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남은 자의 신앙"Ⅱ (이사야 6:13) 이재현목사(25.10.12)

이재현목사 2025. 10. 15. 10:03

남은 자의 신앙Ⅱ

Remnant Faith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이사야 6:1-13 2025.10.12. 主日禮拜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6:13)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10월은 자람의 달입니다.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우리가 전도한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이사야의 환상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환상중에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말씀에, ‘어느 때 까지니이까여쭙자,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고 하셨습니다(6:9-12). 그리고 설사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6:13). 이 말씀은 마치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보입니다.

 

신약에도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었고’, 그 외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11:7). 남은 자들이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11:8). 이사야와 같은 말씀입니다(6:9).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우둔한 본성 그대로입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귀가 안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감각이 전혀 없는 살갗처럼 신령한 일에 반응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둔하게 내버려 두심

 

구원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자들

 

우리는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구원받고 싶었는데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11:7). 얻고 싶어서 구하는데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은혜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둔하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둔해진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은 우둔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인간 본능의 부패한 성품으로만, 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우둔함 배후에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고’, ‘보지 못할 눈을 주셨고’,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8). 본문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같은 말씀입니다(6:9). 복음에 대해 인간은 본성적인 우둔이 있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가사의한 말씀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한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는 자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받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버리고 눈도 막아 버립니다. 그렇게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면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밥상은 올무와 덫이 됩니다(11:9.참고/69:22). ‘밥상이란,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육적인 관심사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입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바라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서 즐기다가. 죽음의 길로 빠지게 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환경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의 덫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돈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돈을 벌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그의 밥상이 복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번영 복음, 기복 신앙, 형통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해서 장수하면, 그것이 예수 잘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가르침이 다 틀린 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11:10).

 

잘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소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웃음이 있어야 복음이고 눈물은 복음이 아니다.’는 말이 교회 안에서 진리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런 세대에 쓴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좋은 것만 말했던 길 예언자를 따랐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였지만, 쓴소리를 했던 흉 예언자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실을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참고/왕상22:18). 지금 쓴소리가 달갑지 않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다시 회복의 은혜를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쓴소리를 듣고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잘사는 것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 즉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의 하나가 잘사는 것,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벌고 잘 먹는 형통이 올무가 되어 교회를 다녀도 평생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는 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렇듯 교회를 다니는 자에게도 올무가 될 수 있는 밥상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진수성찬이 올무가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초라한 밥상을 가지고 살았다면, 복이 되었을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막대한 돈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다면, 그 돈이 밥상올무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로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서 예배 중에도, 돈 벌고 투기할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예가 종종 있다고해서,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감사할 문제가 아닙니다. 밥상의 올무요 덫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형통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적 암흑기가 찾아 올 것인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하였습니다(24:38-39).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 부을 것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인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논리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된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듣지 못하게 하셔서 우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책임은 우둔해서 믿지 아니한 그 사람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셔서 그랬다고 하는 변명이 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어떤 남자가 친구의 꼬임을 받아서 술집에 갔다고 합시다. 그곳에서 희희낙락하며 밤늦도록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술이 취한 채 운전을 하며 집으로 가는데, 급기야는 과속으로 사람을 치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술이 깬 다음에 경찰이 취조할 때, 왜 나를 탓하느냐고, 나를 술집에 데리고 간 친구에게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술에 취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면 통합니까? 통하지 않습니다. 사고의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합니다. 친구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물론 마신 술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러니저러니 하고 변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가 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고의로 어떤 사람들을 버리시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 유식하다는 사람일수록 거부반응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하고 항변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분은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마음을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셔서 창세전부터 선택하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는 말씀에도,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우둔하게 해서 믿지 못한다는 말은 받아들이면서,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구원받게 했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것은 결국 누구의 책임이 됩니까?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다면, 선택받았다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대신 분명히 어떤 사람은 우둔한 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구원하느라, 하나님의 관심권 밖에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한 것은 나 때문인지 누가 압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야곱이 하나님께 왜 형을 버렸느냐고 따릴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기가 선택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말씀합니다(2:11). 그러나 성경을 한 부분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셨습니다(1:16).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그분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3:22). 세상은 죄 아래에 있지만 그 세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 즉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하나님에게 순종은 그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3:22).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5:9).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고의로 버렸다는 데 대해서 반발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나를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버림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을 귀를 주지 아니하신 것도 맞는 말입니다. 선택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버린 자도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신 사람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왜! 누구는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합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창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사셨습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택자의 감사이어야 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기독교 강요 교리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선택과 버리신 유기에 대해서, 어거스틴Augustine,354-430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을 자, 안 받을 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선택 받을 자로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창세 전은 인간에게 과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처음과 끝, 시작과 마침,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참고/22:13).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선택받는 자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해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중보해야 합니다. 만약 나의 전도 대상자가 바로처럼 강퍅한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나의 전도 대상자가 구원 받은 자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아니라, 우둔한자로 남은 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무조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할렐루야!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고, 나의 전도 대상자는 그 선택을 받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을 때, 한 명 만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머지 아홉은 제 갈 길을 같습니다(17:17). 그와 같이 같은 설교를 들어도, 열 명 중에서 한 명은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비웃거나 싫어합니다. 이 현상을 단지 마음이 악해서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악하기는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모두가 우둔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만지셔서 깨닫게 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릴 때, 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데, 남편은 눈을 감고 조는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부인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놓고 부인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믿었고, 남편은 마음이 우둔해서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본래 마음이 우둔하기는 남편이나 부인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둔하다는 것만 가지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듣게 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자, 가족, 전도 대상자가, 듣는 자로 만들어 달라고, 선택받은 자로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남은 자

 

그렇다면 이제 앞서 보았던 본문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9-10).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한 책임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봉독한 본문에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이스라엘은 소수를 상징하는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고 하였습니다(6:13). 그러나 그것을 끝이 아닙니다.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하셨습니다. 다같이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6:13).

 

이 말씀을 보면 남아 있는 자에 대해 두 번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전자 남아 있는 자는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될 때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 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란 멸망 받을 자입니다. 반면 후자에 남아 있는 자는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잇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란 멸망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 택하신 남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파멸의 도시’, ‘멸망의 성읍인 이 장망성’將亡城, the City of Destruction,19:18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는 남은 자가 되어야지,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은혜 받지 못한 멸망받을 남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이 후자, 죄악의 도성인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위해 택함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11:3-4). 사도 바울이 구약을 인용했습니다(왕상19:10).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아합의 왕 시대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으로 가득한 그 땅에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겨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 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남은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로마서를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1:5). 아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노아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라는 것에 공감할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나라 전역에 세웠던 아합 왕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라는 것에도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마지막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하기를 소망합니다.

 

남은 자의 신앙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 남은 자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하겠습니까? 분당에 있는 한 교회의 이야기를 하려고합니다. 이 교회는 우리 교회와 같은 총회에 소속된 교회입니다. 담임목사님은 제가 졸업한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의 선배입니다. 그 분이 섬기시는 교회는 만 명의 단위가 넘어섭니다. 신앙은 보수적인 분으로 개신교 새로운 지도자로 불리는 분입니다. 훌륭한 목회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시무하는 부목사가 한 수요예배에 행한 설교로 인해 큰 논란이 인적이 있습니다.

 

정 모 목사는 마태복음 151-11절을 본문으로 지적질인가?, 거룩한 분노인가?”는 제하의 설교를 했습니다. 마태복음 151-11절은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정 목사는 이 성경을 동성애자등 성수소자라는 미명아래 펼쳐지고 있는 퀴어문화축제와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에 대해 연결했습니다. 정 목사는 동성애 자체가 아닌 동성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전제는 동성애 관련 문제는 절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질서에 따라서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준에 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동성애를 찬성한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논란이 된 것은 퀴어 축제에 대한 많은 자료를 찾아봤다. 몇 년 동안의 퀴어축제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 기독교계의 반응, 그 기독교계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젊은이들과 나이 드신 분들의 반응을 봤다, “내가 찾은 결론은 대세는 넘어갔다"고 밝혔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분노를 사는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성애 대세는 넘어 갔으니, 우리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정 모 목사는 또 언론과 이것을 이용하는 정치인들과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인해서 동성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소위 꼰대들의 이야기가 되어져버렸다",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퀴어 축제 앞에 드러누워서 악을 쓰면서 기도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꼰대에 비유하며, 동성애 반대집회를 비꼬는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이어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하고 있는 성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 대해, “자기들 밖에 모르고, 타협하지 않으며, 악만 쓰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다", “동성애 같은 문제에는 난리를 치면서 성경에서 동성애보다 10배는 더 나오는 탐욕에 대해서 시위하고 분노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기독교인들을 폄하하는 발언도 하였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이 다른 죄들도 많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그렇게 반대하지 않으면서, 왜 동성애 죄악에 관해서만,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이냐는 말로 들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성경본문과 시대배경 해석을 도치倒置, 뒤바꾸는 것이고, 우선순위를 세상 언론뉴스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동성애는 한 죄가 아닌, 임박한 심판, 멸망의 척도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 그리고 퀴어문화축제가 종교다원주의로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 궁극적 지향, 배교적 행위에 대한 지식도 일천日淺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사건에 대해 덕망있는 한 신학자는 오늘날 동성애 퀴어축제는 자유의 이름으로 전정한 자유를 파괴하는 인본주의 운동이다.” 하였습니다. 인본주의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어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남녀 양성의 결혼과 가정을 부정하고 해체시키는 제2의 반역The Second Revolt"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동성애는 대세가 이미 넘어갔다는 것은 스스로 포기와 항복 선언을 했다는 점"이라며, 이는 정 목사 한 개인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도 반동성애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는 분들이 있다. 이는 스스로 포기요 항복 선언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눈을 뗀데서 오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탈동성애 운동에서 세상 풍조와 타협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 서야 한다", “오늘날 글로벌 성 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성애 퀴어운동은 성 자유의 이름으로 진정한 성의 존엄과 자유를 오해하여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동성애의 하나님 거역과 사회적 해악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신학자는 결론으로 한국교회는 오늘날 1930년대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로 다가온 시대적 흐름에 대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극복했듯이, 그루터기의 남은 자 신앙으로 이겨 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남은 자 신앙’ ‘Remnant Faith’, 이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일사각오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입니다. 어떤 것에 앞에 우리의 생명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까? 죄악은 끝까지 죄악이요. 진리는 끝까지 진리입니다.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보여주듯이 동성애는 죄악의 프로나운Pronoun, 재앙의 리트머스Llitmus, 심판의 바로미터Barometer입니다. 동성애가 공론화, 일반화, 법제화 되었다는 것은, 그 외 수많은 죄악은 이미 가득 찼다는 얘기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입니다.

동성애는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죄악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동성애로 대표되는 죄악은 죄이지, 절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사각오입니다. 즉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지 못하면, 항복하거나 타협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한국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꼽히는 분이 섬기는 교회 강단에서 전해졌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죽으리라 일사각오를 갖지 못하면, 교회 강단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어떤 믿음을 가질 위험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이것이 ‘Remnant Faith’, ‘남은 자 신앙’ ‘거룩한 씨’ ‘이 땅의 남은 그루터기’, 바로 우리들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입니다.

 

지난 제110회 총회 신학부 보고에서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25.09.24). 이전까지 총회는 정동수 씨에 대해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고 참여 금지 및 경계 결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금번 총회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정동수 씨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고 못 박은 것입니다. 신학부는 정동수는 자신의 주장을 사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편적인 교회의 속성을 부정하고 한국교회에 성경에 대한 혼돈과 번역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하여 성도들을 혼동케 한다,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제를 단절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고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시 된 것이 정동수 목사가 번역한 킹제임스성경 만을 정경으로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그 외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등은 특정한 세력에 의해 가감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부의 보고는 맞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정동수 목사가 킹제임스성경을 가장 권위있는 성경으로 믿으나, 개역 개정 등 다른 성경을 제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정통교회와 마찰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최소 유감을 표명하지 않은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중의 하나가, 사과하지 않는 오만, 유아독존입니다.

 

이단 규정에 가정 잣대, 첫째는 삼위일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한분 하나님으로 믿는 가입니다. 둘째는 기록론입니다. 예수님 만을 구원자로 믿는 가입니다. 세 번째는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를 믿는가입니다. 정동수 목사가 이 세 가지를 부정하거나 위배하거나 오용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단으로 규정한 총회의 결정을 저는 존중합니다. 정동수 목사의 신학 사상과 설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 목사는 공학박사입니다. 모 대학교의 교수입니다. 그분은 정규 신학을 교육받지 않고, 미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목수 안수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 목사가 목회하는 침례교는 정통교회가 속한 교단이 아닌 정 목사 개인이 하는 교회입니다. 이렇게 혼자 사역을 감당할 때, 문제를 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총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도도 받고 검증도 받고 보호도 받아야 합니다. 성도님들 가운데도 기성교회에 실망했다며, 집에서 유튜브 등을 통해 설교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총회 신학부 결정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작년 922-28일 송도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1년간 연구하고 발표했습니다. “로잔대회는 총회와 다른 노선을 가진 교단과 단체에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참석을 금지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게 아니다라며, “총회가 개혁주의 정체성을 분명히 선포하면서, 로잔대회의 주최자가 되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선구자적 역할과 사명을 감당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로잔대회는 총회 신학부 보고대로 우리의 신학, 신앙, 신조와 다른 노선을 가진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석을 금지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니, 큰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한국로잔위원회는 그렇지 않겠지만, 국제로잔대회 본부와 참가 단체 중에는 개신교의 절대적 교리인 삼위일체와 기독론과 이신칭의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연합을 금지할 정도가 아니라고 하니, 말 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나아가 금년 1027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세계복음주의연맹 WEA 14차 서울총회에 대하여, 1년간 조사 후 내년 111회 총회에서 보고하기로 했는데 금번 로잔대회의 보고와 같은 보고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성경에 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정동수 목사의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성경관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inerrancy을 믿습니다. 그러나 WEA는 성경의 ‘무류성’無謬性,infallibility을 말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구원의 교리는 물론 역사와 사실과 과학에 오류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성경의 무류성은 구원의 교리는 틀림이 없으나, 역사, 사실, 과학에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배우면서 대홍수에 대해 나누었는데요. 방주에 승선한 노아와 가족은 구원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방주와 대홍수가 역사적, 사실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나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믿는데,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광풍이 잔잔해졌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성경 무류설은 성경 불오성不誤性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WEA는 성경의 무오성,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들과 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 66권을 하나님 말씀 정경Canon으로 인정하는 성경 무오성inerrancy,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믿는 삼위일체Trinity,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기독론Doctrine of Christ, Christology,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이신칭이Justification by faith, 우리가 믿는 것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고백문인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절대 변개할 수 없습니다.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이것이 ‘Remnant Faith’, ‘남은 자 신앙’ ‘거룩한 씨’ ‘이 땅의 남은 구루터기바로 우리들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끝까지 진리이어야 합니다. 개신교, ‘Protestant’저항하는 자입니다. 진리는 끝까지 진리이다. 세상과 배교에 타협하거나 항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말씀, 믿음, 예수, 진리를 진리되게 하고, 진리가 변질되지 않기를 저항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입니다. 노아의 시대, 아합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인 지금 하나님이 은혜주시고자 위해 택한 남은자입니다.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최종 정리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천상으로 올림을 받았습니다. 그 곳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하나님 위로 천사들이 있는데요. 각 각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은 날개 둘로 얼굴을 둘로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이 찬송이 어찌나 우렁찬지 문지방의 터가 움직이고, 성전에 여기가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것입니다. 놀라운 광경에 이사야는 자신 같이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이 하나님을 보았으니,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천사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가지고와서, 이사야 입에 닿았으니, 너의 악의 사해졌다고 하였습니다(6:1-3).

 

죄 사함 받은 이사야 앞에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낼까물었고, 이사야는 자신이 가겠다고 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을 것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이 다 황폐할 때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가 없도록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그 황폐한 땅에 십분 일이라는 소수가 남았을 지라도, 그들마저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6:8-13).

 

신약에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아 구원 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이 우둔하게 내버려 두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11:7-9). 이 우둔은 완악이라는 뜻입니다. 일을 많이 하면 손에 굳은 살이 박이듯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귀가 안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구원받고 싶었는데도 못 받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둔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은혜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의 본성적인 우둔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둔한 자들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밤낮없이 추구하는 육적인 관심사를 상징하는 밥상이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그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그 밥상이 좋은 것이 아니요, 올무가 되어 저주가 된 것입니다. 잘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잘사는 것이 복음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즉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의 하나가 잘사는 것, 건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경고하신 그대로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전부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멸망 받도록 우둔하게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친구가 술을 권유해서 마시고, 음주운전까지 해서 큰 사고를 내었습니다. 그러면 경찰에게 술을 먹게 한 친구 잘못이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러니저러니 하고 변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가 져야 합니다.

 

특별히 유식하다는 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어떻게 누구는 우둔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멸망 받게 하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죄악 된 인간 본성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멸망 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창세 전 택하셔서, 구원받게 되는 은총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믿는 것은 백퍼센트 자신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다면, 선택받았다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나를 구원하느라, 하나님의 관심권 밖에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야곱이 하나님께 왜! 형을 버렸느냐고 따릴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기가 선택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누구는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나의 전도 대상자가 구원 받은 자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아니라, 우둔한자로 남은 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의 전도 대상자를 위해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택함 받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두 남은 자를 말씀합니다(6:13).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그래서 그대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망성 멸망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남은 자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한국교회 중 차세대 리더로 손꼽히는 분께서 담임하시는 강단에서, 부목사가 행한 동성애에 관한 설교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지만, 동성애에 대한 대세는 끝났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꼰대라고 비유했습니다. 그가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지식과 역사의 인식이 얼마나 단천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동성애로 대표되는 악 앞에 스스로 항복을 선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북이스라엘 전역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가득했던 아합 왕의 시대에도,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었듯이,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동성애 등 성의 자유의 이름으로 진정한 성의 존엄과 자유를 오해하여,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의 하나님 거역과 사회적 해악을 직시해야 합니다. 동성애는 임박한 종말을 알리는 심판의 잣대입니다. 그것이 이 나라와 세계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때, 주께서 재림하시고,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멸망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악은 끝까지 죄악이요. 진리는 끝까지 진립니다. 동성애에는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죄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복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악은 죄이지, 절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사각오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죽으리라 일사각오를 갖지 못하면, 교회 강단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어떤 믿음을 가질 위험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금번 사건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가 마지막 때의 신앙을 찾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하셨습니다(6:13).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거룩한 씨’, ‘이 땅의 그루터기, 바로 끝까지 진리를 수호하는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이것이 ‘Remnant Faith’, ‘남은 자 신앙바로 우리들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① 죄인인 인간의 본성적인 우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관심사를 상징하는 잘 먹고 잘 사는 밥상이 올무가 되어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하지 않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이 우둔하도록 내버려 두어 구원 받지 못했다고, 책임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죄악 된 인간 본성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멸망 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창세 전 택하셔서, 구원받게 되는 은총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후자가 되게 하옵소서.

 

③ 우리가 선택 받았다는 것은 누군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관심 밖에 있게 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중보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④ 남은 자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대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남은 자,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은 자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장망성, 멸망의 세상에서도, 택한 받은 남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⑤ 죄악은 끝까지 죄악이요. 진리는 끝까지 진립니다. ‘거룩한 씨’, ‘이 땅의 그루터기, 바로 끝까지 진리를 수호하는 일사각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남은 자 신앙을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