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종말 시계視界(1)
절대적 성경과 시대적 징조
이재현목사
서 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는 오늘까지 지구촌 220개국에서 발생했고, 확진자가 전 세계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7억 6백만 명에 달하며, 사망자는 7백만 명으로 웬만한 국가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다. 또한 엄청난 경제의 손실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셨다(눅21:11). 종말의 징조임을 예언하신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안전지대가 없었다. 이 또한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한 재앙의 전조임을 주님이 경종했다(눅21:35).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눅21:36).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한국교회가 경각하고 있는가? 한국교회 중 많은 교회가 방역을 위해 공적 예배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고 있다지만, 내용적으로 예배 중단이라는 지적을 받아도 변명할 수 없다. 이럴 때 일수록 정부와 국민을 위해 교회가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환난은 더할 것이다. 교회가 원인이 아닌데 교회가 문제인 것처럼 몰고 갈 것이다. 교회가 ‘타깃’Target이 될 것이다. 지난 3년 간 목도한 사실이다. 그러면 그때마다 성도들은 공적예배를 중단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되는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앞에 고심하게 된다.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 전염병 등 대재앙 ‘이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라고 하셨다(눅21:10-12). 이 말씀 그대로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예배의 위협을 받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예견했다. 선지자여서가 아니라 성경을 통찰하여 증언한 것이다. 그 기조에서 전하고 싶다. 범유행 감염병은 종말시대인 7년 환난에 당할 환난을 미리 경험하게 하면서, 한국 교회에 기회를 주신 것으로 믿는다. 한국 교회가 지상명령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재림의 신앙으로 주 오심을 고대하며, 그의 통치를 바라야 한다. 세상에 어떤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소중한 것은 그가 다시 오심을 믿기 때문이다. 인류가 당하는 모든 혼란은 예수님이 오셔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주 재림을 통해 확인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과 헌신과 예배에 저해되거나, 퇴보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자성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한국교회에서 종말의 계시를 전하지 않으면, 이러한 격동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본고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러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심구다.
본 론
1. 바울신학과 요한신학 - 교회론과 종말론
신약에서 바울이 기록한 말씀을 바울서신으로 분류한다. 이 성경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론에 정립에 긴요하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바울과 전도여행에서 초대교회의 생성, 흥왕, 부흥, 기적, 역사를 전해 듣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바울서신과 깊은 관계가 있고 해석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기에 사도행전 또한 교회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와 같이 바울이 기술한 서신과 증언은 현재 교회를 어떻게 섬기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주석과 설교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서신에 비해 요한서신은 심구深究와 빈도頻度에서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물론 신학자와 목회자들에 성향과 선호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또한 요한신학이라는 학문 장르에서 주主는 요한복음이고, 요한 1, 2, 3서는 상호의 관계성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동일한 저자임에도 요한계시록은 요한신학 범주 안에서 연구를 찾기가 희소하다. 이러한 데에는 예언서라는 특성상, 요한의 복음서, 서신서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신학은 물론 요한신학에서도, 요한계시록은 다른 성격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 한 것은 바울서신 라인Line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적용 시기를 초대교회부터 전 교회시대와 주 재림 때까지 보고 있다. 즉 그 기간 안에 신앙생활의 교훈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바울 서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신학의 서신서와 요한신학의 예언서와 구별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바른 분별을 요청한다. 성경을 구분할 때는 서신서와 예언서로 구분하는데 주석의 성격은 같다. 물론 요한계시록에서 신앙생활의 교훈을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바울서신으로 통해서도 충분한 교회시대의 교회론을 요한을 통해 계시록에서 중첩重疊하게 하셨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학부 1학년에서 수강하는 과목가운데 하나가 신약개론이다. 신약성경은 크게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나뉜다. 예언서는 당연히 요한계시록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주해하는 데는 서신서와 동일한 관점을 가진다. 과연 이것이 바른 자세인가?
2천 여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마지막 시대이다. 그렇기에 교회시대는 곧 종말시대와 동의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종말시대를 주 재림 전 후 시점으로 하고, 논지를 이어가고자 한다. 필자는 바울신학의 서신서는 교회시대 교회론을, 요한신학3)의 예언서는 종말시대 종말론으로 주신 말씀으로 본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올바른 믿음을 보존하고 헌신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바울신학이고, 종말시대 성도들이 진리를 사수하고 재림을 맞이하게 위해 주신 말씀을 요한신학인 것이다.
바울 서신으로 바울 신학의 권위자인 이한수 박사는 무천년주의자였다. 그런데 최근 역사적 전천년주의로 선회했다. 그는 그 계기를 설명하면서 “본인은 무천년설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천년 통치에 대한 명시적 교훈을 하지 않는 바울의 편지들을 전공한 학자로서 무천년설이 신약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 서신과 관계없이 계시록 자체의 이야기 흐름에 주목하면서, 적어도 17-21장의 논지 흐름이 연대기적 순서를 따라 점진적으로 전개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되면서 기존에 채택한 무 천년설을 접어두고 역사적 전천년설을 굳히게 되었다.”고 했다.
바울 신학의 대가로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논지에는 바울 신학을 통해서는 종말론 정립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통해 교회시대의 교회론과 종말시대의 종말론을 구분하지 못하면, 종말계시는 영원한 미제로 남거나,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종말 시점에 있을 예언을 교회 전시대를 위한 서신 위치에 배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만약 종말시대가 없고, 오늘날 신앙생활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신약성경으로만 구분할 때, 복음서, 역사서 그리고 바울과 공동 서신서로 충분하다. 어디 부족함이 있는가?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예언서로 분류한다. 범주는 나누면서 내용은 서신서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시대의 끝 종말시대에 성도들을 위해 주신 책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는 예언서를 서신서와 구약 심지어는 문헌과 전설들까지, 연결하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재림의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통해 교회시대의 교회론과 종말시대의 종말론을 구분하여 주해하지 못하면, 결정적으로 종말의 시대가 감춰지게 된다. 이 기간은 예수님 재림 전 7년 환난이다. 한국교회에서 7년 환난은 유물처럼 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상기 주제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교회시대 상징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교회시대 2천년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들 눈앞에 2천 년 전 오셨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교회시대 구원받은 이방인은 종말시대 7년이 ‘베일’veil이다.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이다.
한국교회에서는 7년 환난Seven Year Tribulation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이들이 많다. 종말의 7년을 환난 기간으로 인정하면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로 보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7년 환난을 세대주의 산물로 보는 것을 넘어 시한부 종말론자라고 속단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런가? 7년 환난의 경우 이 낱말은 결코 세대주의 신학의 창작품이 아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적 예언으로 분명히 성경에 명기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용어는 분명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7년이라는 기간은 다니엘 9장 27절에 ‘한 이레’로 명시되고 있다. 이 기간을 요한계시록에는 절반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다. 전 3년 반은 ‘천이백육십일’(계11:3)로, 후 3년 반은 ‘마흔 두 달’(계11:2;13:5), ‘천이백육십일’(계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계12:14)로 나타나 있다. 다니엘 9장 27절에는 ‘이레의 절반’이라는 분기점을 말씀하며, 7장 25절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후 3년 반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참고/마24:15).
그러면 7년 환난의 ‘환난’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찾은 것인가? 마태복음 24장 3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이다. 8절에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다. 이어 9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라고 하심으로 환난의 시작이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것이다. 환난 중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15절의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다니엘 9장 27절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라는 구절과 비교해 볼 때, 환난의 중간에 있을 사건도 계시해 주시고 있다. 29절에는 ‘환난 후에’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통하여 대환난의 시작과 중간 끝에 있을 일을 선명하게 알도록 하셨다. 21절에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큰 환난’ 즉 대환난Great Tribulation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7년 환난은 성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참고/막13:1-37;눅21:5-38).
성경의 증거가 이렇게 명백함에도, 종말의 시대 7년을 부정하려고 하는가? 종말시대의 신앙을 경각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교회론 연구에서, 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종말론 연구에 대한 한국교회의 각성이 요구된다.
2. 개혁주의와 세대주의 - 대체주의와 유대주의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구원이 이방인으로 옮겨졌다.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이 대체신학代替神學,Replacement Theology,(대체사상,Replacement Theory)이다. 이것은 로마가톨릭에서 태동되고 정립된 것으로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이에 동조하는 혹은 은연중 내재되어 있는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가 상당수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을 논하면 시니컬Cynical한 반응을 보인다. 교회시대 구원만을 강조한다.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그로써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고 있음을 상기해야한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구원을 받을 때, 구원이 완성되고, 구속사의 종결, 즉 종말(재림)이 온다는 명확한 구속사 결론도, 그 날이 가까이 옴에 따른 경각과 대비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종말계시를 닫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법정에서, 빌라도는 무죄함을 알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다(마27:24). 이때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고 하였다(마27:25). 그로인해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구원은 종료되었다는 것이 대체신학의 요지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4장 27절에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를 거슬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죽으심을 뜻한다. 그 자리에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합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위한 죽으심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만 구원이 임하고, 유대인의 구원은 주님의 초림 이후. 종료되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로마서 3장 3절에 ‘(유대인)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고 하셨다. 유대인들이 지금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느냐’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거두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11장 1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선민으로 택했고, 말씀을 맡겼으며, 혈통에서 주님을 보내셨고, 이방에 전도를 시작하게 하셨다(창12:1;행10:44,13;3,48;롬1:16,3:2-3,9:5).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박은 것도 유대인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에 대한 구원이 상실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우둔하게 된 것이라’고 하셨다(롬11:25). 그러나 교회시대가 끝이 있다(롬11:22). 그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다(롬11:26). ‘하나님’ 유대인을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기 때문이다(롬11:28).
유대인 구원을 불인정하는 일부 개혁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세대주의는 유대인에게 지나친 특권을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셨음으로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이 중심이라는 사상이다. 이방인을 위한 교회시대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이루어야 할 왕국시대가 연기된 것뿐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섭리사관 가운데 교회시대를 도말塗抹해 버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연기된 왕국은 재림이후 완성되며, 이 나라 역시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메시아왕국(천년왕국)이라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이 개혁주의자들 가운데는 구원에서 의도적으로 유대인을 제외시키려 한다. 그들은 성경과 구주를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도구요 통로일 뿐 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회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세대주의는 유대인들을 하나님 다음의 자리에 놓고, 이방인을 그 아래 종속의 관계처럼 취급하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존재를 놓고 개혁주의는 배격, 세대주의는 특권이라는 절충할 수 없는 괴리를 갖고 있다. 이것을 극복해야 바른 종말론을 정립할 수 있다. 일부 개혁주의 자들은 사실상 대체주의Supersessionism이 함정에 빠져있고, 고전적 세대주의자들은 유대주의Judeaism에 심취되어 있다.
유대인 전도 사역자인 폴 모리스Paul Morris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에 관계에 대하여 명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유대인을 통해 받은 모든 것으로 인해 유대 민족에게 빚을 졌다. 그러나 그런 빚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해서는 분별력 있게 그리고 성서적으로 행동해야지, 감정이나 불확실한 영적 추론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오만함을 땅에 묻고 자족함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들이 자주 멸시받고 있는 이 백성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받은 긍휼의 결과로 긍휼을 받는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복음에 불순종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긍휼을 얻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여전히 갖고 계신 (구원) 계획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유대인에 대한 배격도 특권도 없다. 단, 지금은 이방인이 구원 받는 교회시대요. 교회시대가 마감되는 날 유대인의 구원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유대인은 배교시대에서 구원시대로 이방인은 교회시대에서 배교시대로 역전된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았던 돌감람나무가 잘려지고, 잘려졌던 참감람나무 가지가 다시 참감람나무에 접붙힘을 받는 것이다(롬11:17-24). 이것이 종말의 시대에 있을 이스라엘 회복이다. 구원이 다른 것이 아니다. 시기가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봉함되어 있다(단12:4). 그러나 교회는 열려있다(계22:10). 그러므로 우리가 종말계시를 증거하지 않으면, 교회시대에 있으나 유대인과 같은 자들이다. 이들을 ‘벙어리 개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사56:10). 시대의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요, 그가 주인이 올 때(재림) 복 있다고 하셨다(마24: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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