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에덴의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창 4:16-26) 이재현목사(23.05.07)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5. 8. 09:28

에덴의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창세기4:16~26 2023.05.07. 主日禮拜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16-26)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제물만이 아니요.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까지도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는 것은 아벨까지도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단순히 제물만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제물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인의 타산입니다. 그의 타산적인 제물 드림을 받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전가입니다. 잘못이 드러났을 때, 깨닫고 회개하여야 하는데, 그는 몹시 분개하였고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이 변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담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렇기에 동생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줄 모르고 잘못을 전가하는 자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 무감입니다. 가인은 자기 만을 생각했습니다. 돌을 들어 동생을 내리 칠 때, 하나님도 부모도 생각지 않았죠. 하나님이 아벨을 찾을 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까라면 강변했지요.

 

나중에는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 크다고 모면해 달라고 하지요. 가인의 이러한 행위는 자기만을 생각하지,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와 관심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감한 자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예배는 우리의 입술, 마음, , 영 모든 것이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참고/19:14). 이것이 타산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전가가 아닌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제단에 올려진 나의 제물 만이 아니라, 청아비전교회 제단에 올려진 모든 이들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4:23). 이 예배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우리에게는 청아비전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제단에 올려진 나의 제물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도록 책임을 다하고, 다른 성도님들 특히 연약한 성도님들이 온전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 이 중보가 책임의 한 모습입니다. 한 교회 소속된 성도로서, 이 책임을 갖고 함께 참예하는 것이 책임으로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감이 아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조차 부담으로 여기는 세대라고 하지만, 영혼에 대한 관심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대한 관심, 성도들의 영혼을 경성할 자로서 교회지도자의 영혼에 대한 관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영혼에 대한 관심,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즉 한 성도 영혼에 대한 관심을 주님은 요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21:4). 이것이 무감이 아니라 관심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분하고 안색이 변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않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4:7).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기 전에 그의 심리 상태와 죄의 엄습을 경종했습니다. 그러나 가인 듣지 않았습니다.

 

타산, 전가, 무감한 자는 자신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도,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예배자로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타산이 아닌 믿음, 전가가 아닌 책임, 무감이 아닌 영혼에 관심을 갖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 복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한 가정의 형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제사 즉 예배로 인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종말에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의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하십니다(10:21). 가정에 이렇게 애통할 일의 원인은 다름 아닌 신앙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는 종교적인 문제와 갈등과 대립으로 가족 간에도, 이러한 슬픔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지나치게 들리세요. 그렇다면 본문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형제간에서 발생했고, 그 원인이 예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이러한 비극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신앙은 가장 가까운 데서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 가족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온 가족이 한 섬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한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한 비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이 되지 못하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가 될 것입니다(10:34). 왜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분쟁을 주시는 분입니까?(12:51-53). 그럴 리 없습니다. 한 가정 안에 모든 가족이 예배자로 한 섬김과 믿음과 비전을 갖지 못하면 이러한 비극이 찾아온다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10:22). 지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방해를 이겨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인내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어 온 가족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응하고 온 가족이 거룩한 헌신자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16:31).

 

본문은 예배에 실패하면, 그 인생 전체가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범죄 후 도피를 하게 되는데요. 이에 관해 성경은 가인이 고향을 떠나혹은 가인이 부모를 떠나로 말씀하고 있지 않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4:16).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사는 인생을 가인과 가인의 후손은 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가인은 인류 역사 가운데 악인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실패가 그 인생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다신 한 번 강조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자의 예배를 올려 드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한 교회 공동체와 성도님들 가정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

 

어린이 어버이 주일예배에 오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지난주에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의 목숨을 빼앗는 범죄 후 타지로 도피하게 되는데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가인이 부모를 떠났다.’ 혹은 가인이 고향을 떠났다고 기록하지 않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4:16). 가인은 그동안 속박과 같이 여겨졌던 하나님을 떠나, 자기 하고 싶은 데로 마음껏 사는 인생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렇게 산 결과에 대하여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인

가인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4:17). 여호와를 떠나 자신의 포부를 펼친 가인은 큰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주한 가인은 열심히 일하여 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았다는 말은 도시를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교회가 위치한 청라국제도시와 같은 신도시를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인장을 찍듯이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 성이라 명명했습니다. 지금도 유명인사를 기념하기위해 건축물과 도시를 사람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유형의 도시명칭이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가인의 명성과 권위가 어느 정도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멕

이뿐 아닙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면면을 보아도,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4:19) 이 구절에서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라멕은 가인의 오대손입니다. 그 앞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무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고, 이렇게 라멕 이전까지는 누구는 누구를 낳고, 그 이름들만 열거 되어 있습니다.

 

가인 이후, 라멕 이전까지는 비천하게 살아서, 이름만 기록되어있을까요? 본문을 연구해 볼 때,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조상 가인과 같이 호의호식하며, 잘살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별 다른 언급이 없다가, 라멕에 와서, 그의 아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데 아내가 하나가 아니고, ‘아다씰라둘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일부다처제입니다. 이를 볼 때 가인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결혼까지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데로 하며 산 것입니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

라멕은 두 아내를 통해 세 아들을 얻게 됩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그들입니다.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4:20-22). 이 구절을 세 사람의 이름과 함께 재미있게 지어낸 설명이 있습니다.

 

야발은 가축을 치면서 얼마나 열심히 소와 양을 돌보았던지 밤낮없이 일해서 이름이 밤 야로 야발이고요.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던지,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도록 유발한다고 해서, 이름이 유발입니다. 막내인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가지고, 정교하게 머리깎는 가위까지 만들어서, 이름이 두발가인입니다. 이렇게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각 각 유목문화, 유흥문화, 철기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세상적인 성공

 

오늘 본문 당시대의 사람들은 거의 천년의 수를 누렸습니다.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았고, 므두셀라는 무려 구백육십구 세를 살았습니다(5:5,27). 그 기간 동안 자손을 생산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가인도 구백여년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고요. 그 동안 자신의 오대손인 라멕 그리고 육대손인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까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후손들이 번창하는 것을 보고요. 이렇게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단 그 성공이 여호와를 떠난 세상적인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의 성공은 오직 자신들의 영화를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이룬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라멕의 과시

라멕에 대하여 추가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3-24)

 

이 말씀은 라멕이 두 아내 아다와 씰라를 불러다 놓고,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자신의 과시입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무슨 뜻입니까?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것입니다. 나에게 조금이라고 해를 가하는 자에게 가차 없이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가인을 해친 자에게 벌이 일곱 배이면, 라멕을 해치는 자에게는 벌이 일흔일곱 배다.”는 것입니다. 즉 라멕은 자신이 가는 길에 어느 누구도, 걸림 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항상 계산적이었던 타산의 가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는 전가의 가인,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관심을 두지 않는 무감의 가인, 이 타산, 전가, 무감의 가인은 그의 후손에게 가서 타산, 전가, 무감이 어떻게 극대화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 야발, 유발, 두발가인도, 오직 자기 자신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라멕과 그의 아들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 나만을 생각하면 살아가고 있음을 이미 창세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참 씁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셋과 그의 후손

 

그리고요. 오늘 본문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마지막 두 절에 셋과 그의 후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5-26).

 

아담과 하와는 또 다른 아들을 생산하게 되는데요. ‘입니다. 이 셋에 대하여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남 가인이 차남 아벨을 해한 후, 슬픔에 잠긴 아담과 하와에게 셋을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에노스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광 돌리며, 예배드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죽었기에 단순히 그 생명을 하나 더 셋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제일 첫째로 하는 예배자로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 셋과 그의 후손을 세우신 것입니다.

 

화려함과 단순함

 

가인과 그의 후손과 셋과 그의 후손에 대하여 그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에서 거둔 성공들을 통해 장황하게 기록되고 있는데요. 셋과 그의 후손들은 아주 짧게 예배에 관해서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인생은 화려하게 보이는데, 셋과 그의 후손들의 인생은 소박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과 같이 화려한 세상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셋과 그의 후손처럼 소박한 신앙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너무 이분법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신앙에서도 성공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분이 여호와를 떠난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얻는 세상의 성공을 말한 것이라면,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의 성공인 세속의 문화와 셋과 그의 후손의 영광된 예배의 문화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인은 세상적인 성공을 얻더라도,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얻은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면서도 세상에서 얻은 성공을 자신 만을 위해 쓴다면 누구와 같아요, 그의 정신과 가치는 가인과 그의 후손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가치는 하나님과 성경에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

 

가인의 정신과 가치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증거하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정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 이름을 자신의 아들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이 성은 오늘로 말하면 도시입니다. 청라국제도시와 같은 신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을 미국의 워싱턴, 베트남의 호치민, 대한민국의 세종시처럼, 사람의 이름 아들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가인이 왜 이렇게 도시 건설에 공을 들였을까요?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 가인이 동생의 목숨을 해한 후, 하나님은 그에게 징벌을 하셨는데요. 그 중 하나가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였습니다. “가인 너는 평생 동안 도망자처럼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거한 놋 땅의 놋이라는 뜻도 유랑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에 가인은 반기를 든 것입니다. “내가 평생 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유리하는 자가 된다고 그래 내가 한 곳에 붙박이로 사나 안사나 봐라하면서, 보란 듯이 도시를 세우고, 그 이름을 아들 이름인 에녹으로 부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없이 이렇게 잘 살 수 있다고,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정을 이룬 부부의 제일 소원이 내 집 마련입니다. 어떤 분은 그러데요.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왜 주는지 아느냐고요. 집사는 집사라고 해서 집사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 집 갖는 것이 인생의 제일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집 사기도 어렵고, 집 없는 서러움을 우리는 느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집에 집착을 할까요. 이사 다니는 것 힘들어서요. 2년에 한 번씩 임대료 올려야 하는 부담 때문에요. 얘들 커 가는데, 자기 집도 없는 것에 기죽을까 봐요. 다 맞는 말인데요.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입니다. 안정된 생활을 하는데 자기 집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용이하지 않습니까?

 

집에 대한 소유 그리고 내 집에서 누리려는 안정, 이 심리 안에는 가인의 정신과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떠나서, 내 힘으로 내 집 갖고, 안주해보겠다는 가인의 정신과 가치 말입니다. 가정에 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자기 예배당 건물이 있으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어떤 것에서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안주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유형의 건물을 얻게 되면 안정을 얻을까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빌라에 살던 사람은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24평 아파트에 들어가 보니 대궐 같습니다. 빌라에서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는 듯합니다. 그렇게 안주하고 얼마지 나지 않아 답답해 보입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 좀 큰 평수로 옮겼습니다. 30평대로 그리고 50평대로요. 마음이 안정이 얼마나 갈까요? 내 집이니까 좋기는 좋지만,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집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아직도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라멕의 정신과 가치

두 번째로 라멕의 정신과 가치를 살펴볼까요. 그는 아내가 둘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중혼자입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2-23) 라멕이 아내 둘을 얻은 것은 자신의 욕망이 전부가 아닙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일부일처에 대한 반항입니다.

 

라멕은 그 뿐 아니죠. 자기를 대적하면, 자기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자는 죽임으로 응징했다고, 자기 아내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자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떠나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자신의 성을 세우고요. 그의 후손인 라멕은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의 질서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음을 중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모자로 자기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면, 타인의 생명을 하루살이처럼 여겼습니다. 한 생명을 가장 중요시하는 성경의 정신과 가치에 정면으로 대적함을 가졌습니다. 이 또한 가인의 정신과 가치입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정신과 가치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정신과 가치는 무엇입니까? 야발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목축업의 시초인 것이지요. 소와 양을 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가축은 피를 흘려야 목적을 이룹니다. 가축의 최종은 자라면 도살합니다. 인간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축은 이 경우만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이 되기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이 때 흘린 피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축을 키우는 자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야발은 자신을 위해서만 도축을 했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위해서는 인색한 것입니다. 야발의 조상 가인을 통해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업이 나의 생존만을 위한 것으로 안다면,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고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기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그 기업의 수입에 십일조를 성별하여 드림으로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유발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악기를 잘 연주했습니다. 음악은 인간 사회에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음악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사용됩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 부터 하프’harp를 연주했고, 그가 하프로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나가는 역사 있었습니다(삼상16:16-18). 또 수많은 노래를 시편에 남겼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찬양과 악기와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사용되는 귀한 도구입니다.

 

가수 선예아세요. 민선예씨요. 그는 원더걸스 원년 멤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전성기 때 돌연 한 자원봉사모임에서 만난 선교사님과 결혼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선예씨는 가정의 어려움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할머니가 지금은 소천하셨는데요. 신실한 권사님이셨어요. 그 믿음을 따라 선예씨도, 예수님을 잘 믿었고요. 그리고 대형기획사 오디션에 합격 걸그룹으로 데뷔 후, 활발한 활동을 펼쳤었지요. 저는 그것에 대하여 반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예능을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중 연예인 중 자신의 연예계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음악을 인간의 쾌락을 위한 향락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음악이 인간에게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대인 관계의 한 소통으로도, 정신 건강을 맑게 하는데도 유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에서 향락을 위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도구가 음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소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그만큼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기에 그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두발가인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제철업을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철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제철로 어마어마한 부를 일구어낸 미국 최초의 근대 자본가 카네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석유왕 록펠러John D. Rockef

eller,1839-1937, 백화점왕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1838-1922와 함께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어려서부터 성경 교육을 받았고, 십일조를 잘 드려 이러한 큰 복을 받았다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면서, 반만 아는 말입니다.

 

록펠러도 그랬고 카네기도 독과점을 하였습니다. 제철분야에서 타 회사가 추종할 수 없도록 재정이 악화된 경쟁사들을 사들이고, 원료와 상품 수송을 위해 독자적인 철도망을 구축했습니다. 카네기는 비도덕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전형적인 자본가였던 것입니다. 회사 물품을 운송하는 철도회사에 리베이트를 강요하고, 제철업자들끼리 독점 담합을 맺어, 엄청난 부당 이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외국 경쟁회사가 국내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보호관세법을 통과시키기도 했습니다. 임금을 형편없이 깎아내리고, 이에 항의하는 노동단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는 재투자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카네기의 경영을 볼 때,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전형적인 가인의 정신과 가치이지요.

 

그러나 또 다른 반전이 있지요. 그는 나중에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회사를 매각했습니다. 그리고 1902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자신의 수중에 남은 25천만 달러를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 기부로 미국 전역에 공공도서관 2,500개 건립했고요, 카네기회관,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3억 달러 이상을 기증했습니다.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건물인 평화궁을 지었으며, 카네기멜론 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카네기는 감당할 수 없는 물질이 쏟아질 때,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빠지기도 했지만,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돌아와 인생 마지막까지 산 것입니다. 그리고 카네기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를 살펴보면서 아차!’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이 생각들이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이었구나 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인 세속 문화가 아니라, 셋과 그의 후손의 예배 문화로 대표되는 정신과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지켜야 합니다.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우리의 사명입니다.

 

 

정리

 

가인과 그의 후손

 

가인이 아벨을 해한 후, ‘부모를 떠났다.’ ‘고향을 떠났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와 앞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4:16). 가인은 그동안 속박과 같이 여겨졌던 하나님을 떠나 하고 싶은 데로 마음껏 사는 인생을 추구한 결과에 대하여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인. 여호와를 떠나 자신의 포부를 펼친 가인은 큰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주한 가인은 열심히 일하여 을 쌓았습니다(4:17). 성을 쌓았다는 말은 도시를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도시를 아들의 이름 에녹 성이라 명명했습니다. 가인의 명성과 권위가 어느 정도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멕. 가인의 5대손 라멕은 아내가 하나가 아니고 아다씰라둘입니다(4:19).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일부다처제입니다. 이를 볼 때 가인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결혼까지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데로 하며 산 것입니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 라멕은 두 아내를 통해 세 아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4:20-22). 야발은 가축치는 자의 상으로 유목문화,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부는 자의 조상으로 유흥문화, 두발가인은 쇠를 다루는 자로 철기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세상적인 성공

 

본문 당시 사람들은 거의 천년의 수를 누렸습니다(참고/5:5,27). 그렇다면 가인은 자신의 오대손인 라멕과 육대손인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까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단 그 성공이 여호와를 떠난 세상적인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의 성공은 오직 자신들의 영화를 위함이었습니다.

 

라멕의 과시. 라멕은 두 아내를 불러다 놓고 자신을 과시하는 노래를 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4:23-24). 나에게 조금이라고 해를 가하는 자에게 가차 없이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가인은 해친 자에게 벌이 일곱 배이면 자신은 일흔일곱 배라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은 오직 자기 자신이 전부인 것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면 살아가고 있음을 이미 창세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참 씁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셋과 그의 후손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마막 두 절에 셋과 그의 후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또 다른 아들을 생산하게 되는데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4:25).

 

그리고 셋의 아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였습니다(4:26).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광 돌리며, 예배드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죽었기에 단순히 그 생명을 하나 더 셋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제일 첫째로 하는 예배자로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 셋과 그의 후손을 세우신 것입니다.

 

화려함과 단순함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에서 거둔 성공들을 통해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셋과 그의 후손들은 아주 짧게 예배에 관해서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과 같이 화려한 세상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셋과 그의 후손처럼 소박한 신앙의 길로 갈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이 질문이 너무 이분법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얻는 세상의 성공을 말한 것이라면 합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의 성공인 세속의 문화와 셋과 그의 후손의 영광된 예배의 문화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인은 세상적인 성공을 얻더라도,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얻은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가치이어야 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

 

가인의 정신과 가치. 가인은 여호와를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정착해서 성을 쌓고 이름을 자기 아들 에녹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가인이 왜 이렇게 도시 건설에 공을 들였을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평생동안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4:12). 가인이 거한 놋 땅의 놋이라는 뜻도 유랑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에 가인은 반기를 든 것입니다. 내가 정착하여 떵떵거리며 살아 보겠다고 한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임대를사는 서민에게 자가는 꿈이라고 할 정도로 소망입니다.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입니다. 안정된 생활을 하는데 자기 집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용이합니다. 그러나 집에 대한 소유 그리고 안정을 누리려는 심리 안에는 가인의 정신과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집도 예배당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에서도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안주가 되어야 합니다. 집이니까 좋기는 좋지만,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집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아직도 매여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라멕의 정신과 가치. 라멕은 아내가 둘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중혼자입니다. 이것은 욕망이 전부가 아닙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일부일처에 대한 반항입니다(2:22-23).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의 질서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음을 중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모자로 자기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면, 타인의 생명을 하루살이처럼 여겼습니다. 한 생명을 가장 중요시하는 성경의 정신과 가치에 정면으로 대적함을 가졌습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정신과 가치. 야발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입니다. 목축업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축은 인간의 양식을 위해서만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이 되기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이 때 흘린 피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야발은 전자만을 위해서 했을 뿐 후자에는 인색했습니다. 유발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음악은 인간 사회에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능을 통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중 연예인 중 자신의 연예계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음악을 인간의 쾌락을 위한 향락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도구가 음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참고/삼상16:16-18). 다소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그만큼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기에 그렇게 들릴 수 있습니다.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입니다. 제철업하면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는 독과점을 하였습니다. 전형적인 가인의 정신과 가치이지요. 그러나 또 다른 반전은 나중에 잘못을 인정하고,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회사를 매각했습니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미국 전역에 공공도서관 2,500개 건립했고요, 카네기회관,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3억 달러 이상을 기증했습니다.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돌아와 인생 마지막까지 산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보면서 우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인 세속 문화가 아니라, 셋과 그의 후손의 예배 문화로 대표되는 정신과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지켜야 합니다.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우리의 사명입니다.

 

 

최종정리: 에덴의 동쪽

 

제임스 딘James Dean,1931-1955 아세요. 미국의 유명한 배우입니다. 제임스 딘은 24세 교통사고로 사망, 3편의 영화를 남겼음에도, 대 스타의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의 데뷔작은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입니다(1955, 엘리아 카잔Elia Kazan,1909-2003 감독). 이 영화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요. 1952년 미국 작가 존 스타이벡John Steinbeck,1902-1968이 소설 에덴의 동쪽을 발표했습니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을 오늘 본문인 창세기 416절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에덴의 동쪽

 

1.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 자신의 욕망을 펼쳤던 에덴 동쪽 놋 땅’land of Nod 유랑이라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떠나, 마음껏 꿈을 펼치며, 살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유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한 방황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에덴의 동쪽에서 살려고 합니다. 그 에덴의 동쪽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정신과 가치를 쫓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가인처럼 내가 성을 쌓으면, 내 이름의 도시를 건설하면, 방황하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더 좋고 더 큰 집에 대한 욕망만 쌓일 뿐,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46:1).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아직도 매여 있는 것입니다.

 

2. 라멕은 중혼을 통해 일부일처제라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 제도에 도전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자기에게 손끝하나라도 해를 가하면, 타인의 생명을 서슴없이 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의 불화와 자신의 불안만을 증폭할 뿐이지요. 진정한 가정과 개인의 행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성구있지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말씀합니다(127:1).

 

3. 야발은 목축한 가축의 피를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였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만을 위하여, 쌓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앞으로 잘 될 것이니, 창고를 더 크게 짓자고, 생각하는 부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 내가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2:9).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다함으로 정작 자신들은 환난과 긍핍을 당하였지만,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신 다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고,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2:10). 하나님께 대하여 쌓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야발과 같이 가축의 피를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데 인색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데 부요한 자는 가인과 정신과 가치를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과 가치입니다.

 

4.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잘 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향락만을 추구하는 음악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되는 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우리도 하나님의 도구요.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경의 가치와 정신을 알게 됩니다.

 

5. 두발가인은 구리와 시로 여러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철강왕으로 불린 카네기는 한 때, 체절업 독과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나중에는 부유한 채로 죽는 것은 인간의 치욕이다.”, 회사를 매각하고, 자신의 소유를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에 이를 것이요’(3:19). 우리는 인간이기에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빠질 수 있지만, 깨닫고 빨리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돌아와 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결론 :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러한 가인의 정신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이 에덴의 동쪽을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합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5:20). 우리는 에덴의 동쪽에서 아직도 가인의 정신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을 그 죄에서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서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벨 대신 주신 셋은 단순히 잃은 아들을 보충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셨던 하나님은 산 제사를 드릴 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셋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십니다.

 

에노스 이전에 아벨과 그의 제물도 하나님은 받으셨지만, 에노스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수입니다, 즉 에노스 때, 이르러 공적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지만, 세밀하게 구분을 한다면, 첫 공식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노스 그리고 에노스와 신앙을 같이 하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과 같이 세속의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 셋과 그의 후손들은 예배의 문화를 높인 것입니다.

 

에노스가 예배를 드렸을 때, 아버지 셋도 함께 있었을까요? 셋은 백다섯 살에 에노스를 낳고, 그 후 팔백칠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고, 구백십이 년을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5:6-8). 그렇다면 충분히 에노스가 예배 드릴 때, 아버지 셋도 함께 했을 것입니다. 구백 삼십년을 산 아담도 함께 있었을 것이고요. 범죄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 그리고 셋과 에느스 삼대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까요? 같은 시간 가인은 자신들의 후손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을 보며 도취 되었겠고요. 성도님들께서는 어느 장면을 여러분 때와 후손의 때에 보고 싶으세요. 당연히 예배의 문화를 드높이고, 하나님과 교제한 셋과 그의 후손들이겠지요.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어버이주일 우리 가정의 역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19:6). 이것이 어찌 이스라엘에게만 향한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저와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셋과 그의 후손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어야 합니다. 세속의 문화가 아니라 예배의 문화를 높여 가야 합니다. 세속의 문화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성적인 성공을 거두어도 가인의 정신과 가치처럼 하지 말고,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오늘도 에덴의 동쪽에서 인생의 향방을 알지 못하고,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사로잡힌 자들을, 성경의 정신과 가치를 아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자들이 되도록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크고 좋은 집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와 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라멕은 여러 명의 배우자를 두고 자신의 경쟁자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불화와 자신의 불안만을 증폭할 뿐이지요. 진정한 가정과 개인의 행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뿐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야발은 목축한 가축의 피를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였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을 다 한 성도들에게 내가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시며, ‘ 생명의 관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유발의 악기 연주는 사람들을 향락에 빠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도, 내 손에 들린 어떤 도구도 하나님께 영광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들어 번창했습니다. 철강왕으로 불린 카네기는 한 때, 체절업 독과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나중에는 회사를 매각하고 자신의 소유의 물질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가인의 가치와 정신에 빠질 수 있지만, 깨닫고 빨리 성경의 가치와 정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