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강도 만난 사람들"(눅 10:25-37) 이재현목사(23.04.23)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4. 23. 16:09

강도만난 사람들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누가복음 10장 2537절 2023.04.23. 主日禮拜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10:25-37)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데에서, 출발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복음에 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관해서 경멸합니까? 바로 이 이유 때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배척한 나사렛 가운데로 지나가셨다고 했습니다(4:30).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이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지나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 세상은,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목사와 성도가 아니라, 혹 교회 안에서도, 목사를 목사로 또는 성도를 성도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 우리는 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회자가, 부유하건, 궁핍하건, 그 사람이 아니라, 목사님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즉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이 진리이면, 우리는 아멘 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이 판다하시고 결정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을 적용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목사님을 통해서 진리가 증거되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하지, 사람을 보아서는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님을 통해서도 사람을 보지 말고, 성도님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우리는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고 사람으로 본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는 형편으로 보아도, 배운 것으로 보아도, 하는 일을 보아도, 나 보다 잘난 성도가 하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고, 한 교회공동체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와 같이 목사를 목사로 보는 자에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가 온전케 될 것입니다. 성도를 성도로 보는 자에게 성도를 통해 전해지는 섬김이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교회에 주신 이 복을, 우리 모두가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사렛과 같이 배척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영접하라고 가리켜 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보좌에 기도를 쌓을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기 기뻐하시는 찬양을 올릴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하늘의 문을 여시고, 은혜와 응답과 권능과 인도와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같이 권능을 보고도, 배척하는 자가 되지 말고, 너희들의 메시아인, 나를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13:20).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에서, 우리는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14;3).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장차 천국에서, 예수님이 그를 영접할 것이요.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그도 영원히 있게 하리라는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 이 하나만 생각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아는 성도에게는, 예수님 영접, 그 하나만으로도,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여 권능을 행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시는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의 모든 권능이 행하시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사랑하기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성경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이 말씀의 골자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지배하는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이 말씀이 다른 곳에 또 한 번 나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무슨 뜻입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싶으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에는 요한복음 524절과 요한일서 314절을 한데 묶어 놓고 검토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동시에 그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로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오늘 본문은 아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줄 작정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고 이렇게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이제 공은 율법교사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지체할 필요도 없이 유대인들이면 누구나 머리속에 늘 담고, 다닌다는 쉐마’The Shema , ‘너희는 들으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외웠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이에 주님은 맞다. 잘 알고 있구나, 그 율법의 계명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젊은 율법교사는 머쓱해 하지 않고, 더 우쭐대기 위하여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선한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로 일컫는 유명한 비유를 오늘 본문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이 이야기 내용의 요지는 이러합니다. 어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가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가 이 사람의 옷을 다 벗기고 해를 입혀서, 피가 흐르는 채로 길거리에 내팽개치고는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갑니다. 그들은 강도당한 사람을 피하여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가여운 생각도 들었겠지만, 혼자서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 상태를 보아하니, 어설프게 관여했다가 뒷감당도 못 할 수 있겠나 하는 판단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는 피 흘리며 죽어 가는데, 그냥 못 본 척하고 가버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라는 불쌍히 여겨’, 연민의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응급 치료를 위해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상처에 바르고 싸매어 준 뒤,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이 사람을 맡기면서, 남자 이틀 치 품값인 두 데나리온 적지 않은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도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다 갚을 테니, 잘 돌봐달라고 부탁까지 한 뒤에야 가던 여행 길을 마저 갔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떤 종파, 어느 부족인지 도무지 상관하지 않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예수님은 이야기의 종결을 율법사에게 묻는 질문으로 마칩니다. “피 흘리는 사람 앞에 세 사람이 지나갔는데 누가 이웃이겠는가?”. 율법사는 서슴지 않고 대답합니다. “그거야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에게 당한 사람의 이웃이지요.”, “그러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선한 사마라아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대한 비유를 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200자 원고지 넉 장도 채 안 되는 짧은 이야기에 인간들이 지닌 문제의 핵심을 갈파하였으며,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인간이 질문하는 구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구원받은 사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대한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 사람인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보다 감동적으로 이해하려면, !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의 여러 민족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인물로 캐스팅'Casting하셨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고대 팔레스타인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 앗수르Asshur의 침략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앗수르 제국의 혼혈정책으로 말미암아, 침략자인 앗수르 사람들이 식민지인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들과 통혼通婚을 했습니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던 하나님을 강제로 믿지 못하게 하고, 앗수르의 우상을 믿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순수 유대민족의 혈통이나, 종교에서 그 순수성이 크게 훼손을 당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혈통적, 종교적으로 희생된 것이지요.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 민족의 주류들은 한마디로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남쪽 유다도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포로생활을 한 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헌금을 더럽다고, 여겨 받지 않을 정도로 천대시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도취되어, 우월감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옥의 불의 땔감으로나 쓰지,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어떤 유대 랍비의 기록에 보면 이런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부활시킬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만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증오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들을 그렇게 천시하는 강도만난 유대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유대 사람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도, 감당하기 벅찰 것 갖자, 그냥 지나쳐 버렸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는 사람을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어떤 큰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에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들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이 말씀 당시 즉, 2000년 전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그렇다면 오늘 귀한 시간에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마치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 길가에 쓰려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나라는 치안이 잘되어서, 강도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요! 저는 이제껏 태어나서 강도를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강도는 칼을 들고, 생명을 위협하여, 금품을 갈취하고, 여자에게 못된 짓을 하는 문자 그대로의 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남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즉 그 고통을 주는 원인이 강도요, 그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피를 흘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시대에 강도만나, 피 흘리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적용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대에 와서 여성의 지위는 옛날에 비해 비교도 안될 만큼 높아졌습니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으면 세탁은 물론 건조까지 해줍니다. 이렇게 생활도 너무 편해져서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서구에서는 존중 순위 5위가 남자고, 4위가 애완동물 ‘Pet'이고, 3위가 노인이고, 2위가 어린아이고, 1위가 여자라고 합니다. 여자들이 옛날처럼 스트레스 받을 일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연구에 의하면, 도시 여성 두 명 중 한 명은 우울증 증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서불안이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 열 가지 가운데, 최고의 판매고를 자랑하는 약이 우울증 환자에게 신비의 약으로 통하는 프로작’Prozac입니다. 이 약을 복용하면 우울증 증상이 70-80% 정도 치료된다고 하니, 환자에게는 영약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프로작을 복용하는 사람이 미국에 5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미국 인구가 2억이 넘으니까, 40명당 한 명 꼴로 우울증, 정서 불안 때문에 이 약을 복용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 이러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에는 남녀를 무론하고, 정신적인 강도들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영적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까요? 한 부인이 목사님에게 고통의 문제를 안고, 찾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사연인즉 십오 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정말 호랑이같이 무서운 시어머니 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나 무서운지 오금을 필 수 없을 만큼 공포 속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살얼음을 걷듯이 숨죽이며, 생활을 하다 보니, 심신이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 졌습니다. 그 형편이 하도 민망했는지, 주변에서 교회를 한번 나가 보라고 권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집사님의 강요에 못 이겨, 아주 능력 있다는 어떤 권사님에게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수 중에 악령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귀에서 자꾸만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시어머니를 죽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환청幻聽 증세로 지금까지 수년 동안 시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어떤 때는 멀쩡했다가, 갑자기 악화되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멀쩡할 때는 하나님을 향해 저주한 놈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말 못할 고통을 겪어 왔다고 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하루도 편안히 잠든 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부인은 지금 누구한테 강도를 만난 것이에요, 호랑이 같은 시어미니에게 강도들 맞고, 정통교회가 아닌 어디 이상한데 가서, 잘못 안수 받고 피를 흘리게 된 것 아닙니까? 영적으로 강도를 당한 것이지요. 요즘 모 이단 집단 교주의 추종자들은 영적 강도를 당한 것입니다. 잘못된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발을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불치병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여기까지만, 예를 들면 남자 분들 가운데 그것은 지질이 못난 여자들이나,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심지가 굳고 강한 남자들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교회는 집에서 할일 없는 여○○들이나, 오늘 내일 하는 마음 적적한 늙으신네들이나, 다니는 것 아닙니까?” 하고 반문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명성과 존귀와 부가 있어도, 강도만난 체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오늘로 말하면 모든 군의 실질적인 지휘자인 합참의장과 같습니다(왕하5:1-14). 여러분 우리나라에서도 합창의장이면, 군대 지위에서 통수권자인 대통령 다음 아닙니까? 나아만은 자신의 유일한 상관인 아람 왕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크고 존귀한 자 큰 용사라고 칭함을 받았습니다(왕하5:1). 그런데 이러한 화려한 직위 뒤에 그에게는 가장 큰 고민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환자’癩患者였습니다. 군마를 타고, 처렁 처렁 위용 있는 갑옷을 입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호령하던 막강한 힘도,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 같으나, 실상은 얼마나 불쌍한 자입니까? 여러분 이런 나아만 같은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 한센’Hansen’s, ‘나병’癩病이라는 강도를 만나 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불치병에는 남자도 별수 없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강도당해 피 흘리고 있다.

 

우리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전세 사기를 당한 20~30대의 젊은이가 228314, 17일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명 깡똥 전세로 손해를 입고 전세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게 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건축왕 전세 사기로 불리며 무려 700여 명의 서민에게 500억 원대의 피해를 줬습니다. 전세금을 강도당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강도당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이상씩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물질로도, 지식으로도,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한 분도 있지만,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질병일 수도 있고, 이성 혹은 부부문제일수도 있으며, 자녀문제일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인간은 어딘가 강도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럴까요?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라,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조물이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는 절대자이지만, 피조물은 연약자입니다. 여러분 이 몸이요. 여러분 것 아니에요. 여러분 것이면, ! 아프면 병원에 가요? 자기 몸이면 자기가 고쳐야지요! 안 그렀습니까? 그리고 의사도 다 고칩니까? 고치는 것보다,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한 병원 안에서 입원실에 있다가, 바로 옆 동에 있는 영안실로 옮겨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없이 많잖아요!

 

이렇게 이런 저런 류 만 다른 뿐 사람들은 모두 강도 만난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연만물도 강도당해 피 흘리고 있다.

 

여러분 우리 사람들만 강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자연 환경도, 강도 만난다는 것을 아세요?

 

성경에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했는데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몸 아닙니까? 그러면 오늘 내 몸의 생명이 살아 있고, 유지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선, 태양이 끊어진다면, 나의 생명은 죽음에 이를 것이니, 태양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공기가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해도, 나는 불과 몇 분을 못 버티고 죽습니다. 특히 공기 속의 산소를 호흡해야 삽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는 또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또 흙 속에서 나오는 곡식과 과일들을 먹지 않아도 생명은 멈춥니다.

 

그렇다면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이웃은 인간관계에서의 생명체만은 아닐 것입니다. 태양도, 공기도, 물도, 우리의 이웃이 됩니다. 금번 강릉 산불 등으로 인명과 재산 큰 피해가 있었는데요. 지난 26일 발생한 튀르키예·시리아 모멘트 규모 7.8의 대지진으로 사망자 57,740, 부상자 129,803, 이재민 약 2,300만 명, 건물 264,000채 이상 파괴, 피해총액 840억 달러 이상에 달합니다. 아직도 많은 실종자들이 있어 사망자는 6만 명 이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10여 년 사이 지구의 온난화 현상, 이상기후, 해수면의 상승, 오존층 파괴의 증폭, 토양의 산성화, 물 부족, 사막화, 동식물 종의 멸종 등 지구 생명체의 거대한 신음과 죽음을 듣고 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인해 태양광선과 공기에서 지금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흐르는 피가 오존층 파괴로 인한 적외선이 그대로 인간에게 내리쬐어 인간에게 큰 해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피 흘리게 하고, 그 피의 대가를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오염된 미세먼지는 국제적으로 제일 높은 수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지금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곡식을 내는 대지도, 오염이 되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한 공중파 방송사에서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을 시리즈로 방영했습니다. 그 눈물이 무슨 눈물입니까? 자연세계가 강도 만나 피를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염과 공해로 인한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를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2천 년 전에 강도 만나 피 흘리는 지구의 눈물을 전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8:22).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자연만물, 즉 하늘의 해와 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땅에 피는 아름다운 화초, 나무 그리고 바다에 있는 고기 등 모든 자연만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만물이 왜 탄식을 합니까? 수없이 강도들 받고 받으니, 탄식할 수밖에요. 이렇게 이 세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두 강도 맞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자연은 구제의 대상이고 인간은 구원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가정에서 강도당한 가족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방이 온통 다 빼앗아 가려는 강도니, 믿을 것은 같은 뼈다귀 피붙이 밖에 없어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가정 안에 그렇게 소중하다던 가족들 간에 부부사이에, 부모자녀사이에, 형제사이에 서로 서로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앞서 도시 주부 두 명 가운데 한명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성들이 정서적인 혼란을 겪는 이유는 남편으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시댁 식구로부터 소외당하고 갈등하는데, 그 뿌리가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에게 상담하러 온 부인, 그 원인이 누구 때문이에요. 시어머니입니다.

 

모 탤런트이자 뮤지컬 배우이고, 극단단장의 남편이 단원들을 태우고, 속칭 칼치기를 했습니다. 차선을 좌우로 휘젓고, 다니는 곡예 운전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음주 상태였고, 결국 대형 참사가 발생 두 명의 단원이 죽고, 자신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단 한 번도 병원을 찾아 남편을 문병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는 어의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남자가 연하로 초혼이고, 여자는 자녀까지 있는 재혼임에도, 한때는 연예계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나 매스컴을 타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음주운전으로 두 단원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 된 남편 강도를 당한 것이고요. 남편은 중상을 입었음에도 찾지 않는 아내 강도를 당한 것입니다. 서로 피를 흘리며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누구에게 강도 맞고 있는 것입니까? 가족입니다. 원수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10:36).

강도만난 인류가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강도만나 피 흘리는 것을 치료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방금 전에 우리 인간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피조물인 자연만물 모두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강도만난 피조물들이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8:19). 피조물들인 자연만물이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피조물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고개를 쑥 빼서 오나 안 오나 하고, 앞을 열심히 내다보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월성신日月星辰, 천지만물天地萬物이 고개를 쑥 빼고, 우리 인간이 구원받고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광 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정말 안 믿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자연만물들이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린다고 합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강도만나 피 흘리는 것이 치유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연만물도 예수님을 고대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강도만나 피 흘리고 있으면서도, 위로자시며 치유자이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딘가 큰 모순 속에 살아가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앞서 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강도 만나고, 이상한데 빠져, 피 흘린 부인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이 부인의 상담을 받은 목사님이 너무도 불쌍하고 민망해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시간 반이나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준 다음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 어느 주일 예배에 이 부인을 목사님이 마주치게 되어, “잠은 잘 자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편안하게 잤다고 대답했습니다. 얼굴이 굉장히 밝아 보였습니다. 마당에 나오면서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물어 볼 게 있다기에 말해 보라고 했더니,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을 향해 저주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성경 구절을 읽어주면서 확신을 주었습니다(8:1-2).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 받고 죄 씻음 받은 자는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고 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이 말을 들은 부인의 얼굴이 어떻겠어요! 한마디로 봄꽃 같이 핀 환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 만나자 강도만나, 피 흘리던 모든 것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사내대장부로 세상에 명성과 존귀를 다 갖고도, 나병이라는 강도만나 피 흘려야만 했던 나아만, 자기 아내의 몸종인 소녀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왕하5:3). 이 말은 들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이스라엘로가 선지자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명한 데로 하였더니, 문둥병으로 썩어가던 나아만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왕하5:14). 나아만은 병에서 치유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인도한 집의 여종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육체의 질병이 치유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도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아만은 그 즉시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아람 민족에 하나님을 알리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왕하5:17).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분 내면에 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어떤 고통의 강도만난 모든 것이 치유됩니다. 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8:21).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치유 받을 뿐만 아니라, 강도만나 피 흘리리다 썩고 죽는 운명을 겪지 않게 됩니다. 영원히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저 아름다운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얼마나 놀랍고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까? 이 세상의 자연만물인 피조물도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탄식하고 있다고 했는데, 자연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것을 못 찾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동안의 모든 결박에서 풀어지고, 연약함에서 강건해지고, 아픔에서 치유되고, 사망에서 영생을 얻고, 심판의 자리에서 천국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만 이 사실을 알면 너무나 아깝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분들이 우리 보다 모든 면이 ‘Better’, 나은지 몰라요.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은 어 교회가 겨우 이거야 그리고 전도를 했어?’할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명망가이고,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고, 권력가지고, 안정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이 산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강도 만난 사람으로 봐야합니다. 불쌍히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고통이 있어요. 완벽한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어딘가 남모르는 ‘Handicap’이 있고, ‘Pain’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남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허세도 부려보고, 과시도 해보고, 자신만만하게 나는 할 수 있어 하나님 없어도 내 능력으로 살 수 있어하는 안쓰러운 모습이, 마치 강도만나 피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으로 불신자들을 안아야 합니다. ! 그렇게 해야 하나고요.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한 영혼을 소중히 전도해야 합니다.

 

천하 보다 귀한 한 영혼, 귀하를 위해 기도합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8:36). 이 말씀들이 여러분 가슴 속에 절절히 흘러 넘쳐야 합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도 치사하시지, ! 강도 만나서 꼭 고통을 인간에게 갖도록 하는 가, 좀 아무 문제 없이 편하게 살게 해 두면 안 되는가?”하고 항변조로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University of Cambridge 교수로 무신론자였으나, 회심한 후,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사가로 평가받는. 변증가이자 시인, 작가, 비평가인 영문학자 루이스C. S. Lewis,1898-1963는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받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꼭 행복하길 원하시진 않는 같습니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우리가 철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고통의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치려고, 고통이라는 메가폰을 드신 겁니다. 우린 조각가가 인간 형상으로 깎아 내리는 돌덩어리입니다. 끌로 때리면 너무 아프지만, 그건 우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하면, 듣지 않은 완악한 인간을 향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믿도록 하기 위해, ‘고통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고통은 깨닫지 못하는 인간을 향해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거부하더라도요.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자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드릴 것이 있어요. “주기는 뭘 줘 교회를 보아하니, 내가 도와주어야 하겠는데할지 몰라요. 어쩌면 우리를 세상에서는 유대인이 보는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볼지도 모르지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한 것과 같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하였습니다(20:24).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인 것을 확신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생명도 아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주지 않았다면, 가장 좋은 것을 아직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할지라도, 가장 좋은 것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생명 그리고 나의 구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복음을 우리만이 알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아직도 강도 만나 피 흘리는 분들을 치료해 주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강도 만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 등으로 정신적으로 당한 강도, 악한 영에 따라 영적으로 당한 강도, 아람 군대장군 나아만 같이 심지가 굳고 강하다고 자부하는 큰 용사가 자신의 병에 속수무첵인 남자들도 당한 강도, 피조물의 탄식이라고 말한 자연만물이 당한 강도, 심지어는 가정에서 강도당한 분들, 예수님만이 이들을 치료해 주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청아비전교회는 강도만나, 신음하는 자들을 치유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에 함께하는 자들이 날마다 더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서론에 구원을 논할 때, 요한복음 524절과 요한일서 314절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옯겼습니다. 동시에 그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해야 할 사랑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오늘도 강도만나 피 흘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치료받고, 구원 받아, 함께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영혼들이 모이고 모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구원받은 자의 사랑하기

 

성경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로 표현합니다(5:24). 예수 믿으면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지배하는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다른 곳에 또 한 번 나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싶으면, 사랑해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여 많은 사람에게 망신을 주려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묻자, 주님은 즉답을 피하고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지체하지 않고 쉐마’The Shema를 자신 있게 외웠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맞다. 잘 알고 있구나, 그 율법의 계명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율법교사는 더 우쭐대기 위하여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물었고,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로 비유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어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가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가 이 사람의 옷을 다 벗기고 해를 입혀서, 피가 흐르는 채로 길거리에 내팽개치고는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갑니다. 그들은 강도당한 사람을 피하여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가여운 생각도 들었겠지만, 혼자서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 상태를 보아하니, 어설프게 관여했다가 뒷감당도 못 할 수 있겠나 하는 판단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냥 못 본 척하고 가버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라는 불쌍히 여겨’, 연민의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상처에 바르고 싸매어 준 뒤,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이 사람을 맡기면서, 남자 이틀 치 품값인 두 데나리온 적지 않은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도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다 갚을 테니, 잘 돌봐달라고 부탁까지 한 뒤 여행 길을 나섰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떤 종파, 어느 부족인지 도무지 상관하지 않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의 종결을 율법교사에게 피 흘리는 사람 앞에 세 사람이 지나갔는데 누가 이웃이겠는가?”는 질문으로 마칩니다. 그는 그거야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가 이웃이지요.”, 서슴없이 답하였고, 주님은 그러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대한 비유를 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기 위함입니다. 오는 세대의 모든 인간이 질문하는 구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구원받은 사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대한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 사람인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스토리를 보다 감동적으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여러 민족 가운데 왜 사마리아 사람을 캐스팅'Casting하셨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BC 722년 앗수르Asshur의 침략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혼혈정책 앗수르인과 통혼通婚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의 우상을 믿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는 혈통적, 종교적으로 크게 훼손을 당했습니다. 유대 주류에서는 이들을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훗날 남유대도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포로생활을 한 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헌금을 더럽다고, 여겨 받지 않을 정도로 천대시하였고 지옥의 불의 땔감으로나 쓰지,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도 지나쳤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들을 그렇게 천시하는 강도만난 유대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는 사람을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어떤 큰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에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들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이 말씀 당시 즉, 2000년 전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강도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남이 모르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을 당합니다. 즉 그 고통을 주는 원인이 강도요, 그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피를 흘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현대에 와서 여성의 지위는 옛날에 비해 비교도 안될 만큼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신경정신과 전문의 연구에 의하면, 도시 여성 두 명 중 한 명은 우울증 증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우울증 환자에게 신비의 약으로 통하는 프로작’Prozac을 복용하는 사람이 5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40명당 한 명 꼴로 우울증, 정서 불안 때문에 이 약을 복용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정신적인 강도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한 부인 호랑이같은 시어머니 밑에서 숨도 못쉬며 살다가 어느 집사님의 권유로 아주 능력 있다는 어떤 권사님에게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들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시어머니를 죽이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저주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말 못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부인은 시어미니에게 강도들 맞고, 영적으로 강도를 당한 것입니다.

 

불치병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그러면 심지가 굳고 강한 남자들은 예외인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명성과 존귀와 부가 있어도, 강도만난 체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지금의 합참의장과 같습니다(왕하5:1-14). 그런데 그는 나환자라이었습니다.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호령하던 막강한 힘도,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중병의 강도는 남자도 별수 없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강도당해 피 흘리고 있다. 우리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전세 사기를 당한 20~30대의 젊은이 세 명이가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전세 사기 강도당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다. 물질로도, 지식으로도,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질병일 수도 있고, 이성 혹은 부부문제일수도 있으며, 자녀문제일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인간은 어딘가 강도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럴까요? 인간은 피조물이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는 절대자이지만, 피조물은 연약자입니다. 여러분 이 몸이요. 여러분 것 아니에요. 여러분 것이면, ! 아프면 병원에 가요? 자기 몸이면 자기가 고쳐야지요! 안 그렀습니까? 그리고 의사도 다 고칩니까? 고치는 것보다,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류 만 다른 뿐 사람들은 모두 강도 만난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강도당한 가족들. 사방 모두 강도니 믿을 건 가정일까요? 그러나 그렇게 소중하다던 가족들 간에 부부사이에, 부모자녀사이에, 형제사이에 서로 서로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앞서 도시 주부 두 명 가운데 한명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성들이 정서적인 혼란을 겪는 이유는 남편으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갈등하는데, 그 뿌리가 있다고 합니다. 가족에게 강도를 맞은 것입니다(참고/10:36).

 

강도만난 인류가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을까?

 

앞서 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강도 만나고, 이상한데 빠져, 피 흘린 부인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이 부인의 상담을 받은 목사님이 너무도 불쌍하고 민망해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후 어느 주일 예배에 이 부인이 이제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며, 예수 믿으면 이전에 하나님을 저주한 것도 용서받을 수 있냐고 묻자, 목사님은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성경 구절을 읽어주면서 확신을 주었습니다(8:1-2). 그 부인은 예수님 만나자 강도만나, 피 흘리던 모든 것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사내대장부로 세상에 명성과 존귀를 다 갖고도, 나병이라는 강도만나 피 흘려야만 했던 나아만, 자기 아내의 몸종인 소녀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왕하5:3). 이 말은 들은 선지자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명한 데로 하였더니,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왕하5:14). 나아만은 병에서 치유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여종과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왕하5:17).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분 내면에 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어떤 고통의 강도만난 모든 것이 치유됩니다. 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동안의 모든 결박에서 풀어지고, 연약함에서 강건해지고, 아픔에서 치유되고, 사망에서 영생을 얻고, 심판의 자리에서 천국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만 이 사실을 알면 너무나 아깝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고통이 있어요. 완벽한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어딘가 남모르는 ‘Handicap’이 있고, ‘Pain’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남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허세도 부려보고, 과시도 해보고, 자신만만하게 나는 할 수 있어 하나님 없어도 내 능력으로 살 수 있어하는 안쓰러운 모습이, 마치 강도만나 피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으로 불신자들을 안아야 합니다. ! 그렇게 해야 하나고요.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한 영혼을 소중히 전도해야 합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하나님도 치사하시지, ! 꼭 고통을 인간에게 갖도록 하는 가, 좀 아무 문제 없이 편하게 살게 해 두면 안 되는가?”하고 항변조로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사가로 평가받는 루이스C. S. Lewis,1898-1963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고통의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치려고, 고통이라는 메가폰을 드신 겁니다. 우린 조각가가 인간 형상으로 깎아 내리는 돌덩어리입니다. 끌로 때리면 너무 아프지만, 그건 우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하면, 듣지 않은 완악한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믿도록 하기 위해, ‘고통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드릴 것이 있어요. “주기는 뭘 줘 교회를 보아하니, 내가 도와주어야 하겠는데할지 몰라요. 어쩌면 우리를 세상에서는 유대인이 보는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볼지도 모르지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한 것과 같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생명도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20:24).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주지 않았다면, 가장 좋은 것을 아직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할지라도, 가장 좋은 것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생명 그리고 나의 구원이 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만이 아직도 강도 만나 피 흘리는 분들을 치료해 주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 등으로 정신적으로 당한 강도, 악한 영에 따라 영적으로 당한 강도, 아람 군대장군 나아만 같이 심지가 굳고 강하다고 자부하는 큰 용사가 자신의 병에 속수무책인 남자들도 당한 강도, 심지어는 가정에서 강도당한 분들, 예수님만이 이들을 치료해 주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 서론에 구원을 논할 때, 요한복음 524절과 요한일서 314절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옯겼습니다. 동시에 그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해야 할 사랑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오늘도 강도만나 피 흘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로 치료받고, 구원받아, 함께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부터 강도를 물리쳐야 합니다. 사망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천국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확실한 신앙으로 갖가지 모양으로 찾아오는 강도를 물리치고 강건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지금 시대 우울증 등 정신적, 악한 영으로 영적, 나아만 같이 큰 용사인 남자도 속수무책인 중병, 심지어 가정에서 강도당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강도 만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으로 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강도당한 자들을 안은 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한 자라도 예수 믿으면 용서받습니다. 예수님만이 강도 당한 자들을 치료해 주십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구원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예수를 그들 심령에 증거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