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말씀 : 로마서 8:31∼39 2025.12.07 主日아침禮拜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025년도 마지막 달 한 주간 잘 보내셨어요. 올해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소망한 기도, 다짐한 결단, 약속한 헌신 가운데 응답과 행한 것도 있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줄 압니다. 남은 24일 동안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정진해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구원救援의 송가頌歌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 로마에 가게 될 것을 알았고, 그 후 고린도에 3개월 정도 체류하였을 때,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AD57-58.참고/행19:21,20:2-3). 그가 성령의 이끌림으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롬1:15). 사도 바울은 장차 만나게 될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1장에서 8장 30절까지 216절에 자상하면서도 깊이 있게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이 정도면 복음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설명한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이것은 복음의 ‘피날레’finale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서에서 복음의 대단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영화롭게 되는 축복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 8장 31-39절 이하의 내용은 복음의 비밀을 다 밝히고 난 사도 바울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그의 기쁨의 고백이요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무슨 말로 시작하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 이 말은 극도로 기쁜 심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좋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일을 당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런 심정이 되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구원救援의 송가頌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마지막 악장을 장식하는 ‘대합창’大合唱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여섯 가지의 질문 형식을 빌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뇨?(32)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33)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3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고 외치는 것은 바울 혼자의 독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의 합창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슴도 바울처럼 뜨거워져야 합니다.
본문의 성격은 구원의 찬가이지만 그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구원을 흔들거나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구원 받는다’. 고 하는 철썩 같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서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고부동한가를 증명하기 위해 역설적인 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적을 세 가지로 가정해 놓고 그 적들이 벌 떼와 같이 한꺼번에 덤빈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절대 안전하다는 사실을 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는 세 가지 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31절 중간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를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는 한 그 사랑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건져 놓으신 우리를 포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구원의 확신을 흔들기 위해 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수법을 씁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우리를 위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끝가지 나를 사랑해 주실까? 아직도 하나님의 눈에 꼭 들게 살지 못하는 데 정말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셔서 버리지 아니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끔 합니다. 예수를 갓 믿었거나, 믿은 지 오래 되었거나 가릴 것 없이 이러한 증세는 적고 많고의 차이가 다를 뿐 다 있습니다. 목사도 가끔 이런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나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수가…?" 하고 불안해하는 버릇은 결코 남의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 잘못하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인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마귀가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2절을 볼까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영원불변성永遠不變性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사실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던 것을 포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값진 선물을 값없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그의 사랑이 어찌 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조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와 관계 없이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독자를 아끼지 않고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로마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 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독자를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한 마리 어린양을 사방이 메마르고 먼지 바람만 이는 광야 가운데 내던져 놓은 것과 같습니다. 한 낮의 강렬한 태양이 기울고 어두움이 엄습해 오기 시작합니다. 밤과 함께 찾아온 사막의 찬 기운은 가뜩이나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하던 어린양을 더욱 떨게 만들었습니다. 폭풍의 전야같이 얼마동안의 적막이 흘렀을까! 피 냄새를 맡은 야수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수십 개의 파란 눈빛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거리를 좁혀 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외마디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던 어린 양에게 한 마리의 야수가 달려들더니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 버립니다. 네 발은 다른 야수들에 의해 나뭇가지 떼어내듯 떨어져 나가 버리고, 몸통은 갈기갈기 휴지 조각처럼 찢기고, 내장이 쏟아지고, 뼈까지 으스러트리며,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두움의 권세에 내놓고, 채찍에 맞게 하고, 수모를 당케 하고, 저주의 죽음을 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놓으시고 죽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또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죄 덩어리로 만들어서 처형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같은 사랑을 일컬어 ‘영원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31:3)).
하나님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사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다시 한번 32절을 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구절의 요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놓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나머지 우리를 위해서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척동자라 해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은 사람은 덜 귀한 것은 쉽게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가장 귀한 것인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나머지 것들은 자연히 따라 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는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원수였을 때 자기 독자를 주신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 지금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어찌 우리를 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큰 사랑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만큼 강한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원한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Unchangeable LoveAgape & Unchangeable Salvation’, 그 사랑이 불변이면 우리의 구원도 불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바울처럼 절대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죄로 인한 자책과 두려움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두 번째 적이 있다면 범죄로 인한 죄책과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3절을 봅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보고 죄가 있느니, 없느니 하고 따지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공격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본의 아니게 한두 가지 죄를 짓게 되면 용서 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남의 눈에 뜨이게, 뜨이지 않게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가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죄책감이 따라 다닐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원의 확신이 자주 흔들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이러한 약함을 지렛대로 삼아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았다고 그래? 그런 위선이 어디 있어?’라고 침을 튀기며 우릴 정죄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가책과 불안으로 떨게 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이 될 것입니다. 설혹 무서운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습관적으로 어떤 죄를 자주 범하는 사람이 ‘그래도 나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어’라고 한다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틀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켕기는 데가 있어도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인간의 논리로 따지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오해를 받을 만큼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 아직 복음의 진미를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 목사님이 남자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습니다. 여덟 형제들이 함께 성경 공부를 받았는데 대개가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믿음이 잘 닦여지지 않은 분들이었습니다. 한 날은 성경공부를 하면서 구원의 확신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공부가 거의 끝날 즈음, 목사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으시지요? 그러면 구원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모두가 다 확신한다고 대답을 하는데 유독 한 형제만이 약간 감정이 격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대답 못하겠어요. 우리 모두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하기 전에 세상에 나가 바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떠드는 것을 보면 저는 비위가 상해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저는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손쉽게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형제는 성경공부에 계속 불참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그 형제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언동言動이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자기 입으로 떠들지 않아고 그 사람 정말 구원받았구나 하고 남이 치며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살면서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라고 떠든다면 어떻게 바로 봐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형제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보면 그 형제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참고/롬3:27-31). 만약에 우리가 믿음 때문에 구원 받는다면 “하나님 내 믿음 여기 있나이다”. 하고 자랑거리로 들고 나가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매개체입니다.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믿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 만드시고 제시하신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내가 죄 없다고 인정하고 구원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데 나는 죄인이라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겸손이 아니라 교만인 것입지다. 만일 우리 자신을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이면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갈 때가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오늘은 스스로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지 하다가 하룻밤을 채 넘기기도 전에 자신에게 실망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구원이니 확신이니 하고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볼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구를 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시니’. 예수님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나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활이 비록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말고 시종일관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보신다면 누구를 정죄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까?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나 같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와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면 예수 자신도 죄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찌 조금인들 가능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의 영원한 사랑, 그의 중보기도가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 영광스러운 중보의 자리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 영광스러운 심판석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 자신을 바로 신뢰하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
세 번째로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무서운 시험이 덮치면 평안할 때 가졌던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35절을 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얼마나 무서운 여건입니까?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들이 여기에 다 나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환난’은 원래 로마시대에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트리불룸’이라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도리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 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 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난은 마치 신자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곤고’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용신할 수 없도록 좁은 감방에 갇혀서 움쭉달싹 못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터질 것 같은, 미칠 것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곤고라고 합니다.
‘박해’은 노골적인 핍박입니다. ‘기근’은 굶주림이요, ‘적신’은 헐벗음입니다. 로마 당시만 해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많은 성도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황무지로 쫓겨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굶주림과 헐벗음을 견디지 못해 죽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무서운 시련을 당하게 되면 우리의 확신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본문 로마서 8장 36절에 말씀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끝가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외칩니다.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는 우리의 힘으로 이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좋아서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본문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언제 바울처럼 예수 믿는다고 해서 뺨을 한번 맞아 보았습니까? 제가 언제 바울처럼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간 일이 있습니까? 제가 언제 바울처럼 예수님 때문에 굶어 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 바울처럼 헐벗고 주리고 다닌 일이 있습니까? 저는 거꾸로 예수님 때문에 호강만 했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갖가지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이기게 하는지 실제로 체험해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다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 깨닫고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바울이 확신 있게 증거 하는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진리가 꼭 체험이라는 여과기를 통과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같이 아멘! 하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종말시대 7년환난에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시대에도 예수의 사랑이 지닌 힘, 사랑의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은 천하무적입니다. 바울은 이 능력을 환난과 곤고와 굶주림을 당하면서 확실히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박해가 무서워도 예수의 사랑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증된 이 사랑의 능력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가냘픈 실오라기처럼 약할지 모르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세상에 있는 모든 강한 것들이 다 덤벼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이기도 또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수없이 증거된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 안이숙 사모님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들도 계시고 혹 모르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던 분입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본의 왕을 신으로 앉힌 신사에 절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믿음의 절개를 기키기 위해 처녀 몸으로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당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분입니다. 그는 자기 책 서문에서 참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자격 부족으로 실격된 순교자다. 진실로 나는 내 주님 예수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잃었을 때 섭섭해서 몹시 울었다”. 6년간의 지긋지긋한 감옥 생활에서 풀려 나오는 처지에서 다른 사람 같으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할 텐데 거꾸로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하지 못한 것이 원통해서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요? 여기에 그의 설명이 나옵니다. “양순한 양떼 같은 성도들이 도살하는 자들 앞에서 그 모진 매와 고문에도 ‘아이구’ 소리 한마디 안하고 견디는 그 진절 머리나는 참상을 볼 때 나는 왜 그랬는지 몰라도 급한 말로 ‘주여 천사를 속히 보내셔서 속히 속히 이 모든 사실을 사진 찍으세요. 속히 속히 주여 속히…’ 하면서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나는 예수님이 그 어떠하신 사랑으로 순교자들을 사랑하셨으며 만삭도 못된 나를 역시 그 어떠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셨던가를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와도 왜 그런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꺽일 수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을 안이숙 사모님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7절을 우리 함께 큰 소리로 읽어 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또 정죄하지 않을까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난과 박해를 당할 때 믿음이 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사랑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자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노래합니다. 38절 이하를 보세요. ‘내가 확신하노니’. 그는 확신에 넘치는 어조로 외칩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렐루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계획, 이 모든 사실들을 의심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구원은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을 받고 사는 행복을 노래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정리
구원救援의 송가頌歌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가운데서 로마에 가기 원했던 원했던 이유는 ‘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전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롬1:15.참고/행19:21,20:2-3). 로마서 1장 1절뿌 8장 30절까지 216절에 걸쳐 복음을 자세히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이것은 복음의 ‘피날레’finale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영화롭게 되는 날 복음의 대단원은 막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 시작한 본문은 사도 바울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기록한 기쁨의 고백이요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구원救援의 송가頌歌’이요. 복음의 마지막 악장으로 ‘대합창’大合唱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여섯 가지의 질문 형식을 빌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뇨?(32)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33)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3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로마서 8장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암송하면서 단 한번이라도 “아, 정말 좋다!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어. 너무 감사해요. 하나님!” 이런 감격이 가슴 속에서 뭉클 일어난다면 복음을 바로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본문은 로마서에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집중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만 복음에 감격에 빠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합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도 바울처럼 뜨거워지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의 성격은 구원의 찬가이지만 그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아무도 이 구원을 흔들거나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구원 받는다’. 고 하는 철썩 같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구원의 확신’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고부동한가를 증명하기 위해 역설적인 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세 가지 적의 공격에도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다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는 세 가지 적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우리를 위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수를 갓 믿었거나, 믿은 지 오래 되었거나 가릴 것 없이 ‘의부증’擬父症 증세는 적고 많고의 차이가 다를 뿐 다 있습니다. 이럴 때 잘못하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를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하나님 사랑의 영원불변성永遠不變性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사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던 것을 포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그의 사랑이 어찌 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와 관계 없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마치 한 마리 어린양이 깊은 밤 광야에 홀로 버려져 야수에게 찢기고 먹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의 권세에 내놓고, 채찍에 맞게 하고, 수모를 당케 하고, 저주의 죽음을 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참고/사53:10;고후5:21;갈3:13).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같은 사랑은 ‘영원한 사랑’인 것입니다(렘31:3).
그렇다면 하나님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나머지 우리를 위해서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32). 예수를 모를 때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독자를 주신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 지금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무궁한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Unchangeable LoveAgape & Unchangeable Salvation’, 그 사랑이 불변이면 우리의 구원도 불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바울처럼 절대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범죄로 인한 자책과 두려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보고 죄가 있느니 없느니 공격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경찰서만 보고도 불안한 것은 발이 저린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으로 얻은 용서와 의롭다함에 대해 확신이 약하면 언제든지 크고 작은 죄책감이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특히 죄를 짓게 될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책감이 따라 다닐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원의 확신이 자주 흔들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약함을 지렛대로 삼아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았다고 그래? 그런 위선이 어디 있어?’라고 정죄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오해를 받을 만큼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 아직 복음의 진미를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언행이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자기 입으로 떠들지 않다고 그 사람 정말 구원받았구나 하고 남이 치며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살면서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라고 떠든다면 어떻게 바로 봐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역설逆說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참고/롬3:27-31). 만약에 우리가 믿음 때문에 구원 받는다면 “하나님 내 믿음 여기 있나이다”. 하고 자랑거리로 들고 나가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매개체입니다.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 만드시고 제시하신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보라고 말씀합니다(34). 그러므로 우리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시종일관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 자신을, 예수님 자신을 바로 신뢰하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이 모두 나옵니다(35). ‘환난’은 곡식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자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곤고’는 좁은 감옥에 갇혀 터질 것 같은, 미칠 것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박해’은 노골적인 핍박입니다. ‘기근’은 굶주림이요, ‘적신’은 헐벗음입니다. 로마 당시만 해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많은 성도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황무지로 쫓겨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굶주림과 헐벗음을 견디지 못해 죽어갔습니다.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끝가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37). 우리 시대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렇지만 비록 다 깨닫고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바울이 확신 있게 증거 하는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진리가 꼭 체험이라는 여과기를 통과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시대가 마쳐지고 종말시대 7년환난에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시대에도 예수의 사랑이 지닌 힘, 사랑의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은 천하무적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 예수님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이기도 또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수없이 증거된 사실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사모님은 일제 치하에서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고자 처녀 몸으로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당하다가 해방과 함께 풀여났습니다. 그런데 책 서문에 “나는 자격 부족으로 실격된 순교자다. 진실로 나는 내 주님 예수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잃었을 때 섭섭해서 몹시 울었다”. 광복과 출옥에 “할렐루야!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하지 못한 것이 원통해서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양순한 양떼 같은 성도들이 도살하는 자들 앞에서 그 모진 매와 고문에도 ‘아이구’ 소리 한마디 안하고 견디는 그 진절 머리나는 참상을 볼 때 나는 왜 그랬는지 몰라도 급한 말로 ‘주여 천사를 속히 보내셔서 속히 속히 이 모든 사실을 사진 찍으세요. 속히 속히 주여 속히…’ 하면서 발을 구르며 부르짖었다. 나는 예수님이 그 어떠하신 사랑으로 순교자들을 사랑하셨으며 만삭도 못된 나를 역시 그 어떠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셨던가를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와도 애 그런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종말의 시대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신앙입니다.
사랑하는성도 여러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의 사랑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내가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38).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은총, 구원계획을 의심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구원은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본문 말씀 속에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찾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최종 정리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장 31-39절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신이 절대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
우리에게 있는 구원의 확신이 얼마나 흔들림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 확신이 주는 감격과 능력의 잠재력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알게 하는 데 이 과의 목적이 있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가졌던 확신과 감격을 회복할 수 있다면 이과를 공부하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구원救援의 송가頌歌
로마서 8장 31-39절 이하의 내용은 복음의 비밀을 다 밝히고 난 사도 바울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펜 가는 대로 털어놓은 그의 기쁨의 고백이요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로마서 8장 31-39절은 ‘구원救援의 송가頌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마지막 악장을 장식하는 ‘대합창’大合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성격은 구원의 찬가이지만 그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구원을 흔들거나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구원 받는다’. 고 하는 철썩 같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서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고부동한가를 증명하기 위해 역설적인 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적을 세 가지로 가정해 놓고 그 적들이 벌 떼와 같이 한꺼번에 덤빈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절대 안전하다는 사실을 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는 세 가지 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31절 중간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를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는 한 그 사랑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건져 놓으신 우리를 포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구원의 확신을 흔들기 위해 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수법을 씁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우리를 위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끝가지 나를 사랑해 주실까? 아직도 하나님의 눈에 꼭 들게 살지 못하는 데 정말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셔서 버리지 아니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논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2절을 볼까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영원불변성永遠不變性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사실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던 것을 포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값진 선물을 값없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그의 사랑이 어찌 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조입니다. 머리를 식히고 조금만 냉정히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의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로마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 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독자를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어두움의 권세에 내놓고, 채찍에 맞게 하고, 수모를 당케 하고, 저주의 죽음을 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놓으시고 죽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또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죄 덩어리로 만들어서 처형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같은 사랑을 일컬어 ‘영원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그리고 하나님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큰 것을 주면 그보다 못한 것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은 사람은 덜 귀한 것은 쉽게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가장 큰 것, 가장 귀한 것인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나머지 것들은 자연히 따라 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무궁한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Unchangeable Love(Agape) & Unchangeable Salvation’, 그 사랑이 불변이면 우리의 구원도 불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바울처럼 절대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죄로 인한 자책과 두려움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두 번째 적이 있다면 범죄로 인한 죄책과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3절을 봅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보고 죄가 있느니, 없느니 하고 따지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공격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세상 살면서 누가 걸어 법에 고소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세상 말로 발이 저린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용서와 의롭다함에 대해 확신이 약하면 언제든지 크고 작은 죄책감이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특히 본의 아니게 한두 가지 죄를 짓게 되면 용서 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게 됩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매개체입니다.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 만드시고 제시하신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죄책감함을 지렛대로 삼아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았다고 그래? 그런 위선이 어디 있어?’라고 침을 튀기며 우릴 정죄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가책과 불안으로 떨게 됩니다. 이런 처지에서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이 될 것입니다. 설혹 무서운 죄는 아닐지라도 모르지만 습관적으로 어떤 죄를 자주 범하는 사람이 ‘그래도 나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어’라고 한다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틀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켕기는 데가 있어도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인간의 논리로 따지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오해를 받을 만큼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 아직 복음의 진미를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 때문에 구원 받는다면 “하나님 내 믿음 여기 있나이다”. 하고 자랑거리로 들고 나가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믿음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매개체입니다.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믿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 만드시고 제시하신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으면 내가 죄 없다고 인정하고 구원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구를 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시니’. 예수님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나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활이 비록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말고 시종일관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
세 번째로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적이 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무서운 시험이 덮치면 평안할 때 가졌던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35, 36절을 봅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얼마나 무서운 여건입니까?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것들이 여기에 다 나옵니다.
‘환난’은 마치 신자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곤고’는 용신할 수 없도록 좁은 감방에 갇혀서 움쭉달싹 못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박해’은 노골적인 핍박입니다. ‘기근’은 굶주림이요, ‘적신’은 헐벗음입니다. 로마시대 때 기독교인들이 당했던 고통 마지막 때 성도들이 당할 고통,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끝가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외칩니다.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는 우리의 힘으로 이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좋아서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초대교인들과 같이 본문의 사도 바울 같은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다 깨닫고 느낄 수 없다 할지라도 바울이 확신 있게 증거 하는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진리가 꼭 체험이라는 여과기를 통과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는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같이 아멘! 하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지닌 힘, 사랑의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은 천하무적입니다. 바울은 이 능력을 환난과 곤고와 굶주림을 당하면서 확실히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무서워도 예수의 사랑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증된 이 사랑의 능력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가냘픈 실오라기처럼 약할지 모르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세상에 있는 모든 강한 것들이 다 덤벼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이기도 또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수없이 증거된 사실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오늘 본문을 두고두고 묵상하면서 외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확신이 생기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31절부터 39절까지 기껏해야 아홉 구절입니다, 만약 이 아홉 구절을 외우는 사람에게 아파트 당첨권을 준다고 하면 기를 쓰고 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길 수 없는 저 영광스러운 천국 맨션을 주신다는데 외우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을 받고 사는 행복을 노래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결론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는 세 가지 적,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불변이면 구원도 불변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는 세 가지 적, 두 번째, 범죄로 인한 자책감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고, 예수가 믿음의 근거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럼에도 구원하시는 말씀을 확신하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는 세 가지 적, 세 번째,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칼 위험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예수님으로 넉넉히 이깁니다. 이 사랑으로 참된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가득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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