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 잃어버리지 말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18:10-14 2025.01.26. 主日禮拜
“천국에서 큰 사람(막9:33-37,42-48;눅9:46-48;15:3-7;17:1-2)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없음어떤 사본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음)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눅17:3)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1-35)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돌아오는 1월 29일은 민족 명절인 설입니다. 우리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천국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1:15). 이 ‘때’에 대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갈4:4). 하나님은 아담 범죄 이후, 구원자로 언약하신, ‘여자의 후손’ 예수님을 정하신 때, 2천 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창3:15;마1:25;눅2:7). 그러므로 이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천국이 너희 손닿을 만큼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바로 너희들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대속으로 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고, 기업을 이어받게 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참고/요14:6;갈1:4,4:6;롬8:15,17).
예수님은 탁월한 교사로서 이 천국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겨자씨 비유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32.참고/막4:30-32;눅13:18-20). 누룩 비유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참고/눅13:21).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좋은 진주 비유입니다.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물고기 비유입니다.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13:47-49).
겨자씨같이 작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가지에 깃드는 큰 나무가 된 단다는 것입니다(마13:31-32.참고/막4:30-32;눅13:18-20). 천국 승리입니다. 누룩이 서 말의 밀가루를 모두 부풀린다는 것입니다(마13:33.참고/눅13:21). 천국 확산입니다. 보화와 진주 같다고 하셨습니다(마13:45-46). 천국 보배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보배요 확산이며 승리를 모르는 자는 못된 ‘물고기’처럼 버려져, ‘풀무 불’, ‘성 밖’,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참고/마13:48-49,24:51;눅13:28;계22:15). 우리는 천국 비유를 통해 천국의 보배, 확산, 승리를 믿는 좋은 물고기로 그릇에 담겨, 주님께서 ‘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이 ‘하늘에 보좌’에 계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에 거하게 될 줄 믿습니다(참고/시11:4;마13:48;요14:2;계4:2, 21:1-2).
예수님은 이렇게 천국을 ‘34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마13:34-35.참고/막4:33-34). 창세로부터 감추었던 복음,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입성한다는 소식을 비유로 이제 세상에 드러내 알게했습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이 드러났다고 아무나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한다고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13:16-17). 택자,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된 자만이 천국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마13:16-17). 우리가 천국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택자가 된 것에 다시 한번 감사에 감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과 어린아이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천국을 비유로 쉽게 풀어서 가르쳐 주셨는데도, 바른 의미를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1).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에게 물어본 이 질문은 어른의 관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6·25가 종전되고, 1955-1963년 까지 태어나, 무려 710만 명에 달하는 아직도 건재한 ‘베이비붐 세대’Baby Boom Generation는 물론이고, 그 이후 출생한 저 때만 해도, 초등학교 한 반에 60명에서 많게 75명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도 몰려오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어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치열했습니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몰이 말라 물을 서로 마시려고 수도 갓까지 달려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장년이 되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기성세대는 경쟁적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 속에서, 항상 누가 더 크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어른의 시각이 되었습니다. 힘이 있어야 먼저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의 ‘크다’는 개념은 이지적이거나 내면적이거나 인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권위적이고 외형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천국도 그러한 인식에서 큰 자가 있고 그 밑에 작은 자도 있을 것으로 제자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2-5.참고/막9:33-37,42-48;눅9:46-48;15:3-7;17:1-2). 예수님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니라’며, 어린 아이가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답변하시면서, 어린아이는 신앙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강조하십니다(마19:14). 이 교훈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는어야 한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가 천구에서 큰 자이다.”입니다.
첫째로, 어린아이 같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 여기에서 ‘결단코’never로 번역된 헬라어 ‘우 메’ου μη,oume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어떤 분은 천국 입구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어른 노릇 하려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른들은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 맑고 천진난만한 모습,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의 순수함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청결을 말하는데, 그런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5:8).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중간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너무나도 예쁘고 예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노래한 무리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마21:15). 이를 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노’하자, 예수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마21:16). 주님이 인용한 말씀은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입니다(시8:2). 아이들의 입으로도 올려드리는 찬송이 권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른들은 어린이들로부터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껏이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또한 어른들은 아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순수함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본질적 책무입니다. 어린이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 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일까요? 신앙은 능력이 아니라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 있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성취하였다는 자만심에 빠지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자로서 무엇인가 배워야 한다는 자세가 있다면, 그것이 곧 자기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성된 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성장하기 위하여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는 본질적으로 겸손한 자입니다. 어린아이의 겸손은 꾸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겸손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사도 바울만큼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은 없습니다. 그는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목회자이었으며, 가장 많은 성경을 기록한 성경 저자요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위대함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이루었다고 자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빌3:14). 사도 바울은 항상 새로움을 향하여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장을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는 것, 새로움을 향한 열정이 곧 겸손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겸손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본질적인 겸손,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을 가진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셋째로, 어린아이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돌보아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것은 실제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삶의 기준과 원칙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지 말라”(골2:23). 어린아이에게도 그와 같이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린아이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접하듯 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엡6:4). 여기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자신이 낳은 자녀라 하여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생명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 위해서입니다(엡6:4). 자녀를 노엽게 하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 말씀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제대로 전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해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천국과 작은 자
예수님은 천국과 어린아이에 대한 가르침 이후,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6),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10),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작은 자’에 대한 가르침으로 연결하십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볼 수도 있지만, 어린아이를 포함하는 사회 약자로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에 더 부합합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는 무시를 당하고, 배제를 당하고, 열외를 당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밀려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약자인 ‘작은 자’도 천국의 주인공인 어린아이 같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인 ‘작은 자’도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말씀과 은혜와 기도를 사모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인 ‘작은 자’도 어린아이와 같이 인격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를 양육하여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첫 번째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6-7).
‘연자碾子 맷돌’은 헬라어 ‘뮐로스 오니코스’μύλος ὀνικός,mulos onikos입니다. 나귀를 뜻하는 헬라어 ‘오니코스’와 맷돌의 ‘뮐로스’의 결합어입니다. 연자 맷돌은 아랫 돌은 고정되어 있고, 윗돌은 나귀나 소등이 끌며 돌리는 큰 맷돌로 그 크기가 큰 것은 지름 120-150㎝에 무게가 1톤이 넘는 것도 있습니다(참고/눅17:2;계18:21). 그런데 이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6). 무엇 때문에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6).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고 하였습니다(7). 이 세상에 화가 임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사람을 실족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상이 사회 약자인 ‘작은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어떤 사람이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의 범죄자가 되기까지, 유년 시절을 보면 소외되고 불우하고 지울 수 없는 상처, 곧 실족을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어 큰 범죄로 세상의 화가 되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고 하였습니다(7). 우리의 무심함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인해 ‘작은 자’가 실족했다면 우리는 화를 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나와 직간접 관계에 있는 분들 특히 사회 약자라 할 수 있는 ‘작은 자’를 보살피고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8-9). 물론 이 말씀을 문자적 그대로 보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함축 의미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서, 우리와 함께 예수님 영접하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을 얻는 일 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든 특히 ‘작은 자’를 돌보고 돌보아야 합니다.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첫 번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업신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없음어떤 사본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가 있음)”(10-11).
예수님 ‘작은 자’를 ‘없신여기지 말라’고 하신 후, ‘그들의 천사들’ 즉 ‘작은 자’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셨습니다(10).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하나 하나에게 ‘수호천사’Guardian Angel를 보내어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큰 자의 천사가 되었던 작은 자의 천사가 되었건 하나님을 뜻을 따라 똑같이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기준으로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자는 그에게 수호천사까지 보내어 섬기게 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든 관심받지 못하는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풍토가 자리잡게해서는 안됩니다.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첫 번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업신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2-14)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도 잘압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15:5-6).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후, 친구와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잃어버린다는 말은 지운다는 말입니다. 지우면 그를 위해 생각도, 기도도, 축복도 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든 온 듯 안 온 듯 존재감 없이 보이는 ‘작은 자’라고 마음에서 지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그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리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용서해야 한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첫 번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업신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누구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작은 자’를 용서하라고 한 것은 한 예를 들면요. ‘작은 자’에게 돈을 꾸워주고, 어떤 면에서는 갚을 수 없을 만큼 빌려주고, 갚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작은 자’를 종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고, 관용 베풀어라,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의 약점을 노리고, 종속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렘34:9.참고/레25:46).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의 신상을 좌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 안에서 ‘작은 자’를 용서라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출22:25/참고/레25:36). ‘작은 자’은 가족의 끼니 때문에 돈을 빌린 것인데, 그러한 처지를 외면하고, 못 갚을 것을 알고, 종으로 삼으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고리 대금은 피해야 합니다.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23:20). 이 ‘형제’에게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 해석하고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23-35)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각 각 쌓은 상급을 받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용서하였는지를 보십니다. 특히 ‘작은 자’를 용서하였는가를 보십니다.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왔습니다(24). 한 달란트는 장정 6,000명의 하루 품삯인 6,000데나리온으로 당시 금으로 34kg의 가치입니다. 현재로 환산하면 약 27억원, 만 달란트는 약 27조원 정도입니다. 성경에서 일만은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의 단위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을 갚은 길이 없자, 주인이 전액 탕감을 주었습니다(25-27). 그런데 이 탕감받은 자가 집에 돌아가서, ‘백 데나리온’ 지금 돈으로 천 만원 정도를 갚지 못한 동료가 그렇게 사장 사정을 하는데도, 봐주지 않고, 그 집 가족들이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28-30). 이러한 사실을 안 27조를 탕감해 준 주인이 그를 불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는데, 너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며,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31-34). 순 자산만 3478억 달러 우리 돈 500조 원을 가진 일론 머스크Elon Musk,1971-가 아닌 바에야 27조를 갚을 수 있나요. 평생을 감옥에서 나올 수 없지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우리는 27조를 빚진 자입니다. 용서 받은 수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종속하려고 하지 말고. 관용, 긍휼, 용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등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관용, 긍휼,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하시 기 전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21-22). 유대인의 가장 큰 용서인 ‘일 곱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전에 말씀드린 일만 달란트 빚지고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교회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15). 주님은 죄를 지은 자가 있거든 먼저 그에게 찾아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지은 자의 사건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완악한 자들 가운데는 듣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16). 단둘이 말해서 듣지 않을 때는 두 세 증인과 함께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듣지 않을 때,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 그러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였습니다(18). 이 교회법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따라야 합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라도 말입니다. 동등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에게도 천국의 주인공인 어린아이 같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인 ‘작은 자’도 어린아이 같이 겸손하게 말씀과 은혜와 기도를 사모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인 ‘작은 자’도 어린아이같이 인격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를 양육하여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하기 위해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첫 번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업신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용서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동등해야 합니다.
여기서 동등에는 사회적 약자인 ‘작은 자’가 다른 성도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거룩한 백성이 된 ‘작은 자’는 책임에서도 동등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사회 약자인 ‘작은 자’로서 받아야 할 것만을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라는 미명으로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의무 없는 권리는 방종, 오만, 불의입니다. 교회법을 예로 들 때, 그 적용에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라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제 다른 교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예전엔 사회 약자인 ‘작은 자’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성도와 똑같이 주님의 제자된 그분들에게 동등하게 대할 때, 그분들도 떳떳한 교회의 가족이요, 천국의 백성로서 자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여기까지 이끌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회에서도 당당한 일원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 이 말씀은 이전에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자, 예수님은 ‘네가 복이 있다’하신 후,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시며,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마16:16-19). 주님을 그리스도, 왕으로 모신 교회인 우리에게,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것은, 죽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는 세상의 어떤 올무로 옭아맬 수 없고, 병기로 무너뜨릴 수 없고, 함정에 빠뜨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의 약자인 ‘작은 자’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20). 공동체 안에 ‘두세 사람’안에 이전에 사회 약자인 ‘작은 자’이었다가, 이제는 다른 성도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첫 번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업신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용서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동등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와 함께 공동체 가족으로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함께 이 세상의 음부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리
천국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마4:17.참고‘막1:15). “천국이 너희 손닿을 만큼 가까이 왔다”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는 뜻입니다. 너희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참고/요14:6;갈1:4,4:6;롬8:15,17). 예수님은 탁월한 교사로서 이 천국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겨자씨같이 작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가지에 깃드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마13:31-32.참고/막4:30-32;눅13:18-20). 천국 승리입니다. 누룩이 서 말의 밀가루를 모두 부풀린다고 하셨습니다(마13:33.참고/눅13:21). 천국 확산입니다. 보화와 진주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보배입니다(마13:45-46).
그러나 이 진리를 모르는 자는 ‘못된 물고기’처럼 버려져, ‘풀무 불’, ‘성 밖’,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참고/마13:48-49,24:51;눅13:28;계22:15). 우리는 천국 비유를 통해 천국의 보배, 확산, 승리를 믿는 ‘좋은 물고기’로 ‘그릇’에 담겨, 주님이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이 ‘하늘에 보좌’에 계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천국에 거하게 될 줄 믿습니다(참고/시11:4;마13:48;요14:2;계4:2, 21:1-2).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감추었던 복음,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입성한다는 소식을 비유를 통해 세상에 드러내 알게 했습니다(참고/마13:34-35;막4:33-34). 그러나 천국 복음이 드러났다고 아무나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택자,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된 자만이 천국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마13:16-17). 우리가 천국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택자가 된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과 어린아이
그런데 이렇게 천국을 비유로 쉽게 풀어서 가르쳐 주셨는데도, 바른 의미를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1). 이것은 성인 관점에서 질문으로 여기서 ‘크다’는 개념은 이지적이거나 내면적이거나 인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량적이고 권위적이고 외형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천국도 그러한 인식에서 큰 자가 있고 그 밑에 작은 자도 있을 것으로 제자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고 하셨습니다(2-5.참고/막9:33-37,42-48;눅9:46-48;15:3-7;17:1-2). 이 교훈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이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입니다.
첫째로, 어린아이 같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3). ‘결단코’never의 원문 뜻은 “어른 노릇 하려는 사람은 천국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입니다, 어른들은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 맑고 천진난만한 모습,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노래한 무리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마21:15). 이를 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노’하자, 예수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마21:16). 이 구절을 인용한 구약에는 ‘찬미’를 ‘권능’으로 말씀하셨습니다(시9:2). 아이들의 찬송이 권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이를 배워야 하고, 아이들이 이를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둘째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4).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인 것은 신앙은 능력이 아니라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였다는 자만심에 빠지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자로서 무엇인가 배워야 한다는 자세가 있다면, 그것이 곧 겸손입니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성된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더 성장하기 위하여 많이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는 본질적으로 겸손한 자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사도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요 목회자며, 가장 많은 성경을 기록한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대함이 위대함일 수 있었던 것은 이루었다고 자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항상 새로움을 향하여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바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셋째로, 어린아이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돌보아야 한다(5). 예수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엡6:5). 어린아이에게도 그와 같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하듯이 어린아이에게 하라는 뜻입니다. 성경 당시 어린아이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접하듯 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은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엡6:4). 그런 관계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엡6:4). 자녀를 노엽게 하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 말씀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제대로 전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해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나아가 누구든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듯 대접해야 합니다.
천국과 작은 자
예수님은 천국과 어린아이에 대한 가르침 이후, ‘작은 자’에 대한 가르침으로 연결하십니다(6,10,14). ‘작은 자’는 어린아이를 포함하는 사회 약자를 가리킵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는 기득권에 밀려 권리를 찾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작은 자’도 천국의 주인공인 어린아이 같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말씀과 은혜와 기도를 사모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인격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를 양육할 때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작은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연자碾子 맷돌’은 맷돌을 뜻하는 헬라어 ‘뮐로스’μύλος,mulos와 나귀를 뜻하는 ‘오니코스’ὀνικός,onikos의 결합어입니다(6). 큰 것은 지름 120-150㎝에 무게가 1톤이 넘는 것도 있습니다(참고/눅17:2;계18:21). 그런데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차리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려서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6). 어떤 사람이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의 범죄자가 되기까지, 유년 시절을 보면 소외되고 불우하고 지울 수 없는 상처, 곧 실족을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된다고 하셨습니다(7).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7). 우리의 무심함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인해 ‘작은 자’가 실족했다면 우리는 화를 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범죄하게 한 네 손이나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 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비장애인으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8-9).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절대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들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서,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든 특히 ‘작은 자’를 돌보고 돌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작은 자’를 ‘없신여기지 말라’고 하신 후, ‘그들의 천사들’ 즉 ‘작은 자’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셨습니다(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하나 하나에게 ‘수호천사’Guardian Angel를 보내어 섬기도록 하셨습니다(히1:14). 큰 자의 천사가 되었던 작은 자의 천사가 되었건 하나님을 뜻을 따라 똑같이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기준으로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자는 그에게 수호천사까지 보내어 섬기게 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든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풍토가 자리잡게해서는 안됩니다.
세 번째로 ‘작은 자’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비유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며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양들보다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12-14). 또한 즐거워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와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일 것이라며,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눅15:5-7).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잃어버린다는 말은 지운다는 말입니다. 지우면 그를 위해 생각도, 기도도, 축복도 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 안에 어떤 분들이든 ‘작은 자’라고 마음에서 지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리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네 번째로 ‘작은 자’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서 ‘결산’을 하게되는데 그중에 이 세상에서 특히 ‘작은 자’를 용서하였는가도 포함됩니다(23).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왔습니다(24). 한 달란트는 장정 6,000명의 하루 품삯인 6,000데나리온으로 당시 금으로 34kg의 가치입니다.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27억원, 만 달란트는 약 27조원 정도입니다. 성경에서 일만은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의 단위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을 갚은 길이 없자, 주인이 전액 탕감을 주었습니다(25-27). 그런데 이 탕감받은 자가 집에 돌아가서, ‘백 데나리온’ 지금 돈으로 천 만원 정도를 갚지 못한 동료가 그렇게 사장 사정을 하는데도, 봐주지 않고, 그 집 가족들이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28-30). 이러한 사실을 안 27조를 탕감해 준 주인이 그를 불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는데, 너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며,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31-34). 평생을 감옥에서 나올 수 없지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참고/출22:25;레25:36,46;신23:20;렘34:9). 우리는 27조를 빚진 자입니다. 용서 받은 수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 약자인 ‘작은 자’에 종속하려 하지 말고, 긍휼, 용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서번째로 ‘작은 자’도 동등해 한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관용, 긍휼,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하시 기 전, 죄를 지은 자가 있거든 먼저 그에게 찾아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15). 범죄자의 행위를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완악한 자들 가운데는 듣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단둘이 말해서 듣지 않을 때는 두 세 증인과 함께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16). 그러나 그렇게 해도 듣지 않을 때,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하라고 하십니다(17). 그러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였습니다(18). 성도라면 동등하게 교회법을 적용되야 합니다. 사회 약자인 ‘작은 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들도 이제 다른 교우들과 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무 없는 권리는 방종입니다. 교회에서 예전엔 사회 약자인 ‘작은 자’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성도와 똑같이 주님의 제자된 그들에게 동등하게 대할 때, 그분들도 떳떳한 교회의 가족이요, 천국의 백성로서 자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여기까지 이끌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 이 말씀은 이전에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자, 예수님은 ‘네가 복이 있다’하신 후,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시며,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마16:16-19). 주님을 그리스도, 왕으로 모신 교회인 우리에게 주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죽음,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위협하는 세상의 어떤 올무로 옭아맬 수 없고, 병기로 무너뜨릴 수 없고, 함정에 빠뜨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20). 공동체 안에 ‘두세 사람’안에 이전에 사회 약자인 ‘작은 자’이었다가, 이제는 다른 성도와 동일한 성도가 된 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첫 번째로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업신여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용서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동등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와 함께 공동체 가족으로 기도의 능력을 얻어 함께 이 세상의 음부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①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세상에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면 범죄한 신체를 버린다는 마음을 같고, 작은 자를 돌보고 보살펴 함께 영생을 얻고,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게 하옵소서.
②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업신여기면, 그를 섬기라고 수호천사를 보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분이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존귀하게 여기는 풍토로 세워지게 하옵소서.
③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길잃은 한 마리 양을 찾은 것과 같은 간절함을 갖게 하옵소서. 마음에서 생각도, 기도도, 축복도 지우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④ 사회 약자인 ‘작은 자’를 위선으로 돕고 난 후, 갚지 못할 때, 용서하지 않고, 종속하려는 세상 처세를 버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에도 하나님 은혜로 용서받은 것 같이 용서할 수 있게 하옵소서.
⑤ 사회 약자인 ‘작은 자’가 이제는 다른 성도와 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법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의무없는 권리는 방종입니다. ‘작은 자’가 떳떳한 교회의 가족,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옵소서.
⑥ 사회 약자인 ‘작은 자’가 우리와 함께 공동체 가족으로 기도의 능력을 받고, 음부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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