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 25 이재현목사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행 28:1-10)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2. 12. 11. 17:49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8:1-10 2022.12.11. 主日禮拜 

 

“1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28:1-10)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에 따라, 로마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로마 황제의 근위대 백부장 율리오를 책임자로 세우고, 바울을 로마까지 이송하도록 하였습니다(27:1). 이스라엘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출항, 이튿날 오늘날 레바논 시돈을 거쳐, 터키 무라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환승 후, 항해를 계속했지만,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27:2-9). 이때 바울의 항해 중단을 권면하였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강행을 하였고, ‘유라굴로 광풍에 파선되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며, ‘구원의 여망을 잃어버렸습니다(27:10-20). 이 순간 바울이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서서, 안심하라 한 사람도 상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27:21-26). 그 말 그대로 승선한 이백 칠십육 명 모두가 구조되었습니다(27:27-44).

 

첫 번째 가르침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입니다. 백부장은 바울이 아닌 선장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27:11). 백부장이 보기에 바울은 항해에 문외한입니다. 그러나 간과한 것은 선장의 경험이 유라굴로로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광풍도 하나님 주권하에 있습니다(참고/8:26;4:39;8:24;7:1,16:5,14:18). 바울은 항해의 지식은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 있으면, 천사를 통해, 바다를 하나님이 어떻게 주관하실지 알았습니다. 목사가 성도의 물질 등 어려운 현실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성도 여러분 가정과 기업에 임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들을 말을 듣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다수와 소수가 아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항해에 모두가 찬성했고 바울만이 반대하였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를 따르지만, 소수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수를 통해서도, 소수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수 소수를 따지기 이전에, 모두 기도하는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고, 정성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우리가 모두 함께 승선한 공동체이기에 교회를 위한 기도는 나의 가정과 기업 위에도, 아름답고, 거룩하며, 역사하는 힘이 큰 응답으로 임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 책망 속에서 희망을 들으라 입니다. 바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내 말을 듣고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27:21-22). 바울은 희망보다 책망을 먼저 전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을 위해 책망이 먼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참고/3:7-8,11). 그렇더라도 말씀의 목적이 책망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살릴 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자를 만나야 한다는 희망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말씀이 때로는 채찍으로 들려올 때도, 듣고 싶지 않다고 돌아서서,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아멘' 하면 반드시 주시고자, 하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는 말씀에 확신을 가지라입니다. 바울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생명에 손상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포한 후, 즉시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어려움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무려 열 나흘째 되는 날까지 거세 풍랑 가운데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27:27). 그러나 바울은 하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7:25). 이것이 확신입니다. 확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믿고 선포했으면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요. 인내의 기간 동안 허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는 응답되고 오늘은 부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가를 측량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다섯 번째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입니다(27:24).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고 하셨습니다(27:24). 하나님은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게 하려고, 바울을 살려야 했고요. 그 하나님 역사에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기에 살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른 사명자가 있으면, 그가 속한 교회와 가정의 성도와 가족은 모두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 분명한 사명자가 있다면, 다른 성도들이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이 사명자가 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에 분명한 사명자가 있다면, 그 가족 전체가 사명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귀한 은혜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멜리데 섬에 오르다

 

사도 바울을 로마로 이송하기 위해 승선한 배는 항해 중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하여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한 사람도 상함 당하지 않고,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1). 멜리데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멜리데는 본래 가고자 하는 목적 항로는 아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섬에 상륙하기까지도, 배가 파선되는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선포한 그대로 우리가 구조되었다는 것은, 승선 인원 모두의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참고/27:22-26).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는 것은, 섬에 도착한 나중에서야 멜리데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인데요(1). 오랜 동안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까지 항해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선원들이라면, 멜리데 섬을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늦게 멜리데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지금 도착한 곳이, 멜리데의 중심 항구인 발레타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조그마한 ’灣에 도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통하여 이곳이 멜리데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멜리데 섬은 오늘날 몰타’Malta공화국입니다. 크기는 제주도의 1/6정도입니다. 지금은 바울을 태운 배가 입항한 ’灣 성 바울 만”St. Paul's bay, 몰타 섬 주변에 있는 여러 작은 섬 중 바울이 들어온 에는 바울의 동상을 세우고, “성 바울의 섬"St. Paul's Island으로 명명해놓았습니다.

멜리데 섬에 도착하자,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고 하였습니다(2). 멜리데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의 어부들이 맨 처음 사용한 명칭으로 가나안 토착 언어로는 피난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바다가 그렇듯이 지중해도 풍랑이 심한 경우 종종 이 섬을 피항처’避港處로 삼은 것인데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일하심을 볼 때, 어쩌면 바울을 이송하는 배의 피난처가 되기 위한 섬으로 만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멜리데는 페니키아와 연관이 있는데요. 원래 시리아와 레바논 일대가 페니키아로 이들 스스로 가나안인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이곳 출신의 공주 디도’Dido,엘리사Elissa가 남편을 살해한 오빠 퓌그말리온’Pygmalion을 피해서 BC 814년에 아프리카 상단의 카르타고Carthago,지금의 튀니지 지역를 세웠으며, 이 카르타고 사람들이 멜리데를 포함한 해상을 장악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 아니라, 페니키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멜리데 섬의 사람들을 원주민들로 번역된 헬라어는 호이 바르바로이ο βάρβαροι라고 불렀는데요(2).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야만인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성경도 그와 같은 번역의 예가 있습니다(참고/1:14;고전14:11;3:11).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야만스러운 민족이라는 말은 아니고요, 성경에서 사용되는 이 말의 용례는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섬의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영접해 주어서, 오랜만에 땅을 밟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3). 나뭇가지에 속에 숨어있던 뱀이 뜨거운 불길에 놀라서 바울의 손을 물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뱀을 독사’Poisonous Snake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독사는 물고서 달려 있기보다는 물고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달려 있다는 것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4). , 원주민들은 바울이 뱀에 물리자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리는 것에 대하여,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맹독을 가진 뱀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뱀을 헬라어로 독사를 지칭하는 에키드나’ἔχιδνα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저자인 누가가 의사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뱀의 독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고 하였습니다(5). 원주민들은 바울이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고 소리쳤습니다(6). 그 이후 바울이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와 유사한 상황이 1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있었습니다(14:8-15). 당시 바울은 자신을 신들이 사람의 형상이라고 한 이들에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 (사람을 믿고) (우상을 섬긴)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설교했던 것을 볼 때, 멜리데 원주민들에게 나는 신이 아니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증인이라고 선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14:11). 그동안도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으로 도움을 받았었는데요. 바울을 신으로 추앙하려던 일이 있은 뒤에는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추장 보블리오가 바울 일행을 환대하고, 자신 소유의 토지에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7). 그리고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치유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8). 이러한 소식은 삽시간에 섬 전체에 퍼졌고,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라고 하였습니다(9). 바울이 치유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곳 멜리데는 98%가 기독교 신자이며, 오래된 비문에 보블리오가 이곳의 최고 높은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섬에서 삼 개월 동안 바울을 통해 멜리데를 거룩한 영토로 원주민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의赭衣를 입고도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 군대 영내와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은 본문 시점으로 약 2년 여전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넘겨져 로마 군대 영내 층계 위에 서서, 유대 무리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22:1.참고/23:26).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22:6-9).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겠다하시며, 이방의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했습니다(22:21).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호소했습니다(22:30-23: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시며, 반드시 로마에가서도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11).

 

가이사랴 헤롯 궁 재판정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총독 벨릭스에게도 ”,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의를 얻고, “절제”, 한 영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판”, 예수를 영접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심판받지 않는,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24:24). . 유대 총독 벨릭스에게서 베스도가 소임을 이어받게 됩니다(24:26-27). 갈릴리 분봉왕인 아그립바가 누이 버니게와 함께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문안하고자 찾아오자,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일을 꺼냈고, 그동안 송사 과정을 들은 아그립바는 직접 바울의 말을 듣고 싶다는 요청에 재판이 열렸습니다(25:13-27). 재판정에 선 바울은 지금 내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다가, 고발당했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모세의 예언을 말한 것으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을 빛을 선포하실 분이라는 것을 전하리라는 것을 증언했습니다(26:1-23). 바울은 쇠고랑에 차여 있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26:29).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지만,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상대가, 왕이든 총독이든 왕비이든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도한 것입니다.

 

광풍에 표류하는 선상에서 

 

바울의 가이사에게 상소로 로마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25:11,27:1). 이스라엘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 배로 출항 후, 오늘날 레반논 시돈을 거쳐, 터키 무라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배로 환승하여 항해를 이어갔지만, 외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27:3-9). 바울은 항해를 계속하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항해 중단을 승선한 사람들에게 권면했지만, 이송 책임자 율리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항해를 강행하였습니다(27:11). 그 결과 유라굴로 광풍에 파선하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27:14-19). 승선한 사람들 모두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습니다(27:20). 이 절망의 순간에도 바울은 의연하게 일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27:22-25). 모두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대로 멜리데 섬에서 모두 구조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바울은 광풍에 떠내려가는 선상에서도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이와 같이 지난 2년 여 동안 로마 군대 영내와 산헤드린 공회에서, 가이사랴 헤롯 궁 재판정에서, 광풍에 표류하는 배 위에서, 구조된 멜리데 섬에서, 죄인이 입는 자의赭衣를 입고서도, 복음을 증거를 쉬지 않았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던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전파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바울을 붙잡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자신을 어느 그곳에서든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딤후2:9). 자신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너무나도 우리에게 큰 도전은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 메임을 받아도,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것과 같이 로마에 가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이후 석방되어 사도행전 이후 4차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멀리 서바나, 스페인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고요. 그레데, 밀레도, 골로새, 에베소, 빌립보, 니고볼리 등 이전 전도 여행에서 들렸던 도시들을 다시 찾아 성도들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혀 2차 투옥됩니다(참고/15:23-28;2:23-24;딤전1:3;딤후1:17,4:6,20;1:5,3:12;1:22). 이때 바울이 순교 직전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딤후2:9).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2-13). 이 말씀에 부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마지막에는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미쁘시니’, ‘항상 신실하시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신실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신실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 살려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에 넘겨졌을 때, 재판장이었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18:37). 이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라고 위엄있게 답하셨습니다(18:37). 누가 재판장이고 누가 죄수의 신분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근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권위가 있음을 내비치며,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답할 것을 유도했습니다(19:10). 예수님이 지금 재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고발하였기 때문입니다(10:33,36.참고/26:65;2:7,14:64;5:21).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라며,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과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19:11).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도 바울의 순교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복음을 끝까지 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 하나는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구원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위해 내 일생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딤후4:7-8).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가질 것을 도전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2).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는 순간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는 것은 우리의 심령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말씀이 아니요. 그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강조입니다.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10:32). 우리를 하나님 앞에 시인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예수님에게 부인을 당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예수님에게 시인을 받으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셨을 때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수제인 베드로는 이 말씀을 아주 가까이서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날 밤,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26:34).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호기롭게 장담하였습니다(26:35). 그러나 결과는 여러분이 잘 아는 데로 저주하며 맹세하여 세 번 부인했습니다(26:69-74). 그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씀합니다(26:75). 그런데 베드로는 부인이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까지 건너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AD 63년경인데요. 폭군 네로가 로마를 지배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로의 핍박이 극심해졌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박해에 피해 로마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회심한 후에도 베드로는 또다시 자신의 살기 위해 핍박을 피한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을 부인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피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가 나의 백성을 떠나므로 내가 한 번 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로마로 간다고 답하십니다. 이에 자신의 비겁함을 뉘우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네로에 의해 십자형에 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죽음의 순간 감히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내 머리가 땅 아래로 오도록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베드로의 순교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부인하고 부인했지만, 결국은 시인으로 돌아섰습니다. 베드로는 회심 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고요. 회심 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돌아섰습니다.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제 누구 앞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은 신앙으로 무장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순교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았던, 그 신앙을 바울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같이 회심한 후에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돌아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가리키면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부인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 내가 좀 돈을 보려고, 유익을 얻으려고, 잠시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에 있을지라도, 돌아서서 마지막에는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번 믿음을 잃어버리다가 나는 안돼는 구나하고 포기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도하는 모든 분이 그러한 길에 들어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함께 살 것이요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신앙이고요. 두 번째로 주를 위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주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참고/8:35).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풀면, 여러분 신앙 생활하면 죽지 않아요. 손해 보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 큰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출석도 해야지요. 땀 흘려 봉사도 해야지요. 피 같은 헌금도 해야지요. 그와 같은 모든 믿음 안에서 행위들을 손해로 생각해요. 그러면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기 이전에요. 시간 내에서 예배 출석도 안 하고, 땀 흘려 봉사도 하지 않고, 피 같은 헌금도 안 하고, 다 나를 위해 사용했어요.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어요. 생각을 한번 잘 해 보세요. 예수 믿기 이전에요. 그때 모든 것은 나와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을 때, 여러분 행복했어요. 우리는 인생의 경험으로 압니다. 나를 위해 나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쓴다고, 그것이 내게 가정에 유익으로 행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간에게 행복은 그런 것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행복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만날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는가? 이 해답을 찾아야, 인간은 비로소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인간은 외롭고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쓰고 써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은 무려 50년 동안 건축되었습니다. 이 궁전은 규모, 장식품, 회화들, 조각상 그리고 그 유명한 베르사유 정원은 감탄을 자아낼 만했습니다. 전체 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인데요. 각종 방들 가운데 가장 화려한 방은 거울의 방입니다.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으로서, 거울이 17개의 아케이드를 천장 부근까지 가득 메우고 있고, 천장은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을 아들인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증축한 곳인데요. 루이 14세는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리며,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 왕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법률과 같은 존재였고, 스스로 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였습니다. 모든 것을 쟁취하고, 누리고, 자신의 명성을 위해 쌓고, 세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임종하기 닷새 전인 1715 8 26, 증손자이자이자, 다섯 살 어린 나이의 후계자인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가,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물에 탐닉했던 짐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점도 닮지 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석하게도 짐은 그러지 못했느니라.”

 

그는 아들과 손자까지 다 죽고 난 이후까지, 생존하여, 당시로서는 장수인 77세를 살며, 72 110일 동안 재위하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왕위를 지켰지만, 그의 삶은 탐욕의 절정인 베르사유궁의 건축과 끝없이 이어지는 참혹한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양왕이라 불리는 국왕이 빛나는 영광을 추구하는 동안 2,000만 명의 프랑스 국민들은 캄캄한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아가,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물에 탐닉했던 짐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점도 닮지 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석하게도 짐은 그러지 못했느니라.”

 

그의 유언에 그 강대하고 찬란했던 삶이 행복한 것으로 보이세요. 아니면 후회, 후회, 후회로 보이세요. 인간의 행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세상에서 오는 것들이 자신을 위해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도 결국 후대에 프랑스 혁명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끌려 내려지게 되지 않습니까?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 이라고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왕 노릇 권세 - 왕권자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고요. 두 번째로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이고요. 세 번째로 왕 노릇의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2). ‘함께라는 말은 주님과 함께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왕이시라는 것이고요. ‘왕 노릇이라는 것은 왕은 아닌데 왕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왕 노릇할 자인가? 왕권을 받을 자인가하는 것입니다.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1-12). ‘주와 함께 죽었으면을 상징적으로 보면, 끝까지 믿음을 지킨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과 같이 순교한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주와 함께 왕 노릇 할 자는 순교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에게 하나님은 왕 노릇하는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순교자에게 왕권이라는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급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일생을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간 성도들과 주를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들이 천국에서 상급이 동일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에게는 왕 노릇의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교자에 대하여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20:14). 이 말씀 중간에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란 당연히 순교자를 가리키는 것이고요. 이어서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도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되요. ‘짐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 자는 마지막 때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일컫는데요.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장차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인 지금 교회 시대 순교자와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지배한 이후 종말 시대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순교자들에게는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왕권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에서 순교자들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마지막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에서, 악인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것은 순교자에게 주는 특권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상급의 차이입니다. 평범하게 예수 믿다가 천국에 간 성도와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며 충성한 순교자가 같은 상급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순교라고 할 때,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기거나, 죽음의 위협이 내 앞에 오면, 나는 그 자리를 피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를 쓴 장소가 감옥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 자리를 기념하여 지금은 천국의 계단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 지하에 가면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 10대 황제 , 가장 그 정도가 심한 왕 중 한 명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85-312가 자신의 목욕장 공사에 징집되었던 기독교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각 지역에 산재했던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킨 후, 이곳에서 무려 1 203명을 죽였습니다.  1 203명 중에는 어쩌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릅니다. 즉 순교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 나에게 맞이하게 될 줄 모릅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예화를 들려드릴까요? 지금 미국에서 총기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학교에서 벌어져 큰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1999 4 20일에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오래전 사건임에도 다른 총기 사건과 다르게 오늘까지 기억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의 놀라운 증언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인 트렌치코트 마피아 단원이었던 에릭 딜란이 총기를 휴대하고, 학교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고 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마피아 단원 학생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는 물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믿냐?” 만약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캐시의 이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의 크리스천 십 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주의 한 도시에서는 2 5백 명의 십 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캐시 바넬은 어린 소녀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 이름과 하나님 말씀을 증거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교의 자리에 찾아 온 것입니다. 이와같이 순교는 어느 순간, 어떤 자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찾아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부인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으며, 순교 후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생각할 때,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살아서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도 순교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순교하지 않는 제자도 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마지막을 밧모섬에 유배당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종말에 있을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1:1,9). 그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 소망과 축복의 말을 남기고 편안히 주님이 계신 천국에 안식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았지만 성경학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놓습니다. 그 이유는 일생 동안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산다는 신앙을 잃지 않고. 그 또한 승리의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하였고요(2:10).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주리라고 하였습니다(2:26). 이 또한 순교자에게 주시는 왕 노릇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아멘! ‘이제 후로는 죽음 후를 말씀합니다(딤후4:6-8).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즉 사도 바울은 저 영원한 나라에 자신을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순교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인생의 후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더욱이 이 의의 면류관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의로운 면류관을 예비하여 주신 다고 하셨으니, 이보다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라면서, 우리 또한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축복했습니다(딤후4:8). 

 

 

정리

 

멜리데 섬에 오르다

 

사도 바울을 로마로 이송하기 위해 승선한 배는 항해 중 유라굴로 인하여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한 사람도 상함을 당하지 않고, ‘멜리데 섬에서 구조되었습니다(1). 바울이 광풍으로 파선된 선상에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27:25-26). 멜리데 섬은 오늘날 몰타’Malta공화국입니다. 크기는 제주도의 1/6정도입니다. 지금은 바울을 태운 배가 입항한 ’灣 성 바울 만”St. Paul's bay, 몰타 섬 주변에 있는 작은 여러 섬중 바울이 들어온 에는 바울의 동상을 세우고, “성 바울의 섬"St. Paul's Island으로 명명해놓았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영접해 주어서, 오랜만에 땅을 밟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 그러던 중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불에 넣으려고 하자, 그 안에 있던 독사가 그만 손을 물어버렸습니다(3). 이에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4). 그러나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고 하였습니다(5). 원주민들은 바울이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고 소리쳤습니다(6). 그 이후 바울이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와 유사한 상황이었던 1차 전도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도 있었는데요(14:8-15). 당시 바울은 자신을 신들이 사람의 형상이라고 한 이들에게 행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 (사람을 추앙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말씀을 볼 때, 멜리데 원주민들에게 나는 신이 아니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증인이라고 선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14:11). 그동안도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으로 도움을 받았었는데요. 바울을 신으로 추앙하려던 일이 있은뒤에는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가 바울 일행을 환대하고, 자신 소유의 토지에 사흘 동안 머물도록 친절하게 배려해 주었습니다(7). 그즈음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8). 이러한 소식은 삽시간에 섬 전체에 퍼졌고, 다른 병든 사람들도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9). 바울이 치유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멜리데는 98%가 기독교 신자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섬에 머무는 삼 개월 동안 바울을 통해 멜리데를 거룩한 영토로 원주민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의赭衣를 입고도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 군대 영내와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의 지난 1, 2, 3차 전도 여행에서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결박을 당한 후, 가이사랴 헤롯 궁에 구금되고, 로마로 이송되는 배 안에서도, 그리고 멜리데 섬에서도 복음 증거에 멈춤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으로부터 약 2년 여전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에게 넘겨져 로마 군대 영내 층계 위에 서서, 유대 무리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22:1.참고/23:26).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난 체험과 이방의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했습니다(22:6-9,21). 이튿날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호소했습니다(22:30-23: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시며, 반드시 로마에 가서도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23:11).

 

가이사랴 헤롯 궁 재판정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되어 총독 벨릭스에게 강론을 통헤 ”,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의를 얻고, “절제”, 한 영혼,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판”, 예수를 영접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심판받지 않는,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24:24). 유대 총독 벨릭스에게서 소임을 이어받은 베스도와 갈릴리 분봉왕 아그립바와 그의 누이 버니게가, 재판 석에 앉아 있었지만, 바울은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쇠고랑에 차 있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24:26-27,25:13-17,26:1-23,29).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지만,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상대가, 왕이든 총독이든 왕비이든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도한 것입니다.

 

광풍에 표류하는 선상에서. 바울의 가이사에게 상소로 로마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 배로 출항 후, 오늘날 레반논 시돈을 거쳐, 터키 무라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배로 환승하여 항해를 이어갔지만, 외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25:11,27:1-9). 바울은 항해를 계속하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항해 중단을 승선한 사람들에게 권면했지만, 이송 책임자 율리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항해를 강행하였습니다(27:11). 그 결과 유라굴로 광풍에 파선하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27:14-19). 승선한 사람들 모두 구원의 여망이 사라졌습니다(27:20). 이 절망의 순간에도 바울은 의연하게 일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27:22-25). 모두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증거한 그대로 승선한 이백 칠십육 명 중 한 명도 손상을 입지 않고 구조되었습니다(27:27-44). 바울은 표류하는 선상에서도 하나님을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군대 영내와 산헤드린 공회에서, 가이사랴 헤롯 궁 재판정에서, 광풍에 표류하는 배 위에서, 구조된 멜리데 섬에서, 죄인이 입는 자의赭衣를 입고서도, 복음을 증거를 쉬지 않았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던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전파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바울을 붙잡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 메임을 받아도,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이 로마에 가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이후 석방되어 사도행전 이후 4차 전도 여행이 시작됩니다. 멀리 서바나, 스페인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고요. 그레데, 밀레도, 골로새, 에베소, 빌립보, 니고볼리 등 이전 전도 여행에서 들렸던 도시들을 다시 찾아 성도들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혀 2차 투옥됩니다(참고/15:23-28;2:23-24;딤전1:3;딤후1:17,4:6,20;1:5,3:12;1:22). 이때 바울이 순교 직전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딤후2:9).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2:12-13). 이 말씀에 부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마지막에는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미쁘시니’, ‘항상 신실하시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신실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신실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 살려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참고/18:37,19:10-11).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복음을 끝까지 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 하나는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구원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위해 내 일생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딤후4:7-8). 왜 우리가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2).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말씀이 아니요. 그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강조입니다.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고 하셨습니다(10:32). 우리를 하나님 앞에 시인해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내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예수님에게 부인을 당하면 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인정 받지 못해도 예수님에게 시인을 받으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이 말씀을 아주 가까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을 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호기롭게 장담하였습니다(26:34-35).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세 번 부인했습니다(26:69-74). 그런데 베드로는 부인이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까지 건너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AD 63년 경 인데요. 폭군 네로가 로마를 지배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극심해졌습니다. 베드로는 회심한 이후임에도 박해에 피해 로마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 또한 주님을 부인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도피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가 나의 백성을 떠나므로 내가 한 번 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로마로 간다고 답하십니다. 이에 자신의 비겁함을 뉘우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네로에 의해 십자형에 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회심 전에도 회심 후에도 부인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돌아섰습니다.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제 누구 앞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은 신앙으로 무장했던 것입니다. 

 

시도 바울이 순교의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았던, 그 신앙을 바울도 가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같이 회심한 후에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돌아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가리키면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부인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살기 위해, 내가 좀 돈을 보려고, 유익을 얻으려고, 잠시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에 있을지라도, 돌아서서 마지막에는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번 믿음을 잃어버리다가 나는 안돼는 구나하고 포기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도하는 모든 분이 그러한 길에 들어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함께 살 것이요.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로 주를 위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주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참고/8:35).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 큰 손해를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이전에요. 시간 내에서 예배 출석도 안 하고, 땀 흘려 봉사도 하지 않고, 피 같은 헌금도 안 하고, 다 나를 위해 사용했어요.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어요. 그때 모든 것은 나와 조금 더 나아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했을 때, 여러분에게 행복했어요. 우리는 나를 위해 나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쓴다고, 그것이 내게 가정에 유익으로 행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인간은 외롭고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쓰고 써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만날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리며,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 왕입니다. 가장 오래 동안 72년간 왕위를 지키며, 탐욕의 절정인 베르사유궁의 건축하는 등 빛나는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임종하기 닷새 전인 1715 8 26, 증손자이자, 다섯 살의 어린 나이 후계자인 루이 15세에게, “아가,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물에 탐닉했던 짐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점도 닮지 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웃 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석하게도 짐은 그러지 못했느니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에 그 강대하고 찬란했던 삶이 행복한 것으로 보이세요. 아니면 후회, 후회, 후회로 보이세요. 인간의 행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세상에서 오는 것들이 자신을 위해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복음을 위하여 죽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살게되는 것입니다.

 

왕 노릇 권세.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번째로 왕 노릇의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2). ‘함께라는 말은 주님과 함께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왕이시라는 것이고요. ‘왕 노릇이라는 것은 왕은 아닌데 왕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왕 노릇할 자인가? 왕권을 받을 자인가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었으면을 상징적으로 보면, 끝까지 믿음을 지킨 모든 성도를 가리키지만, 실제로 보면, 사도 바울과 같이 순교한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딤후2:11). 순교자들에게 하나님은 왕 노릇하는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순교자에게 왕권이라는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급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일생을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간 성도들과 주를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들이 천국에서 상급이 같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에게는 왕 노릇의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순교자에 대하여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20:14). 여기서 짐승은 마지막 때 등장할 적그리스도를 일컫는데요. 이 말씀은 장차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인 지금 교회 시대 순교자와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지배한 이후 종말 시대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순교자들에게는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말씀합니다(20:14).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세우실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는 왕권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20:14). 마지막 심판대인 흰 보좌 심판에서 순교자들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순교라고 할 때,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기거나, 죽음의 위협이 내 앞에 오면, 나는 그 자리를 피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총기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학교에서 벌어져 여러 번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1999 4 20일에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오래전 사건임에도 다른 총기 사건과 다르게 오늘까지 기억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학생 25명과 용의자 2명이 총기 난사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 가운데 살아남은 여학생의 놀라운 증언이 하나 있습니다. 이 학교의 불량 서클인 트렌치코트 마피아 단원이었던 에릭 딜란이 총기를 휴대하고, 학교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고 있을 때, 그곳에는 17살 된 캐시 버넬이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총을 들고 있던 마피아 단원 학생 중 한명이 그녀에게 총구를 목에 겨누고는 물었습니다. “너도 하나님을 믿냐?” 만약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러자 그는 총구를 캐시의 가슴에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캐시의 이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미국의 크리스천 십 대들 사이에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플로리다주의 한 도시에서는 2 5백 명의 십 대들이 모여 감동적인 신앙고백의 집회했습니다. 이 집회의 이름 역시 “Yes, I believe in God"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캐시 바넬은 어린 소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 이름과 하나님 말씀을 증거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교의 자리에 찾아온 것입니다. 이같이 순교는 어느 순간, 어떤 자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찾아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부인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으며, 순교 후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생각할 때,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살아서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베드로도 순교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순교하지 않는 제자도 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마지막을 밧모섬에 유배당하며, 예수님에게 종말에 있을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1:1,9). 그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 소망과 축복의 말을 남기고 편안히 주님이 계신 천국에 안식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았지만, 순교자의 반열에 놓습니다. 그 이유는 일생동안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산다는 신앙을 잃지 않고. 그 또한 의의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2:1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아멘! ‘이제 후로는 죽음 후를 말씀합니다(딤후4:6-8).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즉 사도 바울은 저 영원한 나라에 자신을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순교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인생의 후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더욱이 이 의의 면류관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의로운 면류관을 예비하여 주신 다고 하셨으니, 이보다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라면서, 우리 또한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축복했습니다(딤후4:8). 

 

 

결론

 

사도 바울은 로마 군대 영내와 산헤드린 공회에서, 가이사랴 헤롯 궁 재판정에서, 광풍에 표류하는 배 위에서, 구조된 멜리데 섬에서, 죄인이 입는 자의赭衣를 입고서도, 복음을 증거를 쉬지 않았습니다. “9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2:9-10) 바울의 몸은 감옥에 가둘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자들이 구원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오늘도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는 신앙과 순교자로서 왕 노릇하는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음을 소망하는 자가 받을 의의 면류관 영광입니다. 어느 형편에서든지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매이지 않게 하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과 함께 이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주를 시인하면 주도 우리를 시인할 것이요. 마지막까지 부인하지 않는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로 주를 위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주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자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번째로 왕 노릇의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딤후2:12). 순교자에게 주시는 권세가 왕권자입니다. 예수 이름을 증거하다가 생명을 드리는 순교, 일생 동안 십자가 길을 가는 순교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 설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