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과 그의 제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창세기4:3~8 2023.04.30. 主日禮拜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3-8)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율법교사에게 그 유명한 선한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로 비유해 가르쳐주셨습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준 것은 동족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인간 취급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상대가 누구이건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당시 2000년 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강도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현대에 와서 여성의 지위는 옛날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신경정신과 전문의 연구에 의하면, 도시 여성 두 명 중 한 명은 우울증 증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우울증 환자에게 신비의 약으로 통하는 ‘프로작’Prozac을 복용하는 사람이 5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약 40명당 한 명 꼴로 우울증, 정서 불안 때문에 이 약을 복용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정신적인 강도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한 부인이 호랑이같은 시어머니 밑에서 숨도 못 쉬며 살다가 어느 집사님의 권유로 아주 능력 있다는 한 권사님에게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들어 “하나님을 저주하고 시어머니를 죽이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저주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말 못 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부인은 시어머니에게 강도들 맞고, 영적으로 강도를 당한 것입니다.
불치병으로 강도당한 사람들. 그러면 심지가 굳고 강한 남자들은 예외인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명성과 존귀와 부가 있어도, 강도 만난 체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지금의 합참의장과 같습니다(왕하5:1-14). 그런데 그는 나환자였습니다.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호령하던 막강한 힘도,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중병의 강도는 남자도 별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강도당한 사람들. 사방 모두 강도니 믿을 건 가정일까요? 그러나 그렇게 소중하다던 가족들 간에 부부, 부모자녀, 형제사이에 서로 서로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앞서 도시 주부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성들이 정서적인 혼란을 겪는 이유는 남편으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갈등하는데, 그 뿌리가 있다고 합니다. 가족에게 강도를 맞은 것입니다(참고/마10:36).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강도당해 피 흘리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이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는 절대자이지만, 피조물은 연약자입니다. 여러분 이 몸이요. 여러분 것 아니에요. 여러분 것이면, 왜! 아프면 병원에 가요? 자기 몸이면 자기가 고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의사도 다 고칩니까? 고치는 것보다,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류 만 다를 뿐 사람들은 모두 강도 만난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강도 만나고, 이상한데 빠져 영적으로 강도 만난 부인의 상담을 받은 목사님이 너무도 불쌍해서,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후 어느 주일 예배에 이 부인이 이제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며, 예수 믿으면 이전에 하나님을 저주한 것도 용서받을 수 있냐고 묻자, 목사님은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성경 구절을 읽어주면서 확신을 주었습니다(롬8:1-2). 그 부인은 예수님 만나자 강도 만나, 피 흘리던 모든 것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또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사내대장부로 세상에 명성과 존귀를 다 갖고도, 나병이라는 강도 만나 피 흘려야만 했던 나아만, 자기 아내의 몸종인 소녀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왕하5:3). 이 말은 들은 선지자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명대로 하였더니,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왕하5:14). 나아만은 병에서 치유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여종과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왕하5:17).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분 내면에 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어떤 고통의 강도 만난 모든 것이 치유됩니다. 답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드릴 것이 있어요. “주기는 뭘 줘 교회를 보아하니, 내가 도와주어야 하겠는데” 할지 몰라요. 어쩌면 우리를 세상에서는 유대인이 보는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볼지도 모르지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한 것과 같이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를 전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생명도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행20:24).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도하는 영혼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주지 않았다면, 가장 좋은 것을 아직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가장 좋은 것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예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오늘도 강도 만나 피 흘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로 치료받고, 구원받아, 함께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거부된 제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범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펼쳐진 땅을 땀 흘려 일구며 어렵고 어렵게 살아야 했습니다(창3:18). 이러한 힘든 노동의 수고 속에도 아내 하와를 통해 첫 아들 가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얻는 기쁨은 삶의 힘을 갖게 했습니다(창4:1-2). 열심히 일하여 자녀들을 뒷받침했고, 어느덧 두 아들은 각각의 생업을 갖게 될 만큼 장성하였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일을 아벨은 양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자신의 죄를 자녀들에게 말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을 볼 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가인은 농부로서 하나님께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목자로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창4:3-4). 그런데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채식보다 육식을 좋아하시기 때문인가요? 이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과 그 전후 그리고 관련 성경을 보면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타산打算
이 말씀을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대비되는 용어는 불신앙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불신앙으로 제물을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가인도 분명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드렸음을 볼 때, 불신앙이라는 표현보다는 타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칠 타打 셀 산算, 타산이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 헤아림”을 뜻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중에 가인이 타향으로 떠나게 되는 되요. 자신을 위해 성을 쌓을 만큼 부를 얻습니다(창4:16). 세상 적으로는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자녀들도 각기 분야에서, 사람들이 알아주는 업적을 세웁니다. 이러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삶을 보았을 때 가인은 굉장히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임을 알게 합니다. 세상적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타산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농사 지은 소산 중, 이런 모양의 곡물로 제물로 드리던, 저런 모양의 곡물로 제물을 드리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똑같으니, 자기에게 가장 손해가 되지 않는 곡식으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전가轉嫁
이렇게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타산적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고요. 타산으로 제물을 드려, 하나님이 안 받으셨으면, 안 받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4:5). 자기 이해타산으로 하나님께 드려도, 자신은 별로 손해 보지 않을 것으로 제물을 드렸으면, 안 받으셨으면 그만인데요. 가인은 심히 분개했습니다. 붉으락푸르락 열국 색이 변하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단은 서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 혹은 나란히 놓인 듯하고요.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신 증표가, 아마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불로 태워 그 향기를 올려드리는 ‘화제’offering by fire였음으로 볼 때,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는 하늘에서 직접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두 제단에 올려진 제물에서, 아벨의 것은 하늘에서 내린 불로 살라 하나님이 받으신 증거가 되었는데요. 가인의 것은 시간이 지나, 곡식이 시들해질 때까지, 그대로이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빨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제물을 다시 드려야 하지만, 가인은 몹시 분해했습니다.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물이 아닌 타산으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지금 드러난 모습에 분개합니다. 그리고 원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이를 책망하자 아담이 무엇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하와와 그 하와를 자신에게 준 하나님에게도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인의 누구의 아들이에요. 아담의 아들입니다. 그 또한 전가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타산으로 시작된 제물은 책임 전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타산은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에도 남을 탓하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몹시 분해하며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결국 동생의 목숨을 빼앗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아벨은 아무 죄도 없는데 말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향해 “너 때문이야!”이런 생각을 갖고 책임을 동생에게 전가한 것이지요.
무감無感
이렇게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타산적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고요. 그 타산은 전가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자의 제물을 하나님은 받으실 수가 없지요. 또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없을 ‘무’無, 느낄 ‘감’感 무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큰 범죄 사건이 주변에서 발생하는 것을 보는데요. 그 사건들은 사실 드러난 것이지, 보이지 않는 범죄는 더 많습니다.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마5:21-22).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를 발하고, ‘이 미련한 놈아’라고 인격을 비하하는 말을 하여도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고요(요일3:15). 그래서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큰 범죄 사건을 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큰 범죄 사건을 우리도 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화를 내고, 미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요 범죄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극도로 분노가 차오르는 순간 큰 범죄의 직전에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배우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자식의 얼굴이 떠오르면, 손에 들었던 흉기를 내려놓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렇지 않았죠. 아무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타산은 전가요, 그리고 무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자기 부모와 가까운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인이 돌로 아벨을 친후,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강변했습니다(창4:13). 이러한 가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안중에 있는 것으로 보이세요. 자신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생에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죄책이 들고 “하나님 제가 큰 죄를 범했습니다. 엄마 제가 너무나도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인은 전혀 그런 말이 없었지요.
나중에 그가 죄로 도피하게 될 때도,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해요.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 여러분 이 말씀에 가인은 끝까지 누구만을 생각해요. 자기 만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심지어 부모를 걱정하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무감입니다. 이런 자의 제물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으신 것이지요.
지금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가인은 제물을 타산적으로 하나님께 드렸고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고, 몹시 분개하고 얼굴색이 변한 데에서, 그리고 동생의 생명을 해하는 것에서, 전가를 두 번째로 말씀을 드렸고요. 자기 외에는 아무로 생각지 않는 무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타산과 전가와 무감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 형제가 드린 제물을 언급할 때, 성경은 가인와 아벨의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이라고 기록했다면 무엇이 주어가 되는 거에요. 아벨이 드린 제물입니다. 그러나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말은 아벨과 제물 둘이 주어가 됩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제물만이 아니요.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제물로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가인과 그의 제물이란? 단순히 가인이 드린 제물을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 것만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가인을 산제사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대강 제물을 드려도 되겠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드러난, 가인의 타산과 전가와 무감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열납된 예물
믿음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바로 내가 먼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 타산 아닌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소망이 되신 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이 찬양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는 말씀에 곡을 부친 것입니다(시19:14).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도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요. 우리 입술의 고백도 하나님만을 말하고, 우리 마음의 영역도 하나님만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말과 마음이 세상의 정욕과 염려에 있다면, 믿음의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의 ‘몸’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예배는 우리의 입술, 마음, 몸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제가 예배 전에 선포하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말씀 또한 믿음의 예배가 어떠한 것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 우리의 입술도, 마음도, 몸도, 영과 함께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임을 믿는 진리임을 분명히 믿는 것이 믿음의 예배인 것입니다.
책임
두 번째로는 전가가 아닌 책임을 소중히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교회는 내가 예배를 드리고 떠나는 곳이 아니라, 나는 교회의 한 예배자라는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4:23). 이 말씀에서 ‘예배하는 자들’이란 단수에요 복수에요 복수입니다. 즉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한 예배자로서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가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고,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속에 있다는 것에는 구성원으로 책임이라는 소중한 의식 또한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한 예배자로서, 저마다의 제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배자들로서 청아비전교회 제단이라는 공동체의 제단에 우리의 제물을 올려놓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청아비전교회라는 공동체 제단에 올려드린 모든 성도들의 제물이 다 하나님께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청아비전교회 제단의 제물 가운데, 나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아서, 다른 성도들의 제물도 열납되지 않는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 내가 드린 제물은 바른 것인데, 다른 성도의 제물이 바르지 않아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전체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나무래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책임입니다. 산제사를 드리는 내 제물이 드려져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제물도 열납 될 책임이 나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이끌어주고, 격려해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성도들이 올바른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어떤 일로 가족들이 다툼이 생길 때,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되는 일이 없어”라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 말을 들은 가족은 심히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교회에서 어떤 큰 일이 아닌 이상 “너 때문에 우리 교회는 되는 일이 없어”라고 말할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성도가 금번에 조금만 힘을 내주면, 우리 교회에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을 텐데” 이런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성도에 대한 기대이면서, 그 성도가 함께 참여하여, 큰 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해요. 그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 겠지요.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룰 수 있는 성도님이 되기 위해서요. 이것 또한 책임의 한 예입니다. 그 성도가 함께 하지 않아 속상해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성도가 함께 참여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중보도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성도가 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중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여해서, 올려 드린 제물이 교회 제단에 올려져, 하나님께 열납되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미스바 대성회입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삼상7:5). 이에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집결했습니다. 그리고 제단에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삼상7:9). 이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이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블레셋)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고 말씀하십니다(삼상7:10).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로 모여 블레세에게 패한 것은 자신들의 잘못임을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숫자적으로는 어린양 하나지만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제물에 함께 드린 것입니다. 책임을 모두가 함께 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관심
세 번째로는 무감이 아닌 관심을 소중히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관심은 귀한 것임에도 지금의 시대는 관심에도 너그럽지 못합니다. 개개인적인 삶을 존중하고, 점차 더욱 개인화되며, 상대방의 관심조차도,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참 조심스러운 것이 관심입니다. 어디까지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고, 어디까지 무감해야 하는가에 대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무감 그가 그러한 큰 죄를 범할 때도, 부모도 하나님도 안중에 없었고요, 범죄 후에도 하나님과 부모님에 대한 일말의 자책과 회개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무감은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관심은 영혼에 대한 관심을 중요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직접으로 관심을 갖는 것에 부담스러워하더라도, 그 영혼에 대한 관심까지 잊혀서는 안 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와 관심의 관계입니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시121:3-5).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이에요. 저와 여러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영혼에 대한 관심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란 교회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고 말씀합니다(잠27:23). 이 말씀은 교회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는 자들이기에 교회의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성도들의 영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지도자는 지도자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찌 목사만이 성도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3:6). ‘그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한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함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청아비전교회 공동체는 목사도 성도님도 모두 영혼에 대한 관심 갖기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예배자로 세워지도록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정리
거부된 제물
범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펼쳐진 땅을 땀 흘려 일구며 어렵고 어렵게 살아야 했습니다(창3:18). 이러한 힘든 노동의 수고 속에도 아내 하와를 통해 첫 아들 가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얻는 기쁨은 삶의 힘을 갖게 했습니다(창4:1-2).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을 볼 때, 아담은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가인은 농부로서 하나님께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목자로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창4:3-4). 그런데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11:4).
타산打算.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불신앙이라 할 수는 없고요. 타산적打算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나중에 가인이 타향으로 떠나게 되는 되요. 자신을 위해 성을 쌓을 만큼 부를 얻습니다(창4:16). 그의 자녀들도 각기 분야에서 업적을 세웁니다. 세상적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타산이 빠른 것을 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은 타산으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똑같으니, 자기에게 가장 손해가 되지 않는 곡식으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전가轉嫁. 가인은 심히 분개했습니다(창4:5). 당시 가인과 아벨의 제단은 서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놓인 듯하고요. 하나님께 제사가 ‘화제’offering by fire이었음을 볼 때, 제물을 받으신 증표가 아마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벨의 제물을 사르신 것과 달리 가인의 것은 시간이 지나 곡식이 시들해질 때까지 그대로이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회개하고 제물을 다시 준비해서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향해 “너 때문이야!”라며 책임을 전가했습니다(참고/3:12).
무감無感. 타산은 전가로 이어지고 무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범죄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극도의 분노에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면 흉기를 내려놓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인 아무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무감했습니다. 자신이 잘못으로 부모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인이 돌로 아벨을 친후,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강변했습니다(창4:13). 어떤 뉘우침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나중에 도피할 때도 자기 안위만 구합니다(창4:13-14). 무감입니다.
성경은 가인와 아벨의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이라고 기록했다면 무엇이 주어가 되는 거에요. 아벨이 드린 제물입니다. 그러나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말은 아벨과 제물 둘이 주어가 됩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제물만이 아니요. 제물을 드리는 사람도 제물로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는 제물만 아니라 사람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대강 제물을 드려도 되겠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드러난, 가인의 타산과 전가와 무감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열납된 예물
믿음. 내가 하나님께서 올리는 제물 타산 아닌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도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시19:14).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요. 우리 입술의 고백도 마음의 영역도 하나님만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과 진리’도 ‘몸’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4:24;롬12:1). 이렇게 믿음의 예배는 우리의 입술, 마음, 몸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책임. 전가가 아닌 책임을 소중히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교회의 한 예배자라는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들’이란 단수에요 복수에요 복수입니다(요4:23). 즉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한 예배자로서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 예배자로서 만이 예배자들로 청아비전교회 제단이라는 공동체의 제단에 우리의 제물을 올려놓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의 제물이 다 하나님께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단의 제물 가운데, 나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아서, 다른 성도들의 제물도 열납되지 않는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제물이라는 것은 내 제물이 드려져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제물도 열납 될 책임이 나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이끌어주고, 격려해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모든 성도의 올바른 제물로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에 “저 성도가 금번에 조금만 힘을 내주면, 우리 교회에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을 텐데” 이런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성도에 대한 기대이면서 함께 참여하여 큰 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룰 수 있는 성도님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 또한 책임의 한 예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미스바 대성회입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삼상7:5). 그리고 제단에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삼상7:9). 이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이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블레셋)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고 말씀하십니다(삼상7:10).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로 모여 블레세에게 패한 것은 자신들의 잘못임을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숫자적으로는 어린양 하나지만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제물에 함께 드린 것입니다. 책임을 모두가 함께 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관심. 무감이 아닌 관심을 소중히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데 현대인에게 어디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나요. 가인이 무감은 하나님도 부모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감은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영혼에 대한 관심을 중요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에 부담스러워하더라도, 그 영혼에 대한 관심까지 잊혀서는 안 됩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와 관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누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이에요(시121:3-5). 우리 모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영혼에 대한 관심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란 교회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13:17). 즉 지도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참고/잠27:23). 목사는 성도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는 자들이기에 교회의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찌 목사만이 성도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한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6). 우리가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함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사도 성도님도 모두 영혼에 대한 관심 갖기를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예배자로 세워지도록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최종정리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제물만이 아니요.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까지도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는 것은 아벨까지도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단순히 제물만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제물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인의 타산입니다. 그의 타산적인 제물 드림을 받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전가입니다. 잘못이 드러났을 때, 깨닫고 회개하여야 하는데, 그는 몹시 분개하였고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이 변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담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렇기에 동생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줄 모르고 잘못을 전가하는 자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 무감입니다. 가인은 자기 만을 생각했습니다. 돌을 들어 동생을 내리 칠 때, 하나님도 부모도 생각지 않았죠. 하나님이 아벨을 찾을 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까’라면 강변했지요. 나중에는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 크다고 모면해 달라고 하지요. 가인의 이러한 행위는 자기만을 생각하지,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와 관심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감한 자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예배는 우리의 입술, 마음, 몸, 영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전가가 아닌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제단에 올려진 나의 제물 만이 아니라, 청아비전교회 제단에 올려진 모든 이들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 다고 했습니다. 이 예배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우리에게는 청아비전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제단에 올려진 나의 제물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도록 책임을 다하고, 다른 성도님들 특히 연약한 성도님들이 온전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 이 중보가 책임의 한 모습입니다. 한 교회 소속된 성도로서, 이 책임을 갖고 함께 참예하는 것이 책임으로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감이 아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조차 부담으로 여기는 세대라고 하지만, 영혼에 대한 관심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대한 관심, 성도들의 영혼을 경성할 자로서 교회지도자의 영혼에 대한 관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영혼에 대한 관심,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즉 한 성도 영혼에 대한 관심을 주님은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감이 아니라 관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결론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창4: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분하고 안색이 변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않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기 전에 그의 심리 상태와 죄의 엄습을 경종했습니다. 그러나 가인 듣지 않았습니다.
타산, 전가, 무감한 자는 자신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도,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예배자로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타산이 아닌 믿음, 전가가 아닌 책임, 무감이 아닌 영혼에 관심을 갖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 복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한 가정의 형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제사 즉 예배로 인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마10:21). ‘장차’라는 말은 종말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는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의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가정에 이렇게 애통할 일의 원인은 다름 아닌 신앙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는 종교적인 문제와 갈등으로 가족 간에도, 이러한 슬픔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지나치게 들리세요. 그렇다면 본문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형제간에서 발생했고, 그 원인이 예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이러한 비극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신앙은 가장 가까운 데서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 가족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온 가족이 한 섬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한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한 비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비전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이 되지 못하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가 될 것입니다(마10:34). 왜 그렇게 됩니까?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51-53).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분쟁을 주시는 분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한 가정 안에 모든 가족이 예배자로 한 섬김과 믿음과 비전을 갖지 못하면 이러한 비극이 찾아온다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마10:22). 지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방해를 이겨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인내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어 온 가족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응하고 온 가족이 거룩한 헌신자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행16:31).
본문에서 예배에 실패하면, 그 인생 전체가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범죄 후 도피를 하게 되는데요. 이에 관해 성경은 ‘가인이 고향을 떠나’ 혹은 ‘가인이 부모를 떠나’로 말씀하고 있지 않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창4:16).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사는 인생을 가인과 가인의 후손은 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가인은 인류 역사 가운데 악인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실패가 그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다신 한 번 강조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자의 예배를 올려 드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한 교회 공동체와 성도님들 가정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옵소서. 내가 산 제물로 입술, 마음, 몸, 영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전가가 아니라 책임을 갖게 하옵소서. 예배자이면서 예배자들로 나의 제물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 제물이 하나님께 올려질 수 있도록 연약한 분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하고, 한 교회 소속 공동체로서 책임을 갖는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무감이 아닌 관심을 갖게 하옵소서. 한 영혼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주님의 요구에 무감이 아니라 관심을 갖게 하옵소서. 주님이 관심인 영혼에 관심을 갖는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온 가족이 한 섬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온 가족이 한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옵소서. 온 가족이 한 비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비전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배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역사와 복과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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