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성령의 사람의 행복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로마서 8:12-17 2025.11.09. 主日禮拜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2-17)
지난 주 로마서 8장 강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성경학자는 로마서 8장을 놓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흐르던 여러 갈래의 강물이 로마서 8장에서 하나의 생명수 강을 이루어 하나님의 어린 양 보좌 앞에 갈린 수정처럼 맑게 흐르고 있다”. 고 문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이 다 불타서 없어진다 해도 로마서 8장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어느 말씀이 더 좋고 어느 말씀이 덜 좋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단지 로마서 8장을 놓고 이처럼 극찬하는 것은 그것이 대단히 은혜스러운 말씀이라는 것을 설명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로마서 8장 말씀을 평소 즐겨 외우신다는 한 목사님의 말을 인용해 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생활하다 보면 새록새록 받는 은혜가 많습니다. 우리는 곤고한 인생의 여로를 힘겹게 걸어가는 나그네입니다. 갖가지 인생고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가 시시때때로 우리를 향해 엄습해 옵니다. 그때마다 이 로마서 8장을 마음에 담고 깊이 묵상하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을 통해 8장에 담긴 39절의 말씀이 우리가 겪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가히 전천후적인 대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 마음의 정욕이 발동할 때, 성령의 은혜가 의심날 때, 고독을 느낄 때, 기도의 응답이 오지 않을 때, 고통에 빠질 때, 소망이 흐려질 때 등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이 말씀은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고 감동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 8장 1절에서 39절까지를 12월 첫째주까지 암송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이 귀한 은혜를 더욱 넘치게 받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성령에 빚진 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본문 1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은 앞부분에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 성령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성령이 너희 생각을 바꾸어서 영의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너희가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육신에게 빚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에게 빚졌습니까? 성령에게 빚졌습니다. 빚진다는 말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육신에 살 때는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녀야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육신에게 끌려 다니는 빚쟁이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변명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말을 해도 이제는 육신에게 빚진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흔히 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악한 사회에서 죄 안 짓고 어떻게 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런 말들은 전부 육신에게 빚져서 끌려 다니는 사람의 말입니다. 언제인가 사모님하고 어느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그 모임을 주최한 분이 “2년 전보다 참 예뻐졌다”고 말하기에 “그게 그냥 예뿐 것이 아니라 다 미장원서 꾸민 거잖아!” 라고 했더니, ”그러니까 돈 있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마다 미용 샾에 다니고 전신 마사지 받으니까 늙지도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기에 돈이 최고 아니야”라고 말을했습니다. 말하고 나서 제 자신한데 실망스럽기도 하고, 나도 은연중에 돈에 매여 있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 아닌가 하고 몹시 씁쓸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
만약에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육신대로 살면 그 결과는 비참해 집니다. 13절을 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세워놓고 하시던 경고의 말씀입니다. 선악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죽음과 지옥에서 멸망 받을 영원한 죽음을 전부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믿는 사람입니다. 1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죽을 수 없는 성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하십니다. 모순 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앞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고, 뒤에서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분명히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엄한 경고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솔직히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멘, 아멘’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육신대로 사는 사람처럼 행세를 합니다. 만나면 돈 이야기 하는 것이 그의 낙입니다. 조금만 더 깊게 말을 나누면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니 믿음이니 하는 말을 할 때도 그 밑바닥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듣기에 좀 거북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사실은 교회 안에 한둘이 아닙니다. 그들이 입으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하고 목청 높여 찬송을 부른다고 해서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아니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11장 20-21절에도 비슷한 경고가 나옵니다.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전부터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원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꾸 거역하니까 아끼지 아니하고 도끼로 찍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할 때 어떤 존재입니까? 접붙임을 받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원가지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데, 접붙임을 받은 가지인 너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그대로 둘 것 같으냐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사는 증거를 날마다 행동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성령은 항상 우리를 분명한 행동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아고나아’ἀγωνάω라는 말입니다. 강제로 끌고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던 시절에 잘가던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꼭 가야 할 곳은 가기 싫어해도 데리고 가실 만큼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예배에 나온 것입니다. 성령의 끄는 힘은 굉장히 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버티어도 이길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항상 ‘아니오’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핸들을 육신에게 맡겨 놓지 않습니다. 항상 성령의 손에 맡겨 놓고 삽니다. 성령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서라 하면 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는 사람의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
본문을 보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설명하는 실례가 한 가지 나옵니다. 13절 중간 부분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자기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여야 된다는 말은 현재 동사입니다. 한번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말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이는 반복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몸에는 소위 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죄성이 있고 나약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 번 충동을 받으면 그때마다 우리 지체 안에는 바람에 출렁이는 바닷물처럼 무서운 정욕이 발동합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누구나 욕심에 끌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우리가 욕심대로 따르다 보면 몸의 행실이라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몸의 행실’은 죄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행동만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행심사 전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생각으로 죄짓는 것, 말로 죄짓는 것, 행동으로 죄짓는 것, 모략으로 죄짓는 것, 습관으로 죄짓는 것이 다 몸의 행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고개를 들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죽인다는 말은 ‘꼼짝 못하게 한다’ 혹은 ‘끊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주 일어나는 우리 몸의 행실을 끊어 버릴까요? 죽일까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흔히 이런 구체적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기도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안하면 큰일 납니다. 다니엘 기도회에 나오게 되니, 찬송도 드리고, 말씀도 듣고, 기도도 올리게 되니, 얼마나 나의 신앙에 유익됩니까? 이렇게 기도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니까 이 시간 다루지 않고 다른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공식과 같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꼭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첫 번째 단계 작업입니다. 성령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신다.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하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믿는 그 믿음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악에 끌려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성령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가 하실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만큼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안 믿으면 안 믿는 것만큼 성령은 우리를 돕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으면 믿는 것만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 때문입니다. 앞서 성령이 강력하게 이끄신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성령을 모실 때 강력하게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않고 어떤 유혹 앞에서 이겨보려고 몸부림을 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아십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고 탄식하게 됩니다(롬7:24). 분문에서 ‘너희가’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합니다. 몸의 행실은 성령이 죽이는 것이지, 우리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일할 수 있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모신 우리는 누구입니까? 14절을 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는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성삼위 가문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인지 모릅니다. 이 신분의식을 조금이라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항시 깨우쳐 줍니다. 그래도 우리가 분명하게 행동하지 못해 갈지 之자 걸음을 걸으면 그때에는 더 큰소리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말씀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16절을 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잘못된 길을 들었다 해도 성령의 증거에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만일 못 들었다고 변명하면, 그는 성령의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좋은 집안에서는 가훈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녀들을 교훈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자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가정에서는 이런 가훈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박賭博을 가까이 하지 말라. 주색酒色을 삼가라. 남에게 이기려 하지 말라’. 대단히 의미 깊은 말인 것 같습니다. 그 가문의 조상 중에서 도박을 하다가 집안을 망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있었기에 이런 가훈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가문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주색에는 빠지지 말아야지, 도박은 하지 말아야지. 남에게 이기려고 아옹다옹 하지 말아야지” 하고 조상의 교훈을 명심하면서 살기 마련일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하고는 좀 틀린 데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자녀들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가훈이 뭡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가훈 말입니다. 좀 길어 보이지만 66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어두운 세상을 걸으면서 말씀을 등불처럼 밝히고 다니라고 주셨으니 가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돼”하고 항상 우리 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정도는 살아야지”하는 자각의식自覺意識을 시시로 일으켜 줍니다. 이 음성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분명한 신분의식을 갖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주체의식을 분명히 가지면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애매하거나 적극성이 없는 태도를 성령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안돼!’하고 말해야 할 때는 ‘안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도 괜찮을까? 꼭 죄라고 할 수 없잖아?” 하는 애매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두 가지는 다 있지 않습니까? 이성에 약한 사람, 노는 데 약한 사람, 체면에, 과시에, 친구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돈에는 아주 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선배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생 내 소유의 아파트도 승용차도 통장을 가진 일이 없다”. 저는 잔고는 얼마 되지 않고 사용하지도 않지만 어찌 되었건 통장을 몇 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돈에 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 그 약함을 사용하여 접근하는 유혹을 놓고 마치 손에 가지고 놀듯이 행동하면 안 됩니다. 만약 성적 자극에 특별히 약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성령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만 항상 단호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란한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관 앞에서 서성거린다든지 쓰레기 같은 잡지들을 꽃아 놓은 진열대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뽑을까 말까 한다면 이것은 단호한 행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X등급 판정이 난 비디오를 자녀들 몰래 집에 숨겨 놓고 보거나 음란 사이트를 개설해서 보면 안 됩니다. 미끼를 보고 그 근방을 뱅글뱅글 맴도는 물고기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고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빨리 돌아서라. 위험한 곳에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도망가라. 안돼! 하고 외칠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에 있는 욥은 정말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행실을 초전에 박살내기 위해서 행동의 원칙으로 정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욥기 3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이 말은 어찌 처녀에게 주파를 던지랴 하는 뜻입니다. 아마 욥은 아름다운 여성에게 좀 약했는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좀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욥은 부자니까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가까이 하고 싶은 욕망을 자주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단호한 행동을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침을 정하고 처녀를 상대하기로 한 것입니다. 눈짓까지도 조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잠언 4장 25절에 있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안목의 정욕, 이성에 약한 유혹이 가까이 올 때 눈 하나 돌리는 것까지 분명하게 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이런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는 직접 우리를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보혜사保惠師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영어로는 ‘Comforter’ 위로자, ‘Helper’ 조력자, ‘Counselor’상담자입니다. 이렇게 보혜사 성령은 돕는 분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도록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는 분이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주께”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지 아니하면 성령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럴 경우에 성령은 혼자 탄식하신다고 합니다. 근심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대신 해주실 일이면 탄식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오면 우리 스스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정원을 깨끗하게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잡초를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전으로 깨끗이 가꾸기를 원하면 마음속에 잡초가 보일 때마다 쏙쏙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아직 잘 안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성령에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말씀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19편 9-11절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9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0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을 칼처럼 사용하십니다.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저술가요 탁월한 설교가로 인정받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두 주간 동안 캐나다에서 세미나 인도차 혼자서 여행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서구에서는 부부가 같이 가는 것이 상례인데 우리나라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남자 혼자 다니면서 일을 보지 않습니까? 두 주간이니까 주일이 한 번 끼지 않습니까? 주말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주일에 설교를 하지 않으면 얼마나 한가합니까? 무슨 스케줄이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집 생각은 자꾸 나고 하니까 가까운 곳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호텔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기저기를 서성거리고 다녔나 봅니다. 서구 사람들은 좀 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부부가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못 견딥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이런 점에서만은 얼마나 강합니까? 24시간 안 보고 밖에 있어요. 아내한테 전화 한 번 안하는 강한 기질이 있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에도 교역자모임이 있을 때라든가, 어느 겨우 기도원에서 한 주간 정도를 보낼 때도 전화 하지 않습니다. 또 전화해 보았자 “기도하러 갔으면 기도나 하지 무슨 전화를 그렇게 해 여기는 아무 걱정 말고 기도나 하세요”. 라는 말을 들을 것이 뻔하니까 아예 전화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미국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위장 이혼을 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미국 영주권을 얻도록 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일명 기러기 아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내가 미국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뒤 예전에 한 이혼이 위장이 아니라 정말 이혼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바람에 졸지에 가정을 잃어버린 홀아비 기러기가 된 사건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몇 년을 보지 않고 살아도 사랑이 안 변하는 순수한 마음을 아직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미국도 유럽도 가고 구아라비아도 가고 아프리카도 가서 혼자 몇 년을 있다가 오지요. 그런데 서구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이혼을 하고 말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습니다. 다시 그 목사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호텔 주변을 돌다가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6층 단추를 눌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을 팔로 가로 지르면서 아름답게 생긴 젊은 여자 두 사람이 타는 것이었습니다. 몇 층을 가는지 단추를 눌러야 하는데 누르지를 않았습니다. 그 대신 생글생글 거리며 목사님을 쳐다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6층, 어때요? 오늘 오후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나요? 함께 지내면 참 즐거울 같은데요?”
순간 이 목사님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때 무슨 생각을 제일 먼저 했는지 아십니까? 이 여자들 하고 한번 시간을 가져 볼까 하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지하는 우려감도 아니었습니다.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것은 자기가 외워 놓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6장 11-12절 말씀이라고 합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그 목사님은 평소에 말씀을 열심히 외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그 말씀을 생각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3층 단추를 눌렀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고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던지는 그 제안에는 아무 흥미가 업습니다”. 하고 냉정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혹 앞에서 얼마나 단호한 위력을 발휘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중요한 성구들을 외우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암송한 말씀을 가장 적합한 때에 생각나게 하십니다. 특히 로마서 8장 전체를 암송하면 한 목사님 말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전천후적인 응답이 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암송한 자는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님은 1936년 7월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인 평양산정현교회에 청빙받아 첫 설교가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다.”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38년 10년 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의성 경찰서에 7개월간 죽음과도 같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잠시 풀려난 1939년 2월 첫째 주일 임박한 당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강단에 올라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설교하신 후, 재차 투옥되었고. 영어의 몸이 된지 6년째인 1944년 감방에서 옥사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의 최후인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영원한 나라 영원한 승리 영원한 영광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 가운데도 직접 보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WEA와 관련 일선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어떤 경우에는 30:1, 50:1로 맞설 때, 힘든 점도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보았던 영원한 나라 영원한 승리 영원한 영광을 저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행복
이렇게 다섯 가지로 무장하여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힌 행복이 따라옵니다. 그 행복이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종이 주인을 무서워하듯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받는 아들이 하듯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막14:36). 오늘 설교 제목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아기가 아버지를 향해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기에는 품위나 체면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마냥 좋아서 떨어지지 않는 어린 아이한테만 통하는 말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 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터지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느니라’는 말은 뜨거운 감정을 담고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끈질기게 재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빠 아버지는 좋아서 부르는 소리요 반가워서 터지는 소리요 급해서 찾는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빠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은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요 행복해서 부르는 아름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그 마음이 늘 평안하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향해 ‘아빠’하고 부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를 상상해 보세요. 그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자랑스러워 보이는 분이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 아빠는 무엇이나 나를 위해서 다 해줄 수 있는 하나님 같은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색함도 없습니다. 큰 형이 겁이 나서 말 못하는 것을 사랑받고 있다고 자신하는 막내 아들이 대신 말해 줍니다. ‘아빠 아버지’, 얼마나 행복한 부름인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빠 아버지’하고 부르면서 즐거워하도록 만듭니다. 믿습니까?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기에 쑥스러울 만큼 성인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춘추는 지금 어떻게 되시나요? 아시는 분 있어요? 90세가 아닙니다. 100세가 아닙니다. 영원세입니다.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누가 어른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어른인 체합니다. 그들은 쑥스럽고 어색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지 못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거리낌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자신감이 있습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복이 있습니다. 고독할 때도 ‘아빠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슬플 때도 ‘아빠 아버지’하고 부르면 그 마음에 위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다니엘 기도회 6일째 간증자는 와플대학 창업자 손정희 장로님입니다. 그 자리에 있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 파산으로 모든 것을 잃고, 리어커를 끌고 붕어빵 장사를 했습니다. 그 붕어빵을 어떤 기회로 여러 크림을 만들면서 대박이 났고, 겨울을 지나 5월 이후 이제 장사가 안되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또 어떤 기회로 12가지 맛을 개발 와플을 시작 오늘 300여개의 가맹점을 보유한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런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더군요. 아빠 아버지 나락에서도 지금 정상에서도 아빠 아버지 손 장로님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는 그 고백이 아빠 아버지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만큼 행복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사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이 특권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기쁨, 자유함, 평안함, 이것이 우리에게 항상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11월 23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무엇을 감사할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본문을 봅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빚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 첫째는 12절 말씀대로 육신대로 살면 절대 안됩니다. 성령에 빚진자로 살아야 됩니다. 이어서 13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묵상하고 간직하라.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라. 그 다음에 15절에 가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성령의 사람의 생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복된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정리
성령에 빚진 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러므로’는 앞에 설명을 반복하고 있습니다(12). “너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 성령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성령이 너희 생각을 바꾸어서 영의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너희가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이제는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 우리가 예전에는 육신에 빚져 멋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에게 빚졌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는 말을 해도, “이렇게 악한 사회에서 죄 안 짓고 어떻게 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등 육신에게 빚진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은영 중에라도 “그러기에 돈이 최고 아니야”라는 물질에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제 이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3).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와 같은 말씀입니다(창2:17). 영적 죽음돠 육적 죽음영원한 죽음 전부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가’는 불신자가 아닌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신 성도를 말합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엄한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냐고 물으면, 아멘, 아멘’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육신대로 사는 사람처럼, 돈 이야기나,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을 이야기할 때도 밑바닥에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하고 찬송을 부른다고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아니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원가지로 비유하며, 그들이 거역하자 아까지 아니하고 찍어버렸습니다. 이방인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도 아까지 않으셨는데 이방인인 우리도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그대로 둘 것 같으냐고 하셨습니다(롬1:20-21).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사는 증거를 입증할 행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이라고 하였습니다(14). ‘인도함을 받는다’는 헬라어‘아고나아’ἀγωνάω로 강제로 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던 시절에 잘가던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꼭 가야 할 곳은 가기 싫어해도 데리고 가실 만큼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간섭하십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항상 ‘아니오’, 성령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핸들을 성령께 맡깁니다. 성령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서라 하면 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는 사람의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실제에 대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13). 여기서 죽여야 된다는 말은 현재 동사로 날마다 죽이는 반복행위를 뜻합니다. 인간의 몸은 온갖 죄성과 나약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누구나 욕심에 끌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겁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우리가 욕심대로 따르다 보면 몸의 행실이라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몸의 행실’은 죄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행동만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행심사 전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생각으로 죄짓는 것, 말로 죄짓는 것, 행동으로 죄짓는 것, 습관으로 죄짓는 것이 다 몸의 행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고개를 들 때마다, 죽인다는 것은 ‘꼼짝 못하게 한다’ 혹은 ‘끊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안하면 큰일 납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니까 기도하는 문제는 이 시간 다루지 않고 다른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꼭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제일 단계 작업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에 계신다.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하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죄악에 끌려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믿으면 믿는 것만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 때문입니다. ‘너희가’아니라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한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몸의 행실은 성령이 죽이는 것이지, 우리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일할 수 있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우리는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삼위 하나님 가문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이 영광스로운 신분의식을 조금이라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항시 깨우쳐 줍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성령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잘못된 길을 들었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증거에 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가훈은 성경 66권이지만, 그중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를 들 수 있습니다(시119:105). 어두운 세상을 걸으면서 말씀을 등불처럼 밝히고 다니라고 주신 가훈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각의식自覺意識을 시시로 일으켜 줍니다. 이 음성을 듣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분명한 신분의식을 갖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요3:2-3). 그럴 때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성령은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래도 괜찮을까? 꼭 죄라고 할 수 없잖아?”애매하거나 적극성이 없는 태도를 성령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두 가지는 다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 그 약함을 사용하여 접근하는 유혹을 놓고 마치 손에 가지고 놀듯이 행동하면 안 됩니다. 미끼를 보고 그 근방을 뱅글뱅글 맴도는 물고기처럼 행동할 때, “빨이돌아서라, 위험한 곳에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도망가라. 안돼! 하고 외칠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욥은 하나님의 영,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하였습니다(욥31:1). 아마 욥은 아름다운 여성에게 좀 약했는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좀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욥은 단호한 행동을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침을 정했던 것입니다. 성령은 이런 결단을 요구합니다(참고/잠4:25).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보혜사로 직접 우리를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지 아니하면 성령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럴 경우에 성령은 혼자 탄식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오면 우리 스스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자기의 정원을 깨끗하게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잡초를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잡초가 보일 때마다 쏙쏙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성령에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말씀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19편 9,11절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사람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참고/엡6:17).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을 칼처럼 사용하십니다.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유명한 저술가요 탁월한 설교가이신 목사님이 현역에 계실 때 캐나다에서 세미나 인도차 혼자서 여행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출을 하고 호텔에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단추를 눌렀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두 여인이 엘리베이터 문을 팔로 가로 지르면서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층 수 단추를 누르지 않고, 생글생글 거리며 목사님에게 “6층, 어때요? 오늘 오후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나요? 함께 지내면 참 즐거울 같은데요?” 순간 위기감을 느낀 목사님에게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것은 자기가 평소 애송하는 로마서 6장 11-12절 “11이와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사로잡힐 수 있었고, 자기도 모르게 3층 단추를 누르고 문이 열리자,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던지는 그 제안에는 아무 흥미가 업습니다”. 하고 냉정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혹 앞에서 얼마나 단호한 위력을 발휘했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암송한 말씀을 가장 적합한 때에 생각나게 하십니다.
특히 로마서 8장 전체를 암송하면 한 목사님 말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전천후적인 응답이 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암송한 자는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38년 10년 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의성 경찰서에 7개월간 죽음과도 같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잠시 풀려난 1939년 2월 첫째 주일 임박한 당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강단에 올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설교하신 후, 재차 투옥되었고. 1944년 차가운 감방에서 옥사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의 최후인 순교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성도님 가운데도 직접 보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WEA와 관련 일선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어떤 경우에는 30:1, 50: 1로 맞설 때, 힘든 점도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보았던 영원한 나라 영원한 승리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행복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힌 행복이 따라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는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막14:36). 여기에는 품위나 체면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마냥 좋아서 떨어지지 않는 어린 아이한테만 통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 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터지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느니라’는 말은 좋아서 부르는 소리요 반가워서 터지는 소리요 급해서 찾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빠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은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요 행복해서 부르는 아름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색함도 없습니다. ‘아빠 아버지’는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행복을 느끼고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어른인 체합니다. 그들은 쑥스럽고 어색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지 못합니다.
와플대학 창업자 손정희 장로님은 그 자리에 있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 파산으로 모든 것을 잃고, 리어커를 끌고 붕어빵 장사를 했습니다. 그 붕어빵을 어떤 기회로 여러 크림을 만들면서 대박이 났고, 겨울을 지나 5월 이후 이제 장사가 안되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또 어떤 기회로 와플을 시작 오늘 300여개의 가맹점을 보유한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런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더군요. 아빠 아버지 나락에서도 지금 정상에서도 아빠 아버지 손 장로님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는 그 고백이 아빠 아버지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이 특권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기쁨, 자유함, 평안함, 이것이 우리에게 항상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1월 23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무엇을 감사할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본문을 봅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빚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 첫째 13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둘째 14절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15절에 가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성령의 사람의 생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복된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최종 정리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성령 사람의 행복
•로마서 8장12-16절
성령의 생각을 통해 자기 몸도 성령에 복종하게 하신 은혜
성령의 사람은 실제적인 삶도 그에 수반되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경건생활의 실패를 당연시한다. 자칫 이것은 신앙생활을 무력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성령으로 사는 실제적인 삶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능력 있는 평신도로 훈련하는 데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은 앞부분에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 성령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성령이 너희 생각을 바꾸어서 영의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너희가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육신에게 빚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에게 빚졌습니까? 성령에게 빚졌습니다. 빚진다는 말은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육신에 살 때는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녀야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
만약에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육신대로 살면 그 결과는 비참해 집니다. 13절을 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세워놓고 하시던 경고의 말씀입니다.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죽음과 지옥에서 멸망 받을 영원한 죽음을 전부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믿는 사람입니다. 1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죽을 수 없는 성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하십니다. 모순 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분명히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엄한 경고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솔직히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멘, 아멘’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육신대로 사는 사람처럼 행세를 합니다. 만나면 돈 이야기 하는 것이 그의 낙입니다. 조금만 더 깊게 말을 나누면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니 믿음이니 하는 말을 할 때에도 그 밑바닥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듣기에 좀 거북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사실은 교회 안에 한둘이 아닙니다. 그들이 입으로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하고 목청 높여 찬송을 부른다고 해서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아니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스스로 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사는 증거를 날마다 행동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성령은 항상 우리를 분명한 행동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8장 14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아고나아’ἀγωνάω라는 말입니다. 강제로 끌고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던 시절에 잘가던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꼭 가야 할 곳은 가기 싫어해도 데리고 가실 만큼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끄는 힘은 굉장히 강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버티어도 이길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항상 ‘아니오’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핸들을 육신에게 맡겨 놓지 않습니다. 항상 성령의 손에 맡겨 놓고 삽니다. 성령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서라 하면 서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는 사람의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설명하는 실례가 한 가지 나옵니다. 13절 중간 부분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자기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여야 된다는 말은 현재 동사입니다. 한번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말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이는 반복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몸에는 소위 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죄성이 있고 나약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대로 따르다 보면 몸의 행실이라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몸의 행실’은 죄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행동만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행심사 전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생각으로 죄짓는 것, 말로 죄짓는 것, 행동으로 죄짓는 것, 습관으로 죄짓는 것이 다 몸의 행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고개를 들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죽인다는 말은 ‘꼼짝 못하게 한다’ 혹은 ‘끊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주 일어나는 우리 몸의 행실을 끊어 버릴까요? 죽일까요?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흔히 이런 구체적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기도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안하면 큰일 납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니까 기도하는 문제는 이 시간 다루지 않고 다른 네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공식과 같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꼭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제일 단계 작업입니다. 성령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에 계신다.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하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믿는 그 믿음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악에 끌려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성령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가 하실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만큼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안 믿으면 안 믿는 것만큼 성령은 우리를 돕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으면 믿는 것만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 때문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일할 수 있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모신 우리는 누구입니까? 14절을 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는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 가문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인지 모릅니다. 이 신분의식을 조금이라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항시 깨우쳐 줍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분명한 신분의식을 갖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주체의식을 분명히 가지면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애매하거나 적극성이 없는 태도를 성령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안돼!’하고 말해야 할 때는 ‘안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도 괜찮을까? 꼭 죄라고 할 수 없잖아?” 하는 애매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두 가지는 다 있지 않습니까? 이성에 약한 사람, 노는 데 약한 사람, 체면에, 친구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돈에는 아주 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 그 약함을 사용하여 접근하는 유혹을 놓고 마치 손에 가지고 놀듯이 행동하면 안 됩니다. 미끼를 보고 그 근방을 뱅글뱅글 맴도는 물고기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고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빨리 돌아서라. 위험한 곳에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도망가라. 안돼! 하고 외칠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는 직접 우리를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돕는 분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도록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는 분이지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시해주께”라고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지 아니하면 성령도 속수무책입니다. “자기의 정원을 깨끗하게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잡초를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전으로 깨끗이 가꾸기를 원하면 마음속에 잡초가 보일 때마다 쏙쏙 뽑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아직 잘 안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성령에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네번째로, 말씀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19편 9,11절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사람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9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1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을 칼처럼 사용하십니다.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혹 앞에서 얼마나 단호한 위력을 발휘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중요한 성구들을 외우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8장 전체를 암송하면 한 목사님 말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전천후적인 응답이 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암송한 자는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양蘇羊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1938년 10년 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의성 경찰서에 7개월간 죽음과도 같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잠시 풀려난 1939년 2월 첫째 주일 임박한 당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강단에 올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설교하신 후, 재차 투옥되었고. 1944년 차가운 감방에서 옥사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의 최후인 순교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성도님 가운데도 직접 보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WEA와 관련 일선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어떤 경우에는 30:1, 50: 1로 맞설 때, 힘든 점도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기철 목사님같이 영원한 나라 영원한 승리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행복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힌 행복이 따라옵니다. 그 행복이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종이 주인을 무서워하듯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받는 아들이 하듯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시던 일이었습니다(눅14:36). 우리 말로 하면 ‘아빠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제목을 ‘아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아기가 아버지를 향해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기에는 품위나 체면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마냥 좋아서 떨어지지 않는 어린 아이한테만 통하는 말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이 넘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 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터지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거리낌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자신감이 있습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복이 있습니다. 고독할 때도 ‘아바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슬플 때도 ‘아빠 아버지’하고 부르면 그 마음에 위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와플대학 창업자 손정희 장로님은 그 자리에 있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 파산으로 모든 것을 잃고, 리어커를 끌고 붕어빵 장사를 했습니다. 그 붕어빵을 어떤 기회로 여러 크림을 만들면서 대박이 났고, 겨울을 지나 5월 이후 이제 장사가 안되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또 어떤 기회로 와플을 시작 오늘 300여개의 가맹점을 보유한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런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더군요. 아빠 아버지 나락에서도 지금 정상에서도 아빠 아버지 손 장로님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는 그 고백이 아빠 아버지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만큼 행복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사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이 특권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기쁨, 자유함, 평안함, 이것이 우리에게 항상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1월 23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무엇을 감사할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성령의 사람의 생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복된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첫째,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꼭 믿어야 합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에 계신다.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 꼭 믿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둘째,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항시 깨우침을 듣게 하옵소서. 성삼위 하나님의 가문의 자손이 된 자기 주체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셋째,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성령은 보혜사 돕는 분입니다. 빨리 돌아서라 위험한 곳에 근처도 가지 마라 도망가라 외치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넷째, 말씀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성경 암송의 지혜를 주시고, 암송한 말씀이 가장 적합한 순간 생각나서, 단호한 위력을 나타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다섯째,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 같이 영원한 나라 영원한 승이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기가 막힌 행복이 따라옵니다. 이제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요. 사랑 받는 기쁨, 자유함, 평안함으로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친근하게 아빠로 부를 수 있다니 얼마나 큰 감사입니까? 날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감사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으로 이제 성령에 빚진 자입니다.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겸허히 기쁘게 끝까지 따르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더욱 성령 충만함을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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