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로마서 8:26-27) 이재현목사(25.11.23)

이재현목사 2025. 12. 6. 09:4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이재현 목사

하나님말씀 : 로마서 8:26-27 2025.11.23. 秋收感謝主日禮拜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오늘 추수감사주일 예배 오신 성도 여러분 한 해의 수고에 격려를 드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감사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기원합니다.

 

연약한 인간을 돕기 위해 보내신 성령

인간의 연약함은 ‘인간 조건의 총체’ 혹은 ‘피조물다움’이라고 한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피조물로서의 연약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자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26절에 ‘우리 연약함’이라고 말씀한 인간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 그렇구나!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9절에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성경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 몸은 토기장이신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으신 질그릇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어지기 쉽습니까? 우리는 너무 지나쳐도 안 되고 너무 못 미쳐 안 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돈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고 돈이 너무 없어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도 문제가 되고 흡족하게 받지 못해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분수에 맞게 받아야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받으면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도 마음 놓고 받을 수 없는 만큼 우리의 영육은 너무나도 약합니다. 한마디로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연약성은 아담이 범한 원죄로 말미암아 유전된 타락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 받았다고 해서, 이 연약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약성은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던질 수 있는 겉옷이 아니요,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 동안 연약한 존재로, 피조물다움을 벗지 못한 채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 돕는 자, 즉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본래 육신의 사람이었던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장차 누릴 영광, 즉 몸의 속량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장 첫 절부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26절 초두에 ‘이와 같이’라는 접속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한 군데 이상하게 생각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라는 단어 밑에 ‘도’라는 조사가 붙은 ‘성령도’라는 것입니다(26). 이 말을 왜 ‘성령은’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도’라는 조사는 ‘또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성령도’는 지금까지 전혀 언급하지 않던 성령께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겨주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정학하게 살린다면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번역해야 바른 것입니다. 성경 번역은 조사 하나 하나까지도 얼마나 예민하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성령도’라고 했다고, 성령께서 갑자기 우리를 도우시려고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를 돕고 계셨고,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도우실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합니다保惠師, 헬라어 ‘파라크네톤’παρακλητον.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에는 한문으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로 해석하고 있고, 영어 성경에는 해석 본에 따라 KJV에서는 ‘Comforter’, ‘위로자’慰勞者로 번역되어 있고, NIV에서는 ‘Counselor’, ‘조언자’助言者로 번역되어 있으며, LB에서는 ‘Helper’, ‘조력자’助力者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품에 안아 주시는 위로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을 가리켜 주시는 조언자가 되시며, 곤경에 처하여 앞이 캄캄하고 도움이 절실할 때 조력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과 함께 매일 동행하고 있음으로 항상 든든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돕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잠깐 그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함께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꾼다면 맞잡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가령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려고 그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쉽게 옮기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통나무의 한쪽 끝을 맞잡아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돕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은 성령이 머무시는데 필요조건이다

 

이렇게 성령은 통나무의 한쪽 끝을 맞잡아 주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너는 저기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다 해주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통나무를 뜰 때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돕는다’는 말 의미를 보조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셨다고 해서 우리의 연약함이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해서 우리가 갑자기 영적 거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을 그대로 두시고 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도움을 따르려고 할 때 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은 성령을 머물게 하는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겸손하자에게 찾아오신 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연약은 절대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지 않다면 성령이 우리에게 머물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히려 연약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엉뚱한 반응을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연약한 것을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하는 탄식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의 연약을 탄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는 조건도 아니요,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연약이 우리로 하여금 성공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이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약함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이 성령을 머물게 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바울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이것은 자기의 연약을 꿰뚫어 보는 영의 눈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의 언약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26).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성령께서 기도를 특별히 도우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가장 먼저 힘을 잃게 되는 것이 기도하는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몸에 열이 있어도 조금 나도 기도를 못하고 드러누워 버립니다. 기분이 조금 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기도를 제대로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긴장이 풀려서 세상 재미에 맛이 들면 우리의 영혼은 캄캄해지고 기도가 막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연약함이 기도를 못하게 하는 쪽으로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서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로마서 8장 12-17절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서 배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묵상하고 간직하라’,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바’. 이 다섯 가지는 꼭 순서적일 필요는 없고 경우에 따라 어느 것이 먼저 나오고 뒤에 나와도 상관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이것 외에 정말 중요한 것이 있지만 너무나 당연히 아는 사실이기에 그냥 넘어 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한 생명 줄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탈이 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의 신앙생활은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온갖 질병이 감기의 문으로 들어오듯이 신앙생활의 적신호는 기도의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기도가 고장이 나면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특별히 돕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이 기도를 듣는다고 하는 말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기도를 도우시는 두 가지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 성령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신다.

 

첫째,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26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입니다. 기도를 무시하고 산다든지 기도를 가볍게 생각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 즉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가 기도를 잘 하지 않거나 해도 바르게 간구하지 못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실 때마다 성령은 무표정하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것은 성령이 직접 탄식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성령이 우리의 영을 움직여 탄식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말 번역을 보면 성령이 직접 탄식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탄식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탄식하지 않는 분이다. 성령께서 자기가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도록 만드신다.” 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때로는 근심하시고 때로는 시기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직접 탄식하시면서 간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 우리는 지금 어느 쪽의 해석이 옳으냐를 놓고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신비스러운 영역입니다. 우리가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한계선이 있습니다. 성령이 어떤 형식으로 탄식을 하시는지 우리가 꼭 집어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견해를 다 수긍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탄식하실 때가 있는가 하면, 그와 함께 우리의 영이 탄식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17:16)).

 

성령은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무슨 뜻입니까?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농도 짙은 탄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탄식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이 가을이잖아요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낙엽이 떨어지면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인간들아 너희들 때문에 내가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가면 나무들이 과실을 맺는데 ‘열두 실과’라고 했습니다. 다달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엽이 떨어질 새가 있겠어요? 없지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낙엽은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인간들이 죄를 범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 노아 홍수로 지구는 심각한 손상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심음이 있고 거둠이 생겼습니다. 더위가 오고 추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창8:22). 그래서 파괴된 자연에 순응하기 위해 나뭇잎이 가을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게 되었고 그 낙엽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 인간들을 향해 탄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탄식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귀에는 안 들리지만 분명히 성령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정말 들어와 계신다면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마다 그가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탄식하실까요? 아마 탄식하실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하는 꼴을 보고 가슴을 안 치시겠어요? 마음에도 없는 기도, 형식적으로 겨우 입술을 놀리는 꼴을 볼 때마다 어찌 탄식이 나오지 않겠어요? 죄는 숨겨놓은 채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꼴을 보고 어찌 탄식 안하시겠어요? 사소한 이런저런 일을 핑계 삼아 가장 중요한 기도를 희생시켜 버리고 하루해를 넘기는 우리 꼴을 보고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짊어지고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령님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는 더없이 비참해지고 말 것입니다. 성령님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공중을 날다가 힘없이 떨어지는 화살처럼 하나님의 존전까지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록 형편없는 기도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감사를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해서 나오는 탄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성령은 자신이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게 도우십니다. 우리는 탄식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탄식으로 부르짖지 아니하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제 기도의 약 60%는 탄식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끔은 찬송하며 드리는 기도도 있고, 가끔은 너무 좋아서 즐거워하면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덩실 덩실 춤까지 추고 싶을 정도로 기도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예는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연약함을 쏟아 놓을 때는 탄식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탄식이 아닙니다. 자연인의 탄식도 아닙니다. 성령이 탄식하는 영을 주실 때만 할 수 있는 탄식입니다. 탄식은 이성과 거리가 멉니다. 탄식은 입술에서 나오는 무엇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만이 진지한 탄식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아내가 기도할 때 엄지와 검지를 이마 중앙에 대고 기도하기에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기도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되고 세로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잔뜩 찡그린 표정이 대부분입니다. 기도하고 나면 미간 사이에 ‘내 천’川자 글씨가 새겨지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사람이 웃을 때는 17개의 안면 근육이 움직이고 찡그릴 때는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주름살이 좀 많고 약간 울상인 표정을 짓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탄식이 빠지면 하나님이 들으실 만한 기도가 안 될 때가 참 많습니다. 탄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많이 하다보니 자연히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우리가 잘 아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속한 교단으로 성령의 은사를 중시하는 오순절주의를 지향합니다. 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은 성경의 유일을 중시하는 개혁주의를 지향합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교단이 통합 협의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두 교단은 신학과 예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분열을 넘어 연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며 대대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교파를 넘어선 연합이 이제 어디까지 갈까를 생각하며, 깊이 탄식했습니다. 한국에서 세계종교대회 그랜드슬램Grand Slam인 WCC 로잔 WEA 총회가 개최된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두 교단의 통합이 이와 무관치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은 지난 11월 4일 성모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코레뎀트릭스,co-redemptrix로 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님과 동등한 구원자로 섬겼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 년간 이어진 가톨릭 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결정으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로 인정한 것도 교황이고, 현재 제268대 교황인 레오 14세Leo XIV, Robert Francis Prevost의 승인으로 철회했다는 것입니다. 교황의 지위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황이 성경 위에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로마 가톨릭의 성모의 지위를 지우려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과 그 안의 다른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요.

 

WEA는 오래전부터 삼위일체만 인정하면 WCC는 물론 가톨릭과 하나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로마 가톨릭도 성모를 버리고 성부 성자 성령만 인정한다고 하니, WEA와 하나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금번 WEA 제14차 서울총회를 주도한 분들이 기하성과 예장 백석의 실질적 지도자입니다. 그로 볼 때 두 교단의 교파 연합을 넘어서, 앞으로는 종교 통합이 가속화되는 것은 아닌지 큰 우려를 갖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난 주 탄식했습니다. 성령의 탄식이었습니다. 정말 탄식하며 우리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기도회 18일째 강사 안소영 전도사님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대학 때 신천지에 미혹되어 기성교회 성도들을 포교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부모님은 딸을 구해내는 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와 신천지 대책 위원회의 교육으로 드디어 신천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안소영 전도사님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너무 강하게 들어 자살 기도를 몇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그동안 가족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아무 일도 못 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우상의 앞잡이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니, 부모님이 5개월 동안이나 양쪽 팔을 붙들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부모님을 보는 분들이 어머니가 연상이냐고 물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는데 너무나 상해 있었습니다. 안 전도사님이 “엄마 얼굴이 왜 그렇게 상해 있어” 물으니, 엄마가 지금서야 당시의 심정을 말한다면서, “너가 죽을까봐 화장실도 못 가고, 자지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씻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안 전도사님은 기도실에 가서 주님 앞에 회개 기도를 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신천지 활동으로 대학에서 제적을 당했는데, 자신이 신천지에 몸담고 있을 때 저주했던 신학대학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금은 전도사님으로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안소영 전도사님 어머니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세요. “너가 죽을까봐 화장실도 못 가고, 자지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씻지도 못했다”. 이것은 어머니의 탄식만이 아니요 성령의 탄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진실 되게 하시는 성령의 탄식을 들으면서 함께 탄식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창하게 말을 늘어놓으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탄식에다 마음의 진실을 담아 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탄식할 수 없는 우리를 탄식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신다.

 

둘째,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시는 분입니다. 27절을 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기도를 곧잘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주십니다. 따라서 27절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다 좋습니다. 성령께서 경우에 따라 필요한 대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는 세배대 아내와 그의 두 아들처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실 때에 요한과 야고보 형제, 또 그들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분명히 높은 왕좌에 오르실 텐데 그때 두 아들이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살로메는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와서 절하며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1). 아마 이 시절에도 여자들의 치마 바람이 있었나 봅니다. 이때 예수님이 참 의미 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20:22).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이 모자母子는 자기들의 뜻대로 무조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소위 손해 보는 기도를 자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처음에 만나를 먹을 때는 좋아했지만 세월이 흘러 싫증나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던지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거절을 못하시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시편 106편 15절을 보면 참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실컷 먹은 육신은 피둥피둥 살이 쪘는지 모르지만 그 대신 영혼은 형편없이 여위어 갔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너무 영양실조가 되어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또 순종할 기력마자 잃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구한 결과로 고기는 먹을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형편없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내 뜻대로 기도하기 쉬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특히 아주 어려운 재난을 만난다든지, 어떤 숨가 뿐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봉착하면 하나님의 뜻을 몰라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하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영적 지평선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위급할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철학자 중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극단적인 말을 한 사람마저 있습니다.

 

수년간 병으로 고통 받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병으로 고생할 때 가끔은 난감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병든 사람의 기도는 뻔하지 않습니까? 주여, 꼭 고쳐주옵소서. 고쳐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고쳐주시면 내 몸을 더 아름답게 헌신하겠나이다.” 이렇게 똑같은 기도를 하다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너무 뜻대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은 내 기도하고 다를지 모르는데….” 이런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기도가 잘 안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잘 모르니까 마음만 답답해 집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목사님께서 병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찾을 때마다 손바닥 보듯이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뜻을 잘 모를 때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나의 약함으로 인해 성령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정확하고 힘 있는 기도는 오리무중을 헤매는 어린아이처럼 기도하면서 힘들어 하는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은혜스러운 간구가 나오게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성령이신지요.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이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봅니다. 성령은 친히 우리를 위해 탄식하는 기도를 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은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므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주자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 공동체 가족 여러분, 우리 자신의 기도는 항상 약합니다. 우리는 평생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한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연약을 짊어지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심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오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함께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입을 열면 함께 입을 여시고, 우리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어서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심을 감사합시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여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도우시는 한, 우리는 기도에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요, 은혜요, 축복입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활화산처럼 타올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힘차게 올라감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감사가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이어야 하겠습니다.

 

 

정리

 

연약한 인간을 돕기 위해 보내신 성령

 

본문에 ‘우리 연약함’은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26). 하님의 마음이 우리 가슴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 몸은 토기장이신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으신 질그릇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사45:9). 인간은 깨지지 쉬운 질그릇입니다. 너무 지나쳐도 안 되고 너무 못 미쳐 안 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분수에 맞게 받아야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받으면 잘못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영육 모두가 약한 존재입니다. 그 원인은 아담이 범한 원죄로 말미암아 유전된 타락의 결과입니다. 중생 받았다고 금새 연약성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육신의 사람이었던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장차 누릴 영광, 즉 몸의 속량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 그런데 성령에 ‘은’이 아닌 ‘도’라는 조사가 붙은 ‘성령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6). ‘도’‘또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성령도’는 성령께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정학하게 살린다면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번역해야 바른 것입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를 돕고 계셨고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Comforter’, ‘위로자’, ‘Counselor’, ‘조언자’, ‘Helper’, ‘조력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품에 안아 주시는 위로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을 가리켜 주시는 조언자가 되시며, 곤경에 처하여 앞이 캄캄하고 도움이 절실할 때 조력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과 함께 매일 동행하고 있음으로 항상 든든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돕는다’의 뜻은 함께 담당한다입니다. 더 쉽게 맞잡아 준다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무거운 통나무를 쉽게 옮기도록 한쪽 끝을 맞잡아 주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인간의 연약은 성령이 머무시는데 필요조건이다

 

이렇게 성령은 무거운 통나무를 함께 옮겨주시는 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너는 저기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다 해주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돕는다’를 보조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에서 요점은 성령님은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성령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은 성령을 머물게 하는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겸손하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연약한 것을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의 연약을 탄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이 연약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이 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12:9). 이 말씀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의 언약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해지면 가장 먼저 기도의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힘쓰지 못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와서 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만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서 배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롬8:12-17).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유혹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묵상하고 간직하라’,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바’. 그러면서 그때 이것 외에 정말 중요한 것이 있지만 너무나 당연히 아는 사실이기에 그냥 넘어 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한 생명 줄과 같은 것입니다. 온갖 질병이 감기의 문으로 들어오듯이 신앙생활의 적신호는 기도의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기도가 고장이 나면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기도를 듣는다고 하는 말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기도를 도우시는 두 가지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 성령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신다.

 

첫째,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 즉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신다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탄식할 수 없으시다. 또는 탄식하신다 견해가 팽배합니다(참고/약4:5). 인간의 영적인 한계로 영적 영역인 성령의 탄식을 맞다 아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견해를 다 수긍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탄식하실 때가 있는가 하면, 그와 함께 우리의 영이 탄식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17:16)).

 

성령은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신비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 그러나 우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령은 듣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만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정말 들어와 계신다면 기뻐하시기 보다 탄식하실 것입니다. 사소한 이런저런 일을 핑계 삼아 가장 중요한 기도를 희생시켜 버리고 하루해를 넘기는 우리 꼴을 보고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짊어지고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록 형편없는 기도자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성령이 우리를 탄식하게 해서 나오는 탄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성령은 자신이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탄식하게 도우십니다. 우리 모두는 탄식으로 부르짖지 아니하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 같은 경우도 기도의 약 60%는 탄식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연약함을 쏟아 놓을 때는 탄식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본능아니라, 성령이 탄식하는 영을 주실 때만 할 수 있는 탄식입니다. 성령만이 진지한 탄식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분들 미간 사이에 ‘내 천’川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봅니다. 탄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많이 하다보니 자연히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우리가 잘 아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속한 교단으로 성령의 은사를 중시하는 오순절주의를 지향합니다. 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은 개혁주의를 지향합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교단이 통합 협의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교파를 넘어선 연합이 앞으로 어디까지 갈까 깊이 탄식했습니다. 한국에서 세계종교대회 그랜드슬램Grand Slam인 WCC 로잔 WEA 총회가 개최된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두 교파의 통합은 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은 성모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코레뎀트릭스,co-redemptrix로 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님과 동등한 구원자로 섬겼습니다. 이제 성모의 위치를 지우겠다는 것입니다. WCC와 WEA는 오래전부터 삼위일체만 인정하면 하나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로마 가톨릭도 성모를 버리고 성부 성자 성령만 인정한다고 하니, WCC, WEA와 하나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기하성과 예장 백석와 같은 교파 연합을 넘어서, 앞으로 종교 통합이 가속화되는 것은 아닌지 큰 우려를 갖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난 주 탄식했습니다. 성령의 탄식입니다. 정말 탄식하며 우리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기도회 18일째 강사 안소영 전도사님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대학 때 신천지에 미혹되어 기성교회 성도들을 포교하는데 앞장 서다가, 정체가 발각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와 신천지 대책 위원회의 교육으로 드디어 신천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자신이 우상의 앞잡이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니, 부모님이 5개월 동안이나 양쪽 팔을 붙들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 얼굴이 너무나 상해 있어서, “엄마 얼굴이 왜 그렇게 상해 있어” 물으니, 엄마가 지금서야 당시의 심정을 말한다면서, “너가 죽을까봐 화장실도 못 가고, 자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안소영 전도사님 어머니의 탄식만이 아니요 성령의 탄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진실 되게 하시는 성령의 탄식을 들으면서 함께 탄식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탄식할 수 없는 우리를 탄식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신다

 

둘째,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시는 분입니다. 27절을 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기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27절은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다 좋습니다. 성령께서 경우에 따라 필요한 대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배대의 아내 살로메는 예수님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아뢰었고, 그녀의 두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도 그와 같이 간청했습니다(마20:21;막10:37). 라고 아뢰었습니다(마20:21). 이때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욕심대로 구한다고 하셨고,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0:22-23).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는데 이 모자母子는 자기들의 뜻대로 무조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음에도, 감사하지 않고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하나님이 거절을 못하시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시106:15).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구한 결과로 고기는 먹을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형편없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특히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내 뜻대로 기도하기 쉬운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하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년간 병으로 고통 받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다른 중환자들이 그렇듯 주여, 꼭 고쳐주옵소서. 고쳐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고쳐주시면 내 몸을 더 아름답게 헌신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던 중 너무 뜻대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은 내 기도하고 다를지 모르는데….”라는 불안한 마음이 생기면 기도가 잘 안되었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찾을 때마다 손바닥 보듯이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뜻을 잘 모를 때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나의 약함으로 인해 성령은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은혜스러운 간구가 나오게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기도는 항상 약합니다. 우리는 평생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한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연약을 짊어지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심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오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함께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입을 열면 함께 입을 여시고, 우리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어서시는 성령이 우리 곁에 계심을 감사합시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여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도우시는 한, 우리는 기도에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요, 은혜요, 축복입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활화산처럼 타올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힘차게 올라감을 믿고 감사를 드립시다.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이어야 하겠습니다.

 

 

최종 정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로마서 8장 26-27절

 

어떤 고난 속에서도 불안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확실한 보증을 주신 은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최후의 영광을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 은혜가 무엇인가를 바로 가르치면 신앙생활에 자신감과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

 

첫째는 성령의 실제적인 도우심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의 확고성이다. 이 두 가지 보증에 대해 확신을 가진 자는 절대 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을 돕기 위해 보내신 성령

 

이사야 45장 9절에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 몸은 토기장이신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으신 질그릇이라고 비유하셨습니다. 질그릇은 얼마나 깨어지기 쉽습니까? 우리는 너무 지나쳐도 안 되고 너무 못 미쳐 안 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친히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 돕는 자, 즉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합니다. ‘Comforter’, ‘위로자’, ‘Counselor’, ‘조언자’, ‘Helper’, ‘조력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품에 안아 주시는 위로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을 가리켜 주시는 조언자가 되시며, 곤경에 처하여 앞이 캄캄하고 도움이 절실할 때 조력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과 함께 매일 동행하고 있음으로 항상 든든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돕는다’는 뜻은 ‘함께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꾼다면 ‘맞잡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습니다. 가령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려고 그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에게 맞은편에서, 통나무의 한쪽 끝을 맞잡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연약은 성령이 머무시는데 필요조건이다.

 

그렇다고 성령은 “너는 저기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다 해주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노력을 할 때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돕는다’는 말 의미를 보조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즉 연약한자에게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은 성령을 머물게 하는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겸손하자에게 찾아오신 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연약은 절대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지 않다면 성령이 우리에게 머물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히려 연약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것은 자기의 연약을 꿰뚫어 보는 영의 눈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의 언약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까? 성령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신다.

 

첫째,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26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입니다. 기도를 무시하고 산다든지 기도를 가볍게 생각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가 기도를 잘 하지 않거나 해도 바르게 간구하지 못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실 때마다 성령은 무표정하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것은 성령이 직접 탄식한다는 말입니까?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농도 짙은 탄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탄식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정말 들어와 계신다면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마다 그가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탄식하실까요? 아마 탄식하실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하는 꼴을 보고 가슴을 안 치시겠어요? 마음에도 없는 기도, 형식적으로 겨우 입술을 놀리는 꼴을 볼 때마다 어찌 탄식이 나오지 않겠어요? 죄는 숨겨놓은 채 청산유수로 기도하는 꼴을 보고 어찌 탄식 안하시겠어요? 그러나 이러한 연약함을 짊어지시는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비록 형편없는 기도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신다.

 

둘째,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시는 분입니다. 27절을 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기도를 곧잘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27절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령이 직접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도우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다 좋습니다. 성령께서 경우에 따라 필요한 대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함으로 인해 성령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정확하고 힘 있는 기도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인간이 기도하면서 힘들어 하는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은혜스러운 간구가 나오게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성령이신지요.

 

 

결론

 

성령은 돕는 분입니다. 성령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보조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은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를 도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에 형편없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가게 됩니다. 성령의 탄식을 듣는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성령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입술을 주장하셔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성령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면 함께 들어오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함께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입을 열면 함께 입을 여시고, 우리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면 함께 일어서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성령을 강력하게 모시게 하옵소서.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여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도우시는 한, 우리 기도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위로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활화산처럼 타올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힘차게 올라감을 믿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오늘 추수감사주일 감사로 올려 드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