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마가복음 15:21-32 2025.09.21. 主日禮拜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21-32)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구레네 시몬
성경에는 동명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그들의 출생지 또는 거주지를 표기합니다. 가롯 유다가 대표적입니다. 성경에 유다가 여러 명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을 판 유다를 기록할 때는 그의 출신지가 ‘가리옷’Cariot이기 때문에 지명을 이름 앞에 기록하여, 다른 동명인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시몬’Simon,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도 그렇습니다. 이 이름도 많은 사람이 인명으로 사용되었기에 본문의 시몬 앞에 ‘구레네’Cyrene라는 지역이 기록된 것입니다. 구레네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도시입니다. 헬라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서 B.C. 5세기 이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집단 거주했습니다. 이곳에서 자란 시몬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마치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오순절 칠칠절로도 불리는 맥추절과 우리의 추수감사주일에 해당하는 초막절은 삼대 절기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드려야 했습니다(출23:14-17). 이 명절에는 해외에 흩어진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참고/행2:1,5). 그렇기에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도시인 구레네에 거주하던 시몬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것입니다.
명절을 지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음을 알게 됩니다. 소동의 진원지는 성문 밖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모여 들었고요. 구레네 시몬은 본문에 ‘시골’로 기록된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다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막15:21). 그는 거기서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이른 아침까지, 세 번의 재판과 가혹한 채찍 그리고 모욕과 고초로 한숨도 자지 못한 체, 십자가가 끌고 가는 것인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도와주는 이는 없었고요.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를 제외하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자신을 희롱하는 말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넘어졌다 가까스로 일어 섰다를 수차례하시면서, 골고다 덕을 향해 핏자국이 선명한 발걸음을 내디셨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십자가 형 집행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은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자,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하는데요. 이 시간이 되기 전 십자가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부정한 것을 나무 위에 달려있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심한 매질과 먹지도 자지도 못하신 상태에서, 탈진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제대로 걸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연구가 의하면,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전 사형수에게 기절할 정도로 모진 채찍질을 가한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쓰던 형벌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의 기분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습니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짐승의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고,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루 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듭니다. 이 채찍에 맞게 되면, 멍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요. 상처 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갑니다. 이런 채찍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린치'Lynch를 가하는데요. 단순히 몇 대 맞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혹독하게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 팔, 가슴,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 고환까지,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합니다. 이렇게 얻어맞으면, 사형수는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됩니다.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내장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범죄자들은 이 채찍 형을 당할 거라는 말을 듣고 자살할 정도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채찍질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 고증을 통해 연출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채찍질로 이렇게 죽음 문턱에 이른 사형수에게, 자기가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고, 처형장까지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 형틀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무겁게 보는 학자들은 50-60kg 까지 다양하지만, 확실한 건 빈사상태인 사람이 쉽게 지고, 이동할 만한 무게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도 넘어지거나 하면 채찍질을 당합니다.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겪는 고통도 엄청난데, 이런 식으로 몸을 혹사당하면, 그만큼 빨리 상처의 괴저가 일어나, 전신이 불로 달구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중도 사망하는 죄수도 많았는데, 이때 사형수의 가족들은 채찍질하는 집행인에게 뇌물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채찍질을 살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채찍질 더 심하게 해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덜 고통스럽게 채찍질로 미리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도 감함 없이 모든 채찍과 구타를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거반 죽음에 이른 사형수가 십자가를 들고 사형장으로 오면, 십자가에 매달 준비를 합니다. 우선 사형수의 속옷까지 모두 벗겨 나체로 만듭니다. 성화같은 것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반바지 같은 것을 입고 계신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최대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최대의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발가벗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22:6-8,14-17). 이 말씀 그대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을 모든 준비를 마치면, 사형수를 십자가에 눕히고, 손목과 발뒤꿈치에는 최대 18Cm 정도에 사람 몸무게를 지탱할 만한 초대형 대못을 박습니다. 이 못은 인간의 체내의 중추 신경계를 완전히 부숴버립니다. 그 고통은 정신이 완전히 파괴될 정도입니다. 팔꿈치를 벽에 세게 부딪칠 때, 혹은 팔 아래로 뻗어있는 척골신경을 펜치로 잡고, 비틀어서, 뭉개는 고통과 비슷해서 사람이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십자가형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드렸는데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으시다가 쓰러지고 쓰러지셨는지, 그 상황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안식일 저녁이 되기 전 십자가형을 마쳐야 하고, 빈사상태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요. 이러한 때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병사에게 눈에 띠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주변에 있던 무리들 가운데, 아무나 붙잡아 도우라고 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몬을 시킨 것을 보면, 아마 그 일에 적합한 인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앞서 설명한데요. 시몬의 성장지가 구레네인데요. 이곳은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해안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그림이나 영화에서 시몬은 대개 흑인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구레네 사람들은 흑인이 아닙니다. 이곳은 아프리카이지만, 구성원들이 아랍인입니다. 그런데 1965년 영화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서는 구레네 시몬 역으로 흑인 배우가, 2004년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백인으로 등장합니다. 이 둘 모두 사실을 묘사한 배역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돕는 조력자로 로마 병사는 구레네 시몬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병사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자로 구레네 시몬을 택했지만,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로마 병사들이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십자가를 지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15:21). 로마 병사는 마땅한 자로 여겼지만, 본인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억지로 동참하게 된 사람 구레네 시몬입니다.
구레네 시몬의 회심과 변화 그리고 흔적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으로 더 이상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이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본문을 보면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면서, 그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막15:21). 성경에 누구를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 예를 들면 요한과 야고보를 언급할 때,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마4:21). 그러나 누구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특정인을 기술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병행본문인 마태복음 27장 32절과 누가복음 23장 26절에는 구레네 시몬만 기명되어 있는데요.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에만 그의 두 아들을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가 이렇게 기록한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구레네 시몬에 대한 이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그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함께 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16:13).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과 동역했던 인물 가운데 ‘루포’ 즉 구레네 시몬의 아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에게 문안할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구레네 시몬에 대한 말씀은 본문 이후로 찾아 볼 수 없지만,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것과 달리, 골고다에서 집행된 예수님의 십자형을 보면서 회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과 아내가 훗날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로마서에 기록했던 것이지요. 바울은 수많은 전도 여행에서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교회에서 본이 될 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록하였는데요. 그렇다면 구레네 시몬의 아들과 아내가 평범한 성도가 아니라, 로마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는 중진급 성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인물입니다(벧전5:13). 바나바의 생질이기도 했던 마가는 바나바가 사도 바울과 전도 여행을 함께 할 때, 자연스럽게 사도 바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동참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귀향하여 한동안 바울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으나, 후에 그는 바울의 신실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참고/행15:37-39;골4:10;딤후4:11;몬1:24). 이러한 마가의 이력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었고요. 그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과거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과 아내임을, 본문을 통해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회심한 것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초대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기 그의 아들과 그의 아내가 훗날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레네 시몬의 변화는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과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 기록된 데로 로마 병사에 의해 억지로 예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평생 있지 못할 ‘스티그마’‘στιγμα’,‘stigma'를 갖게 됩니다. 스티그마는 ‘흔적'이란 뜻의 헬라어입니다. 과거 로마 시대 때 노예들에게 주인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표시하며, 찍어 놓은 낙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하였습니다(갈6:17).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의 흔적’을 자기 몸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체험을 통한 예수의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복음 증거하다가 당한 환난을 ‘예수 흔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 육체의 흔적을 직접 자신의 몸에 갖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은 이미 빈사상태였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성한 곳이 없고, 찢겨진 살점은 리본같이 매달리고, 살색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온 몸을 덮었습니다. 그 옆에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의 혈과 육이 묻어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기에 예수님의 혈과 육이 자신에게 묻어나는 것이 싫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혈과 육이 베었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예수님의 흔적을 갖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레네 시몬이 바라본 예수
구레네 시몬은 본문의 기록 그대로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 중에 로마 병사에게 끌려갔습니다(막15:21). 자기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마지막 예수 십자가의 예수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던 자들의 가래침과 돌멩이를 어쩌면 구레네 시몬도 맞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가뜩이나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구레네 시몬은 이제 예수에게 무리들이 뱉은 담연痰涎과 투석投石에까지 얻어맞았을 지도 모릅니다. 구레네 시몬은 불쾌하고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주님은 그 상황에서도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개의치 아니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히12:2). 자신은 미칠 지경인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담연과 투석에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절) 예언된 메시아의 고난을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당하신 것이지요. 이것이 구레네 시몬이 바라본 예수님입니다.
본문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무리들이 조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같이 봅니다.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15:29-31). 그뿐 아니죠. 예수님과 함께 형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도 예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32).
예수님을 공격하는데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종교 지도자에서부터, 일반 백성들 그리고 악행으로 법정 최고형을 받은 자들까지도 함께 했습니다(참고/마27:44;눅23:39).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다같이 읽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힐난詰難하는 자들에게 응대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 했습니다. 이것이 구레네 시몬이 바라본 예수님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은 이뿐이 아닙니다. 본문 다음 구절을 함께 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9). ‘백부장’은 일 백 여명의 로마 병사를 거느리는 영관급 장교입니다. 총독으로부터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라는 명을 받고 집행하는 총 책임자입니다. 그랬건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병행본문에는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고백하였다고 말씀합니다(눅23:47). 백부장 뿐만 아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마27:54). 이렇게 예수님 십자가 죽음에서 그를 못 밖은 자들의 변화는 모습을 누구도 지켜 보았겠어요. 예 맞습니다. 구레네 시몬입니다.
이렇게 일생 잊지 못할 예수님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게 된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지만, 그 동참이 주님 최후의 순간에 밀착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는 바로 구레네 시몬이 이후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에 대한 소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을 보면서, 자기의 십자가 길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
억지 자원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 각 자 이미 억지 동참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깊은 깨달음과 큰 도전 또한 이미 주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억지 동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전환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는 자원이라는 단어를 교회에서 많이 듣습니다. 자원은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설명하면서, 마게도냐 교회는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했다고 말씀합니다(고후8:1-4). 이렇게 성경은 예물 그리고 헌신에서 자원하여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5:2).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이들, 오늘날 목회자들은 주의 일을 하는데,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사역이란 평신도들도 제직으로서, 교사로서, 리더로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물과 헌신 그리고 직임과 봉사에서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원이 어떤 자원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모실 상전이 어떤 위치에 있던 인간이 인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에는 같은 유대 동족이 팔려 종이 되었을 때 규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렸다는 것은 돈으로 샀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돈 때문에 팔려간 사람은 억지로 종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섯 해를 종으로 섬겼으면 일곱째 해에 자유’ 주게 하였습니다(신15:12). 그런데요 칠 년째가 되었는데도, 자유인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종이 되기를 자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육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억지로 종이 되었지만, 주인이 너무나도 잘 대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인 일곱째 해가 되어서도, 그대로 종으로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들은 다른 종들과 달리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영구히 그 집안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신15:16). 처음에는 억지로 종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자원하여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것은 저와 여러분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이렇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자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점잖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강권입니다. “찍혔다‘는 말은 거친 표현인데요. 요즘 아이들 있지 않습니까? 초등생 중학생 여자 아이들이 그런다고 합니다. 자기를 어떤 남학생이 좋아하면, “나 아무개에게 찍혔어”라며, 그 찍힌 것을 좋아하고 자랑삼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를 찍어서, 강권하여 예수 믿게 하였다는 사실에 어떤 성도는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하지만, 어떤 성도 가운데는 “정말 왜 나를 예수 믿게 하셔서 이렇게 믿음대로 살라고 하는지, 나는 신앙생활이 체질이 아닌데” 투덜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찍힌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의와 관계없이, 마치 억지로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운 로마 병사 같이, 하나님이 강권하여 자기를 왜! 예수 믿게 한지를 깨달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 같이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강권하여 예수 믿게 하였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기뻐하기보다, “왜! 나를 예수 믿게 하여 교회를 섬기게 하는지” 아직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더라도, 낙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처음에는 억지이지만 깨달아가 회심하고, 그를 따르는 거룩한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원의 영적인 뜻입니다. 성도의 자원은 처음부터 자원일 수도 있지만, 억지로 믿게 되었다가 하나님의 인도를 깨달아가면서,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가래침과 돌로 맞으면서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희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의 대적자인 백부장과 지키던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교회를 섬기면서 이러한 역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성도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삶으로 전환 될 것입니다(고전9:19). 여러분 바울의 일대기를 알지 않습니까? 그가 자의로 예수님을 만났나요? 성도들 핍박하려 가는 길에 주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에 억지로 주의 종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자원한 종이 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기도 시간을 정하고, 예배 시간을 정하고, 봉사 시간을 정하고, 전도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 가고 싶지 않아도, 교회에서 가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원도 억지로 해야 자원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자원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과정에서 자원하는 분들로 거듭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은혜 소명
처음에 억지 동참한 구레네 시몬은 그렇게 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어주신 은혜를 알고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물론 아들과 아내까지 그 길을 따르는 성경에 기록된 가정이 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 동참하라고 명하실 때는 우리에게 이렇게 부어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부르신 소명이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을 청아비전교회에서 찾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를 현실에서 보면, 웬만한 교회는 개척할 때부터 이 정도 규모로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교회에 발을 디딪게 된 것이 어쩌면, 억지 동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부어주시고자 하는 은혜가 있고, 부르신 소명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억지로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 이는 누구입니까? 로마 병사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로마 병사를 누가 도구로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여러분을 청아비전교회로 인도한 분이 누구이세요? 어떤 성도이고 제직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여러분을 인도한 그 성도님이 아니면 제직되는 분이,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 만해 놓고 자기는 다른데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누구의 섭리에요. 하나님의 섭리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억지 동참에 임하시는 은혜 소명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같은 상황 다른 결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좌우로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15:27).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하였습니다(막15:32). 이 말씀은 예수님 좌우편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예수를 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과 같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좌편 강도는 예수님을 욕했지만, 우편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니와 예수님이 행하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눅23:40-41).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나를 기억’해달라고 하였고, 그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23:42-43).
그러면 오늘 마가복음은 잘못 기록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강도 둘 다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서론에 십자가 형을 받은 자들은 집행하기 전, 채찍과 구타로 빈사 상태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달렸으니, 악 밖에 남지 않고요. 그것을 옆에 있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쓰인 예수님에게 쏟아 부은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편의 강도는 변한 것입니다. 자기 옆에 고초를 당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도 구레네 시몬과 같은 회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알게 합니까?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동일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우편 강도에게 약속한 낙원과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여기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정리
구레네 시몬
구레네 시몬의 ‘구레네’Cyrene는 현재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한 지명입니다. 헬라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서 B.C. 5세기 이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집단 거주했습니다. 이곳에서 자란 시몬은 유대인들의 관례에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고(참고/출23:14-17;행2:1,5), 그때 십자가르 지고 가시는 예수님으로 큰 소동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자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고, 구레네 시몬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막15:21).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이른 아침까지, 세 번의 재판과 가혹한 채찍 그리고 모욕과 고초로 한숨도 자지 못한 체, 십자가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누구하나, 도와주는 이는 없었고요.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를 제외하곤, 모두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자신을 희롱하는 말을 쏟아내는 이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넘어졌다 가까스로 일어 섰다를 수차례하시면서, 골고다 덕을 향해 핏자국이 선명한 발걸음을 내디셨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 전에 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이미 빈사상태이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제대로 걸을 수 없었기에 로마 병사에게 눈에 띤 시몬 구레네를 예수님을 돕는 조력자로 택했습니다.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십자가를 지게했다’고 하였습니다(막15:21).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로마 병사는 마땅한 자로 여겼지만, 본인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억지로 동참하게 된 사람 구레네 시몬입니다.
구레네 시몬의 회심과 변화 그리고 흔적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는 본문 이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의 실명을 기록하고 있고(막15:21), 훗 날 사도 바울은 자신과 동역했던 인물 가운데 ‘루포’ 즉 구레네 시몬의 아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에게 문안할 것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롬16:13). 이로 미루어 보건대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것과 달리, 골고다에서 집행된 예수님의 십자형을 보면서 회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전도 여행에서 많은 동역자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교회에서 본이 될 만한 사람들을 기록하였는데요. 그렇다면 구레네 시몬의 아들과 아내가 로마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는 중진급 성도로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인물입니다(벧전5:13). 원래는 바울과 함께 했던 바나바의 생질로 전도 여행에 동참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귀향하여 바울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으나, 나중에는 신실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참고/행15:37-39;골4:10;딤후4:11;몬1:24). 이러한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들을 밝히 알 수 있었고,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과거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과 아내였음을 본문을 통해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회심한 것은 물론 제자로서, 초대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레네 시몬의 변화는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과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이미 빈사상태였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성한 곳이 없고, 찢겨진 살점은 리본같이 매달리고, 살색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온 몸을 덮었습니다. 그 옆에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주님의 혈과 육이 묻어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기에 예수님의 피와 몸이 자신에게 묻어나는 것이 싫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혈과 육이 베었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예수님의 흔적을 갖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레네 시몬이 바라본 예수
구레네 시몬은 의지와 관계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막15:21).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에게 뱉고 전진 가래침과 돌멩이를 어쩌면 구레네 시몬도 맞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는 불쾌하고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히12:2). 자신은 미칠 지경인데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잠잠하시며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사53:7). 무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무리가 조롱하였습니다(막15:29-31.참고/눅15:32).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 했습니다(눅23:34). 또한 십자가 형의 총 책임자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막15:39;눅23:47). 이렇게 일생 잊지 못할 예수님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게 된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지만, 그 동참이 주님 최후의 순간에 밀착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는 바로 구레네 시몬이 이후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에 대한 소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을 보면서, 자기의 십자가 길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
억지 자원.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억지 동참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전환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자원해야 하는 것은 바른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면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여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고 했습니다(고후8:1-4). 이렇게 성경은 예물 그리고 헌신에서 자원하여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사역에 있어서도, 목회자만 아니라 평신도도 억지로 말고 자원하여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원이 어떤 자원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종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에는 같은 동족에게 팔려 종이 되었을 때 6년을 섬겼으면 7년되는 해 자유를 주게했습니다(신15:12). 그러나 종 가운데 지난 육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억지로 종이 되었지만, 주인이 너무나도 잘 대해 주어 안식년인 일곱째 해가 되어서도, 그대로 종으로 있기를 원하면, 송곳을 가져다가, 귀를 문에 대고 뚫은 다음 영구히 그 집안의 종이 되었습니다(신15:16). 처음에는 억지로 종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자원하여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요6:44) 이와 같이 하나님이 강권하여 예수 믿게 하였다는 사실에 어떤 성도는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하지만, 어떤 성도 가운데는 “정말 왜 나를 예수 믿게 하셔서 이렇게 믿음대로 살라고 하는지, 나는 신앙생활이 체질이 아닌데” 투덜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강권된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만약 그렇더라도 낙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처음에는 억지이지만 깨달아가 회심하고, 그를 따르는 거룩한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원의 영적인 뜻입니다. 성도의 자원은 처음부터 자원일 수도 있지만, 억지로 믿게 되었다가 하나님의 인도를 깨달아가면서,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가래침과 돌로 맞으면서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희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의 대적자인 백부장과 지키던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교회를 섬기면서 이러한 역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성도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삶으로 전환 될 것입니다(고전9:19).
사도 바울도 자의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 핍박하려 가는 길에 주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에 억지로 주의 종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자원한 종이 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기도 시간을 정하고, 예배 시간을 정하고, 봉사 시간을 정하고, 전도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 가고 싶지 않아도, 교회에서 가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원도 억지로 해야 자원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자원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과정에서 자원하는 분들로 거듭나시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은혜 소명. 처음에 억지 동참한 구레네 시몬은 그렇게 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어주신 은혜를 알고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물론 아들과 아내까지 그 길을 따르는 성경에 기록된 가정이 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 동참하라고 명하실 때는 우리에게 이렇게 부어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부르신 소명이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을 청아비전교회에서 찾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를 현실에서 보면, 웬만한 교회는 개척할 때부터 이 정도 규모로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교회에 발을 디딪게 된 것이 어쩌면, 억지 동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부어주시고자 하는 은혜가 있고, 부르신 소명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억지로 구레네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 이는 누구입니까? 로마 병사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로마 병사를 누가 도구로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여러분을 청아비전교회로 인도한 분이 누구이세요? 어떤 성도이고 제직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여러분을 인도한 그 성도님이 아니면 제직되는 분이, 여러분을 교회로 인도 만해 놓고 자기는 다른데로 갔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누구의 섭리에요. 하나님의 섭리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억지 동참에 임하시는 은혜 소명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같은 상황 다른 결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좌우로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15:27).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하였습니다(막15:32). 이 말씀은 예수님 좌우편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예수를 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과 같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좌편 강도는 예수님을 욕했지만, 우편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니와 예수님이 행하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눅23:40-41).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나를 기억’해달라고 하였고, 그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23:42-43).
그러면 오늘 마가복음은 잘못 기록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강도 둘 다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서론에 십자가 형을 받은 자들은 집행하기 전, 채찍과 구타로 빈사 상태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달렸으니, 악 밖에 남지 않고요. 그것을 옆에 있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쓰인 예수님에게 쏟아 부은 것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편의 강도는 변한 것입니다. 자기 옆에 고초를 당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도 구레네 시몬과 같은 회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알게 합니까?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동일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우편 강도에게 약속한 낙원과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여기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최종 정리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은 북아프리카 리비아 구레네라는 곳에서 살던 유대인입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 억지로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면서 채찍과 구타로 찢겨진 예수님의 혈과 육이 자신의 몸에 묻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만큼 예수님의 혈과 육이 묻는다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도중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내뱉는 가래침과 돌도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 또한 원치 않는 것이니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에는 그것이 구레네 시몬에게 육체적인 영적인 예수의 흔적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구레네 시몬은 가래침과 돌로 맞으면서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희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의 대적자인 백부장과 지키던 자들이 변화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교회를 섬기면서 이러한 역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교회를 섬길 때 어떤 경우는 억지 동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원해서 참여하여 하는 것이 맞는데 말입니다. 어느 누구 던 처음 종이 될 때는 억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스스로 종 된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주인이 너무나도 자기를 귀하게 대해 주었기에 스스로 종이 된 것입니다. 어떤 성도이던 예수 믿는 것은 자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점잖은 표현으로 인도이고, 직설적 표현으로는 강권입니다. 이러함에도 처음부터 그 강권에 감격과 감사하는 성도가 있지만, 어떤 성도는 “왜 나를 예수 믿게 하는지 나는 신앙이 체질이 아닌데”라며 투덜거리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권하심에 순종하다보면 나중에는 억지에서 자원하며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억지로 믿게 되었지만, 믿고 난 이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원되지 않더라도, 구레네 시몬가 같이 억지 동참하다가 깨달아가면서 자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레네 시몬 같이 억지 동참이지만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을 보면서, 자기의 십자가 길을 알게 됩니다. 구레네 시몬의 억지 동참이 예수님의 마지막을 까까이서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어떤 시각과 태도로 섬겨야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고 싶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시간을 정해서 예배드리고, 시간을 정해서 전도를 하고, 시간을 정해서 봉사를 하게 되면, 억지 동참에서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강도에서도 보았듯이 동일한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동일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청아비전교회를 섬긴다면, 이 제단에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소명을 누리고 감당해야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우편 강도에게 약속된 낙원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룰 줄 빋습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함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로마 병사에 끌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27-31).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습니다(27-32). 시몬은 리비아 ‘구레네’Cyrene라는 곳에서 살던 유대인으로 규례대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다가 얼떨결에,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참고/출23:14-17). 채찍과 폭행으로 찢긴 예수님의 혈과 육이 자신의 몸에 묻게 되었습니다. 십자자가를 지고 가는 도중 무리가 예수님에게 내뱉는 가래침과 돌도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이 모두 원치 않는 것이니 화가 치솟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에는예수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막15:21). 바울은 동역자 중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하였습니다(롬16:13).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회심했고, 30년이 지난 후, 자신만 아니라, 아내와 자녀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로서, 초대교회를 세우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희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십자가를 끝까지 지셨던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섬길 때 어떤 경우는 억지 동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던지 예수 믿는 것은 자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강권입니다. 이러함에도 처음부터 그 강권에 감격과 감사하는 성도가 있지만, 어떤 성도는 “왜 나를 예수 믿게 하는지 나는 신앙이 체질이 아닌데”라며 투덜거리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권하심에 순종하다 보면 나중에는 억지에서 자원하며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참고/출21:6;롬1:1;약1:1;벧후1:1;유1:1). 억지로 믿게 되었지만, 믿고 난 이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원되지 않더라도, 구레네 시몬가 같이 억지 동참하다가, 깨달아가면서, 자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하고 싶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게 되면, 억지 동참에서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고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는 말씀을 보면, 주님 오른편에 달린 강도는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33-44.참고/막15:21-32;눅23:26-43;요19:17-27). 십자가에 두 강도가 있었지만, 동일한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눅23:39-43).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이라는 동일한 환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를 수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을 통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청아비전교회를 섬긴다면, 이 제단에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와 소명을 누리고 감당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억지 동참으로 여겨질 때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다짐하고 결단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있던 첫 번째 사람 구레네 시몬, ‘억지의 은혜’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억지 동참.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되었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달리신 주님을 보면서 변화되었고. 회심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기도, 예배, 봉사, 전도 시간을 정해서, 가고 싶지 않아도, 교회에서 가서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자원도 억지로 해야 자원이 될 때가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이러한 과정에서 자원하는 성도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은혜 소명.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알고, 부르신 소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물론 아내와 아들까지 그 길을 따르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을 십자가 지게한 로마 병사도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여러분을 우리 교회에 인도한 분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하고 싶지 않은데 하라고 하실 때,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알게 하옵소서. 가족 모두가 그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같은 상황과 다른 결과.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좌우편에 강도가 같은 상황이지만 다른 결과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채찍과 구타로 빈사 상태가 되어 십자가 달렸을 때, 악밖에 남지 않은 강도 둘 다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고 낙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같은 환경 안에서 어떤 신앙을 갖는가에 따라 열매는 다릅니다. 어떤 경우 억지 동참이지만, 그래도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부르신 소명을 받는 성도가 되어서, 우편 강도에게 약속한 낙원과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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