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에서 백배의 결실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13:3-8,19-23 2023.01.08. 主日禮拜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38-8,19-23)
2023년 우리 교회 Slogan은 “서로 사랑하라”Love one another입니다. 지난주 신년 첫 주일을 드리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영생’Eternal Life,永生에 대하여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이유는 인간은 육만이 아니라, ‘영’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전3:11;눅21:9;살전5:23;벧전1:9). 인간은 남녀 간에 피어오르는 ‘에로스’Eros적인 사랑이나, 혈육 간에, 친구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필로스’Philos적인 사랑만, 가지고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어떤 사랑도 메우지 못하는 공백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의 “이방지대”가 있습니다. “영혼”입니다. 이곳을 채워줄 사랑은 영원한 사랑, ‘아가페’Agape입니다. 이 사랑을 찾는 자가 지혜자라고 말씀합니다(잠19:8). 우리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있는 곳은 ‘갈보리’Calvary입니다(마27:33;막15:22;요19:17). ‘사랑은 여기 있으니.’(요일4:10) 이 갈보리에 사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요일4:10).
갈보리 십자가는 첫째 ‘무조건’無條件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인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예찬하고, 노래하고,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데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손해 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음까지, 감수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세 번째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기 아들, 자기 딸을 내줄 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켜 주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서로 사랑’을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도 떠난 다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이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였습니다(요일4:11).
주변에 가져볼 것 다 가져보았는데도, 어딘가 허전함을 갖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한숨을 짓는 분들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혼을 채워주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언젠가는 예배당의 문을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잘 분별하여 바싹 다가서 손을 잡고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 공동체 사랑, 서로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이 자신의 존재에 영혼이라는 영역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것입니다(요일4: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서로 사랑입니다. 그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습니까? ‘갈보리’Calvary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에는 단지 십자가 하나만 있습니다. 그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비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그 몸에서는 핏방울이 오늘도 끝없이 끝없이 이 땅의 온 인류를 향하여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시고 가시관으로 온 얼굴에 피범벅이 된 그분의 얼굴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공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뼛조각과 납덩이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에 깊은 골이 진 밭고랑 같은 등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같은 죄인을 위해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다 해갈하고 넘치도록 마음에 차는 사랑은 갈보리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거기에 큰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세상이 가득 차고 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앞에 들어갑시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몸을 던집시다. 이렇게 우리가 항상 갈보리를 묵상하면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 사랑, 희생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기쁜 일이 있고, 감사한 일이 있고, 행복한 일이 있어도, 갈보리를 묵상합시다. 슬픔이 있고, 장벽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갈보리를 묵상합시다. 그러면 지금도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나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공동체 가족인 성도들 서로 사랑으로 섬길 수 있고, 그들의 영혼 또한 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갈보리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서, 기쁜 일, 감사한 일, 행복한 일 만이 아니라, 슬픔과 장벽과 고난에도 승리하는 올해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네 곳에 뿌려진 씨앗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신년 첫 주간 승리하셨어요’ ‘금주도 주 안에서 승리하세요’ ‘함께 승리합시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이렇게 네 곳에 씨가 뿌려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중 싹이 나고 자라 열매 맺고 수학할 수 있는 곳은 ‘좋은 땅’입니다. 아주 단순한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귀중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렵게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익숙히 보고 들은 것들을 예화로 하나님 나라의 깊은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은 2천 년 전, 당시대 사람들이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의 먹이가 되어 버립니다. 청라에 조경을 많이 해 놓지 않습니까? 그 수목과 화초들이 모두 열매를 맺게 되는데요. 주로 참새와 비둘기들의 먹이가 됩니다. 노방전도를 하다 보면 새들의 먹이 활동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참 신기해요. 그 가느다란 가지에 올라 않아 까맣게 익은 열매를 따 먹는 것을 보면요. 한 번은 약간 놀란 적도 있어요. 참새가 꿀을 따라온 꽃 벌을 잡아먹는 거예요. 먹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시대가 바뀌면서 새들로 습성이 새롭게 변화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활동은 길가에 떨어진 열매나 음식물들입니다. 이것이 가장 오랜 된 새들의 먹이 활동 중 하나죠. 이렇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 새들이 먹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흙이 얇은 돌밭에 씨가 떨어졌습니다. 흙이 있기에 뿌려진 씨에서 싹이 트기는 하 지만 돌밭인 까닭에 뿌리가 내리지 못하는 것이죠. 하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 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라 버립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도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가시덤불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씨앗 보다 가시덤불이 더 자라버려 씨앗의 ‘기운’, ‘Breath’ 생명을 막아 버렸습니다. 오직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그 밭에 따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길 가’, ‘돌밭’, ‘가시떨기’는 불신자를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본문의 의도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도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19), ‘말씀을 듣고’(20), ‘말씀으로 말미암아’(21), ‘말씀을 들으나’(22)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말씀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길가’도, ‘돌밭’도, ‘가시떨기’도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교회를 많이 다녔건 출석을 몇 번 하지 않았건, 예배를 드렸었기에 말씀을 들은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었으나 그 후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좋은 땅’의 주석을 듣기 전, ‘길 가’,‘ 돌밭’, ‘가시떨기’에 관한 비유 잘 알아야 합니다.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 비유들을 해석할 때 어떤 유명 신학자와 목회자의 말이 아닌 예수님이 직접 주해한 것을 나누기 원합니다.
‘길가’ - 하나님 말씀을 빼앗기지 말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마13:19).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길가에 씨앗이 뿌려진 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자, 즉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것을 새가 날아와 길가의 씨앗을 먹어 버린다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것이 담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모든 성도에게 그렇게 하듯 깊은 사랑을 다한 새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출석하기 전 그의 남편분이 먼저 교회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한 6개월 정도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천국에 가셨는데요.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를 제가 집례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렇게 강퍅하게 마음을 닫고 계시던 부인이 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그 성도님이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많이 입원하셨는데요. 병원에도 참 많이 찾아갔습니다. 교회 재정이 여유롭지 못했지만, 봉투와 과일 등을 꼭 챙겨 드렸습니다. 어떤 날은 문병하러 가니, 제 손만 물끄러미 쳐보시더라고요. 저는 그의 가정이 어려운지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말씀드린 데로 교회에서 장례를 주관하는데도 참 정성을 다했습니다. 물질적인 부분도 진행 과정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인사치레라도 안 나오실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몇 번 출석하셨어요. 그런데 그런 말을 남기시던 군요. “말씀이 안 담긴다고요”, “마음에 담아지지 않는다”라고요.
이분의 남편이 먼저 돌아가셨다고 했잖아요. 생전에 아내와 자녀들을 몹시 힘들게 하시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생 말년에 교회 사모를 만나 전도를 받아 복음을 듣고 난 후, “예수님은 ○○○성도님의 구원자세요.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했더니 그대로 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두 달 만에 돌아가신 것에요. 그러면 그분이 천국에 가셨겠어요. 못 가셨겠어요. 당연히 가셨죠. 일생 아내와 자녀들 힘들게 하고, 고생시킨 분은 단번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고요. 우리가 그렇게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신 분은, 끝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씀이 마음에 담아지지 않네요.” 하였습니다. 바라기는 그분이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다면 꼭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담아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악한 자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영적으로 큰 불행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모임에서 목사님들 한 50여 명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성도님들 ‘예배관’이 대화 주제가 되었습니다. 현대 교인들의 예배관 말입니다. 오늘날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 “은혜받으러 간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예배 영역 가운데 은혜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러 가는 목적이 은혜받으러 간다와 교회에 가는 것이 동격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예배드리러 가는 것이 은혜받으러 가는 것이다’라고, 여겨진 것이 언제부터인가요? 2천년대 들어서, 1990년대, 1980년대 아니면, 그 이전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언제부터인가요? 제가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 우리 어머니들 당시 교회의 권사님들 장로님들 입에서 교회 갈 때, 은혜받으러 간다는 말 저는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에 오면 일단 회개의 기도부터 하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되면, 하나님께 자신을 산 제물로 받아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분들은 예배를 통해 ‘은혜를 달라’, 그러한 말보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간절한 소망을 드렸습니다. 말 그대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게 죽게 하시고 구원을 주신 것, 그것 자체가 가장 큰 은혜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은혜받으러 가는 것이 예배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은혜를 끼치는 목사님을 쫓아 벌 때 와 같이 성도님들이 모여들기도 합니다. 어째 거나 목사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사람들이 따르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는 적어지고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진단해봅니다. 자칫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나의 충족의 변형이 은혜받으러 간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배의 기원인 제사는 자신의 죄를 소와 양에게 전가한 후, 짐승을 잡아 드리는 것입니다. 네 다리를 자르고, 가죽을 벗기고, 장기들을 추출한 후, 살만 각을 떠서, 불에 태웁니다. 짐승을 잡을 때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네 다리를 자를 때, 그 짐승에게 죄를 전가한 자신의 손과 발을 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일에 손대지 않고 찾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지요. 가죽을 벗겨내고 장기들을 추출할 때, 자신의 더러운 죄를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각 뜬 살을 불에 태우면서, 자신의 죄악을 용서받고 하나님에 바쳐지는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 예배의 기원인 제사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요4:24). 예배는 우리의 영이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몸만 와있지 말고, 마음에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다 벗어버리고, 정욕과 욕망의 죄를 회개하고,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진리, “오직 나의 구원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고백을 하며, 드리는 예배가,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신양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예배도,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우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할 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보다, 은혜를 받는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자칫 말씀에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를, 악한 자 사탄으로부터 빼앗기고 있는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리는 것에도, 말씀에 합당한 예배 하나님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예배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지, 내가 만드는 예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의 참된 가르침대로 예배를 드릴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하고 놀라운 은혜를 부음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참된 예배자가 되어, 성경이 증거하는 예배를 드리는 바른 예배관을 가르치는 말씀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예배 안에서 큰 은총과 복을 받게 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나에게 맞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맞는 것에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자 사탄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맞는 내가 만든 신앙생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떨어진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담겨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말씀이 담겨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는 악한 자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빼앗기는 영적으로 큰 불행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도둑질 맞을 수도 있고, 지위를 빼앗길 수도 있고, 명예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시 벌고 찾고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과 다른 신앙은, 영원한 생명, 구원, 천국을 망실 할 수 있기에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마13:19). 여기서 ‘아무나’는 ‘누구든지’입니다. 어느 신분에 있던 그 자리가 그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직함의 명패가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더라도 그것이 그를 살리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영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말씀을 붙들고 있으니까,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 아니겠어요. 어떻게 하던 믿음을 갖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 수 없기에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하나님 존전尊前에 나온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하나님 말씀이 원하는 삶으로 인도하심 받기를 축복합니다.
‘돌밭’ -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자
돌밭에 뿌려지는 씨앗 비유 또한 말씀을 들은 것은 분명합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마13:20). 그리고 돌밭은 말씀을 받고 다가 아니라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길가’에 말씀과 연결을 해 보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돌밭이기에 뿌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기쁨이라는 것은 그 수명이 짧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좋다가도 하루 후 아니 30분 후에도, 나빠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감정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쁨이 왔다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그 이후 뿌리까지 내리면, 즉 신앙이 자리 잡히면 참 좋은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윤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웅변을 잘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군사정권시절이었기에 반공웅변대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출전하면 거의 1등을 했지요. 이 윤리 선생님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었는데요. 저를 잘 보아서인지 큰 대회에 나가게도 해주시고, 교육감상도 받을 수 있게 추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불신자임에도, 사모님이 예수를 믿어 집에서, 지금은 천국가신 영산 조용기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는다고 합니다. 조 목사님의 여러 설교 테이프가 있는데요. 그 가운데 병고치는 신유神癒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 아픈 게 낫는다고 합니다. 배가 아프다가 안 아프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체험을 하고도 교회를 다녀요. 안 다녀요. 안 다니세요.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를 이처럼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쁨이 온다는 것은 귀한 것이고요. 그 후 신앙이 자리 잡히면 금상첨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13:21). 현대인들 가운데 여러 어려움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 분들이 예수를 믿고 우울증에서 고침 받아 삶에 기쁨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함에도 내 인생의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고, 모든 어려움이 한순간에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그 어려운 순간에도 믿음으로 이기려 인내해요. 그렇지만 그 인내가 길지 못한 것이지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그 뜻입니다.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환난이나 박해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환난이나 박해는 세상에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말씀으로 말미암아 즉 말씀 때문에 환난 박해 핍박이옵니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삶을 살려고 할 때, 세상에서 부딪히는 것입니다.
출입문에 “주일은 쉽니다.” 혹은 “일요인은 휴무입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인 점포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안 믿는 분들도 “아! 이 가게 사장은 교회에 나가는 분이구나!”고 생각합니다. 믿는 성도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합당한 일을 이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는 그 가게를 찾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면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믿음을 밝힌 후, 주변 상인들 또한 고객들에게 당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 교회 다니면서 그 정도도 안 해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잖아요.
또 ‘주일은 쉽니다.’는 문구를 보고, 대수롭지 여기지 않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꼭 저렇게 예수 믿는 것 티를 내야 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소한 시비가 있을 때도,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할 수 있는 말 다하지 못하고, 손해가 될 수도 있지요. 이러한 것이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말씀으로 환난이나 박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에이 덕 안 돼! ‘주일은 쉽니다.’ 떼버리자”고 하면 곧 넘어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당당히 밝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어도 조용히 믿지 내가 꼭 교회 나는 것 내세울 필요가 있나!”라는 것은, 사회생활 하는데 크리스천의 처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정진하다가, 당하는 환난이나 박해에서 넘어지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올해 눈이 많이 온 편이죠. 한 번은 아침 8시에 교회에 나왔는데요. 11시까지 세 번 제설했습니다. 계속해서 눈이 오니까요. 눈을 치웠다가 쉬었다가를 세 번 한 것이지요. 교회 앞 도로 건물 주변 뒤편 주차장까지 눈을 쓸고, 삽으로 퍼가면서 눈을 치웠습니다. 예배당 건물에 입주해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눈을 치우는 것은 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쓸고, 라면을 끓여 먹고 커피를 들면서, 제가 할 일을 하다가, 오후 4시경 집으로 갈려고 예배당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건물 한쪽 구석에 눈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에요. 교회 주변에 있는 한 가게 직원이 자기 건물 앞에 고객 주차를 해야 하니까. 그 도로 쪽 눈을 우리 건물에 몰아넣은 것이지요. 그래서 집에 가려고 나서다가 다시 삽을 잡고 치우려고 하는데요. 그 가게 직원이 제 팔을 잡으면서 치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도로가 얼까 봐 자신들이 치웠으니, 그대로 놔두라는 것입니다. 순간 좀 당황도 하고, 불쾌해지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치우려면 자신들 건물 모퉁이 쌓아 놓아도 될 터인데, 남의 건물에 쌓아 놓고, 말입니다. 더욱이 제 팔까지 '탁' 치면서 “치우지 말라고 치울 거면 저 멀리 가져다 버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눈이 온 후 햇살이 쏟아져서, 금세 눈이 녹을 때였습니다. 눈을 앞 도로에 펴면 차들이 지나다니면서, 다 녹아 버리는데, 쌓아 놓으면 그대로 얼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더 말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다툼이 될 것 같아. 제가 삽을 놓고 “아 그러세요. 수고하셨네요. 빙판 될 수도 있었는데 잘하셨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제가 잘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삼일 뒤인 수요일 아침에 와서, 제가 우리 건물 구석에 쌓여 얼어붙은 눈을 도로에 깔았습니다. 그것을 본 가게에 어떤 직원 분이 미안했든지 자신이 같이 치워주더군요. 도로에 깔아 놓은 눈은 한두 시간 만에 녹아 버렸고요. 이렇게 사소한 순간들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도 교회 목사이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요. 이 건물 2층에 4가구 3층에 3가구 일곱 가구가 사는데요. 눈 한 번 치우시는 분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건물 눈 제가 치우고 쓰레기 매일 아침 줍고 한다고 ‘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도,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당하는, 보이는 보이지 않는 환난 고통과 박해 핍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넘어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 자세 그대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 안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안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님들하고도 “이 말은 하지 맙시다” 했으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경우는 누구를 통해 그런 말이 들려와도, “저는 모르는 일이데요”라고 합니다. 말 안 하고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말 안 하고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본문과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에는 ‘돌밭’을 ‘바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눅8:6). 돌밭보다 바위가 주는 의미는 더 크고 단단합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말씀했습니다(눅8:13). 본문에는 ‘뿌리가 없어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였고, 누가복음에는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세상에 부딪히는 환난이나 박해로 넘어지는 자를 누가복음은 ‘배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도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었다면, 믿음이 자리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삶을 위해, 한 걸음씩 내딛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와도 넘어지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길가를 통해서는 말씀을 빼앗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돌밭은 통해서는 말씀을 붙들고 살고자 할 때,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라고, 뒤돌아서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시떨기’ - 하나님의 의와 나라의 열망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13:22). 가시떨기 비유를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자라는 가시떨기, 가시덤불은 4m까지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씨 뿌려진 곳에 가시떨기가 자라면, 그 씨앗 뿌려진 전체를 뒤덮게 됩니다. 씨앗이 안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서 대가 되고 자라기는 자라는데, 씨앗 보다 가시떨기가 자라는 속도와 범위가 더 큰 것입니다. 씨앗의 기운보다 가시떨기의 기운이 더 센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해 예배는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에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덮어 버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인간이기에 이 땅이라는 현실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어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여기에서 자유 함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세상의 염려와 제물의 유혹에서 이기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 너무나도 잘하는 말씀 있지요. 염려함으로 너의 키를 한 자라도 늘릴 수 있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크게 하시는 하나님 아니시냐,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하나님이 기르시지 않느냐, 그것보다 귀한 너희를 기르시지 않겠느냐?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5:25-33)
성도 여러분 아멘이세요. 실상 염려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어요. 고심하면 이마에 주름이 늘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면 방고래 구들장 무너져요.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하늘 아버지는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제가 드리는 얘기를 세상 기준으로 추하게 여기지 않을 줄 알고 합니다. 혹 모르니 양해를 구하고 드립니다. 가끔 아내가 득탐을 해와야. 득탐이 무엇인지 아세요. 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요즘 말인데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 중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오는 것을 득탐이라고 해요. 점잖게 표현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이고요. 주워 온 거예요. 아내가 여기저기서 옷이며 생필품이며 득탐을 해올 때가 있는데요. 저에게는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것도 있고요.
수입에 옷 살 지출을 뺄 수 없을 때, 물질이 부족한 것이 비참해요. 옷이 없어 득탐해 입는 것이 비참해요. 부족한 것은 지출을 안하면 되고요. 득탐해도 처지에 낙담하지 않으면 돼요.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득탐할 수도 있는 거에요. 그러나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고 신세를 한탄하면, 스스로 불행을 자임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오늘 본문의 세상의 염려요. 재물의 유혹입니다. 물질이 없는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재물의 유혹되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이 없으면 없었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비루하게 만들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만큼 물질이 절박하다면,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청아비전교회공동체가족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왜 역사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 말씀을 하시기 전 바로 앞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5:24).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염려는 곧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염려가 바로 재물의 유혹에 빠지게 될 수 있어,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자칫 천륜도 어기는 죄를 범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우리 마음속 깊은 그곳에 영혼을 내리신주
죽음 이기신 영원한 생명을 약속 하시었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몸을 정금같이 하시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매주 주일 설교를 듣고, 어떤 분은 매일 말씀 묵상하면서, 들으면서 자라갈 때, 그 자람보다 가시떨기인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더 자라 덮지 않기를 바랍니다. 길가를 통해서는 말씀을 빼앗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돌밭을 통해서는 말씀을 붙들고 살고자 할 때,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가시떨기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망으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좋은 땅’ - 백배의 결실
이제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대한 예수님의 주석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무엇이 좋은 땅인가라고 했을 때, 지금까지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것을 상기하면 됩니다.
길가, 말씀을 빼앗기는 자가 되지 말고, 돌밭, 말씀을 붙들고 살고자 할 때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가시떨기,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 나를 위한 열망으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는 자가 좋은 땅인 것입니다.
본문과 평행 본문인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눅8:15). 좀 더 구체적으로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말씀을 더하지도 빼지도 가감하지 않고 받겠다는 말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영에 불순물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가감도 개작도 각색도 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말씀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난 후, ‘지키어’라고 말씀합니다.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지만, 뿌리가 내리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 신앙이 뿌리가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돌밭과 환난과 고통에 넘어지고 배반하는 자가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신앙의 뿌리가 내리고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 가감과 개작과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믿으니 믿음이 자라고 신앙의 뿌리가 내리고, 당연히 결실을 맺게 됩니다. 단 그 결실할 때까지 인내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이 자라가지만, 그 자람보다 가시떨기인 세상이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더 자라, 신앙을 덮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는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요. 염려 하면 재물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에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결단을 결실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인내해야 결실할 수 있습니다.
지난 1년간도 교회 공동체를 섬기면서 인내하신 성도 여러분, 가정과 기업의 녹록지 않음에도 인내로 말씀에 순종한 여러분에게, 올해는 반드시 결실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나타나는 2023년 신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도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바랍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이 아멘! 하셨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23). 하나님이 원래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백배입니다. 완전을 상징하는 수 백배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가감하고 개작하고 각색하는 길가가 아니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좋은 땅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그대로 받으면, 하나님도 하나도 부족함 없이 백배를 주실 줄 믿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난 후, 지키면, 돌밭 같이 기쁨으로 끝나고 뿌리가 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에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듣고 지키면 백배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신앙의 자람보다 더 자라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열망을 가지면 백배의 은총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마13:16). 말씀을 보고 듣는 것이 좋은 땅인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마13:23). 금년도 오늘 말씀의 백배의 결실을 맺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씨뿌리는 비유 중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불신자가 아닌 성도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마13:19,20,21,22). 그렇다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교회를 많이 다녔건 출석을 몇 번 하지 않았건 예배를 드렸었기에 말씀을 들은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었으나 그 후는 달랐습니다.
‘길가’ - 하나님 말씀을 빼앗기지 말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마13:19).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자 즉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것이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다한 새신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출석하기 전 남편분이 먼저 교회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한 6개월 정도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천국에 가셨는데요.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를 제가 집례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렇게 강퍅하게 마음을 닫고 계시던, 부인이 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그 성도님 남편이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많이 입원하셨는데요. 문병에도 이후 장례식에도 물질 등 참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고인의 아내가 인사치레로 교회를 몇 번 나오시다가, 그런 말을 남기시던 군요. “말씀이 안 담긴다고요”. 이분 남편이 먼저 돌아가셨다고 했잖아요. 생전에 아내와 자녀들을 몹시 힘들게 하시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생 말년에 전도를 받아 “예수님은 ○○○성도님의 구원자세요.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했더니, 그대로 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두 달 만에 돌아가신 것에요. 당연히 천국 가셨습니다. 일생 아내와 자녀들 힘들게 하고, 고생시킨 분은 단번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고요. 우리가 그렇게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신 분은 끝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씀이 마음에 담아지지 않네요”라며 떠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담아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 “은혜받으러 간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예배 영역 가운데 은혜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러 가는 목적이 은혜받으러 간다와 교회에 가는 것이 동격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예배드리러 가는 것이 은혜받으러 가는 것이다’라고, 여겨진 것이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들 당시 교회의 권사님들 장로님들 입에서 교회 갈 때, 은혜받으러 간다는 말 저는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에 오면 일단 회개의 기도부터 하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되면, 하나님께 자신을 산 제물로 받아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분들은 예배를 통해 ‘은혜를 달라’, 그러한 말보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간절한 소망을 드렸습니다. 말 그대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은혜받으러 가는 것이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은혜를 끼치는 목사님을 쫓아 벌 때 와 같이 성도님들이 모여들기도 합니다. 자칫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나의 충족의 변형이 은혜받으러 간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요4:24). 예배는 우리의 영이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몸만 와있지 말고, 마음에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다 벗어버리고, 정욕과 욕망의 죄를 회개하고,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진리, “오직 나의 구원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고백을 하며, 드리는 예배가,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렇게 예배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우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할 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보다, 은혜를 받는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자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의 참된 말씀을, 악한 자 사탄으로부터 빼앗기고 있는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예배 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지, 내가 만드는 예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의 참된 가르침대로 예배를 드릴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하고 놀라운 은혜를 부음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나에게 맞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맞는 것에 먼저이어야 합니다. 말씀이 담기지 않는 자가 아니라, 말씀이 담겨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는 악한 자 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사람이 돈을 도둑질 맞을 수도 있고, 지위를 빼앗길 수도 있고, 명예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시 벌고 찾고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과 다른 신앙은, 영원한 생명, 구원, 천국을 망실 할 수 있기에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영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6:63). 예수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말씀을 붙들고 있으니까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 아니겠어요. 어떻게 하던 믿음을 갖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 수 없기에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하나님 존전尊前에 나온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하나님 말씀이 원하는 삶으로 인도하심 받기를 축복합니다.
‘돌밭’ -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자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였습니다(마13:20). 말씀에 ‘기쁨’ 즉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돌밭이기에 뿌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기쁨’이 감정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을 뿐 신앙으로 승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고교 때 저의 웅변 실력을 보고, 이끌어 주신 은사가 계신데요.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음에도, 믿음이 신실한 사모님이 틀어주는 신유神癒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 아픈게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을 하고도 교회를 안 다니세요.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가 이런 경우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문제는 여전할 때가 있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 또한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환난이나 박해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마13:21).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삶을 살려고 할 때, 세상에서 부딪히는 것입니다. 출입문에 “주일은 쉽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인 점포가 있습니다. 안 믿는 분들도 “아! 이 가게 사장은 교회에 나가는 분이구나!”고 생각합니다. 믿는 성도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합당한 일을 이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믿음을 밝힌 후, 주변 상인들 또한 고객들에게 당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 교회 다니면서 그 정도도 안 해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잖아요. 또 “꼭 저렇게 예수 믿는 것 티내야 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소한 시비가 있을 때도,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서, 할 수 있는 말 다 하지 못하고, 손해가 될 수도 있지요. 이러한 것이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말씀으로 환난이나 박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말씀을 따라 살기위해 정진하다가, 당하는 환난이나 박해에서 넘어지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에는 돌밭을 ‘바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8:6).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말씀합니다(눅8:13). 본문에는 ‘넘어지는 자’를 ‘배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도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었다면, 믿음이 자리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삶을 위해, 한 걸음씩 내딛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환난과 박해가 와도 넘어지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가시떨기’ - 하나님의 의와 나라의 열망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13:22). 가시떨기 비유를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자라는 가시떨기 가시덤불은 4m까지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서 대가 되고 자라기는 자라는데, 씨앗 보다 가시떨기가, 자라는 속도와 범위가 더 큰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해 예배에 참석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덮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염려함으로 너의 키를 한 자라도 늘릴 수 있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크게 하시는 하나님 아니시냐,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하나님이 기르시지 않느냐, 그것보다 귀한 너희를 기르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6:25-30).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하늘 아버지는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가끔 아내가 득탐을 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다지 나쁘지 않아요. 지금 제가 가진 것보다 나은 것도 있고요. 수입에 옷 살 지출을 뺄 수 없을 때, 물질이 부족한 것이 비참해요. 옷이 없어 득탐해 입는 것이 비참해요. 부족한 것은 지출을 안 하면 되고요. 득탐해도 처지에 낙담하지 않으면 돼요. 세상의 염려요. 재물의 유혹입니다. 물질이 없는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재물의 유혹돼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이 없으면 없었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비루하게 만들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만큼 물질이 절박하다면,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청아비전교회공동체가족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왜 역사하지 않으시겠어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매주 주일 설교를 어떤 분은 매일 묵상하면서 들으며 자라갈 때, 그 자람보다 가시떨기인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더 자라 덮지 않기를 바랍니다.
‘좋은 땅’ - 백배의 결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무엇이 좋은 땅인가요. 길 가, 말씀을 빼앗기는 자가 되지 말고, 돌밭, 말씀을 붙들고 살고자 할 때,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고, 가시떨기,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망으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는 자가, 좋은 땅인 것입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라고 하였습니다(눅8:15).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겠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불순물 없이 가감도 개작도 각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믿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야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말씀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키어’라고 말씀합니다(눅8:15).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 신앙이 뿌리가 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돌밭, 환난과 고통에 넘어지고 배반하는 자가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신앙의 뿌리가 내리고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눅8:15).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 가감과 개작과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믿으니 믿음이 자라고 신앙의 뿌리가 내리고,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단 그 결실할 때까지 인내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염려하면 재물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에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결단을 결실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인내해야 결실할 수 있습니다. 지난 1년간도 교회 공동체를 섬기면서 인내하신 성도 여러분, 가정과 기업의 녹록지 않음에도 인내로 말씀에 순종한 여러분에게, 올해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을 줄 믿습니다.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23). 하나님이 원래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백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개작 각색하는 길가가 아니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좋은 땅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그대로 받으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난 후 지키면, 돌밭 같이 기쁨으로 끝나고 뿌리가 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에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듣고 지키면.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신앙의 자람보다 더 자라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열망을 가지면. 하나님도 하나도 부족함 없이 백배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마13:16). 말씀을 보고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좋은 땅인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마13:23). 2023년도 오늘 말씀의 백배의 열매를 맺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길가’, 말씀을 듣고 담기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담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만드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는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돌밭’ 말씀의 기쁨을 감정의 영역에만 머물지 말고, 신앙으로 승화하게 하옵소서. ‘뿌리’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믿음으로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하나님에 대한 사모를 덮지 않게 하옵소서. 물질이 없는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유혹돼 가는 것입니다. 물질이 절박하다면,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의와 나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좋은 땅’에 ‘백배’를 하나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그대로 받고, 지키어서 핍박과 환난에 넘어지지 않고, 염려로 재물의 유혹을 벗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결단을 열매를 맺을 때 가지 인내하여, 백배를 받는 2023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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