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나를 택하신 불가사이한 은혜"(로마서 11:1-10) 이재현목사(25.12.14)

이재현목사 2026. 1. 31. 14:28

나를 택하신 불가사이한 은혜

하나님말씀 : 로마서 11:1∼10 2025.12.14 主日아침禮拜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11:1-10)

 

탁월한 유대인 교육의 수혜자受惠者 사도 바울의 동족 구원 확신

 

오늘날 유대인을 보아도 그렇고, 본문 당시의 이스라엘을 보아도 그렇고,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격하고 십자가에 못밖고 ㅇ여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사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 문제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낙관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 자신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심정을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가 바로 이것입니다(1).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선민으로 택하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갖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확신했습니까? 그는 자기가 확신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동족을 행해 절망하지 않는 확신 - ①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

먼저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절 중간을 봅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이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순수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치고, 과거에 나만큼 예수를 배척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예수 믿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색출해서 잔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 같은 놈을 선택해서 믿게 하지 않았는가?” 유대교의 골수분자요, 핍박자 였던 자기를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을 보면, 아직 믿지 않고 거역하고 있는 오늘날 이스라엘도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족을 행해 절망하지 않는 확신 - ② 엘리야시대의 남은 자 7000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근거로 그가 또 하나 제시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버림당한 것처럼 보이는 암흑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아합왕 시대가 가장 대표적인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의 아내 이사벨은 이방 시돈 왕 엘바알Ethbaal의 딸이었습니다. 정략적 결혼으로 이스라엘의 왕비가 된 이 여인은 지독한 우상숭배자로 바알과 아세라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도록 하는 타락의 길을 걷도록 하였습니다. 당시에 엘리야 선지자가 활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남아 있나 하고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온통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뿐인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2-3.참고/왕상19:10). 그때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르기는 해도 하나님께서 껄껄 웃으시면 대답하신 것 같아요.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4,참고/왕상19:18) 엘리야의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몽땅 우상숭배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한 경건한 사람 칠천을 하나님이 남겨 놓으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절망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엘리야의 예를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5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2,5)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7천 명이 아직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 하나님께서는 남겨 놓으신 그들은 무슨 선을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값없이 주는 구원의 선물이 더 이상 은혜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에 포커스를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에 포커스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택함 받은 백성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는 현대 이스라엘을 볼 때,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희망의 상징 남은 자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멀리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남은 자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시에 남은 자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서도 입증이 되었습니다만, 어느 민족이든 국가적으로 전부가 구원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교회가 전부 다 구원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일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남은 자의 진리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낙관할 수 없습니다. 어는 교회이든 그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남은 자뿐입니다. 불행하게도 남은 자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이 섞여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택함을 입은 데서 제함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택함 받은 것이 아닌가요?” 라고 물을지 모르지만, 대답은 분명히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원이 개인적이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바울한테서 꼭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가족과 민족의 구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믿지 않는 내 가족이나 동족을 놓고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상숭배에 젖어 있고 완악할 대로 완악해도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가족과 동족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다 할지라도, 그중에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남은 자가 있다는 꿈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내 가족을 비롯하여 남북한의 8천만 명 가운데 남은 자 7천 명이 있다는 확신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숫자적 의미의 7천명이 아닙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숭배하던 아합왕 때 이스라엘의 인구라고 해봐야 1천만 명이나 되었을 까요? 그런데 그 당시에도 아합의 핍박에 숨어 있기는 했지만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남은 자가 7천명이었으니까? 우리나라에는 앞으로 믿도록 남은 자가 내 가정과 이 민족에 얼마나 많다는 말입니까? 할렐루야! 이런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기바랍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80년이 넘는 동안 남북이 둘로 나뉘어져 극한 대립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남은 자를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나의 가정과 북한 동포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북한 정권이 교회와 성도들의 씨를 말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북한 동포들만큼 속임을 당하며 핍박을 받는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주체사상에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을 남겨 놓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7천명은 북한에 정말 7천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시대에 우상에 무릎 끓지 않는 자 7천명을 남겨 놓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종교를 아편이라고 매도해 버리는 극악무도한 정권 아래에서도 믿음을 위해 남겨 놓으신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7천 명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지금 북한에 그 7천 명의 몇 배 몇 십 배 몇 백배에 달하는 7백만의 남은 자가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실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멘! 아합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듯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북한 정권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남은 자 7천명이 할렐루야! 찬송하며 우리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에 포함되지 못한 자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안 믿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 문제를 사도 바울은 7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은혜를 받지 못했고 그 결과 우둔해 졌다고 합니다. 우둔 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 즉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귀가 안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7-8/29:4;29:10). 감각이 전혀 없는 살갗처럼 신령한 일에 반응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자들

 

우리는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구원받고 싶었는데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11:7). 얻고 싶어서 구하는데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은혜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둔하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둔해진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은 우둔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인간 본능의 부패한 성품으로만, 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우둔함 배후에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혼미한 심령을 주셨고’, ‘보지 못할 눈을 주셨고’,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참고/6:9). 복음에 대해 인간은 본성적인 우둔이 있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가사의한 말씀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풍성한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는 자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받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버리고 눈도 막아 버립니다. 그렇게 마음을 우둔하게 만들면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지 모릅니다. 그들의밥상올무와 덫이 됩니다(9.참고/69:22). 밥상이란,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육적인 관심사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입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바라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서 즐기다가. 죽음의 길로 빠지게 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환경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의 덫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돈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돈을 벌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그의 밥상이 복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번영 복음, 기복 신앙, 형통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해서 장수하면, 그것이 예수 잘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가르침이 다 틀린 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10). 이것이 우둔한 자입니다.

 

잘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구약에 좋은 것만 말했던 길 예언자와 달리 쓴소리를 했던 흉 예언자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실을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쓴소리가 달갑지 않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다시 회복의 은혜를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참고/왕상22:18). 그러므로 쓴소리를 듣고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잘사는 것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 즉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의 하나가 잘사는 것,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벌고 잘 먹는 형통이 올무가 되어 교회를 다녀도 평생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는 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렇듯 교회를 다니는 자에게도 올무가 될 수 있는 밥상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진수성찬이 올무가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초라한 밥상을 가지고 살았다면, 복이 되었을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막대한 돈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다면, 그 돈이 밥상올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둔한 자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로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적 암흑기가 찾아 올 것인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하였습니다(24:38-39).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 부을 것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갈 생각에 빠져 영적인 일, 복음, 진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인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논리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된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듣지 못하게 하셔서 우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책임은 우둔해서 믿지 아니한 그 사람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셔서 그랬다고 하는 변명이 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고의로 어떤 사람들을 버리시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 유식하다는 사람일수록 거부반응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하고 항변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분은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마음을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셔서 창세전부터 선택하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는 말씀에도,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우둔하게 해서 믿지 못한다는 말은 받아들이면서,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구원받게 했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것은 결국 누구의 책임이 됩니까?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다면, 선택받았다는 말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대신 분명히 어떤 사람은 우둔한 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구원하느라, 하나님의 관심권 밖에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한 것은 나 때문인지 누가 압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야곱이 하나님께 왜 형을 버렸느냐고 따릴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기가 선택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라고 말씀합니다(2:11). 그러나 성경을 한 부분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셨습니다(1:16).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그분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3:22). 이 세상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하셨습니다(3:22). 세상은 죄 아래에 있지만 그 세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 즉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약속을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하나님에게 순종은 그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3:22).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5:9).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나를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버림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을 귀를 주지 아니하신 것도 맞는 말입니다. 선택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버린 자도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신 사람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왜! 누구는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합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창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사셨습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택자의 감사이어야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354-430“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을 자, 안 받을 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선택 받을 자로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창세 전은 인간에게 과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과거,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처음과 끝, 시작과 마침,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참고/22:13). 하나님에게는 항상 오늘 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선택받는 자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해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중보해야 합니다. 만약 나의 전도 대상자가 바로처럼 강퍅한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나의 전도 대상자가 구원 받은 자로 택함 받은 남은 자가 아니라, 우둔한자로 남은 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무조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할렐루야!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고, 나의 전도 대상자는 그 선택을 받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을 때, 한 명 만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머지 아홉은 제 갈 길을 같습니다(17:17). 그와 같이 같은 설교를 들어도, 열 명 중에서 한 명은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비웃거나 싫어합니다. 이 현상을 단지 마음이 악해서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악하기는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모두가 우둔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만지셔서 깨닫게 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릴 때, 남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데, 부인은 눈을 감고 조는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남편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놓고 남편은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믿었고, 부인은 마음이 우둔해서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본래 마음이 우둔하기는 남편이나 부인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둔하다는 것만 가지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듣게 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자, 가족, 전도 대상자가, 듣는 자로 만들어 달라고, 선택받은 자로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눈이 머셨지 저 사람을 택하셨을까? 그 첫 번째는 바로 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잇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시지 않으면 못 듣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수만 명의 무리가 자기를 따라온다고 해도 그 가운데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셔서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데도 하나님이 듣도록 하신 자만이 들을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말씀이 바로 귀 있는 자가 들을지어다입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근본 마음이 아무리 악해도 믿게 되고, 멸망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자들은 설혹 덜 악하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스틴Augustine,354-430은 이 사실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악인들의 뜻을 선하게 만들실 수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그의 뜻이 다른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 다른 데 있는지는 그분만이 아신다. 우리는 분에 넘치는 지혜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칼빈John Calvin,1509-1564은 여기에 대해 한마디 더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버리고 믿지 못하게 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꾸 파고들면 결국은 쓸데없는 고통만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 공동체 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완악하게 만들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은 괴롭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 영혼이 구원받도록 기도하지 말라 사랑과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완악한 그 영혼을 보다가 자기가 택함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마저 빼앗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아니한 사람이면 우리가 아무리 동정해도 아무리 위로해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통곡해고 별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왜 저 사람들을 버리셨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 문제도 불가사이의 수수께끼지만 거기에 못지않게 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하나가 있습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을까? 왜 믿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듣는 귀를, 보는 눈을, 깨닫는 마음을 주셨을까?” 이 문제는 “왜 저 사람은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 믿지 못하게 했을까?” 하는 것보다 훨씬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잖아요. 이 세상에서 제일 안 될 일이 된 것이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버림받은 자에 대해 대답이 안 나오는 것처럼 택함을 받은 나에 대해서도 대답이 안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왜 나 같은 놈을 택해서 은혜를 주셨습니까?” 하고 밤낮없이 고심해 보십시오. 아무리 논리를 펴서 증명해 보려고 해도 대답이 안 나옵니다. 버림받은 자를 놓고 “왜 그를 완악하게 해서 믿지 못하게 했을까?” 하고 따질 때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버림받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이러니저러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인간끼리 비교해도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무엇을 보고 믿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생긴 것을 보아도 잘난 것이 별로 없고, 머리가 똑똑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잘된 일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게다가 성격까지 괴팍해서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것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놓고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듣는 귀를 주셨고 보는 눈을 주셔서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를 놓고 우리는 정말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눈이 멀 으셨지 저런 사람을 좋다고 택하시다니.” 하나님이 눈이 머셨지 라는 표현을 쓰기에 하나님 앞에 너무 송구스럽습니다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면 정말 말대로 하나님이 눈이 멀어서 누구를 택하셨나면 그중에 첫 번째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나요 나!”l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불가사의한 사건이 또 있습니까? 자기의 선택을 놓고 하나님이 실수했다거나 모순을 범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지 않았냐고 하나님 앞에 항변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우연한 실수로 해석하고 싶은 자가 있습니까? 버림받은 자의 문제가 신비라면 선택받은 나 자신의 구원은 신비 중의 신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가 막힌 자기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치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지고 자꾸 따지려 들지만 은혜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구원 얻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하나님 앞에 끓어 앉아 흐느끼게 됩니다. 찬송가 가사를 쓴 위대한 신앙 인물들 중에 이 감격을 노래한 사람이 많습니다. 아이삭 왓츠Isaac Wattsa는 찬송가 149장에서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하고 찬송했습니다. 휘틀D. W. Whittle은 찬송가 310장에서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하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크로스비라고 할 수 있는 송명희씨는 너무나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그리고 존 뉴톤John Newton은 찬송가 305장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하고 노래했습니다.

 

존 뉴톤이 남긴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면 세 번 놀랄 것입니다. 첫째는 천국에 와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안 보여서 놀랄 것입니다. 둘째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자리에 와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셋째로 노예상인으로 악명 높았던 존 뉴톤이 그곳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왜 선택되어 구원받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저 사람을 완악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믿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풀 수 없는 불가사이의 진리 때문에 날마다 얼떨떨해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이렇게 중얼거려 보세요. “허허 하나님도 눈이 머셨지 나 같은 놈이 뭐가 좋아서 택하셨지? 정말 모를 일이야.”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이 감격이 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감격이 있습니까? 이 감격이 있으면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감격이 있으면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감격이 있으면 병상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할렐루야 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이 감격이 샘솟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반석에서 터지는 샘물처럼 이 감격이 넘치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리

 

탁월한 유대인 교육의 수혜자受惠者 사도 바울의 동족 구원 확신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탁월하기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그들은 자녀가 어려서부터 고상한 꿈을 갖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어려서부터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인지, 예수를 거부하며 핍박하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향해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1).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선민으로 택하신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갖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확신하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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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을 행해 절망하지 않는 확신 - ①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 먼저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 이 말씀의 의미는 유대교 골수분자로 예수 믿는 자를 극심하게 핍박자 였던 자기를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을 보면, 아직 믿지 않고 거역하고 있는 오늘날 이스라엘도 버리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동족을 행해 절망하지 않는 확신 - ② 엘리야시대의 남은 자 7000. 또 하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사실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는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버림당한 것처럼 보이는 암흑기였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사벨은 이방 시돈의 왕 엘바알Ethbaal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지독한 우상숭배자로 바알과 아세라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도록 하는 타락의 길을 걷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선지자 엘리야는 자기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백성이 온통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3.참고/왕상19:10).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4,참고/왕상19:18).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경건한 사람 칠천을 하나님이 남겨 놓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를 가지고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5).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6). 하나님께서는 남겨 놓으신 그들은 무슨 선을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에 포커스를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에 포커스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택함 받은 백성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는 현대 이스라엘을 볼 때,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희망의 상징 남은 자

 

이렇게 남은 자는 희망의 상징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지난 역사 가운데 어느 국가나 교회가 전부 다 구원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안에서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남은 자뿐입니다. 그 외에는 은혜로 택함을 입은 데서 제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택함 받은 것이 아닌가요?” 라고 물을지 모르지만, 대답은 분명히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개인적으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바울한테서 꼭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자기 가족과 민족의 구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상숭배에 젖어 있고 완악할 대로 완악해도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가족과 동족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남북한의 8천만 명 가운데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확신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7천은 숫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해서 앞으로 믿도록하신 남은 자인 내 가정과 이 민족의 모든 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기바랍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80년이 넘는 동안 남북이 둘로 나뉘어져 극한 대립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남은 자를 보존하고 계셨습니다. 그와 같이 나의 가정과 북한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북한 정권이 교회의 씨를 말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주체사상에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을 남겨 놓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상징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극악무도한 정권 아래에서도 믿음을 위해 남겨 놓으신 자가, 7천 명의 몇 배 몇 십 배 몇 백배에 달하는 7백만의 남은 자가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실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북한 정권이 종말을 고하는 날 남은 자 7천명이 할렐루야! 찬송하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에 포함되지 못한 자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받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은혜를 받지 못했고 그 결과 우둔해 졌다고 합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7) 여기서 남은 자들이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8.참고/29:10;29:4).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우둔해집니다. 손에 굳은 살과 같이 영적인 일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둔해 졌다는 것은 감각이 전혀 없는 살갗처럼 신령한 일에 반응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자들. 우리는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구원받고 싶었는데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11:7). 얻고 싶어서 구하는데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은혜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둔하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둔해진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은 우둔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인간 본능의 부패한 성품으로만, 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우둔함 배후에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고’, ‘보지 못할 눈을 주셨고’,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8). 이사야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라고 하였습니다(6:9). 복음에 대해 인간은 본성적인 우둔이 있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가사의한 말씀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귀가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마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풍성한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는 자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받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버리고 눈도 막아 버립니다. 그렇게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면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밥상은 올무와 덫이 됩니다(11:9.참고/69:22). 밥상이란,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육적인 관심사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입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바라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빠져서 즐기다가. 죽음의 길로 빠지게 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부유한 환경이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는 불행의 덫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정신없이 돈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돈을 벌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그의 밥상이 복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 번영 복음, 기복 신앙, 형통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해서 장수하면, 그것이 예수 잘 믿는 자들이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가르침이 다 틀린 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11:10).

 

잘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소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웃음이 있어야 복음이고 눈물은 복음이 아니다.’는 말이 교회 안에서 진리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런 세대에 쓴소리를 듣고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좋은 것만 말했던 길 예언자를 따랐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하였지만, 쓴소리를 했던 흉 예언자들은 인기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실을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참고/왕상22:18). 지금 쓴소리가 달갑지 않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에게, 다시 회복의 은혜를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므로 쓴소리를 듣고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잘사는 것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 즉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중의 하나가 잘사는 것,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벌고 잘 먹는 형통이 올무가 되어 교회를 다녀도 평생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는 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렇듯 교회를 다니는 자에게도 올무가 될 수 있는 밥상이라면,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진수성찬이 올무가 안 되겠습니까? 차라리 초라한 밥상을 가지고 살았다면, 복이 되었을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막대한 돈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다면, 그 돈이 밥상올무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로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서 예배 중에도, 돈 벌고 투기할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예가 종종 있다고해서,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셔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감사할 문제가 아닙니다. 밥상의 올무요 덫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형통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적 암흑기가 찾아 올 것인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하였습니다(24:38-39).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쏟아 부을 것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인가? 그렇다면 세상 논리로 말할 때, 하나님이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우둔해서 믿지 아니한 그 사람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서요. 어떤 사람이 친구의 꼬임에 유흥업소에서, 밤늦도록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음주운전으로 인사가 발생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면 경찰에게 자기 잘못이 아니라, 친구 때문이라는 말이 통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러니저러니 하고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고의로 누구를 버리고, 믿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유식하다는 분들 중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하고 항변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그렇다면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마음을 우둔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에 불쾌감을 느낀다며,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사랑하셔서 창세전부터 선택하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는 말씀에도,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대신 분명히 어떤 사람은 우둔한 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를 구원하느라, 하나님의 관심권 밖에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한 것은 나 때문인지 누가 압니까?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야곱이 하나님께 왜 형을 버렸느냐고 따릴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기가 선택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고의로 버렸다는 데 대해서 반발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나를 예수 믿도록 하기 위해서 버림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을 귀를 주지 아니하신 것도 논리적으로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선택받았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버린 자도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신 사람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왜! 누구는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합니다(1:4-6).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354-430“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 대상자를 위해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열 명 중에서 한 명은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참고/17:17).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비웃거나 싫어합니다. 이 현상을 단지 마음이 악해서라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결국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듣는 귀가 열린 자의 은혜

 

예수님께서는 “귀 잇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시지 않으면 못 듣는다는 것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수만 명의 무리가 따라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듣도록 하신 자만이 들을 수 있다는 선언이 귀 있는 자가 들을지어다입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근본 마음이 아무리 악해도 믿게 되고, 멸망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자들은 설혹 덜 악하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John Calvin,1509-1564“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버리고 믿지 못하게 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꾸 파고들면 결국은 쓸데없는 고통만 당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눈이 머셨지 저 사람을 택하셨을까? 그 첫 번째는 바로 입니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만들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은 괴롭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완악한 그 영혼을 보다가 자기가 택함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마저 빼앗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저 사람들을 버리셨을까도 쑤쑤께기지만,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을까? 왜 믿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듣는 귀를, 보는 눈을, 깨닫는 마음을 주셨을까?” 는 훨씬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입니다.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까? 버림받은 자에 대해 대답이 안 나오는 것처럼 택함을 받은 나에 대해서도 대답이 안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버림받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이러니저러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인간끼리 비교해도 저런 사람을 하나님이 무엇을 보고 믿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것을 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듣는 귀를 주셨고 보는 눈을 주셔서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이 멀 으셨지 저런 사람을 좋다고 택하시다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송구스럽습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눈이 멀어서 누구를 택하셨나면 그중에 첫 번째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나요 나!”l고 대답해야 합니다. 자기의 선택을 놓고 하나님이 실수했다거나 모순을 범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지 않았냐고 하나님 앞에 항변할 수 없습니다. 버림받은 자의 문제가 신비라면 선택받은 나 자신의 구원은 신비 중의 신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305장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를 작사한 존 뉴톤John Newton“만일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면 세 번 놀랄 것입니다. 첫째는 천국에 와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안 보여서 놀랄 것입니다. 둘째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자리에 와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셋째로 노예상인으로 악명 높았던 존 뉴톤이 그곳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왜 선택되어 구원받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저 사람을 완악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믿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감격이 있으면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감격이 있으면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감격이 있으면 병상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할렐루야 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마음속에 이 감격이 샘솟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반석에서 터지는 샘물처럼 이 감격이 넘치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① 죄인인 인간의 본성적인 우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의도적인 우둔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관심사를 상징하는 잘 먹고 잘 사는 밥상이 올무가 되어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한 사람의 생활이요, 우둔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하지 않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이 우둔하도록 내버려 두어 구원 받지 못했다고, 책임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죄악 된 인간 본성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멸망 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창세 전 택하셔서, 구원받게 되는 은총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가 중보하는 이들이 후자가 되게 하옵소서.

 

③ 우리가 선택 받았다는 것은 누군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관심 밖에 있게 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창조자, 절대자,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중보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선택받을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④ 하나님이 완악하게 만들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다가, 내가 택함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빼앗기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같은 자가 구원받은 수수께기도 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버림받은 문제를 자기고 따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⑤ 하나님이 앞에 왜 내가 선택되어 구원받았는지 알 수 없는 이유, 오직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올리는 이 시대 택함 받은 남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