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전도Paul preaching
이재현목사
전도 대상자의 유형
우리는 바울이 재판정에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섰지만, 자기 앞 재판 석에 앉아 있은 자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행25:23-27).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그리고 베니게 이 세 사람을 보면,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 흔히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적을 바로 알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듯이, 복음을 효력 있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전도의 대상자들이 어떤 부류인가를 어느 정도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세 사람은 우리에게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베스도Porcius Festus,AD59-62,“‘기쁨’,‘즐거움’,‘명절’”:오해와 편견의 소유자
베스도는 유대의 현직 총독입니다. 그가 재판 석에 앉아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행26:23).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26:24).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돌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스도의 행동을 보면서, 그의 성향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해가 많이 쌓인 사람들입니다. 편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자를 광신자로 취급하고, “예수는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이나 믿는 것이고, 교회는 나약한 자들이나 가는 곳이며, 게다가 성도란 사람들은 다 이중인격자들이다. 목사는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비웃듯이 말하는 대부분 사람은 교회에 대해 자기 나름의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물의를 일으키는 교인은 소수인데, 모든 교인을 그들과 똑같은 부류로 판단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있음에도, 물의를 일으키는 몇 사람을 보고서, 교회 전체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공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베스도 형의 사람들입니다.
아그립바 왕Herod AgrippaⅡ,AD53-100: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사람
그는 예수님 탄생 시 악명 높았던 헤롯 대왕의 증손자입니다.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는 스무 살 내외인 아주 젊은 왕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재판에서 ‘주심’主審입니다(행25:2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그는 유대 나라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대 사회의 모든 물정과 종교에 밝은 사람입니다(행26:3). 그래서 바울은 아그랍바 왕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26:27).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듣던 왕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 다르게 해석하면 “네가 몇 마디 말 가지고 예수 믿게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만”이라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만, 가까이 접근을 하면, 그만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 뒤로 빼는 사람들의 유형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한 시간 두 시간이나 하면서, 끝까지 잘 경청해주고, 정작 “주일예배에 오세요”라고 하면, “저도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교회는 환경이 좋게 열리면 가려고 해요. 생각해 보게요”라면서, 뒤끝을 흐리고, 전도자의 힘을 빼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그립바 형의 사람들입니다.
버니게Bernice,‘승리자’:무반응과 냉소주의
버니게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맏딸로, 아그립바 왕이 남동생이며, 베스도 이전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입니다(행24:24). 버니게는 처음엔 알렉산더의 아들 ‘마르쿠스’Marcus와 결혼하였다가, 그가 죽자 숙부 ‘칼키스’Chalcis와 결혼했고, 그가 사망하자 본문에 재판 주심인 남동생 아그립바에게 와서 얹혀살면서, 마치 왕비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는 이 오누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결혼하였으나, 그를 버리고 다시 동생 아그립바와 동거하였습니다. 훗날에는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Titus, AD.79-81를 유혹 정부가 되어, 황후가 되고자 했던 대단한 여자이었습니다(Josephus).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미모에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에 물든 그녀의 귀에는 한낱 죄수에 지나지 않는 바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춘에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게 살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만하여,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귀에는, “예수 믿고 천국 가자”라는 말이 들어오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불쌍하다.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됐을까? 허우대는 멀쩡한데 왜 저런 짓을 할까?”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즐길 것이 많아질수록,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생길수록,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우리는 적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버니게 형의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복음 들어야 할 자들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전도할 때 만나는 모든 유형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별하여 전도하는데 차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행26:17-18).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소경과 같습니다. 하나님도 못 보고 예수님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들어야만 영적인 소경이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누구도 스스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전도는 어두운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은 그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악령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용서받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후사가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그들이 더욱 잘 이해할 방법을 모색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자의 무장
죄수의 신분이지만 상대가 왕이든 총독이든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세 가지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의 감격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또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3,15). 나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구원의 감격이 바울의 심정을 뜨겁게 만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같은 것이 예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주체치 못하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시는지 정말 신기하구나,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게 되었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록 가난할지라도, 세상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울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당신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자꾸 식을까요? 매우 중요한 이유는 바울처럼 자기를 죄인의 괴수로 보는 시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그래도 좀 낫다.”라는 우월감이 밑바닥에 조금이라도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월감 또는 자기의自己義는 구원의 감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자나, 매일 강단에서 거룩한 말씀만 전하는 목사나 똑같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면 다 죄인입니다. 100% 죄인이 있고 10%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가장 밑바닥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음을 믿고 인식할 때, 그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표정에서 구원이 가져다준 그 기쁨을 상대방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감동으로 뜨거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자존심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왕이나, 총독, 왕비 같은 여자와 죄수로 서 있는 바울을 비교해 볼 때, 바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그들과 비교하여 자랑하고 긍지를 가질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가슴에는 당당한 긍지가 있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는 말 속에는, 나를 본받으라는 자신감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참고/고전4:6,9:4-12;빌3:17;살후3:9).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바울과 같은 긍지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당당했습니다. 가진 것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으로도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을 보면, 이런 긍지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전도는 해야 할 것 같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찾아가서는 집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나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데 남들이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직업이 어떠하던, 누구 앞에서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가진 재산도 별로 많지 않고,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세요. 그게 저는 기쁘답니다. 예수님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그런데 당신은 세상적으로 보면 다 가졌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예수님이 전부랍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긍지가 넘칩니까? 이런 자부심으로 속 사람을 무장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굴하지 않는 그 자부심을 보고서 상대방이 감동을 받습니다.
세 번째 연민의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훨씬 더 불쌍해 보이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당신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그들을 향하여 무엇인가 간절히 애타는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들의 영혼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았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바울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당할 그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세상 사람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으므로 심판이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한 번쯤은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애써 부정합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하는 편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 즉 심판받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 버니게 왕비를 쳐다보면서, 그들이 나중에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느끼는 연민의 정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체,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찢어지도록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만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개 깡패들 협박에 무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하므로 예수 믿을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슴 찢어지는 연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심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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