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단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골로새서 1:21-23 2023.06.25. 主日禮拜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이 왕 노릇’이라고 하였습니다(롬5:12,17).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아도 죽음이 인간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도, 자녀들을 옆에 두고도 "이 자녀들이 잘못돼서 혹 일찍 죽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도, 병원에 가서 암으로 혹은 치명적인 어떤 병으로 한 생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나도 갑자기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도, 우리가 다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비참한 삶을 벗어나서 죽음과는 관계없는 좀 새로운 어떤 삶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가 한번씩은 다 하게 됩니다. 인생이 ‘속히 가니’ 새와 ‘날아가아니다’고 하셨습니다(시90:10). 살아갈수록 자꾸 시간은 더 빨리 가고, 이상하게 인생에 대해 허무를 느끼게 되고, 뭔가 아쉬워져서 한번쯤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입니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 혹은 ‘구원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 길은 하나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요일5:11). 인간의 노력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기쁘신 뜻대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입니다(롬5:10).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원수로 그분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관계가 화목되었습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또 맡길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둘째 영생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롬5:10). 이 말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악령의 세계에서 해방된다’는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잘 때도 동서남북을 가려서 자야 된다 등 수 백가지도 넘는 제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령의 지배를 받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데서 해방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영생, 즉 구원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는 순간부터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지고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악령이 손들고 다 도망갑니다. 예수 믿으면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셋째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마25:24). 그 나라가 정말 있습니다. 날마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정말 너무 좋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크라-러시아 전쟁 등 불확실한 시대에 어떤 사람은 그저 그날그날 사는 게 제일이라고 하면서 흥청망청 살다가 죽을 때 죽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예수 믿고 죽는 사람만큼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 다시는 곡하는 것도 없고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인 그 나라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계21:4).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믿음입니다(행16:31;엡2:8).첫째로 믿음은 믿는 것은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믿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내가 “믿겠습니다.”하고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받고도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이 밤에 침대에 누었는데도 잠이 안 와서 뒤척뒤척 할 때, 낮에 예수 믿으라고 찾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사납게 대해서 돌려보낸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리면서, ‘예수님이 누굴까?’ 하고 자꾸 생각이 납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으라고 도와주려고 하는데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믿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믿음은 나의 온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막연히 긍정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믿음을 ‘사랑’과 많이 비교합니다.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려면 그 속에 무엇이 담겨야 합니까? 마음이 담겨야죠. 마음은 자기 인격의 전부입니다. 나의 전부가 담겨야 합니다. 이것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나를 온통 그분에게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내가 믿는다면 세상에서 그분밖에는 내 마음을 바칠 분이 없습니다.
네 번째 믿음은 고백입니다. 믿음은 고백에서부터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10:10).
다섯 번째 믿음은 믿음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진실로 믿으면 자연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한 관리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여쭈며, 자신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성실히 지켰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눅18:18-22). 그러나 그는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여 더나 갔습니다(눅18:24). 부자는 돌아서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믿노라고 하면서도 내가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순종하는데서 성장합니다. 한번 예수님께서 마음을 온통 바치고 나면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혼은 장사지낼 수 없다
제73주년 6·25전쟁 기념주일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국가와 가정과 교회는 하나입니다. 대통령실과 관저 정부청사에 이교, 무속, 미신의 행위가 사라지고 이 나라에 우상의 잔재가 소멸되게 하옵소서. 행정부 수반부터 모든 국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민이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경제를 견실하게 세워주시고 제조업과 소상공인들 기업을 지켜시며, 서민들의 생계가 안정되게 하옵소서. 한국교회가 국가와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는 사명을 완수하게 하옵소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다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아마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잣대가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 정도면 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정반대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한 시간 후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떠벌리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아상을 가진 위험한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옛날에 의료 시설과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자기 판단이 꽤 옳다고들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자기 병은 자기가 안다고 했습니다. 또 그렇게 맞는 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예전과 같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몇 달이 지나 세상을 떠난 사람을 주위에서 봅니다. 그것도 70, 80 연로하신 분들이 아니라 30도 되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가 말입니다. 지금은 의술이 고도로 발달해서 정밀한 기계를 가지고 뇌파검사도 할 수 있고, 엑스레이로 뼈 안까지 들여다볼 수 있고, 내시경을 가지고 위를 샅샅이 뒤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내 건강에 대해서 내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발달된 의술의 큰 권위가 있기 때문에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자주자주 판명이 되고 보니, 자기의 몸에 대해 자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그래서 조금만 몸에 이상이 와도 “혹시 누구처럼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육체에 대해서 인간은 이와 같이 자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간에게는 고집이 하나 있습니다. 육체의 진단에 대해서는 자신을 잃어버렸으면서도, 한 가지는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영혼입니다.
사람은 육체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제발 이 시간부터 그 생각을 버리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을 동물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배부르고, 잘 입고, 즐기면 다 해결될 수 있는 동물로 여러분 자신을 비하시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왜!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끌어내립니까?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32:15). 사람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과학이 발달해서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많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혼을 부인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문명인이요, 뒤쳐진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나같이 배운 사람이, 인텔리가 어떻게 영혼 세계를 인정해”라는 교만은 이제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오히려 배웠다고 한다면 영혼의 세계에 대하여 인정을 하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동물하고 다르게 지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영혼입니다. 영혼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영혼은 절대로 장사지낼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삽니다. ‘천국’에서든지 ‘지옥에서든지 말입니다.
영혼의 진단
영혼에 대해 나는 어떻게 진단합니까?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상입니다. 영혼의 진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지고 진단하시는가 하면, 오직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십니다. 성경은 영혼을 투시하는 엑스레이요, 영혼의 뇌를 살펴보는 뇌파검사기계요, 영혼의 깊은 위를 들여다보는 내시경입니다. 이것을 펴면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영적으로 다 진단할 수 있습니다.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9-11).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영혼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부탁합니다. 성경을 모른다면 현대인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단적으로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지난 3,500년 동안 이 성경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나타났지만, 아무리 성경을 장사지내고 그 위에 무덤을 쌓고 성경이 없어졌다고 공언한다 해도 그때마다 성경은 다시 부활하고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의 손에 또 성경이 들려졌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영방송에서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제목으로 성경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공영방송도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한 해 동안 미국과 유럽에 있는 성서공회에서 출판해서 판매하는 성경만도 모두 6억 권입니다. 우리 한국과 아시아를 다 합하면 아마 7, 8억 권은 될 것입니다. 성경은 전 세계의 1,739개 언어로 변역되어, 전 인구의 97%의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세계가 이와 같은 관심을 가질까요? 다른 곳도 아닌 공영방송에서 성경에 대한 고찰을 하면서 인류 역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면서, 그 분야 또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학 예술 등 모든 부분을 망라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을 차지하더라고도 말이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나운서가 이런 멘트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가 이렇게 세계 모든 사람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인류가 공감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프로그램은 믿는 PD가 기획한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분들이 제작한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한 지난 3,500년 동안 왜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까? 뭐 다른 읽을 책이 없었나요. 위대한 철학자들이 없었나요. 그 이유는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거짓말이겠습니까? 거짓말이 그렇게 많이 팔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진지하게 살피는 사람은 성경 앞에 거꾸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영혼을 성경 속에서 진단해보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진단이 나오기 때문에 모든 인생들이 두 손 들고 맙니다.
성경을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방금 인용한 것처럼 ‘죄’라는 말입니다(롬3:23). “죄의 삯은(결과는 이라는 말입니다.) 사망이요” ‘사망’, ‘죽음’이라는 말입니다(롬6:23). ‘피’라는 용어도 자주 언급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심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전부 원색적인 표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죄, 죄!”, “죽음, 죽음!” “심판, 심판!”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킬 그런 원천적인 용어들이 왜! 성경에 자꾸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 떠난 인생은 그런 진단밖에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자꾸 거부하고 아니라고 합니다. 원색적 원천적 직설적은 본질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의사가 최첨단 의료 시설을 갖고 정밀 조사를 해서 ‘암’이라고 하는데 자기는 그것을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감기 정도라고 소화 불량 정도라고 우긴다고, 암이 감기가 되나요? 영적인 하나님의 진단이 죄요 사망이요 심판입니다. 그러니 아니라고 거부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 불쌍한 자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이렇게 원색적인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바로 가르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현대인들이 좀 더 좋아하는 용어를 쓸 수 없을까 해서 ‘죽음’이라는 말 대신에 “허무한 인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죄’라는 용어 대신에 “인간의 언약함”이라고 표현하고, ‘심판’이라는 단어는 “선하게 사는게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조금씩 돌려서 말합니다. 사람들도 ‘옳거니, 그것참 들을 만하다.’해서 다 고개를 끄덕이고 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나중에 1년, 2년이 지나도 영혼의 병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른 말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진리만이 인간의 실존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진리가 구원을 주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한 후에 ‘암’(癌)이라는 최종 판결이 나왔다면 당사자에게는 숨기면서 큰 병이 아니니 몸조리 잘하고 병원 치료를 잘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가족들에게는 지금 심각한 상태에 있으니 각별히 유의와 준비(죽음)를 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환자는 가족들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고, 가족들은 환자 앞에서는 “허허” 웃다가, 나와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잘못하면 환자는 자기가 왜 죽는지, 언제 죽는지 준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설마 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예전에 한국 의사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암이면 암이라고 당사자에게 직접 진단 결과를 말해주고 수술로 완치는 어렵지만, 그래도 수술을 해볼 것이냐, 아니면 약물로 치료할 것이냐, 방사선 치료를 할 것이냐를 선택하게 하고, 그렇게 해도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고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 서구 의사들은 덧붙이는 것이 있는데 “저, 무슨 신앙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하면서 종교를 권면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듣고 털썩 주저앉습니다마는 한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내가 죽음을 준비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 세상에 가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준비해야겠구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로 진단하고 준비를 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경이 ‘죄’, ‘죽음’, ‘심판’이라고 하는 원색적 원초적 직설적 즉 근본적인 표현을 하는 이유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
그렇기에 조금 거부감이 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진단하신 그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나옵니까?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1:21). 여기서 ‘전에’란 “예수 믿기 전에”라는 뜻입니다. 또 ‘원수가 되었던“은 누구와 원수가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마음으로’, 즉 마음 깊이, 우리 인간의 본성 깊은 데서부터 원수가 되었습니다. 겉으로만 원수가 아니고 인간의 근본에서부터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왜 원수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리적인 범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지금이 죄요 죽음이요 심판이요.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4:9).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죄요.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 형편에서 나 자신은 하나님과 마음 바닥으로부터 원수관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요점이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꼭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은 아냐. 우리 가족은 교회에 내보내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왜 !하나님과 원수까지 되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안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원수 맺은 관계로 보시는가! 아닌가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을 따라야지 자기 진단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내 기분에 따라서 좌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를 볼 때, 정상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수된 관계로 보신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입장입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살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라는 것을 수긍할 수 있습니까? 마음 바닥으로부터 원수 되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자신에게 많이 있는가요? 참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무관심하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무관심의 관계에 존재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은총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7). 하나님은 인간에게 황홀한 은총을 주십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과 은총에 대하여 인간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무관심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찾아뵙지도 않고 무관심하다는 것은 분명히 담이 쌓인 것입니다. 어떤 자식들은 부모에게 명절이 되면 혹은 생일 되면 몇 십 만원 용돈을 온라인으로 보내드리고 선물 세트를 택배로 보내 드리고서는 1년이고 10년이고 고향에 계신 부모를 찾아뵙지 않고는 “나는 자식 도리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부모 앞에는 아무리 큰 죄를 범한 자식이라도 찾아와 무릎을 꿇어야 부모가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식이 입장에서 찾아뵙지 않고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부모가 그것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아무리 잘해드려도 찾아뵙지 않는다면 불효입니다. 예전에 불효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무관심할 수가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혈육의 관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자녀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무관심한 관계가 될 수 없는데, 자신이 무관심하다면 담이 쌓인 것이죠.
또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해 적대 감정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지도 않으면서 사업이 안 되고, 자식이 속 썩이고, 뜻대로 안되면 꼭 하나님 들먹이면서 은근히 원망하고, 불평하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하면 ‘알러지’allergy, ’시니컬’cynical, ‘히스테리’hysteria, 신경질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왜 그런 마음이 생길까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부인 할 수 있습니까? 부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세상에서 큰 권력을 가진 사람과 자신이 원수가 되어 있다면 아마 잠을 잘 자지 못할 겁니다. 굉장히 불안할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라면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왜 평안이 없고 알 수 없는 공허와 허무가 밀려옵니까? 지금 이 시간에 분명히 진단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오는 공포입니다. 늘 불안과 염려가 찾아옵니다. 인정하십시오.
십자가의 자리가 지옥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다가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원수 된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경이로운 일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끝내고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 ‘이제는 그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원한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아직도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영적으로 죽어있을 동안에 하나님 편에서 나를 위해 이미 이런 일을 해주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 일을 해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 통해서 이 일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셔서 오신 분입니다. 왜 오셨나요?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된 관계를 풀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화목제물로 쓰이기 위해서 입니다. 스스로 “나는 죄 안 지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생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살던 생활 전부가 죄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손발을 묶어놓고 꼼짝을 하지 않다가 죽어도, 심지어 식물인간이 되어 10년을 살다 죽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내 조상이 ‘관비’官婢이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도 노예인 것처럼 죄인 조상 아담을 둔 우리는 여지없이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원수의 관계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겠는데 죄인은 이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를 전부 짊어지고, 그 죄 값을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 받은 고난의 동산입니다. 바로 그곳, 십자가의 자리가 지옥입니다. 내가 장차 지옥에 가서 받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하나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열고 십자가를 바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십자가를 좀 보세요.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당장 보입니다. 나를 위해 죽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믿기만 하면 금방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지구상에 있는 1/3이나 되는 25억의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마치 거짓말과 같은 그 이야기를 참말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나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 꺼내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확인하게 되고, 그것이 마음으로 전달되어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눈물 흘리게 되며,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 앞에 감격하고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져서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는 삶이 모든 크리스천들의 삶입니다.
왜! 그것을 못 봅니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완전히 다 해결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삼 일 만에 죄를 이기고 살아났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마귀를 무찌르고 살아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에게 선언합니다. “이제는 너희와 원수관계가 십자가를 통해 모두 해소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만 바라보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리려던 모든 진노를 거두고 대신 은혜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무죄선고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해주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주여, 나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를 맡깁니다. 나의 죄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주님이 다 맡아주세요. 내 인생도 이제는 전부 다 맡으세요. 오직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고 맡기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셔서 이제는 나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 하나를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돈을 가져오라거나 선행을 많이 하고 수양을 쌓으라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도 필요 없어요. 단 한 가지 “예수님이 너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기가 막힌 선물을 받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습니다.”하고 마음으로 고백만 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의 모든 죄를 말끔하게 씻어서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죄선고를 해버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인생이 평안합니다. 죄에 대한 눌림이 없이 자유한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수가 감옥에 앉았다가 대통령이 사면을 내리면 자기가 왜 나오는지도 모르고 벙벙한 채 감옥 문을 나오게 됩니다. 감옥을 나오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은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볼 때는 죄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되어 나오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더러운 것도 그대로 있고 잘못된 마음도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다 없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 값을 다 치르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붙드는데 하나님께서 용서 안 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덜 가진 것이 있어도 그렇게 평안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 죄책감이 없으니까 마음대로 죄 지어놓고 항상 주여, 잘못했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다 없어진다고 하는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들 위선자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회개와 제가 말하는 회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죄 없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죄, 죽음, 심판으로 진단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죄인을 죄없는 의인으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면 전부다 의인이 됩니다. 항상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항상 빕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왜 용서해줍니까?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신자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용서가 안 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화평하였기에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껏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종도를 구경하기 위해서 처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초행이기에 길을 알고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묻거나 약도를 받아들고 가거나 내비에 입력을 하고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가는 길을 알고 이해가 돼서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이나 약도를 보고 인터넷을 믿고 가는 것입니까? 믿고 가보니 정말 영종도 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영종도에 가는 길을 확실히 알고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믿으니 이해되는 진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여러분을 구원하고자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의 밧줄을 끝까지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1:23). 항상 기회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배우자의 성화에 못 이겨서, 혹은 자녀 때문에 아니면 극성스러운 예수쟁이 이웃 때문에, 친한 친구 때문에 이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지금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해결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평스러운 관계가 됩니다.
한 빌딩이 화재가 났는데 사람들이 모든 비상구와 출구들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자 간신히 옥상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제 119 구조대가 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바삐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지상에 그물을 쳐 놓고 뛰어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빌딩이 너무 높아서 불가능했습니다. 두 번째로 골리앗 크레인에 연결된 고가 사다리를 이용하여 한명씩 구조하려 했지만 불길이 옥상까지 치솟자 구조대원들이 접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슨 방법을 택했겠어요. 헬리콥터를 동원합니다. 이제 옥상에 있는 사람들이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헬리콥터에서 내려준 밧줄을 잡아야 합니다. 잡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잡아야 합니까? 구조대원들이 안전이 보장된 곳으로 내려줄 때까지 잡아야 합니다. 잡았어도 중간에 놓는다면 그 생명을 보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줄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5:1).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주님 오실 그날까지, 영원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이 믿음을 붙잡기를 축복합니다. 다음 주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땅의 곡식 중 첫 번째 소출인 밀을 수학 후 드리는 절기로 오늘날에는 한 해를 시작하고 반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성별하여 감사주일에 참예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예수님 믿고 하나님과 원수에서 화목하고 화평을 이룬 것에 감사합니다. 무죄를 선고받고 성전에 마음껏 나아갈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에 입성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는 믿음을 가지고 붙들고 지킬 수 있게 된 것,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정리
영혼의 진단
영혼에 대해 나는 어떻게 진단합니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영혼의 진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직 성경을 진단하십니다. 성경은 영혼을 투시하는 엑스레이요, 영혼의 뇌를 살펴보는 뇌파검사 기계요, 영혼의 깊은 위를 들여다보는 내시경입니다. ‘우리는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0-11).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영혼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입니다. 한 해 동안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과 아시아만도 7, 8억 권이 됩니다. 성경은 전 세계의 1,739개 언어로 변역되어, 전 인구의 97%가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인류 역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그 분야 또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부분을 망라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영방송서 성경을 고찰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가 이렇게 세계 모든 사람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인류가 공감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뭐 다른 읽을 책이 없었나요. 위대한 철학자들이 없었나요. 그런데 왜 말씀은 날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까요, 그 이유는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거짓말이라면 이렇게 많이 팔리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진지하게 살피는 사람은 거꾸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영혼을 성경 속에서 진단해보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진단이 나오기 때문에 모든 인생들이 두 손 들고 맙니다. 성경을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죄’라는 말입니다(롬3:23).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롬6:23). ‘심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히9:27). 너무 원색적인 표현들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도 합니다. “죄, 죄!”, “죽음, 죽음!” “심판, 심판!”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떠난 인생은 그런 진단밖에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색적은 본질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의사가 최첨단 의료 시설로 조사를 해서 ‘암’이라고 하는데 자기는 감기라고 우긴다고 암이 감기가 되나요? 영적인 하나님의 진단이 죄요 사망이요 심판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이렇게 원색적인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바로 가르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현대인들이 좀 더 좋아하는 용어를 쓸 수 없을까 해서 ‘죽음’이라는 말 대신에 “덧없는 인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죄’라는 용어 대신에 ‘인간의 언약함’이라고 표현하고, ‘심판’이라는 단어는 ‘선하게 사는게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조금씩 돌려서 말합니다. 사람들도 ‘옳거니, 그것참 들을 만하다.’해서 다 고개를 끄덕이고 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나중에 1년, 2년이 지나도 영혼의 병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른 말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진리만이 인간의 실존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국 의사들은 환자를 진단하고 암이면 당사자에게는 숨기고 가족들에게 심각한 상태에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환자는 가족들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고, 가족들은 환자 앞에서 “허허” 웃다가, 나와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지금은 암이면 암이라고 당사자에게 직접 말해주고 수술을 해도 완치는 어렵고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 서구 의사들은 덧붙이는 것이 있는데 “저, 무슨 신앙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면서 종교를 권면합니다.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털썩 주저앉았다가 한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내가 죽음을 준비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로 진단하고 준비를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 ‘죽음’,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진단은 원수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1:21).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라고 말씀합니다. 왜 원수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범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지금이 죄요 죽음이요 심판이요.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4:9).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죄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가 원수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신앙생활을 긍정적으로 보는데 하나님과 원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안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원수 맺은 관계로 보시는가! 아닌가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을 따라야지 자기 진단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내 기분에 따라서 좌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를 볼 때, 정상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자신에게 많이 있는가요? 참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무관심하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무관심의 관계에 존재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은 인간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7). 하나님은 인간에게 황홀한 은총을 주십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과 은총에 대하여 인간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무관심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아무리 잘해드려도 찾아뵙지 않는다면 불효입니다. 예전에 불효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무관심할 수가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혈육의 관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창조자요, 우리는 그의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절대로 무관심한 관계가 될 수 없는데, 자신이 무관심하다면 담이 쌓인 것이죠.
하나님 믿지도 않으면서 사업이 안 되고, 자식이 속 썩이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꼭 하나님 들먹이면서 은근히 원망하고, 불평하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에수님에 대해 뭐라고 하면 신경질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왜 그런 마음이 생길까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부인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세상에서 큰 권력을 가진 사람과 자신이 원수가 되어 있다면 아마 잠을 잘 자지 못할 겁니다. 굉장히 불안할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라면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왜 평안이 없고 알 수 없는 공허와 허무가 밀려옵니까? 지금 이 시간에 분명히 진단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오는 공포입니다. 늘 불안이 찾아옵니다. 인정하십시오.
십자가의 자리가 지옥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원수로 지내다가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원수 된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경이로운 일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그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원한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아직도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영적으로 죽어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된 관계를 풀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죄 안 지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생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살던 생활 전부가 죄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죄 없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를 전부 짊어지고, 그 죄 값을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 받은 고난의 동산입니다. 바로 그곳, 십자가의 자리가 지옥입니다. 내가 장차 지옥에 가서 받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 꺼내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확인하게 되고, 그것이 감정으로 전달되어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눈물 흘리게 되며,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 앞에 감격하고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져서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는 삶이 모든 크리스천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믿는 자에게 선언합니다. “이제는 너희와 원수관계가 십자가를 통해 모두 해소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만 바라보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리려던 모든 진노를 거두고 대신 은혜를주겠다.”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무죄선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주여, 나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를 맡깁니다. 나의 죄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주님이 다 맡아주세요. 내 인생도 이제는 전부 다 맡으세요. 오직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고 맡기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셔서 이제는 나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 하나를 요구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돈을 가져오라거나 선행을 많이 하고 수양을 쌓으라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도 필요 없어요. 단 한 가지 “예수님이 너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기가 막힌 선물을 받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습니다.”하고 마음으로 고백만 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의 모든 죄를 말끔하게 씻어서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죄선고를 해버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의롭다 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인생이 평안합니다. 죄에 대한 눌림이 없이 자유한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수에 대통령이 사면을 내리면 그가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죄가 하나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다 없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 값을 다 치르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붙드는데 하나님께서 용서 안 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덜 가진 것이 있어도 그렇게 평안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 없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면 전부다 의인이 됩니다. 항상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잘못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항상 빕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왜 용서해줍니까?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에 가끔씩 실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신자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용서가 안 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화평하였기에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껏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종도를 구경하기 위해서 처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초행이기에 길을 알고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묻거나 약도를 받아들고 가거나 내비에 입력을 하고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가는 길을 알고 이해가 돼서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인터넷을 믿고 가는 것입니까? 믿고 가보니 정말 영종도 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영종도에 가는 길을 확실히 알고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믿으니 이해되는 진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여러분을 구원하고자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의 밧줄을 끝까지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1:23). 항상 기회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서, 혹은 자녀 때문에 아니면 극성스러운 예수쟁이 이웃 때문에, 친한 친구 때문에 이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지금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해결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평스러운 관계가 됩니다.
한 빌딩이 화재가 났는데 사람들이 모든 비상구와 출구들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자 간신히 옥상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제 119 구조대가 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바삐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지상에 그물을 쳐 놓고 뛰어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빌딩이 너무 높아서 불가능했습니다. 두 번째로 골리앗 크레인에 연결된 고가 사다리를 이용하여 한명씩 구조하려 했지만 불길이 옥상까지 치솟자 구조대원들이 접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슨 방법을 택했겠어요. 헬리콥터를 동원합니다. 이제 옥상에 있는 사람들이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헬리콥터에서 내려준 밧줄을 잡아야 합니다. 잡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잡아야 합니까? 구조대원들이 안전이 보장된 곳으로 내려줄 때까지 잡아야 합니다. 잡았어도 중간에 놓는다면 그 생명을 보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줄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5:1).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주님 오실 그날까지, 영원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이 믿음을 붙잡기를 축복합니다. 다음 주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땅의 곡식 중 첫 번째 소출인 밀을 수학 후 드리는 절기로 오늘날에는 한 해를 시작하고 반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성별하여 감사주일에 참예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예수님 믿고 하나님과 원수에서 화목하고 화평을 이룬 것에 감사합니다. 무죄를 선고받고 성전에 마음껏 나아갈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에 입성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는 믿음을 가지고 붙들고 지킬 수 있게 된 것,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콜링Calling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 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끝가지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갈 때까지 예수라는 믿음의 밧줄을 잡아야 합니다. 중간에 놓으면 안 됩니다. 믿어도 어설프게 믿었던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과 성도들의 헌신된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나도 다녀 보았는데 세상하고 똑같아 똑같아”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을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잡을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바로 지금인지도 모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난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어디서 배웠습니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십니다.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무거운 짐을 많이 짊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간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세상에서 나쁜 죄를 범해서 항상 마음에 고통받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게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마음에 받아들이십시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제 결단하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영접기도a welcoming prayer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된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우리가 듣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날 때부터 마음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며 날 때부터 하나님께 무관심하며, 적대감정을 갖는 인간이었습니다. 오직 내 육신의 쾌락과 향락을 위해서 나의 아까운 생애를 소모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처절한 존재로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이 모든 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살아나셔서 드디어 우리를 향해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모든 죄를 용서받으며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갖는다.’고 가르쳐주시 것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 이 관계를 회복시켜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지금 이 기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자리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만이 영혼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진단 결과 죄, 죽음, 심판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고, 영광을 올리지도 않는 이들이 속히 교회로 인도되어서, 하나님의 진단인 자기 영혼이 죄, 죽음, 심판임을 듣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원수의 증거 가운데 무관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해, 주님 몸인 교회에 대해, 주님이 지체로 맺어준 성도에 대해, 주님 일에 대해, 사명(은사)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것 회개합니다. 관심과 헌신과 증보로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원수에서 예수님 믿음으로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천국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그날까지 믿음을 굳게 잡게 하옵소서. 이 놀라운 은혜를 받는 믿음을 가지고 붙들고 지킬 수 있게 된 것에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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