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Love one Another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요한일서 4:10-12 2023.01.01. 新年感謝主日禮拜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7-12)
성탄축하예배의 첫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사람이 아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전하게 하셨습니다(눅1:26-31). 인간에 의해 전달될 경우 발생하게 될 여러 논란을 차단하신 것입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한 것은 이러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예수님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인간이 전혀 개입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성탄축하예배의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에 이 땅에서 태어난 인간이 가진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녀의 몸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나셨습니다(창3:15;사7:14). 예수님은 성령으로 통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눅1:34-35). 그러므로 이 땅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가진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참고/요일3:5).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탄생의 역사는 하나님만 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느 피조물도 개입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성탄축하예배의 세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뜻입니다(마1:21).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오신 구원자이십니다(사7:14). 예수님의 이름을 뜻하는 ‘예수아’의 고대 히브리어 뜻을 보면 ‘hand two tent peg see’입니다. ‘손에 2개의 못을 보라’입니다. 손에 두 개의 못이 박히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곳에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축하예배의 네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은 ‘큰 자’이십니다(눅1:32-33).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 중 한 왕이 아니라 왕 중의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계19:16).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신 것입니다(딤전6:15.참고/요1:2-3,3:35,5:22). 이러한 큰 자이신 예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큰 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데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성탄축하예배의 다섯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입니다(눅1:32).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눅1:35).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골1:15).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를 믿어라, 너희들이 본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믿지 않는 자는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요3:16-18).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성탄의 소식을 듣고 구원받아 심판받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탄의 소식을 받는 마리아에게 ‘은혜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고 하였습니다. 성탄의 소식을 받은 우리도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성령충만함’으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고 하였습니다(눅1:41-42). 성탄의 소식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가장 큰 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하였습니다. 성탄을 소식을 믿은 우리에게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
2023년 신년감사주일에 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금년에도 오직 주님과 동행하세요. 선한 하나님의 인도를 축복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국회의원이요, 판사에다, 학문에 정통한 교수였습니다. 이 사람에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마음속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간절함을 안고 늦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요3:1-2). 사마리아 수가성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을 여섯 명이나 거쳤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원하는 이성과 한 번쯤 살아 보았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무언가 자기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갈함이 남아 있음을 느꼈습니다(요4:9). 유대의 한 마을에 부자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위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돈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았던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쾌락을 위해 술도, 여인도 가까이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재물 불리려 대부업貸付業 같은 도적질도 안했고, 꾸어준 돈 제때 안 갚는다고, 채무자 집 몰수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와 달리 극악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이 무언가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를 가득 않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마19:16).
제가 지금 세 사람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또는 만나서 한 공통된 질문이 무엇인 줄 아세요? 표현의 차이일 뿐 그 내용은 모두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삽나이까?” 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 가져볼 것 누릴 것 다 누리고,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데, 영생에 관하여 관심을 가질까요? 그 답은 저와 여러분 인간은 육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영’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이 있으니까 영생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만으로 육은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영은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셨습니다(전3:11;눅21:9;벧전1:9). 영혼까지 채울 수 있는 것을 얻지 않고는 인생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채워줄 사랑이 있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 영의 세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데도 영생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도피처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현실을 한번 즐겨보자, 그리고 잊어보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한다’고 말씀합니다(딤후3:2-4). 이 세 가지 우상을 앞에 놓고는 낮에 절하고, 밤에 절하고 새벽에 절합니다. 그들은 그 속에 몰입하면서, 모든 것을 잊어보자고 합니다.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 중,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1888를 기억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남에게 주고 마지막에는 납으로 된 심장만 남은 이 감동적인 글을 쓴 작가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입니다.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치면, 그의 경력이 상당 부분 나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아름다운 글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에서 칭송받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름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내 천재성을 내 삶을 위해 사용했고, 내 작품을 위해서는 단지 내 재능만을 사용했다”는 다소 거만스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했습니다. 심지어는 “나는 고상한 것이 다 싫다. 하나님이고 뭐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골치가 아프고 싫으니까 좀 더 즐기는 방향으로 나가고 싶다.” 그래서 그는 돈과 명예를 있는 대로 즐기는 데에다 쏟아 받쳤습니다. 결혼 후에도 매춘 소년들, 미소년들이 있는 술집을 드나들며, 쾌락을 즐겼습니다. ‘보시’Bosie라는 예명의 ‘앨프레드 더글라스’Alfred Douglas라는 미모의 여인이 아니라, 남자 청년을 만나, 동성애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쓴 ‘행복한 왕자’의 내용과는 그의 삶이 너무도 괴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욕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그 유명한 ‘퀸즈베리 사건’Queensberry's Defense,1895을 겪게 됩니다. 영국 최고의 지성인들만 모이는 사교클럽에서, 퀸즈베리 후작Marquess of Queensberry이 오스카 와일드를 ‘남색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하면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는 이 사건 재판에서 자신의 지위를 믿고, 자신만만했지만,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내가 골방에서 혼자 즐기면서 하던 일 때문에 훗날 내가 지붕 위에서 통곡할 줄은 몰랐다. 내가 쾌락에 나 자신을 맡기자 내 영혼은 이미 방향을 잃었다”고 탄식했습니다. 출소 후, 그의 모든 재산은 사라져버렸고, 아내에게는 이혼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녀 후견인 자격도, 영국 국적도 박탈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재산 상당 부분을 물려주었던 사랑하는 ‘보시’를 찾아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그에게마저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종국에는 감옥에서 얻은 뇌척수막염으로 46세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정말 심각한 문제, 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이 세상에서 즐기고 잘 살다가 끝내자.” 하는 식으로 산다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오스카 와일드를 보면서, “당신을 만족하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사랑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여기에 “나는 정말 어떤 사랑에 만족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사랑을 받는 것 같고, 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의 갈증을 다 앓고 있고, 사랑에 대한 욕구불만 때문에, 가슴속이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자상하게 보살펴 주는데도, 힘들어 지쳤을 때, 아내가 따뜻한 위로를 해주는데도, 매사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남편이 있는데도, 엄마 아빠 부르며 두 손 들고 달려오는 아이들이 있는데요, 어딘가 충족하지 못하는 사랑의 갈증이 있어요.
인간은 남녀 간에 피어오르는 ‘에로스’Eros적인 사랑이나, 혈육 간에, 친구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필로스’Philos적인 사랑만, 가지고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냐! 안 그래 나는 부부간의 에로스, 혈육과 친구 간의 필로스로도 충분해”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그런 위선과 가식은 여러분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나에게 솔직히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 이 정도는 인정해야 대화가 되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죠! 여러분! 인간은 동식물이 아니에요.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암꽃 수꽃이 서로 꽃가루를 나누어서 번식하듯이, 일정 기간에만 암컷이 수컷을 맞이하여, 생산하듯이, 그러한 남녀의 관계가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저급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사랑도 메우지 못하는 공백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의 “이방지대”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영혼”이라고 합니다. 한 번 따라 해주시겠어요. “사랑의 이방지대, 영혼”, 세상에서 만끽할 수 있는 돈과 출세와 명예를 향해 아무리 노력해보십시오. 1년 365일 사랑을 하여도, 이 영혼의 사랑의 갈증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으로도 메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잠19:8). 참 지혜자는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을 찾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인간의 육이 전부로 아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요. 인생을 헛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말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완전하지 못하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영혼에게는 창조자를 찾는 본연의 끝없는 절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고, 아버지를 찾는 본능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가서 위로하고, 장난감을 주고, 맛있는 것을 줄지라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엄마를 찾는 애절한 소원과 갈증,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채워줘도 메우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 영혼 속에는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찾아 애타게 호소하는 공백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에게서 난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주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성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몹시 귀찮게 생각합니다.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사는 인생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32:15).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내가 주인이요, 그러니 ‘오스카 와일드’ 같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이든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도저히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마 닥뜨리게 됩니다. 혹은 자신의 과시하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앉게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퀸즈베리 사건으로 몰락한 것 같이 말입니다. 또는 가장 소중한 것을 비극적인 사고로 잃게 됩니다.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위기입니다. 무슨 위기요 바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가 찾아올 때, 모든 인간은 그동안 자기 자신을 포장했던, 위장의 커플이 다 벗겨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능을 속일 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까? 왜! 찾습니까? 나는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세상의 그 어떤 눈에 보이는 사랑을 가지고도,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354-430이라고 하는 유명한 교구가 있습니다. 서양사를 공부하신 분이면, 좀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가 없다.” 집을 떠난 자녀가,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인간은 그 사랑을 다시 찾아가기 전에는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 진정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의 에로스나, 친구와 형제간의 필로스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Agape입니다.
어느 사람이 영혼의 갈급함까지 채워줄 수 있습니까?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라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아내라도, 자기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다 바쳐 키운 자녀라도, 영혼 깊은 곳에서 찾아 헤매는, 진정한 사랑을 절규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에 대해 응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부간의 사랑,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이 샘솟는 곳, 우리 인생의 갈급함의 영의 문제가 해결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곳은 ‘갈보리’Calvary라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언덕 ‘골고다’를 라틴어로 ‘칼바리아'Calvaria라고 하고, 이것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 갈보리입니다(마27:33;막15:22;요19:17).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 하나만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그 몸에서는 핏방울이 오늘도 끝없이 끝없이 이 땅의 온 인류를 향하여 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2023년 첫 주일 신년감사주일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그곳 갈보리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받으신 분도 받아도 받아도, 더욱 새로운 갈보리 사랑에 다시금 흠뻑 젖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요일4:10) 이 구절은 대단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잘 새겨들어보십시오. ‘사랑은 여기 있다’는 말은 “다른 곳에는 사랑이 없다. 여기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랑이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채워줄 사랑이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 말이 강조 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장 맨 앞에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 네 영혼이 찾는 사랑은 여기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십자가가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일4:10).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죄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만이 인간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을 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 어찌해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십니까?”하고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뜨거워질 정도로,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이 십자가 사랑의 놀라운 진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조건’인 사랑이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는 말씀대로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無條件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땅 위의 많은 사람이 사랑을 예찬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데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 천년 성을 쌓은 것 같은 사랑도 다음 날 아침에 “나 당신 싫다”라고 한마디 해버리면, 등 돌리고, 남남이 되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 속은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실연의 아픔을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새 출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분명한 것은 사람의 사랑은 절대로 사람을 책임질 수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이타적’인 사랑이다.
두 번째로 본문 말씀에 담겨진 진리는 십자가의 사랑은 바로 우리들을 위하여 주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 사랑이 필요할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손해 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게하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음까지, 감수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사랑 순수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죄를 전부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세 번째,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을 화목제로 바친 곳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한 교회의 목회자의 자녀가 여덟입니다. 연세가 들기는 했습니다만, 어쩌면 그렇게 자녀를 많이 나셨는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신 분이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허락하셨습니다. 옛날 같으면 자식들이 많으니, 큰소리치면서 살 수 있는데, 요즘은 사정이 달라,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지요. 그렇게 고생하는 가운데서도, 그 팔 남매가 잘 자라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또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홉이 됐어요. 그래서 사모님이 멋쩍어서 하시는 말이 이렇습니다. “아, 이 아홉 번째 애가 생겼을 때, 우리 부부가 이렇게 의논했어요. 아홉 명 중에서, 한 둘은 우리 형님 댁에 주고, 또 동생 집에도 주고, 그러자고요. 그 집에 애들이 적으니까 좀 나누어 갖자고 하고, 그것을 꼭 지키기로 약속했는데, 막상 애를 낳아놓고는 그 좁은 방에다, 흥부 식구처럼 일렬종대로 아홉 명을 눕혀놓고, 저녁에 이부자리 하나를 딱 펴서 자는데, 내려다보니, 어떻게나 사랑스러운지, 어느 놈을 뽑아서, 형님 집을 갖다 줄꼬, 어느 놈을 뽑아서, 동생 집을 갖다 줄꼬, 아무리 쳐다봐도 뽑아낼 애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아홉 명을 다 키우자고 했지요.”
지난 번에 어느 모임에 갔는데, 한 사모님께서 자녀가 넷인데요. 막내가 중학생이 되었답니다. 그러니 어리광부리는 짓을 이제는 잘 하지 않겠지요. 그렇게 되니 사모님 마음이 너무 허전하더랍니다. 자식 사랑을 잃어 가는 것 같은 것이지요. 넷으로도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자식이 넷이 되었건 아홉이 되었건, 자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기 아들, 자기 딸을 내줄 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켜 주셨습니다. 아들이 아홉 아니, 둘 셋 되는 것도 아니에요 ‘독생자’입니다.
최대의 희생, 최대의 대가를 지불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왜! 갈보리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피를 다 쏟고, 나중에는 물까지 다 쏟으신 줄 아십니까?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아야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따라갈 수 없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대단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갈보리에 서 있는 십자가는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까지 채워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예수님께서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이방지대인 영혼을 채워 줄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된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을 찾지 못하는 인간은 방황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저와 여러분은 사랑의 이방지대인 영혼까지 채울 수 있는 사랑,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부르고 있습니다(요일4:11). 왜! 부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하나님의 무조건이고, 이타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은 예수님의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은 지난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저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셨습니다(요13:4-5). “12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가르치심을 이어 가시던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요13:21). 그러시고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26-27,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 함께했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떠나고 11명의 제자만이 남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New Command, Love one Another” 예수님의 새로운 명령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이 자리는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떠나고, 11명의 제자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요13:35). 이 말씀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간의 사랑입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제자, 교회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요13:14-15). 이 말씀을 서로 사랑과 연결하면, 발을 씻겼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였습니다(11).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우리는 꼭 해야 합니까?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은 영혼을 채워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전핼 줄 때, 내게 더 사랑은 넘칩니다. 사랑은 베풀수록 풍성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겉은 메이크업에 명품에 고급 승용차에 번드르르 하지만, 서론에 말씀드린 대학교수요 국회의원이요 판사인 니고데모와 같이, 여섯 명의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남자와 살아본 수가성 여인 같이, 도덕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던 부자 청년같이,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다 가져보았는데도, 어딘간 허전함을 갖고 있지 않던가요? 만나면 매일 같이 남편 자랑 자식 자랑 새로 산 아파트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얼굴에 근심이 흐르지 않던가요? 멋진 슈트 차려입고, 잘나가는 직장에서 존경받으며, 헬스에 레저에 누리며 사는데도 간혹 한숨을 쉬고 있지는 않던가요?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했어요. 영혼을 채워주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언젠가는 예배당의 문을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솔깃도 안 하다가, “같이 교회 가자”라는 말에 발걸음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불가지론’不可知論,Agnosticism, 아예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다가, 찬양 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하여, 하나님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다가, 말씀이 귀에 들려 오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잘 분별하여 바싹 다가서, 손을 잡고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웃사랑을 넘어 교회 공동체 사랑, 서로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이 자신의 존재에 영혼이라는 영역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먼저 교회 공동체의 사랑,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고, 실천해야 하고, 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12).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서로 사랑입니다. 그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사랑이고, 교회 공동체를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 인 것입니다.
정리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
2023년 신년감사주일에 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지금의 국회의원, 판사, 교수입니다(요3:1-2). 사마리아 수가성에 여인은 남편을 여섯 명이나 거쳤습니다. 원하는 이성과 모두 살아보았습니다(요4:7). 유대의 한 마을에 부자 청년은 돈 만 많은 것이 아니라, 흠결없을 정도로 도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마19:16).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고, 만나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육만이 아니라, ‘영’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만으로 영까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셨습니다(전3:11;눅21:9;벧전1:9). 영혼까지 채울 수 있는 것을 얻지 않고는 인생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채워줄 사랑이 있을까?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1888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큰 성공을 거두고 “나는 내 천재성을 내 삶을 위해 사용했고, 내 작품을 위해서는 단지 내 재능만을 사용했다”, “나는 고상한 것이 다 싫다. 하나님이고 뭐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골치가 아프고 싫으니까 좀 더 즐기는 방향으로 나가고 싶다.”며 미소년과 동성과도 즐기는 데 돈과 명예를 사용했습니다. 정작 자신은 ‘행복한 왕자’의 내용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최고의 지성인들만 모이는 사교클럽에서, 퀸즈베리 후작이 오스카 와일드를 ‘남색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내가 골방에서 혼자 즐기면서 하던 일 때문에 훗날 내가 지붕 위에서 통곡할 줄은 몰랐다. 내가 쾌락에 나 자신을 맡기자 내 영혼은 이미 방향을 잃었다”고 탄식했습니다. 출소 후, 그의 모든 재산은 사라져버렸고, 아내에게는 이혼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녀 후견인 자격도, 영국 국적도 박탈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재산 상당 부분을 물려주었던 동성 연인를 찾아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그에게마저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뇌척수막염으로 46세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정말 심각한 문제, 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이 세상에서 즐기고 잘 살다가 끝내자.” 하는 식으로 산다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참고/딤후3:2-4).
인간은 남녀 간에 피어오르는 ‘에로스’Eros적인 사랑이나, 혈육 간에, 친구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필로스’Philos적인 사랑만, 가지고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동식물이 아니에요.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암꽃 수꽃이 서로 꽃가루를 나누어서 번식하듯이, 일정 기간에만 암컷이 수컷을 맞이하여, 생산하듯이, 그러한 남녀의 관계가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저급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사랑도 메우지 못하는 공백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의 “이방지대”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영혼”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만끽할 수 있는 돈과 출세와 명예를 향해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영혼의 사랑의 갈증은 메우지 못합니다.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잠19:8)). 참 지혜자는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을 찾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인간의 육이 전부로 아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요. 인생을 헛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말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의 영혼에는 창조자를 찾는 본연의 끝없는 절규가 있습니다.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찾아 애타게 호소하는 공백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주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그런데 인간의 심성은 하나님을 몹시 귀찮게 생각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싶어 합니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32:15).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내가 주인이요, 하고 싶은 대로 다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이든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도저히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마 닥뜨리게 됩니다. 혹은 자신의 과시하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앉게 됩니다. 또는 가장 소중한 것을 비극적인 사고로 잃게 됩니다.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위기입니다. 무슨 위기요 바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위기입니다. 위기에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까? 왜! 찾습니까? 나는 그분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세상의 그 어떤 눈에 보이는 사랑을 가지고도,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354-430은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의 에로스나, 친구와 형제간의 필로스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Agape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이 샘솟는 곳, 우리 인생의 갈급함의 영의 문제가 해결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곳은 ‘갈보리’Calvary라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언덕 ‘골고다’를 라틴어로 ‘칼바리아'Calvaria라고 하는데요. 이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 갈보리입니다(마27:33;막15:22;요19:17).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 하나만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그 몸에서는 핏방울이 오늘도 끝없이 끝없이 이 땅의 온 인류를 향하여 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2023년 첫 주일 신년감사주일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그곳 갈보리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받으신 분도 받아도 받아도, 더욱 새로운 갈보리 사랑에 다시금 흠뻑 젖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요일4:10) “다른 곳에는 사랑이 없다. 여기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랑이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채워줄 사랑이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원문에는 “사랑은 여기 있다. 네 영혼이 찾는 사랑은 여기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십자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일4:10).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죄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만이 인간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을 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조건’인 사랑이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無條件인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예찬하고, 노래하고,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데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속는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실연의 아픔을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분명한 것은 사람의 사랑은 절대로 사람을 책임질 수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이타적’인 사랑이다.
두 번째,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손해 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 님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음까지, 감수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사랑 순수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적’利己的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죄를 전부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을 화목제로 바친 곳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한 교회의 목회자의 자녀가 여덟입니다.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아홉째가 생겼습니다. 이에 큰마음 먹고 한둘을 형님과 동생 집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이부자리 하나를 딱 펴서 자는데, 내려다보니, 어떻게나 사랑스러운지, 어느 놈을 뽑아서, 형님 집을 갖다 줄꼬, 어느 놈을 뽑아서, 동생 집을 갖다 줄꼬, 아무리 쳐다봐도 뽑아낼 애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아홉 명을 다 키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자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기 아들, 자기 딸을 내줄 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켜 주셨습니다. 아들이 아홉 아니, 둘 셋 되는 것도 아니에요 ‘독생자’입니다.
최대의 희생, 최대의 대가를 지불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왜! 갈보리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피를 다 쏟고, 나중에는 물까지 다 쏟으신 줄 아십니까?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아야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따라갈 수 없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대단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갈보리에 서 있는 십자가는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까지 채워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예수님께서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이방지대인 영혼을 채워 줄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된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을 찾지 못하는 인간은 방황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저와 여러분은 사랑의 이방지대인 영혼까지 채울 수 있는 사랑,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랑을 받은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부르고 있습니다(요일4:11). 왜! 부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하나님의 무조건이고, 이타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서로 사랑’은 예수님의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셨습니다(요13:4-5). 그리고 가르치심을 이어 가시다가,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요13:21). 최후의 만찬에는 가룟 유다가 떠나고, 11명의 제자만이 남았고, 그들에게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0,34).
“New Command, Love one Another” 예수님의 새로운 명령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이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제자, 교회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11).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우리는 꼭 해야 합니까?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은 영혼을 채워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남에게 전해 줄 때 내게 더 충만해 집니다. 사랑은 베풀 때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겉은 메이크업에 명품에 고급 승용차에 번드르르 하지만, 서론에 말씀드린 대학교수요 국회의원이요 판사인 니고데모와 같이, 여섯 명의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남자와 살아본 수가성 여인 같이, 도덕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던 부자 청년같이,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다 가져보았는데도, 어딘간 허전함을 갖고 있지 않던가요? 만나면 매일 같이 남편 자랑 자식 자랑 새로 산 아파트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얼굴에 근심이 흐르지 않던가요? 멋진 슈트 차려입고, 잘나가는 직장에서 존경받으며, 헬스에 레저에 누리며 사는데도 간혹 한숨을 쉬고 있지는 않던가요?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했어요. 영혼을 채워주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언젠가는 예배당의 문을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 같이 인생의 위기가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잘 분별하여 바싹 다가서 손을 잡고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웃사랑을 넘어 교회 공동체 사랑, 서로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이 자신의 존재에 영혼이라는 영역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12).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서로 사랑입니다. 그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사랑이고, 교회 공동체를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 인 것입니다.
결론
인간이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어떻게 가능한가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중심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묵상입니다. ‘갈보리’Calvary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 하나만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그 몸에서는 핏방울이 오늘도 끝없이 끝없이 이 땅의 온 인류를 향하여 떨어지고 있습니다. 갈보리 사랑에 다시금 흠뻑 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갈보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시고 가시관으로 온 얼굴에 피범벅이 된 그분의 얼굴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공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뼛조각과 납덩이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에 깊은 골이 진 밭고랑 같은 등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같은 죄인을 위해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다 해갈하고 넘치도록 마음에 차는 사랑은 갈보리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거기에 큰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세상이 가득 차고 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앞에 들어갑시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몸을 던집시다. 이렇게 우리가 항상 갈보리를 묵상하면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 사랑, 희생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2023년 1년 동안 기쁜 일이 있고, 감사한 일이 있고, 행복한 일이 있어도, 갈보리를 묵상합시다. 슬픔이 있고, 장벽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갈보리를 묵상합시다. 그러면 지금도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나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공동체 가족인 성도들 서로 사랑으로 섬길 수 있고, 그들의 영혼 또한 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갈보리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서, 기쁜 일, 감사한 일, 행복한 일 만이 아니라, 슬픔과 장벽과 고난에도 승리하는 올해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2023년 사람의 사랑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의 화술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의 마음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 갈보리의 십자가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에 흠뻑 빠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2023년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잊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의 혼란, 방황, 갈증을 잘 분별하여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2023년 기쁜 일, 감사한 일, 행복한 일에도, 슬픔과 장벽과 고난에도, 갈보리 십자가를 묵상하고,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채우고 흘러넘쳐, 서로 사랑으로 교회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승리하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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