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푯대를 향하여"(빌 3:12-14) 이재현목사(23.08.27)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3. 8. 27. 18:52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말씀 : 빌립보서 3:1214 2023.08.27. 主日禮拜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엘리압은 자랑스럽고 늠름한 장남이었습니다(참고/삼상16:6,17:12-13,17-22). 반면 말째 다윗은 사울의 왕궁과 베들레헴을 오고 가며, 양이나 치고 아버지 잔심부름하는 아직 마음에 놓이지 않는 아이에 불과했습니다(참고/삼상17:17-19). 한 날은 이새가 다윗에게 진영에 있는 형들을 만나 음식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삼상17:18). 다윗이 오랜만에 형들하고 재회 담소를 나누던 중 블레셋에서 적장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 중 나와 대적할 자를 보내어 지는 자가 종이 될 것을 소리치는 것을 듣게 됩니다(삼상17:9,23.참고/삼상17:4-8).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무도 맞서지 않았습니다(삼상17:24). 이때 다윗이 저자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냐며 호소를 합니다(삼상17:26). 이 말을 들은 엘리압은 전쟁을 구경이라 온 주제에 빨리 돌아가 양이나 치라며 많은 사람 앞에서 면박을 줍니다(삼상17:28). 그 자리에서 다윗은 형에게 맞서지 않고 돌아서서 다른 사람향했습니다(삼상17:30). 지금 다윗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엘리압입니다. 그러나 진짜 대적은 골리앗이지 형이 아닌 것을 안 것입니다.

 

적은 가까이에 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대적인 사탄은 뒤에 숨어서 혈기로 분탕질을 하게하고, 사랑할 사람을 자꾸 잃게 됩니다(6:12). 지금 나를 막고 서 있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 뒤에 정작 내가 맞서야 할 대적이 누구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아비 이새도 형 엘리압도 알지 못했지만, 체험한 하나님의 산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 떼를 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을 움키면 사자와 곰을 쫓아가서 막대기로 치고, 그 입에서 양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확신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도 건져내신 하나님께서는 저 무시무시한 적장 골리앗에게서도 건져내시고 이기게 하시리라는 믿음입니다(삼상17:34-36). 그 결과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고, 군대 최고 지휘관이 되고, 훗날 이스라엘이 낳은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삼상17:49-50,18:5;삼하2:7,5:3).

 

21세기에 바람직한 기업가가 가져야 할 자질에 관한 설문 조사를 CEO들을 대상으로 한적이 있는데요. 오늘 말씀 교훈과 삶에 적용할 수 있기에 인용하고자 합니다. 첫째 비전 있는 사람입니다. 사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기여 할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을 영어 성경에는 ‘leaders’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3:17). 성경적 리더십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것입니다(13:7).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13:17).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세상의 지도자라는 것입니다(5:13-14).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부터 다른 영혼을 인도할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어떤 업적이 아니라. ‘한 영혼을 위한 것이었는가를 경성회계하십니다(13:17).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그 출발점은 사자와 곰과 맞서 싸우면서도 한 마리 양을 지킨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영혼에서 한 민족 한 국가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을 비전으로 갖기 바랍니다(8:36).

 

둘째 코페르니쿠스적인 개혁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1473-1543은 천동설을 믿던 시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적이란 획기적이다”, “개혁적이다는 말입니다. ‘루터’Martin Luthe,1483-1546의 종교개혁운동1517.10.31은 성경을 첫째로 하였고, 이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로 부릅니다. 성경에 비추어 바르지 못한 것들을 늘 개혁해 나간다는 의미의 개혁주의’reformism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개혁적이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일개 부족 국가인 블레셋의 골리앗 하나 대항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말이 선민이지 신앙을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인 어둠을 깨운 사람이 다윗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대적들 앞에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 대각성을 일으켰습니다. 개혁주의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으로 누리는 안식보다,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더해갑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가면 갈수록 문명이 아니라, 신앙의 중요성이 더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을 붙잡는 것이 코페르니쿠스 개혁입니다.

 

셋째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대치 중인 이스라엘이 적장 골리앗에게 꼼짝 못 하자, “! 속수무책으로 당하여야만 하는가?”, “!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가?”. 군인들을 만나면서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습니다(삼상17:26,30).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사울에게 전하였습니다(삼상17:31). 사울 앞에 선 다윗은 골리앗으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싸우리이다고 하였습니다(삼상17:32).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의로운 여론은 일말의 희망을 왕과 이스라엘에 안겨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골리앗을 일격에 무너뜨리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 힘이 되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담긴 신앙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의 근원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혼이 소생하고, 치유와 회복이 나타나며, 부흥의 아름다운 소식을 널리 퍼뜨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희망, , 비전을 보는 역사기 있기를 축복합니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분들 가운데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영혼의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를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어떤 커다란 문제 앞에서 돌아서서행하게 하는 신앙이 우리 모임에 있는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산 역사를 체험하는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돌아서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않고, 진짜 대적인 마귀의 계략을 간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러한 위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

 

제가 군 생활을 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513일에 입대하여서, 논산에서 6주 훈련을 받고, 김해 공병학교에서 주특기 폭파병 교육 8주 그리고 서울-춘천-신남-현리를 거치는 한 달간의 대기를 거처, 인제에 있는 자대에 10월 중순 경 배치를 받았습니다. CP에 도살장에 끌려온 것처럼 더블백에 힘없이 앉아 있는데 행정반 분대장이 대대장에게 신고식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와 함께 신병으로 온 3명의 제식 동작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군대 얼차례 용어로 심어’, ‘박어를 몇 차례 한 후, 이런 말을 하더군요. “! 군대 생활 30개월이야 20개월만 고생해 그러면 나머지 10개월은 놀고먹어 10개월 놀려고 20개월 일하는 거야 알았어!” 그러는 것입니다. 그때 송충이 하나 이등병인데 다른 도리 있나요. “! 알겠습니다.” 3년 군 생활인데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대우가 있고, 또 그것을 의당 바랍니다.

 

사회 생활에는 단계가 있고 거기에 따른 대우가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해도 말단에서부터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느새 아래 사람이 생기고 대접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느덧 교회를 섬긴 지도 수십 년이 되었고, 자신이 예전에 전도했던 성도가 벌써 권사가 되었으니, 이제 교회에서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한 때는 그가 순교하기 5, 6년 전쯤으로, 이미 60대의 나이에 접어든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로마 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딱한 형편에서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로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전도했고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결과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드디어 로마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성도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 학파로 가장 존경받던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사사 받았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변론할 때,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Epicureanism와 함께 양대 사상인 금욕주의의 스토아Stoicism 학파의 고대 시인 아라투스Aratus,BC315-240의 시를 인용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헬라의 사상과 문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배경은 대단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배설물로 여겼고, 오히려 수학한 체계적 신학교육이 나중에는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 만큼 뛰어난 신학자가 되게 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이었던 회심 이전 활동은 회심 이후 성경 견해와 상이할 때, 타협하지 않았던 곧은 성품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 함께 초대교회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17km에서 최대 2km 정도로 지구의 절반 거리에 달합니. 장거리를 자동차나 비행기로 이동하는 지금과 달리 배와 육로를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오늘날 아시아는 당시 터키(소아시아)이었고, 서바나인 스페인은 당시 지구의 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8).

 

바울의 전도 여행과 서신서 13권은 초기 기독교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교회 시대의 거룩한 부흥을 이루고, 교회론을 정립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부름을 받은 이후,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했습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유대교와 구분된 기독교를 확립했고, 그 터 위에 교회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와 역사에 그가 미친 영향에 대해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바울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데반이 순교하자 바울을 준비시켰던 것처럼, 바울이 없었어도 그와 같은 사명자를 세우셨을 것입니다.

 

바울은 부름을 받은 후 30여 년간 초지일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가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서구 문명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하여 안주하든지, 이제 여유를 갖고 속도를 조금 늦추자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 이와 정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힘껏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전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푯대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것이 푯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푯대를 가리켜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13). 이것은 두 가지가 아닌 오직 한 가지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13). 그러므로 푯대의 의미는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이요. 이는 한 가지 일이며, 앞에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를 위해 일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핍박하고 미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다른 나라까지 원정을 떠나 그들을 결박하려고 공문을 받아 시리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잡히자마자 예수님이 바울의 주인이 되었고, 그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이게 웬일인가? 내가 왜 붙잡혀서 눈도 못 뜨고 땅에 엎드려져야 하고 이렇게 비참해지는가?” 하며 당황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어 손에 꽉 쥐셨는지를 알고, 난 후부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마음속에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무조건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참고/딤전1:12-16).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결심이 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이 예수를 위해 살리라. 이 예수를 나의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살리라.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내가 보고 달려갈 유일한 푯대다.”

 

이러한 목표를 정한 다음 그는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했고,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했으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기를 원했습니다.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예수처럼 욕먹고, 예수처럼 매 맞고, 예수처럼 굶주리고, 예수처럼 멸시받는 일을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자신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능력을 자신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존귀케 하는 것이 그가 설정한 인생 목표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기대, 바울의 목표, 바울의 간절한 소원에 대하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20).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 만이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찬양을 부르면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겠다는 바울의 심정에 동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생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목표가 있습니까? 바울처럼 예수님께 붙잡힌 자입니까?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입니까?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들기를 소원하는 자입니까?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박한 꿈이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나는 인생을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까? 과연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또 앞으로도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기 원합니까?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는 목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삶의 의욕이 넘치고,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그 자체로 어려운 것이며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한번 공을 잘못 치면, 공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그렇게 되면 그다음 경기가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골프가 대중화된 지금과 달리 부유층의 전유물로 서구의 인기 스포츠로 알고 있던 1998년 한국인 최초로 US Women`s Open에서 우승하며, 국민적 스타 반열에 오른 박세리 선수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대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공이 연못으로 빠져 버리자,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샷을 날린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박세리 선수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프로 골퍼가 아닌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인생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거나, 목표를 잘못 설정하면, 다음 진로가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길을 어떻게 들어서느냐가 중요합니다. 때에 따라 삶이 질서를 잃고 맙니다.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동영상 사이트를 쫓아다니면서, 인스턴트식과 같이 힘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돈 벌 수 정보를 진리인 것처럼 맹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러면 깨닫나요. 그렇지 않고 또 다른 일을 시도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면, 왜 자기가 돈을 벌지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겠어요. 속임수이지요. 전략이나, 목표, 일정한 우선순위 없이 행동하면 이러한 결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쉽게 이루려 하다가, 작은 일을 붙잡으려다가, 큰일을 놓쳐 버리는, 정말 안타까운 인생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목표가 불확실하거나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일컬어 누군가 딸꾹질하는 삶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가진 목표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정한 목표가 내 인생을 걸 만한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 목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목표는 피니스’finis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의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않는 목표가 진짜 목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It is finished”,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목표를 바르게 정하고 달려왔다는 증거입니다(19:30). 그래서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외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때 바른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까? 물론 둘 다 중요한 질문일 수 있지만, 궁극적인 질문이 되지는 못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흐르면 다 먼지 속에 파묻히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중요한 질문이라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지막에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러므로 과연 내가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을까?” 이것이 내 인생 종말의 질문이어야 합니다. !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구름에 가려 승천하신 예수님을 오백여 제자들이 넋 나간 듯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 천사 말합니다.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1). 재림 주에 의해 세상은 결국 소멸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지난 6천여 년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심판하시고,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주님이 세세토록 왕으로 통치하셔서, 첫 번째 아담의 범죄로 실패한 천지창조의 영광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것입니다(11:15.참고/2:44,7:26-26;고전15:24;16:19,18:2-3,21).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영원한 나라, 천국에 우리는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이되어 입성하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 영원토록 다스리게 됩니다(21:1-2.참고/7:9-10,13-14,27;5:2;1:33;살전5:23;21:24,27).

 

이처럼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했다면 마지막에 가서 큰 소리로 찬양할 수 있는 목표여야지, 중간에 사라지고 마는 목표를 가지고는 인생을 걸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계십니까? 바울은 바로 이런 목표를 푯대로 정해 놓고 인생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라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여러 가지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가정이나 행복과 같은 것은 참으로 중요한 목표가 아닙니까? 건강 역시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돈을 모으되 하나님의 나라와 선한 일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가능하면 성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가도 즐겨야 할 것입니다. 취미 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맛보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그런데도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모든 현실적인 목표나 계획이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그에 비해 나의 현실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꿈을 접어야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이야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펼쳐보고자 하는 자기의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기 꿈이 하나님의 꿈에 귀결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이 최종적인 목표가 추가되어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소원과 계획을 저울질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목표에 비추어서, 가정이나 재물에 대하여. 현재 내가 가진 생각이 얼마만큼 정당한지, 얼마만큼 합리적인지 평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울질의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재고해 봐야 하고, 나쁘다고 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푯대를 두고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웠으면 결단하고 변화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마음을 비우십시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1813-1855마음을 비운다는 것, 즉 마음을 단순하게 갖는다는 것을 한 가지만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짧은 인생인데 두세 가지 추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 생명을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마지막에 가서 큰소리칠 수 있는 것 하나만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을 붙잡고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은 달려가는 것

 

바울은 자기가 세운 이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노라라고 말합니다. ‘달려가노라라는 말은 좀 더 강한 어감인 쫓아간다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요즘 스포츠 중계에 사용되는 카메라의 성능은 워낙 뛰어나서, 순간적인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축구에는 오프사이드인지, 야구에는 태그 세입이 맞는지, 배구에서는 라인 안인지, 태권도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인 머리를 가격한 것이 맞는지, 비디오 판독으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얼굴 표정, 팔 동작, 다리 동작, 눈동자 하나 하나까지, 다 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경기장에서 카메라가 저속으로 선수들의 경주 자세를 분석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긴박한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끼며, 누가 승자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올림픽 등 중요 국제대회에서는 그 정확도 때문에 순위가 바뀌고, 육상 같은 경우에는 완주했어도 라인 터치로 실격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경주 장면을 잠깐 연상해 보세요. 몇몇 경주자가 앞에 있는 테이프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누가 먼저 그 테이프를 가슴에 대느냐에 따라 승자가 것입니다. 그 경주자에게 다른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결승 지점만을 목표로 하고 바라보면서, “내가 먼저 가슴을 댄다.”라는 일념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0.01초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선수가 마지막 역주를 하는 태도를 일컬어서 좇아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 속에는 굉장한 긴장과 힘이 담겨 있습니다. 전심을 다 쏟는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형편을 한번 보세요. 그는 지금 수감되어 언제 풀려 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60으로 접어들고 몸에는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남아 있습니다. 늘 통증을 달고 살면서 불편을 느끼는 사람입니다(참고/고후12:7). 그런 사람이 육상선수가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듯이 인생을 살겠다.”라고 토해낸 말을 우리는 결코 가볍게 들어선 안 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을 만도 한 처지인데 끝까지 달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달리리라.”는 바울의 몸부림을 한번 마음속에 영상으로 그려보세요.

그러므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기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볼펜이 있습니까? 종이가 제대로 있습니까? 게다가 시력마저 좋지 않습니다(참고/16:22). 그런데도 그 어두침침한 감옥 속에서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면서, 시간만 나면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성도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유대인들을 앉혀 놓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시위대’侍衛隊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1:3). 시위대는 집정관의 시위 대원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에는 약 9,000여명의 병력이 궁정 수비대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하루에 6시간씩 4교대로 하루만도 4명이 돌아가며, 바울과 접촉할 때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또 나머지 대원들은 바울을 만나 본 대원들을 통해 그것을 들었을 것입니다.장관을 하려고 해도 육사를 나와야 한다라는 말이 나돌던 때가 있었습니다. 군부 독재 30년간 군인들이 정치한 하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당시 시위 대원은 장래가 촉망받는 유능한 젊은이들로 장차 로마를 이끌 인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향을 로마에 전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투옥으로 소심해 있던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시위 대원들로부터,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주 예수 그리스를 증거하기 위해 쉼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에 용기를 얻고,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도무지 감옥에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달려가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어가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걸어가듯이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달려가는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멉니다.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40:31).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었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작은 예수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목표와 이상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적당히 걸어갈 수 없습니다. 적당히 기어가면서 할 일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최선을 다해야 되는 일입니다.

 

바울이 갇힌 감옥처럼, 우리의 처지가 답답한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환경에 구애받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에게 있는 몸의 가시처럼, 우리 몸이 연약한 부분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잠 못 이룰 때가 많다 하더라도, 절대로 좌절할 수 없습니다(참고/고후12:7). 설령 바울처럼 나이가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나이 탓만 하며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하고, 큰 목표를 향해 주야로 마음을 집중해서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교회는 항상 주보에 기재되어 있는 것과 같이, 청아비전교회 5大 생활이 있습니다.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생활 ∙온전한 십의일조와 헌금생활 ∙적극적인 복음전도와 증거생활 ∙분명한 사명의식과 헌신생활 ∙간절한 재림신앙와 신부생활 이상의 청아비전교회 5大 생활을 놓고 전심을 다하는 경주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분명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듯 이런 일들을 놓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달려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경주자의 자세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까? 그저 막연히 습관에 젖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본질을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지난 세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

 

바울은 자기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세 가지를 포기했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13). 쉽게 말하면 자신의 현재 상황이 아무리 만족스럽다 할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푯대입니다. 앞에 있는 푯대에 그의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은 이미 어느 경지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큼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예수님을 닮기 위해 평생을 투자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참고/고전4:6,16). 바울이 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신앙생활의 본보기로서,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라고 덧붙입니까? “나는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에 만족하기를 원치 않는다.” 실제로 그는 현재에 안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고 달려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지, 여러분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던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얼마만큼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던지,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든지 간에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현재에 안주하면 적당히 타협하거나, 영적 안이함에 빠져 달음질을 못 하고 맙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앞만 쳐다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의 자세 첫 번째 현재에 안주하지 않은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바울이 또 한 가지 포기하기로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13). 이는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딤전1:13).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전과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를 믿은 후로도 여러 번 실수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나나 사이에 알력이 불거져 서로 갈라졌습니다(참고/15:39).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를 이방에 전하는 자가 되었다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에게 소개해 주었고, 길리기아 다소에서 실의에 빠져 있던 바울을 안디옥교회에 초빙하여 목회하도록 하였고, 1차 전도 여행까지 함께 했던 동역자였습니다(9:27,11:25-26,13:2-3). 그런 바나바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아 있는 실수들은 하나님께서 다 덮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앞만 내다보고 달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3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을 만큼 놀라운 선교의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기를 진정 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과거와 결별해야 합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과거에 은혜를 많이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과거에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한 경험이 있습니까?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을 계속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것에 매이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실패, 상처, 원한 등으로 인해, 그리고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지금까지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원망스럽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런 과거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를 무력화시키고, 앞으로 달려가는 일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돌아보지 마시고 예수 안에서 다 잊어버리십시오.

 

내가 과거에 어떤 어려움을 당했다 할지라도 다 잊어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계속 돌아보면서, 그 일들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의 자세 두 번째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입니다.

미래에 기대하지 말라

 

바울이 세 번째로 포기하기로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입니다. 왜 미래를 포기해야 합니까? 미래를 포기한다는 것은 세상의 미래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정부는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불신의 장벽을 높이 쌓아가며, 내부적으로는 모든 것이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방향을 잃고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답답한 환경뿐, 한 자락 희망을 걸만한 것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세상은 좋아집니까? 세상의 미래에 기대를 걸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생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미래에 기대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14).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입니다(참고/14:2). 그러므로 현세의 미래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세의 미래, 장차 도래할 영원한 나라를 기대한다는 역설逆說인 것입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의 자세 첫 번째 현재에 안주와 둘째 과거에 집착과 셋째 미래에 기대, 현새의 미래 기대를 버리고, 내세의 기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달음질을 도우시는 하나님

 

예수님만을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놓고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단하셨다면,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겠습니다. 이런 나를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그저 구경만 하실까요? 고개만 끄덕끄덕하시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내가 예수님을 인생의 제일 큰 기쁨과 목표로 정해 놓고 살려고 하면, 그분은 결코 나를 적당히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주하는 선수들 가운데서 항상 제일 앞에 뛰는 사람을 주목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많은 성도가 있지만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남보다 먼저 뛰는 사람을 주목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인 예수님이 차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성도를 주목한 다음에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주십니다.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쓴 빌립보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말이 9번 이상이나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참고/2:18,3:1,4:4). 도대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푯대를 분명히 하고 달려가는 삶을 살기로 작심한 바울을 보시고, 예수님이 날마다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옥이라는 환경도, 나이도, 몸의 질병도 바울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불길한 예감조차도 그를 절망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지고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이 날마다 솟았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은혜를 맛보고 살았습니다. 바울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감옥이 이겼습니까? 네로가 이겼습니까? 로마 제국이 이겼습니까? 아무도 바울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조차도, 그 사람조차도, 그 물질조차도 우리를 절대로 넘어뜨리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푯대를 향해 바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혹시 병이 있습니까? 남이 모르는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까? 무거운 십자가의 짐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푯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능히 이기고도 남을 새 힘을 날마다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 탈봇신학교 실천학부 교수인 닐 앤더슨’Neil T. Anderson의 이야기인데요. 어느 믿음 좋은 부부가 선교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 훈련을 받던 기간에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닙니까?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결국, 너무나 견디기 힘든 충격 때문에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를 하였는데도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끔찍한 기억과 상처로부터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닐 앤더슨의 강의실에 그 부인이 찾아와 개인적으로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나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선교사로서 헌신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용납하십니까?” 그러자 닐 앤더슨이 대답했습니다. “잠깐,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단지 피해를 본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다 보면 피해를 보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피해를 통해서도, 당신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목사님 도무지 그런 것이 믿어지지 않고 계속 갈등만 일어나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그러면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평생 나는 성폭행 희생자.’라고 생각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그것을 아예 잊어버리고 나는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고백하면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삶의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5-39)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누가 우리를 넘어뜨립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힙니까? 푯대만 분명하다면, 그리고 달려가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세력이나 권세나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정리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한 때는 그가 순교하기 5, 6년 전쯤으로, 이미 60대의 나이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로마 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딱한 형편에서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로 30여 년 동안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전도했고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결과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기독교가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매김 하는 데 있어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서구 문명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하여 안주하든지, 이제 여유를 갖고 속도를 조금 늦추자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 이와 정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힘껏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전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푯대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것이 푯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푯대를 가리켜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13). 이것은 두 가지가 아닌 오직 한 가지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13). 그러므로 푯대의 의미는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이요. 이는 한 가지 일이며, 앞에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

 

바울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 믿는 성도를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잔멸했던 자였습니다. 예루살렘도 모자라 다메섹까지 원정을 떠나 그들을 결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잡히자마자 예수님이 바울의 주인이 되었고, 그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어 손에 꽉 쥐셨는지를 알고, 난 후부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마음속에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달려갈 유일한 푯대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정한 다음 예수처럼 욕먹고, 예수처럼 매 맞고, 예수처럼 굶주리고, 예수처럼 멸시받는 일을 자청했습니다(참고/3:10-11).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자신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능력을 자신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존귀케 하는 것이 그가 설정한 인생 목표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1:20),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생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목표가 있습니까? 바울처럼 예수님께 붙잡힌 자입니까?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입니까? 그래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들기를 소원하는 자입니까?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박한 꿈이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나는 인생을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까? 과연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또 앞으로도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기 원합니까?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는 목표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삶의 의욕이 넘치고,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표, 일정한 우선순위 없이 행동하면, 쉽게 이루려 하다가, 작은 일을 붙잡으려다가, 큰일을 놓쳐 버리는, 정말 안타까운 인생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인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라틴어로 목표는 피니스’finis인데, 종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목표는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의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않는 목표가 진짜 목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It is finished”,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인생 목표를 바르게 정하고 달려왔다는 증거입니다(19:30). 그래서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외친 것이 아닙니까? 목표를 정할 때 바른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까? 중요하 질문일 수 있지만 궁극적인 질문은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자의 것들은 다 잊혀질것이지만, 마지막에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참고/고후5:10). 그러므로 과연 내가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을까?” 이것이 내 인생 종말의 질문이어야 합니다. !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지신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1:11). 재림 주에 의해 세상은 결국 소멸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지난 역사 가운데 인류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심판하시고,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인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주님이 세세토록 왕으로 통치하셔서, 첫 번째 아담의 범죄로 실패한 천지창조의 영광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것입니다(11:15.참고/2:44,7:26-26;고전15:24;16:19,18:2-3,21).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영원한 나라, 천국에 우리는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이되어 입성하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 영원토록 다스리게 됩니다(21:1-2.참고/7:9-10,13-14,27;5:2;1:33;살전5:23;21:24,27).

 

이와 같이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했다면 마지막에 가서 큰 소리로 찬양할 수 있는 목표여야지, 중간에 사라지고 마는 목표를 가지고는 인생을 걸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계십니까? 바울은 바로 이런 목표를 푯대로 정해 놓고 인생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라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여러 가지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가정이나 행복과 같은 것은 참으로 중요한 목표가 아닙니까? 건강 역시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돈을 모으되 하나님의 나라와 선한 일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가능하면 성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가도 즐겨야 할 것입니다. 저같이 집 교회만 왔다 갔다 해도 정서적으로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취미 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맛보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계획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나의 현실적인 계획이나,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위해서는 자기 꿈을 접어야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이야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펼쳐보고자 하는 자기의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기 꿈이 하나님의 꿈에 귀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이 최종적인 목표가 추가되어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소원과 계획을 저울질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내가 가진 생각이 얼마만큼 정당한지, 합리적인지 평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재고해 봐야 하고, 나쁘다고 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푯대를 두고 사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1813-1855마음을 비운다는 것, 즉 마음을 단순하게 갖는다는 것을 한 가지만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생명을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마지막에 가서 큰소리칠 수 있는 것 하나만 붙잡고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은 달려가는 것

 

바울은 세운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보다 강한 어감인 쫓아간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경주자들은 0.01초로도 승부가 갈리는 결승 지점을 목표로 역주하는 태도를 일컬어서 달려간다. 쫓아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굉장한 긴장과 힘과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언제 풀려 나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말씀을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60으로 접어들고 몸에는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남아 있습니다(참고/고후12:7). 그런데 육상선수가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듯이 인생을 살겠다.”라고 토해낸 말을 우리는 결코 가볍게 들어선 안 됩니다. 주저앉을 만도 한 처지인데 끝까지 달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성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볼펜이 있습니까? 종이가 제대로 있습니까? 게다가 시력마저 좋지 않습니다(참고/16:22). 그런데도 어두침침한 감옥 속에서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면서, 시간만 나면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성도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앉혀 놓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은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같은 것입니다(40:31).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이라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적당히 걸어갈 수 없습니다. 적당히 기어가면서 할 일이 아닙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올라가야 합니다. 바울 같이 갇히고 병들고 쇠약해져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좌절할 수 없습니다. 안일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하고, 큰 목표를 향해 주야로 마음을 집중해서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생활 ∙온전한 십의일조와 헌금생활 ∙적극적인 복음전도와 증거생활∙분명한 사명의식과 헌신생활 ∙간절한 재림신앙과 신부생활 이상의 청아비전교회 5大 생활을 놓고 전심을 다 하는 경주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분명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듯 이런 일들을 놓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달려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경주자의 자세

 

바울은 자기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세 가지를 포기했습니다. 첫째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3:12),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3:13). 현재 상황이 아무리 만족스럽다 할지라도, 거기의 마음을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어느 경지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았기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참고/고전4:6,16). 그런데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지,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던지, 교회에서 얼마만큼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던지,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든지 간에 현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현재에 안주하면 적당히 타협하거나, 영적 안일함에 빠져 달음질을 못 하고 맙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앞만 쳐다보아야 합니다.

 

둘째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13).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딤전1:13).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후로도 여러 번 실수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나나 사이에 알력이 불거져 갈라선 것입니다(참고/15:39). 바울이 이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를 이방에 전하는 자가 되었다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에게 소개해 주었고, 길리기아 다소에서 실의에 빠져 있던 바울을 안디옥교회에 초빙하여 목회하도록 하였고, 1차전도 여행까지 함께 했던 동역자였습니다(9:27,11:25-26,13:2-3). 그런 바나바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아 있는 실수들은 하나님께서 다 덮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앞만 내다보고 달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어느 믿음 좋은 부부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훈련을 받던 중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고통의 기억과 상처로부터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 살면서 피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당신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자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평생 나는 성폭행 희생자.’라고 생각하면서 살든지, 아예 잊어버리고 나는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고백하면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삶의 방향 전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과거와 결별해야 합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과거에 은혜를 많이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과거에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한 경험이 있습니까?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실패, 상처, 원한 등으로 인해, 그리고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지금까지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원망스럽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이런 과거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를 무력화시키고, 앞으로 달려가는 일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돌아보지 마시고 예수 안에서 다 잊어버리십시오. 그렇지 않고 마음에 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셋째 미래에 기대하지 말라. 미래에 기대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미래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정부는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불신의 장벽을 높이 쌓아가며, 내부적으로는 모든 것이 붕괴하여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방향을 잃고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답답한 환경뿐, 한 자락 희망을 걸만한 것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세상은 좋아집니까? 세상의 미래에 기대를 걸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생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미래에 기대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14).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입니다(참고/14:2). 그러므로 현세의 미래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세의 미래, 장차 도래할 영원한 나라를 기대한다는 역설逆說인 것입니다. 현세의 미래 기대를 버리고, 내세의 기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달음질을 도우시는 하나님

 

예수님만을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놓고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달음질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셨다면, 이런 나를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예수님은 많은 성도가 있지만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남보다 먼저 뛰는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성도를 주목한 다음에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주십니다.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쓴 빌립보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말이 9번 이상이나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참고/2:18,3:1,4:4). 도대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푯대를 분명히 하고 달려가는 삶을 살기로 작심한 바울을 보시고, 예수님이 날마다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옥이라는 환경도, 나이도, 몸의 질병도 바울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불길한 예감조차도 그를 절망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지고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이 날마다 솟았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은혜를 맛보고 살았습니다. 바울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네로가 이겼습니까? 로마 제국이 이겼습니까? 아무도 바울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푯대를 향해 바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8:35-39).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는 우리를 누가 넘어뜨립니까? 누가 주저앉힙니까? 누가 포기하게 만듭니까? 푯대만 분명하다면, 그리고 달려가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세력이나 권세나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최종까지 후회하지 않는 것이야 합니다. 누구나 마지막에 예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요 승리자요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에 목표를 두고 두고 그 푯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푯대를 향한 신앙생활은 달려가는 것입니다. 적당히 기어가거나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 날게 치듯 올라는 것입니다. 청아비전교회 5大 생활에 전심으로 달려가는 경주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경주자의 자세. 이 정도 믿음이면 되었지라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게 하옵소서. 지난 죄악과 슬픔과 원한을 버려버려 과거에 집착하지 않게 하옵소서. 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현세의 미래 기대를 버리고, 영원한 나라 내세의 기대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푯대만 분명하다면, 그리고 달려가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세력이나 권세나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음을 믿고 행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만을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달려가는 성도에게 예수님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주십니다.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능력을 우리와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받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