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 19 이재현목사 "부자 청년의 근심"(마19:16-22)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5. 2. 22. 17:57

부자 청년의 근심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19:16-22 2025.02.02. 主日禮拜

 

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막10:1-12)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다(막10:13-16;눅18:15-17)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재물이 많은 청년(막10:17-25;눅18:18-25) 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제자들이 놀라다(막10:26-31;눅18:26-30)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1-30)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명절 동안 모두 평안하시고 행복한 시간 가지셨는지요. 온 가족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된 가정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레아와 유대에서 전도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인 가버나움, 벳세다, 고라신 등에서 천국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셨습니다(4:13,12:20-24;1:21,6:45;4:31,9:10,10:13-15;4:46). 이제 공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갈릴리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으로 돌아가시기 약 한 달 전으로서 대략 AD 292-3월 경으로 추정이 됩니다(예수님이 AD 1년에 태어나시고, 30년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3년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아는 분들이 있는데요. 서기력은 4년에서 많게는 8년 이상까지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해를 대략 AD 29년으로 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셨다고 하셨습니다(1). 이때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일주일 전인 수난 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와 유대를 순회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20장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입성까지 도중의 기사로, 보통 베레아 전도라고 불리는데, 이 전도사역은 갈릴리에서 출발로 시작되어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기름부음으로 끝납니다(참고/19:1-26:4;10:1-14:3). 이 기간에 예수님은 유대 백성으로부터는 약속된 메시아라는 기대와 환호를 받았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는 질시와 정죄와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셔서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는데요. 이곳을 유대와 베레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른 수많은 유대인과 함께 베레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여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유대인들은 거룩치 않은 땅으로 생각한 사마리아를 피하여 대신 베레아로 통과하곤 하였다(4:9).).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서 건너는 헬라어 페란πραν,pevran으로 유대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페란유대사이에 접속사로 그리고라는 헬라어 카이καί,kai입니다. ‘요단강 건너와 유대에 이르시니로 각각 독립 구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베레아의 헬라어는 건너편이란 뜻의 페라이아πέράὶἀ,peraea입니다. 이로 볼 때 예수님이 베레아와 유대에서 전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중적으로 사역하셨던 갈릴리를 떠나, 베레아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서 이미 소문을 들은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고 하였습니다(2). 예수님이 천국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신, 기사와 이적은, 공간과 시간과 상황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대양·육대주와 우주 전체에 안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그 어떤 장애도 뛰어넘는 분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메시아, 구원자입니다.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대속자입니다. 하늘 권세로 모든 상황을 이기시는 전능자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영으로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주님을 꼭 붙들고, 주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리새인의 음모

 

예수님이 베레아에 오셨다는 소문은 무리에게만 들려온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등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회인 산헤드린συνέδριον,sanhedrin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여, 예수님이 가신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시험과 비방과 모함을 일삼았습니다(참고/9:1-13,12:1-21,15:1-20;2:1-12,23-28,7:1-23;5:17-26,6:1-5). 베레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방문하신 베레아는 땅이 비옥肥沃하여 소출이 풍부하고, 경제력이 다른 지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평화로운 전원풍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지역의 주민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등 굉장히 우호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곳까지 찾아와서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무리를 충동질하여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이때 바리새인들이 결혼, 이혼, 재혼을 두고, 주님을 시험한 것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 사회적 이슈issue였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BC20-AD39는 원래 이스라엘 동남쪽에 있던 나바티아 왕국Nabatean Kingdom의 공주아레타스 4Aretas IV왕의 딸와 결혼했으나, 헤로디아Herodias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내쫓았습니다. 헤로디아는 아버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BC73-4에게 죽임을 당한 헤롯 아리스토블루스Herod Aristobolus의 딸이고, 훗날 사도 야고보를 참수한 헤롯 아그립바 1Herod Agrippa I,AD37-44의 누나입니다(12). 헤로디아는 삼촌인 헤롯 빌립Herod Philip,BC4-AD34과 결혼했지만, 야망이 컸던 그녀는 분봉왕의 지위가 없었던 남편을 버리고, 권력자인 또 다른 삼촌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한 것입니다. 이 불의를 저격한 세례 요한은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Salome,AD14-62or73의 춤 값으로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악이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와의 이혼문제로 나바테아의 침공을 받았고, 동생 헤롯 아그립바 1세의 고발로 유배를 당하고 거기서 죽게 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이스라엘 전 영역을 다스리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지만, 교만하여 몇 년 만에 하나님께 벌을 받아 급사합니다(12).).

 

이렇게 결혼, 이혼, 재혼이 탐욕과 배신과 죽음으로까지 이어지자, 이러한 사회적 이슈에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한 것입니다(3). 여기서 만약에 이혼이 옳다고 하면, 욕망으로 인한 이혼도, 포함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에, 예수님이 부덕하다고 공격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혼이 부당하다고 하면, 그 일로 세례 요한까지 참수한 헤롯의 미움을 사고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이에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시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세우신 혼인의 서약을 상기시켰습니다(4-5.참고/2:24). 그러나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계명을 들고 반론했습니다.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7).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24:1) . 바리새인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아내가, ‘수치되는 일을 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혼을 반대만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24:2-4). 구약 율법에는 아내가 수치 되는 일을 하면 이혼 증서를 써주어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습니다(24:1). 그런데 수치 되는 일을 가부장적 입장에서 적용 집에 살림만 잘못해도 쫓아 버렸습니다. 그것은 남자들이 마음껏 아내를 바꾸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9).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하였는데요(5:32), 이것은 이혼하고 난 후, 재혼했다가, 또 이혼한 다음, 삼혼을 첫 번째 혼인했던 아내와 결혼은 간음이라고 하였는데, 첫 번째 혼인했던 아내가 이혼한 후,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는데, 다시 결합하는 것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5:32). 이혼을 남용하는 것은 정욕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이 이혼 사유로 정한 간음한 경우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8). ‘완악한 인간이 정욕으로 이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간음을 이혼의 라인으로 한 것이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각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5:28). 정욕이 없는 또는 정욕을 품어 보지 못한 사람이 없기에 자신의 이혼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하고, 타인의 이혼에 대해서도, 돌을 던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허물이고 깨어지는 존재임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 그가 실족하게 되었다면,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18:6-10,14.참고/5:29-20).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있기 전 타인의 간음을 보지 말고 자신의 음욕을 보고 겸허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결혼, 이혼, 재혼으로 종교심문과 법정재판으로 잡아넣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혼은 무조건 잘못됐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기에 분봉왕 헤롯이 잡아들일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감금하면 자신이 간음한 자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하셨기에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트집 잡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공회에 넘기면 율법의 본래 의미를 모르는 자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율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말씀의 지혜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이후,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고 여쭈었습니다(10). “남편과 아내 사이가 그러하다면, 차라리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11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고 하셨습니다(11-12.참고/10:1-12). “누구나 다 이 말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다만, 타고난 사람들만이 받아들인다. 모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도 있고, 사람이 고자로 만들어서 된 고자도 있고, 또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는 것입니다.

 

결혼이 예외일 수 있는 세 가지 하나는 어머니 태’, 태생적, 하나는 사람이 만든으로 자발적, 하나는 천국을 위하여사명적으로입니다. 아무리 결혼과 이혼과 재혼이 물의가 되어도, 이 세가지 외에는 모두 혼인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사도 바울은 천국을 위하여즉 사명을 위해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7:7). 이 구절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독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이어 말씀합니다(고전7:8). 사도 바울은 혼기가 지났음에도, 결혼하지 않은 이들과 과부를 향한 권면입니다. 그들이 적령기가 지났거나, 사별한 다음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 원한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7:7). 주를 위해 사도 바울이 독신의 길을 선택했다고, 다른 주의 종들이 그와 같이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은사’, 자기가 받은 은혜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지혜 – 성경의 적용

 

본문 당시 결혼, 이혼, 재혼 사회적 이슈로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과 같이, 오늘날에도 성도를 사회적 이슈로 불의에 빠뜨리려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가운데 광화문에서 여의도에 있는 이들의 탄핵이 기각되어야 한다. 인용되어야 한다.”라는 정세의 소리를 외치는 것은, 하늘과 땅의 기상을 보는 천지의 표적에 비견될 수 있다고, 석주 전 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16:2-4.참고/12:54-56). 그들은 사회적 이슈로 자기편을 만들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 편에서서는 안됩니다. 주님 편에만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표적인 기상과 정세만을 말하고, 2천 여 년 전 주 오심과 종말에 주님 다시 오심인 시대의 표적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외식을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이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습니다(16:5).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16:6). ‘누룩은 빵을 부풀릴 때 사용하는 효소입니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제자들은 떡을 챙겨오지 못한 준비성 부족에 대한 지적인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16:7).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고 하셨습니다(16:8).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16:9-11).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통해 들녘을 가득 메운 무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한 끼의 식량을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으로 알아들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오직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하였습니다(16:11-12.참고/8:14-21). ‘누룩은 퍼뜨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천지의 표적만 알아서, 기상과 정세만 떠벌릴 뿐, ‘시대의 표적인 초림의 주님과 재림의 주님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어두울 뿐만 아니라,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5:14.참고/6:39).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구덩이 빠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탄핵의 찬반을 외치는 자들은 소경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들 개 개인 탄핵을 인용 또는 기각으로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로 변질시켜 교회를 끌어들이려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이슈에 분별없은 언행을 따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헤롯 왕이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고, 바리새인이 율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게 하신 예수님이 가지신 말씀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참고/고전12:8). 말씀은 성경입니다. 지혜는 적용입니다. 성경을 적용하는 것이 말씀의 지혜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지혜입니다.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 삼으려는 본문의 바리새인과 같은,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의 간계를 물리치는 성경의 적용인 말씀의 지혜를 갖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구하면, 말씀의 지혜로 누구 편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게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10:13-16;18:15-17). 어린아이는 말씀을 듣는 그대로 믿고, 원천적인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친히 안수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말씀 그대로 믿고, 원천적인 지혜를 갖는, 말씀의 지혜가 충만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며 안수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

 

영생과 선한 일

 

거기를 떠더나시니라’(15). 예수님은 베레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행보를 재촉하셨습니다(참고/10:32;18;31). 그때 어떤 사람이등장합니다(16). 그에 대하여 재물이 많은 청년이고, ‘계명을 다 지키었으며, ‘관리이자 큰 부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22.참고/10:17;18:18,23). 그럼에도 주께 (찾아)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여쭈었습니다(16). 젊은 나이에 물질의 부유도 얻고, 높은 신분도 가지고, 율법 준수도 빠지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 ‘영생입니다. 이 청년이 가진 젊음, 자산, 명예로도 천국에 갈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 불안하니까? 내세에 대한 갈증, 구원의 확신이 없으므로 인해서, 마음에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회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신 세대不信 世代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공허가 밀려오는 것은, 영생만이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되느냐는 여쭙자,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17). 병행 본문에는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하셨습니다(18:19).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합니다(참고/5:4,6,14).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1,14-15). 선한 일은 한 영혼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야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바리새인과 같이 공적功績, 행위를 통해서야 구원에 이른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시자(17), 청년은 “18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물었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하시자)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자신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준수하였다고 아뢴 것입니다(18-20). 그러나 율법에 열거된 계명만 준수했지,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의 답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영생과 하나님 사랑

 

예수께서(는 청년이 모든 율법을 지켰다는) 이 말을 들으시고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하시며(18:22).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하셨습니다(21-22.참고/10:17-25;18:18-25). 예수님이 청년에게 온전하고 할진대라는 율법의 계명을 준수했다고 장담한다고,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제가 계명을 다 지키었사온데 더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것도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다 계명을 지키었는데 네가 구원받았다는 답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만한 것입니다.

 

주님은 청년에게 네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율법이 어느 계명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도 없는 것을 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사옵니까라고 물으면서,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다 준수했다고 장담했지만, 그에게는 율법에 열거된 계명이 아니라, 그 계명이 담고 있는 첫 번째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한 것입니다(참고/22:37-38;12:30;10:27). ‘하나님 중히여긴 것이 아니라, 재물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 섬긴 것이 아니라, 재물을 섬긴 것입니다. 영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안다면, 하나님 믿음에 앞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에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생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면 말입니다. 지금 나의 것을 다 처분해도,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을 믿고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하였습니다(22).

 

말씀의 지식 - 해석

앞서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 삼으려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간계를 물리치는 성경의 적용인 말씀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말씀의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참고/고전12:8). 말씀의 지혜는 성경의 적용이고, 말씀의 지식은 성경의 해석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50:4).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다.’라는 것은 아침마다 말씀 읽는다는 것입니다. 읽으니까 깨우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만이니라, 깨닫는 은사도 받았습니다.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라는 적용입니다.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같이 율법에 열거된 계명을 준수했다는 장담만 갖고 있었지, 그 율법의 계명 첫 번째 해석이 하나님 사랑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바른 해석인 말씀의 지식을 축복합니다. 그래야 영생의 길로 그리고 영생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청년이 해야 할 일은 행위,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아들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놀라다

 

재물이 많은 청년이 소유를 다 팔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떠난 후, 주님은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르겠다고, 다짐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셨습니다(23). 이어서 재차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고 하셨습니다(24). 병행 본문에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하셨습니다(10:23). 여기서 재물이 있는 자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를 가리킵니다. 본문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 즉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조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예도 있는데요.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자유 아래 자본이 아니라, 개개인 자유 위에 자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공산주의하에서만 아니라, 자본주의하에서도 자본, 돈으로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돈이기 때문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재물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닙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물을 의지하면 있을 때는 좋지만, 없으면 마음마저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를 등한히 합니다. 헌신을 게을리 합니다. 신앙에서 이탈합니다. 부자와 천국을 비유한 낙타와 바늘귀에 대해 한 학자는 색다르게 육중한 몸무게를 자랑하는 낙타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구멍이 천국으로 가는 영적 통로를 상징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에 무릎을 '' 치고 기뻐해야 할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고 하였습니다(26). 돈에 대한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사람의 판단, 노력,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말씀입니다. 부자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문제가 됩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있어도 재물을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고 하였습니다(27).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어선도 가족도 모두 버렸습니다(참고/4:18-20;1:16-20;5:1-11). 이에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하시며,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큰 보응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8-29.참고/10:26-31;18:26-30). 그리고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30).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크리라고 하여도, 이 땅에서도 영원한 나라에서도 큰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하여도, 믿지 못하면 먼저 믿어도 나중된 자요, 믿으면 나중에 믿어도 되어도 먼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믿음 - 신실

 

헬라어로 믿음을 피스티스πστις라고 하는데 그 뜻이 신실입니다. 말씀을 일다가 믿음이란 단어가 나올 때, 신실로 대체하면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1:22). 성도이면 모두가 애송하는 구절입니다. 믿고 구하면 다 주신다니,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기도하고 나서, 믿고 구했으니 이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믿음을 신실로 대체하면 너희가 신실하고 구하면 다 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신실한 사람은 헛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욕망을 위해 구하지도 않습니다. 허망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의 기도는 모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참고/고전12:9). 성경에 신실한 것이 말씀의 믿음입니다.

앞서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 삼으려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간계를 물리치는 성경의 적용인 말씀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말씀의 지식인 성경의 해석을 가져야합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 같이 율법 계명을 준수했다고만 했지, 율법 계명의 첫 번째 해석이 하나님 사랑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바른 해석인 말씀의 지식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믿음인 성경에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클 것이고, 이 땅에서도 큰 보응을 받을 것을 그대로 믿는, 신실, 말씀의 믿음을 가진 자로서, 나중에 믿었어도 주님이 먼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정리

 

베레아와 유대에서 전도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의 주 무대는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인 가버나움, 벳세다, 고라신 등이었습니다(4:13,12:20-24;1:21,6:45;4:31,9:10,10:13-15;4:46).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기 한 달 전쯤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와 유다지역을 순회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수난 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1). 갈릴리에서 시작된 전도 사역은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기름 부음으로 끝납니다(참고/19:1-26:4;10:1-14:3). 예수님께서 베레아에 이르렀을 때, 소문을 들은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고 하였습니다(2). 예수님이 천국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신, 기사와 이적은, 공간과 시간과 상황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대양·육대주와 우주 전체에 안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늘 권세로 모든 상황을 이기시는 전능자입니다. 지금도 영으로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주님을 꼭 붙들고, 주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리새인의 음모. 예수님이 베레아에 오셨다는 소문은 무리에게만 들려온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 등 유대종교지도자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시험과 비방과 모함을 일삼았습니다(참고/9:1-13,12:1-21,15:1-20;2:1-12,23-28,7:1-23;5:17-26,6:1-5). 베레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무리를 충동질하여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이때 바리새인들이 결혼, 이혼, 재혼을 두고, 주님을 시험한 것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이혼을 했고, 그녀 역시 야망을 위해 본분왕의 지위가 없던 남편 헤롯 빌립을 버렸습니다, 이 불의를 저격한 세례 요한은 체포되고,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 값으로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결혼, 이혼, 재혼이 탐욕과 배신과 죽음으로까지 이어지자, 이러한 사회적 이슈issue에 예수님을 옭아매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이혼이 옳다고 하면, 욕망으로 인한 이혼도, 포함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에, 예수님을 부덕하다고 공격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혼이 부당하다고 하면, 그 일로 세례 요한까지 참수한 헤롯의 미움을 사고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세우신 혼인의 서약을 상기시켰습니다(4-5.참고/2:24). 그러자 바리새인은 율법을 들어, 아내가 수치되는 일을 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혼을 반대만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참고/24:1-4). 그러나 유대인들은 수치 되는 일을 가부장적 입장에서 적용, 살림만 잘못해도 쫓아 버렸습니다. 마음껏 아내를 바꾸려는 속셈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9).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이 이혼 사유로 정한 간음한 경우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정욕으로 이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간음을 이혼의 라인으로 한 것이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8). 이것은 각 각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5:28). 정욕이 없는 또는 정욕을 품어 보지 못한 사람이 없기에 자신의 이혼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하고, 타인의 이혼에 대해서도, 돌을 던져 실족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5:29-20,18:6-10,14).

 

예수님을 결혼, 이혼, 재혼으로 종교심문과 법정재판으로 잡아넣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이혼은 무조건 잘못됐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기에 분봉왕 헤롯이 잡아들일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감금하면 자신이 간음한 자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하셨기에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트집 잡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공회에 넘기면 율법의 본래 의미를 모르는 자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율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말씀의 지혜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이후, 제자들이 그러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고 하자, 결혼이 예외일 수 있는 세 가지, ‘어머니 태’, 태생적, ‘사람이 만든으로 자발적, ‘천국을 위하여사명적으로 라고 하셨습니다(110-12.참고/10:1-12). 그 외는 혼인하는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천국을 위하여즉 사명을 위해 결혼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7:7). 그러나 혼기가 지났거나, 과부를 향한 권면입니다(고전7:8) 그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7:7). 주를 위해 사도 바울이 독신의 길을 선택했다고, 다른 주의 종들이 그와 같이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지혜 – 적용. 본문 당시 결혼, 이혼, 재혼 사회적 이슈로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 바리새인과 같이, 오늘날도 오늘날도 성도를 사회적 이슈로 불의에 빠뜨리려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목회자 가운데 광화문에서 여의도에 있는 이들의 탄핵이 기각되어야 한다. 인용되어야 한다.”는 정세의 소리를 외치는 것은, 하늘과 땅의 기상을 보는 천지의 표적에 비견될 수 있다고, 석주 전 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16:2-4.참고/12:54-56). 그들은 사회적 이슈로 자기편을 만들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 편에서서는 안됩니다. 주님 편에만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표적인 기상과 정세만을 말하고, 2천 여 년 전 주 오심과 종말에 주님 다시 오심인 시대의 표적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외식을 경계하셨습니다. ‘제자들이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습니다(16:5).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16:6). ‘누룩은 빵을 부풀릴 때 사용하는 효소입니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제자들은 떡을 챙겨오지 못한 준비성 부족에 대한 지적인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16:7).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고 하셨습니다(16:8).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16:9-11).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통해 들녘을 가득 메운 무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한 끼의 식량을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으로 알아들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오직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하였습니다(16:11-12.참고/8:14-21). ‘누룩은 퍼뜨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천지의 표적만 알아서, 기상과 정세만 떠벌릴 뿐, ‘시대의 표적인 초림의 주님과 재림의 주님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어두울 뿐만 아니라,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5:14.참고/6:39).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같이 구덩이 빠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입니다.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탄핵의 찬반을 외치는 자들은 소경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들 개 개인 탄핵을 인용 또는 기각으로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로 변질시켜 교회를 끌어들이려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이슈에 분별없은 언행을 따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헤롯 왕이 사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고, 바리새인이 율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게 하신 예수님이 가지신 말씀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참고/고전12:8). 말씀은 성경입니다. 지혜는 적용입니다. 성경을 적용하는 것이 말씀의 지혜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지혜입니다.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 삼으려는 본문의 바리새인과 같은,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의 간계를 물리치는 성경의 적용인 말씀의 지혜를 갖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구하면, 말씀의 지혜로 누구 편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게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

 

영생과 선한 일. 예수님이 베레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어떤 사람이등장합니다(5-6.참고/10:32;18;31). 그때 어떤 사람이등장합니다(16). 그는 젊은 나이에 물질의 부유도 얻고, 높은 신분도 가지고, 율법 준수도 빠지지 않았지만,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22.참고/10:17;18:18,23). 영생입니다. ’주께 (찾아)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예수님에게 청년에게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17.참고/5:4,6,14;18:19).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10:11,14-15). ‘선한 일은 한 영혼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믿음이 아니라, 공적功績=행위로 영생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율법의 계명을 말하자, 자신은 다 지키었는데 무엇이 부족하냐고 하였습니다(18-20). 그러나 율법에 열거된 계명만 준수했지,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의 답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영생과 하나님 사랑. 예수님이 청년에게 온전하고 할진대라고 하셨습니다(21-22.참고/10:17-25;18:18-25). 율법의 계명을 준수했다고 장담한다고,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 네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21.참고/18:22). 이것은 율법에 없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못하기 때문입니다(6:24). 재물이 많은 청년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사옵니까라고 물으면서,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다 준수했다고 장담했지만, 그에게는 율법에 열거된 계명이 아니라, 그 계명이 담고 있는 첫 번째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한 것입니다(참고/22:37-38;12:30;10:27). 영생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면 말입니다. 지금 나의 것을 다 처분해도,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21).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가니라고 하였습니다(22).

 

말씀의 지식 – 해석.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 삼으려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간계를 물리치는 성경의 적용인 말씀의 지혜에 더해, 성경의 해석인 말씀의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참고/고전12:8). 시편 5042절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다.’라는 것은 아침마다 말씀 읽는다는 것입니다. 읽으니까 깨우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만이니라, 깨닫는 은사도 받았습니다.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라는 적용입니다.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같이 율법에 열거된 계명을 준수했다는 장담만 갖고 있었지, 그 율법의 계명 첫 번째 해석이 하나님 사랑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야 영생의 길로 그리고 영생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놀라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 떠난 후,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셨습니다(23). 여기서 부자재물을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참고/10:23). 단순히 돈이 많은 것이 아니라,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조를 지닌 자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 우리는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해야 합니다. 재물은 내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이 있다가 없을 때, 마음마저 빼앗겨 예배를 등한히 합니다. 헌신을 게을리합니다. 신앙에서 이탈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놀라 돈에 대한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냐고 질문했습니다(26).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사람의 판단, 노력,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27). 부자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문제가 됩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있어도 재물을 따르지 말고, 주님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어선도 가족도 모두 버렸는데 무엇을 얻으리까 여쭈었습니다(27.참고/4:18-20;1:16-20;5:1-11). 이에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큰 보응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8-29.참고/10:26-31;18:26-30). 그러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크리라고 하여도, 이 땅에서도 영원한 나라에서도 큰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하여도, 믿지 못하면 먼저 믿어도 나중된 자요, 믿으면 먼저 되는 것입니다(30).

 

말씀의 믿음 – 신실. 믿음은 헬라어 피스티스πστις로 신실을 뜻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1:22). 이 구절을 가지고 믿고, 구했으니, 이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신실로 대체하면 너희가 신실하고 구하면 다 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신실한 사람은 자기 욕망을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의 기도는 모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참고/고전12:9). 성경에 신실한 것이 말씀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클 것이고. 이 땅에서도 영원한 나라에서도 큰 보응을 받을 것을 그대로 믿는, 신실, 말씀의 믿음을 가진 자로서, 나중에 믿었어도 주님이 먼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집중적으로 활동한 갈릴리 동네는 물론 한 달 여 사역한 베레아와 유대에서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주님 청라국제도시에 역사하사 지역 주민을 청아비전교회에 인도해 주시고, 거룩한 부흥과 위대한 역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을 말씀의 지혜로 물리치셨습니다. 지금도 사회적 이슈를 신앙적 이슈로 변질시켜 교회를 끌어들이려는 바리새인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성경을 적용하는 말씀의 지혜를 갖게 하옵소서.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구하여 말씀의 지혜로 누구의 편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는 인간 본연의 공허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영생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영생이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면, 주님의 명령에 '아멘' 하고, 하늘에 보화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같이 율법 계명을 준수한 것만 알았지, 율법 계명 첫 번째 해석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경의 해석인 말씀의 지식으로 바로 깨달아 영생의 길로 그리고 영생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하늘에서 보화가 클 것이고, 이 땅에서 큰 보응을 받을 것을 그대로 믿는, 신실, 말씀의 믿음을 가진 자로서, 나중에 믿었어도 주님이 먼저 세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