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브라이즘Hebraism과 헬레니즘Hellenism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갈라디아서 1:6~12 2023.03.26 主日禮拜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7-12)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지만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유대인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참고/행16:1.참고/출2:8,6:20). 디모데는 어머니로부터 말씀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조상부터 하나님을 섬겨온 것을 말하며, 그의 인품은 ‘청결한 양심’이라고 했습니다(3). 청결한 양심’을 ‘순결함’Pure Conscience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KJV). 어떤 자리에서도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리베이트Rebate를 받을 상황이 되어도, 믿는 사람이 받으면 욕을 먹게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범주만이 아니라, 그 이상 이어야합니다. 그들을 전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기억되는 양심. 어떤 사람의 양보로 내가 더 받게 되었을 때 공짜로 얻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때 그 사람 왜 나에게 자기 것을 그냥 주었을까”라고 기억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일들 말입니다. 예전에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남을 대접을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청결한 양심은 기억되는 양심입니다.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아 맞아 그 사람 예수 믿는다고 했지 교회 다니니까 그렇게 한 것이지”라고 생각이 나는 사람이 된다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되니 말입니다. “엄마 아빠 얻는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손해를 봐야 돼”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듣더라도, ‘청결한 양심’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자녀와 타인에게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양심. 안 믿는 분들 가운데 나는 이제껏 나쁜 일 해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 상대적일 뿐 하나님 아래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롬3:10). 이것을 모른 것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벧전3:16,21). 정말 ‘청결한 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한 ‘청결한 양심’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품인 ‘청결한 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디모데의 성정은 의로운 눈물입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딤후1:4).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 바울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빌3:18). 그렇다면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의 눈물 또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위한 눈물일 것입니다. 디모데의 영혼에 대한 눈물, 이 애타는 사역이 지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 바울에게도 들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를 만나는 것이 ‘내 기쁨의 가득’하다고 말합니다(딤후1:4). 자기의 영적인 아들이 한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것이기에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한 눈물이 기쁨입니다.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21세기는 ‘트랜스모더니즘’Transmodernism이라고 합니다. 그 특징이 ‘비진리의 득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십자가의 부활, 천국과 지옥, 영생과 멸망, 심판과 구원, 재림과 종말 등이 신앙 없는 자들에게 위화감을 준다고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들이 바로 절대 진리가 상실되고, 비 진리의 득세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눈물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 예수님의 눈물이고, 사도 바울의 눈물이고, 디모데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어머니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울 수 있다면, 부모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가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눈물이 우리의 성정이어야 합니다.
디모데의 신앙은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가운데 믿음을 언급하면서, 그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목회를 정의하는 말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목양의 환경이나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목회에 대한 정의도 다양한데요. 일치하는 것 중 하나가 “목회는 꾸준해야 된다. 인간의 수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실, 일관, 진실이란 뜻이 있고 , 쉽게 ‘있는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있는 그대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꾸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꾸민다는 말은 각색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렇지만, 현실은 안 그래, 내 사는 형편에 맞게 살아야 돼, 하나님도 다 사정 아셔”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왜 모르시겠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에 각색을 하는 믿음에는 성경 그대로 역사는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일관되게, 진실하게, 믿는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부모와 자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그리고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서양 문화를 형성하는 2대 조류는 ‘헤브라이즘’Hebraism과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했다는 선민의식, 유대인 민족의 사상을 일컫습니다. 이 고대 유대인의 사상을 서구가 받아들였습니다. 서구가 발전시킨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을 계승 순화한 사조입니다. ‘헬레니즘’은 알렉산더대왕Alexandros the Great,BC336-BC323이 동방 원정 이후, 그리스 고유의 문화가, 오리엔트Orient 문화와 만나면서, 이룬 새롭고 세계적 성격을 띤 문화를 가리킵니다.
‘헤브라이즘’은 하나님이 중심인 ‘신본주의사상’The God-Oriented을 가집니다. 유일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중심사상을 갖습니다. 반면 ‘헬레니즘’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사상’Humanism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이 중심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의지적ㆍ윤리적ㆍ종교적 특징을 갖고요. ‘헬레니즘’은 이성적ㆍ과학적ㆍ미신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헤브라이즘’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신입니다. ‘헬레니즘’ ‘인본주의’는 그리스신화에서 보듯이 인간의 목적에 따라, 신들을 만들어 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다신주의입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통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태동된 역사를 말씀을 드렸는데요.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중심인 사상, ‘인본주의’는 인간이 중심인 사상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요.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만 말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결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인본주의’ 사상이 여전히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데로, 하나님이 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인간의 목적대로 신을 만든 그리스도신화와 같은, ‘인본주의’ 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 때문에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오늘 본문은 ‘헤브라이즘’ ‘신본주의’와 ‘헬레니즘’ ‘인본주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갈1:10).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결연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살전2:4).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이요, 주의 증인된 사도 바울의 자세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신본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금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가를 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의 기준을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데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7) 이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성도들을 교란하려고 교회에서 침입해서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랴’ ‘인본주의’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니라’ ‘신본주의’를 말하면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기준을 복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신본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복음인데, 다른 복음을 전하여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만히 잠입해서 성도로 가장하고 성도들을 변질시키는 것이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신○지예○교증거○막○전 신○지를 떠올립니다. 그들은 교회에 침투해서, 이○희 씨가 재림 예수, 보○사 성령이라고 떠벌이며 자기들의 가르침 다른 복음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님의교회 세계○음화협○회로 이름을 바꾼 안○홍증○회는 “성탄절이 원래 12월 25일이 아니다”는 전혀 비본질적인 질문으로 성도를 미혹합니다. 이들과 같은 자들이 성도들을 다른 복음으로 교란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전번에 주일에 말씀을 드렸던 것과 같이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갈6:12-17). 유대주의적 복음으로 잘못된 사상을 전하는 자들이죠.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고 한 말씀에서, ‘거짓 형제’가 그들입니다(갈2:4). 이들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다른 복음을 주장하여 성도들을 교란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다른 복음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앞서 말한 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와 같은 이들과 최근 한 비디오 웹사이트에서 방영되고 있는 J○S 만○교회 아○동산 오○양사건 등을 들 수 있는데요. 이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정통 교회 안에서 증거되고 수용되고 있는 것들 가운데에도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인본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다른 복음에 대해서 한 신학자는 이것을 ‘물탄복음’, ‘가짜복음’, ‘짝퉁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별칭을 붙이고, 그 형태로 ‘기복주의’, ‘율법주의’, ‘방종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를 들었습니다.
기복주의祈福主義, Prosperityism=Prosperity Gospel
‘기복주의’는 복을 받기를 바라는 신앙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복중의 가장 큰 복이자, 첫 번째 복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셔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영생을 주셨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가장 큰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이 한 가지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에게, 삶에서도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복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감사가 앞서는 것보다. 이 땅에서 삶을 윤택하게 하는 물질 같을 것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폴라 화이트Paula M. White,1966-목사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서 개회사를 맡는 등 유명인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인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닌 재정적 어려움에서 구출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매우 잘못된 번영신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60주년 기념예배 설교자로 초청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부자이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요. 가난하면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질문을 할게요. 예수님이 부자이었나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마8:20). 예수님은 자신의 몸 하나 누울 거처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은 십자가이었습니다(마27:32-44;막15:21-32;눅23:26-43;요 19:17-27). 오늘 본문의 저자 사도 바울은 어떠했나요.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마지막은 참수였습니다(참고/행19:21,20:22-24,21:13;딤후4:6-8).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에,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예수 믿으면 잘 살아야지”가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다면, 기복주의 물든 것입니다. 우리는 신본주의이어야지, 기복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복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큰 복, 구원자 예수, 예수가 가장 큰 복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하신 가운데, 그 백성에게 주시는, 이 땅에서의 분복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18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19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5:18-19). 아멘! 하나님이 여러분에 주신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인 인본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인 인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본주의이어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본주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
‘다른 복음’ 두 번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은 없어 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롬7:12). 그러나 죄인인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롬3:10). 이러한 인간을 위해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으로 율법을 완성하였습니다(참고/마5:17;갈3:10;요일 3: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 받게 된 것입니다(참고/롬3:17,21-22,5:1;갈2:16,3:11;빌3:9). 그런데 예수 믿음보다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거짓 형제들이 침입해서,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가르침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율법주의는 무엇입니까? 예배에 참예한 것을 전부로 아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함정에 제일 빠지기 쉬운 것이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입니다. 저는 로마가톨릭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를 말씀드립니다. 천주교에서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들려진 것이 1960년대 후반입니다. 그 이전에는 사제가 라틴어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베푸는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숙하고 거룩해 보이는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한 것으로 압니다.
또 자신의 죄를 신부에게 고하는 고해성사를 합니다. 신도들은 죄를 고백하고, 그에 따라 사제들은 “얼마간 금식을 하십시오.”, “어느 곳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하십시오.”, “어떤 제목의 예물을 드리십시오.”라고 명합니다. 이를 실행하면 해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롤랑 조페Roland Joffe연출은 개봉 된지 35년이 지났습니다. 1750년 경을 무대로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신부가, 남미의 오지인 원주민 과라니족의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곳에는 백인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가 있는데요. 그는 원주민을 잡아 파는 악랄한 노예상으로 신부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도 원주민 사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멘도자는 자신의 연인과 동생의 불륜을 알게 되고, 우발적으로 아우를 살해하게 됩니다. 이에 큰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멘도자에게 가브리엘 신부가 찾아와 함께 선교활동에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멘도자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동안 자신을 원주민을 사냥할 때 사용하던, 각종 무기와 장비들을 큰 그물에 담고, 폭포아래서 쏟아지는 폭포를 맞으며, 폭포 위에 있는 교회까지, 절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릅니다. 죽을힘을 다해 폭포 위에까지, 거의 도달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원주민들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가, 멘도자의 어께에 매고 있던 각종 무기와 장비들이 담긴 그물을 잘라버립니다. 순간 원주민들은 박장대소하고, 맨도자도 해방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크게 웃음을 짓습니다. 제가 꼽은 영화 가운데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여기서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요.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원주민을 사냥하던 각종 무기와 장비를 큰 그물에 담고, 그 무거운 것을 힘겹게 지고, 폭포를 오르면,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까? 로마가톨릭의 율법주의의 한 단면을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 권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들은 단지 형식과 규범에 따른 예배의식에 참예한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혹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나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립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립니다. 바르지 않은 예배 형식적인 예배 참예하는 것으로 전부로 아는 율법주의로 또한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방종주의放縱主義, Self-Indulgentism
다른 복음 세 번째는 ‘방종주의’입니다. 믿는 성도들의 말씀에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방종주의입니다. 듣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종주의는 율법 폐기론 자입니다. 우리가 형식에 얽매이는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기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십자가에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7).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였습니다(시119:1).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율법으로 상징되는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시작되는 십계명이 율법이기에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출20:3)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오늘도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또한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2:8).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교회는 거치장스러운 곳에 불과한 것입니다. 방종주의가 아닌 순종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방종주의는 또 도덕적 방종도 부추깁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반도덕주의자들은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못 해석합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왕 노릇을 이기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습니다(롬5:21;히2:14). 그럼으로 우리도 사탄의 죽음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육체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폐기하고, 반도덕주의를 내세우는 방종주의도,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입니다.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
다른 복음 네 번째는 신비주입니다. 우리는 신본주의the God-oriented이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영적인 것이기에 신비적인 일을 전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주의가 붙은 신비주의입니다. 오늘날 특별히 심각한 것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내면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꿈이나 환상 어떤 경우는 비상한 방법의 계시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도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꿈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을 많이 체험하는 목사님은 신령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안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안 보여주시면,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 비디오 웹사이트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고 있는 모 집단 교주의 충격적인 실태가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곳에 심취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나다니엘이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일면식도 없는데도 알아보았던 것 같이, 그 교주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자기 어머니가 아프다는 것에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의술로 이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체험이 교주에게 미혹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신13:1) 자칭 선지자나 꿈을 통해 예언한 자들도 ‘이적과 기사’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주변에 무속인이라고 불리는 자들도 점괘로 맞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별할 것은 지나간 일과 지금의 일에 대해서라는 것입니다. 귀신도 과거와 현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렇기에 10명의 점쟁이가 과거의 일과 현재 일은 하나같이 맞추지만,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각기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교주가 자신의 지난 일과 지금 일을 맞춘다는 것에 놀라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송구한 표현으로 그 교주가 지난번에는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이번 재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될 줄 알았겠어요. 교주라는 자가 자기의 미래 일도 모르면서 무슨 인류의 메시아라고 떠벌입니까? 그런데도 미혹이 되면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거짓 선지자와 해몽가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도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참고/계13:4,13). 여기서도 우리의 분별이 필요합니다. “ 2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2-3). 거짓 선지자와 해몽가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다른 신’ 우상 숭배나 집단 교주를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청종하지 말라’,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신유와 예언과 통시가 있더라도, 그로 인해 우상과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Test’를 통과하지 못하면, 마귀의 권세를 받은 집단 교주의 ‘Temptation’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일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심화深化되어집니다. 마지막때 추수의 시대를 넘어 타작의 시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것입니다(마3:12.참고/마13:36-43). 누가 알곡이 될 수 있습니까?
“4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5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13:4-5). 우리는 신비를 조장하는 사람을 따르는 인본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 만을 경외하는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알곡 성도로 신랑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맞이하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다 가록한 것이 아닙니다. ‘일곱 우레’를 듣습니다(계10:4). 하늘의 음성을 말합니다. 이를 기록하려고 하자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계10:4).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너무나도 들으려고 하고 들었다고 말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극단적 신비주의자에게 좋은 방법은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의 개인, 우리 가정, 이 사회와 나라, 나아가 세계의 움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는 내가 응답받은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 발동의 주체가 ‘나’임으로, 이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다른 복음 다섯 번째는 ‘영지주의’입니다. 영혼과 정신은 선하고,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더러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없다는 ‘가현설’Doketismus을 주장합니다. 가현설은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진짜 육체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신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 중 한 인간 예수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신성’deity과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성’hamanity을 모두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요1:14). 인성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그 분만이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아멘!
영지주의는 여러 변형들로 지금도 성도들을 감염시킵니다. 여기에 빠지면, 이상한 신앙을 갖게 되는데요. 몸은 더러운 것이니,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금욕주의를 권합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이단 사이비 집단들은 자신들 공동체에서는 부모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부부도 다른 공간에서 기거하게 합니다. 그리고 남자 교주도 여자 교주도 원하는 이성을 매일 밤 바꾸어가면 불러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위해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과식과 정욕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극단적인 것입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문제가 됩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이해하고, 영혼을 가두고 있는 육체를 제어하고, 영혼을 육체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를 가르칩니다.
담배는 기호품입니다. 육체 건강과 영혼 성결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여부는 아닙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스스로 금연하게 죄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잘 믿는 여자 성도님들은 남편과 한 방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 말씀합니다(고전7:5). 그리고 이어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롬1:4). 우리가 성결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지, 인간의 금욕이 아닙니다. 이렇게 영지주의의 영향에 따른 신앙도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입니다.
변형된 영지주의인 사이비집단도 있습니다. 정통교회에서 교류를 금하고 있는 어느 집단은 예수 믿고 거듭난 날짜를 기억해야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람같이 임함으로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오는지 알지 못함과 같다는 말씀을 통해서. 그 집단의 잘못된 신앙노선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이 집단은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한다며, “깨달음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형된 영지주의 입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어로 ‘그노시스’gnosis, ‘지식’이란 뜻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은 받은 것이라며, “깨달음과 거듭남의 비밀”을 주장하는 자들도, 영지주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 함으로 구원 받을 줄 확신합니다.
오늘 타종교와 이단사이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조심스러운 것은 목사는 판단을 하고 정죄하는 자가 아닙니다. 판단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단 목사는 분별하여 정도로 성도들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복음인 물탄복음, 가짜복음, 짝퉁복음의 기복주의, 율법주의, 방종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를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본주위를 배격하고, 진리인 오직 신본주의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은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강단에서 그리고 간증에서, 그럴듯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장해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전쟁
영적 전쟁
헤브라이즘의 신본주의와 헬라니즘의 인본주의는 지금도 계속해서 대립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와 대결이 아니라, 성도 사이에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도 심화되고 있는 것이 마지막 시대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하늘로부터 강림한 천사가 전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이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합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내린 사람처럼 보여도,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는 미혹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하였습니다(갈2:6). 무슨 뜻입니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났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그토록 당부를 하고, 다른 복음을 쫓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타 지역으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떠나 있을 때, 소식이 전해온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가 또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살전2:2). 사도 바울은 고난과 능욕을 당하는 중에서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살전2:4).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즉 신본주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휴머니스트Humanist
한 연예인이 오래 전에 동성애자로 커밍아웃Comingout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출연하던 방송에서 하차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커밍아웃이 용기있고 진실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고, 보란 듯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입양한 자녀라며, 딸의 신상까지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지난 시절 어려움을 격은 누나의 딸을 자신이 입양한 가족애가 남다르고, ‘휴머니스트’Humanist 사례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저는 입양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점 점 우리 사회가, 성경적인 가정, 성경적인 부부, 성경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죄가 죄가 아니고, 공개되고, 인정되고, 이것이 하늘에까지 죄가 차고 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좋게하고,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인본주의, 휴머니스트가, 어떤 면에서는 신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는 이러한 설교조차 하지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절대자 기준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계속해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기를 감추고 있는 휴머니즘, 휴머니스트, 인본주의, 인본주의자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러한 자들이 교회에 가만히 잠입하여,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일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휴머니스트를 적대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 실체를 바로 알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의하거나, 동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복음에 융화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성별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휴머니스트로 포장된 인본주의와 영적전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갈1:7).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라고 말씀합니다(살후2:3). 여기서 ‘배교하는 일’이란 전 세계적으로 주 예수의 유일성을 거부하는 흐름이 대세를 이룰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거부하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요14:6). 그래서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또한 구원과 절대 진리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라는 종교다원주의가 큰 세력을 이룰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라는 간판은 달았지만 강단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은 거부되고, 종교다원주의가 설파되는 교회들이 많아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바로 이런 일이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이 시대가 배교의 시대입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거부하고, 세계 종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종교를 통합하는 종교다원주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좋은 일이 먼저가 아니요, 구원을 얻데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구원 받으면 선행도 하게 되는 지는 것이지, 선행이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구원은 오직 예수입니다.
복음주의 자이신 한 저명한 교수님은 이에 대해 “이것은 20세가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대격변”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 “20세기 들어와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는 세계의 명문대학을 중심한 학문계에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는 좀 배웠다고 하는 지식인들 모두가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통합주의가 미래의 대세가 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전 세계적인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휴머니스트로 포장된 인본주의와 영적전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로 포장된 인본주의와 영적전쟁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 오직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정리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그리고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서양 문화를 형성하는 2대 조류는 ‘헤브라이즘’Hebraism과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헤브라이즘’은 하나님이 중심인 ‘신본주의사상’The God-Oriented을 가집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중심사상을 갖습니다. 반면 ‘헬레니즘’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사상’Humanism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요.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만 말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결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인본주의’ 사상이 여전히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데로, 하나님이 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인간의 목적대로 신을 만든 그리스도신화와 같은, ‘인본주의’ 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 때문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헤브라이즘’ ‘신본주의’와 ‘헬레니즘’ ‘인본주의’에 대해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결연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갈1:10).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이요, 주의 증인된 사도 바울의 자세입니다(갈2:4).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신본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금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가를 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의 기준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갈1:7) 이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성도들을 교란하려고 교회에서 침입해서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갈1:7). ‘신본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의 이름을 갖고 다른 복음을 전하여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만히 잠입해서 성도로 가장하고 성도들을 변질시키는 것이지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교회에 침투해서, 다른 복음으로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화협의회로 이름을 바꾼 안상홍증인회는 “성탄절이 원래 12월 25일이 아니다”는 전혀 비본질적인 질문으로 성도를 미혹합니다. 이들과 같은 자들이 성도들을 다른 복음으로 교란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나누었던 것과 같이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갈6:12-17). 유대주의적 복음으로 잘못된 사상을 전하는 자들로 ‘거짓 형제’가 그들입니다(갈2:4). 이들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다른 복음을 주장하여 성도들을 교란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다른 복음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앞서 말한 이단들이 다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증거되고 수용되고 있는 것들 가운데에도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인본주의를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기복주의祈福主義, Prosperityism=Prosperity Gospel. 기복주의는 복을 받기를 바라는 신앙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복중의 가장 큰 복이자, 첫 번째 복은 예수님입니다. 구원을 주셨습니다. 성도는 가장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에게, 삶에서도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복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보다 물질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폴라 화이트Paula M. White,1966-목사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서 개회사를 맡는 등 유명인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인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닌 재정적 어려움에서 구출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매우 잘못된 번영신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창립기념예배에 설교자로 초청되었습니다. 가난하면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 것인가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마8:20). 예수님은 자신의 몸 하나 누울 거처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은 십자가이었습니다(마27:32-44;막15:21-32;눅23:26-43;요 19:17-27). 사도 바울은 어떠했나요. 그는 회심 이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을 드림으로 수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참고/고후11:23-27). 그리고 마지막은 참수였습니다(참고/행19:21,20:22-24,21:13;딤후4:6-8).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에,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예수 믿으면 잘 살아야지”가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다면, 기복주의 물든 것입니다. 기복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본주의이어야 합니다. “18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19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5:18-19). 예수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 가운데 이 땅의 분복도 받기를 축복합니다. 기복주의인 인본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본주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참고/마5:17;롬3:17,21-22,5:1;갈2:16,3:11;빌3:9). 그런데 예수보다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 함정에 제일 빠지기 쉬운 것이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입니다. 천주교에서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들려진 것이 1960년대 후반입니다. 그 이전에는 사제가 라틴어 성경을 읽어 주고, 그가 베푸는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의식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여겼습니다. 또 자신의 죄를 신부에게 고하는 고해성사를 하고, 그에 따려 내려진 명령을 실행하면 해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합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은 1750년 경을 무대로 ‘가브리엘’ 신부가, 남미의 오지인 원주민 과라니족의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곳에는 원주민을 잡아 파는 악랄한 ‘멘도자’는 어떤 일로 동생을 살해하게 됩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에게 신부가 찾아와 선교에 동참을 권합니다. 멘도자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동안 자신을 원주민을 사냥할 때 사용하던, 각종 무기와 장비들을 큰 그물에 담고, 폭포아래서 쏟아지는 폭포를 맞으며, 폭포 위에 있는 교회까지, 절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릅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원주민들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멘도자가 매고 있던 것을 잘라버립니다. 순간 원주민들은 박장대소하고, 맨도자도 해방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크게 웃음을 짓습니다.
원주민을 사냥하던 각종 무기와 장비를 큰 그물에 담고, 그 무거운 것을 힘겹게 지고, 폭포를 오르면,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까? 로마가톨릭의 율법주의의 한 단면을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 권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들은 단지 형식과 규범에 따른 예배의식에 참예한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혹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나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립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립니다. 바르지 않은 예배 형식적인 예배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전부로 아는 율법주의 또한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방종주의放縱主義, Self-Indulgentism. 믿는 성도들의 말씀에 순종을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 폐기론 자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율법이 폐기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5:17).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였습니다(시119: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시작되는 십계명이 율법이기에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출20:3)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오늘도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2:8). 방종주의가 아닌 순종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방종주의는 도덕적 방종도 부추깁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반도덕주의자들은 ‘자유’를 잘못 해석합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왕 노릇을 이기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습니다(롬5:21;갈5:1;히2:14). 그럼으로 우리도 사탄의 죽음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육체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방종주의도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입니다.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 우리는 신본주의the God-oriented이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영적이기에 신비를 전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주의가 붙은 신비주의입니다. 특히 극단적인 신비주의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내면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꿈이나 환상 어떤 경우는 비상한 방법의 계시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도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모 비디오 웹사이트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고 있는 모 집단 교주의 충격적인 실태가 폭로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주에게 미혹된 이유로 통시, 예언, 신유를 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나 해몽가들도 ‘이적과 기사’를 보인다고 했습니다(신13:1). 무속인들도 점괘로 과거와 현재는 잘 알아 맞춥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 교주가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재수감될 줄 알았을가요? 그런 자가 무슨 메시아로 떠벌입니까? 마귀도 능력을 행합니다(참고/계13:4,13). 어떤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나도, 그로 인해 우상과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알아보려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신13:2-3). 하나님의 ‘Test’를 통과하지 못하면, 마귀의 권세를 받은 집단 교주의 ‘Temptation’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일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심화深化되어집니다. 마지막때 추수의 시대를 넘어 타작의 시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것입니다(마3:12.참고/마13:36-43). 누가 알곡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거짓선지자와 해몽가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비를 조장하는 인간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만을 경외하는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신13:4-5). 그가 알곡 성도로 신랑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맞이하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고 다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일곱 우레’를 듣고 기록하려고 하자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계10:4). 하나님 계시를 직접 받았어도 하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극단적 신비주의자에게 좋은 방법은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의 개인, 우리 가정, 이 사회와 나라, 나아가 세계의 움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는 내가 응답받은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 발동의 주체가 ‘나’임으로 이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영혼과 정신은 선하고,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없다며, 육체를 가지신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Doketismus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부활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신’deity과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성’hamanity을 모두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요1:14). 인성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영지주의의 여러 변형들이 지금도 성도들을 감염시킵니다. 몸은 더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금욕주의를 권합니다. 이단들은 자신들 공동체에서는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부부도 다른 공간에서 기거하게 합니다. 그리고 남자 교주도 여자 교주도 원하는 이성을 매일밤 바꾸어가면 불러들입니다. 신앙을 위해 과식과 정욕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극단적 금욕주의는 문제가 됩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이해하고, 영혼을 가두고 있는 육체를 제어하고, 영혼을 육체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를 가르칩니다.
담배는 기호품입니다. 육체 건강과 영혼 성결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여부는 아닙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고 예수를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스스로 금연하게 죄어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우리가 성결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지, 인간의 금욕이 아닙니다. 이렇게 영지주의의 영향에 따른 신앙도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입니다.
어떤 사이비집단은 예수 믿고 거듭난 날짜를 기억해야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바람같이 임함으로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어로 ‘그노시스’gnosis, ‘지식’이란 뜻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은 받은 것이라며, “깨달음과 거듭남의 비밀”을 주장하는 자들도, 변형된 영지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 함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복음인 물탄복음, 가짜복음, 짝퉁복음의 기복주의, 율법주의, 방종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를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또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본주위를 배격하고, 진리인 오직 신본주의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은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강단에서 그리고 간증에서, 그럴듯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장해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전쟁
영적 전쟁. 헤브라이즘의 신본주의와 헬라니즘의 인본주의는 지금도 계속해서 대립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와 대결이 아니라, 성도 사이에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도 심화되고 있는 것이 마지막 시대 교회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사람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가 아니면 미혹당하지 말아야 합니다(갈1:8). 사도 바울이 수없이 말했지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났다고 합니다(갈1:9,2:6). 이것은 성도들에게 대한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가 또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능욕을 당하는 중에서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살전2:2).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즉 신본주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살전2:4).
‘휴머니스트’Humanist. 모 연예인 동성애자의 커밍아웃Comingout이 용기있고 진실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고, 보란 듯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누나의 딸을 자녀로 입양한 가족애가 남다르고, ‘휴머니스트’Humanist 사례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저는 입양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점 점 우리 사회가, 성경적인 가정이 관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에까지 죄가 차고 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좋게하고,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인본주의, 휴머니스트가, 어떤 면에서는 신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계속해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교회에 가만히 잠입하여,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일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갈1:7). 적대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바로 알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인, 동의,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성별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살후2:3). ‘배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거부하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요14:6). 그래서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또한 구원과 절대 진리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라는 종교다원주의가 큰 세력을 이룰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라는 간판은 달았지만 이러한 것을 설파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바로 이런 일이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교회는 선행이 먼저가 아니요 구원이 우선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입니다.
저명한 복음주의자께서 “이것은 20세가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대격변”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 “20세기 들어와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는 세계의 명문대학을 중심한 학문계에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지식인 휴머니스트로 포장된 인본주의와 영적전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로 포장된 인본주의와 영적전쟁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 오직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설교는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두 가지 사조思潮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서두로 시작으로 했습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통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태동된 역사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중심인 사상, ‘인본주의’는 인간의 중심인 사상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요.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만 말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물탄복음’, ‘가짜복음’, ‘짝퉁복음’ 즉 다른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복주의’, ‘율법주의’, ‘방종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등 여러 형태의 인본주의로 채색되어 성도들을 교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진단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가운데, 여러 대안들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의 영성과 도덕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재정의 운영을 좀 더 투명하고 책임성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회복하여 교회 지도자들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목회자 대물림 현상을 막고, 예배당 건축의 광풍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돕는 긍휼 사역에 한국교회가 더 전향적으로 나서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제안들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저도 한국교회가 그런 방향으로 갱신되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당면해 있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갱신과 회복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참된 복음의 회복입니다. 백퍼센트 복음입니다.” 맞습니다. 전전으로 동의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전해야 져야 합니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0-12).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 성도는 사람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절대 신앙이 여러분 모든 삶의 척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상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란 반대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데요.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 중심입니다. 신본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상을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반드시 받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신본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헤브라이즘’ ‘신본주의’와 ‘헬레니즘’ ‘인본주의’는 불신자와 신자만이 아닙니다. 신자이지만,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복주의 율법주의 방종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의 형태로 침투하는 다른 복음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신본주의자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한 분으로만 기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기쁘하게 하옵소서, 구원의 기쁨이 항상 내 안에 넘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오직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로 영접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함께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신본주의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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