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스라엘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갈라디아서 6:11~18 2023.03.12. 主日禮拜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6:11-18)
‘내핵’inner core은 최고 7 천도에 달합니다. 왜! 지구 중심부에 태양과 같은 불덩어리가 있는 것일까요? 첫 심판은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 물심판이었습니다(벧후3:6.참고/창7:10). 마지막 심판인 불심판에 '하늘과 땅을 (내핵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후3:7). 모든 징조는 그 날이 가까이 옴을 경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심판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받는 것이요(벧후3:7-9.참고/계16:19,18:2,10,21). 성도들은 공중 휴거로 건지시는 것입니다(살전4:17;벧후2:5.참고/계15:3;출15:1-18). 이 영광에 모두 참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내핵에는 백금, 금, 오스뮴, 이리듐, 팔라듐, 레늄 등이 다량 함유된 보석층이 있는데 지구 전체 귀금속의 98%에 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구는 종말에 불심판으로 완전히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가 조성됩니다. 그 나라는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 주께서 ‘왕노릇, 예수님이 만왕으로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입니다(계11:15). 내핵 안에 있는 진귀한 보석들은 불심판 후, 지구에 새롭게 만드실 천년왕국에 재료들로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첫째 (강) 이름은 비손이라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창2:10-12). 하나님이 처음 만드셨던 세상은 진귀한 보석들로 가득 차고 넘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우실 천년왕국이 에덴의 회복인 것입니다.
본문에 ‘내 거룩한 산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나라’ ‘Not Hurt or Destroy Land'는 ‘평화의 나라’Land of Peace입니다(사11:9).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참고/사66:12).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2:4). 이 말씀은 실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와 지금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말일’The last days에 장차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사2:2.참고/암5:18;미4:1;습1:7;욜3:14;요6:39;고전1:8;빌1:6;살전5:2;엡4:30;벧후3:12). 다시 오실 주께서 세상은 심판하시고 세우실 나라가 천년왕국The Millennium인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 무저갱은 밑바닥 없는 구렁텅이를 말합니다. 악한 천사와 사탄을 잡아 가두는 곳입니다. 천사가 그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하늘로부터 가지고와서, 용을 잡으니, 이 용은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이 사탄을 큰 쇠사슬로 결박하고, 끝이 없는 구렁텅이인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입구를 인봉했습니다. 천년이 차도록 만국 이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계20:1-3). 다시 오실 주께 심판받을 사탄의 운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탄이 활동하지 못하는 기간이 천년입니다. 천년왕국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삽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습니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립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습니다.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이사야65:6-8). 이렇게 하여도 해 됨도 상함도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파괴된 에덴 동산의 회복인 것입니다(창2:19,29-30,3:9,14).
천년왕국은 죽음이 없습니다. 마귀가 없기에 죄가 없고 죄가 없기에 죽음이 없는 나라입니다(사65:20.참고/롬6:23). 상실이 없습니다. 타인에 의해 빼악기지 않습니다. 노력한 그대로를 받는 나라입니다(사65:22-23). 단절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단절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기 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나라입니다(사65:24.참고/단9:24).
교회는 이 세상에서도 천년왕국의 삶을 누리게 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셨습니다(행20:28.참고/히9:22). 교회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박해로 직장과 장사를 할 수 없는 상실을 당하지 않도록 재산과 소유를 교회에 드려 유무상통하게 하였습니다(참고/행4:44-45;고후8:14). 이 헌금의 정신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은 성도의 피와 땀입니다. 그것을 예물로 드릴 때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피하였습니다(창3:8). 하나님과 단절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상대와 대립하고 단절이 된 것입니다(참고/창3:18). 예수님은 단절의 담을 허무셨습니다(엡2:14-18). 그러므로 교회가 세워지면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고 양반과 천민 신분, 남녀 성별 차별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혼란과 혼미와 혼돈을 해결하실 다실 오실 주님께만 소망 두고, 죽음, 상실, 단절이 완전히 소멸하실 재림 예수와 그분이 왕으로 통치하셔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천년왕국에 거룩한 백성을 소망하고, 천국 입성까지 나아가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사11:9).
선민과 할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성경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후, 오늘까지도 선민이라는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창12:1). 이스라엘의 ‘선민사상’先民思想,the Chosen People Concept은 대단한 것입니다. AD 70년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69-79의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79-81는 제1차 유대독립전쟁을 저지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 시켰습니다(참고/눅19:43-44).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Colosseum을 건설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AD 135년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 Hadrianus,76-138는 제2차 유대독립전쟁을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유대인들을 세계 각지로 영구 추방하고, 유다아Judea로 부르던 지명을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estina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하게 됩니다. 정확히 1,813년만입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국치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36년 만에 잃어버린 나라를 찾은 것도, 대단히 고무적인 일인데, 이스라엘은 무려 2천여 년 만에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룬 요인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민사상의 저력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기에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참고/겔37:25-28).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왜곡하고 오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할례 문제입니다. 본문에 ‘할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갈6:12-13).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언약의 표식’으로 남자의 몸에 행하는 예식입니다(창17:10). 이 할례의식은 초대교회까기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교회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있었는데요. 이들 중 교회에 혼란을 야기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것입니다.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갈6:12-13)
이 말씀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할례에 대해서 갖고있는 이중적 태도를 알 수 있는데요. 첫째 그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것 때문에 오는 박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유대교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보고자, 이방인 성도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고,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지키게 하는 데 열심 있는 자라"고 알림으로써, 유대교 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고, 기독교를 믿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어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함으로 유대교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지만, 할례받은 이들답게 율법은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즉 “나는 유대인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가장 중요한 할례를 받게 했으면 되었지 뭐”라는 식의 모순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표식인 할례만을 행하고, 다른 율법 규례는 준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는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려 한 것은 결국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이방인이 할례를 받게 했다"라고 공을 내세우며,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랑을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택하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Circumcision 명하셨습니다(창17:10-12). 아브라함은 구십 구세에 이스마엘은 십 삼세에 ‘포피’를 베어 할례를 행했습니다(창17:23-27). 그리고 이후 정해진 규례대로 이삭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21:4).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언약의 표식으로 할례를 행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언약의 백성된 저와 여러분은 어떤 언약의 표징을 가져야 합니까?(참고/롬4:16) 유대인들처럼 육체의 표식을 가져야 합니까? 구약시대를 넘어 신약시대의 언약 백성인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표면적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가리킵니다. ‘표면적 유대인’들은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는 명를 따라, 유대인들은 이 예식을 행했습니다(창17:12.참고/눅2:21;빌3:5).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변질되었습니다. 육체에 할례를 행하기만 하면, 언약의 백성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만으로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선민으로 할례를 받았으니, 구원받는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할례는 육신의 할례가 아니요 마음에 하라’고 하였습니다(참고/신10:16,30:6). ‘마음에 할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신 것은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저와 여러분들의 언약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히7:22,12:24).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라고 하였습니다(히13:20). 그러므로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10:10).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할례’를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은 ‘할례를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갈6:13). 육체의 모양’ 할례를 가지고, ‘육체의 자랑’을 삼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하셨습니다(롬2:29).
십자가만 자랑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우리의 자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내가 할례 받았다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고, 무할례자라고 핸디캡Handicap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어떤 것도 자랑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1: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온 우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빌3:8). 사도 바울은 정통 바리새파이며, 베냐민 자손으로 혈통적 유대인으로서도 당당했습니다.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에게 사사 받은 자로서, 학식으로도 톱클래스Top Class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능통하게 구사했습니다. 신분으로도 로열패밀리 Royal Family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구원을 받은 것,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인생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는데요. 그 모임을 주선한 분은 일산에 있는 모교회의 권사님이십니다. 우리 교회 개척 때부터 기도 동역자입니다. 중학교 교감인데요. 그때는 교사였어요. 교감 승진을 위해 기도를 부탁해서, 열심히 중보를 했었습니다. 그 권사님과 같이 그 모임에는 세상 적으로 괜찮게 사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강남 압구정에 2층 단독주택에서 사는 분도 계시니까요? 그런데 그중에 한 분이 홍익대학교 미대를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가 아니고요. 똥통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시골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30년도 넘은 시절에 대학교에 대한 정보도 미약했을 때, 미대 중에 최고라는 홍익대에 합격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입니다. 그 당시 홍대 미대를 졸업하면, 제일 못해도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얼마나 기대를 많이 받았겠어요.
그런데 이분이 신앙생활을 하였으니까요. 대학교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복음주의 초교파적 선교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더욱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에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헌신을 결단했습니다. 제가 목사 취임을 할 때, 축하하러 오셨었는데요. 그 당시 대학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을 때였는데요. 그때도 UBF간사로 활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UBF간사 1년 연봉이 얼마인지 아세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120만 원입니다. 한 달 월급이 아니고요. 1년 연봉이요. 한 달에 한 10만 원 정도 받으니까요? 상황이 이러니 그 많은 기대를 했던 학교와 가정에서 어떻겠어요. 몇해 전 제가 장례식장에서 뵈었을 때, 변함없이 UBF 간사들을 지도하는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분 뿐 아니라 제가 아는 선교단체에 소속된 청년들은 모든 젊음을 선교에 헌신합니다. 한 달에 오만 원에서, 십만 원 수입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요. 빵 하나라도 공동체 수 데로 나누어 먹지요. 그들은 그것이 아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그들은 왜 그런 길을 선택했을까요?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그리스도가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앞에 말씀드린 선교단체에 관련된 분들과 같이, 선교에 대한 비전에 헌신하는 분들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분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각자의 삶에서, 그러한 고백으로 주님이 주시는 감동과 성령의 인도함으로 행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최선희 사모가 모인 동창 모임에는 그분뿐만 아니라, 또 다른 분도, 그리스도를 얻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분이 있는 데요. 그분이 누구인지 아세요? 최선희 사모입니다. 여러분 이재현 목사를 존경하세요. 최선희 사모를 존경하세요.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모두 존경합니다. 우리 교회를 섬긴다는 자체가 존경받을 만한 일이에요. 우리 모두가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존경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분에게 인사하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끝까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6:14).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풀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대학을 나와서, 촉망되는 장래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다가도, 다 버려버리고 앞서 말씀드린 분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기대가 없고, 이제 세상도 나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대는 세상 적 기대입니다.
새로 지음 받은 것 자랑
우리는 어떠한 육체의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분문에서 찾은 우리의 자랑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우리의 자랑은 육체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데요. ‘새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새로운 사람에 대하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고후5:17). 이 말씀에서 ‘새로운 사람’ 어떤 것인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새로운 사람이란? 처음 예수님 믿는 순간, 회심을 경험하고, 구원의 감격에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헌신자로 살기를 다짐하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새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얻어,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리며,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여기 말씀에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하시면서,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그에 대해서 쭉 이어 말씀하고 있고요.
세상 사람들은 어둠의 일을 자랑하겠지요. 어느 회사가 1905년 러일전쟁 때, 자침自沈 된 150조 원의 금괴가 있는 배를 발견했다고 들썩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자 점점 말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10조로 줄였다가 배를 발견한 잠수정 기술자가 금괴가 든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는 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그 배 자체만으로도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고, 앞으로 그 일대가 해상공원으로 지정될 것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발견 이전부터 보물선을 인양한다고, 비트코인 가상화폐를 발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많은 투자자의 엄청난 손실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자랑입니다. ‘어두의 일’입니다.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세상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한번에 큰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인 것입니다. 가상화폐나 다단계 투기 등은 자기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돈을 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자기 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을 모여 드는 것을 자랑삼는 바로 어둠의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자기보다 똑똑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대의 아들들이’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성도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신 것입니다(눅16:8).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일을 자랑할 수도, 자랑해서도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우리들에게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는 전도, 복음이 우리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우리가 복음, 예수를 전할 때,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성도들 ‘세상의 약한 것(인 성도들)을 택하사’ 세상의 ‘강한 것 들’ 세상에서 지혜있고 능력있다고 떠벌이는 자들을 ‘부끄럽게’하시다고 하셨습니다(고전1:27).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을 자랑해야 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어두의 일을 벗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고, 복음을 전하고, 은사대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겠다는 것이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자랑
우리는 어떠한 육체의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분문에서 찾은 우리의 자랑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고요. 세 번째는 ‘예수의 흔적’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이 말씀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이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로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흑인노예가 있던 시대에는 주인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종의 몸에 남겨두는 상처를 말합니다. 시뻘겋게 달군 쇠로 살을 지져서 표시를 남기곤 했습니다. 그런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흔적에 해당합니다. 갈라디아 지방에서의 유대인들은 몸에 행해진 할례를 자기들의 흔적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회심 이후에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전도사역의 삶을 사는 동안 실로 수많은 흔적을 그의 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 모든 것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 바울이 가진 ‘예수의 흔적’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삶의 의미이고, 목표이며, 기쁨이고, 방식이었던, 바울의 삶의 증거로, 그의 몸에 남은 흔적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이러한 고난에서, 얻은 몸에 난 상처와 흉터 같은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이 외의 일은’, 앞에서 열거한 사도 바울을 숱한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즉 ‘그 밖의 것은 제쳐 놓고서라도’,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즉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는데,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면서, 당한 수많은 고난과 그를 통해 얻은 상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봅니다.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9-30).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약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도 약해지고, 성도들이 실족했다는 전갈을 받으면, 자신은 애가 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을 통해 약해지는 것, 이 약함이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수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성경 상으로 볼 때, 약 4차례로 보이고, 그 기간은 10년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10년 동안, 앞서 우리가 합독한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수많은 죽음의 위기와 옥살이와 매질과 배신과 강도와 도적과 굶주림과 헐벗음과 추위와 위험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몸에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정말 ‘예수의 흔적’을 육체에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의 상처가, 자신의 자랑이 아니고, 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그 수많은 고난 가운데도, 성도들의 약함과 실족을 들을 때, 함께 약해지고 애타는 마음이 자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약함을 듣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전해지는 성도들의 약함이 나의 약함이 된 것이 자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약함을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으로 가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에 가시’로 명한 자신의 질병, 죽은 자도 살린 능력의 사자가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아니러니’Irony라고 할까요. ‘딜레마’Dilemma라고 해야 하나요.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의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감추고 싶은 약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됨으로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12:9).
이렇게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약함을 위해 기도할 때, 자신도 성도들의 약함을 체감하는 것이 자랑이요. 자신의 수차례 낳기를 구하였으나, 고침 받지 못한 질병 ‘육체의 가시’로 인한 약함이 자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복음을 증거한 전도여행에서, 당한 고난 속에서, 얻은 육체의 상처가 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약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울이 가진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계신가요?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그들의 아픔이 여러분이 아픔이 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9:36).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긍휼히 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목자 잃은 양들이 당하는 고생과 기진함을 아시는 것만이 아니라 몸소 겪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히4:15). 이 구절을 예전에 사용하던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 체體 동정할 휼體,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가장 큰 고통인 십자가에 달리셨으니까요? 그러므로 한 성도의 약함을 위해서, 그 성도의 약함을 나의 약함으로 기도할 때, 바로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 점 “지복이지 뭐 지가 알아서 믿어야 해”, 믿음 1/3, 체념 1/3, 포기 1/3이 되어져 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저도 주님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정말 성도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 성도를 위해, 내가 아파서 고침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 같이, 예수님과 같이, 성도들의 연약함을, 내 연약함으로 갖는 것이, 나의 자랑, 예수의 흔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우리가 갖는 예수의 흔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우리는 어떠한 육체의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두 번째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로 옷 입는 것입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일을 계획하고, 주님의 일을 실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한 영혼의 약함을 내 약함으로 품고, 그 성도 약함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 가지. 십자가, 새로 지음 받은 것, 예수의 흔적이 자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6:16) 아멘!.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론에서 ‘선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자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선민사상이 2천 여 년 동안 나라가 없던 이스라엘을 독립하게 된 저력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고 하는 육체의 표시인 할례를 자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고도, 유대교의 비판을 받지 않으려고,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방인들을 할례를 행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다른 율법의 규례는 지키지 않는 모순적인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혈통적 유대인을 일컫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혈통으로는 이방인인 이면적 유대인이어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영적인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이 영적인 유대인의 성경적 표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으면,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영적 유대인,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인 저와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 명령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새로지음 받음을 자랑하고, 예수의 흔적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사명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
선민과 할례
성경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후, 오늘까지도 선민이라는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창12:1). 이스라엘의 ‘선민사상’先民思想,the Chosen People Concept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라를 잃어버린지 무려 2천여 년 만에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유대인이 갖고 있는 선민사상의 저력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기에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참고/겔37:25-28).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왜곡하고 오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할례 문제입니다. 본문에 ‘할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갈6:12-13).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언약의 표식’으로 남자의 몸에 행하는 예식입니다(창17:10). 이 할례의식은 초대교회까기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교회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있었는데요. 이들 중 교회에 혼란을 야기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것입니다(갈6:12-13)
그러나 그들의 이중적 태도를 알 수 있는데요. 첫째 유대인으로서 예수을 믿으으면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피해 보고자, 이방인 성도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교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의 표식인 할례만을 행하고, 다른 율법 규례는 무시하는 모순을 가졌습니다. 셋째 이방인을 할례 받게 한 것은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며,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은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유대교에 있다는 것을 방패로, 유대교로부터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택하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Circumcision 명하셨습니다(창17:10-11).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도 할례로 언약의 표징을 가져야 합니까?(참고/롬4:16)‘표면적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이방인 우리를 가리킵니다(롬2:28-29).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받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 유대인들입니다(창17:12.참고/눅2:21;빌3:5). 그들에게 ‘할례는 육신의 할례가 아니요 마음에 하라’고 하였습니다(롬2:29.참고/신10:16,30: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신 것은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인 우리의 언약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라고 하였습니다(히13:20.참고/히7:22,12:24). 그러므로 ‘마음에 할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참고/롬10:10).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할례’를 한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 할례를 가지고, ‘육체의 자랑’을 삼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십자가만 자랑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우리의 자랑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어떤 것도 자랑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1:16). 이 세상에서 십자가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찬송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대로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통 바리새파이며, 베냐민 자손으로 혈통적 유대인으로서도 당당했습니다.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에게 사사 받은 자로서, 학식으로도 톱클래스Top Class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능통하게 구사했습니다. 신분으로도 로열패밀리Royal Family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동창 중에는 미대 중 최고 레벨의 대학교를 나오신 분이 있습니다. 30여 년 전 시골에서 그 학교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졸업하면 제일 못해도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얼마나 기대를 많이 받았겠어요. 그런데 이 분이 믿음을 가졌기에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복음주의 초교파적 선교단체 동아리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헌신을 결단하고 간사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분들 월급이 아니고 연봉이 120만 원 정도입니다. 몇해 전 장례식장에서 뵈었을 때, 변함없이 UBF 간사들을 지도하는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젊음을 선교에 헌신하는 청년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6:14). 쉽게 풀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대학을 나와서, 촉망되는 장래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다가도, 다 버려버리고 앞서 말씀드린 분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기대가 없고, 이제 세상도 나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대는 세상 적 기대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모두 존경합니다. 우리 교회를 섬긴다는 자체가 존경받을 만한 일이에요. 우리 모두가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존경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분에게 인사하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끝까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새로 지음 받은 것 자랑
우리는 어떠한 육체의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 두 번째 새로 지음 받은 자랑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은 ‘새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얻어,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리며,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하시면서,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하십니다(롬13:11).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롬13:12-14). 모 회사에서 150조 원의 금괴가 있는 침몰된 배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바꾸기 시작했고, 그 이전부터 가상화폐를 발행하여 수많은 투자자의 엄청난 손실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자랑입니다. ‘어두의 일’입니다.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세상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욕을 이용하여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사람들이 성도들보다 세상 방법은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눅16:8). 우리가 세상의 어두운 일을 자랑할 수도, 자랑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는 전도, 복음이 우리의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고전1:2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우리가 복음, 예수를 전할 때,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성도들 ‘세상의 약한 것(인 성도들)을 택하사’ 세상의 ‘강한 것 들’ 세상에서 지혜있고 능력있다고 떠벌이는 자들을 ‘부끄럽게’하시다고 하셨습니다(고전1:27).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을 자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어두의 일을 벗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으로 주님의 일을 하기기를 축복합니다(롬13:12-14).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자랑
우리는 어떠한 육체의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만이 자랑입니다. 두 번째 새로 지음 받은 자랑입니다. 세 번째 예수의 흔적을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로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과거 노예제도 가 있는 시절 주인은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종의 몸에 시뻘겋게 달군 쇠로 살을 지져서 표시를 남기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 이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을 드림으로 수많은 흔적을 그의 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고후11:23-27).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이러한 고난에서, 얻은 몸에 난 상처와 흉터 같은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숱한 고난을 고사하고’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사도 바울에게 예수의 흔적은 핍박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도 항상 교회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약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도 약해지고, 성도들이 실족했다는 전갈을 받으면, 자신은 애가 탔다고 하였습니다(고후11:29-30).
뿐만 아니라 ‘육체에 가시’로 명한 자신의 질병, 죽은 자도 살린 능력의 사자가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아니러니’Irony라고 할까요. ‘딜레마’Dilemma라고 해야 하나요.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의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감추고 싶은 약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됨으로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12:9). 이렇게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약함을 위해 기도할 때, 자신도 성도들의 약함을 체감하는 것이 자랑이요. 자신의 수차례 낳기를 구하였으나, 고침 받지 못한 질병 ‘육체의 가시’로 인한 약함이 자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계신가요?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그들의 아픔이 여러분이 아픔이 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9:36).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시신 것만 아니라, 십자가로 몸소 체휼 하신 분입니다(히4:15). 그러므로 한 성도의 약함을 위해서, 그 성도의 약함을 나의 약함으로 기도할 때, 바로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 점 “지복이지 뭐 지가 알아서 믿어야 해”, 믿음 1/3, 체념 1/3, 포기 1/3이 되어져 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저도 주님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정말 성도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 성도를 위해, 내가 아파서 고침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 같이, 예수님과 같이, 성도들의 연약함을, 내 연약함으로 갖는 것이, 나의 자랑, 예수의 흔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우리가 갖는 예수의 흔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우리가 십자가을 자랑하고, 새로 지음 받은 것을 자랑하고, 예수 흔적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갈6:16).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자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 표시인 할례를 자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고도, 유대교의 비판을 받지 않으려고,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방인들을 할례를 행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다른 율법의 규례는 지키지 않는 모순적인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혈통적 유대인을 일컫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혈통으로는 이방인인 이면적 유대인이어도, 예수를 믿는 자가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영적인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이 영적인 유대인의 성경적 표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 명령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되었습니다(창12:2-3). 그러므로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새로지음 받음을 자랑하고, 예수의 흔적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사명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택함 받은 선민이 사는 국가는 성민의 나라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14:2). 이 ‘여호와 성민’ 어느 나라입니까? 우리는 주저 없이 “대한민국” 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영적 아브라함 후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민이 우리이고,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성민의 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2008년 금융위기,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보다 더하다는 경제위기,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의 창궐, 우크라-러시아 전쟁에서 보듯이 세계의 곳곳의 분쟁, 기후재앙, 자연재해, 자원의 임계점, 경제의 추락, 식량 부족과 식수의 고갈, 세계 대전 등 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가운데 이러한 혼돈의 시대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급변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징조들은 주 오심의 가까이 옴을 경종하고 있습니다. 헛된 곳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26:19) 어떤 사건과 사태 앞에서도, 주의 백성과 주의 백성이 거하는 나라는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한 백성인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 어둠의 자랑을 벗고, 정욕을 위하여 도모하는 자랑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로 옷 입는 낯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일을 계획하고, 주님의 일을 실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영혼의 연약함을 예수님과 같이 체휼하고, 사도 바울 같이 그 연약함으로 자신도 연약 짐을 자랑하는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가득한 성민의 나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통하여, 마지막시대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감당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지금 목양과 신앙하는 우리들의 소망이요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십자가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세상에서 십자가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의 삶에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 분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새로 지음 받은 것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세상의 방법, 어둠의 일을 자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으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심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를 믿음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도 한 성도의 연약함을, 내 연약함으로 갖는 예수의 흔적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주셨던 명령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새로지음 받음을 자랑하고, 예수의 흔적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가득한 성민의 나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통하여, 마지막시대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감당하실 줄 믿습니다. 이 소망으로 정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설교 > 주일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갈 1:6-12) 이재현목사(23.03.26) (1) | 2023.03.27 |
---|---|
"양심과 눈물과 믿음"(딤후 1:3-5) 이재현목사(23.03.19) (0) | 2023.03.19 |
"해 됨도 상함도 없는 나라"천년왕국 The Millennium 千年王國(사 11:6-9) 이재현목사(23.03.05) (1) | 2023.03.05 |
"온 마음으로"(렘 29:11-13) 이재현목사(23.02.26) (0) | 2023.02.26 |
"하늘에까지 사무쳤다"(계 18:4-6) 이재현목사(23.02.19) (1) | 2023.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