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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모습 다른 선택"(막14:51-52) 이재현목사(25.06.08)

이재현목사 2025. 6. 16. 10:34

같은 모습 다른 선택

 

 

하나님말씀 : 마가복음 14:51-52 2025.06.08. 主日禮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벗은 몸으로 도망한 사람을 마가로 봅니다(14:52). 당시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별도로 기록된 한 청년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가,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시각이 밤이었고, 잠을 자려고 준비 중에, 경황이 없던 터라 베 홑이불을 두른 체, 달려왔을 것으로 보입니다(14:50-52.참고/18:3).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뒤 늦게라도 뒤 따르지 않겠습니까? 마가는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칠십 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부끄러웠던 과거,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도망쳤던 자신의 이름 대신 한 청년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쩌면 마가는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말을 듣고 분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을 결박하고 끌고 가던 무리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순간 도망 치게 되었는데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 급하였으면, 몸에 두른 베 홑이불을 잡은 무리의 손길을 뿌리치며, 옷이 벗겨지면서까지, 그 자리를 떠났겠습니까? 다른 복음서에만 없고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기록은 그저 한 에피소드Episode로만 보면 되는 것일까요? 성경의 기록은 단지 재미있는 사건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증언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본문을 관찰하면 예수님과 마가는 비슷한 입장에 있지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 다음 <같은 모습 다른 선택(1) “벗기심”>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마가가 황급하게 벗은 몸을 두른 베 홑이불의 재료는 아마’亞麻, ‘리넨’linen Flax입니다(참고/41:42;38:16).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자신의 무덤에 안장할 때, 예수님 몸에 입혀드린 옷이 아마로 만들 세마포입니다(27:59). 이렇게 예수님과 마가는 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달랐습니다.

마가는 벗은 몸으로 수치도 생각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가벗겨진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같이 한 영혼을 위해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자 수치를 생각지 않고 도피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셨습니다(참고/22:18). 마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가벗겨지심을 우리를 위함이지만, 마가의 벗은 몸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요. 이것이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발가벗겨지셨지만, 마가는 살기 위해 벗은 몸이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신 분들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인생 가운데 어떤 어려운 순간에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특정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한 사람이 당장 해결해주지 않으면, 뒤돌아서기도 하지만, 너무도 힘든 지경에 있으면, 부탁을 하고 사정을 하고 애원을 합니다. “내 체면이 어디 있어라고 수치까지 버려버리면서요.

그러면 우리를 위해 수치를 버리신 주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치를 겪은 적이 있는가? 한 번쯤 고민이라고 해 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주님이 우리 한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듯이,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당하는 수치를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승합차로 차 운행 많이 했습니다.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예배 시간 이전에 와야 하기에 일찍 준비해야고, 집 근처와서는 나오시라고 전화드려야 하고, 힘든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때도 많습니다. 늦으면 일찍오라, 빨리오면 서두른다. 운전을 빨리하면 급하고, 천천히 하면 굼벵이 같이 느려 터진다. 이렇게 신경 쓰이고 번거로운데도 왜! 차 운행을 하고 카풀을 합니까? 한 분이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때로는 좋은 일 하면서도 핀잔을 받아도, 수치를 개의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하기가 얼마나 어렸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간과 쓸개도 다 빼야 할 때도 잊지 않습니까? 이런 섬김 하나 하나가 바로 벗기심을 당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신, 스스로 수치를 받으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 옷이 벗겨지면서까지, 도피했던 수치를 당했던 마가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벌거벗겨지신 스스로 수치를 당하신 주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2. 다음 <같은 모습 다른 선택(2) “잡히심”>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로 나왔느냐’, “내가 강도냐면서 호통을 치시면서, 스스로 잡히시며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14:48-49).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던 무리에게 잡히매,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잡히셨지만, 마가는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잡히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잡힐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청아비전교회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 잡힌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교회 가운데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 우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똑같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도, 기쁨으로 자원하여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분이 있는지 몰라요. 지금 예배드리는 분 가운데는 그런 분은 한 분도 없는 줄 믿습니다. 교회에 억지로 붙잡혀서 오게 되었건, 자원해서 오게 되었건, “그래도 교회를 섬기다 보면 나도 덕 보는 것이 있겠지하는 인간적인 기대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기대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을 때, 이 교회에서 신앙을 계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초대교회 때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고, 헤아릴 수 없는 남녀의 큰 무리주께 나왔으며, 성령 충만한 역사 병든자들이 고침 받고 귀신들려 괴로움을 받던 자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5:12-16).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물과 소유한 집과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드리고, 교회는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유무상통하였습니다(2:45,4:32). 이렇게 흠 없이 교회가 성장해 나갔는데 전혀 생각지 않은 일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회에서 과부 등 소외 계층을 돕는데, 원래 예루살렘 토박이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해외에서 이주한 헬라파 유대인들보다 우대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6:1). 이에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집사로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 등의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본연의 사역인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습니다.’(6:3-5).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6:7). 무엇 하나 흠 없이 부흥과 역사와 은혜가 가득한 초대교회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때 사도는 사도일 집사는 집사의 일을 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는 목사의 일을 하는 것이고, 성도면 성도, 제직이면 제직, 맡은 직분자이면 직분을 감당할 때, 문제는 없습니다.

이를 간접적으로 적용해서 본다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나를 잡아 맨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의를 가질 때, 우리는 다른 생각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가를 성령님을 의지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분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배당 자리만 체운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52주가 있는데요. 한 해 주일성수 아무런 말없이 해주는 성도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각 각의 받은 사명과 은사와 재능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교회에 매이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잡히기 싫어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의 마가를 통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잡히시게 하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잡을 때, 잡힌바 되어야지, 벗어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다음 <같은 모습 다른 선택(3) “버리심”>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마가도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살기 위해 버린 것이고, 주님은 죽기 위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단호합니다. 확고합니다. 우리에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저서 내려놓음을 일어보지 않았더라고, 한번 쯤 모두 들어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분은 서울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미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수나 연구원 등 안락한 미래의 보장과 인간의 기대를 전부 내려놓고, 가족을 모두 동반한 체, 가난한 나라인 몽골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미국 한인교회의 파송을 받아 몽골의 한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대학의 강의도 맡았지만, 한국 유수의 대학 세계 명문 대학에서 교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2005년부터는 전 세계 어디든 마다 않고, 강사로 섬기면서, ‘내려놓음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강의하면서, 시종일관 인생의 모든 편안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하늘로부터 채워지는 평안의 진정한 특권을 깨닫고 누릴 것을 말하고, “내려놓음의 결심과 실행만이 진정한 행복을 택하는 크리스천의 덕목인 것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대명사처럼 쓰여지는 내려놓음은 주님의 버리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 그 영광의 옷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버리기 위해 선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입으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아직도 입으려고 하는 것 즉 얻으려고 하는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버릴 수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릴까에 앞서,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얻을 까 아직도 입으려는 그 생각을 없앨 수 있다면, 오늘 말씀 통해서 바른 가르침을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설교 중에 혹은 직접 당사자를 통해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헌신에 대해 간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얻은 것은 무엇인데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음에도, 그로 인해 받은 복이 드러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한 것은, 주님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헌신을 했어도 자기에게 외형적인 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들의 버리심의 헌신으로 예수 믿지 않은 자가 구주를 영접하고, 잃었던 신앙이 회복되었다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신 하늘의 영광 보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천하지 천한 인간의 몸, 종의 옷을 입으신 주님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린 헌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4. 다음 글을 읽고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우리가 얻는 것이 없는데도, 예수님의 벗기심’, ‘잡히심’, ‘버리심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주님의 보혈이 지우개가 되어 지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가, 오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은, 마가처럼 예수를 따르다가 도망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따라 승리하는 제자,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반드시 살아계신 역사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①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죽으시고자, 십자가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못하고 벗겨 지졌습니다. 마가는 살기 위해 베 홑이불을 잡는 자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벗겨졌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수치를 당하신 주님과 같이 한 영혼을 위한 일이라면, 수치마저 영광으로 받들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잡히게 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이 시간 동안 교회를 섬겼음에도,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해 회의가 들 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과 같이 잡히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하옵소서.

③ 예수님은 하늘 영광 보좌를 죽으시기 위해 버렸습니다. 마가는 베 홑이 불을 살기 위해 버렸습니다. 주님을 따른 분들 가운데 외형적인 복이 적더라도, 그분들이 버림을 통해 믿지 않는 자가,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이 회복되었다면, 고귀한 일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영광의 옷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라, 버림으로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