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로마서 8:18-25 2025.11.16. 主日禮拜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11월은 “기도의 달”입니다.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단10:3). 어제부터 시작된 다니엘 기도회에 모두 참여하여 하나님의 놀라라운 은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세상에서 치루어야 할 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황홀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악한 세상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일이요 매력을 주지 못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세상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된 마귀의 자녀들이서 그런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들과 섞여서 세상을 삽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연히 그만한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돼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값을 치르지 못하면 마귀의 자녀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세상에서 꼭 치러야 할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바로 치를 때에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고난, 탄식,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입니다. 17-18절 말씀을 봅니다.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구절에서 고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주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고난의 특징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요 현재의 고난이라는 데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참고/마26:65;요10:33-3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을 때에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7).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구원의 창시자’인 예수를 십자가 대속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를 예수님은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잘 만나냐 하지만 집안의 장손 큰 형 잘못만나면 아버지 재산 다 탕진하고 동생들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영광스로운 하나님께 인도해 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지 아니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 우리도 고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주의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우리의 고난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로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맏형이 고난을 받는데 동생들이 피할 수 있습니까? 주인이 고난을 받는데 종이 안 받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20절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바울이 한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지하게 핍박했습니다. 한참 열이나 서 다멕섹으로 달려갈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아마 그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성도의 고난을 바로 자기 자신의 고난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가 담당해야 할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는 기막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다는 것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은 지난 2천 여 동안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세상 신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겉으로는 별로 표를 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정말 싫어합니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죽여라 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들은 금방 우리를 향해 욕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을 우리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샅샅이 뒤져보십시오. 특별히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해 고난을 피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오는지 찾아보십시오. 놀랍게도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말씀이 점점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난 받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언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꾸로 고난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에 내어 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딛고 일어서기를 지켜보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환난을 받아야 한다고 당연하게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참 기가 막힌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라고 하기는커녕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만큼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현재의 고난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이라고 말씀합니다(18). 어떻게 보면 이 현재라는 말이 잠간 스쳐지나가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라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때부터 시작하여 재림하시기까지, 그 가운데 끼인 소위 말세라고 부르는 시대를 전부 포괄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2천여 년이 흘렀습니다. 앞으로 얼마가 더 흐를지 아무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동안 받을 수 있는 고난이 현재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일생 동안 고난 당할 각오를 하고 살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한 고난이라고 할 만한 어려운 일을 별로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남모르게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배우자로부터 정신적인 신문을 당하는 분들, 직장에서 술자리 등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진급마저 어려움을 겪는 분들, 남들이 다 하는 땅투기 나 몰라라 하고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자녀들이 다 컸는데도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분들, 이런 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현재의 고난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꺾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 그렇다고 해서 믿는 것 따지지 말고 아무하고라도 결혼하자니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아, 부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 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고난을 사서 일부러 만들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가 오게 될 때 기꺼이 감내하고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니엘 기도회 11일째 간증자 박인경 사모님은 대학 때 한 선교 단체를 통해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선교회 헌신하다 보니, 어느덧 서른이 넘었습니다. 40여 전에는 노처녀입니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인도로 전도사님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담임목사가 된지 14일째 되는 날 아들이 학원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고통 가운데 성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다시 목회를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56살 건강하던 목사님이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천국에 가셨습니다. 교회와 집 친구들을 멀리 떠나 남은 자녀들과 이사를 했습니다. 기도 중에 “네 남편은 사명이 다해서 내가 데려갔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에게는 남아 있는 사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전 교사였던 때부터 해왔던 부모 상담을 ‘부모 면허’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담은 ‘사모 면허’를 출간하고, 평신도와 사모님들을 대상으로 훈련 프로그램 사역을 현재 하고 있습니다. 박 사모님은 하나님 안에서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도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고난 중에도 정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더니, 아들 잡아먹고 나면 잡아먹고 이 ㅇㅇ한 ㅇ라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중에도 믿은을 놓치 않고 주님을 붙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입니다. 우리만이 아는 고난입니다. 우리만이 받는 자랑스러운 고난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절대로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돼는 고난입니다. 가정에서 핍박을 당하는 공동체 가족 여러분 계십니까? 사회에서 멸시를 받는 가족 여러분 계십니까? 예수 때문에 가난해야 되는 가족 여러분 계십니까?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가족 여러분 계십니까?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이 고난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본문은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첫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중생시키신 것, 믿게 하신 것,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신 것,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 등 등. 이 모든 것이 성령께서 주신 첫 열매들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와 죽음의 감옥에 갇혀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열매라 하지 않고 첫 열매라고 한 것을 보면 둘째 셋째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열매가 있으면 중간 열매가 있고 마지막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첫 열매만 주시지 않고 뒤따라 올 다음 열매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분문 말씀에서는 ‘양자’될 것,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의 속량’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몸의 속량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먼저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가 탄식하고 있다는 말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탄식은 우리만 아는 탄식이요 우리만 할 수 있는 탄식입니다. ‘탄식한다’는 이 말은 해산하는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비통해서 터지는 그런 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산모가 애를 낳으면서 소리 지르는 비명은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산모는 새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차서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산모는 너무 아프고 괴로운데 애는 나오지를 않고 시간은 끌고 견딜 수가 없으니까, 옆에 서있는 남편의 뺨을 때린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뺨을 맞는것도 좋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을 함께 나누는 고통이요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생 얻고, 예수를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는 탄식은 바로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날을 기다리는 탄식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지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썩을 몸을 입고 힘들게 살고 있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죽을 몸이 새 몸을 입고 영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탄식은 일종의 기다림의 탄식, 사모하는 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병들면 신음하고 고통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멸시를 받을 때 탄식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땅에 묻히는 것을 보고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기다려지는 것이 저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터지는 탄식입니다. 무엇이든지 안달이 나도록 기다려지는 일이 있으면 기다리는 그 자체가 탄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잘 알지 않습니까? 간절히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든지, 못견디게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한시 바삐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 있을 때 기다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탄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탄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날을 너무 기다리고 사모하다 보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말씀을 보면 참 희한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2절을 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 피조물은 비이성적인 자연만물, 즉 하늘의 해와 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땅에 피는 아름다운 화초, 나무 그리고 바다에 있는 고기 등 모든 자연만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탄식합니까?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17).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만물까지 인간과 똑같은 저주의 자리에다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서는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도 썩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일월성신日月星辰도 나고 죽고 하는 과정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하 만상은 모두 부패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에게 썩어짐이 온 것은 인간의 점죄로 땅, 자연도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들이 탄식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탄식하는 진짜 이유가 될 것입니다. 19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피조물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고개를 쑥 빼서 오나 안오나 하고 앞을 열심히 내다보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일월성신, 삼라만상의 고개를 쑥 빼고 우리가 영광 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정말 안 믿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가을 아닙니까?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군 복무 시절 자대가 있는 인제에서 속초로 파견 가는 길에 미시령을 넘어 왔습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어대는지 그 깊고 큰 미시령 골짜기 안에 피를 뿌린듯한 낙엽이 눈발같이 휘몰아치는 장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던 지요. 여러분 이 깊어가는 가을에 낙엽에게 조용히 물어 보십시오. “너도 탄식하고 있니? 너 지금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 몸을 입고 나타나는 그날 너도 낙엽 되지 않고 사시사철 푸르고 청청할 날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니?”라고 말입니다. 틀림없이 살랑 살랑 바람을 타고 내려오면서 “그래 그래”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 내가 너희들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이렇게 낙엽이 되어서 떨어지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국에서는 과일이 한계절만 아니고 열두 실과 다 달이 맺는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나뭇잎이 낙엽이 될 때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 낙엽도 아담이 범죄 한 후 이 세상이 저주 받은 후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찮은 낙엽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만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귀가 어두운 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1절을 봅니다. 모든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다시는 썩고 죽는 운명을 겪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저 아름다운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가슴이 뛰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탄식하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영광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탄식은 범사에 감사하는 찬송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은 바로 우리가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소망을 말합니다. 17절을 보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하고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8절에도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하고 나옵니다. 21절에도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은 전부 다 23절에서 언급하는 우리 몸의 속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3). 우리 몸의 속량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1절로 잠깐 돌아가 봅니다.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을 멸하시고,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을 조성하시고, 아담의 범죄 잃었던 창조의 영광을 올려 드린 후, 천년왕국이 마쳐지고, 흰 보좌 심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새것으로 바꾸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영원히 살게 될 새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여기서 ‘몸의 속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죄와 그 비참한 결과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썩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입성할 천국, 영원한 나라, 신천신지新天新地,New Heaven and New Earth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안십니까?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게21:1-2). “1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1-2,5). 이 나라의 영광이 지금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몸의 속량,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을 입고 반드시 천국에 올라가서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영광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고 피조물도 탄식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 믿는 우리만이 아는 영광입니다.
우리만의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으로 악한 현실 대처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만이 아는 고난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만이 아는 탄식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만이 아는 영광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이 악한 현실을 대처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고난과 영광을 열심히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18절부터 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비교의 명수였습니다. 정확히 비교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를 하면서 사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비교했더니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교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고 옥에도 많이 갇혔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으며 돌에도 맞고 세 번씩이나 배가 파산하여 일주일 밤낮을 망망대해에 떠있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같은 형제에 위험과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병까지 안고 씨름하는 생을 살았습니다.(“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 그러나 자기의 고난을 다 묶어서 장래의 영광과 비교해 보았더니 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에서는 비교를 하니까 지금의 고난은 오히려 가벼운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이겨야 하는 청아비전 공동체 가족 여러분! 비교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을 견디어야 하는 청아비전 공동체 가족여러분! 비교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난과 영광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시때때로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성령께서 “상대가 안돼. 너 아무리 힘들어도 네 고난은 앞에 있는 영광에 비해서 가벼워”라고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큰 위로와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남편과 함께 선교 사역을 펼치던 30대 초반의 젊은 선교사님이 괴한의 습격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왜 그토록 젊디젊은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일찍 부르셨을까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선교사님의 장례식이 모 교단의 교단장으로 치루어 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유족과 수많은 조객들이 참여했습니다. 물론 죽음의 자리에 슬픈 눈물이 있기도 했지만 영광과 감격의 환송식이었습니다. 남편과 유족은 오히려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선교 사역의 승리를 다짐했습니다. 왜 죽음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대범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교한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것하고 장차 예수님이 약속한 영광하고 비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니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이 슬픔은 장차 예수님이 나타날 때 주실 영광하고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다니엘 기도회 간증자로 김지선 자매는 국내 시각장애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최초로 미국유학길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맨해튼 음악대학Manhattan School of Music을 졸업한 최고의 아티스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곳에서 러브콜을 뒤로하고, 자신이 졸업한 전교생이 수십 명밖에 안 되는 한빛맹학교에서 후학들을 양성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대학 졸업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주신 은사를 낮은 곳에서부터 흘려보내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있습니까? 세상의 헛된 부귀와 하늘의 영광을 매일매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돈하고 장차 나타날 영광하고 매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돈, 그것은 마음 쓸 것도 아니고 마음 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영광하고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있는 질병하고 영광하고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핍박과 영광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이렇게 소리치십시오. “상대가 안돼!”
둘째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24, 25절입니다.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기바랍니다. 포기하지 말기바랍니다. 참음으로 기다리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면 멀지 않은 그날 예수님이 오실 것이요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썩을 몸을 훌훌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더럽고 오염된 세계는 사라지고 천하 만상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우리 앞에 신부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준비한 새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이날을 참고 기다리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날마다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소망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으로부터 눈을 하늘을 향해 떠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아웅 다웅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면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가벼운 것이요 비교가 안 되는 것임을 발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정리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세상에서 꼭 치러야 할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대가를 바로 치를 때에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고난, 탄식,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세상에서 치루어야 할 대가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입니다. 17-18절에 나오는 고난의 특징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요 현재의 고난이라는 데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을 때에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7.참고/마26:65;요10:33-36).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유대인들은 고개를 흔들며 빈정거렸습니다. “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잖아. 그랬으니 죽어서 마땅하지”(마27:40,43).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를 예수님은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2:10-11). 비유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지 아니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고난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름받기 이전 성도를 무지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다멕섹 도상에 나타나셔서 하신 첫 마디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이었습니다(행9:4). 예수니은 세상에서 자기로 인해 핍박을 받는 성도의 고난을 자기 자신의 고난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가 담당해야 할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는 기막힌 말을 한 것입니다(골1:24).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은 그동안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해 고난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거꾸로 고난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에 내어 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딛고 일어서기를 지켜보시는 줄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을 피하라고 하기는커녕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벧전4:13). 이만큼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현재의 고난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18). 현재란 잠깐 스쳐지나간 기간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때부터 시작하여 재림하시기까지, 그 가운데 끼인 말세라고 부르는 시대를 전부 포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는 고난이 현재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신앙생활을 위에서 일생 동안 고난 당할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남모르게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않습니다. 배우자로부터 정신적인 신문을 당하는 분들, 직장에서 술자리 등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진급마저 어려움을 겪는 분들, 남들이 다 하는 땅투기 나 몰라라 하고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자녀들이 다 컸는데도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분들, 예수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꺾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런 자리를 사서 만들 필요는 없지만, 그런 자리가 오게 될 때 기꺼이 감내하고 이겨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모두 다 십자가로 낙인이 찍혀 있다. 털에만 찍힌 것이 아니라 살 속에까지 깊이 찍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십자가와 낙인을 우리 몸에 찍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 낙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만 아는 고난이요. 우리만이 받는 자랑스러운 고난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절대로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돼는 고난입니다. 가정에서 핍박을 당하는, 사회에서 멸시를 받는, 예수 때문에 가난해야 되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공동체 가족 여러분 계십니까?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이 고난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3). 우리를 중생시키신 것, 믿게 하신 것,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신 것,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 등 등이 모두 성령께서 주신 첫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열매라 하지 않고 첫 열매라고 한 것을 보면 둘째 셋째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첫 열매만 주시지 않고 뒤따라 올 다음 열매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먼저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가 탄식’하고 있다는 말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23). 이는 우리만의 탄식입니다. ‘탄식한다’ 해산하는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탄식은 절망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의 비명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는 탄식은 바로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날을 기다리는 탄식이요 사모함의 탄식이요 믿음 당하는 멸시 당할 때 탄식입니다(고후5:2). 그러나 이 모든 탄식은 절망이 끝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기다려지는 것이 저 나라에 대한 소망의 탄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날을 너무 기다리고 사모하다 보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말씀합니다. 22절의 ‘피조물’은 하늘의 천사와 같은 열물이나, 세상 사람들을 가키니는 것이 아니라(19-21), 비이성적인 자연만물, 즉 하늘의 해와 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땅에 피는 아름다운 화초, 나무 그리고 바다에 있는 고기 등 모든 자연만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탄식합니까?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17). 그러니 피조물도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서는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은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탄식하는 진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피조물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19). 일월성신, 삼라만상의 고개를 쑥 빼고 우리가 영광 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정말 안 믿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가을에 낙엽을 봅니다. 어쩌면 낙엽이 인간에 “내가 너희들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이렇게 낙엽이 되어서 떨어지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국에서는 과일이 한계절만 아니고 열두 실과 다 달이 맺는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나뭇잎이 낙엽이 될 때가 없지 않겠습니까? 낙엽도 아담이 범죄 한 후 이 세상이 저주 받은 후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면, 다시는 썩고 죽는 운명을 겪지 않게 됩니다(21).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저 아름다운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탄식하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영광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샛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하고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17). 18절, 21절에도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은 전부 다 ‘우리 몸의 속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3).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이 말씀이 ‘우리 몸의 속량’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을 멸하시고,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alism을 조성하시고, 아담의 범죄 잃었던 창조의 영광을 올려 드린 후, 천년왕국이 마쳐지고, 흰 보좌 심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새것으로 바꾸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영원히 살게 될 새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여기서 ‘몸의 속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썩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기 전 재림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삶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가를 이사야는 환상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합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면서 뒹굽니다. 염소와 함께 곰이 풀을 뜯어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합니다.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이사야22:6 이하). 그 거룩한 삶, 이 천년왕국에서는 해하는 일도 없고 자유를 누리며 찬송 중에 살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의 삶이 이정도인데 그 나라 이후(고전15:24) 입성한 천국, 영원한 나라, 신천신지新天新地,New Heaven and New Earth의 영광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1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1-2,5). 이 나라의 영광이 지금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올라가서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영광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고 피조물도 탄식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 믿는 우리만이 아는 영광입니다.
우리만의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으로 악한 현실 대처
첫째로, 고난과 영광을 열심히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바울은 정확한 비교할 줄 알았습니다. 비교했더니 비교가 안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고 옥에도 많이 갇혔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으며 돌에도 맞고 세 번씩이나 배가 파산하여 일주일 밤낮을 망망대해에 떠있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강, 강도, 바다, 같은 형제에 위험과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고, 몸에 병까지 안고 씨름하는 생을 살았습니다(고후11:23-28).
그러나 자기의 고난을 다 묶어서 장래의 영광과 비교해 보았더니 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우리도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이겨야 하는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가난을 견디어야 하는 여러분, 가난과 영광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시때때로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성령께서 “상대가 안돼. 너 아무리 힘들어도 네 고난은 앞에 있는 영광에 비해서 가벼워”라고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큰 위로와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남편과 함께 선교 사역을 펼치던 30대 초반의 젊은 선교사님이 괴한의 습격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장례식에 슬픈 눈물이 있기도 했지만 영광과 감격의 환송식이었습니다. 남편과 유족은 오히려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선교 사역의 승리를 다짐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내가 죽은 것하고 장차 예수님이 약속한 영광하고 비교한 것입니다. 죽음의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이 슬픔은 장차 예수님이 나타날 때 주실 영광하고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헛된 부귀와 하늘의 영광을 매일매일 비교해야 합니다. 이 부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돈하고 장차 나타날 영광하고 매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돈, 그것은 마음 쓸 것도 아니고 마음 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영광하고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있는 질병하고 영광하고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핍박과 영광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이렇게 소리치십시오. “상대가 안돼!”
둘째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기바랍니다. 포기하지 말기바랍니다. 참음으로 기다리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면 멀지 않은 그날 예수님이 오실 것이요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썩을 몸을 훌훌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더럽고 오염된 세계는 사라지고 천하 만상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우리 앞에 신부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준비한 새집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이날을 참고 기다리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날마다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소망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으로부터 눈을 하늘을 향해 떠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아웅 다웅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면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가벼운 것이요 비교가 안 되는 것임을 발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최종 정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차 누리게 될 엄청난 영광을 바라보게 하신 은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며 특권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바울은 이 대가를 일컬어 ‘현재의 고난’이라고 했다.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바로 이해시키는 일은 신앙 자세를 견고히 세워 주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세상에서 치루어야 할 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황홀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악한 세상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일이요 매력을 주지 못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 권력자들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돋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송한 이야기지만 세상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된 마귀의 자식들이서 그런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들과 섞여서 세상을 삽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연히 그만한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돼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값을 치르지 못하면 마귀의 자녀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세상에서 꼭 치러야 할 대가가 있고 그 대가를 바로 치를 때에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고난, 탄식,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고난입니다. 17, 18절 말씀을 봅니다.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두 구절에 등장하는 고난의 특징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요 현재의 고난이라는 데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퍽 초라해 보였습니다. 배경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가문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을 때에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지 아니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 우리도 고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주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우리의 고난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로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20절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사도 바울은 회심 이 후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골로새서 1장 24절에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가 담당해야 할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는 기막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다는 것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상은 그동안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세상 신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죽여라 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들은 금방 우리를 향해 욕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믿는 우리를 향해 고난을 피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오는지 찾아보십시오. 놀랍게도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말씀이 점점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난 받지 않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언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꾸로 고난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참 기가 막힌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라고 하기는커녕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만큼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현재의 고난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18)하고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이 현재라는 말이 잠깐 스쳐지나가는 기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라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때부터 시작하여 재림하시기까지 그 가운데 끼인 소위 말세라고 부르는 시대를 전부 포괄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2천여 년이 흘렀습니다. 앞으로 얼마가 더 흐를지 아무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그동안 받을 수 있는 고난이 현재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일생 동안 고난당할 각오를 하고 살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한 고난이라고 할 만한 어려운 일을 별로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남모르게 고난을 당하는 형제자매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고난을 사서 일부러 만들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가 오게 될 때 기꺼이 감내하고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3). 우리를 중생시키신 것, 믿게 하신 것,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신 것,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 등 등이 모두 성령께서 주신 첫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열매라 하지 않고 첫 열매라고 한 것을 보면 둘째 셋째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첫 열매만 주시지 않고 뒤따라 올 다음 열매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먼저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가 탄식’하고 있다는 말씀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23). 이는 우리만의 탄식입니다. ‘탄식한다’ 해산하는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탄식은 절망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의 비명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사람으로서 하는 탄식은 바로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날을 기다리는 탄식이요 사모함의 탄식이요 믿음 당하는 멸시 당할 때 탄식입니다(고후5:2). 그러나 이 모든 탄식은 절망이 끝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기다려지는 것이 저 나라에 대한 소망의 탄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날을 너무 기다리고 사모하다 보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피조물의 탄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말씀합니다. 22절의 ‘피조물’은 하늘의 천사와 같은 열물이나, 세상 사람들을 가키니는 것이 아니라(19-21), 비이성적인 자연만물, 즉 하늘의 해와 달,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땅에 피는 아름다운 화초, 나무 그리고 바다에 있는 고기 등 모든 자연만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탄식합니까?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17). 그러니 피조물도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서는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은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탄식하는 진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날을 피조물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19). 일월성신, 삼라만상의 고개를 쑥 빼고 우리가 영광 중에 나타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정말 안 믿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가을에 낙엽을 봅니다. 어쩌면 낙엽이 인간에 “내가 너희들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이렇게 낙엽이 되어서 떨어지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국에서는 과일이 한계절만 아니고 열두 실과 다 달이 맺는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나뭇잎이 낙엽이 될 때가 없지 않겠습니까? 낙엽도 아담이 범죄 한 후 이 세상이 저주 받은 후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나면, 다시는 썩고 죽는 운명을 겪지 않게 됩니다(21).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저 아름다운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탄식하고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영광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은 바로 우리가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소망을 말합니다. 17절을 보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8절에도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하고 나옵니다. 21절에도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은 전부 다 23절에서 언급하는 우리 몸의 구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속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1절로 잠깐 돌아가 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가 천국 가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새것으로 바꾸어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영원히 살게 될 새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여기서 ‘몸의 속량’(23)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영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신령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만의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으로 악한 현실 대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고난과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이 악한 현실을 대처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는 고난과 영광을 열심히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18절부터 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비교의 명수였습니다. 정확히 비교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를 하면서 사는 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비교했더니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교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보면 사도 바울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러나 자기의 고난을 다 묶어서 장래의 영광과 비교해 보았더니 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에서는 비교를 하니까 지금의 고난은 오히려 가벼운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비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성령께서 “상대가 안돼. 너 아무리 힘들어도 네 고난은 앞에 있는 영광에 비해서 가벼워”라고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큰 위로와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24, 25절입니다.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기바랍니다. 포기하지 말기바랍니다. 참음으로 기다리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면 멀지 않은 그 날 우리는 썩을 몸을 훌훌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결론
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 첫 번째,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리스도와 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자가 게 하옵소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감내하며 이겨내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 두 번째, 탄식입니다. 산모가 출산할 때 탄신입니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우리 몸이 주님의 영화로운 몸을 입기를 경성하고 소망하고 사모하며, 우리가 탄식하고 피조물이 탄식하며, 영광의 그 날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 세 번째, 영광입니다. 주님이 다시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아담 범죄로 이루지 못한 창조의 영광을 올려드리고, 천국, 영원한 나라, 신천신지에서, 주님의 영화로운 몸을 입는 ‘몸의 속량’을 얻습니다. 예수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신령한 존재로 살아갈 그 날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④ 우리만의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으로 악한 현실 대처 첫 번째,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면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수없는 고난 가운데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상대가 안돼. 너 아무리 힘들어도 네 고난은 앞에 있는 영광에 비해서 가벼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위로와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게 하옵소서.
⑤ 우리만의 고난과 탄식과 영광의 소망으로 악한 현실 대처 두 번째,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게 하옵소서. 포기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썩을 몸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 몸을 입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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