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편에 서 있는 자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21:33-46,22:1-46 25.02.23. 주일예배
포도원 농부 비유(막12:1-12;눅20:9-19) 33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ㅁ)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21:33-46) 혼인 잔치 비유(눅14:15-24)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막12:13-17;눅20:20-26) 15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1)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부활 논쟁(막12:18-27;눅20:27-40)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가장 큰 계명(막12:28-34;눅10:25-28)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막12:35-37;눅20:41-44)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1-46)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의 시작인 종려주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겸손의 왕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려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다음날 화요일 성전에 올라가시면서,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도 있는 믿음의 기도와 그 기도에는 십자가 선상에서도 못 밖은 자들을 용서하신 것과 같은 주님의 용서가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두 아들 비유로 앞에서는 제사를 바로 드려야 한다고 백성에게는 가르치고, 뒤에서는 제물을 파는 장사꾼과 환전상들과 결탁 수뢰하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죄인이라며 긍휼을 구하는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이 천구게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마9:10,21:1-32;막2:15,11:1-33;눅5:30,19:28-20:8;요12:12-22).
주님을 존대하는 자, 열매를 드려라
33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21:33-46.참고/막12:1-12;눅20:9-19)
지금의 교회력 고난주간 화요일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또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시며,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하였습니다(21:33). 그 후, 수학할 시기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21:34-35). 종들은 주인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런 종들을 농부들이 능욕한다는 것은 주인을 업신여긴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인내하고,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었지만,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21:36). 주인은 고심 한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습니다(21:37). 주인은 농부들이 자기 아들에게는 ‘존대’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곧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고 하였습니다(21:38-39). 농부들은 포도원까지 차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주인은 하나님이고, 농부는 광의적으로는 이스라엘 전체, 협의적으로는 본문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비유를 듣고있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선지자의 말을 이스라엘이 들었나요?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안다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보다, 사람의 계명인 전통유전,관습을 앞세워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지배했습니다. 법을 안다고 하는 자가 법을 악용하듯 율법을 안다는 대제사장이 율법을 악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주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어디를 통과해 골고다로 향하셨나요? ‘성문 밖’, ‘영문 밖’입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1-12). 본문은 이에 대해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39).
다시 비유를 이어 보겠습니다. 아들까지 농부들이 죽이자, 주인은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올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라고 하였습니다(21:40-41). 이에 주님은 구약을 인용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되물었습니다(21:42.참고/시118:22;사28:16;행4:11;벧전2:7). 아무 쓸모없어 버려버린 돌덩어리를, 집 짓는 사람이 다듬어, 건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하였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과 같이,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공사장에 필요없는 돌을 버려버리듯이 십자가에 죽게 했지만. 하나님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하는 기이한 일을 행한 것과 같이, 아들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9-11).
예수님은 자신을 영문 밖에서 죽일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러므로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21:43).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라는 이전 문맥과 연결할 때, 자신은 죄인이라며 탄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말하고, 광의적으로 저와 여러분 이방인을 말합니다. 잘못된 선민사상을 가진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로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받은 민족이요, 육체의 할례를 받았기에 구원받았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주인의 아들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입니다(요10:30,38,17:21).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에게 우리의 구원을 맡기셨습니다(요3:17,5:21,26;롬5:10;히2:10).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12:44-50). 이렇게 잘못된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는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입성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천국을 빼앗기고, 이방인들에게 지옥의 땔감이라고 하였지만, 정작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즉 이방인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8:11).
예수님은 이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셨습니다(21:44). ‘이 돌’은 예수님입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 위에 떨어진 자들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깨지겠고’, 자복 회개 긍휼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떨어진 자들, 즉 예수님 아래 깔린 자들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재앙 진노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비유를 듣고 자기들(이 후자인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성전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구원자)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21:45-46.참고/막12:1-12;눅20:9-19).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서, 농부들이 포도원 밖으로 주인의 아들을 내쫓아 죽인 것과 같이,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성문 밖으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죽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들이 버린 쓸모없는 돌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가로막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존재로 보이시나요? 당연히 머릿돌로 보이실 줄 믿습니다. ‘머릿돌’Capstone은 건축물의 가장 근간이 되는 기초석. 정초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징적으로는 교회의 근간이자,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합니다(참고/시118:22;마21:42;막12:10;눅20:17;엡1:22;골1:18).
그런데 머릿돌이신 예수님이 2천 여 년 전 세상에 오셨을 때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졌고, 심지어 죄인으로 몰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기까지, 공사장에서 사람들에게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와 같다고 하였습니다(롬9:33). 그러나 하나님이 살리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높이심을 받고, 인류의 구원자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렇기 머릿돌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만유의 통치자로서, 자리매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롬9:33).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요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것도 부끄러움이 아니요 영광이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들을 ‘존대’ 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으로, ‘농부’인 성도는 ‘주인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존대’하지 않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돌이 사람이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인과 세리와 창녀라도 예수님을 ‘존대’하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주님의 구원으로 영생을 받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은 ‘존대’ 해야합니다. 주님이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존대하다’는 헬라어 ‘티마오’τιμάω,timavw로 “가격을 정하다, 물질을 지불하다, 높이 평가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존대는 말로만이 아닌 가시적으로 나타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존대하는 자는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워 주인이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낼 때, 열매를 드리는 농부가 되어야합니다. 농부는 성도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열매는 여러분 각 각이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존대하는 자는 열매를 드립니다.
주님의 예복을 입은자, 믿음을 드려라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2:1-14.참고/눅14:15-24)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22:1-2).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22:3).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 까지 하였습니다(22:4-6). 앞에 포도원 비유와 유사합니다. 초대받은 자들은 혼인 잔치에 오라는 주인의 종들을 능멸했습니다. 이는 주인을 거역한 것과 같습니다. 종들은 주의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인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7). 왕권을 경멸하고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앞의 포도원 주의 명을 거역한 농부들을 진멸한 것과 동일합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명하자,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였습니다(8-10). 연회장이 만석이되자 입장한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22:11-1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라는 점입니다. 왕정 시대에는 한주, 두주 동안 진행되는 국가적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몇 달 전부터, 초청할 자들을 미리 선정하고, 종들에게 이를 알리도록 하고, 잔치에 입을 좋은 예복까지 미리 전달해 줍니다. 한 달 전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는데요. 축하 무도회 시간에는 일상복을 입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준비된 무도회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임금이 준비해 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임금이 혼인 잔치 초대를 위해 보낸 종들을 죽인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역시 왕권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것도 귀한 일이고, 더욱이 예복까지 받았는데, 당연히 잔치에 예복을 입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왕이 친히 준비한 예복을 입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복은 우리가 만들어서 입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예복을 받고, 입으면 됩니다. 그저, 초대에 응하고, 주신 것을 입기만 해도, 왕은 그 행동을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기뻐하는 태도로 여겨줍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이 농부인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들 예수를 존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존대하는 자는 열매를 드립니다. 또 다른 비유에 임금으로 등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예복을 주신 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신랑으로 맞이할 신부될 성도를 원하시는데, 신부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이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임금이 혼인 잔치에 초청할 때 예복까지 미리 전해 주듯이 믿음은 선물입니다. 왜! 믿음이 선물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임금은 종들에게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10). 누구든 관계없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4:22).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아들의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예복으로 여기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혼인 잔치의 기쁨에 온전히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복인 믿음을 저버리면,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예복을 입지 않은 자)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22:13).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임금의 혼인 잔치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을 불살라 버린 것과, 혼인 잔치 초대에 응하였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초대에 불응한 자와 같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아무 댓가 없이 주어지는 믿음을 붙잡지 않는 것을 지옥에서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후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22:14.참고/눅14:15-24). 선민인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청함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복,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택함 받은 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교회에 인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예복, 믿음을 붙들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믿음을 떠난 것은 자기 잘못임을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예복은 믿음입니다.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다른 이유로 저버렸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잊지 말고 매일 소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축복하고 사랑하고 중보하는 이들이 예수님 앞에 설 때까지, 예복, 믿음을 붙잡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택자인 주님의 예복을 입은 자는 믿음으로 드리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자, 정의를 드려라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즉, 구약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 (돌대가리)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마5:21-31.참고/출20:13;신5:17). 예수님은 율법에 적시된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해석한 주님이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마5:17;롬10:4,13:10). 그러므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이란, 율법에 기록된 글자, 문자인 조문을 넘어 율법의 의미인 정신을 보아야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15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15-22.참고/막12:13-17;눅20:20-26)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와 혼인 잔치 비유로 할 말을 잃은 종교지도자들은 멈추지 않고 도발을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였습니다(22:15). 그런데 이번에는 ‘헤롯 당원’Herodians들 까지 끌어들였습니다. 헤롯 당원이란? 헤롯 왕조와 로마법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같이 이스라엘에서는 매국노와 갔습니다. 헤롯 당원들의 정책이나 노선은 율법에 충실하며 전통을 고수하던 바리새인들과는 정면으로 대치되었지만, 예수님을 반대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원과 연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22:16.참고/막3:6,12:13).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고 아부를 떨면서,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시며,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말씀을 듣고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갔습니다(22:16-22.참고/막12:13-17;눅20:20-26).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세금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서로 대치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이나 모양도 만들지 말라는 율법 앞에 황제의 형상이 들어간 화폐로 세금을 내는 것을 꺼렸습니다(출20:4;신4:15-18). 그러나 헤롯 당원은 우호적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오는 이권을 누리며, 헤롯 왕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졌다고 가이사의 것입니까? 이 세상의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로마제국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 화폐 또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국가의 법을 준수한다고 대통령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국가를 세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있다고,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형상과 모양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의 조문에만 머물지 말고 율법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 논쟁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22:23-33.참고/막12:18-27;눅20:27-40).
같은 유대교이지만, 바리새인과 달리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며, ‘수혼법’에 따른 ‘계대 결혼’을 적시한 율법을 인용하면서,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고 물었습니다(23-28.참고/신25:5).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계대 결혼으로 이렇게 복잡한 관계가 발생했을 때, 남자 형제는 일곱이고, 그들의 아내는 하나인데, 만약에 모두가 다시 산다면, 도대체 이 남자 중 누구의 여자가 될 것이냐는 이성적인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며,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22:29-30). 사람이 죽고 난 뒤 다시 살게 되면, 지금의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육체가 되기 때문에, 천사와 같이 결혼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영생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라고 하시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31-32.참고/출3:6). 모세 당시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는 수가 다해 생을 마쳤을 뿐, 천국에서는 살아서, 지금 하나님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이러한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시자, ‘무리가 듣고 가르치심에 놀라더라’고 하였습니다(32-33.참고/막12:18-27;눅20:27-40). 율법 조문의 죽음은 영멸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고전15:56).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조문의 죽음은 영멸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의 죽음은 영생입니다. 죽음은 영원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를 믿게합니다(롬3:20). 그러므로 율법 정신의 죽음은 영생입니다.
가장 큰 계명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4-40.참고/막12:28-34;눅10:25-28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부활을 깨우쳐 주신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고 묻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34-40.참고/막12:28-34;눅10:25-28). 병행 본문에는 예수님에게 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고 하였습니다(눅10:29). 즉 자기는 하나님 사랑과 같이 이웃도 사랑한다고 자신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동족인 유대인만을 이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유대인 중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같은 유대인인)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유대인 중)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않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나는 가야 할 길을 마저 가야 하니)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자, 율법사는 자신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답했고,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눅10:31-37).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 이웃 사랑은 자기 동족에게만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의 이웃 사랑은 나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할 분들로 영적 돌봄이 필요한 이분들입니다.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41-46.참고/막12:35-37;눅20:41-44).
예수님은 율법의 조문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계명을 받으라고 하신 후,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이번에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22:41).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말하자,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였냐고 하였습니다(22:42-43). 다윗이 “주께서(하나님께서) 내 주께(그리스도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22:44). 구약 시편 110편 1절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자랑으로 여기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며, 다윗의 뿌리에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도 자기의 족보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고 호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너희는 여기 서 있는 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 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하였습니다(22:41-46.참고/막12:35-37;눅20:41-44).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이란, 율법에 기록된 조문을 넘어, 율법의 의미인 정신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재림 때까지, 자기 오른편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을 뜻하는 헬라어 ‘덱시오스’δεξιος,dexios로 히브리어로는 ‘야민’יָמִין입니다. 그 뜻은 “바른, 올바른, 확고한, 영접한, 받은”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과 같이 오른쪽에 서야 합니다. 오른쪽 ‘Righteousness’ 정의입니다. 정의는 하나님 오른편에 서야합니다. ‘좌편’은 ‘저주를 받을 자‘ 악인 ‘염소’요, ‘오른편’은 ‘복을 받을 자’ ‘의인’ ‘양’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33,34,41;요2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오른쪽에 서 있는 줄 믿습니다.
대한민국 행정 수반이 오른쪽에 서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최고위직 국가 공무원이 오른쪽에 서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장성들이 오른쪽에 서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오른쪽에 서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른쪽에 서 있는 성도는, 교회에서도 오른쪽에 섭니다. 성도에게서도 오른쪽에 섭니다. 목사에게서도 오른쪽에 섭니다. 오른쪽은 옳은 길입니다. 정의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는 정의를 드려야 합니다.
포도원의 농부인 성도는 아들 예수를 존대하기를 원하시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열매를 원할 때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열매는 여러분 각 각이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존대하는 자는 하나님께 열매를 드립니다.
임금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자는 미리 준비해 주신 예복, 믿음을 드려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다른 이유로 저버렸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예복을 입은 자는 믿음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재림 때까지, 자기 오른편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오른편 교회의 오른편에 서야합니다. 오른편은 옳은 길입니다. 정의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는 정의를 드립니다.
정리
예수님은 지금 교회력 고난주간 화요일 성전에 올라가시면서,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도 있는 믿음의 기도와 그 기도에는 십자가 선상에서도 못 밖은 자들을 용서하신 것과 주님의 용서가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신 후,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두 아들 비유로 천국에 들어갈 자에 대하여, 앞에서는 제사를 바로 드려야 한다고 백성에게는 가르치고, 뒤에서는 제물을 파는 장사꾼과 환전상들과 결탁 수뢰하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자신은 죄인이라며 긍휼을 구하는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마9:10,21:1-32;막2:15,11:1-33;눅5:30,19:28-20:8;요12:12-22).
주님을 존대하는 자, 열매를 드려라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들으라며, 한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열매 얻을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 가져오도록 하였으나,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21:33-35). 주인의 명을 받은 종을 능욕한 것은 주인을 없신 여긴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인내하고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그들에게도 그렇게하였습니다(36). 주인은 고심 끝에 아들을 보내면 존대하리라 생각했습니다(21:37).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 달리 농부들은 산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치하자고 하였습니다(21:38-39).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고, 농부는 광의적으로는 이스라엘 전체, 협의적으로는 본문의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주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성문 밖’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히13:11-12). 이에 대해 농부들이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39).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것과 같이,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공사장에 필요 없는 돌을 버려버리듯이, 십자가에 죽게 했지만. 하나님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하는 기이한 일을 행한 것과 같이, 아들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21:40-42.참고/시118:22;사28:16;행4:11;빌2:9-11;벧전2:7).
예수님은 예수님을 영문 밖에서 죽인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러므로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43).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라는 이전 문맥과 연결할 때, 자신은 죄인이라며 탄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을 말하고, 광의적으로 저와 여러분 이방인을 말합니다. 잘못된 선민사상을 가진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로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받은 민족이요, 육체의 할례를 받았기에 구원받았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주인의 아들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12:44-50). 이렇게 잘못된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는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입성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천국을 빼앗기고, 이방인들에게 지옥의 땔감이라고 하였지만, 정작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즉 이방인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8:11).
‘주인’은 아들을 ‘존대’ 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으로, ‘농부’인 성도는 ‘주인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존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존대’하지 않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돌(예수님)이 사람이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습니다(21:44). 그러나 죄인과 세리와 창녀라도 예수님을 ‘존대’하면, ‘이 돌(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사람’과 같이, 주님의 구원으로 영생을 받습니다(21:44).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비유를 듣고 자기들(이 후자인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성전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구원자)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21:45-46.참고/막12:1-12;눅20:9-19). 성도는 예수님은 ‘존대’ 해야합니다. 주님이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존대하다’는 헬라어 ‘티마오’τιμάω,timavw로 “가격을 정하다, 물질을 지불하다, 높이 평가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존대는 말로만이 아닌 가시적으로 나타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존대하는 자는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워, 주인이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낼 때, 열매를 드리는 농부가 되어야합니다. 농부는 성도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열매는 여러분 각 각이 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존대하는 자는 하나님께 열매를 드립니다.
주님의 예복을 입은 자, 믿음을 드려라
예수님은 다른 비유로 대답하여, 천국은 마치 아들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며,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을 오라 하였지만, 각 각 자기들 사정만을 내세우며 응하지 않고, 어떤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22:1-6). 이에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랐습니다(22:7). 그리고 종들에게 거리로 나가 만나는 데로 청하여 오라 명하자, 혼인 잔치에 손님들로 가득하였습니다(22:8-10). 연회장이 만석이되자 입장한 손님을 보는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친구여 왜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하이 그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22:11-12). 왕정 시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는 한 주, 두 주 동안 진행되는 국가적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수개월 전부터 초대할 자에게 전갈하고, 잔치에 입을 예복까지 미리 전달해 줍니다. 그런데 임금이 준비해 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임금이 혼인 잔치 초대를 위해 보낸 종들을 죽인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왕권을 경멸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왕이 친히 준비한 예복을 입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은 자기 권위를 인정하고 기뻐하는 태도로 여겨줍니다. 또 다른 비유에 임금으로 등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우리에게 주실 예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신랑으로 맞이할 신부될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사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22:10). 누구든 관계없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느니라’(롬4:22).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예수 믿음을 통해 혼인 잔치의 기쁨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복인 믿음을 저버리면, ‘임금이 사환들에게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구원받지 못합니다. 임금의 혼인 잔치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을 불살라 버린 것과, 혼인 잔치 초대에 응하였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 아무 댓가 없이 주어지는 믿음을 붙잡지 않는 것을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22:13).
예수님은 비유 후,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22:1-14.참고/눅14:15-24).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청함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복,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택함 받은 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교회에 인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예복, 믿음을 붙들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믿음을 떠난 것은 자기 잘못임을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예복은 믿음입니다.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다른 이유로 저버렸다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잊지 말고 매일 소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축복하고 사랑하고 중보하는 이들이 예수님 앞에 설 때까지, 예복, 믿음을 붙잡게 하옵소서. 택자인 주님의 예복을 입은 자는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 정의를 드려라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즉, 구약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 (돌대가리)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마5:2-3.참고/출20:13;신5:17). 예수님은 율법에 적시된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해석한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마5:17;롬10:4,13:10). 그러므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이란, 율법에 기록된 조문을 넘어 율법의 의미인 정신을 보아야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와 혼인 잔치 비유 가르침으로 할 말을 잃은 종교지도자들은 멈추지 않고 도발을 계속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였습니다(21:15).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제자들과 대적 관계 있는 ‘헤롯 당원’Herodians들 까지 끌어들여, ‘예수께 보내’ 아부를 떨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묻자, ‘예수께서 악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며,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신고,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하셨고, ‘가이사의 것이니이다’고 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놀랍게 여겨 떠나’갔습니다(22:16-22.참고/막12:13-17;눅20:20-26).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세금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서로 대치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이나 모양도 만들지 말라는 율법 앞에 황제의 형상이 들어간 화폐로 세금을 내는 것을 꺼렸습니다(출20:4;신4:15-18). 그러나 헤롯 당원은 우호적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오는 이권을 누리며, 헤롯 왕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졌다고 가이사의 것입니까? 이 세상의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로마제국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 화폐 또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국가의 법을 준수한다고 대통령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국가를 세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있다고, 가이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조문에만 머물지 말고 율법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 논쟁. 같은 유대교이지만, 바리새인과 달리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수혼법에 따라, 어느 집안의 일곱 형제와 그들과 결혼한 한 아내도 죽었는데, 만약에 모두가 다시 산다면, 도대체 이 남자 중 누구의 여자가 될 것이냐는 이성적인 질문입니다(참고/23-28.참고/신25:5).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며, 사람이 죽고 난 뒤 다시 살게 되면, 지금의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육체가 되기 때문에, 천사와 같이 결혼이 필요치 않다고 하셨습니다(29-30). 이제는 영생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라고 하시며, 구약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당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는 수가 다해 생을 마쳤을 뿐, 천국에서는 살아서 지금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31-32.참고/출3:6).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시자, ‘무리가 듣고 가르치심에 놀라더라’고 하였습니다(32-33.참고/막12:18-27;눅20:27-40). 율법 조문의 죽음은 영멸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고전15:56). 죄의 결과가 죽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문은 영멸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의 죽음은 영생입니다. 죽음은 영원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를 믿게합니다(롬3:20). 율법의 정신은 영생입니다.
가장 큰 계명.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부활을 깨우쳐 주신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고 묻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하셨습니다(34-40.참고/막12:28-34;눅10:25-28).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동족인 유대인만을 이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유대인 중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는데, 그 앞에 같은 동족인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지만,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불쌍히 여겨, 치료하고, 주막에 데려다가 보살피고,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자, 율법사는 자신들이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답했고,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눅10:31-37).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 이웃 사랑은 자기 동족에게만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의 이웃 사랑은 나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어야 할 분들로 영적 돌봄이 필요한 이분들입니다.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율법의 조문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가르쳐 주신, 주님의 계명을 받으라고 하신 후, 바리새인에게 그리스도를 누구의 자손이라 생각하느냐 물었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답하자, 그러면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41-43). 다윗이 “주께서(하나님께서) 내 주께(예수님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44). 구약 시편 110편 1절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에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이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도 자기의 족보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주라고 호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 너희는 여기 서 있는 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 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고 하였습니다(41-46.참고/막12:35-37;눅20:41-44).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이란, 율법에 기록된 조문을 넘어, 율법의 의미인 정신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재림 때까지, 자기 오른편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을 뜻하는 원문의 뜻은 “올바른‘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과 같이 오른쪽에 서야 합니다. 오른쪽 ‘Righteousness’ 정의입니다. 정의는 하나님 오른편에 서야합니다. ‘좌편’은 ‘저주를 받을 자‘ 악인 ‘염소’요, ‘오른편’은 ‘복을 받을 자’ ‘의인’ ‘양’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33,34,41;요2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오른쪽에 서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오른쪽에 서 있는 성도는, 교회에서도 오른쪽에 섭니다. 성도에게서도 오른쪽에 섭니다. 목사에게서도 오른쪽에 섭니다. 오른쪽은 옳은 길입니다. 정의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는 정의를 드려야 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드립니다.
①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들인 예수님을 농부인 성도들이 존대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주님만을 높이게 하옵소서. 주인인 하나님이 열매를 원하실 때 드릴 수 열매를 드릴 수 있는 농부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존대하는 자로 열매를 드리게 하옵소서.
② 임금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 혼인 잔치에 청한 자들에게 주신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신랑으로 맞이할 신부될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이면 됩니다. 우리와 우리가 축복하고 사랑하고 중보하는 이들이 예수님 앞에 설 때까지, 예복, 믿음을 붙잡게 하옵소서. 택자인 주님의 예복을 입은 자로 믿음을 드리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재림 때까지, 자기 오른편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오른편 교회의 오른편에 서게 하옵소서. 오른편은 옳은 길입니다. 정의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로 정의를 드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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