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얻었노라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누가복음 15:11-24 2025.10.19. 主日禮拜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11-24)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10월은 “자람의 달”입니다.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우리가 전도한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유대 나라 어느 마을의 한 부자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다양합니다. 저는 그중에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때, 어려운 이야기를 가지고 머리를 복잡하게 안 하셨어요. 쉬운 이야기로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쉽고 마음이 열리는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 그대로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대 나라 어느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이미 결혼을 하였고 작은 아들도 이미 장성은 하였지만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두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랑스럽고 마음이 그렇게 흡족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착하고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누구보다도 순종을 잘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고 해도 내 아들만은 믿을 수 있다. 내 아들은 믿을 수 있어’ 라고 부자는 자문자답하며 자주 자주 속삭이고는 흡족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다고요. 어느 날 아버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착하게 보이던 둘째 아들이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아버지 재산 좀 나눠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세상 떠날 때 형하고 저에게 유산으로 주기로 한 것 있지 않습니까? 그거 좀 미리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재산을 배분해 주는 관례가 있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세 몫을 주고 차자에게는 한 몫을 줍니다. 그러니 큰 부자의 자녀들은 그 유산이 대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받는 것인데 지금 당장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아버지가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습니까? “빨리 죽어라 너 이때까지 안 죽고 있냐!” 는 말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몹시 마음이 상해서요. 며칠 밤을 설쳐가며 고심을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에게 약하지 않습니까? 자식이기는 부모 없지 않습니까? 앞뒤 없이 생각 없이 아버지 억장 무너지는 줄 모르고 와서 자꾸 성가시게 하니 어느 날 아버지가 큰 마음을 먹고는 재산 1/3을 둘째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재산을 받아든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며칠을 왔다 갔다 야단법석을 떨더니 ‘cash’ 현금으로 다 바꿔가지고 밤새 짐을 다 꾸려 보따리를 싸고는 다음날 새벽 일찍이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더니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는 짊을 짊어지고 먼 나라로 떠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부디 몸 건강하거라” 한마디 하고는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후 할 수 있는 한 멀리 멀리 갔습니다. 떠나서 아버지 잊어버리고 아버지 간섭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 오늘날로 말하면 이민을 간 것입니다. 태평양 건너서 멀리 떠나 버렸어요. 그리고는 돈 있겠다. 그 돈 다 어디에서 생겼어요. 땀 흘리지 않고 손에 든 돈 아닙니까? 누구든지 수고 않고 가진 것은 헤프게 쓰게 되어 있잖아요. 가서는 큰 집 사고, 고급 승용차 사서 밤마다 여자 갈아가면서 신나게 즐기고 살았어요. 예수님은 이 둘째 아들을 생활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허랑방탕’虛浪放蕩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요사이 잘 쓰는 말이 아닙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허랑방탕했다 하면 아마 무슨 생활을 이야기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떠나서 제 마음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이야기를 멈추고 중요한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둘째 아들은 우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이 둘을 비유로 무한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 없는 호래자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디었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어?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하지 마” ‘진화론’進化論에서 보면 원숭이가 진화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 그리고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예 부정해 버리는 분들이 계시죠.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진화론도 이제 80-90년 그 정도 속았으면 되었어요. 미국 ‘켄터기주’ 같은 곳에서는 법으로 진화론을 교육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맨 날 가리켜도 거짓말이거든요 우리나라 일부 대학들에서도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입각한 자연과학이 과목이 채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 진화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원숭이에서 변화되었나요? 그렇다면 지금도 산에서 원숭이가 유인원이 인간이 되어서 해마다 수백 명씩 내려오거나, 그도 아니면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그런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여러분 그런 사람을 보셨어요? 우리가 무슨 아메바의 후손입니까? 뭐 흑인은 아프리카 열대에서 살기 때문에 피부가 까맣고, 서구 사람들은 햇빛이 적기 때문에 하얗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4계절이 있어서 황인종이라고요? 여러분 아프리카에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노예로 잡혀간 흑인들이 간지가 이백년이 넘었습니다. 화란에서 남아공으로 내려간 백인들도 이미 100여년이 훨씬 넘었어요. 여러분 그런데 그들 피부 색깔이 변하는 것 보았습니까? 변한 것이 있다면 흑인이 백인하고 결혼에서 자녀들이 변한 것이지 않습니까? 뭐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고기와 지하의 캄캄한 동굴 속에 있는 곤충은 눈이 퇴화되고 색깔이 하얗게 변화된 것이라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태초에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살 곳에 맡게 만드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슨 사람이 진화 됐습니까? 우리는 원숭이, 아마베 후손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백성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존재 없이 무작정 자연스럽게 우연히 제멋대로 살도록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 같이 하나님 떠나 멋대로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둘째 아들이 아무리 멀리 떠나서 아버지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다고 아버지가 안계시나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어요.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 받는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신론이요 만약 무신론을 믿는다면 그 순간 나도 존재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면 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있다는 것 인정하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을 낳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꼭 인정하세요. 聖. 어거스틴Augustine,354-430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구가 있습니다. 아마 서양사를 배운 분들은 기억이 조금 나실거에요.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작은 신상, 우상이죠. 그것을 디밀더니 “이것이 나의 신이요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 있소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 하더랍니다. 이에 어거스틴이 대답하기를 “나의 신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없습니까? 천만에요 내가 단지 그 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문제지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사64:8).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주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성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몹시 귀찮게 생각합니다.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간섭 받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서 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제 머리가 커진 둘째 아들이 이제는 아버지 떠나서 혼자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오늘날 인간들이 하나님이 계시지만 내 마음대로 살게 좀 내버려두라 도대체 하나님 이야기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고 날 좀 내버려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간섭이냐 그런 것이지요. 할 수 있으면 나 혼자 멋대로 살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 오늘 오신 분들 중에는 어른들도 많이 계신데요. 여러분 자식들 다 키워 보셨잖아요.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님들에게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최고입니다. 특히 여자 애들이 그렇죠! “나는 시집 안갈 거야 엄마하고 아빠하고 평생 살거야” 그렇죠! 저도 딸이 둘 있는데요. 이 애들이 어렸을 때 저한데 그럽니다. “나는 시집 안가고 아빠하고 엄마하고 살 거야” 그런데 둘째 딸이 4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녔는데 유치원에 며칠 갖다 오더니 고민이 생겼어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호성’이라고 하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자기하고 안 놀아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유치원도 이 정도인데 초등하교 중학교 가보세요 엄마 아빠가 어디 있어요. 여러분도 다 그렇게 지냈죠! 고등학교 대학생만 되 보세요. 이제는 할 수 있는 한 엄마 아빠를 되도록이면 멀리 떠나서 지내고 싶어 합니다.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심리이고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경외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간섭 받지 않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에요 여러분 결국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사람이 자기 멋대로 욕심으로 살려고하니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고 하였습니다(신32:15). “…네가(하나님이 하시는 말이에요)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니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잘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에요 그 다음에 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고 하였습니다(롬1:21). “하나님을 알되(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는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는 다는 말이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8.참고/시36:1).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까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예수님은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허랑방탕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급스러운 용어로 표현 하면 ‘죄’입니다. “죄는 무슨 죄 내가 죄졌냐!” 반문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이 자리에는 착하고 선하게 정말 법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아무리 착하게 살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선하게 살아도, 성공을 거두고 떵떵거린다고 해도,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찾아뵙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효자 아버지 앞에는 죄인이요 죄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멀리 떠나서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내 멋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요 죄인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이야기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우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탕진하다
재산을 허비하고 고향 아버지를 생각하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쓰다보면 언젠가는 밑바닥이 동이 나지 않습니까? 벌지 않고 쓰기만 하니 모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돈 없는 신세가 되니 어떻습니까? 예전에 돈 펑펑 쓸데는 친구도 많았는데 이제는 한둘씩 다 떠나가 버립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골목으로 돌아가 피해버립니다. 거기에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자금 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IMF가 터져 알거지된 것과 똑같습니다. 나중에는 하루 먹을 끼니조차 없게 되자, 우리말로 하면 3D 업종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바로 남의 집 돼지를 치는 일입니다. 중동에는 산에다가 돼지를 풀어 놓고 키웠습니다. 하루 종일 돼지들과 씨름하면서, 그 역겨운 냄새에 다 떨어져 기은 신 안에로 돼지 오물이 들어오고 수입이나 변변한가요. 성경에 보면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것마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 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고달픈 몸을 차디찬 땅바닥에 의지한 채로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은하수가 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 거리며 장관을 이룹니다. 너무나도 자기의 신세가 처량해집니다. 그때 문득 둥근 달로 환하게 비취어진 들녘을 바라보며 그 너머 떠나온 고향이 불연 듯 생각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행복하게 보내던 어린 시절이 아지랑이 같이 가물가물 떠오르면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그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요.
그 광경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혼자 생각으로 말했다는 말이죠)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끈이 얼마나 많은가(집에는 일꾼 조차도 먹을 것이 넘친다는 말이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런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하고 스스로 신세 한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든 후 이제 아들은 결심을 합니다. “그래 내일 아침이면 이곳 생활을 다 청산하고 정말 염치 없지만, 고향을 향하여 아버지에게로 가야겠다.” 그리고는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는 날이 밝자 짐을 꾸립니다. 뭐 짐이랄 게 있나요. 고향에서 올 때는 큰돈을 가지고 왔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쓰잘데기 없는 자질 구례한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섭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신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둘째 아들은 우리라고 했는데 여러분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어떤 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한 평생을 자신만만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생각납니다. 아마 그때는 가장 순수한 자기 모습으로 돌아올 때일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왜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이 났습니까?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계시니까? 왜 아버지를 찾습니까?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을 살다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이에요. 여러분 본능을 속일 수 있습니까? 아들이기에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고상한 교양으로 지식으로 인격으로 문화 생활 골고루 영위하고 집에 고급스럽게 갖출 것, 다 갖추고 위선으로 가득 차서 교만으로 메이크업을 다 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다 벗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순수한 자기 자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자아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자아입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을 일컬어 우리는 ‘삶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위기 온 거예요. 그제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는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다양합니다.
제가 아는 돈을 좀 가진 분이 있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분입니다. 아마 제가 보기에는 죽을 때까지 다 써도 못쓸 정도로 재물을 갖고 있는 것 갔습니다. 그런데 보면 항상 구겨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뭐가 불만족스러운 얼굴이 가득하단 말이죠. 여러분 중에도 마음이 허전하고 인생이 피곤하고 재미가 없습니까? 꼭 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이듭니까? 뭐가 일이 꼬이고 안돼서만이 아니요 잘되는데도 그렇더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기입니다. 무슨 위기요 바로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위기입니다. 남편 잘해주겠다. 자식 잘 크겠다. 세상에 별로 부러워할 것 없는데도 이상하게 인생에 권태를 느끼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자기 내면의 약한 모습을 없애려고 친구들도 만나고, 여기저기도 놀러 다녀보기도 하고, 그래도 성이 안차서 좀 극성스럽게 쇼핑이다. Fitness다. 등산이다 꽃꽂이다 양재다 수영이다 해봐도, 다 그 때 뿐이거든요. 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다시 그대로 마음이 텅 비어버리고 맙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깁니까? 이것이 위기입니다. 위기! 하나님을 알고도 제 마음대로 살다보니 찾아오는 위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위기라고요? 바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위기입니다. 제가 드는 이러한 예들은 아주 점잖은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분은 벼랑에까지 몰려도 안돼서 땅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야 깨닫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혹은 중병으로 가족 중에 먼저 떠나게 되는 경우에 비로소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가 찾아 올 때 모든 인간은 그동안 자기 자신을 포장했던 위장의 꺼풀이 다 벗겨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하나님” 이라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까? 왜 찾습니까? 내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좀 극단적인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경험한 일을 하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에 한 개척교회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개척교회니까? 성도가 별로 없지요 내가 담당한 파트가 교육부서이다 보니 그때 어린이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막 조직할 때입니다.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한둘 만나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문제아들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었고 보살핌을 별로 받지를 못하다보니, 학교를 다니는등 마는등 학교에 갔다가도 기분 나쁘면 그냥 오고, 선생님한데 무슨 소리 한번 들으면 오고, 애들하고 싸움하다가 오고, 밤이면 술마시고 동네 이곳 저곳 도둑질하고 길에 세워든 오토바이 빳데리선 끊어서 타고 다니다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뭐 그런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교회에 오니 조용할 리가 없지요. 교회에서 담배 피우고 창문 넘어 들어와서, 라면 김치 다먹고 잠자고, 헌금 훔쳐가고 그래도 인내를 갖고 그 애들을 하나둘씩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 중 한 어머님이 자기 아이는 불량스러운 학생들이 다니는 교회에 보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불량스러워도 남들 자식만 불량스럽게 보이지 자기 아들은 그렇게 보지 않지 않습니까? 어머님이 그렇게 말하니 어떻게요 하는 수없이 보내주고, 교회 밖에서는 꾸준히 만남을 계속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의 어머니가 자기 자식뿐 아니라, 우리 교회 다니는 학생들 집으로 다 전화를 돌려서, 저 교회에 보내지 말라고 저 교회 이상한 전도사가 있는데 문제아들만 다닌다고 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한 학생에게 전해 듣고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제 별명이 학부모님들 사이에 뭐였냐면 “멸치데대가리”였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렇다고 대들고 싸울수가 있나요.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는 죄를 모르고 하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그분 생각에는 자기 자식은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의 탈선을 막으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 학생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자랑이었어요. 동연배 아이들보다 체격도 얼마나 큰지 몰라요 얼굴도 잘 생겼습니다. 더욱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저도 나중에 알았지만, 남편이 있기는 있는데 정식 남편이 아니고, 첩으로 살아서 남편이 그저 가끔 한번씩 들릴 정도입니다. 물론 그 아들은 전 남편의 소생이지요. 그러니 이 분에게는 오직 아들이에요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잠도 못잘 정도로 우리 애기 우리 아들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못 다니게 하고, 그 아들이 잘 지냈으면 좋으련만, 그만 더 나쁜 아이들을 사귀기 시작하더니, 담배를 배우고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큰 바가지에 소주를 따라서 들이키고, 학교에 매일 같이 결석하고, 이 친구 저 친구 집에서 뒹굴 뒹굴 하다가, 나중에는 본드를 마시고 부탄 가스를 마시는 일까지 서슴없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친구집에 모여서 가스를 마시다가 가스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가스 살돈이 없는거에요. 그러다가 친구 아버지 책상을 보니까. ‘SUN’이라 쓴 라이터 가스가 있는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비닐 봉지에 담어서 나누워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스는 일반 부탄 가스 보다 굉장히 독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나누워 마시다가, 그만 이 아이가 기도가 막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른들이라도 있었으면, 빨리 응급조치를 하고 119를 불렀을 터인데 아이들만 있으니 허둥대둥하다가, 그 아이 집으로 가 어머니를 불러왔는데 이미 아이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한병원 영안실에 안치 되었고 거기서 장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실신을 해서 쓰러지고 깨어났다가는 하는 말이 자기 아들 안 죽고 지금 집에 있으니 밥하러 가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충격이 크니까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자초지종과 그 아이의 신앙생활 이야기를 저와 담임목사님에게 전해들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의붓아버지죠 그렇다면 교회장으로 하여야 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례 절차를 교회 장으로 다 마친 후, 위로 예배를 드리러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제가 알지 못하고 그런 큰 죄를 지어 내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고요.” 그렇게 사랑하던 자식을 잃고 그 어머니가 찾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기 일주일 전 주일 아침 10시 반쯤 교회를 찾아왔어요. 무엇을 하고 왔는지, 얼굴은 초췌하고 머리는 모래 먼지로 뿌옇고 옷은 꾀죄죄하고요. 하는 말이 “전도사님 저 세례 받으면 안돼요” 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부활주일이었는데 엄마 몰래 교회에 와서는 세례를 받은 것이죠. 저는 그래서 그 아이가 천국에 갔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죽었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자신이 죽고 어머니를 하나님 찾게 만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왜! 찾는다고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는 비극인지 모르지만, 그나마 그 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하였다면, 이것은 인생에 얼마나 복된 위기인줄 모릅니다. 아마 그 보다 더한 일들을 이 중에는 겪은 분들도 계실지 몰라요.
위기가 실패가 아니라, 위기에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실패이다
세상을 아무리 80-90 잘살다가 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끝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위기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도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되었던 부름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떤 계기로든 인생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위기를 만나 아버지를 생각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오늘 예배에 오신 분들 가운데 그런 위기에 있는 분들도 계실 줄도 모릅니다. 남이 모르는 마음의 위기 말입니다. 모두가 다 20-30대에는 인생의 푸른 꿈을 품고 살아가지만, 누구에게나 뒤지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래서 예수 믿으세요. 하면 “예수 좋아 하네 내 주먹을 믿어” 그랬지만, 결혼해서 10, 20년 살다 보니, 인생의 경륜이 깊어 가면 깊어 갈수록 처음 마음과 같지 않는 인생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피곤해집니다. 이제 경쟁에도 지쳤어요. 이렇게 살다가 뭐하나 답이 없어요. 인생에 회의가 들어요. 마음속에 무언가 알지 못하는 위기가 느껴질 때 누군가 옆에서 잡았지요. “아 오늘 우리 교회에 갑시다. 점심 제가 살게요. 아주 좋은 자리가 준비되어있습니다. 한번 꼭 가보십시다.” 옛날 같으면 어림이나 있나요 펄쩍 뛰면서, “얘끼 여보쇼 당신이나 가쇼 볼일 없소” 할 터인데, “그래 그게 뭐하는 것인데요.” 하고, 마음이 왠지 열리고 부드럽게 되었죠! 그때 우리 성도들이 바짝 잡아 당겼을 거예요. 그래서 어슬렁어슬렁 에이 한번 가주자 하고 따라 왔다가, 이 예배까지 온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세요. 이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이 여러분에게 너무 너무나 복된 순간임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아들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아버지
다시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야! 길다 아니 여태껏 안 끝난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생각을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병원 가면 어떻게 해요. 의사 시키면 시키는 대로 누워라 하면 눕고, 벗으라 하면 벗고, 소변 받아와라 뭐 받아와라 하면, 시키는 대로 꼼짝없이 다하고, 어느 때는 몇 시간도 순서 기다리기가 태반 아닙니까? 그러데 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그 1시간 투자 안한다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한편 둘째 아들을 멀리 떠나보낸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 생각에 밤잠을 설치게 됩니다. 냐하면 자식에 관해서는 아버지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들의 성격이라든지 기질이라든지 습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헤프고 방탕한 끼를 알았던 아버지는 “이놈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아마 제 마음대로 살다가 다 탕진하고 돌아올 거야 반드시 돌아올 거야” 하고 예측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들이 떠난 뒤로는 아버지에게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어둑어둑해지기만 하면 문밖에서 저 멀리 동네 어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혼자 말로 “저 어귀를 돌아서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대내이곤 하는 것이 자기도 모르게 몸에 익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저녁상을 물리고 문밖에서 행여나 누구 오나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저 너머 동네 어귀를 누가 돌아오는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좀 수상하거든요. 그래서 집밖으로 나가 유심히 살펴보니까 걷는 폼이라든지, 위를 한번 기웃 기웃 쳐다보는 것이라든지 영락없이 아들의 모습이거든요. 그래 이놈이 이제 돌아왔구나! 너무나 기쁜 아버지는 그 연로하고 비대한 몸을 뛰뚱뛰뚱거리면서, 아들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아직도 거리가 먼데(집까지 올 거리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런 말이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아들을 보고란 말이죠)측은히 여겨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같이 어른들은 아무리 급해도 뛰어 간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체면을 깎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모습을 보고 기다리거나, 천천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달리고 달려가서는 “아들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덥썩 껴안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돼지 치던 몸에서 냄새가 얼마나 나겠습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모습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 오물 냄새도 아랑곳없이 누추한 차림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저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 하나만을 기뻐한 아버지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날을 묻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기 전, 아버지를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야지, 이 말을 하면 아마 아버지가 용서하실 거야 하고 외우고 외었던 말을 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9).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21).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일꾼 머슴으로 봐달라는 말이죠. 머슴으로 나를 받아 주세요라는 말입니다. 오면서 이 말을 하면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 거야 하고 생각하였던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말을 다 끝까지 듣지도 않은 체, “애야! 무슨 소리냐 아무말 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와 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지난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다 이제 왔냐! 책망하지 안했습니다. 가진 것 다 어떻게 했느냐 묻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을 부르고 우리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 잔치를 베풀어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아났고 내가 아들을 ‘다시 얻었노라’ 오늘 말씀의 제목이죠. 다시 얻었노라 온 집안이 잔치에 즐거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예수님의 이야기는 거의 끝이 납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것을 이미 다 용서하고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둘째 아들은 우리들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자기에게로 온 자들의 과거의 죄를 묻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둘째 아들과 같이 허랑방탕하게 살았다고 하였어도 어떤 계기가 되어 하나님을 찾았다 하여도 과거를 묻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죄가 많은가 적은가 따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받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기뻐서 하늘에서 천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신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소개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시한부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이 80-90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후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죽으면 끝이다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짐승하고 똑같습니까? 죽으면 끝이에요 여러분 누가 그렇게 얘기해요. 아니 누구한데 그렇게 배웠어요. 인생은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육신에서 영원으로의 삶으로 그 과정이 바뀔 뿐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끝이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인생의 종지부를 마친 다면,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그 심판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이 없다고요 지옥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인간 본성에 지옥에 있는 줄을 아는데 그곳이 너무 무서우니까 아예 없는 것으로 속편케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면 나만 가나 다른 사람들도 안 믿고 살다가 죽는데 그런 심리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에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지난 일을 회개하면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오늘부터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이 여러분은 위해 준비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저 나라 천국에서 영원한 삶이 준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참된 평안과 안식과 행복을 누린 것과 같이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때 참된 평안과 안식과 행복 그것도 영원한 누릴 수 있는 삶을 약속해 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 그래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좋은 이야기야, 하나님이 계신 것 나도 긍정한다. 내가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 멀리 떠나서 방탕하게 산 것도 인정한다. 정말 둘째 아들과 같은 심정이 나의 심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살다가 끝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심정으로 출발하는 마음을 여러분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별수 없이 한번 세계의 종교를 섭렵涉獵해 보시겠어요? 유교요 도올의 논어이야기 이후 여기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신 분들은 더욱 알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이에요. 조상신을 섬긴다고요. 아니 여러분 조상신을 섬기지 않으면 노해서 사업도 망하고 아이들 병들고 대학에도 못 간다면서요. 여러분의 조상이 그렇게 옹졸하고 나쁜 분이었나요. 죽어서 제사 밥 안차려 준다고, 후손들 못살게 굴게요. 불교요 여러분 불교는 신이 없어요. 자기가 신이에요 많은 고행과 도를 통해서 해탈解脫을 하면 열반涅槃들어가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에요, 1994년에 돌아가신 성철 스님은 35년을 벽만 보고 살았다는 그 분의 이야기를 여러분도 들으셨을 거예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700년 전 중국에서 다섯 분의 큰스님이 불교의 경전인 금강경을 해설한 책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그 속에 야보冶父 스님의 시구가 나옵니다.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이성철 스님은 이 시구의 앞부분, 즉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구절만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전체의 의미를 아는 자는 알기 때문입니다. 산이고 물인지 누가 모르나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아무리 고행을 하여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흰두교요 거기는 범신론입니다. 여기 있는 꽃도 신이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신 이래요. 그런 범신론을 찾아가서는 나중에 절대적인 진리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회교를 가보실래요. 거기에 있는 신은 인간과는 아무런 접촉점을 갖지 못하는 신입니다. 하늘에 고고하게 앉아 있기만 합니다. 그런 신은 아무리 존재해도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종교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인생의 한계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이성에 입력된 것으로는 알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것 하나만은 꼭 인정하세요. 인간의 모든 지식, 모든 철학, 모든 지혜를 동원해도 하나님을 찾을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0-1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고 선각자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둘째 아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가출한 사람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이 죄인이듯 하나님을 찾지 못하므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가 죽음이요.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완전히 끊어 버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게 막힌 어떤 박 절벽 정도가 아니고,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심령을 막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자기가 보이고 세상이 보이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러한 약점과 난제를 아시고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기 아들 예수를 인간과 똑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으니,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 ‘계시’Revelation로 알려 준 것이에요.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는데 무슨 화려한 귀족이나, 희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흔해 빠진 모습으로 인간 중에도, 천민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오셨어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에수 그리스도요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왜요 인간이 아무리 찾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으니까, 예수님이 직접 찾아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발견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에 내려와 우리들의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한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4:9).
죄(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으라
그러나 또 하나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처리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를 가진 인간이 만날 수 없습니다. 죄인과는 상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 할 능력이 없어요. 어떻게 도둑놈이 도둑놈의 죄를 해결 할 수 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우리의 죄를 짊어질 자격자가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으로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신 유일한 자격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십자가에서 너무 많이 들어 잘 아고 계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곳입니다. 그곳에서 못 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되었느냐, 그 죽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아세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2).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죠. 죄가 우리의 생명을 앗아갔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어요. 그 단절된 관계 죄를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피가 필요합니다. 피가 있어야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데 아무 피 갖고 되지 않아요. 의인의 피 즉 죄 없는 피가 필요한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죄를 없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에게 우리 대신 피를 요구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은 저주의 죽음이요 심판의 죽음이요 지옥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의 형벌을 모두 다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대속입니다.
옛날에 유대 사람들은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위임한 다음,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우리 모두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다 넘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모든 죄를 다 지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죽은 자가 어떻게 우리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전 인류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3-24). 다시 한번 들어 보세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니라” 예수님은 부활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시고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한순간에 다 용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당당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에 이렇게 예수님이 그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조건은 딱 하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로 벌어진 단절된 것을 그의 십자가로 다리를 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을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그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안겨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세요. 우리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너무나도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위기 고통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두 팔 벌리고 여러분을 안아 주십니다.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멋대로 살다가는 다음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 여러분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십시오.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 나를 위해 십자가 죽으심을 믿습니다.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만 믿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세요.”하고 고백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활을 하였건 둘째 아들의 아버지처럼 잔치를 벌이고 다 용서 하십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은 바로 이 하나님 이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함입니다. 이 아름다움 자리에 그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만나십시오. 그러면 오늘 저녁 여러분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마음이 열리고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인생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십시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정리
유대 나라 어느 마을의 한 부자
유대 나라의 한 부자에게는 자랑스러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그렇게 착하게만 보이던 둘째 아들이 자신 몫의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부자이었기에 아들에게는 상당히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재산 1/3을 주었습니다. 신이난 아들은 며칠 동안 받은 재산을 현금으로 바꾸고는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면서 “ 떠납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는 먼 나라로 떠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부디 몸 건강하거라” 한마디 하고는 떠나보내야만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잊어버리고 아버지 간섭받지 않고 받은 돈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생활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허랑방탕’虛浪放蕩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둘째 아들은 우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둘째 아들은 우리를 비유합니다. 우리는 호래자식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진화론 같은 것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노예로 잡혀간 흑인들이 간지가 이백년이 넘었습니다. 화란에서 남아공으로 내려간 백인들도 이미 100여년이 훨씬 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피부 색깔이 변하는 것 보았습니까? 우리는 원숭이, 아마베 후손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백성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 같이 하나님 떠나 멋대로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면 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있다는 것 인정하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을 낳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꼭 인정하세요. 聖. 어거스틴Augustine,354-430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작은 신상을 디밀더니 이것이 자신의 신이라며 당신의 신을 보여달라고 하자, 어거스틴은 “나의 신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없습니까? 내가 단지 그 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주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64:8). 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성은 둘째 아들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간섭받지 말고 나 혼자 멋대로 살아 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경외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간섭 받지 않고 살고 싶은 것, 사람이 욕심으로 살려고하니 ‘악’해지는 것입니다. “…네가(하나님이 하시는 말이에요)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니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잘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신32:15). 또한 “하나님을 알되(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는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는 다는 말이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롬1:21).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3:18.참고/시36:1).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무슨 죄 내가 죄졌냐!”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생을 선하게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살아계신데 찾아뵙지 않는 자식에게 불효 중의 불효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말하듯이, 하나님 멀리 떠나서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내 멋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요 죄인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탕진하다
재산을 허비하고 고향 아버지를 생각하다. 둘째 아들은 고생 않고 손에 쥔 돈 날마다 펑펑 쓰다 동이 났습니다. 그러자 그 많던 친구들 한둘씩 다 떠나가 버립니다. 거기에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제 끼니조차 없게 되자, 남의 집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 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고달픈 몸을 차디찬 땅바닥에 의지한 채로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때 문득 둥근 달로 환하게 비취어진 들녘을 바라보며, 그 너머 떠나온 고향에 계신 압지가 생각났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혼자 생각으로 말했다는 말이죠)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집에는 일꾼 조차도 먹을 것이 넘친다는 말이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한탄 했습니다. 그리고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고향에서 올 때는 큰돈을 가지고 왔지만, 돌아갈 때는 쓰잘데기 없는 자질 구례한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셨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신호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어떤 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한 평생을 자신만만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생각납니다. 아마 그때는 가장 순수한 자기 모습으로 돌아올 때일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왜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이 났습니까?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계시니까? 왜 아버지를 찾습니까?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을 살다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이에요. 여러분 본능을 속일 수 있습니까? 아들이기에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나는 순간을 일컬어 ‘삶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위기 온 거예요. 그제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는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다양합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해보아도, 그때 뿐일뿐 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다시 그대로 마음이 텅 비어버리고 맙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깁니까? 이것이 위기입니다. 위기! 하나님을 알고도 제 마음대로 살다보니 찾아오는 위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벼랑에까지 몰려도 안돼서 땅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야 깨닫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혹은 중병으로 가족 중에 먼저 떠나게 되는 경우에 비로소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가 찾아 올 때 모든 인간은 그동안 자기 자신을 포장했던 위장의 꺼풀이 다 벗겨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하나님” 이라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까? 왜 찾습니까? 내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교회를 핍박하고 교역자를 비방하다가 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다니던 교회에 장례를 요청하여, 교회 장으로 다 마친 후, 위로 예배를 드리러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제가 알지 못하고 그런 큰 죄를 지어 내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고요.” 그렇게 사랑하던 자식을 잃고 그 어머니가 찾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왜! 찾는다고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는 비극인지 모르지만, 그나마 그 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하였다면, 이것은 인생에 얼마나 복된 위기인 줄 모릅니다.
위기가 실패가 아니라, 위기에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실패이다. 잘살다가 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끝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위기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도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되었던 부름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떤 계기로든 인생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위기를 만나 아버지를 생각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오늘 예배에 오신 분들 가운데 그런 위기에 있는 분들도 계실 줄도 모릅니다. 남이 모르는 마음의 위기 말입니다. 그때 누군가를 통해 교회로 인도되어 이 자리에 온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세요. 이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이 여러분에게 너무 너무나 복된 순간임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아들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아버지. 한편 둘째 아들을 멀리 떠나보낸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 생각에 밤잠을 설치게 됩니다. 아들의 헤프고 방탕한 끼를 누구보다도 알았던 아버지는 “이놈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아마 제 마음대로 살다가 다 탕진하고 돌아올 거야 반드시 돌아올 거야” 하고 예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녁 상을 물리면, 저 멀리 동네 어귀를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네 어귀를 누가 돌아오는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영락없이 아들의 모습이거든요. 너무나 기쁜 아버지는 그 연로하고 비대한 몸을 뛰뚱뛰뚱거리면서, 아들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집까지 올 거리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런 말이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아들을 보고란 말이죠)측은히 여겨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20). 달리고 달려가서는 “아들아!” 큰 소리로 부르면서 덥썩 껴안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돼지 치던 몸에서 냄새가 얼마나 나겠습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모습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 오물 냄새도 아랑곳없이 누추한 차림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저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 하나만을 기뻐한 아버지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날을 묻지 않는다. 그 순간 아들은 아버지 만나면 곡 해야지하고, 외웠던 말을 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이(19,21)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일꾼 머슴으로 봐달라는 말이죠. 머슴으로 나를 받아 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얘야! 무슨 소리냐 아무말 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와 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지난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다 이제 왔냐! 책망하지 안했습니다. 가진 것 다 어떻게 했느냐 묻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기뻐하면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을 부르고 우리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 잔치를 베풀어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아났고 내가 아들을 ‘다시 얻었노라’ 오늘 말씀의 제목이죠. 다시 얻었노라 온 집안이 잔치에 즐거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의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것을 이미 다 용서하고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둘째 아들은 우리들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자기에게로 온 자들의 과거의 죄를 묻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둘째 아들과 같이 허랑방탕하게 살았다고 하였어도 어떤 계기가 되어 하나님을 찾았다 하여도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받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기뻐서 하늘에서 천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신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80-90 시한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인생의 종지부를 마친 다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히9:27). 심판은 영멸입니다. 지옥입니다. 밤낮없이 불과 유황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에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저 나라 천국에서 영원한 삶이 준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참된 평안과 안식과 행복을 누린 것과 같이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때 참된 평안과 안식과 행복 그것도 영원한 누릴 수 있는 삶을 약속해 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3:10-11).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지 않은 것이 죄인이듯 하나님을 찾지 못하므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가 죽음이요.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완전히 끊어 버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러한 약점과 난제를 아시고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기 아들 예수를 인간과 똑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발견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에 내려와 우리들의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한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으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처리해야 될 문제가 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를 가진 인간이 만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우리의 죄를 짊어질 자격자가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으로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신 유일한 자격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이 중요한 것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2).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죠. 죄가 우리의 생명을 앗아갔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어요. 그 단절된 관계 죄를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피가 필요합니다. 피가 있어야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데 아무 피 갖고 되지 않아요. 의인의 피 즉 죄 없는 피가 필요한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은 저주의 죽음이요 지옥의 죽음이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의 형벌을 모두 다 받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니라”(행2:23-24). 예수님은 부활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시고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한순간에 다 용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이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에게 조건은 딱 하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됩니다.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안겨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세요. 우리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너무나도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위기 고통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두 팔 벌리고 여러분을 안아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멋대로 살다가는 다음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 여러분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십시오.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 나를 위해 십자가 죽으심을 믿습니다.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만 믿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세요.”하고 고백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활을 하였건 둘째 아들의 아버지처럼 잔치를 벌이고 다 용서 하십니다. 그러면 이 시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마음이 열리고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십시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결론
① 둘째 아들이 탕진 후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위기가 실패가 아니라, 위기에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우리가 중보이들이 어떤 크기이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복된 위기가 되게 하옵소서.
②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빈손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온 자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너무 기뻐한 아버지 같이 잔치를 천국에서 여십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이 하나님이 준비한 잔치에 참예하게 하옵소서.
③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면, 계속 돼지를 치며, 돼지 우리에서 자고,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죽으면 영멸입니다. 지옥입니다. 밤낮없이 불과 유항으로 고통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평안과 안식과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하옵소서.
④ 둘째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단했을 때, 아버지는 달려와서 아들을 맞이하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직접 세상으로 내려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노크에 문을 열게 하옵소서.
⑤ 둘째 아들이 모든 재산을 탕진했지만, 부자인 아버지에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어도,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 대속으로 사하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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