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사랑하는 독자"(창 22:1-2) 이재현목사(25.09.28)

이재현목사 2025. 9. 28. 18:54

사랑하는 독자

하나님말씀 : 창세기 22:1-2 2025.09.29. 主日禮拜

이재현 목사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1-2)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9월은 전도의 달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하셨습니다(고전1:21).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로다”(16:31)라고 전하는 전도가 미련하게 보이고 어리석게 보이고 하찮게 보지지만, 하나님은 그 미련한 전도를 통하여 지금도 자기 택한 백성을 구원받게 하시고, 청아비전교회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의 능력이 성도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독자를 제물로 드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이렇게 본문은 시작되고 있습니다(22:1). 그 이전에도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 고향을 떠나라고 명하신 것도 시험 아니겠습니까?(12:1). 선대 때부터 쌓아놓았던 그동안의 모든 기반을 뒤로 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가나안으로 가야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시험 가운데는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12:2.참고/15:3).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아브라함에게는 시험입니다. 75세에 약속하시고 100세 주셨으니, 무려 25년 간 시험하신 것입니다(12:4,21:5).

 

그러나 그 모든 시험보다 오늘 본문의 시험은 그 중대함을 볼 때, 이전의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22:2).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 하나 밖에 없는 독자를 바치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이유는 시험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던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속한 응답을 드립니다. 오늘은 어떤 명령을 내리실까 하달을 기다리던 아브라함에게 귀가 의심스러울 음성이 들려옵니다. 다함께 본문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우리로서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제라는 것은 구약 제사의 한 종류입니다. 짐승을 잡고 머리와 네 발을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몸통에서 살을 각 떠서 불에 살라, 그 향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짐승을 제물로 드릴 때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그와 같이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아브라함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있습니다. 어떤 아픈 곳을 찌르고 있습니까? 아들을 바치라 그렇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이 명령할 때,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강조하면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더욱 확인하도록 하고 있는 보이기도 합니다. 아들을 바치라면 그냥 바치라고 하시던지 하시지, ‘네 사랑하는 독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꼭 집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어떤 각오를 하였는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을 부른 후, 아들 이삭과 함께 번제 쓸 장작을 준비한 후, 길을 떠납니다(22:3).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 비정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마치 기대하는 일을 위해 일찍이 일어난 것처럼, 자신의 아들을 태울 장작을 아들 이삭으로 준비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집을 떠난 지 삼일 쯤 되었습니다(22:4).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산을 눈을 들어 바라본 후, 두 명의 종들에게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나는 하나님께 아들과 함께 예배하고 돌아오리라하였습니다(22:5).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었고요, 이삭은 번제 쓸 장작을 어깨에 멨습니다(22:6). 이제 아버지와 아들 부자만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산을 향해 올랐습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요? 이삭이 궁금한 것이 있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답을 합니다(22:7-8). 이 말을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짐작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에 이른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아들을 결박합니다(22:9). 이삭 또한 아브라함의 행동에 아무 반항 없이 항변 없이 저항 없이 결박을 당하고 제단에 눕습니다. 제단에 올려진 이삭을 향해 아브라함은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했습니다(22:10).

 

그때 하나님이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부릅니다. 이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답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22:11).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한 숫양을 발견하고,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에 산에 오르기 전, 이삭이 번제할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고 물었을 때,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한 그대로 정말 하나님이 정하신 번제드릴 산에 한 마리 양이 준비된 것입니다(22:7-8). 사람들은 그 후로 여호와의 이레로 부르게 됩니다(22:14).

 

숫 양을 번제로 드린 후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재차 부른 후, 이어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6-18). 쿤 복과 창대를 다시 한번 약속하셨습니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두 번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두 번 가운데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12),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6).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네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이 인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어떤 존재입니까?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정도로,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없으면 다른 아들을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 없습니다. 독자이었습니다. 그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은 지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에 대한 사랑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전부라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번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러한 중에도,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것을 번제로 바친 것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을 보고, 이제야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줄 아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고,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22:16-18).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까지 드려져 불로 살라지지는 않았지만, 말씀에 순종한 행위를 번제로 드린 것과 같이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큰 복과 창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순종이 작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중차대한 일에 아내와 상의도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말하면 당연히 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두 종과 이삭과 함께 번제 쓸 장작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말이 삼일이지, 그 삼일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겠습니까? 어쩌면 폭우라도 쏟아지고, 대설로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태풍이라도 몰아쳐 가는 길을 막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또 삼일 길을 걸으며, 아들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갈등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아들이 밤에 자는 중에 몰래 도망치면, 적어도 번제로 불에 살라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지 않겠습니까? 또 단 둘이 산에 오를 때, 회피하고자하는 여러 다른 생각도 들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시간들을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르며 묵묵히 산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볼 때, 아들 이삭이 불에 살라지는 번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아브라함의 행동은 번제로 아들을 드린 것과 같은 행위로 하나님은 보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러한 명령을 주신다면, 이것은 결코 단순히 결정할 사안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 날 바로 복종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시간 좀 달라고 하면서, 며칠 몇 날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또 때를 써가면서 돌이키고 싶어했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말 아들이 번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번제로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정하고,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독자를 번제로 드린 아버지

 

그러데요. 성도 여러분! 아들을 번제로 드린 아버지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아시 지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번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이 말씀에 하나님은 아들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셨는데요.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 예수님을 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아브라함을 하나님으로 대비해 보시고요. 이삭을 예수님으로 대비해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독자이었듯이,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독생자이십니다. 만인이 애송하는 성경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하나님이 독생자를 왜 주셨습니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즉 이 세상 바로 저와 여러분을 예수님같이 사랑하사, 그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어떤 존재이었습니까? 사랑이었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예수님이 공생애 중간에 변화산상에 오르셨습니다. 이 때 동행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큰 영광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벧후1:17).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를 앞둔 시점에 기도하실 때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12:28).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영광이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드린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명에 따라,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려, 이삭의 몸을 화제로까지 드리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를 바친 아브라함을 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실제로 번제로 드렸습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아들을 죽이시게 하기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천 여 년 전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참고/2:8).

 

아브라함이 산에 올라 이삭을 결박할 때, 당시 아브라함은 백세가 넘은 노인이었지만, 이삭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아브라함의 결박에 아무런 반항도 항변도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스스로 걸어가신 모습과 흡사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1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27:11-12).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5:2). 희생제물을 예전에 사용하던 개역성경에는 생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를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대신 수풀에 걸린 숫 양을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 숫 양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1:29). 이렇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대신 숫 양을 잡아 드렸지만,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직접 생축’,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다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죽게 하신 사랑,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이천여 년 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명하신 것을 순종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할 때, 아무런 대항 없이 순순히 잡힌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고,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즉 그렇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까지도 아끼지 않은 것을 보고, 하나님은 비로소 아브라함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 진정한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좀 더 성경을 통해 알아보고,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녹아지는 은혜가, 오늘 이 시간에 갖기를 바랍니다.

 

차별이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한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말씀합니다(요일4:10).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이나, 가치가 되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도 조건도 가치도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요.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할 자격도 조건도 가치도 없어요. 하나님에게 죄는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을 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인으로 자격도 조건도 가치도 없지만,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이 진정한 사랑에는 어떤 인간도 예외 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얻게 되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로마서 322절에 하나님의 사랑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의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별이 없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되신 고 노회찬의원이 한 상임위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법은 만인이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을 맞는 말 입이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법은 만이 앞에 평등해야 하는데, 법이 만 명에게만 평등한 세상이다.” 당시 법사위상임위에 출석한 법무장관에게 한 말입니다.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말에서 만인인은 찰 ’滿 사람 ’人은 모든 사람을 일컫지만, “법이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는 말에서, ‘만명은 일만 ’萬 사람 ’人을 의미합니다. 만 명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어요. 쉬운 말로 가진 자들입니다. 특권층, 법도 가진 자들에게는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3·5법칙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 일컫는 말입니다. 일반 서민들은 생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이나, 회령 배임 등으로 재벌 총수들이 구속되었었습니다. 그러면 그 범죄 사실을 볼 때는 적어도 10년 내외는 실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판사들이 재벌총수들에게는 한결 같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 선고합니다. 사실상 석방해 주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재벌 총수들이 수감되면, 그 기업의 경영은 물론 그 기업과 그 기업의 직원들 그리고 그 기업과 연관된 많은 회사들 그리고 상당수의 사원들이 피해를 입게 되고, 그것은 곧 국가와 국민의 피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판결을 하는 것입니다. 또 대기업의 회장으로 그동안 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점을 감안하여, 그런 판결을 내립니다. 판사는 국가가 인정한 양심입니다. 그렇기에 판사의 판결에 무엇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 예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 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차별들을 당합니다. 돈이 없어서 당하는 차별,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직업을 갖는데서 오는 차별, 배움으로 인한 차별, 가정 환경을 통한 차별, 청춘남녀가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싶어도, 배우자가 대칭이 되지 못하고, 비대칭이 되는 데서 오는 차별 말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요. 한 의사가 장가를 가는데, 조건으로 장인에게 상속을 각서로 쓸 것을 요구합니다. 나같이 훌륭한 사위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딸을 시집보내는데, 처가에서 재산이라도 물려주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딸이 좋다고 하니, 장인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각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랑은 신부와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합니다. 이를 안 장인이 격분하여, 상속 각서를 파기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위가 법원에 이를 고소했습니다. 이러한 사건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까? 바로 차별입니다. 차별의 서러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모든 차별에서, 어느 인간도, 가진 자 못 가진 자, 식자 무식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차별이 없는 것이, 바로 독생자를 아끼기 아니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 사랑,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차별이 없이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녹아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이 세상 무엇이라도라는 뜻입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는 어떤 악한 천사, 귀신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횡포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들도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예찬하고,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깨질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무엇으로 만들었다고 합니까? 질그릇입니다.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64:8;고후4:7). 우리는 질그릇으로 연약합니다. 때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그릇인 인간에게 담겨진 것들은 깨질 수 있습니다. 재질이 질그릇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금이 갑니다. 이빨도 빠집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애틋한 사랑을 담아도 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갖게 하는 그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본질이 깨어질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번 사랑하시기로 작정하고, 사랑을 준 자에게 사랑을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또한 누구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상실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배신을 당할 때, 오는 상실감으로 인해 죽음을 택하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남녀 간 연인들만의 사랑 만이 아니죠. 부모와 자식의 사랑도 있습니다. 형제와의 사랑도 있습니다. 친구와의 사랑도 있습니다. 동료와의 사랑도 있습니다. 그중 어떤 사랑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신뢰가 깨어지고, 거기서 오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내하지 못해서 세상을 등지게도 합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사랑으로 상실감에 빠진 자들이 찾은 곳이 어디에요. 교회입니다. 교회는 상실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실패하고 상실한 자들이 찾아올 때, 교회는 상실하지 않는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누구에게도 상실하지 아니하는 진정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십니다(요일4:11). 우리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사랑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막을 수 없다

 

세 번째로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셨습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라는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한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은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즉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이 세상에서 차별이 없고,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은 마지막까지 책임지십니다. 이 인도하심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 세상을 넘어 내세까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빼앗겨서 상실을 당하고, 막아서는 장벽으로 이별을 당하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고, 끊는 자가 있고, 막아서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었는데요. 가을 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 하나가 있죠. 우리나라 현대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인 패티 김이 부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아세요. 그분의 남편인 길옥윤씨가 작가 작곡을 했는데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였나

 

당신에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 가리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왜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이에요. 이별을 한 것이지요.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였나 당신에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누구에게는 가슴 설렘이 가득한 가을이지만, 누구에게는 이별 아픔이 가득한 가을 인거에요. 이와 같이 인간의 사랑은 막아서는 장벽으로 이별을 갖게 해요. 그러나 그것 기억하세요.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 사랑, 진정한 사랑은 누구고 막아설 수 없어요. 어느 순간까지요. 천국에 이르는 그 날까지, 막아설 자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러므로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한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에 거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어요. 어느 순간에서도 막아설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천국까지 인도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가득한 청아비전교회 성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정리

 

독자를 제물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독자를 바치라고 하신 시험은 이전 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22:1-2.참고/12;1-2,5,15: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가장 아픈 곳을 찌르셨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꼭 집어서, 아브라함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22:2). 아브라함은 하나의 의심없이 준행하였고, 집을 나선 지 삼일이 되던 날 두 명의 종들에게는 여기서 기다리라 나는 하나님께 아들과 함께 예배하고 돌아오리라하였습니다(22:3-5). 그리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에 쓸 장작을 어깨에 메게 하고, 자신은 불과 칼을 가지고 걸었습니다(22:6). 산 위를 오르는 길에 이삭이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고 묻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22:7-8). 장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아들을 결박하자, 이삭도 아무런 반항하지 않았고, 아브라함이 망설임 없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했습니다(22:9-10).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부릅니다. 이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아브라함이 답하자,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22:11-12).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한 숫양을 발견하고, 제물로 드렸습니다. 산에 오르기 전 이삭에게 말한 데로 된 것입니다(22:7-8). 사람들은 그 후로 여호와의 이레로 부르게 됩니다(22:14). 숫 양을 번제로 드린 후,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재차 부른 후,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고 하셨습니다(22:16-18).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두 번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두 번 가운데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12),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6). 하나님이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을 인정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어떤 존재입니까? ‘독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번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러한 중에도,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것을 번제로 바친 것과 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인정은 이제야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줄 아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고,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22:16-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했던 것을 드린 것과 같이 여기고 큰 복을 주신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순종이 작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내와 상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까지 삼일 길을 걷는 동안 가는 길이 사라져 버리기를 바랄 수 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아들에게 사실을 말해주고 밤에 잠든 사이 몰래 도망치면, 적어도 번제로 불에 살라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르며 묵묵히 산에 올랐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번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아들을 드린 것과 같은 행위로 하나님은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명령을 받는다면 단순히 결정할 사안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 날 바로 복종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시간 좀 달라고 하면서, 며칠 몇 날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또 때를 써가면서 돌이키고 싶어했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정말 아들이 번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번제로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정하고,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독자를 번제로 드린 아버지

 

그러데요. 자신의 아들을 실제로 드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번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제물로 십자가에 죽게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말씀합니다(요일4:10).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독자이었듯이,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우리르 사랑하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요일3:16).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22:2). 하나님에게 사랑이셨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은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3:17.참고/12:28;벧후1:17).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실제로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만큼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백세가 넘은 노인이었지만, 이삭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아브라함의 결박에 아무런 반항도 항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스스로 걸어가신 모습과 흡사합니다(참고/53:7;27:11-12).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5:2).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숫 양을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1:29). ‘사랑은 여기 있다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죽게 하신 사랑,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요일4:10).

 

진정한 사랑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신 것입니다(5: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요일4:10). 인간의 죄인으로 자격도 조건도 가치도 없지만,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진정한 사랑에는 어떤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얻게 되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의차별이 없다고 하십니다(3:22).

 

모 정치인이 법은 만인萬人 앞에 평등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 만인滿人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평등하는 것입니다. 그 만 명은 가진 자들을 지칭합니다. 특권층, 법도 가진 자들에게는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이나, 회령 배임 등으로 재벌 총수들이 구속되어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 선고합니다. 사실상 석방입니다. 일반인이면 10년 내외는 실형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한 예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차별들을 당합니다. 돈이 없어서 당하는 차별,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직업을 갖는데서 오는 차별, 배움으로 인한 차별, 가정 환경을 통한 차별, 청춘남녀가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싶어도, 배우자가 대칭이 되지 못하고, 비대칭이 되는 데서 오는 차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모든 차별에서, 어느 인간도, 가진 자 못 가진 자, 식자 무식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차별이 없는 것이, 바로 독생자를 아끼기 아니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 사랑,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차별이 없이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녹아지는 것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끊을 수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즉 이 세상 무엇이라도, ‘어떤 피조물어떤 악한 천사, 귀신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횡포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8:39). 인간들도 사랑을 노래하고, 예찬하고, 사랑을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이기에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64:8;고후4;7).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본질이 깨어질 수 없는 분입니다. 한번 사랑을 준 자에게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상실을 당하지 않게 합니다. 인간은 연인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와의 사랑도 있습니다. 그중 어떤 사랑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신뢰가 깨어지고, 거기서 오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상실한 자들이 찾아올 때, 교회는 상실하지 않는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누구에게도 상실하지 아니하는 진정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십니다(요일4:11). 우리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사랑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셨습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하십니다(2:5).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한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은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즉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이 세상에서 차별이 없고,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를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렇게 이 세상을 넘어 내세까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빼앗겨서 상실을 당하고, 막아서는 장벽으로 이별을 당하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고, 끊는 자가 있고, 막아서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요 한 구절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왜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이에요. 이별을 한 것이지요.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누구에게는 가슴 설렘이 가득한 가을이지만, 누구에게는 이별 아픔이 가득한 가을 인거에요. 이와 같이 인간의 사랑은 막아서는 장벽으로 이별을 갖게 해요. 그러나 그것 기억하세요.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 사랑, 진정한 사랑은 누구고 막아설 수 없어요. 어느 순간까지요. 천국에 이르는 그 날까지, 막아설 자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어요. 어느 순간에서도 막아설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천국까지 인도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가득한 청아비전교회 성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최종 정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를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사랑이었습니다. 다른 사랑할 아들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전부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려고 한 것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것만을 가지고도 그의 사랑을 인정했습니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들을 죽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의 답이 없어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다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죽게 하신 사랑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 첫째로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한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저런 것 때문에 차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에서 차별 받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어떤 한 분이이던 우리교회에 오셨을 때,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을 가득 체험할 수 있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 두 번째로 끊을 수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 어떤 악한 천사 귀신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횡포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재질이 질그릇이기에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사랑이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연인이던, 부모와 자녀이던, 형제이던, 동료이던, 친구이던, 깨어진 사랑으로 인한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 세 번째는 막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 인간의 사랑은 장벽이 막아서서 이별의 아픔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차별이 없고,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 바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뛰어 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아설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은 세상에서 마지막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에게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입니다. 그렇기에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차별이 없고, 끊을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이 가득한 우리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전부이자 사랑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을 드린 것으로 받으시고,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순종 우리의 축복이 되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은 독생자를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죽게 하신 사랑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우리 영혼에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차게 하옵소서, 중보하는 영혼들이 이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차게 하옵소서.

 

③ 진정한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여러 차별이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 없는 사랑을 깨닫고,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감사를 갖게 하옵소서. 하나님 사랑,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④ 진정한 사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천사도 사람의 횡포도, 우리가 받은 사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깨어진 사랑으로 고통받는 영혼들이 끊을 수 없는 하나님 사랑, 진정한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⑤ 진정한 사랑은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장벽이 막아서서 이별의 아픔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저 천국에가는 날까지 막아설 자도 세력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아니요. 천국으로 인도하는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사랑안에 거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