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삼상 17:12-30) 이재현목사(23.08.20)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8. 20. 18:15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말씀 : 사무엘상 17:12~30 2023.08.20. 主日禮拜

 

“12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3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14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15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에 16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17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19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20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21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치하였더라 22다윗이 자기의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23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24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25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26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7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이르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29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30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삼상17:12-30)

 

 

시편 저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며 낙망하고 있습니다(42:5,11,43:5). 첫째 눈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 그는 포로 또는 억류 당한 처지에서, 주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야유합니다(42:4). 둘째 현실 앞에서 무능한 자신. 시편 42, 43’ 1인칭 대명사를 51, ‘하나님21번밖에 쓰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갇혀 있는 것입니다. 셋째 과거와 현재를 비교.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성소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는데, 지금은 버리면 받은 신세와 같습니다. 마치 우리 자신을 보는 듯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오지 않습니다. 유대광야는 파란색 잡초 하나 없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 장장 100km에 걸쳐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물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느라고 온 사방을 누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슴에게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끝까지 물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이 낙망을 벗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다.” 저자가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죽음이다.”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고, 목마른 사슴과 같이 오늘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다.” 은혜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두 번째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의 주먹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해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 오면서 가슴에 한이 맺힌 한나는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던지, 제사장 엘리가 술에 취했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몇 사람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공동체입니다(참고/18:20). 낙심되어 하나님을 갈급하며 찾기를 원합니까? 교회공동체에다 자기를 맡기십시오. 가슴이 무너지는 일을 만나면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서는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겠다는 갈증이 클수록 공동체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급함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42:5),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며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는 예전 개역 한글에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낙망이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고개가 자꾸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땅만 쳐다보게 되고 그것도 지치면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한 마디로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하늘을 보게합니다. 소망을 갖게 하시고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얼굴을 들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50:15). 그렇다면 그 약속이 내 삶에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낙망할 때 믿음이 아무 소용 없더라. 예수를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더라라고 한다면, “내가 과연 어려울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찼듯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내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가? 어떻게 기도했나? 어떻게 교회공동체에 나 자신을 맡겼는가?” 자성해야 합니다. 적당히 믿으면 신앙에 재미가 없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갈 때 체험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이 말씀대로 하는 자에게 주시는 응답을 축복합니다.

 

 

이새의 자랑스러운 아들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유대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삼상17:12).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가리키는 오래전 명칭입니다. 이곳에 살던 이새에게는 엘리압, 아비나답, 시므아, 느다넬, 랏대, 오셈, 엘리후?, 스류야, 아비가일 그리고 다윗, 이렇게 많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장자인 엘리압은 특히 이새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이었던 사무엘도 엘리압을 본 순간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을 자, 선택받은 왕으로 알았지 않겠습니까?(‘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16:6))

 

한 청년의 결혼식 때였습니다. 식장 입구에 그 청년의 아버지와 큰 형이 나란히 서서 오시는 하객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백발이 성성하고 기력에 세한 노신사였지만, 옆에 건장한 장남이 딱 버티고 있으니 참 보기 좋더라고요. 한 권사님께서 소천 하셔서 장례식에 참석을 하였을 때도 보니까요. 부군 되는 장로님 옆에 아들 4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조문하러 온 분들이 고인이 참 복있다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장남 되시는 분이 어찌나 겸손하신지요. 그 내외분이 다 의학 박사인데요. 예배드리고 나서 당시 젊은 목사인 저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귀한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고 하셨고, 자부가 되시는 분도 젊은 목사님이 은혜가 있고 정말 감사합니다. 평안히 살펴 가세요하며 공손한 모습을 뵐 수 있었습니다. “! 이래서 어른들이 아들을 그렇게 낳으려고 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구나!”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도님들도 부모님에게 모두가 대견한 아들들이고, 어여쁜 딸들이죠!

 

바로 이새에게 엘리압은 이처럼 든든한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베들레헴 변두리에서 양이나 치는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엘리압은 다른 집안에 누구와도 비할 데가 없는 아주 자랑스러운 장손이었습니다. 엘리압은 동생 아비나답, 삼마와 함께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 중에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라는 말씀을 볼 때,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애국심도 대단히 컸습니다(삼상17:13). 비록 위세있는 가문은 아니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다운 기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관심은 항상 장자 엘리압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부름

 

이새가 하루는 다윗에게 볶은 곡식 한 에바와 떡 열 덩이를 싸주고는 진영’陣營으로 속히 가라’(삼상17:17). 전쟁터로 가란 말이죠. 진영으로 가서 형들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치즈 열 덩이를 따로 떼어 주고는 천부장’, 형들의 부대장에게 갖다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라고 시켰습니다(삼상17:18). ! 형들에게 줄 양식을 심부름시키면서, 천부장에게도 별도의 음식을 주고 증표를 가지고 오라 했을까요? 전장에서 수고하는 지휘관을 대접하기도 위함이었지만, 아마도 이새의 생각에는 다윗을 보아하니, 전쟁터에 갈 용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설사 간다고 해도 양이나 치던 아이가 칼과 창이 번쩍거리고는 전장의 모습을 보고, 무서워 그냥 돌아올까 봐 염려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을 만나 증표를 받아 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볼 때 장자인 엘리압에 비해 말째인 다윗은 사울의 왕궁과 베들레헴을 오고 가며, 양이나 치고 아버지 잔심부름하는 아직 마음에 놓이지 않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항상 불안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아버지 이새도 못 미더워하던 다윗은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기 전 자신의 양 떼를 다른 목자에게 맡기는 책임감을 보였습니다(삼상17:20). 아버지가 본 다윗과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싸준 짐을 지고 길을 떠나 진영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형들은 다른 군인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전쟁터로 떠난 후이었습니다(삼상17:20). 블레셋 군과 항오를 벌이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삼상17:21). 아버지 이새의 생각대로였다면, 다윗은 도망을 왔을 터인데 음식이 담긴 을 감시병에 맡기고는 최전선을 향해 한숨에 달려갔습니다(삼상17:22). 형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아버지의 안부를 전합니다(삼상17:22). 다윗이 겁쟁이였다면, 최전선에 갈 필요도 없고, 진지에서 형들 생사나 확인하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전쟁터까지 가서 직접 형들을 만난 용감함을 보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보인 책임감과 용감함은 아버지 이새가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골리앗에게 치욕을 당하는 이스라엘

 

오랜만에 형들하고 재회한 다윗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적진 블레셋 진영에서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삼상17:23). 누군가 하고 바로 보니, 입이 쩍하고 벌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장수가 정승처럼 서 있습니다. 그 키가 자그마치 여섯 규빗’ 3m에 이르고, ‘놋 오천 세겔’ 60Kg가 나가는 갑옷을 입고, 창날 무게만 철 육백 세겔’ 7kg나 되는 자루가 베틀의 용두머리만큼 굵은 창을 들고서, 큰 방패를 든 호위병을 앞세운 골리앗이 떡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삼상17:4-7).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이스라엘을 모욕하며 진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삼상17:8,9,2).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호랑이 앞에 개라도 된 듯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17:24). 대항은커녕 맞서 고함치는 사람 하나 없이 꼬리를 내려 버린 것입니다. 골리앗의 도발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일 동안을 아침과 저녁에 한번씩 80번을 반복해서 계속되었습니다(삼상17:16). 이스라엘에게 기를 기대로 죽이고 약은 약대로 올리고 아예 전쟁할 염두조차 못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 것은 골리앗에게 이런 모욕을 듣고도, 이스라엘 진영에는 대적할 만한 병사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미천한 블레셋에게 한 마디로 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사울 왕이 골리앗을 죽이면 많은 재물로 상을 주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그 집안 식구 모두에게는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준다고 공고까지 하였겠습니까?(삼상17:25)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이 골리앗의 그 위풍당당한 체구와 우레 같은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바로 서지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압의 꾸지람을 듣는 다윗

 

이때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 “저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준 다구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라며, 이스라엘 진영 내에서 만나는 군인들에게 마다 호소를 합니다. 당돌한 다윗의 말을 들은 큰 형 엘리압이 크게 화를 내면서 호통을 칩니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이 센 녀석,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많은 군인 앞에서 면박을 줍니다. 새카만 녀석이 앞뒤 모르고 설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엘리압은 아버지 이새와 같이 다윗을 그때까지 철부지 어린아이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다윗이 답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삼상17:29). “내가 지금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저 말 한마디 물어보았을 따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아마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마는 엘리압이 이 녀석이 어디다 대들고 있어하고 다윗에게 꿀밤을 먹였던지,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 때려 먼저 태어나면 다야라고 대들었을까요?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서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17:30). 이 말을 현대어 성경에 보면 다윗이 형에게서 멀찌감치 떠났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대적對敵은 골리앗이 아니라 엘리압입니다. 형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동생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마냥 어린아이로 알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의지를 꺾어 버린 것이 바로 엘리압입니다. 다윗의 대적은 엘리압입니다. 다윗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서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들고 난 후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물론 형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물어보지도 못합니까?”라고 대꾸하였지만, 그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즉 자신이 싸워야 할 진짜 싸워야 할 대적, 진짜 대적은 골리앗이지 형 엘리압이 아닌 것을 안 것입니다. 엘리압은 다윗의 대적으로 진짜 대적 골리앗을 못 보게 하는 대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형 엘리압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엘리압을 떠나 진짜 대적인 골리앗에게로 갔습니다. 그것을 본문은 돌아서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떠나지 않고 형 엘리압과 계속 논쟁을 했다면,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때도 물매를 가지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 골리앗 죽이기 전에 형 먼저 죽여야겠다. 이게 형이면 다냐! 내가 그동안 갈고 닦은 물매 솜씨 한번 보라, 물매 돌을 던져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형은 죽일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헛되게 힘을 다 소비하고, 혈기와 분냄으로, 진짜 대적인 적장 골리앗에게는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적은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합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적은 내 가정과 교회 내에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진짜 대적인 사탄은 뒤로 한 채, “다 내 맘 같은 줄 알아라면서 다른 사람들을 못 믿을 사람으로 여겨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의 계략에 빠지는 꼴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부른 모든 찬양이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처럼 허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헛된 곳에 힘을 소비하고, 혈기와 분냄으로 사랑할 사람을 자꾸 잃게 됩니다. 우리의 진짜 대적은 그것을 노리고 있는 사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자기가 진짜 대적인 것을 숨기고,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이 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성도들 사이를 가족 사이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우리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오늘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바른 영분별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싸워야 할 상대는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지금 나를 막고 서 있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 뒤에 정작 내가 감당해야 할 대적이 누구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전인 여러분의 몸을 거룩한 일에 드릴 수 있습니다(고전6:19).

 

저는 본문에서 잘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이 사이의 전쟁이 아닌 다윗과 엘리압의 관계를 비추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엘리압은 그 어떤 면으로 보나 장자 같은 장자였습니다. 다윗은 아비 양이나 치고, 잔심부름이나 하는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비인 이새도 형 엘리압도 알지 못했지만, 다윗만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었던, 양을 치면서 체험한 하나님의 산 역사입니다.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17:34-35). 양 떼를 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을 움키면, 사자와 곰을 쫓아가서 막대기로 치고, 그 입에서 양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확신한 것이 있었습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6).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도 건져내신 하나님께서는 저 무시무시한 적장 골리앗에게서도 건져내시고 이기게 하시리라는 믿음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 되고, 훗날 이스라엘이 낳은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삼상17:49-50,18:5;삼하2:7,5:3).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후손을 이은 장자 엘리압은 블레셋과 대전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기회를 얻었지만, 우리나라 조선 시대로 말하면 궁을 떠난 낙향한 대군처럼 초야 묻혀 지내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나 하고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산 역사를 체험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에게 이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제 마음속에 언젠 인가부터 우리 교회 자녀들에게 전할 말씀을 준비하라는 감동을 받았어요. 오늘 설교는 그 선상에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린이주일학교, 청소년, 청년 여러분! 그 소중한 시간에 다윗과 같은 하나님을 만나는 확실한 체험을 하기 바랍니다. 유아부터 노년에까지 세대마다 받은 은혜의 영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청소년 그리고 청년 시절은 그 인생을 좌우하고, 교회의 다리요. 허리로 부흥의 중심이 됩니다. 다 윗같은 증거를 나에게도 허락해 달라도 간절히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 일생을 좌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산 역사를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을 통해 본 지도자

한 신문사에서 ‘21세기의 기업가상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권위 있는 경제 전문 메거진’Magazine에서 세계 20개국의 1,500명 가량의 기업가들에게 “21세기에 바람직한 기업가가 가져야 할 자질의 무엇이냐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응답은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

비전 있는 지도자

 

첫째는 비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 버는 기업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원들 앞에 기업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기여 할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래지향적인 지도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비전을 가진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 이 말씀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leaders’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이 리더들이 일을 추진해 나갈 때 우리는 그것을 ‘leadership’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리더, 지도자의 비전, 리더십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방금 합독한 말씀에서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사람, 즉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비전이 바로 리더, 지도자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교역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모두를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3-14). 그 말은 세상에서 지도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부터 다른 영혼을 인도할 지도자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나 세상의 지도자가 이미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도자입니다. 한 영혼, 그 영혼이 예수를 믿고, 그 영혼이 은혜를 받고 변화하여, 그 영혼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깨닫고, 그 영혼이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감당해 나가는 것. 이 한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이 있어야 지도자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이렇게 한 영혼의 소중함 발견할 수 있어야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영혼에 대한 비전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장차 하나님께 자기가 한 일을 낱낱이 아뢰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업적을 이루었느냐가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사역을 위해 새로운 계획을 들을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들을 통해 무슨 업적을 이루었다 하여도, 그를 통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한 것이었는가를 하나님께서 회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의 귀결은 한 영혼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행복한 삶으로 이 땅에서 살도록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그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4-37)

 

이 말씀을 볼 때, 다윗이 적장 그 막강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시작이, 한 마리의 양을 지키면서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 한 마리의 양을 지킴에서, 온 이스라엘을 이끌 수 있는 비전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양 한 마리 없으면 그만이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 싸우는 것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그것은 한 마리의 비천한 양이지만 다윗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기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업은 바로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간절함이 한 영혼, 한 민족, 한 국가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 앞에서도 하나님이 예전에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도 지켜주었던 것처럼, 골리앗 앞에서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리 양, 한 영혼에서부터, 이러한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한 영혼에 대한 비전을 심장에 새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함께 했던 성도님들 가운데, 한 영혼에 대한 간절함을 갖고 헌신한 분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오늘도 그분들은 여전히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당시에는 다같이 한 영혼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했던 분들이 누구였는가는 십수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알 수 있겠더라 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은 직장 때문에, 결혼 때문에, 애 키우는 것 때문에, 경제적 이유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시부모 때문에, 집 장만 때문에, 자녀교육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를 말하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청년 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시집가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는 것이에요.

 

내가 구원받은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성도는, 내가 받은 구원을 받지 못한 한 영혼에게 전하려고 날마다 날마다 쉼 없이, 복음을 전하고 섬김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천한 양 새끼 하나를 구하려고, 곰과 사자와 맞서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 마리 양에 대한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 청아비전교회 성도님들은 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8:36).

코페르니쿠스적 개혁

 

“21세기에 바람직한 기업가가 가져야 할 자질두 번째는 코페르니쿠스적인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개혁 정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1473년 태어나 1543년까지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천동설을 믿었는데, 이를 깨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태양 중심설, 지동설을 제창한 폴란드의 천문학자입니다. 지금이야 그깟 지동설이 뭐 그리 대단하냐!” 할 수 있지만, 당시에 그 말을 하고 다니면, “미친 사람소리를 들었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하여 역적으로까지 취급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이라고 하면 아주 획기적이다”, “개혁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시대를 앞설 수 있는 개혁적인 사고와 지도자가 있어야만 앞일을 바로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개혁은 무엇입니까? 15171031마르틴 루터’Martin Luthe,1483-1546가 로마가톨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운동은 의전을 중시하는 천주교와 달리 성경을 첫째로 하였습니다. 이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란 성경에 비추어 바르지 못한 것들을 늘 개혁해 나가는 것을 제일로 삼기에 개혁주의’reformism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개혁적이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성경을 떠나 발전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시대가 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욱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거쳐 그 소망하던 대로 왕을 세워 통일 왕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일개 부족 국가인 블레셋의 적장 하나 대항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단 것은,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선민이지 신앙을 져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출중한 인물 사울 왕도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영적인 잠을 깨운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살아 계심을 대적들 앞에 선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대각성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분명하심을 확고히 믿고, 그것을 체험하는 성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개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아닙니까? 개혁주의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으로 누리는 안식보다, 그 문명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더해갑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가면 갈수록 문명이 아니라, 신앙의 중요성이 더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님들은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문명이 발달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합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문명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을 붙잡는 것이 코페르니쿠스 개혁입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21세기에 바람직한 기업가가 가져야 할 자질”. 세 번째는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CEO는 회사의 종업원들과의 대화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지도자들은 대화를 잘했습니다. 비전의 메시지, 좋은 말, 희망의 소식을 자꾸 전해야 합니다.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자리에 있다고 힘으로 누르면 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으므로 비리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본문에 다윗은 블레셋과 대치 중인 이스라엘의 진영에 가보니, 적장 골리앗에게 온 군대가 꼼짝을 못 하고 있습니다. 이에 ! 우리가 저 골리앗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여야만 하는가?”, “!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선민인 우리 이스라엘군이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가?”. 군인들을 만나면서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여론이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전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삼상17:31). 그리고 사울에게 선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삼상17:32). 이 말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낙담하지 말 것이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믿는 의로운 여론은 일말의 희망을 왕과 이스라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이것은 적장 골리앗을 일격에 무너뜨리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를 주는 신앙의 말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의 근원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소생하고, 치유와 회복이 나타나며, 부흥의 아름다운 소식을 널리 퍼뜨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희망, , 비전을 보는 역사기 있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 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다윗은 본문에 앞서 사무엘에게 사울의 뒤를 이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는 양 떼나 치고 잔심부름을 하는 말째로, 형들에게는 철부지 여김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이렇게 양 떼를 치면서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확고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앙이 장정들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지도자적 자질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산 역사로 준비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문제 앞에서 돌아서서 행하게 하옵소서

 

소년 때부터 준비되었던 다윗의 진가가 발휘할 수 있었던 순간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대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지금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엘리압이 아닌 골리앗이 진짜 대적임을 알았던 것처럼, 진짜 대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 유명 탤런트가 15년 전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애도했습니다. 그것은 고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자리가 그만큼 높았던 국민배우 중의 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같은 동료였고, 친동생같이 아꼈던 후배 남편이 생을 마감한 지, 한 달도 안 된 상태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었습니다. 고인은 오래전부터 우울증 증세로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죽은 후배의 남편과 관련된 사채업자라는 소문에 시달리면서 더욱 심해졌다고 합니다.

 

“‘나는 외톨이·왕따,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 ‘왜 연예인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힘들다.’ ‘밤이면 불안하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영화계가 날 버렸다’ ‘이제 남들을 못 믿겠다.’ ‘세상에 섭섭하다.’ ‘내가 왜 아무 연관이 없는 사채업자로 비난 받아야 하는가? 죽고 싶다’ ‘죽으면 내 진실을 믿어줄까? 내 이름은 진실인데, 사람들은 나를 가식이라고 부른다.’ ‘두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엄마보단 죽어서 진실이 밝혀진 엄마가 낫지 않을까’”

 

이것은 고인이 죽음 직전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주 한 말들과 수첩에 메모한 글들입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죽음을 분명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죽음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그 길을 선택했을까요?

 

이후 자살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말이 기독교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자살한 성도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자살에 관한 여러 사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라고 묻지 말고 구원받는 믿음과 자살행위가 양립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여러분 스스로가 성경적으로 잘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돌아서서입니다. 앞에 말한 고인외에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길을 간 것에는 수많은 악플을 견딜 힘이 없었다는 것이고요. 특히 믿는 분들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마지막까지 신앙의 힘으로 이기는 길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이 죽음은 속한 교회 그리고 모든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 내가 속한 모임 안에서, 한 영혼들의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를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떤 커다란 문제 앞에서 돌아서서행하게 하는 능력이 우리 교회공동체에 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성도님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것은 인내입니다. 우리나라의 무역 규모는 세계 10위 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수치일 뿐 내수는 오히려 악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려워지고만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참으세요.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주의 때를 기다리며, 꿋꿋이 이기시길 바랍니다. 특히 사랑하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힘주어 강조하고 싶습니다. 믿음은 바닥을 칠 때까지 믿는 것이 믿음이요. 지금 순간순간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고 이겨야 합니다.

신앙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산 역사를 체험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돌아서서 향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turned’이라고 번역했어요. 그렇게 될 때 죄인인 인간만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않아요. 진짜 대적인 마귀의 계략을 간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러한 위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

 

이새의 자랑스러운 아들들

 

유대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에세는 엘리압, 아비나답, 시므아, 느다넬, 랏대, 오셈, 엘리후?, 스류야, 아비가일, 다윗까지 많은 아들이 있었습니다(삼상17:12). 이 중에 장자 엘리압은 특히 이새의 자랑이었습니다(참고/삼상16:6)). 비록 베들레헴 변두리에서 양이나 치는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엘리압은 다른 집안에 누구와도 비할 데가 없는 아주 자랑스러운 큰아들이었습니다. 엘리압은 동생 아비나답, 삼마와 함께 당시 블레셋과 전쟁에 참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애국심도 대단히 컸습니다(삼상17:13).

 

아버지의 심부름. 그러나 말째 다윗은 사울의 왕궁과 베들레헴을 오고 가며, 양이나 치고 아버지 잔심부름하는 아직 마음에 놓이지 않는 어린아이에 불과 하였습니다(참고/삼상17:17-19). 그러나 진영에 있는 형들을 만나고 오라는 아버지 심부름에 다윗은 다음날 일찍이 일어나, 떠나기 전 자신의 양 떼를 다른 목자에게 맡기는 책임감을 보였습니다(삼상17:20). 그런데 마침 형들이 전쟁터로 떠난 후인 것을 알고는 음식이 담긴 을 감시병에 맡기고는 최전선을 향해 한숨에 달려가, 형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전합니다(삼상17:20-22). 다윗이 겁쟁이였다면, 대적 블레셋이 있는 전장戰場에 갈 필요도 없고, 진영에서 형들 생사나 확인하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전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직접 형들을 만난 용감함을 보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보인 책임감과 용감함은 아버지 이새가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골리앗에게 치욕을 당하는 이스라엘. 오랜만에 형들하고 재회한 다윗은 담소를 나누던 중 블레셋 진영에서 괴성을 듣게 됩니다(삼상17:23). 키가 3m에 달하는 적장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삼상17:4-8,9,2). 그러나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삼상17:24). 오죽하면 사울 왕이 골리앗을 죽이면 많은 재물로 상을 주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그 집안 식구 모두에게는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준다고 공고까지 하였겠습니까?(삼상17:25). 이스라엘은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압의 꾸지람을 듣는 다윗. 이때 다윗은 저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준 다구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라며, 군인들에게 마다 호소를 합니다(삼상17:26). 이 당돌한 말을 들은 큰 형 엘리압이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이 센 녀석,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많은 군인 앞에서 면박을 줍니다(삼상17:28). 이에 다윗이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였습니다(삼상17:29-30). 현대어 성경에는 다윗이 형에게서 멀찌감치 떠났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대적對敵은 골리앗이 아니라 엘리압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동생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마냥 어린아이로 알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의지를 꺾어 버린 것이 바로 엘리압입니다. 다윗의 대적은 엘리압입니다. 다윗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서서

 

그러나 다윗은 형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자신이 싸워야 할 진짜 싸워야 할 대적, 진짜 대적은 골리앗이지 형 엘리압이 아닌 것을 안 것입니다. 엘리압은 다윗의 대적으로 진짜 대적 골리앗을 못 보게 하는 대적입니다. 엘리압을 떠나 진짜 대적인 골리앗에게로 갔습니다. 만약 여기서 떠나지 않고, 형 엘리압과 계속 논쟁을 했다면,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적은 가까이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대적인 사탄은 뒤로 한 채, “다 내 맘 같은 줄 알아라면서, 다른 사람들을 못 믿을 사람으로 여겨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의 계략에 빠지는 꼴입니다.

 

사탄은 헛된 곳에 힘을 소비하고, 혈기와 분냄으로는 사랑할 사람을 자꾸 잃게 됩니다. 우리의 진짜 대적은 그것을 노리고 있는 사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자기가 진짜 대적인 것을 숨기고,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이 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성도들 사이를 가족 사이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영분별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를 막고 서 있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 뒤에 정작 내가 감당해야 할 대적이 누구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아비 이새도 형 엘리압도 알지 못했지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동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산 역사입니다. 양 떼를 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을 움키면 사자와 곰을 쫓아가서 막대기로 치고 그 입에서 양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면서 확신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도 건져내신 하나님께서는 저 무시무시한 적장 골리앗에게서도 건져내시고 이기게 하시리라는 믿음입니다(삼상17:34-36). 그 결과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 되고, 훗날 이스라엘이 낳은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삼상17:49-50,18:5;삼하2:7,5:3).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산 역사가 체험하는 능력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을 통해 본 지도자

21세기에 바람직한 기업가가 가져야 할 자질에 관한 설문 조사를 CEO들을 대상으로 한 적이 있는데요. 오늘 교훈과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기에 인용하고자 합니다. 첫째 비전 있는 사람입니다. 사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기여 할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비전을 가진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을 영어 성경에는 ‘leaders’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3:17). 지도자인 리더들이 일을 추진해 가는 것을 ‘leadership’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적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사람,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13:17). 이것은 교역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세상의 지도자라는 것입니다(5:13-14).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부터 다른 영혼을 인도할 지도자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를 믿고 위대한 일을 감당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이 있어야 지도자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비전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한 영혼을 위해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장차 하나님께 자기가 한 일을 낱낱이 아뢰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13:17).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한 것이었는가를 회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그 출발점은 한 마리의 양을 지키면서,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삼상17:34-37). 양 한 마리 없으면 그만이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과 싸우는 것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그것은 한 마리의 비천한 양이지만, 다윗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기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업은 바로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간절함이 한 영혼 한 민족 한 국가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한 영혼에 대한 비전을 심장에 새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로서 함께 했던 성도님들 가운데 한 영혼에 대한 간절함을 갖고 헌신한 분들은,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당시에는 다같이 한 영혼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했던 분들이 누구였는가는 십수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알 수 있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은 직장 때문에, 결혼 때문에, 애 키우는 것 때문에, 경제적 이유로, 배우자 때문에, 시부모 때문에, 집 장만 때문에, 자녀교육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를 말하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청년 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결혼해야 안다는 말이 있는 것이에요.

 

내가 구원받은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성도는, 내가 받은 구원을 받지 못한 한 영혼에게 전하려고, 날마다 날마다 쉼 없이, 복음을 전하고 섬김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천한 양 새끼 하나를 구하려고, 곰과 사자와 맞서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 마리 양에 대한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 청아비전교회 성도님들은 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8:36).

 

둘째 코페르니쿠스적인 개혁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1473-1543은 천동설을 믿던 시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설파했습니다. 당시 이 주장은 미친 사람 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역적으로까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이란 획기적이다”, “개혁적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개혁적입니까? ‘루터’Martin Luthe,1483-1546가 가톨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운동1517.10.31은 성경을 첫째로 하였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로 부릅니다. 성경에 비추어 바르지 못한 것들을 늘 개혁해 나간다는 의미의 개혁주의’reformism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개혁적이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성경을 떠나 발전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시대가 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욱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거쳐 소망하던 왕을 세워 통일 왕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개 부족 국가인 블레셋의 골리앗 하나, 대항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말이 선민이지, 신앙을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인 어둠을 깨운 사람이 다윗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대적들 앞에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 대각성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으로 누리는 안식보다,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더해갑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가면 갈수록 문명이 아니라, 신앙의 중요성이 더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을 붙잡는 것이 코페르니쿠스 개혁입니다.

 

셋째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메시지, 좋은 말, 희망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대치 중인 이스라엘이 적장 골리앗에게 꼼짝을 못 하자, “! 속수무책으로 당하여야만 하는가?”, “!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가?”. 군인들을 만나면서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습니다(삼상17:26,30).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사울에게 전하였() 사울이 다윗을 불렀습니다(삼상17:31). 사울 앞에 선 다윗은 골리앗으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싸우리이다고 하였습니다(삼상17:3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의로운 여론은 일말의 희망을 왕과 이스라엘에 안겨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골리앗을 일격에 무너뜨리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 힘이 되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담긴 신앙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의 근원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혼이 소생하고, 치유와 회복이 나타나며, 부흥의 아름다운 소식을 널리 퍼뜨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희망, , 비전을 보는 역사기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게 사울의 뒤를 이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16:13). 그렇지만 아버지에게는 양 떼나 치고 잔심부름하는 말째로 형들에게는 철부지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소년이었지만 양 떼를 치면서, 하나님 역사를 보았고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그 신앙이 장정들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지도자적 자질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문제 앞에서 돌아서서 행하게 하옵소서

 

한 유명 탤런트가 15년 전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애도했습니다. 그것은 고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자리가 그만큼 높았던 국민배우 중의 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외톨이·왕따,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 ‘왜 연예인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힘들다.’ ‘밤이면 불안하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영화계가 날 버렸다’ ‘이제 남들을 못 믿겠다.’ ‘세상에 섭섭하다.’ ‘내가 왜 아무 연관이 없는 사채업자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죽고 싶다’ ‘죽으면 내 진실을 믿어줄까? 내 이름은 진실인데, 사람들은 나를 가식이라고 부른다.’ ‘두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엄마보단 죽어서 진실이 밝혀진 엄마가 낫지 않을까?’” 죽기 전 가족과 지인들에게 자주 한 말들과 수첩에 메모한 글들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죽음을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라고 묻지 말고, “구원받는 믿음과 자살행위가 양립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스스로가 성경적으로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돌아서서입니다. 고인외에도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길을 간 것에는 많은 악플을 견딜 힘이 없었기도 했고, 믿는 분들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신앙의 힘으로 이기는 길에서 멀어져 있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죽음은 속한 교회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 내가 속한 모임 안에서, 한 영혼들의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를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떤 커다란 문제 앞에서 돌아서서행하게 하는 신앙이 우리 교회공동체에 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닥을 칠 때까지 믿는 것이 믿음이요. 지금 순간순간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고 이겨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산 역사를 체험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돌아서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않고, 진짜 대적인 마귀의 계략을 간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러한 위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의 제목 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다윗을 통해 살펴보았던 세 가지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다윗은 미천한 양 한마리를 구하려고, 곰과 사자와 맞서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 마리 양에 대한 사랑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 받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

 

두 번째 세상은 발달해 가는 문명 안에서 많은 안락을 누리기보다, 그 문명에서 뒤처질까 봐 항상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가면 갈수록 인간에 필요한 것은 고도로 발달 된 문명이 아닙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불안한 마음에 오직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하여 자신들의 왕을 세웠습니다. 국가를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일개 부족 국가인 블레셋에게도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졌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이스라엘 진영에서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 정신입니다. 개혁 정신은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증거 했습니다. 싸우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한 어린 목동의 외침이 골리앗 앞에 두려워 떨던 이스라엘 군대 안에 퍼지고, 나중에는 왕에게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 다윗의 희망의 소리가 퍼지고 퍼져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치는 역전의 발판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을 일으켜 세우는 말들, 격려, 위로는 희망을 얻게 합니다. 이런 야기가 많은 물소리처럼 울려 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성도님들을 향해 도전을 던집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지금 영적으로 돌아서서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간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돌아서서’ ‘turned’ 인생의 전환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주신 세 가지 가르침으로 지향해나갈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드립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돌아서서, 숨어있는 대적 사탄의 계략을 간파하고,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은 미천한 양 한 마리를 구하려고 곰과 사자와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한 마리 양에 대한 사랑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면 받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이 소원하던 왕을 세워 통일 국가를 세웠지만, 부족 국가인 블레셋에게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개혁 정신을 갖게 하옵소서.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어린 목동 다윗이 싸우시는 하나님을 외치자, 이스라엘 진영에 퍼지고 왕에게까지 들렸습니다. 다윗의 희망의 소리가 골리앗을 물리치는 역전의 발판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일으켜 세우는 말들, 격려, 위로로 희망을 얻게 하옵소서, 이 지역을 넘어 많은 물소리처럼 울려 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