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누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가?"(눅 7:11-17) 이재현목사(23.06.18)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6. 18. 22:03

누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가?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누가복음 7:11-17 2023.06.18. 主日禮拜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타 종교의 모방을 불허하는 독특한 면을 가진 분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셨습니다(14:9). 예수님은 인간과 만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참고/1:14;1:15). 우리는 누구를 보고 믿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정말 알고 싶다면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참고/1:3;1:14).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참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참믿음을 올바로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요일4:2).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기는 하지만 죄가 없는 분입니다(요일3:5). 예수님은 우리처럼 부정모혈父情母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되 마리아를 통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초라한 인간으로 오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19:10;12:47.참고/11:19;2:7;2:6-7). 우리가 당할 영원한 죽음인 지옥의 형벌을 당하는 인생들을 보실 때 너무나 불쌍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3:16). ‘이처럼극진히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Only Son'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신 참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첫째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전부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죽음을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합니다(3:13). 우리가 지옥에 가서 받게 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통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27:46).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곳이 지옥입니다.

 

예수님 죽음이 나하고 무슨 관계인가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5:15). 아담이 온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가 죄를 지었으므로 나도 같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도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지만, 인류를 대표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습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이 강수처럼 쏟아져 들어옵니다. 지금까지 구멍이 나 있던 내 마음에 시원한 하늘의 강수가 가득 찹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의 태양의 빛이 은빛처럼 반짝이면서 내 가슴속에 놀라운 하늘의 찬송이 울려퍼집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덮어줄 수 있고 그를 대신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어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둘째 부활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끝났다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던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셨지만 죽음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죄인만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3:15).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크리스천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부활을 믿는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불신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신자인가 할 때 예수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을 마음에 확증할 수만 있다면 이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지만 과학적인 증거만 주셨습니다. 아무리 거짓말 같은 일이라도 세 사람 내지 네 사람이 직접 보았다고 하면 그것은 과학적인 증명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믿으야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 부활 사실을 너무나 과학적으로 잘 증거되어 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열 명, 백 명도 아니고 오백 명입니다(고전15:6). 심지어 예수님을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지 못해서 나중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28:11-15).

 

영화 벤허’Ben-Hurs의 원작자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월리스Lew Wallace,1827-1905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친구이자,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잉거솔Robert Ingersoll과 둘이서 유럽과 미국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부 모아가지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많이 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 내가 도무지 이 진실을 거짓말이라고 할 자신이 없구나하고 펜대를 집어던지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여, 예수님은 나의 구주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셋째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 우리가 과거에는 원수였는데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새벽이든 밤중이든 찾아와도 사람들처럼 짜증내지 않으시고, “아버지!”하고 부르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고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또 얻은 것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영생입니다. 장차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사가 와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때 나를 반기며 , 누구누구 왔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소개해줄 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생각만 해도 춤을 추도록 좋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가난해도 좋고 어떤 때는 남에게 욕을 먹어도 좋고 죽게 되어도 웃으면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참 기가 막힌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를 축복합니다.

 

죽음의 노예가 된 인간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어떤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인생이 수학문제처럼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회의懷疑를 갖던 중 결국에는 중이 되기로 결심하고 절간에 들어갔습니다. 중이 되고 보니 불교계가 썩어도 너무 썩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순수하고 깨끗한 불교대학을 세워보려고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꾼들에게 속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도관에게 목탁과 불경을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성경책을 넣어 주었습니다. “좋다! 지피지 기면 백전백승이라! 감옥에 있는 동안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기독교인들을 불자로 만들어 보리라.” 다짐을 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경에 이런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석가모니Śakyamuni,釋迦牟尼에게 코타미라고 하는 과부가 죽은 외아들을 안고 와서는 살려달라고애원을 하였습니다. 이에 석가모니가 마을로 내려가서 삼사 대까지 죽은 자 없는 집안에 가서 볍씨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삼사대가 죽음을 보지 않고 다 살아 있는 집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죽음이란 그녀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찾아옴을 깨닫게 해주면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이치거늘 난들 어찌 하리요이렇게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스님은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어 가는데 마음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렇게도 찾고 찾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데 그곳에도 불경에 나온 코타미같이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스님은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아나셨다.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마침내 목사님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 가는 불자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락의 불나비」라는 책을 써 불교도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김상화 목사님의 애기입니다.

 

김상화 목사님이 스님 시절 감옥에서 읽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말씀이 우리가 이 아침에 봉독한 본문입니다. 김상화 목사님이 깨달았던 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김상화 목사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관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영원히 사는 영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6:23).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숨길 수 없는 증거입니다. 전 인류가 죄로 인해 한번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죽음과 반대되는 말은 생명입니다. 그것도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죽음과는 관계없는 존재에 속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 속수무책인 죄인인 인간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없는 존재 의인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본문에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합니다(6:23).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엉뚱한 데서 영원히 사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극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참 영생의 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믿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인생을 참 보람 있게 영원히 살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영원히 사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5:12). ‘사망이 왕 노릇이라고 하였습니다(5:17).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무서운 폭정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죄로 인해서 왔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든 없든 죽음이 우리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인류 조상 아담이 죄를 지었으면 지었지 죄짓는 자리에 내가 언제 있었느냐고 항변하던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런 죄 지은 일이 없다고 버티던 자들이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누구나 죽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니까요. 왜 사람들이 죽음의 벌을 받습니까? 죽음은 죄인만 가는 곳입니다. 의인은 죽지 않습니다. 죄를 안 지었다면 그 벌도 임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죽느냐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공범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영아가 가끔 죽는 일이 있습니다. 1, 2개월도 안된 핏덩어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거짓말을 했나요? 남을 미워나 했나요? 눈을 한번 흘겨보기나 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안 범했는데 왜 죽습니까? 죄인이니까 죽는 것입니다. 언제 죄를 범했습니까? 임신한 뱃속에서 범했나요? 아닙니다. 아담이 죄지을 때 그 아기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원죄입니다. 누가 이 증거를 부인할 수 있나요? 죄를 안 지었다면 어린 아이가 살아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죽느냐 말입니다. 행위로만 죄를 논한다면 안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도, 자녀들을 옆에 두고도 이 아이들이 잘못돼서 혹 일찍 죽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도, 병원에 가서 암으로 혹은 치명적인 어떤 병으로 한 생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나도 갑자기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드는 것도, 우리가 다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참한 삶을 벗어나서 죽음과는 관계없는 좀 새로운 어떤 삶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가 한번씩은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문제를 전혀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은 하나입니다. 너무 무딘 사람입니다. 마음이 너무 어두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덧없는 인생을 놓고 말하기를 내가 아기가 되어서 웃고 울고 떠들 때는 시간이 기어갔다. 내가 소년이 되어 꿈속에서 살며 좋아할 때는 시간이 걸어갔다. 내가 이제 성인이 되자 시간은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드디어 어느덧 내 머리에 반백이 보이기 시작하자 시간은 날아갔다.” 성경 그대로입니다. 우리 인생이 속히 가니새와 날아가아니다고 하셨습니다(90:10). 살아갈수록 자꾸 시간은 더 빨리 가고, 이상하게 인생에 대해 허무를 느끼게 되고, SNS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기반 잡고 좋은데 여행가고 맛있는 거 먹는데 나만 지지리 궁상 같고요. 뭔가 아쉬워져서 한 번쯤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입니다.

영생은 무엇인가?

 

그러니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이 영원히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부잣집에 있는 개만도 못할지 모릅니다. 부자집 개는 걱정 없이 태평스럽게 그 좋은 집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정승집 개는 죽어도 문상객이 줄을 있는 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개 팔자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우습습니다. 왜 밤낮없이 고민하고 진통하고 괴로워하고 조심하고 불안해하고 그래야 합니까? 사는 것이 이 땅에서의 인생뿐이라고 하면 이 인생만큼 비참하고 우스운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히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23:34).

 

영생영원히 사는 것’, 혹은 구원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영생을 선물로 주셨지만, 이 선물을 하나의 길을 통해서만 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영생을 얻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영생이라는 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는 것입니다. 사람이 달란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서 우리에게 주셔야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철학이니, 예술이니, 자선 사업이니 하는 것들을 통해 얻으려고 합니다. 이 영생이 자동적으로 굴러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만에요.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5:11).

 

그러면 영생이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이 말씀에는 영생에 대한 두 가지 의미가 나옵니다. 먼저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의 또 다른 의미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4).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원수 된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찾아가려고 해도 찾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로 가는 문을 두드리려고 해도 두드릴 수도 없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관계가 다 해소되었습니다.

내가 해소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아들에게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무덤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담을 하나님께서 헐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화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4:14-16).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또 맡길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인간의 첫째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전락한 죽음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연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연결되고 개선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이처럼 다시 연결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원한 그 존재가 바로 나의 존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혼자서 몸부림쳐도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이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번 떨어져 가면 다시 붙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사람이 아무리 붙이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붙여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목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영생의 의미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악령의 세계에서 해방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안 믿고 사신 분들은 잘 때도 동서남북을 가려서 자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팥죽을 하든 뭘 하든 왜 그걸 집 앞에 뿌려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을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내 마음대로 산다.”고 하지만, 천만에요. 성경을 보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밑에서 지배를 받든지 악령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에게는 중간지대의 휴전선이 없습니다. 진공 상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악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동서남북을 재가면서 자야하고, 이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렇게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이 좋다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벌벌 떱니다. 어떤 분이 전도 집회에 가서 복음을 듣고 목사님이 예수님 믿기로 작정된 분은 조용히 일어서십시오.”하는데, 자기도 믿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못 일어섰다고 합니다. 만약에 일어서면 자기나 자신의 가정에 어떤 우환이 덮칠지 몰라 겁이 나서 못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많잖아요. “우리 선조 때부터 절에 나갔는데 내가 교회 나가면 우리 집에 우환이 올까봐요 자식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으면 조상신이 도우셨네요. 조상신이 덕에 살았는데 교회에 나갔다가 조상신 노엽게 하면 안돼요라며 예수 영접한 분은 일어서세요 하면 겁이 나서 못 일어서는 이유가 뭡니까? 악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시집을 가도 장가를 가도 악령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이 길일입니까? 궁합이 어떻게 됩니까? 아들을 낳으려면 베개를 어느 쪽으로 배고 자야 합니까?”하면서, 이렇게 불쌍하게 사는 게 세상 사람인데, 이렇게 악령의 지배를 받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데서 해방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영생, 즉 구원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동서남북 재고 자는 사람이 있습니까? 베게를 가지고 이쪽으로도 잤다가 잠이 안 오면 거꾸로 자기도 하고 맘대로 해도 하나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사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저는 이사를 그동안 20번 했습니다. 남들이 이사 못한다는 날에도 이사를 해보았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는데 무엇이 와서 나를 건드립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세상 떠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장례를 30번 집례를 했습니다. 목사가 되면 어떤 때는 참 힘든 경우를 당합니다. 사람들이 참 약해서 아무리 자신만만하던 사람도 마지막에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지면 목사를 찾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죽을 때도 차이가 납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인지 지옥에 가는 사람인지 벌써 표가 나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사람은 죽음의 노예이며 악령의 노예, 마귀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를 그 노예 된 상태에서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는 순간부터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지고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악령이 손들고 다 도망갑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영생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그 나라가 정말 있습니다. 날마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정말 너무 좋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크라-러시아 전쟁을 보면서 제3차세계대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잠자리가 좀 뒤숭숭해질 만큼 불안해하고, 이 세상이 앞으로도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까? 다른 나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계 곳곳이 화약고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어떤 사람은 그저 그날그날 사는 게 제일이라고 하면서 흥청망청 살다가 죽을 때 죽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믿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 먼저 가든 늦게 가든 간에 , 당신 참 복 있다’.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14:13). 예수 믿고 죽는 사람만큼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유있게 살면 뭐합니까? 조금 오래 살면 또 뭐합니까? 그게 그겁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고 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구원만 받고 가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좀더 건강하고 좀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세상사는 것 자체가 즐겁고 기뻐서 오래 살겠다고 발버둥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좋은 곳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몇 시간 혹은 삼사일 동안 동안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무 절망했습니다. ‘안 돌아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참 오기 싫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오산리에 있는 최자실금식기도원에 지금은 소천하신 김상호 원로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 사모님은 오래 전에 천국에 가셨습니다. 사모님 생전에 남편의 선후배나 동료 목사님들이 오시면 식사를 대접하는데 지금이야 식탁이 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상에 차린 다음 방으로 들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모님은 항상 얼굴을 푹 숙인채 상을 들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얼굴이 얽고 추해서 오신 손님들이 자기 얼굴을 보면 밥맛이 떨어질까 봐 그랬다고 해요. 참 겸손하신 분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사모님으로 목사님에게는 신실한 동역자로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역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 사모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목사님 혼자 지내시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땅에서 말씀으로만 배우고 상상한 그 이상으로 너무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입이 딱 벌어져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더랍니다. 정말 수정 같이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천국 백성들이 찬양하며 담소하며 어울려있는데 얼굴마다 환한 미소 꽃이 피어나는 선남선녀들이더랍니다. 또 청청한 잎으로 우거진 과목에 실과를 따서 한 입을 베어 물때마다 표현할 수 없는 향기로운 향이 가득하더랍니다.

 

감격해있는 목사님에게 천사가 사모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는데 궁궐 같은 집에서 나오는 사모님은 예전에 얼굴도 못 들고 상 들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 마디로 천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변해있더랍니다. 이 땅에서 승리하여 천국에서 면류관 받고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는지 그런데 이 사모님을 자세히 보니 뒤통수 있는 부분이 유달리 다이아몬드 같이 빛이 나기에 동행한 천사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이 사모님이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닌 것을 못 마땅히 여긴 친정아버지가 재떨이를 집어 던졌는데 그 맞은 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목사님이 거할 처소로 안내되었는데 너무 너무 실망을 해버렸습니다. 집에 기둥과 벽만 세워져 있고 서까래, 지붕이 덮여 있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너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그렇다고 하면서 땅으로 내려가 더욱 충성된 종이 되거라하면서 천사가 등을 떠밀기에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오렌지같이 조그마한 지구가 보이고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도착해보니, 친구 목사들이 막 하관을 하려고 준비 중인 관 속에 들어가 벌떡 깨어나 살아나셔서 마지막까지 기도원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 죽음 이후에 주시는 축복이 너무나 좋습니다. 어디입니까? 영원한 나라, 다시는 곡하는 것도 없고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인 천국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21:4). 그곳에 가면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습니다.

 

천국비자

지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을 반대하던 한민통등 많은 해외의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면서 고국을 방문하지 못합니다. 친북 좌익 세력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있는 한민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초대 의장이었는데 이로 인해 1980년 조작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때 사형을 구형 당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도 이 단체를 풀어 주지 않아 고국 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후 이 단체의 용공성을 해제하여 올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나서 일본에서 몇 십 년 살다가, 한국 정부가 이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해줘서 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비자를 받고 나면 잠을 못 자고 정신이 없습니다. 너무 기쁘기 때문입니다. 비자를 받고 나면 그 사람은 한국에 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중국, 몽골 그리고 동남아 등지에서 탈북자들이 목숨을 내어 걸고 대사관이나 외국이 학교 등지 들어가서 망명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국의 대사관에 있지만 마치 한국에 이미 와있는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의 비자를 언제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자의 도장을 하고 찍어주십니다. 그러니 비록 내 몸은 아직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때는 지금 영생을 얻었다.”라고도 하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도 합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비자를 얻었다는 말이고, 앞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로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살 때 이런 준비도 못 해놓고 산다면 참 안타깝습니다. 불쌍합니다.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을 믿으라고 이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큰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주십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2:8).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16:31).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은 믿는 것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10:17). 무엇을 듣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것도 이미 믿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믿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합니다.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믿음은 누구의 선물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열어주셔서 믿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안 됩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이 메시지를 들을 때에 누가 뒤에서 돕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믿을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열심히 돕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목사님, 참 이상해요, 제가 예수를 믿다니 참 이상해요, 제가 어떻게 믿었는지 몰라요.”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믿었는지 자신도 모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뒤에서 내가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내가 믿겠습니다.”하고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데도 끝까지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이런 경우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주위의 이웃들이 자꾸 예수님 믿으라고 찾아와서 강요합니다. 우연히 버스 안에서 옛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너 교회 나가라.”고 말합니다. 이상하게 주변에 온통 예수 믿으라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고 불평했던 적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웃을 통해서, 내 형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열라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꾸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때 그 말에 귀를 막아버리면 큰일 납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안 와서 뒤척뒤척 할 때, 낮에 예수 믿으라고 찾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사납게 대해서 돌려보낸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리면서, ‘예수님이 누굴까?’ 하고 자꾸 생각이 납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꾸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생기는 것이지, 나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끝까지 반대합니다. 이런 사람을 제가 많이 봤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해주시려고 믿으라고 할 때 안 믿었을까?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이 완고할까? 명문학교 나온 것이 하나님나라와 바꿀 만한 것일까? 좋은 직업으로 돈 많이 번다는 것이 영원한 영생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가? 머리가 좋다는 것이 하나님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으라고 도와주려고 하는데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믿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믿음은 나의 온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막연히 긍정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믿음을 사랑과 많이 비교합니다.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려면 그 속에 무엇이 담겨야 합니까? 마음이 담겨야죠. 마음은 자기 인격의 전부입니다. 나의 전부가 담겨야 합니다.

 

이것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나를 온통 그분에게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머리로만 알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났지, 나도 그거는 다 알아.’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막연히 지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자기를 온전히 주는 것입니다.

 

남자 분들 혹시 이런 여자를 사랑해보았습니까? “나 당신 사랑해요.”하면서도 정서진 같은 곳에서 좀 만나자고 하면 아이, 다음에 만나요.” 합니다. 그래서 커피숍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남자가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돈이 없는 걸 알면서도 남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커피 값도 없어서 여자한테 돈을 얻어서 낼까?” 하고 모른 척합니다. 그리고 결혼 얘기가 나오면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습니다. 프로포즈를 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 여자분은 어떤 상태입니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안가니까 대답을 못하는 게 아닙니까? 진짜 마음이 있으면 밤 12시에 나오라고 해도, 엄마, 아빠가 아무리 빗장을 질러놔도 나갑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까? 뭐 다른 것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내가 믿는다면 세상에서 그분밖에는 내 마음을 바칠 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믿음입니다.

 

네 번째 믿음은 고백입니다. 믿음은 고백에서부터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10:10).

 

다섯 번째 믿음은 믿음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진실로 믿으면 자연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영국의 어떤 술집 주인이 전도집회에 참석해서 복음을 듣고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서 나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벌떡 일어나 앞에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자기 술집 앞에 간판을 하나 붙였는데, “나 엊저녁에 예수 믿었소. 오늘부터 술집 영업 안 합니다.”하고 써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한 부자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여쭈었습니다(18:18). 그도 영생 구원에 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계명에 나와 있는 말씀을 전하자 부자는 자신 있게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답하였습니다(18:20-21). 이에 예수님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18:22). 그러나 그는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여 더나 갔습니다(18:24).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18:24-25). 부자는 돌아서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믿노라고 하면서도 내가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와 같이 완전히 돌아서는 변화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엉터리 믿음이라든지 믿음이 너무 어린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하는데서 성장합니다. 한번 예수님께서 마음을 온통 바치고 나면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 이상 좋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이 믿음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영생받은 자에게 주시는 픙성한 복

 

죄 용서

영생과 함께 하나님이 나누어주시기로 한 풍성한 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5:1). 완전히 의롭다는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만큼 깨끗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죄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전히 나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해 준 예수님을 보시고 나의 죄를 무조건 없는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가 갑자기 8.15 특별사면을 받고 나올 때는 사형수가 그만큼 깨끗해졌기 때문에 특사를 받은 겁니까? 아니면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입니까?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해서 내보내 버리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아직도 사람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는 염두에 두지를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특사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깨끗해졌느냐, 깨끗해지지 않았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무조건 예수를 믿는다는 그 조건 하나만 보시고는 무조건 용서해주십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십니다.

 

과거의 죄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죄입니까? 인류 조상 아담의 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죄입니다. 이러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현재의 죄도 회개할 때 용서하시며, 미래의 죄도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0,1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

 

예수님 믿고 나서도 내가 약해서 어쩔 때는 죄를 많이 짓기도 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답은 하나입니다. 회개하면 다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나에게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아들이 부모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또 하고 한다고 해서 호적에서 뽑아버리겠습니까? “호적 파가라 이 놈아그리고는 호적 파 보내는 부모가 있습니까? 그런 법이 없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앞으로는 끝까지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다는 말은 끝까지 용서받는다는 말입니다. 보장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하지 말라는데도 아들이 자꾸 하면 가금씩 부모가 화가 나서 때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호적에서 뽑아내고 좇아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건 부모가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3:12)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12:9)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12:9).

 

하나님의 자녀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참고/4:6). 하나님에게는 독생 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셋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데, 어느 정도로 지키시느냐 하면, 악한 자, 악령, 마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강하게 지키십니다. 사랑이 있는 아버지가 자녀를 안 지키겠습니까? 사랑이 많은 어머니가 얼마나 자녀를 걱정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젖을 먹이는 어미만큼 늘 자식을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머니도 가끔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전에 잠실에 있는 한 목욕탕에서 불이 났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하고 있다가, 불이 났다고 하니까 아이들은 내버려 두고 엄마만 밖으로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사람들은 비난할지 모르지만, 뜨거워서 못 견디면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6.25 전쟁 피난 길에 애를 업고 나온다는 게 베개를 없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사랑도 사실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얼마나 자식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다음에야 얼마나 잘 보호해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이 평안합니다. 걱정 근심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걸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정리

 

죽음의 노예가 된 인간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어떤 선생님이 인생의 허무를 해결하기 위해 속세를 떠나 절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불교계가 너무 썩을 것을 보고, 직접 불교대학을 세우기 위해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교도관에게 불경을 요청했는데 어찐 된 일인지 성경을 넣어 주는 것입니니다. “좋다! 지피지 기면 백전백승이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기독교인들을 불자로 만들어 보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불경의 한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Śakyamuni,釋迦牟尼에게 코타미라고 하는 과부가 죽은 외아들을 안고 와서는 살려달라고애원을 하였습니다. 이에 석가모니가 마을로 내려가서 삼사 대까지 집안에 죽은 자 없는 집에 가서 볍씨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석가모니는 그녀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이치거늘 난들 어찌 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스님이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어 가는데 마음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진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누가복음 차례가 되었는데 그곳에도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행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스님은 그렇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아나셨다.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마침내 목사님이 되어 불자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극락의 불나비」의 저자 김상화 목사님의 애기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분이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사람 힘으로는 영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6:23).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숨길 수 없는 증거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죽음이 없는 존재 의인이신 분 바로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합니다(6:23). 그런데 불행하게도 엉뚱한 데서 영원히 사는 길을 찾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영생의 길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은 죽음의 노예라는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이 왕 노릇이라고 하였습니다(5:12,17).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아도 죽음이 우리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영아가 가끔 죽는 일이 있습니다. 무슨 죄가 있나요? 그러나 죄인이기에 죽는 것입니다. 언제 죄를 범했습니까? 엄마 뱃속에서요 아닙니다. 아담이 죄지을 때 그 아기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누가 이 증거를 부인할 수 있나요? 행위로만 죄를 논한다면 안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도, 자녀들을 옆에 두고도 "이 자녀들이 잘못돼서 혹 일찍 죽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도, 병원에 가서 암으로 혹은 치명적인 어떤 병으로 한 생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나도 갑자기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도, 우리가 다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참한 삶을 벗어나서 죽음과는 관계없는 좀 새로운 어떤 삶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가 한번씩은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너무나 어두운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이 속히 가니새와 날아가아니다고 하셨습니다(90:10). 살아갈수록 자꾸 시간은 더 빨리 가고, 이상하게 인생에 대해 허무를 느끼게 되고, 뭔가 아쉬워져서 한번쯤 몸부림을 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입니다.

 

영생은 무엇인가?

 

그러니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이 영원히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부잣집에 있는 개만도 못할지 모릅니다. 왜 밤낮없이 고민하고 진통하고 괴로워하고 조심하고 불안해야 합니까? 사는 것이 이 땅에서의 인생뿐이라고 하면 이 인생만큼 비참하고 우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것입니다(참고/23:34).

영생영원히 사는 것’, 혹은 구원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사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 길을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노력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기쁘신 뜻대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5:11).

 

그러면 영생이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이 말씀에는 영생에 대한 두 가지 의미가 나옵니다. 먼저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의 또 다른 의미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4).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첫째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원수로 그분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살아나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관계가 화목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4:14-16).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또 맡길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영원히 사는 분입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그분과 죄로 끊어졌던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로 다시 연결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원한 그 존재가 바로 나의 존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영생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악령의 세계에서 해방된다는 말입니다. 불신자들엔 잘 때도 동서남북을 가려서 자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팥죽을 하든 뭘 하든 왜 그걸 집 앞에 뿌려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이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시집을 가도 장가를 가도 악령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이 길일입니까? 궁합이 어떻게 됩니까?”하면서, 이렇게 불쌍하게 사는 게 세상 사람인데, 이렇게 악령의 지배를 받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데서 해방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영생, 즉 구원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는데 무엇이 와서 나를 건드립니까?

 

장례를 집례하다보면 천국에 가는 사람인지 지옥에 가는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사람은 죽음의 노예이며 악령의 노예, 마귀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를 그 노예 된 상태에서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는 순간부터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지고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악령이 손들고 다 도망갑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셋째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정말 있습니다. 날마다 그 나라를 생각하면 정말 너무 좋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크라-러시아 전쟁을 보면서 제3차세계대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잠자리가 좀 뒤숭숭해질 만큼 불안해하고, 이 세상이 앞으로도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까? 다른 나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계 곳곳이 화약고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어떤 사람은 그저 그날그날 사는 게 제일이라고 하면서 흥청망청 살다가 죽을 때 죽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14:13). 예수 믿고 죽는 사람만큼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고 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구원만 받고 가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좀더 건강하고 좀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세상사는 것 자체가 즐겁고 기뻐서 오래 살겠다고 발버둥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좋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몇 시간 혹은 삼사일 동안 동안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무 절망했습니다. ‘안 돌아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참 오기 싫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 죽음 이후에 주시는 축복이 너무나 좋습니다. 어디입니까? 영원한 나라, 다시는 곡하는 것도 없고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인 그 나라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21:4). 그곳에 가면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믿음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2:8).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16:31).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집안 식구들도 예수님을 예수님을 믿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믿음은 믿는 것은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믿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합니다.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내가 믿겠습니다.”하고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받고도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이 밤에 침대에 누었는데도 잠이 안 와서 뒤척뒤척 할 때, 낮에 예수 믿으라고 찾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사납게 대해서 돌려보낸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리면서, ‘예수님이 누굴까?’ 하고 자꾸 생각이 납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꾸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해주시려고 믿으라고 할 때 안 믿었을까?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이 완고할까? 명문학교 나온 것이 하나님나라와 바꿀 만한 것일까? 좋은 직업으로 돈 많이 번다는 것이 영원한 영생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가? 머리가 좋다는 것이 하나님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으라고 도와주려고 하는데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믿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믿음은 나의 온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막연히 긍정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믿음을 사랑과 많이 비교합니다.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려면 그 속에 무엇이 담겨야 합니까? 마음이 담겨야죠. 마음은 자기 인격의 전부입니다. 나의 전부가 담겨야 합니다. 이것처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나를 온통 그분에게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내가 믿는다면 세상에서 그분밖에는 내 마음을 바칠 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믿음입니다.

 

네 번째 믿음은 고백입니다. 믿음은 고백에서부터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10:10).

 

다섯 번째 믿음은 믿음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진실로 믿으면 자연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믿음은 순종하는데서 성장합니다. 한번 예수님께서 마음을 온통 바치고 나면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 이상 좋은 것이 없습니다.

 

영생받은 자에게 주시는 풍성한 복

 

영생과 함께 하나님이 나누어주시기로 한 풍성한 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 용서를 받습니다.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5:1). 완전히 의롭다는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만큼 깨끗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죄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전히 나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해 준 예수님을 보시고 나의 죄를 무조건 없는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과거의 죄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죄입니까? 인류 조상 아담의 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죄입니다. 이러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현재의 죄도 회개할 때 용서하시며, 미래의 죄도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0,1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앞으로는 끝까지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다는 말은 끝까지 용서받는다는 말입니다. 보장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하지 말라는데도 아들이 자꾸 하면 가금씩 부모가 화가 나서 때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호적에서 뽑아내고 좇아내지는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3:12/참고/12:9).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참고/4:6). 하나님에게는 독생 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데, 어느 정도로 지키시느냐 하면, 악한 자, 악령, 마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강하게 지키십니다. 사랑이 있는 아버지가 자녀를 안 지키겠습니까? 사랑이 많은 어머니가 얼마나 자녀를 걱정합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으로 우리를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6.25 전쟁 피난 길에 애를 업고 나온다는 게 베개를 없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사랑도 사실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얼마나 자식을 보호하려고 애를 씁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다음에야 얼마나 잘 보호해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이 평안합니다. 걱정 근심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걸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결론

 

지금 예수님 믿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다시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을 듣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의 아무도 오늘 오후의 일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영생을 소유하여 장차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마음을 여세요. 그리고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 시간부터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요 하나님인 것을 믿고 내 마음 전부를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하는 진실한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예수님께 완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영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새로운 인생을 결단하고 새로운 출발을 합시다. 내가 아무리 젊어도 내 인생을 내가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합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마귀의 역사는 물러갑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상 대적하지 못하게 방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상 우리를 감히 해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함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제 이들이 영적으로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남은 생을 전부 주님께 의탁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힘차게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지금 해결 받아야 합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안 염려 근심 걱정 비관은 사망의 왕 마귀가 죽음으로 공격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한 길 예수님만 믿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 믿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는 것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믿음은 나의 온 마음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돌아서는 것입니다. 믿음의 첫째가 듣는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주일 성수 예배 생활을 통해 말씀 듣는 것을 사수하게 하옵소서.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