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요한복음 13:34-35 2023.07.09. 主日禮拜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7-12)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치기 위해, 한 해 세 번 있는 추수기에 맞춰 3대 절기를 제정하셨습니다. 겨울 내내 자란 보리 첫 이삭을 패는 초봄이 되면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Bread(이 절기 시작 전날이 출애굽한 날을 기염하는 ‘유월절’Passover)과 봄부터 시작해서 보리를 추수하는 늦여름이 되면 ‘칠칠절’Feast of Weeks(‘맥추절’Feast of Harvest)과 늦가을 그동안 열심히 가꾼 감람유,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들을 풍성하게 소출 하는 연말 ‘초막절’feast of booths(‘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참고/대하8:13).
첫째는 무엇을 감사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기적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로 지킨 것입니다. 그 후 일 주일동안 무교절로 지키며,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 맥추절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서, 첫 번째 가장 먼저 수학한 밀을 하나님께 드렸던 절기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먹는 것 하나 하나, 마시는 물 한 방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맥추감사주일 올해 반년 동안도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놓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 길에 홀로 두지 않으신 것에 감사>. 초막절만 되면 산과 들로 가서 나가 나뭇가지를 엮어 장막 즉 ‘텐트’tent를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1주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기거하며, 과거 출애굽 이후 40년 무서운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셨는가를 회상하고 큰 은혜에 감사했습니다(참고/시107:4-7). 누구나 한번쯤 인생의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감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명절을 지킬 때마다 남자들은 하나님 앞에 와서 얼굴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이 제외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유월절 어린 양과 맥추절에 일용할 양식과 초막절 초막에서 함께 했습니다. 가족 모두 참예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 내가 있는 곳이 이태원 압사 현장이 될지 모르는데 지금 아무 사고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요 그것에 감사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5:18). 누구도 예외 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물을 들고 나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차례 절기를 통해 감사를 드릴 때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입의 감사와 동시에 마음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재물과 쉽게 밀착된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물질에 집중하면 자연히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게 되어 하나님을 섬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4). 그래서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를 받으시기 위해 빈 손들고 나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물을 손에 들고나오면 그 예물 때문에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풍성한 소출을 원한다면 많이 심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고후9:6). 내가 얼마나 심느냐의 문제는 곧 내가 얼마나 거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여수에 있는 '애양원'은 114년 전 선교사님이 나병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세운 시설입니다. 애양원은 주일예배외 공예배와 기도회 등에 출석 성도가 같은 한국 유일의 교회입니다. 맥추감사와 추수감사 주일이면 수 천만 원 이상의 감사 예물을 드립니다. 여수지방 400여 교회 가운데 40개가 애양원 나병 환자분들 헌금으로 세워졌습니다. 얼굴과 손발이 뒤틀리고 삶에 소망을 잃은 나병 환자에게 무슨 감사가, 그 손에 무슨 예물이 들려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영생이 가장 큰 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성하지 않은 몸으로 일하며 번 돈으로 십일조는 물론이고 감사 예물을 선교 헌금을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이 담긴 예물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진정 구원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험한 광야 같은 세상 살 동안 도와주시고, 이 불확실한 시대 하루하루 생명을 강건하게 지켜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에게 진정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구약에 기록된 두 가지 사랑
구약 성경에 나타난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묶어 말한다면 첫 번째는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우리의 하나님 변함없으시는 하나님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인 것 같이 우리도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무릇 구약뿐만 아니요. 예수님께서도 ‘37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크고 첫째 되는 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7-38.참고/막12:2,30). 예수님께서는 여러번 강조하여 인생의 첫 번째 하여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두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흔히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말씀 한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맥추감사주일예배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절에 사회적 약자인 ‘성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신16:11.14).
“21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1-24). “9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9-10). 제가 어릴 때에도 여름에 보리를 가을에 벼를 추수할 때 한 귀퉁이는 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마를 거둘 때도 밭 한 고랑은 남겨 놓았습니다. 동네에 가난한 분들을 위해서입니다. 감나무에 감도 다 따지 않고 몇 개를 남겨두어 겨울에 까치들의 먹이가 되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레19:18).
이것은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더냐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십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예 첫 번째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래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율법사는 어떻게 대답해요. 자기는 그렇게 다 행한 것처럼 일부러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습니다(눅10:25-29).
이에 예수님은 무엇을 비유로 들어요. 강도 만난 유대인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말하면서, 앞서 유대인이면서도 아무런 도움과 조치도 취하지 않고 지나간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자기의 물질도 아끼지 아니하면서 정성껏 돌보아준 사마리아 사람 중 누가 이웃이냐 하고 묻습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니이다고 하였고,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눅10:30-37). 곧 이것은 율법사가 어떤 사람만 이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에요. 같은 유대인들입니다. 즉 자신의 배짱에 맞고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이웃의 사랑이 아님을 그 스스로의 답변을 통해서 논리 정연하게 깨우치고 계신 것이며, 오늘 우리들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렇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구약은 곳곳에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이웃의 사랑을 지킬 것을 명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 십계명도 결국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출20:1-17).
신약에서 더해진 서로 사랑
그런데 여기 서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이 두 가지의 사랑만을 생각하는데 그것만 있으면 성도의 본분을 다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행하여야 할 한 가지의 사랑이 더 있는데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사실상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을 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 엄밀히 말씀드리면 성도라고 하기에 또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분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령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을 행할 믿음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무엇이고 왜!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성도라고까지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은혜를 받고, 실천하고자 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이에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요. 본문의 핵심 구절인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let us love one another" 이것은 이웃 사랑과 같은 것으로 혼동할 수 있으나 분명한 구분이 되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하여 처음 말씀하시기 전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고 하셨습니다(요13:31).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이 때가 어느 때이죠!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 이제 조금 있으면 잡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고별 담화입니다.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행하는 대 국민 담화와 같은 것입니다. 죽음의 직전 마지막 말에는 무엇이 없다고 해요. 거짓이 없다고 합니다. 간사한 인간도 이런 말을 하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하신 이 고별 담화에는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었겠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엄숙한 순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입니다(요13:34).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그가 나간 후’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스승인 예수님을 팔러 나간 가롯 유다를 말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한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모든 유대 백성들이 구약의 율법에서도 들었고, 예수님께서도 많은 대중들에게 하셨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롯 유다도 나간 후, 마지막까지 남은 11명의 제자들에게 명하셨다는 대에 대하여, 고별 담화에서 다른 사람들은 제외한 제자들을 향하여 명하셨다는 대에 대하여, 주목할 말씀입니다. 즉 믿음의 성도들을 향한,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지 못하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구분을 지어 놓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서로 사랑을 역설力說하신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사회에서 어떠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20).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각종 핍박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12:42). 유대인의 관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었지만, ‘출교’ 자신들의 지위와 생업과 안정을 잃을까 봐 두려워 드러내어 말하지 못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추방은 세상의 이권과 유익을 포기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요7:1).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요7:25).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8:57-59). 다른 분도 아닌 예수님도 직접 죽음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12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6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도 예수 이름 때문에 미움과 핍박과 죽음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21:12,16)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고 출교를 당하고 죽음까지 당하게 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믿는 사람들끼리 한 공동체를 만들어서 모여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생명과 같이 여긴 자들의 모임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오시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그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들은 어떻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이 곧 힘입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행4:44-45). 핍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직장과 장사를 할 수 없었던 성도들을 위해 자기 물건을 교회공동체에 드림으로써, 서로 통용하여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성도들의 사회적인 상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8:14). 이 구절의 배경은 연보, 헌금의 한 용도에 대해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함’이란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린 헌금 사용 항목 중 구제를 통해 성도들 가운데 어려운 분들을 섬김 것입니다. 당시에는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이지 직장에 근무할 수 있는 오늘날과 같지 않습니다. 신앙 때문에 아예 생업에 종사할 수 없거나, 자연재해 등으로 삶의 기반이 없는 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적극적인 구제를 통해 일어설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고후8:15).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아침에 내려주신 만나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허락했듯이, 신약 시대에는 연보를 통하여, 누구나 상실 없이 살도록 한 헌금의 사용에 대해서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무상통有無相通,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서로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었 것이고요. 이것을 통해 볼 때 서로 사랑은 어디서 기인함을 알 수 있어요? 바로 예수의 사랑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원자임을 믿는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서로 사랑은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의 배경이고 오늘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요15:9).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그 안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요일4:10.참고/마27:33;막15:22;요19:1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無條件인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예찬하고, 노래하고,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데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속는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실연의 아픔을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분명한 것은 사람의 사랑은 절대로 사람을 책임질 수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손해 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 님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음까지, 감수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사랑 순수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죄를 전부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요일4:10).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자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기 아들, 자기 딸을 내줄 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켜 주셨습니다. 아들이 아홉 아니, 둘 셋 되는 것도 아니에요 ‘독생자’입니다. 최대의 희생를 최대의 성물로 최대의 대가를 지불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왜! 갈보리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피를 다 쏟고, 나중에는 물까지 다 쏟으신 줄 아십니까?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아야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따라갈 수 없는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대단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에 거한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사랑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할 줄 아는 성도가 있어도,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행위는 한 인간의 고상한 인격의 모습은 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내려오는 것임을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서로 사랑하는 자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7-10)
이것은 사랑이 누구에게로 말미암은 것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어떻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서로 사랑 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과 일맥을 같이 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히 생각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말씀입니다. 거듭나다라는 말씀을 듣고 고민하며 돌아간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같이 그리고 난 후 다른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를 변론하기에 이르고 훗날에는 예수의 시신을 장사함으로 변화된 그 모습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요3:9,7:50,19:3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온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의 공동체 내의 성도들은 핍박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아예 지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를 좇는 제자들과 세상의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 시켜 주는 시금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예수님과의 관계가 확고히 맺어져야 합니다. 정말로 그분의 사랑을 확고히 믿고 있는가를 그래서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히 역사하는 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만이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19:30).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에게 미치게 한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가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명심하여야 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을 메시아 됨을 부인하고 있는 유대교인들 오늘로 말하면 세상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 곧 우리 교회 공동체를 구별하는 기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요13:35).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과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렇다고 행하지 않으면 구원이 박탈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와서 제직이 되고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신앙의 훈련을 받는 것 무엇 때문이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까? 구원은 그런 노력을 통하여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선물입니다(엡2:8).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제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나의 명한 것’은 곧 서로 사랑 하라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태어난 고장마다 전통이 다르듯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자신들의 뚜렷한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가장 큰 특색이 교회 안에서 서로의 사랑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끼리만 모여서 할렐루야! 하고 즐기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사명 중 하나는 ‘디아스포라적 기능’mission of diaspora(διασπορά)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참고/눅10:3). 예수님이 주신 명령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마5:13-16.참고/막9:50;눅14:34). 이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교회의 사명 중 하는 세상으로 구별되는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것을 ‘에클레시아적 기능’Mission of Ecclesia(ἐκκλησία)이라고 합니다(참고/창18:19;출3:2;엡1:22-23; 히2:12). 그 뜻은 여러분이 잘 아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세상의 삶과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실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이용하고 필요에 따라 상대를 바꾸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분들도 이웃을 사랑합니다. 부영그룹에 이중근 회장이 고향마을·동창 수백명에 최대 1억원씩 나눠줘 화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 회장이 그동안 개인적으로 기부한 현금만 약 1천400억원, 선물 세트 등 기부한 물품까지 더하면 총 2천400억원 규모이고, 부영그룹 차원에서 기부는 1조1천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웃 사랑은 세상 사람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과 함께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에 기인한 서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기관과 소그룹 그리고 여러 모임들이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되지 못한 체 다른 일들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실천해 가고 있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열려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외형의 모습은 어떠할지 모르나 안으로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는 모습이 부족함으로 바로 여기에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어요? 저들끼리도 못하면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일 때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이가 좋고, 항상 웃고, 무슨 일만 일어나면 내일 같이 찾아가고, 친하게 교제를 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일까 부러움과 기대의 눈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복음 생명을 함께한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의 위력
이 모습이 가장 본이 된 곳이 어디죠? 초대교회입니다. 서로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앞서도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한 번 더 보겠습니다.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서로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을 그대로 실천한 곳입니다. 첫 번째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말씀의 증거와 교육은 사도로부터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 재산과 소유를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이외에 누가 필요했습니까? 집사, 오늘로 말하면 제직입니다. 본을 보일 리더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요13:5,15). 서로 사랑하라 섬김과 봉사와 헌신의 본을 그들에게 보임으로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겸손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서로 용납하고’(엡4:2) ‘서로 돌아보아 사라과 선행을 격려’(히10:24)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예수 믿고 난 후 두 번째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성도의 가장 중심적인 삶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번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봉사나 헌신을 잘하는 사람은 물론 안 하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그러한 사람이 정작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하나 되고 있지 못할 때, 과연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분열과 상처와 시기를 조장하는 사람이 헌신과 봉사활동에 열심이라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들 분열과 상처와 시기는 우리 안에서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저는 매년 교회 슬로건 설교를 새해 첫 주와 6개월 후에 한번 더 합니다. 2023년 청아비전교회 슬로건은 서로사랑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깨어진 자들이 찾아와 쉼을 얻고 위로를 얻으는 곳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전하는 성도란 오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 주일 예배에 나와 계신 성도 여러분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까지 성숙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많은 시간을 뭇 영혼들에게 쏟아 붇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좇아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요. 예수님이 가장 편하게 대하는 참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는 사랑이 없었나요. 그러나 이 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고 행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리
구약에 기록된 두 가지 사랑
하나님 사랑. 구약에 나타난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묶어 말한다면 첫 번째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신6:4-5). 예수님께서도 여러번 강조하여 인생의 첫 번째 하여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2:37-38;막12:2,30;눅10:25-28). 두 번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고 압제, 학대. 해롭게 하지말여,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출22:21-24;레19:9-10,18;신16:11.14). 예수님께서도 강도 만난 유대인들을 도와 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이와 같이 하라’명하시며 이웃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눅10:37). 이렇게 구약은 곳곳에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이웃의 사랑을 지킬 것을 명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 십계명도 결국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더해진 서로 사랑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한 가지의 사랑이 더 있는데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면, 사실상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을 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 엄밀히 말씀드리면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서로 사랑하라’“let us love one another"입니다. 서로 사랑은 이웃 사랑과 구별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중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인 고별 담화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그런데 이 말씀을 ‘그가’ 가룟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나간 후’에 하셨습니다(요13:31). 이를 통해 볼 때 서로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한 명령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대중들에에게 구약의 율법에서도, 예수님께서도 많이 하셨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마지막까지 남은 11명 사도들에 명하셨다는 대에 대하여, 주목할 말씀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을 향한,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이를 행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서로 사랑은 구분해 놓은 것일까요?
서로 사랑을 역설力說하신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고 유대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고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각종 핍박을 감수하여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15:20). 관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었지만, ‘출교’ 자신들의 지위와 생업과 안정을 잃을까 봐 두려워 드러내어 말하지 못했습니다(요12:36-43). 유대 사회에서 추방은 세상의 이권과 유익을 포기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직접 죽음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요7:1,25,8:57-59).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이름 때문에 미움과 핍박과 죽음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21:12,16)
이러한 현실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한 공동체를 만들어서 모여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생명과 같이 여긴 자들의 모임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힘입니다. 그렇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행4:44-45). 핍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직장과 장사를 할 수 없었던 성도들을 위해 자기 물건을 교회공동체에 드림으로써, 서로 통용하여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성도들의 사회적인 상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무상통有無相通,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서로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었 것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요15:9). 그러므로 서로 사랑은 예수의 사랑에 기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요일4:10.참고/마27:33;막15:22;요19:1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無條件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요일4:10).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내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부를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따라갈 수 없는 무조건적인 이타적인 희생적인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행위는 한 인간의 고상한 인격의 모습은 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에 거한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서로 사랑하는 자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까지 말씀합니다(요일4:7-10). 요한복음 기록된 서로 사랑 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과 일맥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심각히 생각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말씀입니다(참고/요3:9,7:50,19:3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온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 때 성도들은 핍박과 위험에도 서로 사랑으로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은 예수를 좇는 제자들과 세상의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 시켜 주는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확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19:30).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기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가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명심하여야 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당시는 유대인들과 제자들 오늘날에는 세상과 제자를 구별하는 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요13:35).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과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제직이 되고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신앙의 훈련을 받는 것 무엇 때문이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나의 명한 것’은 곧 서로 사랑 하라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뚜렷한 특색이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만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사명 중 하나는 ‘디아스포라적 기능’mission of diaspora(διασπορά)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세상으로 나아가 변하시키는 것입니다(마5:13-26,10:16;막9:50;눅10:3,14:34).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또 다른 사명은 ‘에클레시아적 기능’Mission of Ecclesia(ἐκκλησία)입니다(창18:19;출3:2;엡1:22-23; 히2:12). 그 뜻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부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세상의 삶과 다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실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이용하고 필요에 따라 상대를 바꾸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기관과 소그룹 그리고 여러 모임들이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되지 못한 체 다른 일들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실천해 가고 있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열려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외형의 모습은 어떠할지 모르나 안으로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는 모습이 부족함으로 바로 여기에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일 때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이가 좋고, 항상 웃고, 무슨 일만 일어나면 내일 같이 찾아가고, 친하게 교제를 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일까 부러움과 기대의 눈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복음 생명을 함께한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의 위력
서로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을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행2:42). 유무상통하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행2:43-47). 서로 사랑의 실행으로 예수님의 새 계명을 그대로 실천한 곳입니다.
이렇게 감당해야 할 리더가 필요합니다. 집사 등 제직들이 ‘서로 사랑하라’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요13:5,15). 사도 바울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 ‘서로 용납하고’(엡4:2) ‘서로 돌아보아 사라과 선행을 격려’(히10:24)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예수 믿고 난 후 두 번째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의 가장 중심적인 삶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분열과 상처를 조장하는 사람이 선교와 봉사활동에 열심이라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저는 매년 교회 슬로건 설교를 새해 첫 주와 6개월 후에 한번 더 합니다. 2023년 청아비전교회 슬로건은 서로사랑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깨어진 자들이 찾아와 쉼을 얻고 위로를 얻으는 곳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전하는 성도란 오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 밤에 이 자리에 나와 계신 성도 여러분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까지 성숙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많은 시간을 뭇 영혼들에게 쏟아 붇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좇아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요. 예수님이 가장 편하게 대하는 참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는 사랑이 없었나요. 그러나 이 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가룟 유다도 떠난 11명의 제자들을 향해 새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은 교회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의 기원은 십자자의 무조건 적이고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으로 심령을 채우고 행할 수 있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을 믿으면 사회에서 출교 당하고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직장과 장사 생업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안에서 유무상통으로 상실감을 갖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 소외와 열등과 안식이 필요한 분들을 서로 사랑으로 세워줄 수 있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상도 행하는 이웃 사랑만 아니라 구별되는 서로 사랑으로 세상도 인정하는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볼 때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이가 좋고, 항상 웃고, 무슨 일만 일어나면 내일 같이 찾아가고, 친하게 교제를 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일까 부러움과 기대의 눈으로 보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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