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눈물과 믿음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디모데후서 1:3∼5 2023.03.19. 主日禮拜
“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3∼5)
갈라디아교회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며 강요하였습니다(갈6:12-13). 그러나 실상은 자신들이 많은 이방인들을 할례받게 했다며,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창17:10-11). 그러면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할까요?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하였습니다(롬2:29.참고/신16:10). 우리에게 언약은 예수님입니다(히7:22,12:24,13:20). 마음에 할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참고/롬10:10). ‘육체의 모양’ 할례를 가지고, ‘육체의 자랑’을 삼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하였습니다(롬2:29).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1:16). 십자가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혈통적, 학문적, 종교적으로 최고였지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6:14). 세상은 나에 대해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기대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님들을 모두 존경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로 지음 받은 자랑.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그리스도 안’,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입니다(참고/고후5:17). 우리 지혜는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복음, 전도입니다(고전1:21). 예수를 전할 때,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성도들 ‘세상의 약한 것(인 성도들)을 택하사’ 세상의 ‘강한 것 들’ 세상에서 지혜있고 능력있다고 떠벌이는 자들을 ‘부끄럽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고전1:27).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일을 하게 됨을 자랑해야 합니다(롬13:12-14).
예수의 흔적 자랑.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사도 바울은 회심 이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을 드림으로 수많은 상처를 그의 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고후11:23-27). 그러나 바울에게 예수의 흔적은 핍박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도 항상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고후11:28). 바울은 성도들이 약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도 약해지고, 성도들이 실족했다는 전갈을 받으면, 자신은 애가 탔다고 하였습니다(고후11:29-30.참고/고후12:9).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중보기도할 때, 그들의 아픔이 여러분이 아픔이 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참고/마9:36;히4:15).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 후손인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갈6:1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명령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되었습니다(창12:2-3). 하나님이 택함 받은 선민이 사는 대한민국은 성민의 나라입니다(신14::2).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우리가 십자가만, 새로지음 받음, 예수의 흔적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사명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통하여, 마지막시대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감당하실 줄 믿습니다.
어머니 유산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서신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데요. 이 말씀을 보면 디모데의 ‘인품’人品과 ‘성정’性情 그리고 ‘신앙’信仰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그의 어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인 로이스가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 둘은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여인들이었습니다(참고/행16:1). 반면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참고/행16:1). 이런 가정 사를 볼 때, 디모데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헬라 즉 그리스계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아버지는 헬라 사람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디모데는 그의 아버지가 이방이었습니다만, 유대인인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어릴 때부터,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모세입니다. 그는 이방 땅 애굽에서 태어났는데요. 그가 출생할 당시 애굽 왕 바로는 유대인 핍박 정책을 펼쳤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혹사시켰고, 산파들에게는 유대인이 낳은 후손이 아들이면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산파들의 마음을 움직여 모세는 살아남게 되는데요. 아이가 자라가면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갈대아 상자에 아이를 담아 나일 강에 띄었습니다. 이 때 강에서 목욕을 하던 바로 왕의 딸에 의해 발견되게 되죠. 이를 뒤따라가며 지켜보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기지를 발휘하여, 공주에게 유모를 추천하는데요. 그 유모는 다름 아닌 모세의 친 어머니인 요게벳입니다(출2:8,6:20). 모세는 유아시절 애굽의 궁중에서 자랐으나, 실상은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배우게 된 것이지요. 이와 같이 디모데도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유대인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디모데의 인품과 성정과 믿음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미래의 주역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고요.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 그 가정 나아가 사회와 국가 심지어는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인권과 평등과 존중이라는 미명아래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하며, 구원자를 배척하는 사상이 교육되고 있는 이 시대 2세들을 위한 기도와 양육과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고, 자식들을 어떻게 양육하며 본을 보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받는 성도님들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부모로서, 세움 받기를 축복합니다. 자녀들은 그 부모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고 승리하기를 또한 축복합니다.
인품 - 청결한 양심
본문에서는 먼저 디모데의 인품이 나와 있는데요.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말씀합니다(3).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디모데의 ‘청결한 양심’입니다. 디모데의 이 ‘청결한 양심’은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디모데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외할머니부터, 이 집안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청결한 양심’의 관계는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청결한 양심’이 뒷받침이 되지 않아서, 여러 지탄을 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문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이라는 문화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할 것 다 해요. 그런데 자기들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술과 담배 주초酒草 문제입니다. 불신자들은 먹고 마시기 원하면 마음대로 술을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신자들도 신자들은 술을 마신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 마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술과 담배에 대해서 신앙 여부와 관계 없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우리는 서구가 아닙니다. 이렇게 신앙이 그 사회의 문화와 연관을 가져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적이면서 문화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양심’이라고 했을 때,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범주만이 아니라, 그 이상 이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똑같이 뇌물, 리베이트Rebate를 받을 상황이 되어도, 믿는 사람이 받으면 욕을 먹게되는 것입니다.
‘청결한 양심’을 설명 드리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청결한 양심’을 ‘Clear Conscience'로 단순히 ‘깨끗함’으로 번역한 영여 성경도 있지만, KJV은 ‘Pure Conscien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순결함’입니다. 깨끗함이나 순결함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순결함은 깨끗함에 비해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깨끗함은 단순히 깨끗하다는 뜻이 있지만, 순결함은 어떤 자리에서도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청결한 양심’을 갖는 것은 태성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분들 가운데도 ‘청결한 양심’이라고 할 만큼, 법 없이도 살수 있을 것 같은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는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롬3:10).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내가 내 죄를 스스로 대속할 만한 자격, 내가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간의 본질이고요. 영적으로 죄인인 인간이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사람과 사이에서요. 상대적 기준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유익만을 쫓는 이기주의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태생입니다. 타고 날부터 갖고 있는 성격입니다. 인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요. 인품이라고 할 수 있는 ‘청결한 양심’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이지만, 부단한 노력에 의해 고쳐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천성이라고 여기고, 고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인 것이지요. 각고의 노력을 하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 각은 다 타고난 인품이 있습니다. 내가 자랄 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말을 많이 했는가를 보면, 자신의 인품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재현 목사는 어릴 때부터, 어떤 말을 어른들에게 많이 들었겠어요. “동네에서 제일 인사 잘하는 얘, 착한 얘”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실속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착한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여러분도 주변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소리 있지요. 그것에 관심을 두고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믿는 사람이기에 내가 좀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잊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당연히 내가 취할 몫이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라면 우선권을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자는 어떤 순간에도, 비난은 물론이고요. “자기 실속 챙길 것 챙기고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다를 것 없네!”라는 말도 듣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설사 내 것을 마땅히 취할 수 있는 몫이라도, 남을 위해 약간의 손실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기억되는 양심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 살면 세상에서는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똑똑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야! 제 봐 자기 것도 안 챙기고, 나에게 주내 바보같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몫을 안 챙기고, 나에게 주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기에 지금 순간 나는 좋아요, 내 것 아닌데, 어떤 사람이 양보해서 내 것이 되었으니, 공짜로 얻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10년이 지났어요. 20-30년이 지났어요.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때 그 사람 왜 나에게 자기 것을 그냥 주었을까”라고 기억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어떤 사람에게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일들 말입니다.
오래전으로 기억되는데요. 승용차를 도로에 세우고, 잠시 일을 보고 나왔는데, 견인되었습니다. 급히 택시를 타고, 견인 보관서로 향했는데요. 가는 도중 지갑을 보니, 기본요금도 안되는 금액밖에 없는 것입니다. 빨리 택시에 타느라고 돈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지요. “어 이거 어떻게 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데요. 도중에 택시에서 내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해서, 기사 분에게 “제가 돈이 이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라고 했더니, 다른 소리 안하고요. “아 있는 것만 주세요, 괜찮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것입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요. 아마도 그 기사님은 백미러로 제가 지갑을 열어 보면서, 난처한 모습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보고 제게 그렇게 것이지요.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로 인해 기사 분은 손해를 보셨어요. 안 보셨어요. 손해를 보셨죠. 우리 같으면 “계좌 보내께 입금하세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예전에 일인데도 지금도 기억이 나요. 큰 도움이 아니라 아주 소소한 이야기인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이 기사 분을 통해 양심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일반적 양심이라는 것은 내 것이면 내 것으로 갖고, 남의 것 욕심내지 않는 것, 무단투기하지 않는 것, 교통경찰이 있건 없건, 무단횡단하지 않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기사 분처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로서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품고, 수용할 수 있는 양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청결한 양심’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그 수준까지 얘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버스나 전철을 많이 이용하는데요. 시간이 급해 교회에서 택시를 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기사분에게 꼭 커피와 사탕 등을 대접을 합니다. 그 작은 것인데, 기사 분들이 그렇게 고마워 할 수 없어요. 저에게 커피를 대접받은 분들 예배당 앞 도로를 지나가다가 제 생각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기억이 나겠지요. 제가 예전에 기사 분에게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기사 분들에게 대접을 하는 것이지요. 양심은 기억이 되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청결한 양심 기억되는 양심입니다.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
이렇게 기억되는 사람 말입니다. 지금 내 실속을 챙기지 못해서, 어리석은 사람, 약지 못한 사람,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만, 그 순간을 지나 몇 년 후, 또는 몇 십년 후까지 기억이 나는 사람 말입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말고요. “그 사람 그때 나에게 왜 그렇게 도와주었을까”하고 생각나는 사람 말입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아 맞아 그 사람 예수 믿는다고 했지 교회 다니니까 그렇게 한 것이지”라고 생각이 나는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된다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되니 말입니다.
지금 ‘청결한 양심’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면서 하는 말입니다. “양심을 지켜라” 그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요. 그것은 자칫 율법이 될 수 있어요. ‘청결한 양심’이라는 삶에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한 예를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당장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배려할 때, 그 마음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양심 말입니다. 지금은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에게 기억되는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기억이 나서 나에게 보답하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요. 그 기억에 “아 맞아 그 사람 예수 믿는다고 했어”라는 말까지 더해, 기억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청결한 양심’은 사람들이 기억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더욱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되도록 청결한 양심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인 양심에서,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양심, 그리고 그 양심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으로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누가 본 받아요. 맞습니다. 자녀들이 본 받습니다. 자녀들이 ‘청결한 양심으로 자란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아시지요.’ 요즘 아이들 보세요. 섬뜩 섬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아이들 중에도, 어른 이상으로 이치에 밝고, 과격으로 연약으로 코스프레Cospre하고, 가증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영악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교활하고 간계까지 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어떻게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엄마 아빠 얻는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손해를 봐야 돼”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듣더라도, ‘청결한 양심’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내 태성이 이기주의 쪽에 기울어 있다고, 자가진단이 되면, 성령님께 ‘청결한 양심’이 되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을 섬긴 것을 칭찬하고 있는데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을 칭찬하고 있고요. 디모데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은 그의 ‘조상 적부터’ 섬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변에서,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 때부터,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알려졌던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양심
내 태성이 ‘청결한 양심’이라면 더 더욱 좋을 일이지요. 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더하면, 자신은 물론 자녀들이 디모데처럼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청결한 양심’을 갖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 배가 되는데도 불구하고요. 천성적으로 그 인품이 ‘청결한 양심’을 가진 분들 가운데는 그 ‘청결한 양심’ 때문에 신앙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또 이웃이 자신에 대한 평을 들어 보아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아도, 자신은 정말 청결하게 양심적으로 살고 있거든요. 전도 중에도 그런 분을 만난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제껏 남에게 나쁜 일 하거나 해 끼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청결한 양심’이란 인간들 사이 즉 상대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비교할 때, 나라는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났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청결한 양심’이 정말 ‘청결한 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한 ‘청결한 양심’이 됩니다.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의 양심이라 비유할 수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 때, 진리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정말 ‘청결한 양심’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양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들 가운데, ‘청결한 양심’이라고 불릴 만한 분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3:16). ‘선한 양심’ 오늘 본문의 ‘청결한 양심’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즉 예수 믿는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면, 우리를 ‘욕하는 자들’이 ‘그 비방했던 일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청결한 양심’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3:21). ‘물’은 세례를 뜻하는데요. 세례 받은 것을 가지고, 즉 예수 믿은 것을 가지고,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인간과 비교해서, 나라는 인간이 윤리적으로 깨끗하다고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것이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이 정말 ‘청결한 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한 ‘청결한 양심’이 됨을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베드로 사도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인품은 ‘청결한 양심’이었습니다. 그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디모데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은 ‘그 조상 적부터’ 섬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모로서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와 같이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를 축복합니다. 일반적인 양심을 넘어서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양심, 그래서 기억되는 양심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사람, 그리고 그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양심이어야 합니다. ‘청결한 양심’이 정말 ‘청결한 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한 ‘청결한 양심’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육적 양심에 더해 영적 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양심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품인 ‘청결한 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정 - 의로운 눈물
본문에 찾아본 첫 번째는 디모데 인품 청결한 양심이었고요. 두 번째는 디모데의 성정입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딤후1:4). ‘눈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말씀이 한군데에만 있습니다. 친구 나사로가 죽음을 당했을 때, 슬퍼하신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1:35). 그러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간, 단 한번만 우셨을 까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나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사신 33년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기간 동안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인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애 동안 하나님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따라온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구원자가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 애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얼굴을 ‘돌이키시며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눅23:28).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의 길에 비통해하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이지만, 그 죽음 후 다시 사시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면서, 울고는 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는 자가 되지 않기를 위하여, 너희를 자신을 위하여 먼저 울어야 하고, 특히 ‘너희 자녀’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후 부활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울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자는 종국에 영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울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참고/계21:27). 그때 예수님도 울지 않으셨겠어요.
오늘 디모데의 눈물은 바로 이러한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자들을 위한 눈물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이자, 스승인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3:18). 십자가의 원수란 복음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말로도 전하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전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영적 아들인 디모데의 눈물 또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위한 눈물일 것입니다. 본문에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디모데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바람이면서, 디모데의 사역에 애통의 눈물을 말씀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딤후1:4). 디모데의 영혼에 대한 눈물, 이 애타는 사역이 지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 바울에게도 들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는 것이 ‘내 기쁨의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왜! 디모데의 눈물이 사도 바울에게는 기쁨일까요? 자기의 제자가 자기의 영적인 아들이 한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것이기에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데, 울어야 할 때 울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눈물은 영혼을 위한 눈물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우신 적이 언제에요. 배우자가 속 썩일 때요, 애들이 말 안들을 때요, 물질에 쪼들릴 때요. 사람 간에 의가 상해서요. 일하기가 힘겨워서요. 이 모든 일들이 눈물을 흘린 만한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언제 기쁨을 느끼셨어요. 배우자의 연봉이 많아졌을 때요. 아이 성적이 올라서요. 생각지 않은 돈이 수입으로 잡혔을 때요. 마음 아프게 하던 사람과 화했을 때요. 일한 보람이 있을 때요. 이 모든 일들은 기쁨을 가질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과 기쁨 가운데, 영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으세요. 즉 하나님을 위한 눈물과 기쁨은 무엇을 들 수 있으세요.
20세기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중 하나는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란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의로움’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픔을 당해도, 그 일로 가슴 아파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만 배부르면 되고, 자기만 안전하면 되고, 좀 더 확장해서, 자기 가족만 건강하면 괜찮습니다. 그래서 옆집에 혼자 살던 노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유해가 한 주간이 지나서야, 그 부패 냄새 때문에 신고하여,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트랜스모더니즘’Transmodernism이라고 합니다. 그 특징이 ‘비진리의 득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진리가 없고 상대 진리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진리가 상실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 부활 신앙 같은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절대 진리 거부는 포스트모던이즘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트랜스모던이즘 시대에는 자취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면 원시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재현 목사가 입만 열면 십자가의 부활, 천국과 지옥, 영생과 멸망, 심판과 구원, 재림과 종말을 명확하고 강조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 강단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언제까지 마음껏 전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되세요. 이미 서구는 그러한 용어를 설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구원자로 믿지 않는 타 단체나 개인에게 위화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들이 바로 절대 진리가 상실되고, 비 진리의 득세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절대 진리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눈물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디모데는 눈물을 흘렸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에 기쁨을 얻었습니다. 디모데의 눈물은 사도 바울의 눈물과 같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물을 흘리고 있으세요. 한 영혼을 위한 눈물은 슬픔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맺게 됩니다.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눈물이기 때문이지요. 이 눈물이 예수님의 눈물이고, 사도 바울의 눈물이고, 디모데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볼 때, 디모데의 어머니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눈물 말입니다. 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울 수 있다면, 부모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가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말입니다. 디모데의 성정은 눈물입니다. 의로운 눈물입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흘리는 의로운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릴 곳에 흘린 눈물 말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찬양,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가사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눈이 향하기를 원해요.”
신앙 - 거짓이 없는 믿음
본문에 찾아본 첫 번째는 디모데 인품은 청결한 양심이었고요. 두 번째는 디모데 성정은 의로운 눈물이었고요. 세 번째는 신앙입니다. 본문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아멘!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가운데 믿음을 언급하면서, 그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다보면, 목회를 정의하는 말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목양하는 목사들마다, 그 환경이나 여건이 각 각 다르기 때문에 목회에 대한 정의도 다양한데요. 일치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어요. “목회는 꾸준해야 된다. 인간의 수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꾸준해야 된다”는 말에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요. 성실, 진실, 일관입니다. 더 쉽게 풀면 ‘있는 그대로’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있는 그대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에 꾸미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 그대로 아멘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꾸민다는 말은 예쁘게 포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각색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렇지만, 현실은 안 그래, 내 사는 형편에 맞게 살아야 돼, 하나님도 다 사정 아셔”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현실이 어렵기에 우리가 그에 따라 변경시키고 있다는 것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왜 모르시겠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에 각색을 하는 믿음에는 성경 그대로 역사는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성도 여러분, 꾸미지 말고, 각색하지 말고, 변경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진실하게, 믿는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오늘 본문 뿐아니라, 믿음의 유산을 자식에게 아름답게 물려준 모범적 신앙인이었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말씀 그대로를 자녀에게 양육한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수 있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있는 우리 가정 되기를 축복합니다.
정리
어머니 유산
바울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지만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유대인이었기에 어릴때부터,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참고/행16:1.참고/출2:8,6:20). 그러므로 본문에 디모데의 인품과 성정과 믿음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권과 평등과 존중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하며, 구원자를 배척하는 사상이 교육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자녀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고, 어떻게 양육하며 본을 보여야 하는지를 알아야하고, 자녀들은 그 부모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고 승리하기를 또한 축복합니다.
인품 - 청결한 양심
디모데의 인품인 ‘청결한 양심’은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겨 오는’것이라고 하였습니다(3).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청결한 양심’의 관계는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이 갖가지 문제로 세상에 비판을 받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양심’이라고 했을 때,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범주만이 아니라, 그 이상 이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리베이트Rebate를 받을 상황이 되어도, 믿는 사람이 받으면 욕을 먹게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청결한 양심’ ‘Clear Conscience' ‘깨끗함’만으로 아니라, ‘Pure Conscience' ’순결함‘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KJV). 어떤 자리에서도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 가운데도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 ‘청결한 양심’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이익만을 쫓는 이기주의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태생, 성격, 인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품을 천성으로만 여기지 말고 부단한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습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에 관심을 두고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청결한 양심’ 순결한 자는 설사 내 것을 마땅히 취할 수 있는 몫이라도, 남을 위해 약간의 손실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기억되는 양심.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는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똑똑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야! 제 봐 자기 것도 안 챙기고, 나에게 주내 바보같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몫을 안 챙기고, 나에게 주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기에 지금 순간 나는 좋아요, 내 것 아닌데, 어떤 사람이 양보해서 내 것이 되었으니, 공짜로 얻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10년이 지났어요. 20-30년이 지났어요.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때 그 사람 왜 나에게 자기 것을 그냥 주었을까”라고 기억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어떤 사람에게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일들 말입니다. 예전에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남을 대접을 하는 것이지요. 청결한 양심은 기억이 되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아 맞아 그 사람 예수 믿는다고 했지 교회 다니니까 그렇게 한 것이지”라고 생각이 나는 사람이 된다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되니 말입니다. “양심을 지켜라” 이것은 자칫 율법이 될 수 있어요. 당장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배려할 때, 일반적인 양심에서,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양심, 그리고 그 양심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으로까지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 가운데는 영악하고 교활하고 간계하기 까지 합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어떻게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엄마 아빠 얻는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손해를 봐야 돼”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듣더라도, ‘청결한 양심’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내 태성이 이기주의라면 성령님께 ‘청결한 양심’이 되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통해 자녀들에게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을 얻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양심.내 태성이 ‘청결한 양심’이라면 더 더욱 좋을 일이지요. 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더하면, 자신은 물론 자녀들이 디모데처럼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들 가운데 나는 이제껏 나쁜 일 해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 상대적일 뿐 하나님 아래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롬3:10). 이것을 모른 것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벧전3:16,21). 정말 ‘청결한 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한 ‘청결한 양심’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육적 양심에 더해 영적 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양심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품인 ‘청결한 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정 - 의로운 눈물
디모데의 성정은 의로운 눈물입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딤후1:4).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눈물은 한번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그러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간, 단 한번만 우셨을까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느니라’(히5:7).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 앞에 많은 눈물을 흘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눅23:28).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면서, 울고는 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모르는 자가 되지 않기를 위하여, 너희를 자신을 위하여 먼저 울어야 하고, 특히 ‘너희 자녀’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후 부활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울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종국은 영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울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참고/계21:27). 그때 예수님도 울지 않으셨겠어요.
디모데의 눈물은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자들을 위한 눈물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적 아버지 바울이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빌3:18). 그렇다면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의 눈물 또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위한 눈물일 것입니다. 디모데의 영혼에 대한 눈물, 이 애타는 사역이 지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 바울에게도 들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를 만나는 것이 ‘내 기쁨의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영적인 아들이 한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것이기에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데, 울어야 할 때 울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한 눈물이 기쁨입니다. 좋은 일에 기쁨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과 기쁨 가운데, 영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으세요. 즉 하나님을 위한 눈물과 기쁨은 무엇을 들 수 있으세요.
21세기는 ‘트랜스모더니즘’Transmodernism이라고 합니다. 그 특징이 ‘비진리의 득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진리가 상실되었습니다. 서구에서는 십자가의 부활, 천국과 지옥, 영생과 멸망, 심판과 구원, 재림과 종말 등이 신앙 없는 자들에게 위화감을 준다고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들이 바로 절대 진리가 상실되고, 비 진리의 득세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절대 진리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눈물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디모데의 눈물은 사도 바울의 눈물과 같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었기 기쁨을 갖게 했습니다. 이 눈물이 예수님의 눈물이고, 사도 바울의 눈물이고, 디모데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의 어머니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눈물 말입니다. 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울 수 있다면, 부모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가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눈물이 우리의 성정이어야 합니다.
신앙 - 거짓이 없는 믿음
디모데의 신앙은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가운데 믿음을 언급하면서, 그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다보면, 목회를 정의하는 말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목양하는 목사들마다, 그 환경이나 여건이 각 각 다르기 때문에 목회에 대한 정의도 다양한데요. 일치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목회는 꾸준해야 된다. 인간의 수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실함, 진실함이란 뜻이 있고 , 쉽게 ‘있는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있는 그대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꾸미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꾸민다는 말은 각색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렇지만, 현실은 안 그래, 내 사는 형편에 맞게 살아야 돼, 하나님도 다 사정 아셔”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현실이 어렵기에 우리가 그에 따라 변경시키고 있다는 것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왜 모르시겠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에 각색을 하는 믿음에는 성경 그대로 역사는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꾸미지 말고, 각색하지 말고, 변경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진실하게, 믿는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오늘 본문 뿐아니라, 믿음의 유산을 자식에게 아름답게 물려준 모범적 신앙인이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말씀 그대로를 자녀에게 양육한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수 있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있는 우리 가정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디모데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에베소 교회를 담임했고, 그리스 아덴,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지에서도 목회했습니다. 디모데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 바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도를 가리켜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딤전1:2). 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는 말씀을 ‘영적 아들’ 또는 ‘무릎으로 낳은 아들’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디모데는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사도 가운데 한 명인 바울의 후계자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청결한 양심’과 ‘의로운 눈물’과 ‘거짓 없는 믿음’을 유업으로 주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주시는 복 가운데 하나인 가장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스승은 두 가지입니다. 학교 스승 교회 스승입니다. 특히 교회 스승인 목사는 영적인 부모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영적인 아들, 무릎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배로 낳아준 부모만 아니라, 무릎으로 낳아준 부모 즉 목사님이 있어야 합니다. 무릎으로 낳았다는 말은 기도로 낳았다는 뜻입니다. 이재현 목사가 무릎으로 낳은 성도, 그리고 성도 여러분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저도 여러분을 위해 매일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중보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첫 번째는 하나님, 두 번째는 교회 공동체 가족입니다. 성도님들을 위한 기도가 하루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인품은 청결한 양심, 성정은 의로운 눈물, 신앙은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이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하나님께 영광되고, 믿음 안에서, 참된 부모, 무릎으로, 기도로 쌓은 목사의 만남도,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조상으로부터 신앙을 물려 받은 디모데의 인품은 청결한 양심입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더렵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약간의 손해가 되더라도 베풂으로 훗날 기억되는 양심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이였지라는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양심입니다. 일반 양심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양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품 청결한 양심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디모데의 성정은 눈물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 대한 눈물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눈물이고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또한 디모데의 어머니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울 수 있게 하옵소서. 내가 먼저 영혼을 위해 울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디모데의 신앙은 거짓없는 믿음입니다. 현실을 들어 꾸미는 각색이 습관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 그대로 아멘하게 하옵소서. 부모로서 성경으로 자녀를 양육하게 하옵소서. 자녀로서 성경으로 부모의 훈계를 순종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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