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신명기 16:16-17 2023.07.02. 麥秋感謝主日禮拜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영혼의 진단은 하나님만이 성경을 통해서 하십니다. ‘우리는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0-11).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와 같이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죄’ ‘죽음’ ‘심판’입니다(롬3:23;롬6:23;히9:27). 너무 원색적인 표현들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떠난 인생은 그런 진단밖에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른 진단 즉 바른 진리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원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진단은 원수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1:21).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범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지금이 죄요 죽음이요 심판이요. 결국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놀라운 사랑과 아들을 삼아 주시고자 하는 황홀한 계획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위한 복된 은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요3:16;갈4:7;딤후4:18). 그런데 하나님에게 무관심하다면 그것이 원수인 것입니다. 예전에 불효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무관심할 수가 없는 혈육의 관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창조자요, 우리는 그의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절대로 무관심한 관계가 될 수 없는데, 자신이 무관심하다면 담이 쌓인 것이죠.
하나님 믿지도 않으면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꼭 하나님 들먹이면서 은근히 원망하고, 불평하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에수님에 대해 뭐라고 하면 신경질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세상 권력자와 원수라면 아마 잠을 잘 자지 못할 겁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라면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왜 평안이 없고 알 수 없는 공허와 허무가 밀려옵니까? 지금 이 시간에 분명히 진단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오는 공포입니다. 늘 불안이 찾아옵니다.
십자가의 자리가 지옥. 하나님은 이 원수 된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경이로운 일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그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원한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참고/롬5:8).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된 관계를 풀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기가 막힌 선물을 받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습니다.”하고 마음으로 고백만 하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의 모든 죄를 말끔하게 씻어서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죄선고를 해버립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롬3:24) 그러므로 이때부터 인생이 평안합니다. 죄에 대한 눌림이 없이 자유한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면 전부다 의인이 됩니다.
그리고 잘못할 때도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항상 빕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왜 용서해줍니까?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에 자범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신자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죄, 원죄가 용서되지 안 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께 화평하기에 마음껏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밧줄을 끝까지.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1:23). 한 빌딩이 화재가 났는데 사람들이 간신히 옥상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구조대가 처음에는 지상에 그물을 쳐 놓고 뛰어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빌딩이 너무 높아서 불가능했습니다. 두 번째로 골리앗 크레인으로 구조하려 했지만 불길이 옥상까지 치솟자 구조대원들이 접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헬리콥터를 동원했습니다. 이제 옥상에 있는 사람들은 헬리콥터에서 내려준 밧줄을 잡아야 합니다. 잡아야 하는데 구조대원들이 안전이 보장된 곳으로 내려줄 때까지 잡아야 합니다. 잡았어도 중간에 놓는다면 그 생명을 보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줄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5:1).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주님 오실 그날까지, 영원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이 믿음을 붙잡기를 축복합니다.
감사를 배운 사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지만 옛날보다 훨씬 감사가 적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있다 해도 단지 입술에 붙어 있는 얄팍한 감사가 만연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진정한 감사를 찾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은혜받으면 자동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안 받은 사람보다 감사를 더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또는 말씀을 깊이 알기 위해서, 전도를 능력있게 하기 위해서 배우고 연습하고 노력해야 하듯이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 실제적인 감사의 생활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훨씬 더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체질화’ 體質化 되고 ‘생활화’ 生活化되고 ‘습관화’ 習慣化 될 것입니다.
누구나 좋은 일에는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일에 감사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공할 때야 어느 정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란 웬만큼 배우고, 연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힘듭니다.
장미란 전 국가대표 역도 선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역도 사상 첫 번째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2005, 2006, 2007, 2009년 세계선수권 4회 재패했습니다. 앞서 2004년 아테나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수상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부상 중에도 참가하였지만, 용상 3차 시기까지 시도했지만 실패 4위로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이 매트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4년 지난 후입니다. 2012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수상한 선수가 금지약물 복용으로 메달이 박탈되었고, 장미란 선수가 뒤늦게 동메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미란은 재단을 설립 특히 소외계층인 청소년들을 지원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여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금번 장차관 개각에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에 내정되었습니다. 그것도 46년 만에 첫 번째 30대 차관이 된 것입니다. 바벨을 들지 못하고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지 11년 만의 일입니다. 어쩌면 이후로 하나님께서 장미란 선수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실패를 했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는 평소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렇듯 굉장한 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말들은 감사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우라”, “감사하면 영혼은 맑아지고 육체는 건강해진다”, “감사의 예술을 터득할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예술은 그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피눈물 나는 수고와 연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의 예술을 터득하려면 남보다 더 많은 감사와 피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감사를 통해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사 교육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치기 위해, 한 해 세 번 있는 추수기에 맞춰 3대 절기를 제정하신 후 이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바로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먼저 겨울 내내 자란 보리 첫 이삭을 패는 초봄이 되면 ‘무교절’無酵節,the Feast of Unleavened Bread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逾越節,Passover 다음 날부터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그리고 봄부터 시작해서 보리를 추수하는 늦여름이 되면 ‘칠칠절’七七節,Feast of Weeks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맥추절’麥秋節,Feast of Harvest로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신 양식을 놓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마지막으로 늦은 가을, 그동안 열심히 가꾼 감람유,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들을 풍성하게 소출 하는 연말이 되면 ‘초막절’草幕節,feast of booths을(‘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Thanksgiving Day)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매년마다 세 차례씩 받은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되고, 나아가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이 성전 건축과 함께 ‘최상의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높으신’ 하나님께 드리며 국가를 통치한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솔로몬 왕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태평성대였습니다. 위엄 있는 성전과 화려한 왕궁을 건축한 것뿐만 아니라, 견고한 경제를 위한 국고성과 탄탄한 군사력을 위한 마병성을 건축하였습니다. 또 백성들이 사는 성읍들도 건축하여 서민들의 삶을 골고루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백향목이 뽕나무 같이 많고 은이 돌과 같이 흔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나라를 다스리고 조공을 받았으며 육로와 해상을 통한 활발한 무역업으로 엄청난 이윤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문화등 모든 분야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대하8:13). 솔로몬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법을 잊지 않고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빼고는 이 3대 절기를 제대로 지킨 적 이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절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백 년을 보낸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적절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가 쉽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생활화되고 습관화 되도록 계속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만 할 것입니다.
감사의 기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세 절기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될 교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감사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국민이 다시 독립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지도자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로 지킨 것입니다.
그 후 일 주일동안 무교절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떡을 먹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무서운 노예의 쇠사슬에서 건져 주셨는지를 나누면서,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유월절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밥 안 먹고 물만 먹어도 70-100일 삽니다. 물도 안 먹고 단식을 하면 40일을 삽니다. 그러나 ‘숨’은 1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생명이 별것 아닙니다. 코의 호흡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 된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켜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며, 그 위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아신 다니…어느 것 하나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데도 값없이 영생을 주시다니…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구원의 감사가 기본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지 못하면서 일이 잘 된다고, 돈을 벌었다고, 또 건강하다고 감사하는 것은 의미 있는 감사일 수 없습니다. 가장 큰 감사는 구원의 감사인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감사 중의 제일 첫째 감사가 ‘날 구원하신 주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그 다음날 부터 일주일간 계속되는 무교절은 바로 이런 은혜를 회복시켜 주는 절기였습니다. 우리 역시 구원의 은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세상의 아름다움을 좇지 않고, 너무나 소중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사랑하실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앞에 감사>.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이 430년의 노예 생활을 마치고, 애굽을 떠나 광야의 40년간 방랑 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서, 첫 번째 가장 먼저 수학한 보리를 하나님께 드렸던 절기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먹는 것 하나 하나, 마시는 물 한 방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칠칠절로도 불리며, 우리가 오늘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사실 가만 가만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온통 감사할 것투성입니다. 의사 전도왕 이병욱 장로님이 계십니다. 우리나라 암 분야에 권위자로 사랑의 클리닉 원장님이기 하십니다. 이분이 이런 글을 썼어요. “누구에게나 주어지기에 너무나 귀한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기쁨과 감사, 감격의 눈물이 말라버린 게 아닐까요? 제가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대하고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많은 분들이 힘든 상황을 보고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우리가 지금 건강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호흡기병으로 숨쉬는 것이 불편한 환자도 있는데 저는 자유롭게 숨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후두암이나 구강암으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은데 자유롭게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 인지요. 식도나 위장의 암으로 막혀서 제대로 먹을 수도, 용변을 볼 수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끼니마다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눈과 귀의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잘 보고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하고 감격하면 오늘 하루가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범사에 감격합니다.”
여러분도 이 이병욱 장로님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단, 감사를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입니다. 이병욱 장로님의 글을 보고 나의 감사를 기록하면 대학 노트 한 장 앞뒤가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도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도록 하신 줄 몰라요. 이런 은혜를 마음에 담고 ‘주여, 무 고맙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어 오늘까지 지난 6개월 동안 강건하게 지켜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게 하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경배하는 것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놓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숟가락, 한 컵이라도 감사 없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 길에 홀로 두지 않으신 감사>. 또한 하나님께서 왜 가을 추수를 마친 후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만 되면 산과 들로 가서 감람나무 가지나 종려 가지 등을 잘라 자기 집 옥상이나 마당,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야외로 나가 나뭇가지를 엮어 장막 즉 ‘텐트’tent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서 1주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기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40년 이상 광야에서 그런 초막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때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무서운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셨는가를 회상하고 큰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4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시107:4-7)
누구나 한두 번씩은 광야 같은 위기와 역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지 그 기간에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어떻게 그 위기를 넘기게 하셨습니까? 눈앞이 캄캄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어디로 가야 될지, 어느 쪽에 탈출구가 있는지를 몰라 허우적거렸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겼고, 하나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는 힘을 얻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과거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앞으로도 광야 길을 걷게 될 때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초막절인 것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을 통해서는 구원의 감사를, 맥추절을 통해서는 살아서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감사를, 초막절을 통해서는 광야 같은 인생에도 지켜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기본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예배입니다
두 번째로 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유월절을 지낼 때 먼저 어린양을 하나님께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린 후 잡으라고 했습니다(신16:2). 왜냐하면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어린양을 먹는 식구들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됩니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통해 구원 받게 된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맥추절에도 떡을 흔들어 요제로, 짐승을 불태워 화제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레23:15-22).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전부 예배요, 제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의 마음이 빠져 있다면 제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없는 예배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감사하다’는 뜻을 지닌 ‘야다’yada라는 말은 “찬양한다”는 말과 같이 쓰입니다. 찬양과 예배는 동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예배에는 반드시 감사가 들어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9-20). 그러므로 감사는 신비로운 제물이 됩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 감사가 바로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그분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사가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있으면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다른 것이 다 있다 할지라도 불안전한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얼마나 감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 촉촉이 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감사가 향기로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감사는 누구에게나 필수입니다
세 번째로 감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해야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년에 세 차례씩 명절을 지키라고 당부하시면서 재미있는 명령 한 가지를 주셨습니다. 곧 명절을 지킬 때마다 남자들은 하나님 앞에 와서 얼굴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지킬 때에도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그분께 얼굴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에게만 이런 명령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을 대표하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 얼굴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 양을 잡아 놓고 모든 식구들이 둘러앉아 함께 그 양을 먹어야 했습니다. 곡식을 추수한 다음에도 모든 가족이 모여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초막을 지어 놓고 온 가족이 그 안에서 1주일 간 기거하면서 광야 생활을 회상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감사 거리가 없어 감사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도대체 나에게 고난 거리만 있지 감사할 거리는 눈을 씻고 봐도 없어", “내 인생에 있어 감사란 없어, 나는 이 세상에 피해자야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빽도 없고 부모 잘 만난 것도 아니야”라며,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6월달이면 6.25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과 함께 6월 29일이 생각납니다. 28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있었던 날입니다. 6.25전쟁 이후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인 50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백화점 측이 붕괴 징후를 알고도, 자신들만 피했다는 밝혀진 진실은 국민들을 분노와 통한의 눈물 바다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502명이란 생명이 숨진 것과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었지만, 사고 후 캄캄한 매몰의 현장에서 10여 일 만에 빛을 보게 된 최명석(28)씨, 13일만에 구조된 유지환(26)씨, 그리고 무려 17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되어 삼풍참사 최후의 생존자로 기록된 박승현(27)씨. 이렇게 3명의 생환은 국민들에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사고 당시의 기억으로 정신적 고통이 약간은 잊기는 하지만 모두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하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 사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끔찍한 사고 현장에서 10여 일 혹은 20여 일에 가까운 시간까지 사투를 벌이며 살아났으니까! 그 기적 같은 일을 체험했으니까! 그들은 얼마나 여생을 감사하며! 마치 덤으로 더 살게 된 것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 듯 살아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붕괴의 참사 현장에서 매몰되었다고, 구출되는 드라마틱한 일을 겪어야 비로소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교통사고로 차가 몇 번 뒤 집어지는 전복 사고 후 살아나는 위험을 겪어야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사업장이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내어 쫓겨야 감사하겠습니까? 이 불확실한 시대 내가 있는 곳이 이태원 압사 현장이 될지 모르는 언제 어떻게 무슨 사건이 벌어질 줄 모르는 지금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요 그것에 감사하여야 하지 않겠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5:18). 값없이 얻은 구원에 감사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놓고 감사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광야의 어려운 삶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니 이 목숨 생명 하나 건강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라’. 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여기에서 제외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 성도의 고백을 옮겨봅니다. “나는 장미를 들고 수백 번 감사했지만, 가시를 가지고 감사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솔직한 고백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장미를 놓고 감사해야 되지만, 가시를 놓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길가의 장미 꽃 감사 장미 꽃 가시 감사 따스한 사랑의 가정 일용할 양식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눈물이 무지개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길 원한다면 장미와 가시를 동시에 놓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장미만 들고 화려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가시 때문에 찔리고 고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소외된 자가 없게 합니다
네 번째로 소외된 자가 없도록 감사해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맥추절과 초막절에 내 가족만이 아니라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신16:11;참고/신16:14). ‘성중에 있는’이라는 것은 넓게는 예루살렘과 같은 큰 성 작게는 한 동네로 볼 수 있습니다. ‘객’은 나그네와 이방인을 포괄합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으로 약자이고 소외계층이며 막일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맥추절에 이러한 분들과 함께 즐거울수 있도록 배려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4:44-45). 이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 소유를 교회공동체에 드렸습니다. 서로 통용하여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배분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때는 박해가 심했습니다. 그로인해 성도들은 제대로 된 직장과 장사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위해 성도들은 자기 물건을 교회공동체에 드림으로써, 서로 통용하여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성도들의 사회적인 상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14년 지났습니다. 할례자 즉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에게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찾아와 선교 회의를 가졌습니다(갈2:1-8). 회의를 마친 후,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이방교회를 대표하는 바울, 바나나, 디도는 서로 ‘친교의 악수’를 하고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며, 부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명은 다르지만 베드로는 양측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고, 이에 바울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갈2:9-10).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할 수 있으면 재정의 50%를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그렇게까지는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정신은 잃지 않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주일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분들을 교회 안과 밖에서 찾아 행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는 마음에서 시작 됩니다
다섯 번째로 예물을 들고 나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차례 절기를 통해 감사를 드릴 때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말씀이 몇 번 나옵니다.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신16:16). ‘빈손’으로 여호와께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입의 감사와 동시에 마음의 감사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감사가 우러나와 입으로 감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너무나 세세하게 잘 아십니다. ‘여호와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11:4). 하실 정도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약점, 즉 우리의 마음이 재물과 쉽게 밀착된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마음은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선 부자가 구원을 얻는 사례가 드물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이 많으면 자연히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게 되어 하나님을 섬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자유하고, 자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내 마음이 자꾸 그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4). 그래서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를 받으시기 위해 빈 손들고 나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 보물을 네 손에 들고나와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손에 들고나오면 그 예물 때문에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까? 많은 감사의 방법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물질을 선택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가장 많은 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돈을 벌고, 저축하고, 구매하고, 사용하는 일합니다. 이런 이유로 돈이 감사의 시금석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 하였습니다(고후9:6).
하나님께서는 예물 드리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해에 흉작을 거두어 씨앗이 별로 없다고 해서 농부가 “나는 이 종자 씨를 심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먹어버리든지, 아니면 심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먹어버리면 그것이 마지막 식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것을 심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풍성한 소출을 원한다면 많이 심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적은 소출을 원한다면 내가 적게 심어도 됩니다. 내가 얼마나 심느냐의 문제는 곧 내가 얼마나 거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소출의 양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입술로만 감사할 수 없어
사회복지법인인 ‘애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14년 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명 문둥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여수 지역에 만든 곳입니다. 요즘은 한센스병이라고 불리는 나환자 촌입니다. 애양원이 유명해진 것은 지금부터 약 70년 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손양원 목사님이 배출되면서부터입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두 아들 역시 순교를 당해 유명해진 곳입니다.
애양원은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한 마디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모이는 숫자가 똑 같은 한국의 유일한 교회입니다. 한 사람도 결석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배에 다 나오는 교회, 따라서 그들의 가슴은 뜨겁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양계, 양돈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이 되면, 거기에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는데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면서 힘껏 헌금을 드리는지 모릅니다. 여수지방에 400여 교회가 있는데, 그중 40개 교회가 이 나환자촌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린 예물로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나환자에게 무슨 감사입니까? 그들의 입에서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무슨 감사의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으로 누리게 되자,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만 감사할 수 없어 성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들고나와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감사를 받으십니다. 이 감사야말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부유하지 못하게 사시는 분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아인쉬타인’, ‘파스퇴르’를 먹이고, 그것도 부족해서 미 8군 부대에서 나온 백인 아이들이 먹는 최고급 분유를 먹일 때, 가장 싸고 싼 ‘서울 분유’ ‘남양 분유’를 먹이면서 절약하고 절약을 하여 모아서 예물을 드립니다. 자녀들 교육을 위해 명문대 출신의 개인 과외 교사는 그만두고 그 흔한 학원에 제대로 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려요. 강산이 변할 연수가 훨씬 넘은 유행이 지나고 지나서, 때가 타고 해어진 옷을 입으면서,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 한번 안 하고 단돈 만 원이 아까워 사우나에도 안 갑니다. 그리고는 헌금을 드리는 거예요. 집 안에 반짝거리는 식기 하나 없이 족히 20여 년은 된 것으로 보이는 허옇게 달고 달은 냄비를 쓰면서, 매주 마다 온 가족이 감사헌금을 합니다. 가족들하고 외식 한번 안 하고 지독하게 지독하게 살아서 헌금을 드리는 분들도 계세요. 자녀들에게 용돈 받은 것 쓰지 않고 모으고 모았다고 쪼글쪼글한 손으로 예물을 드리는 연세 많은 손길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드린 예물이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그 예물도 교회의 교육, 전도하고 선교와 구제를 하며, 애찬과 친교를 하며 각종 행사를 전개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캠프와 어린이주일학교 성경학교를 준비하고, 교육관과 문화센터 사역이 준비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없는 자를 들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물을 들고 나왔을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그 예물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까지 받은 구원의 은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은혜, 가정에 공급해주신 갖가지 은혜, 그리고 어려울 때 눈물 흘려 기도하면 어김없이 응답해 주신 은혜, 그리고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하신 은혜 등등. 특별히 맥추감사절을 맞아 이런 은혜를 감사하며 예물을 준비한다고 할 때, 그것이 너무 적거나 초라하거나 형식적이라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충분히 담긴 예물을 준비해서 드려야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예배로 받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 없이는 한순간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정이 평안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안심하고 앞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가 빈손들과 나오거나 형식적으로 드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이 담긴 예물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진정 구원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험한 광야 같은 세상 살 동안 도와주시고, 이 불확실한 시대 하루하루 생명을 강건하게 지켜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그분에게 진정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정리
감사에 인색한 사람
믿음의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예배드리던 세대 성도들의 입에선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말들이 눈물과 함께 자주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그정도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 마루에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겨울이면 바닥 사이사이에서 찬바람이 방석을 뚫고 무릎까지 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면서도 감사가 메말라 있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단지 입술에 붙어 있는 얄팍한 감사가 만연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게다가 은혜받으면 자동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고 말씀을 바로 알고 전도를 능력있게 하기 위해서 배우고 연습하고 노력해야 하듯이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 실제적인 감사의 생활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좋은 일에는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일에 감사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장로님이 IMF로 회사가 부도나기 직전이었는데도, 건축헌금 2억 원을 가져오면서 제가 작정한 것이니 드리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후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고, 직원을 감원해야 할 처지까지 오고, 하루하루 가까스로 부도의 위기를 연장하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주문이 쇄도하기를 시작하더랍니다. 다른 회사는 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 장로님 회사에만 주문이 몰려 나중에는 만들어 낼 수가 없을 정도가 되더랍니다. 그리고 난 후 이 장로님은 걸핏하면 1억씩 또 드리고 또 드리곤 하더랍니다. 막대한 손해를 입었는데도 작정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평소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렇듯 굉장한 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감사를 통해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사 교육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치기 위해, 한 해 세 번 있는 추수기에 맞춰 3대 절기를 제정하신 후 이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겨울 내내 자란 보리 첫 이삭을 패는 초봄이 되면 ‘무교절’無酵節,the Feast of Unleavened Bread(이 날의 시작이 ‘유월절’逾越節,Passover)과 봄부터 시작해서 보리를 추수하는 늦여름이 되면 ‘칠칠절’七七節,Feast of Weeks(‘맥추절’麥秋節,Feast of Harvest)과 가을, 그동안 열심히 가꾼 감람유,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들을 풍성하게 소출 하는 연말 ‘초막절’草幕節,feast of booths(‘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Thanksgiving Day)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명절에 만유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민족과 우상을 민족을 섬기는 민족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직접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이 성전 건축과 함께 ‘최상의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높으신’ 하나님께 드리며 국가를 통치한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솔로몬 왕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태평성대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대하8:13). 솔로몬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법을 잊지 않고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빼고는 이 3대 절기를 제대로 지킨 적 이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절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백 년을 보낸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적절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가 쉽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습관화 되도록 계속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만 할 것입니다.
감사절의 교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세 절기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될 교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감사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기적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 해방의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로 지킨 것입니다. 그 후 일 주일동안 무교절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떡을 먹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무서운 노예의 쇠사슬에서 건져 주셨는지를 나누면서,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유월절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켜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며, 그 위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지 못하면서 일이 잘 된다고, 돈을 벌었다고, 또 건강하다고 감사하는 것은 의미 있는 감사일 수 없습니다. 가장 큰 감사는 구원의 감사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바로 이런 은혜를 회복시켜 주는 절기였습니다. 우리 역시 구원의 은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세상의 아름다움을 좇지 않고, 너무나 소중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사랑하실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 맥추절은 이스라엘이 430년의 노예 생활을 마치고, 애굽을 떠나 광야의 40년간 방랑 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서, 첫 번째 가장 먼저 수학한 보리를 하나님께 드렸던 절기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먹는 것 하나 하나, 마시는 물 한 방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칠칠절로도 불리며, 우리가 오늘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의사 전도왕 이병욱 장로님이 이분이 이런 글을 썼어요. “호흡기병으로 숨쉬는 것이 불편한 환자도 있는데 저는 자유롭게 숨쉬니, 후두암으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은데 자유롭게 말할 수 있으니, 위장의 암으로 제대로 먹을 수도, 용변을 볼 수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끼니마다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부족한 것으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상으로 우리는 참 많은 아름다운 축복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웃고 울며 잘 감격하는 것이 좋은 신앙입니다. 좋은 신앙은 범사에 감격합니다.”
이 장로님의 글을 보고 나의 감사를 기록하면 대학 노트 한 장 앞뒤가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도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도록 하신 줄 몰라요. 이런 은혜를 마음에 담고 ‘주여, 무 고맙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어 오늘까지 지난 6개월 동안 강건하게 지켜주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경배하는 것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놓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숟가락, 한 컵이라도 감사 없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 길에 홀로 두지 않으신 것에 감사>. 초막절만 되면 산과 들로 가서 감람나무 가지나 종려 가지 등을 잘라 자기 집 옥상이나 마당,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야외로 나가 나뭇가지를 엮어 장막 즉 ‘텐트’tent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서 1주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기거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40년 이상 광야에서 그런 초막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때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무서운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셨는가를 회상하고 큰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광야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주리고 목이 말라 영혼이 피곤하였도다 이에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시107:4-7). 누구나 한두 번씩은 광야 같은 위기와 역경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지 그 기간에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겼고, 하나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는 힘을 얻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과거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앞으로도 광야 길을 걷게 될 때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초막절인 것입니다.
둘째는 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유월절에 먼저 어린양을 하나님께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린 후 잡으라고 했습니다(신16:2). 어린양은 제물이면서, 제사 후 어린양을 먹는 식구들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됩니다. 어린양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맥추절에도 떡을 흔들어 요제로, 짐승을 불태워 화제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레23:15-22).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전부 예배요, 제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의 마음이 빠져 있다면 제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감사하다’는 뜻을 지닌 ‘야다’yada라는 말은 “찬양한다”는 말과 같이 쓰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며 범사에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하였습니다(엡5:19-20).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 감사가 바로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그분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의 은혜로 촉촉이 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감사가 향기로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감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명절을 지킬 때마다 남자들은 하나님 앞에 와서 얼굴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자들은 가정을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도 유월절 양을 함께 먹었습니다. 맥추절에도 모든 가족이 모여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초막에도 온 가족이 그 안에서 1주일 간 기거하면서 광야 생활을 회상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감사 거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고 비관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6월 달이면 6.25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과 함께 6월 29일이 생각납니다. 6.25전쟁 이후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인 50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있었던 날입니다. 그런데 이 참사에 10여 일 혹은 20여 일 가까운 사투를 벌이며 살아난 세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들은 얼마나 여생을 감사하며! 마치 덤으로 더 살게 된 것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 듯 살아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붕괴의 참사 현장에서 매몰되었다가, 구출되는 드라마틱한 일을 겪어야 비로소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불확실한 시대 내가 있는 곳이 이태원 압사 현장이 될지 모르는 언제 어떻게 무슨 사건이 벌어질 줄 모르는 지금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요 그것에 감사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5:18). 값없이 얻은 구원에 감사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놓고 감사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광야의 어려운 삶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니 이 목숨 생명 하나 건강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라’. 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여기에서 제외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소외된 자가 없도록 감사해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맥추절과 초막절에 내 가족만이 아니라 ‘성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신16:11;참고/신16:14). 사적으로 약자이고 소외계층이며 막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분들에게 배려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소유를 교회공동체에 드렸습니다. 서로 통용하여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배분을 하였습니다(행4:44-45). 당시는 교회 박해가 심했습니다. 그로인해 성도들은 제대로 된 직장과 장사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위해 성도들은 자기 물건을 교회공동체에 드림으로써, 서로 통용하여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성도들의 사회적인 상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14년 지났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이방교회를 대표하는 바울은 선교 회의 후,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며, 부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명은 다를지라도 베드로는 양측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고, 이에 바울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갈2:9-10).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분들을 교회 안과 밖에서 찾아 행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예물을 들고 나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차례 절기를 통해 감사를 드릴 때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입의 감사와 동시에 마음의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너무나 세세하게 잘 아십니다(시11:4). 우리의 마음이 재물과 쉽게 밀착된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물질에 집중하면 자연히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게 되어 하나님을 섬길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내 마음이 자꾸 그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4). 그래서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를 받으시기 위해 빈 손들고 나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 보물을 네 손에 들고나와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손에 들고나오면 그 예물 때문에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 노력,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돈 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돈이 감사의 시금석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 하였습니다(고후9:6). 하나님께서는 예물 드리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흉년으로 ‘종자’種子마저 먹는다면 마지막 실물이 되지만, 그것을 심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풍성한 소출을 원한다면 많이 심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얼마나 심느냐의 문제는 곧 내가 얼마나 거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입술로만 감사할 수 없어
‘애양원’은 나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114년 전 선교사님들이 세운 것입니다. 이곳은 70년 전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유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두 아들 역시 순교를 당했습니다. 애양원은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한 마디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일예배와 다른 공 예배 추석 숫자가 똑같은 한국의 유일한 교회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가슴은 뜨겁습니다. 그들은 양계, 양돈으로 번돈으로 맥추 추수감사주일에 수천만 원을 헌금합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감사드리며 힘껏 헌금을 드리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건축을 할 때 소요 예산이 10억 원이 조금 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나환자분들이 드린 헌금으로 충당했었습니다. 여수지방에 400여 교회 중 40개가 이 성도들님들이 드린 예물로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나환자에게 무슨 감사입니까? 그들의 입에서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무슨 감사의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영적으로 누리게 되자,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만 감사할 수 없어 성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들고나와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감사를 받으십니다. 이 감사야말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부유하지 못하게 사시는 분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살림이 여유가 없음에도 최선으로 헌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없는 자를 들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물을 들고 나왔을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그 예물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오늘날까지 받은 구원의 은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은혜, 가정에 공급해주신 갖가지 은혜, 그리고 어려울 때 눈물 흘려 기도하면 어김없이 응답해 주신 은혜, 그리고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하신 은혜 등등. 특별히 맥추감사절을 맞아 이런 은혜를 감사하며 예물을 준비한다고 할 때, 그것이 너무 적거나 초라하거나 형식적이라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충분히 담긴 예물을 준비해서 드려야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예배로 받으시고 복을 내리어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정이 평안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안심하고 앞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은혜를 받고 사는 우리가 빈손들과 나오거나 형식적으로 드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이 담긴 예물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진정 구원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험한 광야 같은 세상 살 동안 도와주시고, 이 불확실한 시대 하루하루 생명을 강건하게 지켜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그분에게 진정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통해서는 구원의 감사를, 맥추절을 통해서는 살아서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감사를, 초막절을 통해서는 광야 같은 인생에도 지켜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좋은 일만 아니라 가슴 아픈 일에도 감사는 평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일 것입니다. 감사에도 영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감사를 통해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하나님께 제사한 후 식구들이 어린양을 먹을 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됩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으면,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가 곧 예배입니다. 우리 마음이 감사로 젖어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명절에 남자가 대표로 참석했지만, 제사 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온 가족이 제물과 양식을 나누며 함께 했습니다. 감사에 모두가 참예해야 합니다. 불확실한 시대 내가 있는 곳이 이태원 압사 현장이 될지 모르는데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놓고 감사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명절에 약자인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즐거워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에도 이어져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 통용과 배분으로 상실당하는 분들이 없게 하였고, 각기의 사명은 다를지라도 어느 곳에든지 가난한 자들을 힘써 섬겼습니다. 우리가 영육 간에 돌보아야 할 분들 잊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감사절에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 우리의 마음이 재물과 쉽게 밀착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집중하는 것이 물질이면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네 보물인 예물을 손에 들고 나오면 그 예물 때문에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심느냐의 문제는 곧 내가 얼마나 거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감사하며 마음이 담긴 예물들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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