼빈주의와 일치한다.”라고 하였다.13) 칼빈주의를 개혁주의로 어떻게 승화시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표현이다.

 

메이천John Gresham Machen,1881-1937 박사는 천년왕국과 전 천년주의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 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우리가 일치하는 게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우리와 똑같이 존중하며, 성경의 해석에서만 차이가 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에게 신성을 돌리며, 예수가 세상에 오실 것과 재림 시 세상이 완성될 것이라는 초자연적인 견해를 견지한다. 따라서 성경과 교회의 위대한 신조에 대한 충성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적인 교제 속에서 연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14) 같은 개혁주의 안에 있는 무 천년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다음은 개혁주의에 있는 한 목회자의 논문가운데 일부이다.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 인식하며, 이를 신앙과 삶의 절대가치와 최고의 규범으로 삼아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며 두 교리체계이다. 그러므로 이 두 신학의 성경 해석적 관점의 차이는 정통과 이단의 관계로 규정해 비판하기보다는 정통신학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의 차이로 분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지엽적인 주제와 관련해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함께 신앙으로 고백하며 동질성을 추구할 수 있다면 동지의식을 가지고 부단히 미래지향적인 합의를 도모하는 일에 긍정적으로 연대해야 할 줄 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전천년주의자도, 후천년주의자도, 무천년주의자도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을 포함해서 저들 간에 비록 해석상의 상호 간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여러 방편들을 통해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뮬러(George Muller), 무디(Dwight Lyman Moody), 스윈돌(Charse Swindoll), 맥아더(John McArthur),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W.A. Criswell) 등도 세대주의 신학자요 목회자란 사실은 새롭지 않다. 선의적인 비판은 가능하되 독선적인 비난을 자제할 줄 아는 자가 진정으로 진리 편에 서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15)

 

또 다른 목회자의 전언이다.

 

세대주의와 계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16)

 

이와 같이 박윤선 박사와 메이첸 박사 같이 유명 신학자 그리고 민병석 목사와 같이 종말론 전문가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일선의 목회현장에 있는 목회자들도 성경해석에 대한 바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자신들만이 개혁주의라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리라 생각한다.

 

尾注>

 

1) 천년설 개관

천년설(The Millennial View)은 크게 세 가지 후 천년설(The Post millennial View), 무 천년설 (A-millenarianism), 전 천년설(The Pre-millennial View)로 나눈다. 이 가운데 전 천년설은 역사적 전 천년설(Historic Pre-millenarianism)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arianism)로 구별한다(재림시기로 구분 할 때 역사적 전 천년설은 환난 후 재림설(Post-tribulation & Pre-millennial View),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환난 전 재림설(Pre-tribulation & Pre-millennial View)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는 전 천년설을 역사적 전 천년설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로 나누지 않는다. 후 천년설, 무 천년설, 역사적 전 천년설, 세대주의 전 천년설로 4대 천년설로 부른다. 다음은 각 천년설의 개관이다(이하는 다음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http://whyjesusonly.com=8164).

1. 후 천년설

신약시대의 말기에 교회의 황금시기가 천 년간 이어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는 복음이 온 땅에 편만하게 왕성해지는 엄청난 영적 부흥이 있고, 이스라엘에도 민족적인 구원이 임하는 평화의 시기가 천 년간 지속된다. 천년왕국 말기에 짧은 배교의 시기가 있고 선과 악의 세력 간의 극심한 싸움의 시기를 거쳐서 예수가 재림한다. 부활한 모든 이에 대한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통해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고 불 신자는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둘째 사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핫지(Chares Hodge,1797-1878), 위필드(Banjamin B. Warfield,1851-1921), 스트롱(A .H. Strong), 켐벨(Joseph Cambell) 등이 동조한 설인데 찰스 핫지가 활동하던 19세기처럼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현실적으로도 인류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지는 낙관주의가 주도 하던 세대에 인정받았던 이론이다. 이보다 더한 낙관주의도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은 없고 인간 이성이 끝 없이 개발되어 과학과 문화와 도덕이 최고 절정에 이르면 인간에 의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일을 신자가 믿음으로 주도하면 된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를 단순히 인간 스승으로 보기에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는 아예 무시한다. 이를 자유주의적 후 천년설(Liberalistic post-millenial view)이라고 한다.

2. 무 천년설

천년왕국이 지상에 따로 이뤄지는 일이 없다. 예수님 초림 이후에 재림 때까지가 실질적인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 보좌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지금도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거룩한 통치를 이루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물론 역사의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성도를 핍박하는 환난기가 있을 것이지만 성도는 결국 그 마지막 전쟁을 승리하고 이스라엘도 회복된다.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을 동일하거나, 동시대의 동류의 전쟁으로 본다. 그 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부활한 모든 자에 대한 백보좌 최후 심판은 동일하게 시행된다. 당연히 그 전이나 중도에 성도의 휴거나 교회가 공중에서 대기하는 일은 없다고 해석한다. 한마디로 역사의 말기에 성도가 큰 핍박과 전쟁을 거치게 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성도와 이미 죽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영원한 심판도 이뤄진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무 천년설은 사실상 변형된 후 천년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354-430),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 벌콥(Louis Berkhof,1873-1957), 바빙크(Herman Bavinck,1854-1921) 같은 신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3. 역사적 전 천년설

신약시대 말기에 비교적 온난한 환난기인 3년 반과 극심한 환난기인 3년 반을 합한 7년의 환난시대에 교회도 동참하게 된다.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후에 예수가 재림하면 성도의 육체적 부활이 일어난다. 예루살렘이 재건되어 유대인의 구원이 일어나며, 이 땅에 의와 평화가 충만해 지며 사단은 천년 동안 감금 된다. 그 후 잠시 놓여서 마지막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여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영영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 성도는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기어진다. 이를 주장한 대표적 신학자로는 벵겔(Bengel Johann Albrecht,1687-1752), 랑게(Jonhann P. Lange), 알포드(Henry Alford,1810-1871), 앤드류스(Andrews), 래드(George E. Ladd,1911-1982) 등을 들 수 있다.

4. 세대주의 전 천년설

공중영접과 휴거를 강조한다. 우선 신약시대 말기에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면 교회는 7년 환난기를 당하지 않도록 공중 들림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공중에서 대기한다. 그동안 지상에선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적그리스도가 패하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회복된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지상으로 강림하여서 천년왕국을 이루다가, 마지막 때에 다시 풀린 사단은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완전한 패배를 당하고 이후 백보좌의 마지막 심판이 있게 된다. 그 후 불신자와 성도가 둘째 사망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뉨은 동일하다. 다비(John Nelson Darby,1800-1882), 불링거(E. W. Bullinger,1837-1913), 스코필드(Cyrus I. Scofield,1843-1921), 그래이(James M. Gray), 블랙스톤(William E. Blackstone), 라일리(Charles C. Ryrie,1953-1981)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설이다.

 

2) 세대주의는 역사의 시대를 7가지로 구분하여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 르친다. 세대주의 신학은 인류역사를 7 세대로 구분하는데 그 일곱 세대란 다음과 같다. “1.무흠시대(Innocence)낙원세대:아담과 하와의 창조에서 타락까지;선악과계명으로 구원 얻음. 2.양심세대(Conscience) 타락에서 홍수 때까지:양심의 선악지식이 사람의 지표가 됨. 3.인간통치세대(Human Government) 홍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심까지:니므릇이 세상을 다스린 이후에 정부의 통치에 잘 순종함으로 구원 얻음. 4.약속세대(Promise)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기까지: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심:땅과 자손의 약속, 약속에 굳게 매임으로 구원 얻음. 5. 율법세대(Law) 시내산에서 율법 주심부터 그리스도의 공생애까지:율법을 잘 지킴으로 구원 얻음. 6. 은혜세대(Grace) 그리스도의 공생애 끝부터서 재림까지:교회시대는 은혜로만 산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결정함. 7. 왕국세대(Kingdom) 그리스도의 재림부터 지상 천년왕국 기간:산상수훈으로 삶. 7세대와 일곱 번 시험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시대마다 실패하셔서 새 세대에는 새로운 시험과 구원 원리를 세우셨다는 주장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근본에서 허는 가정이고 억설이다.”(서철원, 『서철원박사교의신학전집Ⅶ』, 「종말론」, 서울:쿰란출판사, 2018.4.30. pp.250-251.)

 

3) 상기 글은 정성욱 박사가 그의 저서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2016.3.7.) 출판 후 한 매체와 역사적 전 천년설과 개혁주의에 관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 보안한 것이다(“이제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은 가라”. 김은홍, 2016.8.24. http://m.ctkorea.net).

 

4) 세대주의자라고 다 같은 세대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다비(John Nelson Darby,1800-1882)로 대표되는 고전적 세대주의(Classical Dispensationalism), 왈부우드(John F. Walvoord,1910-2002)를 중심으로 한 개정 세대주의(Revised ispensationalism), 블레이싱(Craig A. Blaising,1949-)과 박(Darrel L. Bock,1954-)을 선두로 하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로 변모하고 있다. 점진적 세대주의는 역사적 전 천년설과 거의 동의하다. 그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술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착오가 있다(저자 註).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파루시아글로벌미니스트리센터 사이트 세대주의 종말론 연구를 참조하라(https://blo g.naver.com/bcc4671/221222262383.).

 

5) 상기 글은 정성욱 박사가 그의 저서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2016.3.7.) 출판 후 한 매체와 역사적 전 천년설과 개혁주의에 관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 보안한 것이다(“이제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은 가라”. 김은홍, 2016.8.24. http://m.ctkorea.net).

 

6) Ibid.

 

7) 신약 서신서 중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은 종말시대인 7년환난 가운데 유대인 전도자 144000이 주 수신자로 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이고, 이방인 교회에는 로마서 등 바울 서신만을 주셨다고 주장하는 단체가 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교리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신약을 믿고 깨닫고 이해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그들은 주 재림을 목도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는 구원, 즉 복음을 알지 못한다(참고/12:10,14:1-4;20:21-24;11:25;살후2:1-4;1:7,11:2). 구약도 복음이다. 그러나 구약은 신약으로 해석할 때 복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신약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신약 중 유대인을 위해 주신 서신서가 있다는 논증은 성경의 증언이라 할 수 없다. 세대주의의 해석 오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8) 대표적인 것이 천년왕국과 함께 칠십이레이다. 천년왕국의 차이점은 본 단락에서 언급하였다. 칠십이레에서는 마지막 한 이레가 육십 구 이레 후 장차라는 기간이 지난 후 적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시작된다고 보는 견해는 같다. 그러나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이 때 교회가 휴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는 이 마지막 한 이레를 교회가 통과해야 할 기간이고, 이때 있을 사건들에 대해 교회가 준비하도록 주신 말씀이 요한계시록이라고 믿는다. 같은 용어가 등장한다고 한 잣대로 비판하지 말고, 전체를 파악한 후 판단하기를 당부한다. 자세한 연구는 본고 칠십이레를 보도록 하라.

 

9)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 5. 2. p.7.

 

10) “한국교회와 세대주의에 대한 단상”, 이필찬, 2016.3.31, http://www.newsnnet.com

 

11)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필찬, 2006.8.29. 출처:http://blog.naver.com=110008097941.새 예루살렘’(‘새 하늘과 새 땅’)이 천국인가? 교회인가에 대한 연구는 이재현, 「이어쓰는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도서출판 헤이스, 2018.8.1. pp.203-208을 참조하라.

 

12) 민병석, 『개혁주의 전 천년설』, 도서출판 신생, 2016. 9. 2. pp.16-17.

 

13) Ibid.

 

14) John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New York:Macmillan,1923), John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New Edition(Grand Rapids:Eerdmans,2009), 『기독교와 자유주의』, 황영철역, 도서 출판 복있는 사람, 2016.1.27, p88. 재인용.

 

15) 김성주목사(언약교회),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http://blog.daum.net/7gnak/15718380.

 

16) 장두만박사(강서침례교회,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교수),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목회와 신학> 19952월호(http://blog.daum.net/hosanna7000/15577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