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목수와 권능"(막 6:1-8) 이재현목사(23.04.16)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4. 17. 12:44

목수와 권능

하나님말씀 : 마가복음 6:16 2023.04.16. 主日禮拜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1-6)

 

 

사망이 왕 노릇이란 원래 왕이 아닌데 왕처럼 행세한다는 것입니다(5:14). ‘아담의 범죄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합니다(5:14). 아담이 범죄는 아담을 조상으로 둔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숙명입니다. 만약 죄인이 아니라면 죽지 않으면 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인 것입니다(6:23). 그러나 인간의 왕은 어린 양’ ‘예수님만왕의 왕이십니다(17:14.참고/1:29).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는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고 하셨습니다(11:25-26/참고/2:10).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패퇴시키셨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이 말은 사망아 네가 성도들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고전15:55). 이제 사망이 왕 노릇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사망이 공격할 대상은 죄인데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가 용서받았기에 죽음이 우리를 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15:56).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고전15:57).

 

그럼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헛되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17).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압니다.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 갈림길은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뉩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20:27). 부활을 믿지 못하면 종국이 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입니다(고전15:17).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서 믿음 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8). 우리는 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生,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참고/6:40;6:23).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부활체로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고전15:54). 부활을 믿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예수 믿고 있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면,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15:19.참고/요일2:16). 구원받은 인생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33:9).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구약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25:8).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자력 구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타력 구원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늘에 오를 수 없기에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입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는 굉장히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① 신앙을 논할 때 도덕이 앞서서면 안 되고, 성도를 논할 때 인격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② 신앙을 지칭할 때 진리가 우선되어야 하고, 성도를 지칭할 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이 도덕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인격을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④ 도덕이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인격이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⑤ 신앙의 진리에는 도덕이 따르고, 성도의 믿음에는 인격이 따르는 것이지, 도덕과 인격이 진리와 믿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하나만 열어 놓으셨습니다(참고/4:12). 참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세 가지,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알아야 합니다(고전15:58). 우리가 현실의 높은 장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붙들고, 범람하는 패악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 헌신을 쌓으며, 수많은 유혹 가운데도 오직 예수 신앙정절을 드리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12:12)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21). 부활하신 예수님같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영화로움을 입고, 살아갈 저 영원한 나라에 약속된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며,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아는 부활 신앙인 줄 믿습니다.

 

 

과거의 목수와 현재의 권능

 

A목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 B목사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학장이시기도 했던 A목사님은, B목사님의 스승이시니까? B목사님이 신학교 이전의 삶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B목사님은 열심히 목회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목회 기반을 잘 잡았습니다. 그런데 A목사님은 B목사님에 관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예전에 ○○운수 버스 기사가 그렇게 되었으면, 성공한 거지!” 이 표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듣는 여러분들 각자가 생각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A목사님에게는 B목사님이 목사로 보이기보다, 예전 버스 기사 출신이 신학생 때였던 것만을 생각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B목사님이 훌륭한 목회자가 된 것은, 자신이 스승으로 잘 지도해 준 것도, 한몫했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지도했거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사람 다 아는데라면서, 그에게 점수를 후히 주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도 당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삼 십세 쯤에 가르치심을 시작하셨습니다(3:23). 그 이전 30년 동안은 목수’木手,Carpenter일을 하셨습니다(6:3). 예수님이 목수를 직업으로 갖게 된데에는,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나사렛 동네의 목수였기 때문입니다(13:55). 목수는 나무로 된 농기구를 만들거나, 집을 건축하는 재능을 가진 기술자입니다. 그렇기에 높은 신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2004 중 한 ’Scene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초를 겪으시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살던 때를 회상합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식탁을 만드셨는데요. 마리아가 와서 식탁의 높이가 허리에까지 닿는 것을 보고는, 여기서 식사를 하다가, 주저앉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니까? 예수님이 한쪽에 있던 의자를 내밀며,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새로운 식탁 세트를 선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기록이 아닌 영화를 연출한 멜 깁슨Mel Gibson의 각본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통해서도,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이, 한 목수로서 평범하게 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죽자,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젖동생으로 불리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누이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유년시절부터 장년이 될 때까지를,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모두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삼 십세 쯤이 되던 어느 날,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게 되는데요. 아마도 성경을 통해 보건데,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셨을 때, 동네 사람들이 큰 주목을 받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별로 특출 난 것이 없어 보였고, 설교 중간쯤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것으로 보아서도 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그동안 예수님은 이제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드높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동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다른 동네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종교집합소인,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6: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도敎導에 놀라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찜이냐’.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권능을 보았습니다. 마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이로움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한 인간에게서가 아닌, 하늘의 신적권위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이런 권능을 보고도,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아직도 목수로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6:3)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권능을 보고서도, 여전히 회의적懷疑的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목수였지 않은가?”, “그의 모친과 동생들은 지금도 우리와 한 동네에 살고 있지 않은가?” 라면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것입니다. 설교 서론에 A목사님의 눈에 B목사님은 목사로 보이기보다, 예전 ○○운수 버스기사로 보이는 것과 같이요.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 영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나는 메시아이다

 

오늘 본문과 병행본문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4:17-19).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611절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 611절을 봉독하셨다고 하니까,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을 펴신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경은 양등 짐승의 가죽에 성경 원본을 필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 기록을 한 후, 둘 둘 둘 맙니다. 두루마리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정통하지 않고는 한 번에 특정 구절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원래 장과 절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것은 후대에 성경을 효율적으로 읽기 위해 구분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경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두루마리로 되어 있고요, 장절 구분도 없고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이사야 611절을 택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4:20-22).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내가 구원자이다.”, “내가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다.”, “내가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요. 예수님의 유년과 성년시절을 보낸 나사렛 동네 사람들에게요. 그러나 그들은 이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감동을 받았습니다.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세상 기준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면서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방금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니, 이 청년이 너무 말을 잘 하고, 영감이 있어서, 대단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가난한 요셉의 아들이군, 이런 자가 이렇게 훌륭한 강론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세상 기준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판단한 후에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이 돈도, 명예도, 권력도, 학식도 없는, 시골 청년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더냐라면서, 빈정거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배척해 버린 것입니다.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4:23-24). 예수님은 당시 나사렛 동네의 속담을 빗대어, 그들의 심중을 꿰뚫고 계신 것입니다. 나사렛 속담에 네가 의사냐 그렇게 잘 고쳐 그러면 네 병도 고쳐봐라는 비아냥거림이 있는데요. 이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네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들었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 고쳤다며, 여기 고향에서도 그 일을 한번 해 보아라!”. 나사렛의 조롱을 예수님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와 관련된 두 사건을 말씀해 주십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4:25-27)

유대인들의 배척은 지금 만이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바알 우상이 장악한 때였습니다. 바알은 돈과 풍요와 성적 쾌락의 우상이었습니다. 바알 우상신을 섬기던 자들은 그 가치관이 돈과 풍요와 성적인 쾌락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숭배하느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심한 가뭄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적 약자인 과부들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의 과부들에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방도시 시돈 지방의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엘리사를 만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사람, 이방나라 아람 왕의 군대장관 이방인 나아만만이 엘리사를 만나고, 문둥병에서 치유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바알과 아스다롯을 심각하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있음을 깨우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 기준으로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에서 우상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영접하지 않고, 또한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 기준으로 판단하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들고 나사렛 사람들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좋을 리가 없지요. 그들의 반응을 볼까요.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4:28)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직언한 예수님에게 격노했습니다. 어느 정도 화가 났습니까?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라고 말씀합니다(4:29). 예수님을 배척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였다고요? 예수님의 유년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모든 성장을 지켜보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데에서, 출발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복음에 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관해서 거부합니까? 바로 이 이유 때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했다고 중단된 분들 가운데는 나도 다녀보아서 알라하면서, 오히려 더 완악해지고, 교회를 경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목사를 목사로 보지 못하는 시대

 

설교 서론에 A목사님의 눈에 B목사님은 목사로 보이기보다, 예전 ○○운수 버스기사로 보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그냥 그 A목사님의 인격인가 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목사를 목사로 보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 자택이 ○○엑슬루타워입니다. 저는 평수를 잘 모르는데요. 아마 60평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승용차가 벤츠인데요. 벤츠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벤츠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분이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의 차이가 있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그렇게 살고 탈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보여 집니다. 그 목사님은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분이 섬기는 교회 중에 그런 집에서 지내고, 차를 이용하는 성도님이 없어요. 목사님은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성도 가운데 가장 큰 집과 승용차를 갖고 있습니다. 그 분이 착용하는 시계가 천만 원인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 또한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지만은 않습니다. 그 교회가 위치한 동네가 아주 가난한 분들이 사는 빈촌이지만, 그럼에도 성도님들이 목사님을 위해 그렇게 섬겨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아니고, 안 좋은 판단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어렵게 사는데 목사가 벤츠타고, 타워형 아파트 60평대 살면서, 천만 원짜리 시계 차고 살면 돼!”라고 하면서요.

 

여러분 그런데 제 애기를 해서 송구한데요. 한 번 비교가 될 수 있으니까 해보게요. 교회를 개척할 때 집이 서울이었기에 인천까지 와야 하는데 승용차가 없었습니다. 이를 안 사모님 친구가 자신이 타던 2003년 형 아반떼를 보내왔습니다. 오래된 기종이어서 운전 중 소음이 심한 것을 볼 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성도님들이 와 보셔서 알겠지만, 빌라입니다. 화장실이 두 개인데요. 거실에 있는 화장실에 욕조가 있더군요. 우리가 살면서 욕조가 있는 화장실을 사용해본 것은 처음입니다. 아빠로서는 아이들에게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다른 분들은 작다고 하는데, 저희들은 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성도님들과 식사를 할 때나, 손님들이 오셔서 대접하게 될 때에는 외식을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또는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알뜰하게 사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 솔직히 물어 볼게요. 제가 그렇게 사는 것이 검소해 보이세요. 빈 하게 보이세요.

 

그러면 앞에 말한 목사님은 부유해서, 타워 형 아파트에 살고, 제일 좋은 승용차를 타고, 천만 원짜리 명품 시계를 찬 것을 사치라고 비판한다면, 그 비판하는 분은 저와 같이 궁핍한 목회자는 존경할까요? 그런 분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부유하면 부유하다고 비판하고, 목회자가 궁핍하면 지금까지 뭐했기에 그렇게 살까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부유하다 궁핍하다가 아니라, 목회자 부유하면 부유한 목사의 말을 들을 것 없다.”고 듣지 않고요. 목회자가 궁핍하면 궁핍한 목사의 말을 들을 것 없다라며 듣지 않고요. 이렇게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은 시대가, 오늘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을 과거 목수로 보고, 그 분에게서 전해지는 권능을 배척한 나사렛 동네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성도를 성도로 보지 못하는 시대

 

예배당 뒤 공간에, 조그마한 저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난방이 되지 않아서요. 여름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한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립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아침 830분 전후, 교회에 출근을 하면, 아침 기도회를 드리고요. 여러 준비할 것을 하고, 주방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2-3시경 카페를 갑니다. 커피 값이 싸요, 25000원 이니까요. 주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책을 보고 노트북 작업할 것을 하면서, 오후 6-7경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로 와서 저녁 전도를 합니다. 제가 들리는 그 카페의 사장이 두 자매이신데요. 믿는 분들이세요. 그런데 그 카페에는 한 번도 찬양이 틀려진 적이 없어요. 주변에 성도님이 경영하는 업소에는 찬양을 틀어주거나, 일반 가요나 찬양을 반반 믹서해서 들려주지 않습니까? 알고 보니 그분들은 진보 성향의 교회를 출석하신 분들이세요. 그 곳은 일반적으로 믿음을 보이고, 성별을 강조하는 우리 보수적인 믿음 가치 보다. 한 인간으로서 모습을 진지하게 보이는 인성 가치를 중시해요. 그러다보니 카페도 일반 대중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지요. 그것은 정죄할 일은 아닙니다. 그 분들의 신앙은 그런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근무하는 직장이 사업장에서, 혹은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보이고 계세요. 또 주변 분들이 여러분을 볼 때 아 저 분은 크리스천이야!”라고 인정을 받고 계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합니다. 금번에도 교회에 10여 년 넘게 다니면서 충성과 봉사를 하고, 성도들 신뢰를 얻은 뒤 돈을 불려 주겠다며, 접근하여 53명의 성도들에게 537억 손해를 끼친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도님들도 굳이 나서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거나, 그런 외적으로 표시가 날 때, 동료가 교회에 다니시는가 봐요?”라고 물으면, 그때 예 그렇습니다.”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이 굳이 나서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조심스러워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전도 등의 신앙 행위가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성도로서 해야 할 신앙적 행위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권능을 보이지 않았다면 동네 사람들이 겸손하게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나 목수 출신이 그렇치하고 얕잡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나사렛과 같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거부와 배척의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된다

 

주님은 자신을 배척한, 나사렛 동네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말씀합니다(6:5).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과거 목수로 보고 권능을 보고도, 배척한 나사렛은 구원을 상실하고, 주님으로부터 큰 권능,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든 불행은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6).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나사렛을 이상이 여기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임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같이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된데에는, 예수님을 누구로 보았기 때문이라고요. 목수입니다. 즉 사람으로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원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하였는데요.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목사와 성도가 아니라, 혹 교회 안에서도 목사를 목사로 또는 성도를 성도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인지, 우리는 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한 목사님의 부유함과 한 목사님의 궁핍함을 말씀 드렸는데요. 우리는 부유가 되었건 궁핍이 되었건 그 사람이 아니라, 목사님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기도 하세요. 목사님에게서 사람이 보이지 않고, 말씀이 보이게 해 달라고요. 이것을 정립하지 않으면, 그 성도는 어느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사람으로만 보이고,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자세를 알게 하지 않습니까?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배척한 것입니다. 즉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이 진리이면, 우리는 아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 것, 그 목사님의 인간적인 것은 하나님이 평가하시고, 결정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바른 정립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권능을 행하고도, 배척을 받으신 것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권능을 보지 않고, 목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지,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권능, 신적 권위를 보았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적용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목사님을 통해서, 진리가 증거되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하지, 사람을 보아서는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 걸림으로 진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같이 말입니다.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님을 통해서도, 사람을 보지 말고, 성도님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아닙니까? 그렇기 우리는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누구 누구 성도님, 누구 누구 집사님 하면서,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존중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고 사람으로 본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는 형편으로 보아도 차이가 있고, 배운 것으로 보아도 차이가 있고, 하는 일을 보아도 차이가 있고, 나 보다 잘난 성도가 하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니는 교회 가운데, 한 교회를 섬기는 것에 사랑으로 베푸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를 통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의 신앙에 적용해야 할 목사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은 시대에서도, 청아비전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힘을 얻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봅시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목사로 보는 자에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가 나를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4:12). 성도를 성도로 보는 자에게 성도를 통해 전해지는 섬김이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26). 교회에 주신 이 복을 우리 모두가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정리

 

과거의 목수와 현재의 권능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지도했거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평가절하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사람 다 아는데라면서, 그에게 점수를 후히 주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도 당하신 일입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 여 년 동안 목수’木手,Carpenter일을 하셨습니다(6:3.참고/13:55;3:23).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머니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젖동생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나사렛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위해 가정을 떠난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까요? 제자들을 대동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나사렛을 방문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다른 동네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종교집합소인,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6:2). 많은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찜이냐, 예수님의 교도에 권능을 보았습니다(6:2.참고/7:28-29).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이로움을 가졌습니다. 한 인간에게서가 아닌, 하늘의 신적권위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목수였지 않은가?”, “그의 모친과 동생들은 지금도 우리와 한 동네에 살고 있지 않은가?” 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6:3).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 영접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나는 메시아이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서를 인용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4:17-19.참고/61:1). 이어서 내가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다.”, “내가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다.”는 것을 선포했지만, 나사렛 동네 사람들에게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여기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보일 뿐이었습니다(4:20-22).

 

예수님은 그들의 심중을 꿰뚫고 당시 속담에 네가 의사냐 그렇게 잘 고쳐 그러면 네 병도 고쳐봐라는 비아냥거림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네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들었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 고쳤다며, 여기 고향에서도 그 일을 한번 해 보아라!”. 나사렛의 조롱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4:23-24).

 

유대인들의 배척은 지금만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도 있었다며 두 가지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4:25-27).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바알 우상이 장악한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숭배하느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때 36개월 동안 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인 과부들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이방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셨습니다. 또 엘리사에게는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 환자가 아니라 이방 아람 왕의 군대장관 이방인 나아만에게 보내어 치유함을 얻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바알과 아스다롯을 심각하게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있음을 깨우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 기준으로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4:28).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4:29).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데에서, 출발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복음에 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관해서 거부합니까? 바로 이 이유 때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했다고 중단된 분들 가운데는 나도 다녀보아서 알라하면서, 오히려 더 완악해지고, 교회를 경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목사를 목사로 보지 못하는 시대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 자택이 타워형 아파트입니다. 승용차는 벤츠 중에도 가장 큰 사이즈입니다. 저는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의 차이가 있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그렇게 살고 탈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보여 집니다. 그 교회가 위치한 동네가 빈촌이지만, 그럼에도 성도님들이 목사님을 위해 그렇게 섬겨 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같은 목사이지만 외적으로는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검소한 것이고 비판적으로 보면 빈한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말한 그 목사님의 부유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하는 분은 저와 같이 궁핍한 목회자는 존경할까요? 그런 분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부유하면 부유하다고 비판하고, 목회자가 궁핍하면 지금까지 뭐했기에 그렇게 살까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부유하다 궁핍하다가 아니라, 목회자 부유하면 부유한 목사의 말을 들을 것 없다.”고 듣지 않고요. 목회자가 궁핍하면 궁핍한 목사의 말을 들을 것 없다라며 듣지 않고요. 이렇게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은 시대가, 오늘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을 과거 목수로 보고, 그 분에게서 전해지는 권능을 배척한 나사렛 동네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성도를 성도로 보지 못하는 시대

 

예배당 뒤 공간에, 조그마한 저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난방이 되지 않아서요. 여름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한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립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가끔 들리던 카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찬양이 틀려진 적이 없어요. 그분은 진보 성향의 교회를 출석하신 분들이세요. 그곳은 일반적으로 믿음을 보이고, 성별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믿음 가치보다. 한 인간으로서 모습을 진지하게 보이는 인성 가치를 중시해요. 그러다보니 카페도 일반 대중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지요. 그것은 정죄할 일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은 그런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근무하는 직장이 사업장에서, 혹은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보이고 계세요. 또 주변 분들이 여러분을 볼 때 아 저 분은 크리스천이야!”라고 인정을 받고 계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성도님들도 굳이 나서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해야 할 신앙적 행위를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권능을 보이지 않았다면 동네 사람들이 겸손하게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나 목수 출신이 그렇치하고 얕잡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와 같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거부와 배척의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된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고 말씀합니다(6:5). 예수님을 과거 목수로 보고 권능을 보고도, 배척한 나사렛은 구원을 상실하고, 주님으로부터 큰 권능,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든 불행은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나사렛을 이상이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6:6). 이 말은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임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6:6). 우리들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같이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된데에는, 예수님을 누구로 보았기 때문이라고요. 목수입니다. 즉 사람으로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원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못하는 시대라고 하였는데요.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목사와 성도가 아니라, 혹 교회 안에서도 목사를 목사로 또는 성도를 성도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인지, 우리는 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부유하건 궁핍하건 사람이 아니라, 증거되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것을 정립하지 않으면, 그 성도는 어느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사람으로만 보이고,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자세를 알게 하지 않습니까?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배척한 것입니다. 즉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이 진리이면, 우리는 아멘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이 평가하시고, 결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님을 통해서도, 사람을 보지 말고, 성도님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으로 본다면 나 보다 잘난 성도가 하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주님을 섬기는 지체로 그 많은 교회 가운데, 한 교회를 섬기는 것에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를 통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의 신앙에 적용해야 할 목사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은 시대에서도, 청아비전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힘을 얻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봅시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목사로 보는 자에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가 나를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4:12). 성도를 성도로 보는 자에게 성도를 통해 전해지는 섬김이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26).

 

 

결론:최종정리

 

오늘 말씀에서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도敎導에서 지금 권능을 보고도, 예수님의 행적行蹟에서, 과거 목수를 보았던 데에서, 출발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수로 보고 배척했습니다. 권능을 보고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복음에 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신앙에 관해서 경멸합니까? 바로 이 이유 때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배척한 나사렛 가운데로 지나가셨다고 했습니다(4:30).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이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지나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 세상은,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고,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세상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목사와 성도가 아니라, 혹 교회 안에서도, 목사를 목사로 또는 성도를 성도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 우리는 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회자가, 부유하건, 궁핍하건, 그 사람이 아니라, 목사님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즉 목사님이 증거하는 말씀이 진리이면, 우리는 아멘 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이 판다하시고 결정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을 적용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목사님을 통해서 진리가 증거되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하지, 사람을 보아서는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님을 통해서도 사람을 보지 말고, 성도님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우리는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고 사람으로 본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는 형편으로 보아도, 배운 것으로 보아도, 하는 일을 보아도, 나 보다 잘난 성도가 하나도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고, 한 교회공동체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는 사람들에게, 권능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와 같이 목사를 목사로 보는 자에게, 목사를 통해 전해지는 진리가 온전케 될 것입니다. 성도를 성도로 보는 자에게 성도를 통해 전해지는 섬김이 강건하게 할 것입니다. 교회에 주신 이 복을, 우리 모두가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귀한 은혜를 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사렛과 같이 배척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영접하라고 가리켜 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보좌에 기도를 쌓을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기 기뻐하시는 찬양을 올릴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하늘의 문을 여시고, 은혜와 응답과 권능과 인도와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나사렛 동네 사람들과 같이 권능을 보고도, 배척하는 자가 되지 말고, 너희들의 메시아인, 나를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13:20).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보지 않는 시대에서, 우리는 목사를 목사로 성도를 성도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14;3).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장차 천국에서, 예수님이 그를 영접할 것이요.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그도 영원히 있게 하리라는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 이 하나만 생각해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아는 성도에게는, 예수님 영접, 그 하나만으로도,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여 권능을 행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시는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의 모든 권능이 행하시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을 안 높일 수 가 없지요. 다같이 예수 이름 높이세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리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나사렛은 목수로 보았습니다. 주님이 지나치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이를 적용할 때 목사를 목사로 보지 않는 시대, 우리는 그 목회자가 부유하건 궁핍하건 그 사람이 아니라 증거되는 진리를 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성도를 성도를 보지 않는 시대, 우리는 성도를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고 한 교회 공동체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고 영접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쉼을 배척한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모든 것을 얻은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나의 권능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