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은 무엇인가?
What is Eternal Life?
이재현목사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인생을 참 보람 있게 영원히 살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영원히 사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5:12). ‘사망이 왕 노릇’이라고 하였습니다(롬5:17).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무서운 폭정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영아가 가끔 죽는 일이 있습니다. 1, 2개월도 안된 핏덩어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거짓말을 했나요? 남을 미워나 했나요? 눈을 한번 흘겨보기나 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안 범했는데 왜 죽습니까? 죄인이니까 죽는 것입니다. 언제 죄를 범했습니까? 임신한 뱃속에서 범했나요? 아닙니다. 아담이 죄지을 때 그 아기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원죄입니다. 누가 이 증거를 부인할 수 있나요? 죄를 안 지었다면 어린 아이가 살아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죽느냐 말입니다. 행위로만 죄를 논한다면 안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도, 자녀들을 옆에 두고도 “이 아이들이 잘못돼서 혹 일찍 죽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도, 병원에 가서 암으로 혹은 치명적인 어떤 병으로 한 생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나도 갑자기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드는 것도, 우리가 다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참한 삶을 벗어나서 죽음과는 관계없는 좀 새로운 어떤 삶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가 한번씩은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문제를 전혀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은 하나입니다. 너무 무딘 사람입니다. 마음이 너무 어두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덧없는 인생을 놓고 말하기를 “내가 아기가 되어서 웃고 울고 떠들 때는 시간이 기어갔다. 내가 소년이 되어 꿈속에서 살며 좋아할 때는 시간이 걸어갔다. 내가 이제 성인이 되자 시간은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드디어 어느덧 내 머리에 반백이 보이기 시작하자 시간은 날아갔다.” 성경 그대로입니다. 우리 인생이 ‘속히 가니’ 새와 ‘날아가아니다’고 하셨습니다(시90:10). 살아갈수록 자꾸 시간은 더 빨리 가고, 이상하게 인생에 대해 허무를 느끼게 되고, SNS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기반 잡고 좋은데 여행가고 맛있는 거 먹는데 나만 지지리 궁상 같고요. 뭔가 아쉬워져서 한 번쯤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입니다.
영생은 무엇인가?
그러니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이 영원히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부잣집에 있는 개만도 못할지 모릅니다. 부자집 개는 걱정 없이 태평스럽게 그 좋은 집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정승집 개는 죽어도 문상객이 줄을 있는 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개 팔자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우습습니다. 왜 밤낮없이 고민하고 진통하고 괴로워하고 조심하고 불안해하고 그래야 합니까? 사는 것이 이 땅에서의 인생뿐이라고 하면 이 인생만큼 비참하고 우스운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히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눅23:34).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 혹은 ‘구원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영생을 선물로 주셨지만, 이 선물을 하나의 길을 통해서만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영생을 얻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영생이라는 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달란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서 우리에게 주셔야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철학이니, 예술이니, 자선 사업이니 하는 것들을 통해 얻으려고 합니다. 이 영생이 자동적으로 굴러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만에요.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5:11).
그러면 영생이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이 말씀에는 영생에 대한 두 가지 의미가 나옵니다. 먼저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의 또 다른 의미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원수 된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찾아가려고 해도 찾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로 가는 문을 두드리려고 해도 두드릴 수도 없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관계가 다 해소되었습니다.
내가 해소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아들에게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무덤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담을 하나님께서 헐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화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히4:14-16).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또 맡길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인간의 첫째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전락한 죽음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연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연결되고 개선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이처럼 다시 연결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원한 그 존재가 바로 나의 존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혼자서 몸부림쳐도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이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떨어져 가면 다시 붙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사람이 아무리 붙이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붙여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목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영생의 의미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악령의 세계에서 해방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안 믿고 사신 분들은 잘 때도 동서남북을 가려서 자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팥죽을 하든 뭘 하든 왜 그걸 집 앞에 뿌려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을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내 마음대로 산다.”고 하지만, 천만에요. 성경을 보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밑에서 지배를 받든지 악령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에게는 중간지대의 휴전선이 없습니다. 진공 상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악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동서남북을 재가면서 자야하고, 이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렇게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이 좋다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벌벌 떱니다. 어떤 분이 전도 집회에 가서 복음을 듣고 목사님이 “예수님 믿기로 작정된 분은 조용히 일어서십시오.”하는데, 자기도 믿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못 일어섰다고 합니다. 만약에 일어서면 자기나 자신의 가정에 어떤 우환이 덮칠지 몰라 겁이 나서 못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많잖아요. “우리 선조 때부터 절에 나갔는데 내가 교회 나가면 우리 집에 우환이 올까봐요 자식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으면 “조상신이 도우셨네요. 조상신이 덕에 살았는데 교회에 나갔다가 조상신 노엽게 하면 안돼요”라며 예수 영접한 분은 일어서세요 하면 겁이 나서 못 일어서는 이유가 뭡니까? 악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시집을 가도 장가를 가도 악령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이 길일입니까? 궁합이 어떻게 됩니까? 아들을 낳으려면 베개를 어느 쪽으로 배고 자야 합니까?”하면서, 이렇게 불쌍하게 사는 게 세상 사람인데, 이렇게 악령의 지배를 받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데서 해방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영생, 즉 구원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동서남북 재고 자는 사람이 있습니까? 베게를 가지고 이쪽으로도 잤다가 잠이 안 오면 거꾸로 자기도 하고 맘대로 해도 하나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저는 이사를 그동안 20번 했습니다. 남들이 이사 못한다는 날에도 이사를 해보았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는데 무엇이 와서 나를 건드립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세상 떠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장례를 30번 집례를 했습니다. 목사가 되면 어떤 때는 참 힘든 경우를 당합니다. 사람들이 참 약해서 아무리 자신만만하던 사람도 마지막에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지면 목사를 찾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죽을 때도 차이가 납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인지 지옥에 가는 사람인지 벌써 표가 나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사람은 죽음의 노예이며 악령의 노예, 마귀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를 그 노예 된 상태에서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는 순간부터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지고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악령이 손들고 다 도망갑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영생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그 나라가 정말 있습니다. 날마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정말 너무 좋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크라-러시아 전쟁을 보면서 제3차세계대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잠자리가 좀 뒤숭숭해질 만큼 불안해하고, 이 세상이 앞으로도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까? 다른 나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계 곳곳이 화약고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어떤 사람은 그저 그날그날 사는 게 제일이라고 하면서 흥청망청 살다가 죽을 때 죽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믿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 먼저 가든 늦게 가든 간에 ‘야, 당신 참 복 있다’.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계14:13). 예수 믿고 죽는 사람만큼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유있게 살면 뭐합니까? 조금 오래 살면 또 뭐합니까? 그게 그겁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고 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구원만 받고 가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좀더 건강하고 좀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세상사는 것 자체가 즐겁고 기뻐서 오래 살겠다고 발버둥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좋은 곳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몇 시간 혹은 삼사일 동안 동안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무 절망했습니다. ‘안 돌아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참 오기 싫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오산리에 있는 최자실금식기도원에 지금은 소천하신 김상호 원로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 사모님은 오래 전에 천국에 가셨습니다. 사모님 생전에 남편의 선후배나 동료 목사님들이 오시면 식사를 대접하는데 지금이야 식탁이 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상에 차린 다음 방으로 들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모님은 항상 얼굴을 푹 숙인채 상을 들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얼굴이 얽고 추해서 오신 손님들이 자기 얼굴을 보면 밥맛이 떨어질까 봐 그랬다고 해요. 참 겸손하신 분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사모님으로 목사님에게는 신실한 동역자로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역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 사모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목사님 혼자 지내시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땅에서 말씀으로만 배우고 상상한 그 이상으로 너무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입이 딱 벌어져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더랍니다. 정말 수정 같이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천국 백성들이 찬양하며 담소하며 어울려있는데 얼굴마다 환한 미소 꽃이 피어나는 선남선녀들이더랍니다. 또 청청한 잎으로 우거진 과목에 실과를 따서 한 입을 베어 물때마다 표현할 수 없는 향기로운 향이 가득하더랍니다.
감격해있는 목사님에게 천사가 사모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는데 궁궐 같은 집에서 나오는 사모님은 예전에 얼굴도 못 들고 상 들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마디로 천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변해있더랍니다. 이 땅에서 승리하여 천국에서 면류관 받고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는지 그런데 이 사모님을 자세히 보니 뒤통수 있는 부분이 유달리 다이아몬드 같이 빛이 나기에 동행한 천사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이 사모님이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닌 것을 못 마땅히 여긴 친정아버지가 재떨이를 집어 던졌는데 그 맞은 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목사님이 거할 처소로 안내되었는데 너무 너무 실망을 해버렸습니다. 집에 기둥과 벽만 세워져 있고 서까래, 지붕이 덮여 있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너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그렇다고 하면서 땅으로 내려가 더욱 충성된 종이 되거라”하면서 천사가 등을 ‘탁’ 떠밀기에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오렌지같이 조그마한 지구가 보이고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도착해보니, 친구 목사들이 막 하관을 하려고 준비 중인 관 속에 들어가 벌떡 깨어나 살아나셔서 마지막까지 기도원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 죽음 이후에 주시는 축복이 너무나 좋습니다. 어디입니까? 영원한 나라, 다시는 곡하는 것도 없고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인 천국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계21:4). 그곳에 가면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습니다.
천국비자
중국, 몽골 그리고 동남아 등지에서 탈북자들이 목숨을 내어 걸고 대사관이나 외국이 학교 등지 들어가서 망명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국의 대사관에 있지만 마치 한국에 이미 와있는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의 비자를 언제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자의 도장을 ‘탁’하고 찍어주십니다. 그러니 비록 내 몸은 아직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때는 “지금 영생을 얻었다.”라고도 하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도 합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비자를 얻었다는 말이고, 앞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로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살 때 이런 준비도 못 해놓고 산다면 참 안타깝습니다. 불쌍합니다.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을 믿으라고 이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큰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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