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과 사명
하나님말씀 : 에베소서 6:10-12 2023.09.10. 主日禮拜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0-12)
추수 때는 ‘곡식과 가라지’만을 갈라내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마13:30). 곡식을 타작 ‘알곡과 쭉정이’로 나뉩니다(마3:12).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13:4). 세상 끝은 종말을 일컫습니다. 종말이 되면 곡식과 가라지 신자와 불신자는 물론 알곡과 쭉정이 성도와 성도도 확연하게 나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라지 불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정말 알곡 성도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참고/마3:10;요4:35). 추수 때 타작이 가까울수록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합니다. 두들깁니다. 때립니다. 종말에 성도를 넘어뜨린다는 말입니다. 원수 마귀가 알곡 성도 한 명이라도, 쭉정이로 떨어뜨리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걸려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이방인의 구원받은 수가 차게 되면, 교회시대는 끝나가고 이방인인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대배교Great Apostasy가 일어납니다(참고/롬11:17-26;고후6:2;살후2:3;계17:1). 종말에 있을 일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종교 일치를 주장하고, 세계교회협의회가 종교 통합을 추진하고, 유엔에 세계단일종교회가 생기고, 심지어 이단인 통일교도 초종교 초국가 일치 평화, 신○지 하늘평○세계평○광○을 떠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 일부이지만, 이교, 이단, 무속과도 손을 잡는 이들이 있습니다. <2013년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부산 유치로 인해 한국교회는 혼란의 양상을 보입니다. WCC는 무늬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믿지 않습니다. 종교 다원주의·혼합주의·절충주의입니다. 길은 다원이 아닙니다. 유일 예수입니다. 생명은 혼합이 아닙니다. 유일 예수입니다. 진리는 절충이 아닙니다. 유일 예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멘!
202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래함Billy Graham,1918-2018은 로마 가톨릭과 WCC 수용, 불신자 천국, 미전도종족 타 종교 구원 발언과 행동으로 물의를 빚은 인물입니다. 집회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가운데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재정의 어려움에서 구출하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잘못된 번영신학자로, 통일교 대회에서 초종교 합수식 퍼포먼스에 참석한 ‘폴라 화이트’Paula M. White-Cain,1966- 목사를 교회 창립기념기도회 강사로 초청하고, 한 달 전 통일교 한반도 평화 서밋에 참석 연설한 ‘마이크 펜스’Mike Pence,1959-를 포럼과 간증자로 세우기도 했습니다. 과연 이것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이렇게 대배교가 될 수 있는 일에 앞장서 감당하는 분 중에는 소수이지만 극히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님들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크게 성장을 시킨 지도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분들과 그 교회들이 다 심판받는다” 그런 극단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를 보면 엉터리지만 전체를 보고 나가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이러한 배교 세력에 휩싸이게 됩니다. 조금만 정신을 팔면 넘어갈 수 있는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추수 타작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살아서, 왜! 알곡이 되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그 이유는 재림의 영광입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 생존한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십니다(살전4:16-17). 또 다른 영광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대표로 아담을 만드시고 통치하게 하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영광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루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천 년 여년 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오, 아담의 범죄로 찾아온 인류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아담의 죄로 저주받은 땅에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을 조성하시고, 왕으로 통치하시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천지창조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창1:1,28,2:6,14,17,19;단2:44,7:26-26;마1:25;요1:1-2,14,19,19:30;고전15:24;계11:15,16:19,18:2-3,21). 이 대역사에 알곡만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혹독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큰 영광이 준비된 것입니다.
종말, 재림이 날을 알 수가 없어요(마24:36). 알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징조를 통해 예비토록 하셨습니다(참고/눅12:54-58). ‘배교’가 종말의 ‘영적’인 경각이라면 ‘징조’는 종말의 ‘육적’ 경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에 관하여 ‘난리와 난리 소문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24:6;눅21:11). 금세기 들어 자연재해와 전쟁과 전염병과 대형 참사는 강도가 극에 달하고 빈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음을 보게 하는 외적 빙거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말의 임박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말씀으로 무장하여 종말의 준비하는 것보다 다른데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마음에는 육적인 평안과 안락을 위한 것이 많다는 방증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쭉정이로 빠질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둑처럼 올 것이다’,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계16:15). 그러면 우리가 깨어서 자기 옷을 갖추어 입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신앙과 헌신과 예배에 저해되는 일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됩니다. 노골화되고 있는 교회 내 배교 침투에 맞서,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예수만 유일한 구원자라는 완전한 신앙을. 물질 만능인 맘몬니즘에 맞서, 겸하여 섬기지 않는 확고한 신조를. 역사적 재림을 교리적으로만 고백할 뿐 ‘우리 세대에’라는 안일함에 맞서, 초대교인들과 같이 ‘마라나타’,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갈망하며 믿음을 지키는 분명한 신념으로 무장하여 합니다.
영적 전쟁의 대상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하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적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서,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역입니다. 욥기 1장은 욥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배경을 세 장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실한 믿음, 명성, 부유, 행복하고, 경건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둘째 장면은 하늘의 보좌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에 대해서 사탄에게 자랑하고 계십니다. 사탄은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셋째 장면은 다시 욥의 가정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그의 삶에 가장 슬픈 사건들이 단번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계는 ‘보이는 세계’Seen World와 ‘보이지 않는 세계’Unseen Worl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움직여 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영역에서 전쟁이 있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전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원수와 전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점점 더 영향력을 미치기 원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10:3-4).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싸움은 육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을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싸움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은 바로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번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 사람과 내가 직접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싸움의 방향을 영적인 대상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다루어 주시되,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다루어 주실 것입니다. 나를 대적하던 그 사람이 태도를 바꾸거나 그 사람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전쟁의 대상을 바꿀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할 줄 알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고후10:4).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견고한 진’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 있는 영적인 세계가 갖고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러한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엡6:12). ‘혈과 육’ 즉 사람과 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움입니다(엡6:12).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의 그 세력,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그 세력과 전쟁을 하도록 하나님은 교회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안 보이는 세계를 보아야 하고, 이 영역 안에서 싸워나가야 합니다. 영적 전쟁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기반
“마귀에 관해서 인간은 두 가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잘못이며 또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를 믿고 건전하지 못한 지나친 흥미를 느끼는 일이다.”
- C. S. 루이스 -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아는 것
그러면 두 번째로, 영적 전쟁을 하는 기반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전쟁의 기반을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면, 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한다면, 영적 전쟁의 기반은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3-19)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복음을 전하면 다니시다가, 먼저 질문을 하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마16:13).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등등 여러 가지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마16:14).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대답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마16:15). 시몬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을 기쁘게 들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말하는 두 가지의 신앙 고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다른 하나는,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말해 주는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 안에서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이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체성’Identity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은 예수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신분이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제사장이요, 왕이요, 선지자로서 기름 부으심 받은 자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위하여 보내시는 자마다 기름을 부어 세우셨습니다(참고/삼상16:1,7,12-13;마3:16).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요6:27).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mission, 즉 그의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버지’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두 가지입니다. 40번 이상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그것과 어떤 사명을 가지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사람들로 인해 속이 상해서 잠도 못 주무시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시고, 돈이 없어서 염려에 빠지신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평화가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돈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정치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사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가족 배경으로도 그분은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열등의식에 빠지거나, 불안해하거나,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사셨을 법한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안정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셨고, 만족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비방하고 편견으로 대해도 그것을 변명하거나 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충분히 인정받으셨고, 충분히 안정되셨고, 충분히 용납받으셨고, 충분히 자족하셨고, 충분히 부유하셨기 때문에 더 그런 것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장 안정된 삶, 가장 만족한 삶, 가장 풍요한 삶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장 안정된, 만족한, 풍요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름 부으심 받은 자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하나님의 아들-신분-관계 / 예수-그리스도-사명-목적
대부분의 사람은 무시를 당하면, 몹시 화가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안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치, 지위에 있는 데임에도 불구하고 무시를 당할 때, 기분 나빠 합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안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자신의 신분을 안정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야 비로소 기분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이나 관계 또는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하시려는 일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하여야 할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목적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의 목적은, 오직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은 자,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 사명이 있는 자로서 삶의 목적이 있으셨기에 조금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인정이나 위로에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와의 관계에 신분에 안정을 두시고, 그리스도 사명 때문에 삶의 목적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끊임없이 배워 나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안다면, 어떠한 관계 속에서도, 고독감이나 두려움이 없이 안정과 평화를 유지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명,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안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은 대담함과 포기하지 않는 추진력을 가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나’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안정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안정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신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일을 했느냐, 내가 얼마만큼 성취했느냐 하는 것이 나의 안정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왜 사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을 섬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어릴 때에, 어떤 분은 청년 때에, 또 어떤 분은 뒤늦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신지 알고, 그것에 응답하였습니다.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이 너무도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 자기의 신분을 아는 것과 자기의 사명을 아는 것, 이 두 가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위기가 오는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신분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인생의 안정을 얻게 되고, 또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인생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삶의 추진력을 주는 것은 사명을 아는 것이요. 삶의 안정감을 주는 것은 신분을 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저와 여러분에게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로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와 사명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안에서 설명되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명 안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인가?
그러면 교회는 누구입니까? 교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이와 똑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명과 신분을 통해서, 여러분과 저도 사명과 신분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도 사명과 신분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 말씀 속에 교회의 신분과 교회의 사명이 설명돼 있습니다. 교회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의 지식과 학력으로나, 그가 깨달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16:16-1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마16:17). 이 말은 하나님의 영신 성령이 깨닫게 하셨기 때문에 아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2:3).
우리가 전도할 때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듣는 이들도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방법 때문에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설교를 잘하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녀서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이 그의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너에게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6:17). 그리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처음에는 이 말씀이 많은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을 때의 의미는, 교회의 기반은 굳건한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도 반석이어서 한동안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오해도 생겨났습니다. 천주교가 그렇게 말하는데요. 그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말씀하신 것과, “이 반석 위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반석 위에”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그 신앙 고백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참고/마18:20).
교회를 돌로 지은 건물에 비유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나의 ‘돌’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벧전2:4-5.참고/엡2:20). 이 말씀을 보면 이 반석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벧전2:4). 또한, 예수를 믿는 우리도 ‘산 돌’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말합니다(벧전2:5).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하나씩 하나씩 지어져 가는 부분들입니다. 왜 ‘산 돌’이라고 합니까? 이전에 죄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죽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 돌로 바뀌었습니다. 왜 산돌이 되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라는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산 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신앙 고백을 한 우리 각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기반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산 돌로 그 위에 세워져가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분
이 말씀은 교회의 신분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분은 성전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집니다(참고/엡4:16). 이것은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관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갈4:6.참고/막14:36;롬8:15). 그래서 하나님과 ‘코이노니아’koinonia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코이노니아에는 예배가 있고, 말씀있고, 기도가 있고, 성찬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로 하나님께 나누는 교제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통해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며 코이노니아 교제도 있습니다. 떡을 떼고, 물질을 서로 나누고, 서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참아 주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이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고 서로 기도하며 교제를 많이 했다고 말합니다(행2:42).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서로 사랑하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교회의 신분은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예수에게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떨어져서는 안되다는 말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교회의 사명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6:18). 음부를 이야기할 때, ‘음부의 권세’ 즉, ‘권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대문’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대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단이 장악하고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문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무슨 왕국 같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왕국, 거기에는 대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문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대문은 출입을 하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자와 나가는 자를 지키는 것이 대문의 역할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대문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대문이 갖고 있는 원래 역할은 무엇입니까? 대문의 역할은 수비에 있습니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은 ‘사단 왕국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원수 마귀의 대문을 공격하여, 원수의 왕국에 공격하여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7)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사탄을 방어하는 수동적인 데서 벗어나 공경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의 왕국, 사탄의 왕국의 대문을 깨뜨리면서, 그 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구약부터 신약까지 이 말씀으로 꽉 차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두려워 떨었으며 누가 위협했습니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했었고, 온 가나안 족속들은 힘을 모아 그 문을 굳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때로는 가나안 족속들이 동맹을 맺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의 그림을 보면,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를 잘 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원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 그림 안에서는 원수 마귀가 우리의 땅을 점령하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땅, 권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구도를 모르고 상실을 가져왔습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본질은 모여서 교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항상 공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주여, 우리가 이제 험한 세상에 나아갑니다.”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공격에 벙어를 잘 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수비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을 보세요. 주기도문에 보면,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원래 원어에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처럼 나를 통해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나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원래 주기도문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주시며, 내 보낸 70명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가 무너진 일들을 보고하며 기뻐하셨습니다(눅10:17). 이것이 교회의 본모습입니다.
부흥에 대한 책 중에 ‘레오나르도 레이븐 힐’Leonardo Raven Hill이 쓴 “지옥에서도 유명함”이라는 장이 있습니다. 이 챔터에서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해서, 사탄의 왕국의 대문이 부서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유대인의 제사장 일곱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행하던 식으로 흉내를 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했더니 귀신이 말하기를,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행19:15-16).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지옥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유명한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지옥에서 유명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옥에서는 사도 바울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였습니다. 바울은 권세를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비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여서, 원수의 대문을 깨뜨려 어둠의 왕국을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주의 뜻을 성취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원수가, 사탄의 왕국이 늘 긴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옥의 “Blacklist”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탄의 왕국에서 우리는 잘 아려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공격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지옥에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움직이는 곳마다 사탄의 왕국이 긴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긴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격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곳마다 “거기에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가는 곳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면 회사에 주의 나라가 임하시고, 우리가 학교에 가면 주의 나라가 학교에 임하시고, 우리가 동네에 가면 동네에 나를 통해서 주의 나라가 학장되어 가게 하소서”하고 기도합시다.
공격하는 사람, 원수의 대문을 깨뜨리는 삶,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실 때,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삶입니다. 이같이 교회는 사단의 왕국을 공격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즉, 교회는 모여서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나가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할 때에 부흥이 있게 됩니다. 돌아오는 토요일 창립감사예배와 위임식 및 임직시에 우리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능력을 더욱 맏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배하는 자, 예수님과 관계에서 형제 자매로 부르고 서로 사랑하는 자, 이것이 교회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관계만을 위해 있다면, 마치 박물관에 있는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영적 전쟁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사탄을 공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 ‘앉히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앉히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세를 그 발 아래 복종시키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삼킬 것 같은 권세들 밖에 없어 보이지만, 나의 지금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며 예수의 권세로 그것을 결박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정리
영적 전쟁의 대상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원수와 전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참고/고후4:18).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경건한 사람으로 점점 더 영향력을 미치기 원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영적인 전쟁을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싸움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고후10:3). 싸움의 방향을 영적인 대상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다루어 주시되,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다루어 주실 것입니다. 나를 대적하던 그 사람이 태도를 바꾸거나, 그 사람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전쟁의 대상을 바꿀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다룰 줄 알기를 바라십니다. 영적 전쟁을 할 줄 알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고후10:4). 또 ‘견고한 진’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 있는 영적인 세계가 갖고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고후10:4). 본문은 영적인 전쟁의 대상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엡6:12). ‘혈과 육’ 즉 사람과 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움입니다(엡6:12).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의 그 세력,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그 세력과 전쟁을 하도록 하나님은 교회를 부르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기반
두 번째로, 영적 전쟁을 하는 기반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영쟁의 기반을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마16:13). 사람들이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등으로 말한다고 하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마16:14-15).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마16;16).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예수님의 신분을 말하니다. 정체성Identi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라는 것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 즉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왕, 선지자로서 기름 부으심 즉 택함 받은 자임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삼상16:1,7,12-13;마3:16;요6:27;행2:4).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가장 중심이 되는 것 두 가지 ‘아버지’와 ‘보내심을 받은 자’가 40회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그것과 어떤 사명을 가지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사람들로 인해 속이 상해서 잠도 못 주무시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시고, 돈이 없어서 염려에 빠지신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 가장 안정된 삶, 만족한 삶, 풍요한 삶은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가장 안정된, 만족한, 풍요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름 부으심 받은 자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하나님의 아들-신분-관계 / 예수-그리스도-사명-목적. 사람이 무시를 당할 때 몹시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에게 안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지위에 있는 데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자신의 신분에 안정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이나 관계 또는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목적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요17:4).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은 자,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 사명이 있는 자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버지와의 관계에 안정을 두시고, 그의 사명 때문에 삶의 목적을 두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배워 나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안다면, 어떠한 관계 속에서도, 고독감이나 두려움이 없이 안정과 평화를 유지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명,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안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은 대담함과 포기하지 않는 추진력을 가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나’에 대한 그림을 갖고 이루려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만족과 안정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신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일을 했느냐, 내가 얼마만큼 성취했느냐 하는 것이 나의 안정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사명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이 너무도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위기가 찾아오는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신분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안정감을 얻게 되고, 또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인생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삶의 추진력을 주는 것은 사명을 아는 것이요. 삶의 안정감을 주는 것은 신분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명 안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인가?
그러면 교회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라고 하신 것은 지식과 학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16:16-1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이 말은 하나님의 영신 성령으로 알게 하신 것말씀입니다(참고/고전12:3). 우리가 전도할 때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듣는 이들도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 될 수 있는 것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이 경험과 지식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하시며,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마16:17). 그리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8). ‘너는 베드로라’와 “이 반석 위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반석 위에”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그 신앙 고백이 교회입니다.교회의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를 돌로 지은 건물에 비유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나의 ‘돌’인 것입니다. 반석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벧전2:4.참고/엡2:20). 또한, 예수를 믿는 우리도 ‘산 돌’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 예수 믿는 우리도 산 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하나씩 하나씩 지어져 가는 부분들입니다. 이전에 죄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죽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 돌로 바뀌었습니다. 왜 산돌이 되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라는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산 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신앙 고백을 한 우리 각 사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신분. 이 말씀은 교회의 신분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분은 성전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집니다(참고/엡4:16). 이것은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과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 믿는 자들 사이에서의 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갈4:6.참고/막14:36;롬8:15). 그래서 하나님과 ‘코이노니아’koinonia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코이노니아에는 예배가 있고, 말씀있고, 기도가 있고, 성찬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로 하나님께 나누는 교제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 사이에 코이노니아 교제도 있습니다. 떡을 떼고, 물질을 서로 나누고, 서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참아 주는 것,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입니다(행2:42).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서로 사랑하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교회의 신분은 설명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음부의 권세’에서 ‘권세’는 헬라어에는 ‘대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사탄이 왕노릇하는 왕국입니다. 그 왕국에 대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사단 왕국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원수 마귀의 대문을 공격하여, 원수의 왕국에 공격하여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7). 그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사탄을 방어하는 수동적인데서 벗어나 공경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의 왕국, 사탄의 왕국의 대문을 깨뜨리면서, 그 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이스라엘이 공격했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힘을 모아 그 문을 굳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때로는 가나안 족속들이 동맹을 맺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가나안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를 잘 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원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자기의 땅, 권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여, 우리가 이제 험한 세상에 나아갑니다.”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공격에 벙어를 잘 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수비자의 모습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아버지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처럼 나를 통해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나를 통해 공격함으로써 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주시며, 내 보낸 70명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가 무너진 일들을 보고하며 기뻐하셨습니다(눅10:17). 이것이 교회의 본모습입니다.
‘레오나르도 레이븐 힐’Leonardo Raven Hill이 쓴 “지옥에서도 유명함”이라는 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악귀를 물리치자, 유대인의 제사장 일곱 아들 다섯이 그를 흉내내었다가,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행19:15-16). 사도 바울은 지옥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사도 바울 때문에 너무 신경이 쓰였습니다. 바울은 권세를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비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여서, 원수의 대문을 깨뜨려 어둠의 왕국을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주의 뜻을 성취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옥의 “Blacklist”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단의 왕국에서 우리는 잘 아려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공격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지옥에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움직이는 곳마다 사탄의 왕국이 긴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긴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격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면 회사에 주의 나라가 임하시고, 학교에 가면 주의 나라가 학교에 임하시고, 시장에 가면 시장에 나를 통해서 주의 나라가 학장되어 가게 하소서”하고 기도합시다.
공격하는 사람, 원수의 대문을 깨뜨리는 삶,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실 때,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삶입니다. 이같이 교회는 사단의 왕국을 공격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즉, 교회는 모여서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나가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할 때에 부흥이 있게 됩니다.
건물을 중심으로 관계를 세워 나가는 것이 교회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관계만을 위해 있다면, 마치 박물관에 있는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영적 전쟁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사탄을 공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 ‘앉히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앉히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세를 그 발 아래 복종시키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삼킬 것 같은 권세들 밖에 없어 보이지만, 나의 지금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며 예수의 권세로 그것을 결박하고 확장시킬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 우리가 할 일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신분 하나님의 아들, 사명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을 누리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의 사명은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나의 인생에 안정을 얻고 방향을 정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교회의 신분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배와 말씀과 기도에 더욱 전력하게 하옵시고, 주님을 통해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서로 위로하고 참아주고 나눠주는 서로 사랑으로 더욱 깊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을 방어하는 수비적인데서 벗어나 공격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처럼 나를 통해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내가 있는 교회와 가정과 기업에 나를 통해 악이 패퇴하고 주의 나라게 세워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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