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 강해 23 이재현목사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행 25:1-26:32)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2. 11. 27. 15:38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사도행전 25:1-26:32 2022.11.27. 主日禮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다25:1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 서다13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바울이 변명하다( 9:1-19; 22:6-16) 26: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이 전도하다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다 30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25:1-26:32)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변호사 더둘로를 대동하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 와서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소송하였습니다(24:1-21). 양측의 고발과 변명을 들은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함을 알았지만, 유대 지역의 통치자로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에 재판을 미루었습니다(23:26-30,24:22,27). ‘수일 후에 벨릭스가 아내 드루실라와 (구금된) 바울을 불러 예수 믿는 도를 들었습니다(24:24). ‘바울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습니다(24:25). 첫 번째 가르침은 ”Righteousness,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 주신  율법”Law,律法입니다(7:12). 그러나 세상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3:19-20.참고/3:10). 모두가 죄인으로 심판받아야 하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율법에 나무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3:10,13). 그러므로 이제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3:9.참고/21:23,27:26;2:4;5:17;3:17,21,-22,5:1;2:16,3:11;요일3:5).

 

두 번째 가르침은 절제”Self-Control,節制입니다(24:25).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와 같이 응당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쓰지 않은 것은,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하기 위해, 한 영혼의 전도와 인도와 정착에 쓰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고전9:4-12.참고/8:36;20:17,28-3

1,33-34). 바울은 최대 15,000km에 달하는 전도 여행 동안 “2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고후11:23-27). 그런데도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지 아니하며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았냐고 하였습니다(고후11:28-29). 모진 박해에도 자신을 돌본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세 번째 가르침은 심판”Judgment,審判입니다(24:25). 악인은 득세하고 의인은 고통받는가? 인간들의 죄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판 때까지 쌓이는 것입니다(참고/6:5;22:31;1:28,2:5;벧후3:9;18:5). 악인의 죄는 하나님이 정한 죄에까지 차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정하신 순교자의 피, 헌신, 희생이 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재림 주께서 의인을 보응하고 악인을 심판하십니다(6:10-11,17,18:18,24,19:11-21). 지금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참고/3:18;고후5:10;살후2:12;9:27). 바울의 강론을 듣고, 벨릭스 총독과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24:25). 그러나 진리를 알게 된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는 석방해줄 수 있는 것을 은연중 비치며, 금품을 바라고, 또한 자리를 보존 받기 위해 고발자인 유대인들 환심을 사야 하기에, 바울의 송사를 2년 동안 미루며 가두었습니다(24:26-27).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과 같이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져보고, 누릴 것 다 누려 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본, 사람들도, 믿지 못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2:11;13:23;벧후1:11.참고/1:21,10:28;3:22;3:20;3:7). 추수감사주일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유대 총독 벨릭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고발했지만 어떤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24:22,27.참고/23:26-30). 그는 바울로부터 직접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갖기도 하였습니다(24:25).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고, 또 다른 편으로는 바울에게 뇌물을 바라는 간계한 마음을 갖고, 재판을 미루다가 2년이 지났고, ‘보르기오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소임을 이어받게 됩니다(24:26-27). ‘베스도 총독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부임 인사를 하고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25:1-2). 

 

이후의 말씀을 보면, 베스도도 전임자 벨릭스 손에서 지지부진했던 바울의 송사 사건을 속히 처리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지도자들은 베스도() 호의(를 베풀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함이었다고 했습니다(25:3). 2년 전 예루살렘 로마 군대 주둔지 요새에 있던 바울을 공회로 다시 오도록 천부장에게 요청하여, 오는 길에 숨어 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동맹한 자 사십여 명이 있었지 않습니까?(23:13-15). 그들은 2년이 지났는데도, 바울을 제거하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지금 가이사랴 헤롯 궁에 있는 그가 로마로 가게 되면, 다시는 해 할 수 없기에 어떻게 하든지, 예루살렘으로 오게 해야 했습니다. 무서운 살해 계획을 숨긴 채, 신임 베스도에게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부터 들은 소문을 통해, 익히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베스도가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하였습니다(25:4-5). 

 

베스도가 (예루살렘에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25:6). 바울이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25:7). 2년 전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이전 총독 벨릭스 주재 재판정에서, 바울의 그 어떤 죄도 유대인들은 밝히지를 못한바 있습니다(참고/23:1-9,24:5-9,19-21). 지금도 당시와 같이 율법에 관해서도, 성전에 관해서도, 로마 황제 가이사에 관해서도, 위법한 어떤 사실관계나 증거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 전임자인 벨렉스와 마찬가지로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더러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고 하였습니다(25:9). 앞서 예루살렘에 내려갔을 때,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이 요청한 것을 들어주는 형식이라고 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10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25:10-11).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불의를 행하여 죽을죄를 지었다면, 죽기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고발자들의 증언에서 사실을 찾을 수 없다면, 그들에게 내주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나는 로마 시민권자인 만큼,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는 것입니다(25:10-11).

 

재판장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5:12). 베스도 총독도 실인즉 바울의 항소로 한시름을 놓은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의 요구대로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에 보내 공회에 세워보았자, 그들의 율법, 종교적인 문제로 죄의 유무를 판단하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유대인들의 요청을 무시했다가는 지역 통치자로서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한 책임으로 지위도 위태할 수 있었는데, 바울의 항소로 로마로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 서다

 

본문에 갈릴리의 분봉왕 아그립바가 등장하는데요.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나) 버니게가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지내게 됩니다(25:13-14). 베스도는 자신을 찾아온 아그립바를 위한 답례로 일주일 정도 연회를 베풀었을 것이고요. 자신이 부임하여 해결해야 할 여러 현안 중, 전임 총독인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바울의 일() (아그립바) 왕에게 고하게 됩니다(25:14).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25:15-21). 베스도는 내가 부임 인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발하여, 유죄판결을 청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바울은 로마 사람이고, 관례상 피고가 원고를 직접 대면해서, 그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변호할 기회를 얻기 전에는, 그 사람을 넘겨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이사랴에 함께 왔으므로, 나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서, 그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원고들이 일어나서, 바울을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예수라는 어떤 죽은 이에 관한 일인데,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건으로 거기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여, 내가 그를 가이사랴에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25:15-21). 

 

그동안의 송사 과정을 들은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하자, ‘베스도가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였고,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25:22-23).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면서,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고 하였습니다(25:24-27).

 

바울이 변명하다(참고/9:1-19,22:6-16)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로마 황제에게 써 올릴 만한, 상소 자료를 얻고자, 죄목을 알 수 있도록 심문해달라는 위임을 받은,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바울이 손을 들어’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변론을 시작했습니다(26:1-3).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26:4-8). 내가 젊었을 때부터, 살아온 삶을 모든 유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내가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증언하고자 한다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으므로,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열두 지파는 밤 낮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왕이여, 나는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유대 사람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십니까?(26:4-8). 바울은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고, 그들도 내가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로 살아왔다는 것도 인정할 것이라면서, 내가 재판을 받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냐는 것입니다.

 

“9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26:9-11). 사실, 나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 그 일에 찬동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당마다 찾아가서, 여러 번 성도를 형벌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으므로, 심지어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습니다(26:9-11). 자신의 회심 이전 모습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2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26:12-18). 한번은 내가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일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왕이요, 나는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에서부터 해보다 더 눈 부신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때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 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6:12-18).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소명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26:19-23). 그러므로 왕이여, 나는 하늘로부터 받은 환상을 거역하지 않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온 유대 지방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낮은 사람에게나, 높은 사람에게나, 이렇게 서서 증언하고 있는데, 예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리라고 한 것밖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살아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26:19-23). 바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 온 유대와 이방인들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다가, 고발당했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라고 예언한 것을 말한 것으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을 빛을 선포하실 분이라는 것을 전하리라는 것을 증언했다는, 바울의 사명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기를 마치자, 총독 베스도가 (갑자기) 크게 소리 내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26:24). ‘바울이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면서,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26:25-26). 바울에 대한 재판은 온 유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고 하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26:27-28). 이에 바울이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26:29). 바울의 말을 듣고는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났습니다(26:30). 아마도 어디서 죄인 주제에 감히 가리키려 드느냐면서, 화가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러가(서는) 서로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면서,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라고, 바울의 무죄함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26:31-32).

 

 

전도대상자의 유형

 

우리는 바울이 재판정에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섰지만, 자기 앞 재판 석에 앉아 있은 자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그리고 베니게 이 세 사람을 보면,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 흔히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적을 바로 알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듯이, 복음을 효력 있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전도의 대상자들이 어떤 부류인가를 어느 정도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세 사람은 우리에게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베스도 : 오해와 편견의 소유자

베스도Porcius Festus,AD59-62,“‘기쁨’,‘즐거움’,‘명절’”는 유대의 현직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로마에 충성하는 황제의 대리자이며, 식민지의 정치와 군사, 사법의 모든 통치권을 감독하고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가 재판 석에 앉아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왕들과 재판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될 수 있기를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26:23). 복음의 진수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바울의 이야기를 듣자, 베스도 총독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6:24).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돌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자, 그는 자신의 주위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도 개의치 않고, 바울을 향하여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스도의 행동을 보면서, 그의 성향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대하여 오해가 많이 쌓인 사람들입니다. 편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자를 광신자로 취급하고, “예수는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이나 믿는 것이고, 교회는 나약한 자들이나 가는 곳이며, 게다가 성도란 사람들은 다 이중인격자들이다. 목사는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비웃듯이 말하는 대부분 사람은 자기 나름의 편견과 오해하고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바로 그와 같은 유형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베스도와 같은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해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대적하기도 하고, 우리를 궁지에 몰아붙이면서, 재미있어합니다. 목사와 성도가 개입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련의 사건들을 증거로 들이대며, 교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봇물 터지듯 쏟아 내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 기업, 학원, 단체 등의 대표와 그의 일가 등으로 물의를 빚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모가 밝혀졌을 때, 사실인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이 말을 하면서 이렇게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무 죄도 없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만 가지고도, 당사자들은 물론, 우리도 같은 형제자매로서, 신앙적, 양심적,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죄가 있건 없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선입견을 품고 우리를 거부하고 적대시하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전도하던 중 어떤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예수 자도 나오기 전에, 집주인이 성도인데 전세금을 떼였었는지, 옛날에 자기 어머니가 교회 중진한 데 사기를 당했는지, 올케가 이단 사이비에 빠져 재산 다 탕진하고 가출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 이중성을 아주 격멸해요라고, 일식도 없는 목사에게 치를 부들부들 떨면서, 쏘아붙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배운 사람으로 보였고, 양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수  자만 나오면, 예의고 뭐고 눈초리는 위로 아래로 치켜들었다 깔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톡톡 쏘아 부쳐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어떤 실수를 했을 때, 주변에서 저거 예수쟁이지하면서, 고소해하는 소리를 한두 번은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는 물의를 일으키는 교인은 소수인데, 그 소수의 사람을 보고, 모든 목사와 성도들을 그들과 똑같은 부류로 판단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많은 신실한 목사와 성도들이 있음에도, 몇 사람을 보고서, 교회 전체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종말론 신앙 때문에 집단 가출을 한 사람들, 거짓된 신앙 때문에 가정이 파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그러한 신앙에 빠져있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오해와 편견으로 기독교를 향하여 무장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공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그립바 왕 : 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사람

 

두 번째는 아그립바 왕의 유형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두 살 아래의 사나 아이를 죽이라고 명한 헤롯 대왕Herod the Great,BC73-4의 증손자요. 예수님 열두 제자인 야보고를 참수했던 아그립바 1Herod Agrippa,AD37-44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Herod Agrippa,AD53-100입니다(참고/2:16;12:2-3). 아그랍바는 선친의 영토 일부분인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는 스무 살 내외의 아주 젊은 왕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재판에서 주심’主審입니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그는 유대 나라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대 사회의 모든 물정과 종교에 밝은 사람입니다(26:3). 유대교의 율법이나 전통에 대해서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에서부터 가이사랴는 물론 유대 전 지역에 일어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종교적 논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어려운 사건이 생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랍바 왕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6:27).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듣던 왕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6:28). 다르게 해석하면 네가 몇 마디 말 가지고 예수 믿게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적은 말로 짧은 시간과 동일한 뜻입니다. 즉 아그립바 왕은 바울을 향하여 가소롭다는 듯이, “네가 짧은 시간에 날 예수 믿게 만들려고 설득하느냐?”라며, 조소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어 보이고, 믿을 것 같아서, 가까이 접근을 하면, 그만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 뒤로 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아그립바 왕의 유형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하면서, 고개도 끄덕여주고, “믿으면 좋은 일이죠라고 수긍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말씀을 더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 하십시오라면서, 기분 좋게 한참 동안 들어줍니다. 이제 전도하는 사람이 신이 나서, “, 오늘 좋은 한 분이 예수 믿게 되겠구나라고 기대를 잔뜩 하며, 속으로 열심히 기도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전했는데, 맨 마지막에 가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너무 날 설득하려 들지 마세요. 좋다는 것은 저도 더 잘 알고 있어요.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이 정도로 해 둡시다. 때가 되면 믿을 기회가 있겠죠 하면서,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두어 시간이나 하면서, 끝까지 잘 경청하고, 정작 주일예배에 오세요라고 하면, “저도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교회는 환경이 좋게 열리면 가려고 해요. 생각해 보게요라면서, 뒤끝을 흐리고, 전도자의 힘을 빼놓는 분들도 있지요. 이런 사람이 아그립바 형의 사람들입니다.

 

버니게 : 무반응과 냉소주의

 

세 번째로 버니게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니게Bernice,‘승리자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맏딸로, 아그립바 왕이 남동생이고, 베스도 이전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입니다(24:24). 버니게는 처음엔 알렉산더의 아들 마르쿠스’Marcus와 결혼하였다가 그가 죽자, 숙부 칼키스’Chalcis와 결혼했고 그가 사망하자, 본문에 재판정 주심으로 앉아 있는 친동생 아그립바에게 와서 얹혀살고 있는데, 자기가 마치 왕비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는 이 오누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근친상간한다는 나쁜 소문을 면하기 위해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결혼하였으나, 그를 버리고 다시 동생 아그립바 왕과 동거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격상 어떤 결함이나 고약한 기질이 있어서인지, 여러 번 결혼하였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훗날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AD.69-79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AD.79-81 부자를 유혹하여, 정부가 되어 로마의 황후가 되고자 했던 대단한 여자이었습니다(Josephus).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미모에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에 물든 그녀의 귀에는 한낱 죄수에 지나지 않는 바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신이 다른 곳에 있는데 바울이 전하는 선지자나 예수나 십자가란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저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한 번씩 바울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내려다보면서 어쩌다 저 꼴이 됐을까?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되었지? 정말 한심한 인간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청춘에 깨가 쏟아지듯이 재미있게 살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만하여,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귀에는, “예수 믿고 천국 가자라는 말이 들어오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듣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의 머리는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그의 마음은 비어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불쌍하다.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됐을까? 허우대는 멀쩡한데 왜 저런 짓을 할까?”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인 사람들보다 전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전혀 반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관심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즐길 것이 많아질수록,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생길수록,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우리는 적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복음 들어야 할 자들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우리가 전도할 때,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편견과 오해 때문에 도전적으로 나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말의 관심은 가지면서도 나중에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아니면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 모든 유형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별하여 전도하는데 차별하면 안 됩니다. 구별과 차별은 다른 것입니다. “나는 버니게형에게만 전도하겠다. 나는 아그립바형은 좋은데, 베스도형은 싫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에게만 전도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지, 그들이 처한 형편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에 그들이 처해있습니까?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26:17-18).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소경과 같습니다. 하나님도 못 보고 예수님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멕상 도상에서 사도 바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이 바울을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파송하시면서, ! 그를 세상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영적으로 소경 되었고,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들의 운명을 모르고 있으므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눈을 뜨게 하도록 바울을 사도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어야만 영적인 소경이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야, 그들은 눈을 뜨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알고,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어는 누구도 스스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전도는 어두운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들이 어두운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방법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26:18). 세상 모든 사람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는 노예들입니다. 한 사람도 자유인이 없습니다. 모두가 악령의 권세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들은 사탄의 쇠사슬에 꽁꽁 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서, 복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은 그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악령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전도가 이것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전도의 강력한 능력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전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고 증거 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작은 입을 통하여 증거된 복음이 이루어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는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그들이 예수를 믿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용서받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후사가 됩니다(26:18). 전도는 이와 같은 엄청난 축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단지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그들이 더욱 잘 이해할 방법을 모색할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입니다. 영적으로 죄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모두가 사탄의 쇠사슬에 매여 있는 죄의 노예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들고 모든 사람에게 나가서 전하여야 합니다.

 

복음 증거자의 무장

 

이제 우리의 초점을 돌려, 판석 아래에 홀로 서 있는 사도 바울에게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감옥에 있었기에 그의 옷은 남루하고, 얼굴은 초췌하며, 머리는 손질도 제대로 못 한 체, 헝클어진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손에는 쇠사슬을 차고 힘겹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빛나고 투명합니다. 그의 얼굴은 비록 거칠지만 평안합니다. 그의 가슴에는 피가 끓고 있습니다. 이 작은 죄수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상대가 왕이든 총독이든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배워야 합니다. 철저하게 무장한 복음 증거자로의 마음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의 마음은 무엇으로 무장되어 있습니까?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6:29).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적어도 세 가지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26:29). 

 

첫 번째 구원의 감격으로 무장입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구원의 감격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악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시려고 자신이 십자가에 대신 생명을 바쳐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솟구쳐 오르는 구원의 감격으로 그의 가슴은 언제나 활화산처럼 불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쓴 신약성경의 서신서 들을 보면, 그는 항상 이 감격을 하고 흐느끼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그의 사랑이 정말 고마워 울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주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딤전1:13). 그가 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자주 소개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이 고백 중에 담겨있는 그의 진심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많은 죄인이 있지만, 그 죄인 가운데 나는 가장 악질적인 죄인이다. 다른 죄인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구원의 감격이 그의 진심인 것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사도 바울의 심정을 뜨겁게 만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같은 것이 예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주체지 못하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시는지 정말 신기하구나,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게 되었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록 가난할지라도, 세상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울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당신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감격을 매일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믿은 지 얼마 동안은 가슴이 뜨겁고 너무너무 감사해서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나오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싸늘하게 식어 버려 요즘에는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도 고개만 끄덕거리지 가슴은 냉랭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형상은 절대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 구원의 감격이 자꾸 식을까요? 매우 중요한 이유는 바울처럼 자기를 죄인의 괴수로 보는 시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그래도 좀 낫다.”라는 우월의식이 마음 밑바닥에 조금이라도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월의식 또는 자기의自己義는 구원의 감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칩니다. “수가성 여자는 남편을 5명 갈아치우는 형편없는 인생을 살았으니, 거리의 여자요, 진짜 죄인이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갖고 있지 않아. 나는 그래도 그 여자 같지는 않아. 나는 조금 나아.”라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 조금은 괜찮은 일면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뜨겁게 타오르던 구원의 감격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구원의 감격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이며, 무가치한 존재이며 비천한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 애통해 하는 자리에서만 자라는 꽃입니다. “나는 정말 못 쓸 몸이고, 정말 거리의 여자보다 더 추악한 놈이고, 스데반을 죽인 바울보다 더 독한 놈인데도, 하나님이 아무 가치 없는 나를 불러서 하늘의 영광을 안겨 주었으니, 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인가?”라고 생각할 때, 구원의 감격은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자나, 매일 강단에서 거룩한 말씀만 전하는 목사나 똑같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면 다 죄인입니다. 100% 죄인이 있고 10%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인생에 태어나서 한 생을 손발 꼼짝하지 아니하고 살다가 가도, 그 사람 역시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실존 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를 가지고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기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항상 나는 죄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죄인이다.”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밑바닥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음을 믿고 인식할 때, 그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면서,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당당함을 가지고, 전도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바울이 누렸던 구원의 감격을 소유해야 합니다. 터져 나오는 구원의 감격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말에 묻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표정에서 구원이 가져다준 그 기쁨을 상대방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감동으로 뜨거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자존심 자존심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왕이나, 총독, 왕비 같은 여자와 죄수로 서 있는 바울을 비교해 볼 때, 바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그들과 비교하여 자랑하고 긍지를 가질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가슴에는 당당한 긍지가 있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는 이 말 속에는 나를 본받으라는 자신감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나는 비록 쇠고랑을 차고 있는 몸이지만,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맡긴 사도입니다. 조금 후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있는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된 사람입니다.”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사도 바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총독의 권세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별 것 아닌 인간적인 허세를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바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긍지와 자존감이 있기에 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모두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바울과 같은 긍지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당당했습니다. 가진 것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으로도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을 보면, 이런 긍지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전도는 해야 될 것 같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찾아가서는 집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입을 다물 줄 모릅니다. “이 장롱 어디서 샀어요? 너무 예쁘네요.” 부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고는 그거 어디 메이커 아니에요. 어디서 나셨어요? 이런 건 잘사는 사람들 사는 동네 유명 브랜드만 취급하는 곳에서 멤버쉽으로만 운영된다는데 말끝을 흐리면서. 부러워서 어찌할 줄 몰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나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직업이 어떠하던, 누구 앞에서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가진 재산도 별로 많지 않고,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세요. 그게 저는 기쁘답니다. 예수님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그런데 당신은 세상적으로 보면 다 가졌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예수님이 전부랍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긍지가 넘칩니까? 이런 자부심으로 속 사람을 무장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굴하지 않는 그 자부심을 보고서 상대방이 감동을 합니다.

 

세 번째 연민의 마음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간절하게 호소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훨씬 더 불쌍해 보이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당신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그들을 향하여 무엇인가 간절히 애타는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바울이 그들을 보면서,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 믿기를 호소라는 이유는, 그들의 영혼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바울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당할 그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생각할 때 그들의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연민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세상 사람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으므로 심판이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한번쯤은 생각을 하지만, 결국에는 애써 부정합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하는 편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람들이 이 심판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18:23).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 즉 심판 받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무리 흉악한 악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 버니게 왕비를 쳐다보면서, 그들이 나중에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느끼는 연민의 정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체,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찢어지도록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만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개 깡패의 협박에 무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하므로 예수 믿을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슴 찢어지는 연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심정인 것입니다.

 

정리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유대 총독 벨릭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고발했지만 어떤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24:22,27.참고/23:26-30). 그는 바울로부터 직접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강론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갖기도 하였습니다(24:25).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고, 또 다른 편으로는 바울에게 뇌물을 바라는 간계한 마음을 갖고, 재판을 미루다가 2년이 지났고, ‘보르기오 베스도 소임을 이어받게 됩니다(24:26-27). ‘베스도 총독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부임 인사를 하고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25:1-2). 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내려오게 한 뒤, 매복해 있다가, 살해하려고 하였지만,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고,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날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도 같이 내려가서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하였습니다(25:3-5).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는 즉시 재판을 열었지만, 유대인들은 2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사실관계나 뚜렷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고, 총독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내려가 심문을 받겠느냐고 물었고,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하였습니다(25:6-12). 바울은 로마로 가지 전까지 감옥에 있어야 했고요. 수일 후 갈릴리 분봉왕인 아그립바가 누이 버니게와 함께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문안하고자 찾아와서, 며칠을 유하였습니다(25:13-14). 베스도는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아그립바에게 현안 가운데 바울에 일을 꺼내었습니다(25:15-21). 그동안 송사 과정을 들은 아그립바는 자신도 바울의 말을 듣고 싶다고 하였고, 베스도는 가이사에게 보낼 합당한 상소 자료를 찾고자, 왕과 고관을 들을 모아서, 재판을 열었습니다(25:24-27).

 

바울이 변명하다(참고/9:1-19,22:6-16)

 

바울은 그들에게 변호를 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고, 그들도 내가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로 살아왔다는 것도 인정할 것이라면서, 내가 재판을 받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냐는 것입니다(26:4-8). 사실, 나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였습니다.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 그 일에 찬동하였습니다. 그리고 회당마다 찾아가서, 여러 번 성도를 형벌하면서,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으므로, 심지어 외국의 여러 도시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쳤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증인으로 부름받게 되었습니다(26:9-18). 바울이 회심이 이전과 이후 소명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 온 유대와 이방인들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하다가, 고발당했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모세가 장차 그렇게 되라고 예언한 것을 말한 것으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을 빛을 선포하실 분이라는 것을 전하리라는 것을 증언했습니다(26:19-23). 바울은 사명에 관해서도 진언을 했습니다(26:19-23). 

 

바울이 전도하다 

 

우리는 바울이 재판정에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섰지만, 자기 앞에 재판 석에 앉아 있은 자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고 있는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그리고 베니게 이 세 사람을 보면,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서 전도할 때, 흔히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스도Porcius Festus,AD59-62,“‘기쁨’,‘즐거움’,‘명절’”:오해와 편견의 소유자. 베스도는 유대의 현직 총독입니다. 그가 재판 석에 앉아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26:23).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26:24).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돌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스도의 행동을 보면서, 그의 성향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해가 많이 쌓인 사람들입니다. 편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자를 광신자로 취급하고, “예수는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이나 믿는 것이고, 교회는 나약한 자들이나 가는 곳이며, 게다가 성도란 사람들은 다 이중인격자들이다. 목사는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비웃듯이 말하는 대부분 사람은 교회에 대해 자기 나름의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물의를 일으키는 교인은 소수인데, 모든 교인을 그들과 똑같은 부류로 판단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있음에도, 물의를 일으키는 몇 사람을 보고서, 교회 전체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공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베스도 형의 사람들입니다. 

 

아그립바 왕Herod Agrippa,AD53-100:관심은 가지나 거부하는 사람. 그는 예수님 탄생 시 악명 높았던 헤롯 대왕의 증손자입니다.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는 스무 살 내외인 아주 젊은 왕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재판에서 주심’主審입니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그는 유대 나라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대 사회의 모든 물정과 종교에 밝은 사람입니다(26:3). 그래서 바울은 아그랍바 왕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6:27).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듣던 왕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6:28). 다르게 해석하면 네가 몇 마디 말 가지고 예수 믿게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만이라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만, 가까이 접근을 하면, 그만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 뒤로 빼는 사람들의 유형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한 시간 두 시간이나 하면서, 끝까지 잘 경청해주고, 정작 주일예배에 오세요라고 하면, “저도 예수를 믿어요. 그런데 교회는 환경이 좋게 열리면 가려고 해요. 생각해 보게요라면서, 뒤끝을 흐리고, 전도자의 힘을 빼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그립바 형의 사람들입니다.

 

버니게Bernice,‘승리자’:무반응과 냉소주의. 버니게는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맏딸로, 아그립바 왕이 남동생이며, 베스도 이전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입니다(24:24). 버니게는 처음엔 알렉산더의 아들 마르쿠스’Marcus와 결혼하였다가, 그가 죽자 숙부 칼키스’Chalcis와 결혼했고, 그가 사망하자 본문에 재판 주심인 남동생 아그립바에게 와서 얹혀살면서, 마치 왕비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는 이 오누이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결혼하였으나, 그를 버리고 다시 동생 아그립바와 동거하였습니다. 훗날에는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Titus, AD.79-81를 유혹 정부가 되어, 황후가 되고자 했던 대단한 여자이었습니다(Josephus).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미모에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에 물든 그녀의 귀에는 한낱 죄수에 지나지 않는 바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춘에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게 살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만하여,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귀에는, “예수 믿고 천국 가자라는 말이 들어오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불쌍하다.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됐을까? 허우대는 멀쩡한데 왜 저런 짓을 할까?”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즐길 것이 많아질수록,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생길수록,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우리는 적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버니게 형의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복음 들어야 할 자들.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전도할 때 만나는 모든 유형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별하여 전도하는데 차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26:17-18).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소경과 같습니다. 하나님도 못 보고 예수님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들어야만 영적인 소경이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누구도 스스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전도는 어두운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은 그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악령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용서받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후사가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그들이 더욱 잘 이해할 방법을 모색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자의 무장. 죄수의 신분이지만 상대가 왕이든 총독이든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6:29).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세 가지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26:29). 첫 번째는 구원의 감격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또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3,15). 나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구원의 감격이 바울의 심정을 뜨겁게 만들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같은 것이 예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는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주체치 못하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시는지 정말 신기하구나,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게 되었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록 가난할지라도, 세상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울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당신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자꾸 식을까요? 매우 중요한 이유는 바울처럼 자기를 죄인의 괴수로 보는 시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그래도 좀 낫다.”라는 우월감이 밑바닥에 조금이라도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월감 또는 자기의自己義는 구원의 감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자나, 매일 강단에서 거룩한 말씀만 전하는 목사나 똑같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면 다 죄인입니다. 100% 죄인이 있고 10%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가장 밑바닥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음을 믿고 인식할 때, 그의 마음에 구원의 감격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표정에서 구원이 가져다준 그 기쁨을 상대방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전하는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감동으로 뜨거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자존심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왕이나, 총독, 왕비 같은 여자와 죄수로 서 있는 바울을 비교해 볼 때, 바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그들과 비교하여 자랑하고 긍지를 가질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가슴에는 당당한 긍지가 있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는 말 속에는, 나를 본받으라는 자신감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바울과 같은 긍지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당당했습니다. 가진 것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으로도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인들을 보면, 이런 긍지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전도는 해야 할 것 같아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찾아가서는 집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나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데 남들이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직업이 어떠하던, 누구 앞에서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가진 재산도 별로 많지 않고,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세요. 그게 저는 기쁘답니다. 예수님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그런데 당신은 세상적으로 보면 다 가졌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예수님이 전부랍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얼마나 긍지가 넘칩니까? 이런 자부심으로 속 사람을 무장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굴하지 않는 그 자부심을 보고서 상대방이 감동을 받습니다.

 

세 번째 연민의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훨씬 더 불쌍해 보이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재판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당신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그들을 향하여 무엇인가 간절히 애타는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들의 영혼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았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바울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당할 그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세상 사람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으므로 심판이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한 번쯤은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애써 부정합니다. 죽으면 끝난다고 하는 편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18:23).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 즉 심판받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 버니게 왕비를 쳐다보면서, 그들이 나중에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느끼는 연민의 정을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체,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찢어지도록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만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개 깡패들 협박에 무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하므로 예수 믿을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슴 찢어지는 연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심정인 것입니다.

 

결론

 

저는 전도대상자를 놓고 기도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분들의 이름을 적어서 성경 안에 늘 끼워 놓고 다닙니다. 기도의 자리마다 한분 한분씩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이 당할 마지막 심판을 생각하면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런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여야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중에 아직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 오래 사귄 친구나, 직장 동료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아니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웃에 사는 사람 등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기도하면서 찾아가야 삽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바울처럼 무장합시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바울처럼 자존심을 자기고 무장합시다. 바울처럼 연민의 정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 앞에 아그랍바 왕 같은 인간을 만나더라도, 버니게와 같은 사람을 만나도, 베스도와 같은 사람을 만나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당신들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에 충만해지는 날이 반드시 올 줄을 믿습니다(11:9;2:14).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전도할 때, 편견과 오해 때문에 도전적으로 나오는 사람, 일말의 관심은 가지면서도 나중에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유형의 사람들에게 바울처럼 예수님을 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가장 밑바닥의 죄인임에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전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자존심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예수가 전부이게 하옵소서. 이 자부와 긍지로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은 자존심으로 전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상대가 누구이든 구원받지 못하면, 지옥 영멸인 것을 보게 하옵소서. 악인이라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 연민의 마음으로 전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바울처럼 당신들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증거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지역과 열방의 사명을 들고, 청라국제도시부터 대한민국과 세계에 복음 증거자의 무장을 갖추고, 하나님의 나라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에 충만해지는 날이 속히 임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