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7:1-44 2022.12.04. 主日禮拜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다 1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풍랑으로 배가 깨어지다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행27:1-44)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베스도 총독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고, 부임 인사차 예루살렘에 갔다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다시 돌려 보내어 공회 재판을 받도록 요청하였지만, 실상은 바울이 오는 길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고자 했습니다(행25:1-2.참고/행24:26-27). 베스도는 가이사랴에 올라와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2년 전과 같이 그 어떤 증거도 제출하지 못하였고,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기 전까지, 다시 구금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행25:3-12). 갈릴리 분봉왕 아그랍바는 누나 버니게와 함께 신임 총독 베스도에 문안하러 왔다가, 바울의 일을 직접 듣고자 했고, 가이사에게 상소 자료를 찾던 베스도는 재판을 다시 열었습니다(행25:13-27). 바울은 재판정에서 회심이 이전과 이후 그리고 부름과 사명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자신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께 한 소망을 두고 있으며, 부활을 증언했다고 이유로 고발당했다고 하였습니다(행26:1-23). 이어서 바울은 죄수이지만 위축되지 않고. 재판 석에 앉아 있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26:24-32).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베니게는 복음을 전할 때,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스도 형:오해와 편견의 소유자. 베스도는 유대의 현직 총독입니다. 그가 재판 석에 앉아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행26:23).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네가 미쳤도다’고 하였습니다(행26:24).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돌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해와 편견이 많이 쌓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이나 믿는 것이다”라고 비웃습니다. 물의를 일으키는 교인은 소수인데, 모든 성도를 똑같은 부류로 판단합니다. 아그립바 형: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사람. 재판에서 ‘주심’主審으로 유대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행26:3). 바울은 그에게 매우 진지하게 ‘선지자를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고 하자, ‘적은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 만들려고 한다며 불쾌해했습니다(행26:27-28).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만, 가까이 접근을 하면, 그만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 뒤로 빼는 사람들입니다. 아픔을 듣고 위로해 준 후, “주일예배에 오세요”라고 하면, “교회는 환경이 좋게 열리면 가려고요. 생각해 보게요”라면서, 뒤끝을 흐리고, 전도자의 힘을 빼놓는 이이 있습니다. 버니게 형:무반응과 냉소주의. 두 번 결혼해서 남편이 죽자, 친동생 아그립바에게 와서 얹혀살고 있는데. 두 사람에게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았습니다. 나중에는 또 한 번 결혼하였으나, 그를 버리고 아그립바와 다시 동거하다가, 로마 황제의 아들을 유혹 정부가 되어 황후가 되고자 했던 여자입니다. 젊고, 건강하고, 자신만만한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자” 복음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전도자를 불쌍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생길수록,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집니다. 주변에서 적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을 구별하여 적합하게 전할 수는 있으나, 차별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들의 어두운 영적 눈을 뜨게 하고, 사탄의 결박에서 자유를 얻게 하고, 천국을 기업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26:18). 그것이 전도입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바울의 선포에서 복음 증거자의 무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3,15). “나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구원의 감격이 바울의 심정을 뜨겁게 만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그래도 좀 낫다”는 우월감과 자기의와 교만함을 버리고, 바울 같이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구원의 감격이 밀려오고, 복음을 전할 때, 그 기쁨을 상대방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자존심.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총독, 왕, 왕비와 죄수 바울을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말에는 도리어 나를 본받으라는 자신감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참고/고전4:6,9:4-12;빌3:17;살후3:9).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런 긍지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당당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긍지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직업이 어떠하던, 누구 앞에서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세요. 저는 기쁘답니다. 감사해요. 예수님이 전부랍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긍지가 넘칩니까? 이런 자부심으로 속 사람을 무장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연민의 마음. 겉으로는 바울이 훨씬 더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보았습니다. 그들의 영혼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히9:27). 바울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당할 그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 즉 심판받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겔18:23).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저들이 나중에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느끼는 연민의 정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을 무장할 때, 누구를 만나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당신들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사11:9;합2:14).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다
베스도 총독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 받고, 부임 인사차 예루살렘에 갔다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다시 돌려 보내어 공회 재판을 받도록 요청했지만, 실상은 바울이 오는 길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고자 했습니다(행25:1-2.참고/행24:26-27). 베스도는 가이사랴에 올라와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2년 전과 같이 그 어떤 증거도 제출하지 못하였고,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기 전까지, 다시 구금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행25:3-12). 갈릴리 분봉왕 아그랍바는 누나 버니게와 함께 베스도에 문안하러 왔다가, 바울의 일을 직접 듣고자 했고, 가이사에게 상소 자료를 찾던 베스도는 재판을 다시 열었습니다(행25:1-27). 바울은 변론에서 죄수이지만 재판 석에 앉아 있은 자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행26:24-32).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자들은 전도할 때,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베스도 형 오해와 편견의 소유자, 아그립바 형 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사람, 버니게 형 무반응과 냉소주의입니다(행26:23-28). 중요한 것은 바울처럼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두운 영적 눈을 뜨고,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고, 하늘의 기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행26:18). 바울이 총독, 왕, 왕비에게 ‘당신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노라’(행26:29).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나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구원의 감격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참고/딤전1:13,15). 세상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예수로 가득찬, 자신감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참고/고전4:6,9:4-12;빌3:17;살후3:9). 영화와 권세와 사치를 가진 그들의 최후가 영멸이라는 연민의 마음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참고/겔18:23;히9:27). 마지막 시대 우리는 이 세 가지로 무장한 전도자가 되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하도록 해야 합니다(사11:합2:14).
바울과 동행한 사람
로마 시민권자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에 따라, 이제 로마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된 날,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동승하게 하고,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을 이송 책임자로 ‘맡기’었습니다(1). ‘아구스도’Augustus는 로마 황제 호칭 가운데 하나이며, 아구스도 ‘대’Band, The Imperial Regiment는 ‘황제의 군대’ 곧 로마 황제의 직속 부대인 ‘근위대’近衛隊를 말합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만큼 로마 황제의 직속의 부대 백부장이 호송을 맡은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는 약 2,200km로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가이사랴 항구에서 ‘아드라뭇데노’Adramyttium ‘배’에 승선하게 되는데요.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2). 이 배는 가까운 거리의 해협을 횡단하면서, 양쪽 육상 교통을 이어 주는 연락선으로 국내선입니다.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는 배라는 것은, 오늘날 터키 주변에 있는 여러 항구들을 다니는 배라는 뜻입니다. 아드라뭇데노는 배 이름이 아니라 도시의 이름입니다. 터키 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 아드라뭇데노에서 출발하여 가이사랴까지 갔다가, 다시 아드라뭇데노로 돌아가는 배입니다. ‘아드라뭇데노 배에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고 하였습니다(2). ‘아리스다고’Aristarchus,“최고의 통치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게도냐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3차 전도 여행에 동행했고, 특히 에베소의 아데미 숭배자인 데메드리오가 소란을 일으킬 때, 바울과 함께 다녔다는 이유로 가이오와 함께 연행되어 연극장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행19:29,20:4,;골4:10;몬1:24). 그러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바울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 길을 가는 바울의 수발을 돕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라고 하였습니다(1-2). 바울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죄수로 이송되고, 로마에 당도하기까지, ‘우리’라고 기록된 바울과 동행한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그가 누가라고 하는데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누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신이 바울과 동행했음을, 저자의 입장에서, ‘우리’로 칭한 것입니다. 이곳 외에도 사도행전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행16:10-17,20:5-21,21:1-18,27:1-28:16). 바울이 좋았을 때만이 아니라, 예수를 증거한 이유로, 죄수 된 자리까지, 누가는 변함없이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AD 49-52년 5,600여㎞를 순회하며, 복음을 증거한 2차 전도 여행부터 함께 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처음으로 유럽빌립보에서 전도가 시작되었는데요.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유창한 헬라어와 의사로서 바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행20:5-6;골4:14).
누가도 바울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누가가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의사로서, 아픈 이들을 진료하고, 처방하는 일을 삶 전부로 알고, 인생을 마감하였을 것입니다(참고/눅2:10,4:18-19,14:21 ).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병든 자를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구원을 받아야 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그 비전을 마음껏 펼친 것이 바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인생의 비전을 바뀌게 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구금 중에 ‘가장 고상’한 ‘예수’를 알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씀을 기록할 때도 함께 했습니다(빌3:8). 누가도 바울 통해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린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최고의 교육과 수준 높은 실력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데,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누가는 바울이 순교 후에도, 15여 년 간 복음을 증거 할 때, 가는 곳곳마다 성도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대에는, 바울이 생전에 많은 교회에 편지를 통해 누가의 헌신과 사랑을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딤후4:11;골4:14;몬1:24).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의 보증이, 누가에게는 사역에서 큼 힘이 되었을 리는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바울과 누가 같이 강력한 시너지Synergy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는 길까지 함께한 ‘우리’로 기록된 누가, 이 바울과 누가의 동행을 보면서, 우리 교회 공동체의 동행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인생의 비전을 바뀌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재능을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강력한 시너지를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를 ‘이튿날 (오늘날 레바논의)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했다고 하였습니다(3). ‘시돈’은 가이사랴에서 약 112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이곳에 있는 친구들의 접대를 허용하였습니다. ‘시돈’은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극심한 것을 피하여,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곳에 이른 성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세워졌던 것으로 보입니다(행11:19).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이송되는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들을 방문하여 교제하며 권면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리오의 친절도 간과할 수 없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죄수임에도 의사 누가와 수발자 아리스다고의 도움을 받는 바울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서로를 귀히 여기는 성도의 동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높일 때, 다른 이들도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을 무시하다
시돈에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오늘날 터키)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게 됩니다(4-5). 이 항해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바울을 이송하는 배가 출항을 할 당시는 아마도 여름 끝자락이거나 초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항해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지중해 상의 그레데 섬 남쪽 ‘미항’에 이르게 되는데,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라는 논란이 이었기 때문입니다(8,12). 그래서 폭풍이 잦은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항해를 계속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라에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6). 로마로 가기 위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배로 환승을 한 것인데요. 가이사랴에서 무라까지 온 아드라뭇데노 소속의 배와 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의 배가 국내선으로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승객은 물론 짐도 많이 실을 수 없는 배였다면, 알렉산드리아 배는 규모가 큰 하물선으로 국제선입니다. 특히 이 배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을 출발하여, 로마로 가는 곡물을 운반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식량의 많은 부분을 애굽에서 수입했습니다. 그래서 무라 시에서 약 5.6km 떨어진 인근의 안드리아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곳은 당시 로마 제국의 곡물 저장과 수송을 위한 중요 항구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배라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동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풍력과 조수를 이용하여 항해해야 했습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었는데요. 다시 가이사랴로 돌아간다면 바람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겠지만,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바람을 안고 항해를 해야 했기에 더디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7). 니도는 애굽에서 출발한 상선들이 빈번히 들리는 오늘날 터키 트리오피움의 카리아 곶串,Cape에 있는 항구로, 이곳에 정박하여 순풍이 불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항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풍세가 허락하지 아니’한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배의 소유주가 겨울이 오기 전에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로마 쪽으로 가려는 마음이 앞섰는지, 이들은 이곳 니도에 들리지 않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7). 지중해에 있는 그레데 섬의 동쪽 끝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였고,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그레데 섬에 있는)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그곳은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고 하였습니다(7-8). ‘미항’Fair Havens,美港은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항구입니다. 그리고 미항 부근에는 ‘라새아’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고 하였는데요(9). ‘금식하는 절기’란 9월 또는 10월 초순에 있었기에 당시 AD 59년 태양력에 따르면 10월 5일 경으로 보고 있기에, 이 시기라면 항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중해 지역은 9월 중순 부터 11월 중순까지는 항해가 어려운 시기이고, 11월이 지나면 이제 겨울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아예 항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로 향하는 선박의 선주는 마음이 급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곧 겨울이 다가오면 항해를 더 지속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정박하고 있는 ‘미항’Fair Havens,美港은 작은 섬들이 있어 계절풍에서 배들을 보호해 주기는 하지만, 심한 바람 때문에 겨울철에 정박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겨울도 지낼 수 있고, 또한 북서풍을 잘 피할 수 있는 ‘뵈닉스’로 떠나고자 하였습니다(12). 그러나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며, 미항에 머물러 겨울을 보내자고 하였습니다(9-10). 그러나 율리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는지라, 미항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였습니다(11-13). 이렇게 순조롭게 남풍까지 불어오니,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항해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누구만 반대를 했어요. 바울입니다. 바울이 반대를 한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예! 맞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을 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보다, 항해 경험이 풍부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
그러나 바울의 권면을 받지 않고 출항한 뒤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라라는 광퐁이 크게 일어’났습니다(14). ‘유라굴로’Euraquilo는 그레데 섬의 이다 산맥에서 발생한 북동풍이 난기류를 만나 형성된 강력한 돌풍을 말합니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15). 모든 것을 체념하고, 떠밀려 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갈 때에 어느 정도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서, ‘간신히 (구명뗏목인) 거루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16). 선원들은 거룻배를 갑판 위에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풍랑에 따라 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17). 모래톱은 바다의 주변 바닥보다, 수심이 얕은 볼록한 부분으로서, 단단하지 않은 모래나 진흙 등이 쌓인 곳을 일컫습니다. 이곳에 빠지면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파선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돛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버티어보려고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였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를 (자기네들) 손으로 내버’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18-19).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 ‘여러 날 동안’이었다고 하였습니다(20). 아마 일주일은 그렇게 보내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배에 올랐던 사람들의 심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20).
바울의 선포
그런데 이 순간 바울이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섰습니다. 그의 신분은 죄수였습니다. 지난 2년 여 동안 감옥에서 구금당했던, 그의 외모와 풍채가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히 선포합니다.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1-22). 바울은 일주일전,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항해를 강행한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자기 말을 안 들었기에 이런 일을 당했다고 책망을 하기보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희망을 전해줍니다.
바울의 말을 이어서 계속 보겠습니다.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3-24). 바울은 지금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전한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즉 천사가 전해 준 말이라고 하였습니다(23). 즉 자신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살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바울이 가이사, 로마 황제죠.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가야 하겠기에 지금 광풍 속에서도 이 배가 안전하게 지켜지리라는 것입니다(24).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위해 지키신 것입니다. 그 목적에 함께 승선했던 사람들도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가 그 뜻입니다(24).
바울의 계속된 말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25-26). 바울은 사람들에게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25). 바울의 이러한 확신에는 일주일 전에도 하나님께서 행해를 계속하면, 위험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기에,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항해를 강행하면 어려움은 겪게 될지 모르나, 지켜주실 것 또한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26) 하나님이 한 섬으로 인도하여,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27-44)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믿게 되었고, 바울의 명에 따라, 음식을 만들고,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를 하였고요,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후, 다른 밀 식량은 바다에 모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항구에 도착 항구 부근에 배를 고정시킨 후, 어떤 이는 헤엄을 치고, 어떤 이들은 널조각과 배 물건을 붙들고, 멜리데라라는 섬에서 구조됩니다(44). 승선인 이백 칠십육 명 중 한 명도 생명의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37). 광풍을 만난 후, 열 나흘만입니다(27). 누구의 말대로 된 것에요. 바울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
로마로 죄수들을 이송하는 책임자인 백부장은 항해 중단을 말한 바울의 말을 들었어요. 강행을 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어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11).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은 것에 대해 성경은 ‘더 믿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믿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말을 믿고 계세요.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더 믿고’계세요. ‘더 믿더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적용할 때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겠지요. 그런데 그 목사의 말을 믿는 것보다 ‘더 믿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어떤 면에서 보면 목사가 돈 버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현실에서 당장 필요한 것을 공급할 방법을 목사가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백부장은 어떻게 하던 목적이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그 로마로 항해를 잘 아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지금 로마로 가야 한다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은 바닷길을 수없이 오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또 바다의 일기와 파도의 고도를 경험적으로 잘 아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를 수밖에요. 거기와 비교하면 바울은 이송되는 죄수에 불과합니다. 항해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지요. 선장과 선주의 항해 지식과 기상에 대한 경험 그 모든 것을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한순간에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광풍 유라굴로도 누구의 주권하에 있어요. 성경에는 ‘바람을 붙잡은 천사’, ‘물을 차지한 천사’, ‘불을 다스리는 천사’(계7:1,16:5,14:18)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전쟁과 홍수 태풍과 대형 산불 등을 시행합니다. 유라굴라 광풍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입니다. 이 광풍 앞에 선장과 선주의 행해 지식과 기상 경험은 아무런 대책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항해의 지식과 기상의 경험은 아주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 있으면, 천사를 통해, 바다를 하나님이 어떻게 주관하실지 알았습니다. 목사는 성도 여러분의 물질 등 어려운 현실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성도 여러분 가정과 기업에 임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 가운데 될 수 없는 일도 되게 하시고, 막힌 것도 풀어주시고, 돌아가는 길을 바로 가게 하시고, 거역하는 자의 것을 순종하는 자의 것으로도 되게 하시며, 두 배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을 백배의 이윤을 얻는 시장으로도 만들 수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들을 말을 듣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수인가 소수인가
두 번째는 다수인가 소수인가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만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 있는 곳은 추운 곳임으로 겨울을 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듯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그렇게 결정을 하자, 항해하기 좋은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바울만이 반대하였습니다. 어떤 단체든 사람이 모이면 조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조직에서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다수의 의견을 따른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민주사회에서는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의견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들도 한 조직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방향으로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의견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수가 우선임으로 소수의 의견은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건의를 중시해서 다수의 찬성을 무위로 돌려서도 안 됩니다. 다수가 되었건 소수가 되었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수를 따르느냐, 소수를 따르느냐, 그런 민주적 절차를 논하기에 앞서, 교회에서는 다수이든 소수이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 전체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주하고 여력이 없더라도 시간을 내고, 정성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다수, 소수 이런 것을 따지기 전에 기도한 데로 응답되는 역사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가 항해하자고 결정을 했을 때, 마침 항해하기 좋은 남풍도 순하게 분 것과 같이 잠시 순조로울 수는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으로 결정을 하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 하면, 순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뒤,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버리고, 사흘이 지난 뒤 ‘배의 기구’까지 버려야 했던 것 같이, 어려움이 더하고 더하는 겹겹이 쌓인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 드립니다. 다수가 어떻고, 소수는 어떻게 하고, 그 모든 것을 떠나,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쁘고, 피곤한 삶에서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우리가 모두 함께 승선한 공동체이기에 교회를 위한 기도는 나의 가정과 기업 위에도, 아름답고, 거룩하며, 역사하는 힘이 큰 응답으로 임할 줄 믿습니다.
책망 속에서 희망을 들으라
세 번째는 책망 속에서 희망을 들으라 입니다. 바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섰습니다. 지난 2년간의 구금되었었고, 지금도 죄수의 신분이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일주일 전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항해를 감행한 것에 대하여,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책망을 먼저 했습니다(21). 그리고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희망을 전했습니다(22). 바울은 책망과 희망 두 가지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희망보다 책망을 먼저 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알리기 위해 책망이 먼저 기록된 말씀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곳으로 오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매섭게 호통을 쳤습니다(마3:7). 그리고 이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 ‘내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마3:11). 이러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끝까지 듣고, 믿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앞에 한 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또 책망의 소리는 크게 들리고, 구원의 소리는 작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냐면 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3:1-2). 마지막 때 고통당하는 여러 원인 가운데 가장 첫 번째를 ‘자기를 사랑하며’를 들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 자기의, 자기만 아는 것인데요. 여러 가지로 그 의미들을 유추할 수 있겠는데요. 그 중 하나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은 진리인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내가 듣고 싶은 말인가 아닌가가 먼저입니다. 나에게 좋은 말이면 좋은 것이고, 나에게 거슬리는 것이면 싫은 것입니다. 저는 목양적으로도 이러한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책망을 먼저 말해야 할 때는 책망을 먼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책망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살릴 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자를 만나냐 한다는 희망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내 말을 듣지 않았다고, 책망을 먼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하고자하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8: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생각으로 내가 좋은 말을 듣기 만을 원하고, 진리라고 하여도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않으려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생각으로 듣고 싶지 않아도, 진리이면 듣고, 생명을 얻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채찍으로 들려올 때도, 그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돌아서서, 이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아멘' 하면 반드시 주시고자, 하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에 확신을 가지라
네 번째는 말씀에 확신을 가지라입니다. 바울을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자, 천사의 말로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일주일 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항해를 강행하면,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를 지나, 반드시 한 섬에 걸려, 한 사람도 생명에 상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확신 있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요. 이 확신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새겨 보아야 합니다. 내가 응답 받은 것은 분명한데요.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도 나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가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분명한데도 괜히 그 상황에서 말했다가,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은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에 손상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포한 후, 즉시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어려움에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무려 ‘열 나흘째 되는 날‘까지 망망대해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27). 아니 “하나님의 응답입니다”라고 선포를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으시니 곧바로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 진 것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파도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시방석과 같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의 보름 동안이요. 말은 해 놓았는데, 실현되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 지경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하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이것이 확신입니다. 확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믿고 선포했으면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요. 인내의 기간 동안 허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신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제는 응답되었다고 간증했다가, 오늘은 달라지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그러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느 순간에도, 확신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가를 측량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의 측량이 다 채워지은 교회공동체, 우리의 기도제목, 그리고 가정과 기업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다섯 번째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입니다(24).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입니다(24).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죄수의 신분으로라도 로마에 가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마지막 사역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냉철하게 오늘 본문을 보면,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을 살리셔야 했고요. 그 하나님 역사에 다른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있었기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 모두는 깨닫는 은혜가 있을 줄 압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른 사명자가 있으면, 그가 속한 교회와 가정의 성도와 가족은 모두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나중에 이러한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당연히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 한 사람의 사명자는 곧 다른 사람들이 살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사명자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분명한 사명자가 있다면, 다른 성도들이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이 사명자가 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에 분명한 사명자가 있다면, 그 가족 전체가 사명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명자로 교회와 가정에서 부름 받을 줄 믿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4).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는 사람의 안전을 다 바울에게 맡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재현목사와 함께 항해하는 성도님들의 안전을 다 이재현목사에게 주셨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사명자가 목사 뿐입니까? 우리는 모두 “세상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이 청아비전교회를 보았을 때, 이재현목사 뿐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를 보았을 때도, 여러분을 보고 다른 성도들의 안전을 여러분에게 맡길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정리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다
바울과 동행한 사람. 로마 시민권자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함에 따라, 이제 로마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로마 황제의 근위대 백부장 율리오를 책임자로 세우고, 바울을 로마까지 이송하도록 하였습니다(1).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출항을 했는데, 아리스다고가 바울의 수발을 돕고자 함께 승선을 했습니다(2). 또한 ‘우리’로 기록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죄수로 이송되고, 로마에 당도하기까지, 동행하였습니다(1,2.참고/행16:10-17,20:5-21,21:1-18,27:1-28:16). 누가는 유창한 헬라어와 의사로서 바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행20:5-6;골4:14).
누가도 바울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누가가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의사로서, 아픈 이들을 진료하고, 처방하는 일을 삶 전부로 알고, 인생을 마감하였을 것입니다(참고/눅2:10,4:18-19,14:21 ).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병든 자를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구원을 받아야 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그 비전을 마음껏 펼친 것이 바울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인생의 비전을 바뀌게 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로마 감옥 구금 중 ‘가장 고상’한 ‘예수’를 알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씀을 기록할 때도 함께 했습니다(빌3:8). 누가도 바울 통해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린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최고의 교육과 수준 높은 실력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데,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누가는 바울이 순교 후에도, 15여 년 간 복음을 증거 할 때, 가는 곳곳마다 성도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대에는, 바울이 생전에 많은 교회에 편지를 통해 누가의 헌신과 사랑을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딤후4:11;골4:14;몬1:24). 바울과 같이 위대한 사도의 보증이, 누가에게는 사역에서 큼 힘이 되었을 리는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바울과 누가 같이 강력한 시너지Synergy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는 길까지 함께한 ‘우리’로 기록된 누가, 바울과 누가의 동행을 보면서, 우리 교회 공동체의 동행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인생의 비전을 바뀌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재능을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은 강력한 시너지를 갖게 됩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를 ‘이튿날 시돈에 대니’ 백부장 ‘율리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곳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고, 접대 받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3). 아마도 바울이 죄수임에도 의사 누가와 수발자 아리스다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서로를 귀히 여기는 성도의 동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높일 때, 다른 이들도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을 무시하다. 이스라엘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호號를 타고, 항해를 시작하여, 오늘날 레바논 지역인 시돈 항구를 들리고, 터키의 무라 항구에서, 이탈리아 로마로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환승을 합니다(3-6). 그런데 배가 제대로 항해를 하지 못해, 여러 날이 걸렸음에도, 얼마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7). 더욱이 역풍까지 불어 고전을 하게 됩니다. 지중해의 섬인 그레데 해안을 바람 박이로 간신히 연안을 지나, ‘미항’Fair Havens으로 불리는 항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8). 그 후 많은 시일 지났지만, 행해하기에는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9). 이 때 바울이 지금 항해를 시작하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며, 항해 중단을 승선한 사람들에게 권면을 합니다(10). 당시나 오늘 이나 사람들이 목사의 말을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듣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죄수들 이송 책임자인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11). 시기 적으로는 겨울이었는데요. 지금 배가 정박해 있는 곳은 추운 곳임으로 따듯한 뵈닉스 항구로 가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11). 그렇게 결정을 하지 마침 항해하기에 ‘좋은 남풍이 순하게 불매’ 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항해를 다시 시작합니다(12). 누구만 반대를 했어요. 바울입니다. 바울이 반대를 한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을 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보다, 항해 경험이 풍부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알렉산드리아’ 호는 출항과 함께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유라굴로’Euraquilo,Northeaster라는 광풍을 맞게 됩니다(14). 배는 폭풍에 휘말렸고, 모두가 체념한 체, 바람에 내 맡기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은 임시방편으로 구명뗏목인 거룻배를 갑판 위에다가 끌어올리고, 밧줄로 선체를 동여 매, 배가 요동하지 않도록 애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배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에 가까웠습니다. 모래톱은 바다의 주변 바닥보다, 수심이 얕은 볼록한 부분으로서, 단단하지 않은 모래나 진흙 등이 쌓인 곳을 일컫습니다. 이곳에 빠지면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파선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돛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버티어보려고 심히 애썼지만, 하루가 지난 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마저 버려야 했습니다(15-19).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 ‘여러 날 동안’이었다고 하였습니다(20). 아마 일주일은 그렇게 보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배에 올랐던 사람들의 심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20).
바울의 선포
그런데 이 순간 바울이 의연한 모습으로 일어섰습니다. 그의 신분은 죄수였습니다. 지난 2년 여 동안 감옥에서 구금당했던, 그의 외모와 풍채가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히 선포합니다. 바울은 지금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전한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즉 천사가 전해 준 말이라고 하였습니다(21-22). 자신이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살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바울이 가이사, 로마 황제죠.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가야 하겠기에 지금 광풍 속에서도, 이 배가 안전하게 지켜지리라는 것입니다(23-24).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가 그 뜻입니다(24). 바울의 이러한 확신에는 일주일 전에도 하나님께서 항해를 계속하면, 위험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기에,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항해를 강행하면 어려움은 겪게 될지 모르나, 지켜주실 것 또한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나님이 한 섬으로 인도하여,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5-26).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믿게 되었고, 바울의 명에 따라, 음식을 만들고,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를 하였고요, 배에 있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후, 다른 밀 식량은 바다에 모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27-38). 그리고 한 항만에 도착 항구 부근에 배를 고정시킨 후, 어떤 이는 헤엄을 치고, 어떤 이들은 널조각과 배 물건을 붙들고, 멜리데라라는 섬에서 구조됩니다(39-44). 승선인 이백 칠십육 명 중 한 명도 생명의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37). 광풍을 만난 후, 열 나흘만입니다(27). 누구의 말대로 된 것에요. 바울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닷길을 수없이 왕래한 선장과 선주의 행해 지식과 경험을 들을 것인가? 그 바다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인가? 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말씀 들을 것을 듣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당장의 현실 문제의 답을 알려 줄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돈 버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 현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 가운데, 될 수 없는 일도 되게 하시고, 막힌 것도 풀어주시고, 돌아가는 길을 바로 가게 하시고, 거역하는 자의 것을 순종하는 성도의 것으로도 되게 하시며, 두 배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을 백배의 이윤을 얻는 시장으로도 만들 수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들을 말을 듣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다수인가 소수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민주적 절차이니 말하기 전, 다수가 되었던, 소수가 되었던, 기도하는 모든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쁘고 피곤한 삶에서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교회는 우리가 모두 함께 승선한 공동체이기에 교회를 위한 기도는 나의 가정과 기업 위에도, 아름답고, 거룩하며, 역사하는 힘이 큰 응답으로 임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책망 속에서 희망을 들으라 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구조가 어떤 상황에서는 매서운 회초리와 같은 책망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고, 바로 돌아서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책망은 곧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구원자를 만나게 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자기가 듣고 싶지 않다고, 돌아서는 자가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듣고 아멘 하면, 반드시 생명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는 말씀의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후에도 보름 가까이나 여전히 망망대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응답을 믿으면 확신해야 합니다. 확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믿고 선포했으면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요. 인내의 기간 동안 허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신 분이기에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로 겸비될 때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가 바른 사명자일 때, 교회와 가정의 성도와 가족이 사는 것이며, 함께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에서 주체의 ‘나’를 나라는 인격체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0). 오늘도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항해하는 사명자가 될 때, 하나님은 교회와 가정의 성도와 가족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기는 사명자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선주의 항해 경험을 들을 것인가? 바다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들을 말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다수인가 소수인가 갑론을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수가 되었건 소수가 되었건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특히 공동체에 승선한 모든 성도들의 보호를 위해, 교회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하게 하옵소서.
책망 속에서 희망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책망에 돌아서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의 생각으로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듣게 하옵소서. 복을 받게 하옵소서.
말씀의 학신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씀 선포 후 보름이 지나도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확신했습니다. 인내의 기간 확신하게 하옵소서.
이처럼 겸비될 때,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항해자가 되어, 나와 함께 모든 이들도 보호받고,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 사명자가 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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