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요구는 행복이다
하나님말씀 : 신명기 10:12-13 2025.05.04., 어린이어버이主日禮拜
가정의 자녀는 부모로 인해 행복하고, 부모는 자녀로 인해 행복하고,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행복하다면, 참 좋은 일 일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는 성도로 인해, 또한 성도는 성도로 인해, 행복한 것 또한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 사이의 행복을 갖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행복을 주다가,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이들이 그들이 일 수 있습니다. 한계가 없는 영원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불행하게 하지 않게 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어느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아는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하셨습니다(마7:9-11).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유업을 받을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갈4:5-7.참고/요10:30,13:3).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네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신10:13). 이 요구는 ‘명령과 규례’입니다(신10:13). 요구要求,Demand는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부당한 요구를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과 규례는 정당한 요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받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정당한 이유는 아들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명령과 규례에 거역의 본능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기쁨과 감사와 자원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리할 때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 이 말씀에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하나님의 요구, 첫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입니다. 이 말씀에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신명기 10장 12-13절은 출애굽기 34장 1-10절을 리바이벌한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하산한 모세의 눈앞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출32:4). 이에 격분한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땅에 내치어 깨치게 됩니다(출32:19). 그 후 하나님은 재차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는데 두 돌 판을 직접 만들어 올 것을 명령하십니다(출34:1-2,10.참고/신10:1-2). 본문은 이 배경에 있었던 사건을 40년이 지난 후, 그 말씀을 듣지 못했던 출애굽 2세들에게 모세가 다시 한 번 설교한 것입니다.
십계명 첫 번째는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출20:3). 두 번쩨는 짐승과 일월성신 모양을 한 우상을 만들어 너희들을 위하여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출20:4-6).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것도 섬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에 다른 믿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준비한 돌 판에 두 번째로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 가운데, 이방 나라의 주민과 언약도 통혼도 우상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의 신상을 만들게 되면, 애착을 갖게 되고, 들여 보게 되고, 결국에는 경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출34:15-17).
우리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을 구별하여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단사이비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믿어야 할 분이 있다면서, 자신들의 창시자나, 교주가 “또 다른 하나님, 또 다른 예수, 또 다른 성령이다.”며 마수를 뻗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함께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내가 교제하는 사람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딤후2:15) 믿음의 사람을 따르면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불신의 사람을 만나면 불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라고 하는 이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믿던 복음이 낡고 오래된 것입니까? ‘새로운 복음新福音’은 없습니다. ‘새로운 복음’은 ‘다른 복음’이고, ‘다른 복음’은 ‘틀린 복음’입니다(갈1:6-9). ‘새로운 복음’은 없고 ‘새로운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참고/엡2:14-17). 신복음주의는 전도를 위해서라면, 타 종교와도 대화해야 하고, 반성경적 단체와도 연합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구원자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 오직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2:16). ‘오직’ 에 ‘다른’ 무엇을 더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포용주의입니다. 함께 섞는 것은 혼합주의입니다. 나란히 세우는 것은 다원주의입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복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이 없듯이 “새로운 복음”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있습니다(갈1:7). 우리는 이들과 같이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교제하는 사람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참고/요이1:8-11).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과 규례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만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사람들과 교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믿는 자들도 우리의 전도 대상자이기에 배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안 믿는 자들의 사상과 언행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어떤 면에서는 안 믿는 분들보다 믿는 분들로 인해 신앙에 더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믿는 분들이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만을 경외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에 다른 믿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경외하기 소망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2.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하나님의 요구, 둘째는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라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라”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 벧엘, 길갈은 북이스라엘의 섬기던 잡신과 맘몬이 가득했던 도시였습니다. 브엘세바 또한 남 유대였지만 우상숭배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으로 가지 말라, 그리로 가면,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비참하게 될 것이며, 심판의 불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을 찾아야 ‘살리라’고 하십니다(암4:4-6). 우리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이 세상은 ‘장망성’將亡城,the City of Destruction입니다. ‘멸망의 성읍’, ‘파멸의 도시’라는 뜻입니다(사19:18). 우리는 장망성인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당하자, 우상의 도시인 이방 모압으로 이주하여, 자부를 맞이하고, 행복할 것 같았지만, 남편과 두 아들을 연이어 잃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룻1:1-5).“기쁨”이라는 뜻의 나오미를 “고통”을 의미의 “마라”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룻1:20).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자부들에게 이별을 고하였고, 큰 며느리는 친정으로 돌아 갖지만, 둘째 룻은 끝까지 떠나지 않겠다며,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룻1:6-7,14-17,19). 룻은 시모를 봉양하기 위해 한 밭에서 추수 때 떨어진 이삭을 주었는데, 그 밭의 주인이 베들레헴의 유력자인 보아스이었습니다(룻2:3). 친척으로 그 집안의 사정을 알고 있던 보아스는 룻에게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하였습니다(룻2:8). 집에 돌아가 이를 나오미에게 고하자, 그는 우리와 가까우니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면서, 다른 밭에 가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만 가라고 일렀습니다(룻2:20-23).
그 이후 룻은 보아스와 유대 계대결혼법에 따라, 결혼을 하게 되고, 다윗의 할아버지이자, 메시아의 조상인 ‘오벳’을 출산하게 됩니다(룻4:17).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명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마1:5). 룻은 손위 동서도 떠났지만, 어머니의 고향이 나의 고향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며 고백하며 끝까지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곧 하나님을 따른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밭에 이삭을 주우면서 밭주인인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애기를 들은 시어미니 나오미도 룻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보아스의 밭에만 가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따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 사람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행복을 받는 사람은 들을 말을 듣게 됩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비유에서, 길가, 바위,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 옥토입니다. 그 중에 길 가에 떨어진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눅8:12).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마귀가 말씀을 자꾸 빼앗아 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좋은 땅에 뿌려져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백배의 결실을 맺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눅8:15.참고/마13:23). 하나님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룻과 같이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자입니다.
목사는 누구인가 ‘목사’는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성도들에게 듣도록 전하여, ‘성도를 온전하게’하는 자입니다(엡4:1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재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에게 그 하나님 말씀을 듣도록 전하는 목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목사도, 그 말씀을 듣는 성도도 함께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하나님의 요구 셋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입니다(신10:12).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수없이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사랑으로 답할 수 있습니까?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신10:1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영‘은 “뜻을 다하여”라는 의미가 갖고 있습니다(요4:24). 너는 마음과 뜻, 마음과 영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마22:37), 이어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22:38-40).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마음과 뜻 즉 마음과 영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은 광의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할 수 있고요. 협의적으로는 우리 가정의 가족과 교회의 성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부인 마음과 뜻 즉 마음과 영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가족과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형식적으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즉 모양만 마음과 뜻, 마음과 영을 다해, 가족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까지 내어주시며 사랑했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께만 찾을 수 있고,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마음과 뜻, 마음과 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누구에게요. 가족과 성도에게 마음과 뜻, 마음과 영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가족과 성도들 어떻게 사랑하는 가를 보면, 하나님께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족과 성도에게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합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께 마음과 뜻, 마음과 영을 다해 사랑하듯, 가족과 성도에게 한다면, 그 가족과 성도가 하나님 사랑으로 나와야 합니다. 즉 행복은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는 것을 내 가족과 성도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한 가족과 성도가,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 때, 여러분의 마음과 뜻, 마음과 영을 다해, 가족과 성도들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이 말씀을 담기를 바랍니다.
4. 다음 제목으로 합시하여 기도합시다.
① 예수님은 어느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하나님만이 영원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신뢰가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을 찾고, 받고 누리게 하옵소서.
②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 주신 명령과 규례 첫 번째,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렇지 않는 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성령의 분별을 주옵소서.
③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 주신 명령과 규례 두 번째,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좋은 땅에 뿌려진 백배의 결실을 맺음과 같이, 말씀을 들을 것을 듣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④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 주신 명령과 규례 세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마음과 뜻을 다해 섬기고, 이웃, 내 가족과 성도들에게도 마음과 뜻을 다하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⑤ 5월 가정의 달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에게로 부터만 오는 것임을 아는 모든 가족과 또 하나의 가족인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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