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일념Paul determination
이재현목사
사도 바울의 고별 담화에 나타난 다섯 가지 삶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예루살렘에 가게 되는데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행19:21,20:23-24). 의미심장한 이 말에는 ‘예루살렘’을 통해 가게 될 ‘로마’가 선교의 마지막이자, 순교지가 될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행19:21,23:11.참고/롬1:15). 바울은 이 중대한 순간 ‘말레도’에서, 그 많은 도시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행20:17). 사도 바울은 고별 담화를 통해 먼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20:18). 그러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행했다고 합니까?
겸손
가장 먼저 모든 “겸손”이라고 말씀합니다(행20:19). 에베소에서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하였습니다(행19:11-12). 이렇게 에베소에서 그의 사역은 절정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재림 예수다”고 한마디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것에 겸손했습니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사역지 로마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구금을 당했을 때, 나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인데 하나님이 붙잡아 사용하셨다’고 하였습니다(엡3:7-8). 사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성도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잔멸했던 자이었습니다(행:8:3). 그러한 자신을 친히 만나주신 주님 은혜에 항상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해 아무리 큰 기적이 행해져도, 결과에 도취 되지 않고, 모든 겸손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겸손’으로 교회를 섬깁시다.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께 드린 헌신이 사람들 앞에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잠16:18).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나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눈물
사도 바울이 두 번째 행한 것은 ‘눈물’이라고 했습니다(행20:19). 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눈물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면서 얼마나 울었는가를 한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설혹 울었다고 할지라도, 내 눈물은 어떤 눈물인지, 또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눈물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만일 우는 것은 무조건 저주요, 슬픔은 무조건 부정해야 될 것으로만 알고 있다면,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버린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랍 속담에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비가 와야 합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쏟아질 때,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습니다. 눈물이 없으면, 웃음 그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눈물과 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통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만듭니다. 눈물이 우리의 믿음을 본질로 인도합니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입니다. 젖은 눈에 부활의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애통하는 심령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5:4).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면서, 큰 능력이 나타났어도,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울며불며 매달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나, 이것은 마귀가 주는 소리입니다. 정말 울어야 할 때, 함께 울 수 있는 우리가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
사도바울이 세 번째 행한 것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이라고 했습니다(19.참고/고전9:1-2). “경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시험 가운데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 그중에서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을 통한 시험이었습니다.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말씀하며, 이단의 계략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험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밝히고자하는 노력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입니다(행20:19). 시험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의인이 되었어도, 성숙의 과정 동안 허물을 벗듯 숱한 부족함이 드러납니다. 그로 인해 다른 성도에게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러므로 어떤 간계의 시험에도 참고 주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경외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열정
사도 바울이 네 번째 행한 것에 대하여, ‘유익한 것’이란(행20:20), ‘믿음을 증언한 것’(행20:21) 즉 즉 복음을 일컫습니다. 우리에게 복음만큼 유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공중 앞에서나’ 많은 사람 앞에서든, ‘각 집에서나’ 집 집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동족이던 외인이던 신분고하 남녀노소 식자무식자 부한자빈한자 누구에게든지 가리지 않고 전했다는 것입니다(행20:20-21). 이것은 “열정”입니다. 그렇기에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20:26-27). 이것은 오만의 소리가 아니라 충성을 다한 후회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역에 그리고 내 이웃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통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주 앞에 서는 날, “핑계치 못할 터’라는 당당함을 갖기까지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참고/행20:22-23). 이러한 사도 바울의 복음 증거 열정으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나가기를 축복합니다.
절제
사도바울이 다섯 번째 행한 것은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하였습니다(행20:33). 이것은 “절제”입니다. 교회는 받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지난날 같았으면 응당 내 것으로 취해야 할 순간 “아니지!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드려야지”라며, 타인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것. 내 유익을 타인의 유익으로 바꾸는 크리스천의 고귀한 절제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기 때문입니다(행20:35).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눅6:38).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참고/갈6:2).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소유를 전해 줄 때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아까워도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준다는 정신으로 하여야 합니다.
일념 : 첫날부터 지금까지
첫째는 겸손입니다. 둘째는 눈물이었습니다. 셋째는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는 경외였습니다. 넷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열정입니다. 다섯째는 지난날 내 이익을 앞세우던 것을 타인에도 돌리는 절제였습니다. 이 다섯 가지가 더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날부터 지금까지’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초지일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행20:18).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까지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고. 성산 장기려聖山 張起呂, 1911-1995 박사님은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을 산 분으로 불리는 신실한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최고 학부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에 성공한 의술에 있어도, 당대 세계 최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한 직함보다도, 그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일이 있습니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병원, 간질 환자들의 모임인 ‘장미회’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 창설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 수술을 못 하는 환자들의 비용을 다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환자가 밤에 몰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병원 문을 열어놓은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병원 옥상에 마련된 초라한 숙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625전쟁으로 월남하면서, 데리고 온 둘째 아들 하나를 키우며, 북에 남겨둔 아내와 다섯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소천 하던 날, 그가 평생 동안 봉사했던 병원들과 수십 년간 가르쳐온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한국교회는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를 기리는 묘비에는 “1909년 평북 옹천에서 태어나고, 1995년 서울에서 승천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고 적혀 있습니다. 장 박사님은 실력이면 실력, 영성이면 영성, 삶이면 삶,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이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 고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을 변함없이 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장기려 장로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도전을 줍니다.
사도 바울이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 이 다섯 가지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일념이었습니다. 초지일관 사명을 다한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그러면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행20:35). 우리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섬겼던 것, 기도한 것, 드린 것이 있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지난날 다짐한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다면,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깨우쳐주고 계시는 음성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라면서(행20:32), 하나님에게 뜻을 정했으면, 겸손, 눈물, 경외, 열정, 절제를 첫날부터 지금까지 일념을 갖고 해야 할 것을 간곡히 권면했습니다.
내가 임종의 자리에서 “나는 일생 동안 겸손, 눈물, 시험에도 주를 섬기는 경외, 항상 최선을 다하는 열정, 이익을 버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따라 행한 절제의 삶을 초지일관 살았다”는 말을, 주의 형제와 가족들에게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임종의 자리에서 나를 향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일념대로 삶을 산 사람이라 칭함. 받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의 일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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