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택함 받은 자의 비전"(로마서 11:11-24) 이재현목사(25.12.21)

이재현목사 2026. 1. 31. 14:30

택함 받은 자의 비전

하나님말씀 : 로마서 11:11∼24 2025.12.21 主日아침禮拜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11:11-24)

 

이스라엘 안에도 남은 자’(구원 받을 자)가 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무슨 주제로 말씀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11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그는 11절 이하에서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앞부분에서 주장한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보존하고 계시는 남은 자가 이스라엘에게도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버림당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더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진 덕분에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완악해진 덕분에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는 실족해서 완전히 넘어져 버렸느냐 하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실족넘어짐은 의미가 다릅니다. 실족은 발을 헛디뎌서 비틀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비틀거리다가 바로 설 수도 있는 것이 실족입니다. 그러면 여기서실족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해서 아직 예수 믿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때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에넘어짐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넘어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버림받아 멸망당하는 것, 즉 소망이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넘어질 정도로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완악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멸망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예수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유익을 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믿기를 거부한 덕분에 이방 사람 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믿지 않는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했다면, 이스라엘이 지금 안 믿는다고 해서, 어찌 이스라엘이 모두 망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안 믿어서 이방인이 예수 믿는데 덕을 보았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은 사도행전을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전부 28장으로 되어 있지만 10장부터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 enthusiasm을 올리기 시작했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았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했고 또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질투해서 방해를 많이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6)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2년 동안 연금軟禁 상태로 수감 당해 있을 때, 그는 비교적 자유롭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은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28:28) 이제부터 마음을 돌려 이방인에게 가서 전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아니한 덕분에 이방 사람 된 우리가 호기를 만났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오류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견해를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대주의 학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알게 모르게 이 세대주의 신학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 1세대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 목사님들도 세대주의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대주의가 이단은 아닙니다. 세대주의가 말하는 가운데 참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극단적 세대주의’Hyper Dispensationalism라고 합니다. 이들의 비 성경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놓고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에 이스라엘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거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던 예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으로 이 복음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세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계에 교회가 세워져서 이들의 주장이 틀린 것 같지 않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처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말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실 수 있습니까? 또 하나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우려고 했던 것이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 이 말씀만 보아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따로 보는 그들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가 곧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베드로와 같이 신앙을 고백한 저와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교회인 저와 여러분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많아지만 그것이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했습니다(19:20). 예수님은 승리자입니다. 승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일임하셨습니다(참고/28:18;1:16). 그리고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2:14-16).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절대 실패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단계이지만, 결국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이방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 땅에 세우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가 실패로 돌아가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부터 가지고 계셨던 구원계획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3)는 말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믿지 않아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믿었더라면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눈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은 우둔하셨고, 이방인 알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 않고 저와 여러분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먼저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매우 독보적인 존재요, 존경을 받아야 할 위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은 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된 셈입니다.

 

두 가지 비유를 통한 이스라엘의 독보적獨步的인 위치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비유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떡 비유.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떡으로 비유를 합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擧祭,Heave Offering로 드릴지니라”(15:2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일 먼저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거제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감사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 익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음식 만들 때마다 그 곡식을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떡이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에 그 다음에 만들어 먹는 모든 떡이 자동적으로 거룩해 진 것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은 마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드려진 떡과 같습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해졌으니 그들을 통해 예수 믿은 우리 모두가 거룩해 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를 거룩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의 위치가 얼마나 독보적입니까?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비유. 또 다른 비유가 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7).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참 감람나무는 이스라엘, 돌 감람나무는 우리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가지를 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다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을 접붙였습니다. 돌 감람나무 입장에서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까 굉장히 잘된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웬만한 상식을 갖고 있는 원예법대로 한다면 말도 안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거꾸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접붙이려면 돌 감람나무 가지에 참 감람나무 가지를 붙여야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돌 감람나무 가지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이론이 원예법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를 가지고 돌 감람나무 같은 형편없는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 같은 대단한 유대인 덕분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믿지 않고 고집하다가 꺾여 버리니까 그 자리에 이방인인 우리가 가서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에게 대단히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게 된 우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예수를 배척한다고 해서 멸시하거나 스스로 교만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19-21)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완강하게 배척하지 아니했다면 이방인인 우리가 이렇게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들이 잘못되어서 우리가 잘된 셈이니 어찌 그들을 욕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비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수의 실수를 잘못했다고 공박할 수 있을까?

 

제가 군대 있을 때입니다. 인제에있는 115 공병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에 배속되어 전투 공병으로 1년 중 봄부터 가을까지는 D.M.G.비무장지대 안에 도로 건설 및 건축 공사에 투입되고 겨울에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본부 분대장과 저를 후임자로 지목했던 보급 병이 저를 잘 보았던지 중대장 전령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이제 힘든 공사도 훈련도 다 면제가 되었고, 대신 사무실에 앉아서 행정을 배우고, 중대장 구두 닦고, 식사 시간에 밥 타다 드리고, 군복 다리고, 사무실 청소하는 궂은일이 제 몫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대가 많이 남았던 보급 병이 그만 사고를 쳤습니다. 다음날 당장 대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반성문을 쓰고 완전군장에 연방 장을 일주일 동안 돌고, 보직까지 해임되는 중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졸지에 제 사수였던 보급 병은 소대로 가게 되었고, 아직 이등병으로 부사수이던 제가 하루아침에 보급 병이라는 보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하던 중대장 전령은 새로운 하급병이 맞게 되었고, 저는 이제 궃은 일은 하지 않는 대신에 중대 살림을 보관해 둔 창고를 관리하고 군복, 군화, 내의, 담배 등에서 부터 비누, 치약, 면도기 같은 온갖 생활용품 들을 대대 보급계에게 수령 중대원들에게 잘 분배를 해주면 되었습니다. 1년에 몇 차례씩은 보급대대에 가서 물건도 받고, 폐품을 반납하는데 가는 길에 부대에서 식사용으로 가져온 쌀을 돈 대신 음식점에 주고는 당시 사병들은 잘 먹을 수 없던 육개장으로 외식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다른 중대원은 다 공사 현장에 투입이 되도 저는 부대에 상황병으로 혼자 남아서 현장에 있던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필요한 물품을 전화로 지시하면 깔끔하게 준비해 놓으면 되었습니다. 군대 생활의 2/3를 남의 간섭 받지 않고 혼자 한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수가 잘못한 것 때문에 제가 어떻게 되었어요? 덕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사병복무기간이 18개월까지 단축되었지만 제때는 30개월 이었습니다. 저는 사수가 잘못한 까닭에 다른 사병들은 군 생활중 고참이 되는 1/3 내지 잘해야 절반 편할 것을, 2/3나 편하게 되었잖아요! 그러면 제가 사수가 잘못한 것을 가지고 들추고 다니면서 욕을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사수가 잘못해서 자기가 잘되었는데 왜 욕을 합니까? 그가 보급 병을 계속 잘했더라면 저는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한 8개월은 더 행정반 청소하고 중대장 밥 타다 드리고 군화 닦고, 훈련 시에는 그 무거운 무전기 메고 눈 속의 산야를 누비고, 매섭게 불어 닥치는 소양강의 차디찬 바람에 얼굴과 손이 트면서 걸어야 했습니다. 내가 보급 병에 스스로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못 오릅니다. 그러니 사수를 욕할 리가 없지요.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지금까지 배척하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사람들이 잘못함으로 우리가 얼마나 득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뿌리를 잊지 않는 자가 되라

 

이를 통해 우리가 적용할 때, 우리는 각자의 영적 뿌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의 영적 자본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신앙에 있어서 홀로 선 사람은 없습니다. 홀로 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서 믿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신앙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만큼 영적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가르치느라고 땀을 흘리면 애썼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글로 된 이 아름다운 성경책을 펴볼 때마다, 존 로스John Ross, 중국명 나요한羅約翰, 1842-1915 선교사를 기억하는 분이 우리 중에 몇 분이나 계십니까? 서상윤씨를 기억하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1875년부터 그 두 사람은 만주에서 성경말씀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7년의 각고 끝에 그들은 누가복음을 번역해서 내놓았습니다. 서상윤씨는 예수를 제대로 안 믿는 사람이었지만 성경번역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번역을 할 뿐만 아니라 나무에다 활자를 새기는 일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만든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나누어주는 권서勸書인 역할까지 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번역한 다음에 서상윤씨는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자청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펼 때마다 이 책을 이해 수고한 위대한 선조들과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선교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초의 선교사로 이 땅에 복음을 전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 사업을 펼쳤고,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을 설립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 등 교육사역까지 그 분의 발자취는 엄청난 것입니다. 또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운영하다가, 재정에 큰 어려움을 겪게되어 1899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업가 중의 한 명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1838-1913로부터 거액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은 4대에 걸쳐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이 땅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벌써 몇 번째 간증을 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친척 중 한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정시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편에게 못 배웠다고 무시당하며 살면서도, 예수 한 분을 위해 처녀때부터 지금 90세까지 새벽기도를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대로 증거 되었을까 하고 저는 의심합니다.

 

우리 중에는 부모가 너무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예수 믿게 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남편이 잘못된 길로 빠지자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예수 앞으로 나온 부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 우리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놓고 얼마만큼 감사합니까? 얼마만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까? 진실한 신앙의 사람은 자기가 빚진 영적인 뿌리를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자기가 가지이면서 뿌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잘난 체하면 그 사람은 잘리 울 가능성이 많다고 사도 바울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1)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신앙의 뿌리를 잊어버리고 교만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내가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에 다닐 수 있는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두 번째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버거운 헌신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자기는 그토록 많은 섬김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오늘 이 자리까지 서게 되었는데 자기를 섬겨준 그 사람의 부족함이나 약점 그리고 같이 지내면서 느낄 수 있는 사소한 의견 대립 등을 내세워 자신을 섬겨준 분들을 공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섬길 때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 어리고 연약하다’ ‘그냥 뒤에서 돕겠다.’‘아직 남편이 믿지 않아서’ 라고 말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만 큰딸인 복음이가 어려서 심부름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콜록 콜록” 하면서 “나 감기 걸렸단 말이야!”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이 녀석이 꾀가 멀쩡해 가지고”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이 앞에 이런 소리를 들을지 몰라요 어리고 약한 것이 아니라 안하려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하셨든, 어떤 다른 사람을 사용하셨든 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인자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엄위 하나님이 엄하게 다루시는 것을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엄하게 다루셨지만, 그 대신 접붙임을 받은 가지인 우리 이방인들은 인자로 다루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셨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그 덕분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뭘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은 없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 눈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수고해준 많은 분들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질투

 

두 번째로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보면 결국은 이스라엘도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질투가 많은 콧대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이방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기하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이방인들을 보고 질투해서 회개하고 돌아왔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질투가 대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게는 그들의 질투가 잘못된 방향으로 많이 흘러갔습니다. 자기가 못 먹는 밥, 남도 못 먹게 하자는 식으로 믿는 자를 핍박하고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질투도 있었지만, 반면에 이방 사람들이 예수 믿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풍성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나서 돌아온 유대인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초대교회 안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을 이방 사람들이 가로채듯 먼저 믿는 것을 보고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아니마민אני מאמין ‘I believe’ 나는 믿는다 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디 오신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안하니까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얼마나 처량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이제 그들이 안달이 나서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시점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메시아는 오시지 않고 역사의 종말은 다가오는 것 같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각이 그들 중에 갑자기 팽배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2천년 전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이방 사람들을 따라서 ‘우리도 예수 믿자’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안 믿는 자들이 질투할 정도로 부러움을 갖게 하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잠깐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믿는 우리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형편에 좀더 실감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연 질투의 대상이 될 만한 무엇이 있다고 봅니까? 안 믿는 주변의 사람들이 ‘너 믿는 예수 나도 좀 믿어보자’ 하고 찾아올 만큼 우리들이 그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보다 좋아 보이는 것, 행복해 보이는 것, 무언가 앞서가는 것들이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한 믿음 한 섬김 한 비전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고, 자녀들도 예수 믿는 가정의 자녀들은 더 아름답게 자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성공할 사람은 성공하고, 지도자가 될 사람은 지도자로서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날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발밑에 밟히고 남의 꼬리가 되어서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질투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나를 통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질투가 생겨서라도 예수 믿게 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형제가 예수 믿었다고 하면 예수 믿는 그 가정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정이 얼마나 잘되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형제들이 질투를 하게도 되고 멸시를 하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형제가 제일 못살고 고생을 많이 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퍽 답답하지만 이런 형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가지고 다루신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죽으면 죽이리다.’의 안이숙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0대 초반의 처녀의 몸으로 평양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오랫동안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심문한 사람이나 그를 한번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 신앙인으로서 돋보이는 고매한 인격에 전부 넋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뭘 보고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소문이 세간에 퍼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는 2차대전 때입니다. 평양도청의 연료담당 주임이라고 하면 보통 세도가 당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임의 부인인 허가시라는 여인이 안이숙 여사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평양 형무소에 간수로 취직을 하여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수라는 것이 그다지 환영받는 직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젊은 부인이 갓난애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는 간수 자격으로 이틀에 한 번씩 평양 형무소에 들어와서 하루 종일 안이숙 여사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매료시켰을까요? 안이숙 사모님에게는 분명히 돋보이는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안 믿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무엇이 있습니까? 질투가 생길 정도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돋보이는 매력이 있습니까? 이것을 놓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주변에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나는 얼마만큼 매력을 주는 사람입니까? 나에게 매력이 없다면 매력을 갖게 해주십시오. 내 가정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내 자녀들의 장래를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런 기도를 꼭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 영광스러운 날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방인이 구원받는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유대인이 구원받는 종말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돌아오는 날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 우리 눈 앞에 이방인과 유대인, 전 세계가 복을 받는 영광스러운 장면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고 거역하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 지금 이방인이 구원받는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유대인이 구원받는 종말시대에 이스라엘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는 세상이 얼마나 놀라운 복을 더 받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참고/11:25). 그 다음에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 ‘그들을 버리는 것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결과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날에는 세상이 얼마나 기막힌 복을 누리게 되겠습니까? 마치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것 같은 큰 기쁨을 온 세상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직도 믿지 않는 자기 동족을 향해서 아름다운 꿈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완악해서 돌아오지 않지만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날, 온 세계가 새로 부활하는 것 같은 찬란한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비전을 그는 한시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꿈을 가지고 항시 자기 동족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절망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나의 가족과 동족을 향해서 어떤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울의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 가족과 민족이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보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 가족과 민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우리가 21세기에 세계를 위해서 아름답게 사용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심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바울처럼 긍정적으로 우리 민족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동족으로 세계가 큰 복을 누리게 될 날이 오리라는 꿈을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리

 

하나님이 은혜로 보존하고 계시는 이스라엘 안에도 남은 자’(11:1)(구원 받을 자)가 있다는 진리를 더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진 덕분에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완악해진 덕분에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11). 완전히 넘어질 정도로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완악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멸망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예수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유익을 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믿기를 거부한 덕분에 이방 사람 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참고/13:46,28:28).

 

유대인이 믿지 않아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믿었더라면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눈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유대인은 우둔하셨고, 이방인 알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 않고 저와 여러분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먼저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된 셈입니다.

 

두 가지 비유를 통한 이스라엘의 독보적獨步的인 위치.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비유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떡의 비유.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참고/15:2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일 먼저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음식 만들 때마다 그 곡식을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떡이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은 마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든 떡과 같습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해졌으니 그들을 통해 예수 믿은 우리 모두가 거룩해 진 것입니다.

 

감람나무의 비유.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7). 참 감람나무는 이스라엘, 돌 감람나무는 우리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가지를 쳐버렸습니다. 그리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을 접붙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를 가지고 돌 감람나무 같은 형편없는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 같은 대단한 유대인 덕분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믿지 않고 고집하다가 꺾여 버리니까 그 자리에 이방인인 우리가 가서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게 된 우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예수를 배척한다고 해서 멸시하거나 스스로 교만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완강하게 배척하지 아니했다면 이방인인 우리가 이렇게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들이 잘못되어서 우리가 잘된 셈이니 어찌 그들을 욕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비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함으로 우리가 얼마나 득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 뿌리를 잊지 않는 자가 되라. 우리는 각자의 영적 뿌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의 영적 자본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신앙에 있어서 홀로 선 사람은 없습니다. 홀로 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서 믿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신앙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만큼 영적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가르치느라고 땀을 흘리면 애썼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선교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초의 선교사로 이 땅에 복음을 전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 사업을 펼쳤고,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을 설립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 등 교육사역까지 그 분의 발자취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 후손들은 4대에 걸쳐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이 땅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친척 중 한 분은 왜정시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편에게 못 배웠다고 무시당하며 살면서도, 예수 한 분을 위해 처녀 때부터 지금 90세까지 새벽기도를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대로 증거 되었을까 하고 저는 의심합니다. 우리 중에는 부모가 너무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예수 믿게 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남편이 잘못된 길로 빠지자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예수 앞으로 나온 부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 우리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앙의 사람은 자기가 빚진 영적인 뿌리를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1) 만약에 자기가 가지이면서 뿌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잘난 체하면 그 사람은 잘리 울 가능성이 많다고 사도 바울은 경고합니다. 내가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에 다닐 수 있는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두 번째는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버거운 헌신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자기를 섬겨준 그 사람의 부족함이나 약점 등을 내세워 자신을 섬겨준 분들을 공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섬길 때가 되었는데 ‘나는 아직 어리고 연약하다’, ‘그냥 뒤에서 돕겠다.’, ‘아직 남편이 믿지 않아서’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인자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엄위 하나님이 엄하게 다루시는 것을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엄하게 다루셨지만, 그 대신 접붙임을 받은 가지인 우리 이방인들은 인자로 다루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셨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그 덕분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뭘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은 없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 눈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수고해준 많은 분들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질투

 

두 번째로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보면 결국은 이스라엘도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 이방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기하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이방인들을 보고 질투해서 회개하고 돌아왔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질투가 대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잘못된 질투도 있었지만, 반면에 이방 사람들이 예수 믿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풍성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나서 돌아온 유대인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천 여년 전 이미 예수님 메시가아 오셨음에도, 이를 모르는 유대인들이 아직도 기다리는 메시아는 오시지 않고 역사의 종말은 다가오는 것 같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각이 그들 중에 갑자기 팽배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이방 사람들을 따라서 ‘우리도 예수 믿자’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믿는 우리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있게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연 질투의 대상이 될 만한 무엇이 있습니까? 불신자들에게 ‘너 믿는 예수 나도 좀 믿어보자’ 하고 찾아올 만큼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보다 좋아 보이는 것, 행복해 보이는 것, 무언가 앞서가는 것들이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한 믿음 한 섬김 한 비전으로 교회를 섬겨야하고, 자녀도 더 아름답게 자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도 성공할 사람은 성공하고, 지도자가 될 사람은 지도자로서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날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발밑에 밟히고, 남의 꼬리가 되어서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면, 그 사람들이 질투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나를 통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질투가 생겨서라도 예수 믿게 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도 그들이 질투할 정도의 잘 됨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놓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주변에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나는 얼마만큼 매력을 주는 사람입니까? 나에게 매력이 없다면 매력을 갖게 해주십시오. 내 가정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내 자녀들의 장래를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런 기도를 꼭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얻는 영광스러운 날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방인이 구원받는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유대인이 구원받는 종말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돌아오는 날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 우리 눈 앞에 이방인과 유대인, 전 세계가 복을 받는 영광스러운 장면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12)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고 거역하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2) 마지막 날 이스라엘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는 세상이 얼마나 놀라운 복을 더 받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참고/11:2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15).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결과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날에는 마치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것 같은 큰 기쁨을 온 세상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직도 믿지 않는 자기 동족을 향해서 아름다운 꿈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절망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나의 가족과 동족을 향해서 그와 같은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 가족과 민족이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보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 가족과 민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우리가 21세기에 세계를 위해서 아름답게 사용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심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바울처럼 긍정적으로 우리 민족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동족으로 세계가 큰 복을 누리게 될 날이 오리라는 꿈을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현재 계획은 유대인이 예수 믿지 않고 이방인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스라엘에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구원 받은 첫 번째는 은혜는 하나님이요. 두 번째는 전도와 헌신과 사랑으로 섬겨준 분입니다. 영적 뿌리를 잊지 않는 진실한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도 섬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영적 뿌리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현재 계획은 이방인 예수 믿고 잘돼서 유대인이 시기로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불신자에게 질투가 날 정도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매력을 갖게 하옵소서. 내 가족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도록 물질도 더하여 주옵소서. 내 자녀들의 장래를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복을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현재 계획인 이방이 구원받은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유대인이 구원받는 종말시대에 이스라엘이 믿고 돌아오는 날,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고, 전 세계가 복을 받는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이 꿈을 가진 바울이 절망하거나 부정적이지 않았듯이 패악한 현세 가운데도 우리 가족과 동조을 통해 온 인류가 큰 복을 누리게 꿈을 갖고 전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