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프라이데이
Good Friday
하나님말씀 : 히브리서 13:11-14 2023.04.02. 主日禮拜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히13:10-14)
서양 문화를 형성하는 2대 조류인 ‘헤브라이즘’Hebraism은 ‘신본주의사상’The God-Oriented을 가집니다. ‘헬레니즘’Hellenism은 ‘인본주의사상’Humanism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인본주의’는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인본주의’입니다. ‘신본주의’ 하나님 기쁨과 ‘인본주의’ 사람의 기쁨의 기준은 복음입니다(갈1:10). ‘신본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본주의’는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갈1:7.참고/갈2:4,6:12-17). 정통 교회에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복주의’Prosperityism=Prosperity Gospel. 복 중의 가장 큰 복은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에게 삶에서도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구원보다 물질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화이트Paula M. White,1966-목사는 십자가를 재정적 어려움에서 구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가 강사로 초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 하나 누울 거처없이 지내시다가 마지막은 십자가이었습니다(마8:20,27:32-44;막15:21-32;눅23:26-43;요19:17-27). 바울은 수많은 고난을 받고 참수로 생을 마쳤습니다(고후11:23-27.참고/행19:21,20:22-24,21:13;딤후4:6-8). 잘못 믿었기 이러한 삶을 살았나요. “예수 믿으면 잘 살아애 된다.” 기복주의입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 주시는 분복도 받기를 축복합니다(전5:18-19).
‘율법주의’Legalism.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참고/롬3:17,21-22,5:1;갈2:16,3:11;빌3:9). 그런데 믿음보다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율법주의는 예배에 참여를 전부로 아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들려진 것이 1960년대 후반입니다. 그 이전에는 사제가 라틴어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보이는 의식이 예배를 다 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형식과 규범에 따른 의식으로 예배드렸다고 생각하지 않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립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립니다. 참여를 전부로 아는 예배는 율법주의는 또한 다른 형태의 인본주의입니다.
‘방종주의’Self-Indulgentism.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마5:17.참고/시119: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이 십계명이 율법이기에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지금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2:8). 방종주의가 아닌 순종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신비주의’Mysticism. 신앙은 영적이기에 신비를 전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극단적 신비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꿈, 환상, 계시로 보고자 하는 것은 인본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 집단 교주에게 피해받은 이유 중에 그 자의 통시, 예언, 신유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나 해몽가들도 ‘이적과 기사’를 보인다고 했습니다(신13:1). 중요한 것은 어떤 기적에서도 우상과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신13:2-3.참고/계13:4,13). 하나님의 ‘Test’를 통과하지 못하면, 마귀의 권세를 받은 교주의 ‘Temptation’에 빠지는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 영혼과 정신은 선하고,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도 예수님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가현설’Doketismus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도 부활도 부장하게 됩니다. 신앙을 위해 과식과 정욕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금욕주의는 바르지 않습니다. 성결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보혈이지, 인간의 금욕이 아닙니다(참고/롬1:4).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 구원받는 ‘비밀스러운 지식'‘그노시스’gnosis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그와 같이 예수 믿는 일시를 알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며, “깨달음과 거듭남의 비밀”을 설파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변형된 영지주의입니다.
‘영적 전쟁’The Spirit War. 헤브라이즘의 신본주의와 헬라니즘의 인본주의는 지금도 계속해서 대립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와 대결이 아니라, 성도 사이에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도 심화되고 있는 것이 마지막 시대 교회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사람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가 아니면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갈1:8). 사도 바울이 수없이 말했지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났다고 합니다(갈1:9,2:6).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즉 신본주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살전2:2,4).
‘휴머니스트’Humanist. 동성애자인 모 연예인의 커밍아웃Comingout이 용기있고 진실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였고, 조카를 입양한 가족애가 남다르고, ‘휴머니스트’Humanist 사례로 방송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에까지 죄가 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참고/계185). 인간을 좋게 하고,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인본주의, 휴머니스트가, 신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교회에 가만히 잠입하여,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일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갈1:7).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거부하는 ‘배교’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씀합니다(살후2:3.참고/요14:6). 그래서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또한 구원과 진리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라는 종교다원주의가 큰 세력을 이룰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라는 간판은 달았지만 이러한 것을 설파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바로 이런 일이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명한 복음주의자께서 “20세기 들어와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는 세계의 명문대학을 중심한 학문계에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오직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로 영접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함께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히11:6).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 신본주의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굿 프라이데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성전에 들어가사”(막11:7-11.참고/마21:1-11;눅19:28-40;요 12:12-19). 닷새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죽음의 길을 알고도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그 십자가의 길이, 나의 길임을 믿고 나아가기를 결단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돌아오는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입니다. 이 날을 성금요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금요일이라고 하면 영어로 ‘Holy Friday’로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심을 뜻하는 ‘Precious Blood Friday’로 하든지요. 그러나 성금요일을 영어로 ‘Good Friday’, ‘좋은 금요일’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죽으신 날을 ‘굿 프라이데이’라고 할 수 이을 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약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예언하고 있는데요.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평화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이것만큼 인류에게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영어로 ‘Good News'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을 ‘굿 프라이데이’, ‘좋은 금요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부터 금요일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 고난주간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 성금요일이 왜 굿 프라이데이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오늘 본문에도 이 굿 프라이데이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히13:11)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 안에는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를 전가할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립니다. 주로 양이나 소를 제물로 합니다. 대제사장은 제물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본문 ‘성소’라고 되어 있는데요.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성소라고 한 것은 지성소도 크게 성소 구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 앞 쪽에 큰 휘장으로 가려진 곳이 있는데요. 이곳을 ‘지성소’히,קֹדֶשׁ הַקֳּדָשִׁים,라Sanctum(Sanctorum),영Most Holy Place(sanctuar)라고 합니다. 이곳 지성소를 성소 구역에서 구분한 이유는 지성소는 대제사장 만이 들어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딱 1년에 한 번입니다(레16장,23장). 대속죄일에만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위, 법궤를 덮고 있는 덮개인 ‘속죄소’贖罪所,Atonement Cover=‘시은좌’(施恩座)에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쏟습니다. 이렇게 1년 1차 속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왜 1년에 1차씩 죄를 대속해야 하는가 말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이기 때문입니다(히13:11).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짐승을 대신 제물로 그 피를 드린 것인데요. 짐승의 피로써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대속할 수 없습니다. 그 유효 기간은 1년 지나지 않습니다. 1년 후에 다시 대속죄일에 짐승의 피를 드리며, 인간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매년 반복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짐승의 피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년 마다 반복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마다 또 드리고 또 드리고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약의 제사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로 해마다 반복하여 드리는 제사를 끝내고, 한 번에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흠 없는 피로하시기로 했습니다. 그 피는 짐승의 피로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 보다 하급인 짐승이 인간의 죄를 완전히 대속할 수 있겠습니까? 짐승의 피는 일 년간만 유효할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그렇게 받으시기로 정한 것이니까 효력이 있는 것이지, 짐승의 피 자체가 1년간 인간의 죄를 대속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약의 제사를 끝내고, 한 번에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흠이 없는 피만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흠이 없는 피를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갖고 태어나는 필연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흠이 없는 피를 가진 이는 이 땅에서 태어나는 존재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있는 이 이어야 합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에 피 흘리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할 자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에서 씻김을 받습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 한 번에 죽으심으로 마쳤습니다. 더 이상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흠 없는 피를 흘리심으로 완전히 인간의 죄를 대속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구약과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본문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히13:12).
이러한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7:27). 구약시대에는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그가’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를 (십자가에)드려 (대속을)이루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몇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이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구약의 제사와 비교해서 부각하고 있는 단어가 나오죠!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단번’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해마다 반복하여 드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뜻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셨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2천 여 년 전 성금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완전한 성취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저와 여러분의 대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성금요일은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문 밖
본문에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장소가 있습니다(히13:11-13). ‘영문’입니다. ‘영문’(11), ‘영문’(13) 그리고 ‘성문’ 역시 영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12). 영문은 ‘Outpost’입니다. 뜻 그대로 군인들의 전초기지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 성 밖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병영兵營의 문. 군문軍門이라는 의미로, 성경에서는 ‘군 주둔지’나, ‘성읍을 방어할 수비 부대’, ‘막사’(삼상10:5;13:3-4;대하17:2;행21:34) 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진영’camp의 경계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 ‘영문’을 ‘영문 밖’이라고 할 때는 예루살렘 성문 밖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대속죄일에 짐승을 제물로 잡고, 피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갖고 들어간 후, 나머지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 있는 흰놈의 골짜기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런데요 이 때 짐승의 육체를 갖다 버릴 때, 이용하는 문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요. 짐승의 육체를 갖다 버리는 문은 ‘분문’糞門,Ha'Ashpathot Gate입니다. 분문으로 번역했지만 쉽게 말씀을 드리면, ‘Dung Gate’, ‘똥문’입니다. 다른 문은 이용할 수 없고, 이 분문을 통해 온갖 쓰레기와 오물, 분뇨를 갖고 나왔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대속죄일에 드려진 피 외에 짐승의 육체는 분문을 통해, 흰놈골짜기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소각되었습니다. 짐승의 피 외에 다른 육체들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여러 제사 중 대속죄일에 행하는 속죄제에서입니다. 다른 제사에는 짐승의 제물을 제사장이 먹거나 나눕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행하는 속죄제에서는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죽인 짐승의 피만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다 소진해버립니다. 그 장소가 영문 밖입니다. 이 때 출입하는 문이 본문입니다. 가장 더러운 것을 성 밖으로 반출할 때 사용하는 문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가신 길도, 오늘 본문절에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13:1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문 밖으로 나가실 때 어떤 문으로 나가셨을까요?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황금문’Golden Gate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미문’Beautiful Gate으로도 불립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던 문입니다(행3:3-10). ‘사자문’Lion's gate도 있습니다. 이 문에서 성 안쪽으로 10m 거리에 베다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곳입니다(요5:1-18). 실로암 못 근처에 있는 ‘샘문’Fountain Gate도 있고요. 그 밖에도 제사에 쓰일 제물이 들어가는 ‘양문’Sheep Gate, 생선 매매를 위해 출입하던 ‘어문’Fish Gate, 왕실의 말들이 출입하는 ‘마문’Horse Gate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중 어떤 문도 아닌 ‘분문’을 통해 영문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분문은 어떤 곳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성안의 온갖 쓰레기들과 분뇨를 반출하는 곳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분문을 통해 골고다 형장으로 끌려 가셨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물 같은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하다못해 왕의 말들이 출입하는 마문, 미물인 물고기를 매매하는 어문보다도 못한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비천하게 취급한 것이지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이 분문을 통해 영문 밖으로 가셨기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이 됩니다. 구약 제사 마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속죄제물’을 영어로 ‘Sin Offering’이라고 합니다(레4:3-35,5:7-13).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 ‘Sin Offering’입니다. 어떻게 죄가 가장 거룩한 예물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웠습니다. 스스로 비하하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 덩어리인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시기 위함입니다(빌2:6-8).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신 ‘Sin Offering’이신 것입니다. 속죄제물은 예수님만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분문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영문 밖으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도다. 이 좋은 날, 굿 프라데이, 성 금요일, 예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지시고, 허리는 창으로 찔리신, 그 모진 고통을 받으시기 전, 이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이 모진 고통과 수치는 누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이신 날인 성금요일이 우리에게는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문 밖
우리에게 굿 프라이데이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당하신 모욕에 대한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1-12). 아멘!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좋은 금요일이 되게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고난 이전 본문으로 반출당한 오물 같이 여김을 받으신 예수님의 수치를 우리는 외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가 오기 까지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도 그 예수님이 가신 영문 밖의 길로 가라고 합니다. 가는데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치욕’을 짊어지고 가라고 말합니다.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간 우리는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의 손자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희생된 분들을 찾아가 사죄하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지금 저는 한 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분은 대통령을 지냈지만 실형을 선고 받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했습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원, 추징금 57억8천여만원을 선고받았기 때문입니다(2020.10.29.). 지금은 사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2022.12.28.). 그 앞서 3년 전에 그분이 새벽 자정을 지나 동부구치소에 구속되었을 때, 가족들과 일부 측근들이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장남은 발을 동동 구르며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고, 자부와 딸과 사위도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단순히 그 분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비극이고, 한국교회의 슬픔이었기 눈물을 흐렸습니다. 그 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분을 지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당선된 뒤 교우들과 그 분을 위해 주일 예배에도 기도회에도 많은 기도했습니다. 내가 지지하지 않았어도, 그 분이 대통령이 된 이상, 우리나라의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총회는 한국교회에서도 가운데도 가장 보수적인 교단입니다. 그분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그 분을 지지했습니다. 그 전인 서울시장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선후배 동료목사님들이 지지했을 때도, 저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이 자택을 뒤로 하고, 구치소로 향할 때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지도자의 복이 없을까하는 애통을 갖게 했습니다.
그분은 일생에 두 번 구속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59년 전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 여론을 무시한 채 대일굴욕외교로 불리는 한일수교를 협상 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도 비굴했습니다. 고작 3억 달러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平和線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36년 일제 강점기 치욕을 겪은 지 19년, 20년도 안되던 때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1964년 6월 3일에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때 고려대학교 상과대 학생회장으로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이었던 그분도 참여하게 됩니다. 데모 후 경찰에 체포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습니다. 그때 그분의 나이 24살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63 시위의 주역으로 시위를 하다 구속된 이명박 대통령은 54년 지난서 각종 부정비리의 주범으로 구속되었습니다.
63시위로 6개월간 복역하고 출소한 그분은 복학 후 대학을 졸업했으나,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업이 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어렵게 ○○건설에 입사해 5년째인던 30살 때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1977년엔 37세 나이로 ○○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습니다. 140대에 회장에 올라 1992년 퇴사한 뒤, 14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정계에 입문 후 부정선거로 위기를 겪었으나, 사면복권 되어 서울시장으로 거쳐,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2위 후보를 무려 521만 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이력 뒤에는 온 국민이 마음을 무겁게하는 일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 분의 족적 말로를 보면서 저는 눈물을 흘렸고요.
그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의 장로님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몇해 전 소천하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위패에는 대통령이라는 직분이 아니라 장로로 되어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하지 않습니까? 그 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로서 가장 책임이 큰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분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크리스천들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정말 정말 어렵게 성장하셨잖아요. 어릴 때부터 행상을 했고,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었는데 그의 명석함으로 알아본 담임선생임이 부모님을 간곡히 설득 야간 상고에 진학 졸업 후, 상경하여 한 중고책사장의 도움으로 얻은 책으로 대학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리고 재학 중에도 환경미화원으로 학비를 벌어야했고요. 얼마나 처절하게 살았는가! 가난이 어떤 것인지, 돈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며 자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회사에 입사해서, 하루에 잠을 세 네 시간 밖에 자지 않으면서, 남들이 10년 에 할 것을 자신은 1년에 하였기에 37살에 사장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인생 역경을 보고 감안을 하고 감안을 하고 생각해 보아도,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셨을까하는 것입니다. 비리 내용들이 사실에 1/10에 미치는 것이라 할지라도, 꼭 그러셔야만 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가 국내 굴지 기업의 대표, 한 나라의 지도자를 떠나서, 한 성도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로 보았을 때 하는 말입니다. 정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고 있는 가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그 분 만을 지칭해서는 안 되고요. 오늘 우리들의 인식과 믿음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길을 얼마만큼이나 생각하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분에 비난할 자격이 어쩌면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나도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려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장차 올 것
그러면 왜 성도임에도 영문 밖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성도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기에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 즉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왜! 성도임에도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지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습니다. 영문 밖이 아닌 영문 안에서, 이 세상에서 찾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쌓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인생이 찾으려고 하는 진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인생이 이루려고 하는 진정한 성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인생이 쌓으려고 하는 진정한 업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은 징역 20년, 벌금 180억, 추징금 35억원 판결 확정 받았습니다. 이 분 또한 전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연금 등 모든 혜택이 다 없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경호뿐입니다. 이분도 현재는 사면되어 낙향했습니다(2021.12.24.). 앞서 말씀 드린 그분과 이분은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박탈당했습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세 분 가운데 두 분이 전 대통령으로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그 한 분도 어떻게하든지 지금 끌어내릴려고 하지 않습니끼? 이것이 오늘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눈앞에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도, 그동안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려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업적을 쌓으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다 무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장차 올 것, 즉 영원한 가치와 성공과 업적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영원한 가치와 성공과 업적이 될 수 있습니까? 습니다. 그 일은 한 생명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성문 밖으로 가셔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의 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히13:12). 우리에게 거룩함을 이루신 날이 바로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 보좌와 영광이 그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빌2:9-10). 그런데 이러한 모든 지위를 예수님을 어떤 일에 사용하셨어요.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 ‘치욕’을 담당하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는 즉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문 밖으로 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으로 가지고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간다고 했을 때, 그 치욕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설교를 통해서 “세상의 찾은 가치와 세상에서 이룬 성공과 세상에서 쌓은 업적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즉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쓴 것”으로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영위하려고 하면 앞서 말씀드린 그분들과 같은 불행을 맞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에 우리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내가 아니고요, 내 치부가 아니고요, 내 유익이 아니고요. 내 자랑이 아니고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 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에 우리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는데요. 그 일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되어야 합니까? 일차적으로는 전도이죠. 전도만큼 한 영혼을 살리는 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 외에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은사로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재능을 기부한다는 말을 하는데요. 그것은 성경적 표현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는 영어로 ‘Gift’입니다.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마10:8)
저는 치아로 굉장히 많이 애를 먹었습니다. 한 16개 정도를 발치를 했습니다. 거의 10년 정도를 한쪽에 치아가 없이 다른 쪽으로만 사용하다보디, 그 쪽은 많이 마모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던 중 한 분을 사역회에서 만났는데요. 어떤 기회에 그분에게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자신의 치과로 한 시간 정도 일찍 와서 스케일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서울대치학박사이시거든요. 그래서 사정을 얘기 했지요. “여차 여차 이래이래서 이렇다”. 그랬더니 “그러니 더 오셔야죠.”하는 것입니다. 그때도 치아 한 개는 잇몸에 그냥 붙어 있는 상태고, 여섯 개가 발치된 상태였거든요. 치과에 가서 X-레이를 찍으니 가관도 아니죠. 그 후 4개 월 간을 거의 매주 한 번씩 강남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일체의 진료비며 의치까지 다 무료로 해주셨습니다. 이유는 제가 주의 종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은 목사님을 섬기는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예이고요.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가운데서, 조금만 생각을 하면 남들을 섬길 수 있는 일이 있어요. 너무 바쁘고 쫓기다보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기도하세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를 말이죠. 내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에 우리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방금 전 말씀 드린 그 의사 분에 대해 만약 저에 대해서 섬김으로 말을 끝난다면, 목사한테 잘했다 그 말 하려고 했나보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직업을 통해 섬길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병원 이름을 ‘헵시바’Hephzibah라고 명해서 믿음의 병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헵시바라고하는 뜻이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인데요. 그 말씀은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사62:4). 자신의 의술을 통해서, 합죽이 등으로 불리는 분들이나, 턱이 직각인 분들이나, 치아가 틀어진 분들을 양악 수술로 바로 잡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분들이 치료이전에 신체적으로 갖던 콤플렉스를 해결해 줌으로써,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을 갖고 병원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분들에게 무료로 치료와 의치까지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한 영혼을 살리고 섬기는 일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 분을 위해서 중보하고 있습니다. 구강과 양악 부분에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영혼을 살리는 직접 전도와 함께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하나의 삶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치욕을 지심으로 나가셨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와 세상에서 이룬 성공과 세상에서 쌓은 업적을 통해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쓴다면, 그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치욕을 개의치 않는 자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찾은 가치와 세상에서 이룬 성공과 세상에서 쌓은 업적을 자신을 위해 조금 학장해서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만 사용합니다.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장차 올 것, 영구한 도성,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여러분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실 수 있으세요. 나의 것을 다른 한 영혼을 살리고 섬기는 일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망설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의 ‘부끄러움’은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기에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표현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치욕을 개의치 말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으세요. 그러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않고 감당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저 영원한 나라, 오늘 본문의 영구한 도성에 함께하는 영광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자신의 그 높은 지위로 십자가게 죽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영문 밖으로 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찾은 가치가 있고, 이 세상에서 이룬 성공이 있고, 이 세상에서 쌓은 업적이 있다면, 바로 한 영혼을 살리고 섬기는 일부터 감당하여, 영구한 도성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결단하는 고난주간, 특별히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리
굿 프라이데이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참고/마21:1-11;막11:7-11;눅19:28-40;요 12:12-19). 닷새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죽음의 길을 알고도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날을 성금요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Holy Friday’또 ‘Precious Blood Friday’가 아니라, ‘Good Friday’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사53:5).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 (구원)을 받았도다’(사53:5). 이것만큼 인류에게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을 ‘굿 프라이데이’, ‘좋은 금요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히13:11). 구약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1년 1차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Most Holy Place에 들어갑니다(레16장,23장).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Atonement Cover에 짐승의 피를 쏟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년 반복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짐승의 피는 유효 기간이 1년입니다. 짐승의 피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년 마다 반복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마다 또 드리고 또 드리고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가 일 년간 유효는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일 뿐 사실 1년간 인간의 죄를 대속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약의 제사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셨습니다. 흠이 없는 피를 가진 이는 이 땅에서 태어나는 존재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있는 이 이어야 합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피 흘리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할 자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에서 씻김을 받습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히13:12).
이러한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7:27). 구약시대에는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그가’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를 (십자가에)드려 (대속을)이루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26,10:10).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구약의 제사와 비교해서 부각하고 있는 단어가 ‘단번’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같이 반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셨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성금요일은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문 밖
본문에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영문’입니다(히13:11-13). ‘영문’을 ‘영문 밖’이라고 할 때는 예루살렘 성문 밖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대속죄일에 짐승을 제물로 잡고, 피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갖고 들어간 후, 나머지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 있는 흰놈의 골짜기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 때 짐승의 육체를 갖다 버릴 때, 이용하는 문이 ‘분문’糞門,Ha'Ashpathot Gate입니다. 별칭으로 ‘Dung Gate’으로 불립니다. 이 문은 온갖 쓰레기와 오물, 분뇨 등 가장 더러운 것을 성 밖으로 반출할 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하셨는데요(히13:12). 십자가를 지시고 이 ‘분문’을 통해 영문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물 같은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이 분문을 통해 영문 밖으로 가셨기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이 됩니다. 구약 제사 마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속죄제물’을 영어로 ‘Sin Offering’이라고 합니다(레4:3-35,5:7-13). 어떻게 죄가 가장 거룩한 예물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지만, 죄 덩어리인 사람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예수님만이 ‘Sin Offering’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분문을 통해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영문 밖으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지시고, 허리는 창으로 찔리신, 그 모진 고통을 받으시기 전, 이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모진 고통과 수치는 누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이신 날인 성금요일이 우리에게는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문 밖.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좋은 금요일이 되게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고난 이전 본문으로 반출당한 오물 같이 여김을 받으신 예수님의 수치를 우리는 외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간 우리는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고 모든 예우를 박탈당한 분이 계십니다.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 6.3사태로 수감되어 6개월간 복역하고 출소한 그분은 복학 후 대학을 졸업했으나,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업이 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어렵게 ○○건설에 입사해 5년 30살 때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37세 나이로 ○○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 변신 서울시장으로 거쳐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입니다.
그 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의 장로님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국내 굴지 기업의 대표, 한 나라의 지도자를 떠나서, 한 성도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로 보았을 때 하는 말입니다. 정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고 있는 가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그 분 만을 지칭해서는 안 되고요. 오늘 우리들의 인식과 믿음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길을 얼마만큼이나 생각하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분에 비난할 자격이 어쩌면 없을지 모를 일입니다. 나도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려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장차 올 것. 그러면 왜 성도임에도 영문 밖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성도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기에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 즉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3:4). 그런데 영문 밖이 아닌 영문 안인 이 세상에서 쌓으려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인생이 찾으려고 하는 진정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전직 대통령도 중형을 선고받고, 현재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세 분 가운데 두 분이 전직 대통령으로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 분이 한 분도 없습니다.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모습니다. 지금 눈앞에 이런 일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장차 올 것을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다 무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장차 올 것, 즉 영원한 가치와 성공과 업적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일은 한 생명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으로 가셔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의 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히13:12). 우리에게 거룩함을 이루신 날이 바로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 일차적으로는 전도입니다. 두 번째로는 은사로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는 ‘Gift’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마10:8). 저는 치아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이를 알고 수 개월간 일체의 진료비며 의치까지 다 무료로 해주신 의사가 있습니다. 이유는 제가 주의 종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은 목사님을 섬기는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예이고요.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조금만 생각을 하면 남들을 섬길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방금 전 말씀 드린 그 의사 분은 자신을 직업을 통해 섬길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병원 이름이 ‘헵시바’Hephzibah인데요. 그 뜻이 기쁨, 즐거움입니다(사62:4). 자신의 의술을 통해서, 기형적으로 틀어진 치아나 턱을 수술로 바로 잡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분들이 치료이전에 콤플렉스를 해결해 줌으로써,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직업을 넘어 한 영혼을 섬기는 것이지요. 복음과 함께요.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영혼을 살리는 직접 전도와 함께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하나의 삶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치욕을 지심으로 나가셨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와 세상에서 이룬 성공과 세상에서 쌓은 업적을 통해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쓴다면, 그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고 쫓기다보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기도하세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를 말이죠. 내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에 우리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치욕을 개의치 않는 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길 망설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의 ‘부끄러움’은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히12:2). 그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표현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치욕을 개의치 말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으세요. 그러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않고 감당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저 영원한 나라, 오늘 본문의 영구한 도성에 함께하는 영광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자신의 그 높은 지위로 십자가게 죽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영문 밖으로 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찾은 가치가 있고, 이 세상에서 이룬 성공이 있고, 이 세상에서 쌓은 업적이 있다면, 바로 한 영혼을 살리고 섬기는 일부터 감당하여, 영구한 도성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결단하는 고난주간, 특별히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최종정리
오늘 설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 성금요일이 왜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저와 여러분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이것만큼 인류에게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이 ‘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을 ‘Good Friday’, ‘좋은 금요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위해 영문 밖으로 가셨습니다. 그 길을 가시 전 그 분이 통과했던 문은 분문이었습니다. 온갖 더러운 오물이 반출되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존재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수치를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셨기에 개의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지, 영문 안 즉 이 세상을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데,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 치욕에 대한 정의를 오늘 한 영혼을 살리고 섬기는 일을 위해 첫째는 직접적인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요, 둘째는 내 재능과 은사를 타인을 위해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찾은 가치가 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얻은 성공이 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내 치부, 내 유익, 내 자랑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 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에 우리도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의 비극을 보면서도, 그동안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려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업적을 쌓으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데,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비소한다고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우리는 그 길을 먼저 가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것은 그 앞에 있는 영광, 하나님 우편의 보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았기에 개의치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우리도 소망을 영구한 도성, 저 영원한 나라에 두면, 어떤 치욕을 짊어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영문 밖으로 가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종려주일부터 금요일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준비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 고난주간 가운데 특별히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는 클라이맥스Climax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루신 굿 프라이데를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데 개의치 않는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늘 영광이 약속 된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분문을 통해 영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기에 그 수치를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영문 안, 세상에서 이루려는 것을 버리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치욕에 대한 정의는 한 영혼을 살리고 섬기는 일을 위해 첫째 직접적인 복음 전도를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 둘째 내 은사로 타인을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내가 세상에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내 치부, 내 유익, 내 자랑으로 삼는 것이 아니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 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일에 우리도 쓰임을 받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데,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미련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비소한다고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 길을 먼저 가신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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