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계보에서 생명책으로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창세기5:1~32 2023.05.14. 主日禮拜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1-32)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 자신의 욕망을 펼쳤던 ‘에덴 동쪽 놋 땅’land of Nod 의 ‘놋’은 ‘유랑’이라는 뜻입니다(창4:16).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떠나, 마음껏 꿈을 펼치며, 살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유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원한 방황자일 뿐입니다. 에덴의 동쪽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정신과 가치를 쫓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가인처럼 내가 성을 쌓으면, 내 이름의 도시를 건설하면, 방황하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더 좋고 더 큰 집에 대한 욕망만 쌓일 뿐,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창4:17).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인생의 진정한 안정과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아직도 매여 있는 것입니다.
라멕은 중혼을 통해 일부일처제라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 제도에 도전했습니다(창4:19.참고/창2:24).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자기에게 손끝하나라도 해를 가하면, 타인의 생명을 서슴없이 해했습니다(창4:23-24). 그러나 그것은 가정의 불화와 자신의 불안만을 증폭할 뿐이지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말씀합니다(시127:1). 진정한 가정과 개인의 행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야발은 목축한 가축의 피를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였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창4:20). 자기 만을 위하여, 쌓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앞으로 잘 될 것이니, 창고를 더 크게 짓자고, 생각하는 부자에게 ‘20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0-21). 서머나교회의 희생과 헌신을 다함으로 정작 자신들은 환난과 긍핍을 당하였지만,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신 다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고,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2:9-10). 하나님께 대하여 쌓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야발과 같이 가축의 피를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데 인색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데 부요한 자는 가인과 정신과 가치를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과 가치입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잘 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습니다(창4:21). 그러나 그는 인간의 향락만을 추구하는 음악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되는 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우리도 하나님의 도구요.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골3:23-24). 그리할 때 성경의 가치와 정신을 알게 됩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들었습니다(창4:22). 철강왕으로 불린 카네기는 한 때, 체절업 독과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나중에는 “부유한 채로 죽는 것은 인간의 치욕이다.”며, 회사를 매각하고, 자신의 소유를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에 이를 것이요’(행3:19). 우리는 인간이기에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빠질 수 있지만, 깨닫고 빨리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돌아와 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가인의 정신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이 에덴의 동쪽을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합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5:20). 우리는 에덴의 동쪽에서 아직도 가인의 정신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을 그 죄에서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서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십니다(창4:25-26). 에노스 이전에 아벨과 그의 제물도 하나님은 받으셨지만, 다른 점은 ‘사람들’입니다. 복수입니다, 즉 에노스 때, 이르러 공적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지만, 세밀하게 구분을 한다면, 첫 공식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노스 그리고 에노스와 신앙을 같이 하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과 같이 세속의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 셋과 그의 후손들은 예배의 문화를 높인 것입니다.
에노스가 예배를 드렸을 때, 아버지 셋도 그리고 인류의 시조 아담도 함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참고/5:5-8). 범죄 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은 삼대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까요? 같은 시간 가인은 자신들의 후손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을 보며 도취 되었겠고요. 우리와 후손의 때 보아야 할 거룩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인생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어버이주일 우리 가정의 역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습니다(참고/출19:6;벧전2:9). 저와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셋과 그의 후손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어야 합니다. 세속의 문화가 아니라 예배의 문화를 높여 가야 합니다. 세속의 문화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성적인 성공을 거두어도 가인의 정신과 가치처럼 하지 말고,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오늘도 에덴의 동쪽에서 인생의 향방을 알지 못하고, 가인의 정신과 가치에 사로잡힌 자들을, 성경의 정신과 가치를 아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자들이 되도록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 그리고 셋과 그의 후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지난 두 주 동안 가인과 아벨 그리고 아벨 죽음 후 아벨 대신 주신 셋, 가인과 셋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동생의 목숨을 빼앗은 후 가인은 도피를 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과 사람들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가인이 부모를 떠났다’ 혹은 ‘가인이 고향을 떠났다’고 말하지 않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창4:16). 즉 가인은 그동안 하나님이 자신을 속박한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인의 결과는 어떻다고 말씀드렸습니까?
가인은 개인 성, 오늘로 말하면 자신을 위한 신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창4:17). 성의 명칭을 아들의 이름인 에녹 성이라 명하고, 자신의 명성을 길이길이 남겼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오대손인 라멕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중혼자입니다(창4:19). 그는 자신에게 손끝하나라도 해하는 자는 죽임으로 응징했습니다. 라멕은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이지만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 칠 배라며” 떠벌였습니다(창4:23-24). 자신의 앞길의 장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둘 씩 두어서,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에 도전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가인의 육대손인 야발은 가축치는 자의 조상, 유발은 수금과 퉁소 부는 자의 조상,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자로 각 각의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창4:20-22). 그러나 그들이 발전시킨 유목문화와 유흥문화와 철기문화는 오직 자신들 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야발은 가축을 자신을 위해서만 도살하였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부유한 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인색한 자였습니다(참고/눅12:20). 유발은 악기를 통해 사람들이 음악을 유흥으로 변절시키는데 사용했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골3:23). 즉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도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두발가인은 철기사업의 시초인데, 제철업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철강왕 카네기입니다. 그는 제철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독과점이라는 전형적인 자본가의 행패를 부렸습니다. 잘못을 깨닫기 이전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들은 세상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하나님을 떠난 성공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한 성공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정신과 가치를 같고 사는 사람들의 땅이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 정착했던 놋 땅, 에덴의 동쪽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이 가인의 정신과 가치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도 에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창세기 4장은 이렇게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 하나님이 아벨대신 아담에게 주신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에 대해서는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었더라’(창4:26).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후손에 대해서는 아주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왜! 셋과 그의 후손에 대해서는 간단히 적고 있을까요? 중요하지 안해서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것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 경배했다.”,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문장이지만, 가인과 그의 후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 성경의 정신과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세속문화, 가인의 정신과 가치가 전부인줄로 알고 살아가는 ‘에덴의 동쪽’에 있는 사람들이, 예배 문화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살아가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입니다.
계보와 생명책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에 가서, 우리는 또 다른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봉독을 하면서, 아담의 계보를 보게 됩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족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가만히 보십시오. 아담의 장자는 가인인데요. 앞의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세속적인 성공을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본문에서 아담의 계보에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이 있는 가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창세기 4장에서는 짧게 언급되어 있던 셋,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을 통해 내려오는 후손들만을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에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장자인 가인과 그의 후손은 생략되고 있고, 셋과 그의 후손만이 레코드Record되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문화’ ‘세상의 성공’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의 문화’ ‘신앙의 승리’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인은 세상적인 성공을 얻더라도,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얻은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면서도, 세상에서 얻은 성공을 자신 만을 위해 쓴다면, 누구와 같아요, 그의 정신과 가치는 가인과 그의 후손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의 동쪽에 사는 자들입니다.
지난 주일에 야발을 이야기 하면서 성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으로 목축업의 시초였습니다. 가축은 자라면 잡아 피를 흘려야 목적을 이룹니다. 인간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가축을 잡아 피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야발은 조상 가인과 같이 자신을 위해서는 가축을 잡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부유한 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인색한 자였습니다(참고/눅12:20). 우리는 성별을 알아야 합니다. 성별 가운데 십일조를 말씀드렸습니다. 장로 임직을 받은 분들 가운데도 십일조로 인해 시험에 들고 근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일조와 봉헌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말3:8).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말3:9.참고/창14:20,28:22;레27:30-33;민18:21-24;신12:5-18,14:23:27-29,26:12-15).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그중의 십 분의 일을 드리면 모든 것을 드린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였습니다(참고/대상19:14;말3:10-12;고후9:6-7). 십일조 외에 드리는 물질이 헌금이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는 구약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신약 사도행전의 말씀을 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2:42-45;4:32-37) 예수 믿고 영생 얻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신약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재산 전부 교회에 드렸습니다.
성도님들이 드려지는 십일조로 교회를 운영하고 교육과 선교를 하고 소외된는 분들이 없도록 나눔으로 성경적인 초대교회의 거룩한 헌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간혹 메스컴에 나와서 십일조 불필요를 언급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평신도와 평신도가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는 몰지각한 자들입니다.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아이들 교육이 중요하다면 교육에 필요한 인재와 공간과 교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당연히 물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은 물론 자녀들을 위해 감사예물 한 번 드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바로 세워지기를 바라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에 인색한 것은 아직도 내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다른 분들이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가 유지되겠지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렇게 다들 생각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분들이 다수일 수 있습니다.
십일조로 부담을 주지 말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은혜받으면 즐거이 자원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초신자가 아니라. 10, 20년 교회를 다닌 분들입니다. 2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해 십일조를 드리지 못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신앙의 영역에 은혜와 감동과 기쁨만이 있습니까?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 에 부은 마리아의 애통이 있었습니다(요12:3). 허리가 휠 정도도 가난한 중에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의 헌신이 있습니다(눅12:44). 주님의 사역을 위해 자기들의 소유로 섬긴 막달라 마리와 여인 등의 희생이 있었습니다(눅8:1-3). 이렇게 신앙의 영역에는 은혜와 감동과 기쁨만이 아니라. 애통과 헌신과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두 영역이 함께 할 때 균형이 있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영역에서 은혜와 감동과 기쁨 만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라는 우상, 미신, 무속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애통과 헌신과 희생을 드릴 때, 우리의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고, 비로서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감동과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에 관해서 부정적 시각과 도외시하려는 견해와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려는 경향은 못드리는 것이 아니고, 안 하고 싶어 하는 명분 백 가지로 무장하고 있지 않나 우려스럽습니다. 책임과 권리가 있습니다. 의견은 많은데 예물은 없다는 것은 권리만 내세우고 책임은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처럼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내가 말씀을 받는 제단에 물질을 드릴 때, 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마6:21.참고/말3:10). 그렇지 않으면 마당만 밟는 자, 교회 다니는 사람 수준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참고/사1:12).
우리는 백 가지 말보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여 드리기를 소망하고 교훈하며 축복합니다. 물질은 항상 부족합니다. 수입이 있으면 바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지출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지 않은 일들로 금전에 손해를 보고, 자주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상하고,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갖가지 문제가 생기고, 이러한 일들이 있을 때 중보를 하는데요. 십일조를 결단하지 못해서 그렇게 물질들이 세어나가는 경우를 보기도 합니다. 물질이 부족한 가운에도 하나님의 것을 성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게만 쌓고 하나님에게는 가난한 에덴의 동쪽에서 사는 가인과 그의 후손의 가치와 정신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에덴에 동쪽에 사는 자들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여 성경의 정신과 가치를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 오늘도 에덴의 동쪽에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셋과 그의 후손으로 상징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자들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럼으로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가인과 그의 후손은 전혀 언급이 없고, 셋과 그의 후손을 성경에 남기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는 저와 여러분들은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가 아니라,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셋과 그의 후손들의 족보인 아담의 계보에 올려야 되고, 그것이 저 천국 생명책에 녹명되는 까지 이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계21:27). 본문 아담의 계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디에 이름이 녹명되어야 함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라고요. 생명책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과 명예와 권좌를 누렸어도, 그 마지막이 생명체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주님이 부자를 지칭한 ‘어리석은 자’입니다(눅12:20).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합니다(계20:15). 그러나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했더라도, 그는 ‘실상은 부유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계2:9).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생명의 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2:10). 그가 바로 생명책에 녹명된 자인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인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이 오늘 아담의 계보를 보면서, 셋과 그의 후손의 족보를 보면서, “우리의 궁극적으로 적시되어야 할 것은 생명책이구나!” 다시 한 번 상기하고 확신했다고 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보를 기록하면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대부분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이에게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담입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1-2)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인간으로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사람’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 세 단락을 이어보세요. 인간은 누구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외형이 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과 동일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에 복을 주셨다고 했지요.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즉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은 인간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아담’Adam의 뜻은 ‘붉다’,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 흙이 붉지 않습니까? 이 붉다 곧 사람과 같은 뜻으로 아담입니다.
그러면 연결을 해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을 알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도록 즉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졌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가장 큰 복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신 다는 것을 아는 자가 사람이라고요.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것을 알 때, 사람인 것이지, 이것을 모르면, 그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호흡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모양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성경적인 정의의 사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람입니까?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과 반대는 이들을 자연인 Natural Man으로 부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 아닌 사람인 자연인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지도 모르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첫째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인지도 모르고, 이것을 알 때 사람은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냥 한 인격을 갖고 호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인은 살아가야 할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빨리 하나님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담의 계보를 보면서, 셋과 그의 후손의 족보를 보면서, “우리의 궁극적으로 적시되어야 할 것은 생명책이구나!” 다시 한 번 상기하고 확신했다고 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졌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고,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복인 것을 아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모르는 주변의 자연인들이 빨리 하나님을 믿는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요, 그것이 가장 큰 복임을 고백하고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나조차 그렇지 않으면서, 자연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요, 큰 복이라고 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기에 이를 바로 아는 사람은 그 신앙 자체가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든바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첫째이다.”, “그것이 가장 큰 복이다,”, “이를 믿는 나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이런 고백으로 날마나 살아가는 자, 그의 삶이 곧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살아가면, 그의 삶에 감사가 항상 있지 않겠습니까? 얼굴에 기쁨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행동에 활기가 넘치지 않겠습니까? 대화에 소망이 담기지 않겠습니까? 발걸음이 가볍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변에서 묻겠지요. “뭐 그렇게 좋아 얼굴이 환희가 가득해” 그 때 우리는 긴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러워 예수 믿어!” 그 한 마디가 자연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고 말씀합니다(시73:28). 이 고백과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곧 사람입니다.
동행과 유혹
아담의 계보를 통해 궁극적으로 생명책에 녹명을 확신하는 자의 이 세상에서의 삶 첫 번째는 이렇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야 사람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그가 사람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동행입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5:21-22). 이 말씀에 등장하는 에녹은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삼 백년 동안 동행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고 오늘 분문에 열거된 다른 사람들은 아니고,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좀 더 특별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만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만이 아니라, 다른 것과도 동행을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여러 가지들과 함께 동행 하려고 하고요.
그러한 관점에서 에녹은 정말 하나님과 동행 바꾸어 표현하다면, 하나님과만 동행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그대로 들림 받아, 변화되어 천국에 입성했습니다. 이러한 에녹의 마지막 보았을 때, 그는 정말 일생 동안 오직 하나님과만 동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아니 하나님과만 동행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담의 계보를 보면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생명책에 녹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두 번째로 동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동행은 누구와의 동행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과는 어떤 동행이어야 해요. 하나님과만의 동행이여 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하는데요, 이것이 쉽지 않은 것은 유혹 때문입니다.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외에 다른 것과 동행하게 만들고, 마지막은 하나님과 결별하여 세상과 동행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동행에서 멀어지게 유혹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여기 말씀에 세 가지가 나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곧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이 말씀에서 육신의 정욕은 소유욕을 의미합니다. 소유욕이란 무엇이든지 갖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나 이 소유욕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만족되지 않습니다. 소유욕은 가질수록 점점 더 갖고 싶어하는 무서운 욕망입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이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솔로몬만큼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전무후무하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손에 넣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쌓아놓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보고 나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욕에 한 번 빠져들었다 하면, 끝가지 끌려가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파산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 소유욕입니다. 육신의 정욕인 소유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안목의 정욕
그 다음 안목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일종의 쾌락 욕입니다. 오감五感을 통해서 즐기기를 원하고, 만족하기를 원하는 쾌락 욕도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한 번 즐겼다고 만족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즐기면 즐길수록 더 큰 것을 원합니다. 한 번 작은 쾌락을 맛보았으면 끝없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 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솔로몬이 자기 주변에 아름다운 미녀를 몇 명이나 두었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천 명입니다. 계산이 안 나옵니다. 그것도 공식적으로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으로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마음에 들면 언제든지 자기 옆에 데려다놓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즐긴 사람입니다. 여자를 그렇게 많이 거느렸다는 것은 다른 것들도 하고 싶은 데로 다 누려보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은 즐겨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즐겨보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지만 끝이 없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고 말한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인 쾌락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이생의 자랑
그 다음 이생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이생의 자랑은 과시 욕입니다. 자기가 얻은 명성, 쌓은 부, 잘난 것, 똑똑한 것 등을 가지고 무대 기질을 발휘하여, 사람들 앞에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기를 꺽어 놓는 것이 과시 욕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과시욕, 즉 무대 기질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끌어 자기를 한번 과시해보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어라 마셔라 해됩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젊은 사람들도 놀고, 예전에는 “인생은 육십부터” 그랬는데요, 지금은 “인생은 칠팔십부터” 노인들도 놀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멋과 돈을 힘껏 과시하지 않습니까? 허파에 바람 든 여인들의 형태를 한번 보십시오. 유명메이커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동이 납니까? 남자들 보십시오. 자기 사랑하는 여인 앞에 놓고 “야! 내가 지금은 중형 타지만, 결혼해서 몇 년후에는 대형이고, 십년 후에는 벤츠야, 너에게는 포로세 선물 하께, 신혼여행은 괌 사이판이지만, 결혼 몇 주년은 몰타 십 주년은 미주로 해서 유럽까지 일주야 알아, 이 오빠만 믿어!” 한껏 객기를 부리며 과시하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폼생폼사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그러나 살아가면서 얻는 결론이 있지요 살아가는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되”(전1:14).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생의 자랑인 과시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이렇게 소유욕이나 쾌락욕, 과시욕 같은 것들은 굉장히 아름다운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방 그 쪽으로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그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빠져 있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혹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그 다음 구절에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요일2:17). 하나님과만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합니다.
위로와 심판
아담의 계보를 통해 궁극적으로 생명책에 녹명을 확신하는 자의 이 세상에서의 삶 첫 번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야 사람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인데 어떤 동행이라고요. 하나님과만의 동행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세상은 유혹합니다. 하나님과만의 동행에서, 다른 동행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은 떼어 놓고, 세상과 동행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소유욕과 쾌락욕과 과시욕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만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안위입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5:29). ‘노아’Noah의 뜻인 안위는 위로와 같은 말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노아를 통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계보를 통해 생명책에 녹명되어야 함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과만 동행하고, 다른이에게는 안위하는 자,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어려워합니까? 그들을 한숨 돌리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노아 하면 대홍수를 우리는 생각하는데요. 노아가 홍수 후에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다는 말씀을 볼 때, 노아는 대 홍수이전 6백년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9:28-29). 그 6백 년의 시간 동안 노아는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의 이름의 뜻이 안위라는 것은 노아가 대홍수 이후 그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된 세상에 안위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이전에도 6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백년 동안 노아가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는 삶을 살았음에도, 사람들은 대홍수 직전 물 심판의 임박함을 알리는 노아의 말을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말을 들은 사람이라곤 고작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뿐입니다. 노아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홍수를 알리고 전했는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고생에서 한숨 돌리게 하였습니다. 위로를 주었습니다. 안위를 얻게 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씀인 심판에 대해서는 귀 기울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것만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나와 함께 해도, 신앙만은 합일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여러분 위로가 무엇입니까? 따듯하게 감싸주는 것이 위로입니까?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이 위로입니까? 흘린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위로입니까? 당한 아픔을 싸매주는 것이 위로입니까? 지금 말씀드린 이 모든 것이 국어 정의로 위로입니다. 신앙 행위로도 위로입니다. 우리에게 육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위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위로는 이것만이 위로가 아닙니다.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왜! 심판이 진정한 위로입니까? 성도가 믿음 때문에 당한 고통과 환난에 대한 위로하심이 심판 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며 비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지난 120년 동안 수많은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대홍수로 심판이 시작되고, 자신들의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던 것이 분명함을 알게 합니다. 이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심판의 최종은 종말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심판이 진정한 우리의 위로인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지킨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10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10-11). 지금 신원하는 이들은 순교자들입니다. ‘우리의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는 말씀을 볼 때, 이들은 순교자임이 분명합니다. 순교자들은 빨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청에 들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합니다. 순교자의 동무들이란 순교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교자가 있는데, 그 수가 다 찰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후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고 하셨습니다(계19:2).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 값을 갚아 달라는 신원이 19장에 와서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서 갚으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최종적인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순간, 예수님 재림 때,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내가 정말 이 세상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지킨 믿음이 승리함을 보고, 위로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그 심판에 빠지지 않고, 건짐 받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위로에 이러한 심판에서 건짐 받게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전한 위로는 진정한 위로는 심판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히려 심판에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눈물로 믿음을 지킨 것이 승리함을 보는 위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함에 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마지막 날 심판을 당하지 않고, 그 심판에서 자기의 신앙이 옳았음을 목도하는 위로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그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 것이 옳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양회진 외인 선교사 묘원을 찾아가서 이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
계보와 생명책
본문 창세기 5장을 보면 4장에서 가인과 그 후손들의 세상적인 성공을 장황하게 기록한 것과 갈리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가인이 장자인데도 말입니다. 반면 4장에서 짧게 언급되어 있는 셋,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을 통해 내려오는 후손들만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문화 세상의 성공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문화 신앙의 승리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인은 세상적인 성공을 얻더라도,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 만을 위하여 쓴다면, 그 정신과 가치는 에덴의 동쪽에 사는 가인과 그의 후손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야발을 이야기 하면서 성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으로 목축업의 시초였습니다. 짐승은 자라면 잡아 피를 흘려야 목적을 이룹니다. 인간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짐승을 잡아 피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야발은 조상 가인과 같이 자신을 위해서는 짐승을 잡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부유한 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인색한 자였습니다(참고/눅12:20). 우리는 성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일조와 봉헌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말3:8).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말3:9).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그중의 십 분의 일을 드리면 모든 것을 드린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였습니다(참고/대상19:14;말3:10-12). 십일조는 구약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2:42-45;4:32-37) 신약에서는 예수 믿고 영생 얻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 전부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로 교회를 운영하고 교육과 선교를 하고 소외된는 분들이 없도록 나눔으로 성경적인 초대교회의 거룩한 헌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녀가 중요하다면 인재와 공간과 교재등 교육에 필요한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에 인색한 것은 아직도 내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다른 분들이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가 유지되겠지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렇게 다들 생각하고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 자수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분들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은혜받으면 즐거이 자원해서 한다고 합니다. 초신자가 아니라 20년 신앙생활을 한 분이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그 시간 동안 은혜를 받지 못해 십일조를 드리지 못할까 생각해 봅니다. 신앙의 영역에 은혜와 감동과 기쁨만이 있습니까?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에 부은 마리아의 애통이 있었습니다(요12:3). 허리가 휠 정도도 가난한 중에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의 헌신이 있습니다(눅12:44). 주님의 사역을 위해 자기들의 소유로 섬긴 막달라 마리와 여인등의 희생이 있었습니다(눅8:1-3). 그럼에도 신앙의 영역에서 은혜와 감동과 기쁨 만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라는 우상, 미신, 무속의 신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애통과 헌신과 희생을 드릴 때, 우리의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고, 비로서 하나님의 신앙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감동과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책임과 권리가 있습니다. 의견은 많은데 예물은 없다는 것은 권리만 내세우고 책임은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처럼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내가 말씀을 받는 제단에 물질을 드릴 때, 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당만 밟는 자, 교회 다니는 사람 수준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백 가지 말보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여 드리기를 소망하고 교훈하며 축복합니다. 물질은 항상 부족합니다. 수입이 있으면 바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지출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지 않은 일들로 금전에 손해를 볼 때 중보를 하다보면 십일조를 결단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만 쌓고 하나님에게는 가난한 에덴의 동쪽에서 사는 가인과 그의 후손의 가치와 정신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여 성경의 정신과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셋과 그의 후손들의 족보인 아담의 계보에 올려야 되고, 그것이 저 천국 생명책에 녹명되는 까지 이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계21:27). 본문 아담의 계보는 궁극적으로 생명책에 녹명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성공과 명예와 권좌를 누렸어도, 그 마지막이 생명체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주님이 부자를 지칭한 ‘어리석은 자’입니다(눅12:20). 그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합니다(계20:15). 그러나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환난과 궁핍을 당했더라도, 그는 ‘실상은 부유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계2:9).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생명의 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2:10). 그가 바로 생명책에 녹명된 자인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인
본문의 계보에서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대부분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이에게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인간으로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사람’이라고 칭하셨습니다(창5:1-2). 이 세 단락 연결해보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을 알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아담’Adam 뜻인 붉다 사람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그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호흡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모양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성경적인 정의의 사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연인’Natural Man일 뿐입니다. 이들이 살아가야 할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빨리 하나님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요, 그것이 가장 큰 복임을 고백하고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나조차 그렇지 않으면서, 자연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요, 큰 복이라고 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든바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첫째이다.”, “그것이 가장 큰 복이다,”, “이를 믿는 나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이런 고백으로 날마나 살아가는 자, 그의 삶이 곧 능력입니다. 그의 삶에 감사가 항상 있지 않겠습니까? 얼굴에 기쁨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행동에 활기가 넘치지 않겠습니까? 대화에 소망이 담기지 않겠습니까? 발걸음이 가볍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변에서 그 이유를 물을 때, “부러워 예수 믿어!” 그 한 마디가 자연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이 고백과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곧 사람입니다.
동행과 유혹
두 번째로는 동행입니다. 에녹은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합니다(창5:21-22). 이 구절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삼 백년 동안 동행했다고 하는데요. 당시에 다른 이 가운데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에녹은 좀 더 특별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만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만이 아니라, 다른 것과도 동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만 동행한 사람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상태로 그대로 들림 받아, 변화되어 천국에 입성했습니다(창5:24). 이러한 에녹의 마지막 보았을 때, 그는 정말 일생 동안 오직 하나님과만 동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만 동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외에 다른 것과 동행하게 만들고, 마지막은 하나님과 결별하여 세상과 동행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육신의 정욕. 육신의 정욕은 소유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솔로몬만큼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전무후무하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손에 넣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하였습니다(전5:10). 소유욕에 한 번 빠져들었다 하면, 끝가지 끌려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인 소유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일종의 쾌락 욕입니다. 솔로몬이 자기 주변에 공식적으로만 아름다운 미녀 천 명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도 하고 싶은 데로 다 누려보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은 즐겨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지만 끝이 없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고 말한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인 쾌락욕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이생의 자랑. 이생의 자랑은 과시욕입니다. 무대 기질을 발휘하여, 사람들 앞에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기를 꺽어 놓고 과시해보려는 것입니다. 허파에 바람 든 여인들의 형태를 한번 보십시오. 유명메이커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동이 납니까? 남자들 보십시오. 자기 사랑하는 여인 앞에 놓고 “야! 이 오빠만 믿어!” 한껏 객기를 부립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생의 장인 과시욕 은 하나님과만 동행을 막는 무서운 유혹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빠져 있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혹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그 다음 구절에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요일2:17). 우리는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합니다.
위로와 심판
세 번째는 안위입니다. ‘노아’Noah의 뜻 안위는 위로와 같은 말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노아를 통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창5:29). 아담의 계보를 통해 생명책에 녹명되어야 함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과만 동행하며, 다른 이에게 안위하는 자,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는 대홍수 이전 6백년을 살았습니다(창9:28-29). 그 6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안위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직전 사람들은 물 심판의 임박함을 알리는 노아의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고생에서 한숨 돌리게 하였습니다.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씀인 심판에 대해서는 귀 기울지 않았습니다. 위로가 무엇입니까? 따듯하게 감싸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위로는 이것만이 위로가 아닙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왜! 심판이 진정한 위로입니까? 성도가 믿음 때문에 당한 고통과 환난에 대한 위로하심이 심판 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며 비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면으로는 지난 120년 동안 수많은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홍수로 심판이 시작되고, 자신들의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던 것이 분명함을 알게 합니다. 이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심판의 최종은 종말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심판이 진정한 우리의 위로인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우리가 지킨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신원합니다(계6:10). 이 호소를 들은 하나님은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말씀합니다(계6:11). 순교자의 동무들이란 순교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교자가 있는데, 그 수가 다 찰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고 하셨습니다(계19:2).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 값을 갚아 달라는 신원이 19장에 와서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서 갚으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최종적인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때,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내가 정말 이 세상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지킨 믿음이 승리함을 보고, 위로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그 심판에 빠지지 않고, 건짐 받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위로에 이러한 심판에서 건짐 받게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전한 위로는 진정한 위로는 심판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히려 심판에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눈물로 믿음을 지킨 것이 승리함을 보는 위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인간적인 위로함에 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마지막 날 심판을 당하지 않고, 그 심판에서 자기의 신앙이 옳았음을 목도하는 위로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양화진 외인 선교사 묘원에서 이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최종정리
오늘 우리는 아담의 계보를 통해 가인과 그의 후손의 이름들은 생략되었고, 셋과 그의 후손만이 기록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후손 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과 그의 후손 같이 신앙에서 승리한 성도들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해도,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셋과 그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계보를 통해 이 세상에서 어떤 부유와 명예와 권좌를 누렸더라고,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책에 녹명되어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에 입성하기 때문입니다.
1. 그렇다면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 번째 아담을 통해 찾아보았지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 가장 큰 복인 것을 알 때,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인입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에는 감사, 얼굴에 기쁨, 행동에 활기, 대화에 소망, 가벼운 발걸음을 갖게 되고, 이를 자연인들이 그 연유를 물을 때, “당신도 예수 믿어” 그 짧은 한 마디가 자연인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라는 고백과 실천이 곧 능력인 것입니다.
2. 아담의 계보를 통해 생명책에 녹명된 자이어야 함을 확신하며, 두 번째로 우리는 에녹을 통해 찾아보았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러나 에녹이 죽음을 당하지 않고, 승천한 모습을 볼 때, 그는 하나님과만 동행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 그 외 다른 것들과 아직도 함께 동행 합니다. 육신의 정욕 소유욕의 유혹입니다. 안목의 정욕 쾌락욕의 유혹입니다. 이생의 자랑 과시욕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단호히 배척해야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만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아담의 계보를 통해 생명책에 녹명된 자이어야 함을 확신하며, 세 번째로 우리는 노아를 통해 찾아보았던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상처 받은 이를 따듯하게 감싸주는 것 위로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분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흘린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당한 아픔을 싸매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국어 정의로 위로입니다. 신앙 행위로 위로입니다. 우리에게 육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위로입니다. 그러나 이 위로가 전부이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최종 심판은 예수님 재림입니다. 그 때 악인이 심판을 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믿음을 지킨 것이 옳은 것이었음을 목도할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지금 삶에서 겪는 아픔의 위로만 아니라, 그들이 심판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킴으로 종말에 악인의 심판을 보고, 자신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는 것, 진정한 위로를 받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담의 계보에서 생명책으로, 아담의 계보에서 생명책으로 녹명되어야 함을 확신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행할 일입니다. 아담의 계보에서 생명책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아담의 계보는 궁극적으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자기에게만 쌓고 하나님에게는 가난한 가인과 그의 후손의 정신과 가치를 버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성경의 정신과 가치로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 등을 성별하여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신앙의 영역는 은혜와 감동과 기쁨만을 따르려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기라는 우상, 미신, 무속의 신앙을 버리고, 애통과 헌신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신앙에서 진정한 은혜와 감사와 기쁨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아담, 사람이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확신할 때 우리의 삶에 감사, 얼굴에 기쁨, 행동에 활기, 대화에 소망, 가벼운 발걸음을 갖게 됩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을 때 “당신도 예수 믿어” 증거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연인이 아닌 성경적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하나님과만 동행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인 소유욕, 안목의 정욕인 쾌락욕, 이생의 자랑인 과시욕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만 동행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된 인생에서 따듯한 언어와 포옹은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심판하셔서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응하실 때,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위로인 심판에 귀 기울이고 예수를 영접하여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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