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을 이기리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고린도전서 15:54-58 2023.04.09. 主日禮拜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4-58)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가운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성 금요일’이라고 합니다(참고/마21:1-11;막11:7-11;눅19:28-40;요12:12-19). 그런데 영어로 ‘Good Friday’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날이 ‘좋은 금요일’인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참고사53:5). 구약의 제사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1년 1차 ‘지성소’Most Holy Place에 들어가서,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Atonement Cover에 ‘짐승의 피’를 쏟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참고/레16장,23장). 이렇게 매년 반복하는 것은 짐승의 피로서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의 마침표를 찍고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를 (십자가에)드려 (대속을)이루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히7:27.참고/히9:12,26,10:10). ‘단번’에 이루셨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금요일은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분문’糞門,Ha'Ashpathot Gate,‘Dung Gate’을 통해 ‘영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히13:11-13). 분문은 제물에 드리는 피 외에 짐승의 육체와 성안의 쓰레기와 오물을 갖고 나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오물 같은 존재로 여겨졌지만, 역설적이게도 분문을 통해 영문 밖으로 가셨기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이 됩니다. 구약 제사 마침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참고/레4:3-35,5:7-1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지시고, 허리는 창으로 찔리시는 그 모진 고통을 받으시기 전, 이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수치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금요일이 굿 프라이데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좋은 금요일이 되게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고난 이전 분문으로 반출당한 오물 같이 여김을 받으신 예수님의 수치를 우리는 외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우리나라 지도자 가운데 실형을 선고 받고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한 나라의 지도자를 떠나서, 한 성도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로 보았을 때, 정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고 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 만을 지칭해서는 안 되고요. 우리들의 인식과 믿음에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길을 얼마만큼이나 생각하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여기에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 즉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3:4). 그런데 영문 밖이 아닌 영문 안인 이 세상에서 쌓으려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인생이 찾으려고 하는 진정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얻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다 무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장차 올 것, 즉 영원한 가치와 성공과 업적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일은 한 생명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으로 가셔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의 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히13:12). 우리에게 거룩함을 이루신 날이 바로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 일차적으로는 전도입니다. 두 번째로는 은사로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는 ‘Gift’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마10:8). 제가 아는 한 의사 분은 병원 이름이 ‘헵시바’Hephzibah인데요. 그 뜻이 기쁨, 즐거움입니다(사62:4). 자신의 의술을 통해서, 기형적으로 틀어진 치아나 턱을 수술로 바로 잡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분들이 치료이전에 콤플렉스를 해결해 줌으로써,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길 수 안에서 무료로 봉사도 하고 있씁니다. 단순히 직업을 넘어 한 영혼을 섬기는 것이지요. 복음과 함께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치욕을 지심으로 나가셨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와 세상에서 이룬 성공과 세상에서 쌓은 업적을 통해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쓴다면, 그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고 쫓기다보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기도하세요.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내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를 말이죠. 내가 세상에서 찾은 가치, 이룬 성공, 쌓은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여진다면, 그것이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길 망설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의 ‘부끄러움’은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히12:2). 그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표현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치욕을 개의치 말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할 줄 믿습니다.
미세먼지와 마스크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부활주일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부활의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신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오늘도 살아 계셔서 죽음을 이긴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께 영광 올려 드립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을 믿으세요. 믿는 것은 분명하지만, 체감으로까지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육체를 갖고 있기에 영생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활과 대칭되고 있는 죽음은 아세요. 죽음을 모르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죽음을 말해야하는 이유는 순서상 죽음 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망권세를 패배시킨 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부활의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할 때, 죽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찔러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당하는 것인데, 받아들이는 반응은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일 연장자 성도님이 구십 육세 이세요. 90이 넘은 분들이 죽음이란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하고, 어린이 학생 청년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죠. 그 세월의 간격이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하기도 하고, 아직은 멀게 저 멀리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늙으나 젊으나 죽음은 내 앞에 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종료되어가는데도 마스크를 아직까지 사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황사와 미세먼지도 심각한 수준이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마스크가 일상화되다 시피하였는데요. 마스크를 쓰는데요. 장년만 써요. 청소년들도 써요. 청소년들도 씁니다. 청소년들이 왜 써요. 미세먼지를 안 마시려고 씁니다. 미세먼지를 마시면 어떻게 되요.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미세먼지 노출은 호흡기 및 심혈관계 질환의 발생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사망률도 증가시킨다고 합니다. 작은 입자의 미세먼지가 자칫 인간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런데 이 미세먼지를 차단하는 마스크를 노년만이 아니라, 유년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인지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되도록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건강하게 살고 싶을 뿐이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스스로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다만 건강하기만 원할 뿐이라고 말해도, 그 자체가 죽음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왕 노릇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하여 ‘사망이 왕 노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5:14). 그런데 여러분! ‘사망의 왕 노릇’이라는 말이 원래 사망이 왕이라는 말이에요. 사망이 왕이 아닌데, 왕처럼 행사를 한다는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사망은 원래 인간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망이 인간의 왕처럼 군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롬5:14) 아멘!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이 말씀에 ‘아담의 범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담의 범죄’가 어떤 것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에덴의 모든 것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금기禁忌를 깨트렸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 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원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왕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간을 지배하였습니다.
또한 아담의 범죄는 아담 하나만 죽음을 맞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즉 선악과를 직접 따 먹지 아니한 자들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선악과를 먹기는 고사하고 본적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도 죽음이 찾아옵니까? 아담이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억울할 수 있으나 숙명입니다. 조선시대는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들이 양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관비이면 아들이 아무리 유능하고 공부를 잘해도 관비입니다. 천민의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나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천민이기에 자식이 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아담이 범죄는 아담을 조상으로 둔 모든 인간이 죄인이요. 그로인해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죽지 않으면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실상은 저와 여러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로 인해 어느 인간도 사망의 왕 노릇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로하신 분들도, 혈기왕성한 이들도, 미세먼지 노출을 차단하려고 마스크를 쓰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 자체가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덴동산에 마스크를 쓸 일이 있었겠어요. 완전무결했던 그곳은 미세먼지도 없었을뿐더러,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기 전에는 죄가 없었던 곳입니다. 죽음이 없었던 곳입니다. 그러니 미세먼지도 없었고, 죽음을 대비할 어떤 물품도 필요치 않은 곳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우실 천년왕국은 에덴의 회복입니다. 그 천년왕국에서는 미세먼지 노출 차단하는 마스크로 장사하다가는 한 개도 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
그렇다고 한다면, 사망의 왕 노릇으로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하나요? 아닙니다. 인간의 왕은 원래 사망이 아닙니다. 인간의 왕은 다른 분입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7:14). 우리의 왕은 어린양이십니다. 어린양이 누구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요1:29). 우리의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신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이 죄로 인해 당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사망을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군왕과 다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지배하지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죄가 용서됩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아멘! 이제 저와 여러분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가두어두지 못 했습니다 죽음은 죄인만 가는 곳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배속에 있던 요나가 삼일 후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로 토해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욘2:10). 사망권세를 패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용서 받습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입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우리가 죽음을 당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일 뿐입니다. 훗날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죽음을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사망의 왕 노릇 죽음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사망아 네가 성도들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사망이 왕 노릇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전에는 전갈이 독침으로 쏘듯이 죽음의 공포로 인간을 위협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러한 사망의 공격은 무력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사망이 공격할 대상은 죄인데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가 용서받았기에 죽음이 우리를 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사망이 왕 노릇 아니라,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누구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세요. 이 승리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의 왕 노릇을 컷트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아멘!
부활의 믿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경종
부활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헛되다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겼음에도, 아직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사망의 왕 노릇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니고요. 믿는 사람 가운데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부활에 의문을 가지는 성도들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헛되다’고 합니다. 믿음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고요. 헛되다고 합니다.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압니다.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 갈림길은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뉩니다. 부활을 믿어야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한 제자가 있습니다. 도마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재차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앞서 부활의 예수님을 보지 못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이것이 어찌 도마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믿는 자 가운데서, 아직도 부활 신앙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자들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헛된 믿음입니다. 우리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승리하는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종국이 망亡이다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겼음에도, 아직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사망의 왕 노릇하는 사람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성도들 가운데 그러한 이는 헛됨 믿음이요. 종국은 망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8). 앞 구절 후반과 연결하면 부활을 믿지 못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서 믿음 생활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은 반드시 부활한다는 역설이며, 지금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여,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망亡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生을 얻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어떤 생입니까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 나라’ 천국에 입성할 때,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고전15:54).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영원한 나라에서 이 육체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 종국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음으로 영생을 이미 얻은 줄 확신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겼음에도, 아직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사망의 왕 노릇하는 사람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요. 성도들 가운데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헛된 믿음이요. 종국에는 망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지만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당에 다니면서도,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불쌍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나, 그 가치와 정신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고 한다면, 즉 십자가와 부활 등과 같이 영적인 것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예수 믿고 있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면,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영적인 가치와 정신을 사모하기에 불쌍한 자가 아니라, 행복한 자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말씀합니다(신33: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오늘 예수 믿는 성도를 말씀합니다.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구원받은 것이 인생에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용서함 받고, 죽음을 당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행복자가 되어야지, 예배당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와 정신에 빼앗겨서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정신과 가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죄 사함과 죽음을 이긴 영원한 정신과 가치가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여러분 정말 행복하세요. 불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문제를 해결해줄 자
본문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구약 이사야를 인용한 것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 구원자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단 이사야의 예언 만이 아닙니다. 태초이후 인류는 죽음에서 구원해 줄자를 찾았습니다.
불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석가모니’釋迦牟尼,Śakyamuni에게 ‘코타미’라고 하는 과부가 죽은 외아들을 안고 와서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이에 석가모니가 ‘마을로 내려가서 삼사 대까지 죽은 자 없는 집에 가서 볍씨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삼사 대가 죽음을 보지 않고 다 살아 있는 집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죽음이란 그녀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찾아옴을 깨닫게 해주면서, 그녀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이치거늘 난들 어찌 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가 해탈解脫했다는 것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지, 죽음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종교 가운데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신이다”.는 신론을 ‘범신론’汎心論,Pantheism,만유신교(萬有神敎),다신교(多神敎)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신이라는 것입니다. 인도 계열의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범신론입니다. 범신론에 의하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신의 다양한 현현입니다. 사람에게도, 소, 개, 돼지에게도, 여기 화분의 나무에도 다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벗어나, 저 밖에 세상보다 큰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교는 자력 구원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신이 우리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결국은 고행 등으로 노력을 해서 자기를 구원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반면, 거꾸로 신의 초월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즉 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인간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이 있는데, 그것을 ‘이신론’理神論,Deism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중동 국가들에서 믿는 이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신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하늘 위에서만 있을 뿐, 이 타락한 세상에 올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신학에 의하면,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여러분도 귀에 익은 ‘알라’입니다. 그러나 알라는 하늘 저 꼭대기에 홀로 고고히 앉아 있을 뿐이지, 결코 이 내재의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초월의 신을 인정하지만, 이신론 속에서도 구원론은 자력 구원론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신자들은 숙명주의에 빠지든지,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며, 라마단 금식을 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냥을 주어서 적선을 많이 하고, 거룩한 전쟁에 가서 전사해야, 알라에게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는 이슬람 전사자들은 이를 믿고 행한 것입니다. 이슬람 구원론 역시 자력 구원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력 구원론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 같지만, 인간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당면한 문제조차도 해결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영생을 얻는 구원을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겠습니까?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만한 능력이나, 의지가 내 속에 전무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이것은 저뿐이 아니죠. 여러분 모두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력구원이 아니라 타력구원입니다. 자기 죄를 대신 감당해야 할 분이 있어야 합니다. 힌두교나 불교처럼 자신이 고행으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슬람처럼 신이 하늘 위에만 있기에 자신이 선행으로 그 신에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실 죄 없으신 분, 내가 하늘에 오를 수 없기에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위에만 고고히 앉아 계신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그 위로 올라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천 년 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입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는 굉장히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만을 구원자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타 종교를 말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외에 다른 종교 단체나 신도들을 비하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 종교에는 어떤 면에서 교회보다 더 도덕적인 집단, 성도보다 더 인격적인 신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만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그들의 도덕과 인격까지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교회가 이전에 노방전도를 하던 자리에 큰 천막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는 순간 지금은 ○○○○○○ ○○○○○○○○로 이름을 바꾼 ○○○○○○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그의 사후 ○○○하나님을 믿는 곳입니다. 그들의 처소에 대형 현수막이 걸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미국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상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수상할 만한 것이 있었나보지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신앙을 논할 때 도덕이 앞서서면 안 되고, 성도를 논할 때 인격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② 신앙을 지칭할 때 진리가 우선되어야 하고, 성도를 지칭할 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이 도덕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인격을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④ 도덕이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인격이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⑤ 신앙의 진리에는 도덕이 따르고, 성도의 믿음에는 인격이 따르는 것이지, 도덕과 인격이 진리와 믿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의 도덕, 어떤 신도의 인격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 종교가 어떤 진리를 따르고 있느냐, 그 신도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퍼스트’First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순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따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행4:12).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만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편협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참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예수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을 여러분이 마음에 영접하고,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사망의 승리 사망이 쏘는 공격을 무찌르신 분이 누구세요.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7).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에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3-4). 아멘!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예언과 신약 바울 사도가 증언한 본문이 완전히 성취된 곳이 천국입니다(사25:8;고전15:54). 그 나라가 저와 여러분이 것입니다. 그 나라에 입성할 때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을 입고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20).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보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처럼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보증입니다. 아멘!
정리
사망의 왕 노릇
부활의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할 때, 죽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찔러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이에 따라 죽음을 받이들이는 반응은 다릅니다. 세월의 간격이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하기도 하고, 아직은 멀게 저 멀리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늙으나 젊으나 죽음은 내 앞에 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종료되어가는데도 마스크를 아직까지 사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황사와 미세먼지도 심각한 수준이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마스크가 일상화되다 시피하였는데요. 마스크를 쓰는데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아이들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인지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다만 건강하기만 원할 뿐이라고 말해도, 그 자체가 죽음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하여 ‘사망이 왕 노릇’이란 원래 왕이 아닌데 왕처럼 행세한다는 것입니다(롬5:14). ‘아담의 범죄’로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합니다(롬5:14). 에덴의 모든 것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금기禁忌를 깨트렸습니다. 그 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간을 지배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기는 고사하고 본적도 없는데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담이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는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들이 양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관비이면 아들이 아무리 유능하고 공부를 잘해도 관비입니다. 그와 같이 아담이 범죄는 아담을 조상으로 둔 모든 인간이 죄인이요. 숙명입니다. 만약 죄인이 아니라면 죽지 않으면 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인 것입니다(롬6:23). 어느 인간도 사망의 왕 노릇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로하신 분들도, 혈기왕성한 이들도, 미세먼지 노출을 차단하려고 마스크를 쓰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 자체가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덴동산에 마스크를 쓸 일이 있었겠어요. 완전무결했던 그곳은 미세먼지도 없었을뿐더러,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기 전에는 죄가 없었던 곳입니다. 죽음이 없었던 곳입니다. 그러니 미세먼지도 없었고, 죽음을 대비할 어떤 물품도 필요치 않은 곳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우실 천년왕국은 에덴의 회복입니다. 그 천년왕국에서는 미세먼지 노출 차단하는 마스크로 장사하다가는 한 개도 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
인간의 왕은 사망이 아닙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계17:14). 우리의 왕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입니다(참고/요1:29).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신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사망을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죄가 용서됩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예수님은 죽임으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은 죄인만 가는 곳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배속에 있던 요나가 삼일 후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로 토해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욘2:10). 사망권세를 패퇴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용서 받습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입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죽음을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사망의 왕 노릇 죽음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사망아 네가 성도들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고전15:55). 이제 사망이 왕 노릇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사망이 공격할 대상은 죄인데 성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가 용서받았기에 죽음이 우리를 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15:56).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사망이 왕 노릇 아니라,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누구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세요. 이 승리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의 왕 노릇을 커트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부활의 믿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경종
부활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헛되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은 부활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적 표현으로 그렇다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17).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압니다.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 갈림길은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재차 나타나시어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요20:27). 믿는다고 하는 자 가운데 부활 신앙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자들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헛된 믿음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승리하는 믿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종국이 망亡이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 하십니다(고전15:17-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땅에서 믿음 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은 반드시 부활한다는 역설이며, 지금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부활을 부인하여, 멸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망亡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生을 얻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어떤 생입니까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 나라’ 천국에 입성할 때,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고전15:54).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영원한 나라에서 이 육체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 종국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음으로 영생을 이미 얻은 줄 확신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나, 그 가치와 정신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고 한다면, 즉 십자가와 부활 등과 같이 영적인 것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예수 믿고 있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면,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15:19.참고/요일2:16).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오늘 예수 믿는 성도를 말씀합니다.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구원받은 것이 인생에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신33:9).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행복자가 되어야지, 예배당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가치와 정신에 빼앗겨서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정신과 가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죄 사함과 죽음을 이긴 영원한 정신과 가치가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을 문제를 해결해줄 자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구약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사25:8). 이사야 선지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자를 찾습니다.
‘범신론’汎心論,Pantheism,만유신교(萬有神敎),다신교(多神敎)는 세상 모든 것이 신이라는 신론입니다. 인도 계열의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데요. 세상을 벗어나 저 밖에 큰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종교는 자력 구원론으로 고행 등으로 노력을 해서 자기를 구원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신론’理神論,Deism은 거꾸로 신의 초월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즉 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인간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입니다. 이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알라가 하늘 저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있기에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며, 라마단 금식을 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냥을 주어서 적선을 많이 하고, 거룩한 전쟁에 가서 전사해야, 알라에게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또한 자력 구원입니다. 자력 구원론 좋은 말 같지만 인간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당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구원을 스스로가 얻을 수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자가당착自家撞着입니다.
그러므로 타력구원이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대신 감당해야 할 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처럼 자신이 고행으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슬람처럼 신이 하늘 위에만 있기에 자신이 선행으로 그 신에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늘에 오를 수 없기에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입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는 굉장히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타 종교를 말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외에 다른 종교 단체나 신도들을 비하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 종교에는 어떤 면에서 교회보다 더 도덕적인 집단, 성도보다 더 인격적인 신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만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그들의 도덕과 인격까지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큰 상을 받은 이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신앙을 논할 때 도덕이 앞서서면 안 되고, 성도를 논할 때 인격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② 신앙을 지칭할 때 진리가 우선되어야 하고, 성도를 지칭할 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이 도덕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인격을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④ 도덕이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인격이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⑤ 신앙의 진리에는 도덕이 따르고, 성도의 믿음에는 인격이 따르는 것이지, 도덕과 인격이 진리와 믿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종교가 어떤 진리를 따르고 있느냐, 그 신도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퍼스트’First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순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따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4:12).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하나만 열어 놓으셨습니다. 참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영접하고,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승리 사망이 쏘’는 공격을 무찌르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5-57). 예수 믿고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계21:4).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예언과 신약 바울 사도가 증언한 본문이 완전히 성취된 곳이 천국입니다(사25:8;고전15:54). 그 나라에 입성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을 입고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20).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보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처럼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보증입니다. 아멘!
최종정리
사람은 탄생과 함께 죽음이 카운트다운Countdown되는 것입니다. 현재 늙으나 젊으나 똑같습니다. 단지 내가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있던, 그렇지 않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만아니라 아침에 유치원버스를 기다리는 어린이도 미세먼지 노출을 차단하기 위해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죽음을 할 수 만 있으면 파하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망의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 노릇이란 원래 왕이 아닌데 왕처럼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된 이유는 아담의 범죄 후 모든 사람에게 죄가 유전되고, 그 결과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다만 건강하기만 원할 뿐이라고 항변해도, 그 자체가 죽음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 왕이 아닌 원래 왕을 모셔야 합니다. 그 분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의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통치하십니다.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내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승리가 나의 것입니다. 사망의 공격은 무장해제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나를 쏠 수 없습니다. 사망은 죄인만 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겼음에도, 아직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사망의 왕 노릇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니고요. 믿는 사람 가운데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종국은 멸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헛된 믿음이 아니라, 부활을 믿음으로 반드시 영원한 나라에서, 이 육체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을 얻는 들이어야 합니다. 어떤 생입니까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 종국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음으로 영생을 이미 얻은 줄 확신합니다. 성도는 불쌍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십자가, 부활, 영생, 재림, 천국의 영원한 가치와 정신을 지향하는 행복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은 구원자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타 종교처럼 고행을 통해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선행을 통해 신께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자력구원은 안 돼요. 타력구원이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계신 구원자가 직접 인간에게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죄를 대속해 주셔야 합니다. 그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다른 구원자는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나를 위해 부활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입니다. 나의 모범자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다른 종교를 논할 때 조심할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만이 구원자라는 진리를 교회가, 이 믿음을 성도가 가졌다고, 타 종교단체와 신도를 비하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집단, 성도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신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신앙을 논할 때 도덕이 앞서서면 안 되고, 성도를 논할 때 인격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② 신앙을 지칭할 때 진리가 우선되어야 하고, 성도를 지칭할 때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이 도덕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인격을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④ 도덕이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인격이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⑤ 신앙의 진리에는 도덕이 따르고, 성도의 믿음에는 인격이 따르는 것이지, 도덕과 인격이 진리와 믿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의 도덕, 어떤 신도의 인격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 종교가 어떤 진리를 따르고 있느냐, 그 신도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퍼스트’First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한 분 뿐이라고 말입니다.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의 승리 사망이 쏘는 공격을 무찌르신 분이 누구세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활의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그렇다면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지금 어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아멘. 세 가지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청아비전교회공동체 가족 여러분! 우리가 현실의 높은 장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붙들고, 범람하는 패악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 헌신을 쌓으며, 수많은 유혹 가운데도 오직 예수 신앙정절을 드리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히12:12)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부활하신 예수님같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영화로움을 입고, 살아갈 저 영원한 나라에 약속된 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며,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아는 부활 신앙인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사람은 탄생과 죽음이 카운트다운입니다. 그렇기 아이들도 건강을 지키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원해 사망이 왕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대속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사망이 승리 사망이 쏠 수 가 없습니다. 이 확신할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부활을 믿음으로 반드시 영원한 나라에서, 이 육체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기는 믿음으로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부활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 영생을 얻는 확신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십자가, 부활, 영생, 재림, 천국의 영원한 가치와 정신을 지향하는 날마다 행복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며,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아는 부활의 신앙으로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날까지 정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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