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하나님말씀 : 요한일서 4:10-12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지금의 국회의원, 판사, 교수입니다 (요3:1-2). 사마리아 수가성에 여인은 남편을 여섯 명이나 거쳤습니다. 원하는 이성과 모두 살아보았습니다(요4:7). 유대의 한 마을에 부자 청년은 돈 만 많은 것이 아니라, 흠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마19:16). 그런데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만나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 엇입니까?(참고/전3:11;눅21:9;벧전1:9)
2.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1888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큰 성공을 거두고 “나는 내 천재성을 내 삶을 위해 사용했고, 내 작품을 위해서는 단지 내 재능만을 사용했다”, “나는 고상한 것이 다 싫다. 하나님이고 뭐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골치가 아프고 싫으니까 좀 더 즐기는 방향으로 나가고 싶다”며, 미소년과 동성과도 즐기는 데 돈과 명예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최고의 사교클럽에서, 퀸즈베리 후작이 오스카 와일드를 ‘남색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사건 재판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내가 골방에서 혼자 즐기면서 하던 일 때문에 훗날 내가 지붕 위에서 통곡할 줄은 몰랐다. 내가 쾌락에 나 자신을 맡기자 내 영혼은 이미 방향을 잃었다”고 탄식했습니다. 출소 후, 그의 모든 재산은 사라져버렸고, 아내에게는 이혼을 당해야 했습니다. 자녀 후견인 자격도, 영국 국적도 박탈당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재산 상당 부분을 물려주었던 동성 연인를 찾아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그에게마저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뇌척수막염으로 46세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이 세상에서 즐기고 잘 살다가 끝내자.” 하는 식으로 산다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참고/딤후3:2-4). 인간은 남녀 간에 피어오르는 ‘에로스’Eros적인 사랑이나, 혈육 간에, 친구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필로스’Philos적인 사랑만, 가지고는 절대로 살 수 없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어떤 사랑도 메우지 못하는 공백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의 “이방지대”가 있습니다. “영혼”입니다. 참 지혜자는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을 찾는 자라는 것입니다(잠19:8). 그렇지 못하고 인간의 육이 전부로 아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요. 인생을 헛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 우리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은 ‘갈보리’Calvary입니다(마27:33;막15:22;요19:17). ‘사 랑은 여기 있으니.’(요일4:10) 이 갈보리에 사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요일4:10). 갈보리 십자가는 첫째 ‘무조건’인 사랑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 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無條件인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예찬하고, 노래하고,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데 무조건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속는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실연의 아픔을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분명한 것은 사람의 사랑은 절대로 사람을 책임질 수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4. 두 번째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보시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손해 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 님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음까지, 감수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사랑 순수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죄를 전부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5. 세 번째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세 번째로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을 화목제로 바친 곳입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사’. 이것은 최대의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입니다. 자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기 아들, 자기 딸을 내줄 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켜 주셨습니다. 아들이 아홉 아니, 둘 셋 되는 것도 아니에요 ‘독생자’입니다. 최대의 희생, 최대의 대가를 지불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왜! 갈보리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피를 다 쏟고, 나중에는 물까지 다 쏟으신 줄 아십니까?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아야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따라갈 수 없는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대단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6. 갈보리 십자가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사랑하는 자들 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 로 사랑’을 명하십니다(요일4:11).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도 떠난 다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New Command, Love one Another” 예수님의 새로운 명령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이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였습니다(요일4:11).
주변에 겉은 메이크업에 명품에 고급 승용차에 번드르르 하지만, 대학교수요 국회의원이요 판사인 니고데모와 같이, 여섯 명의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남자와 살아 본 수가성 여인 같이, 도덕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던 부자 청년같이,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다 가져보았는데도, 어딘간 허전함을 갖고 있지 않던가요? 만나면 매일 같이 남편 자랑 자식 자랑 새로 산 아파트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얼굴에 근심이 흐르지 않던가요? 멋진 슈트 차려입고, 잘나가는 직장에서 존경받으며, 헬스에 레저에 누리며 사는데도 간혹 한숨을 쉬고 있지는 않던가요?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채워주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언젠가는 예배당의 문을 두드릴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 같이 인생의 위기가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잘 분별하여 바싹 다가서 손을 잡고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 공동체 사랑, 서로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이 자신의 존재에 영혼이라는 영역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 것입니다(요일4: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서로 사랑입니다. 그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7. 인간이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갈보리’Calvary 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음 글을 읽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갈보리에는 단지 십자가 하나만 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 하나만 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비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그 몸에서는 핏방울이 오늘도 끝없이 끝없이 이 땅의 온 인류를 향하여 떨어지고 있습니다. 갈보리 사랑에 다시금 흠뻑 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갈보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시고 가시관으로 온 얼굴에 피범벅이 된 그분의 얼굴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공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뼛조각과 납덩이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에 깊은 골이 진 밭고랑 같은 등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같은 죄인을 위해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갈증을 다 해갈하고 넘치도록 마음에 차는 사랑은 갈보리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거기에 큰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세상이 가득 차고 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앞에 들어갑시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몸을 던집시다. 이렇게 우리가 항상 갈보리를 묵상하면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 사랑, 희생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2023년 1년 동안 기쁜 일이 있고, 감사한 일이 있고, 행복한 일이 있어도, 갈보리를 묵상합시다. 슬픔이 있고, 장벽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갈보리를 묵상합시다. 그러면 지금도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나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공동체 가족인 성도들 서로 사랑으로 섬길 수 있고, 그들의 영혼 또한 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갈보리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서, 기쁜 일, 감사한 일, 행복한 일 만이 아니라, 슬픔과 장벽과 고난에도 승리하는 올해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 다음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① 2023년 사람의 사랑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의 화술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의 마음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 갈보리의 십자가의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에 흠뻑 빠지게 하옵소서.
② 2023년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잊지 않게 하시고, 그들 영혼의 혼란, 방황, 갈증을 잘 분별하여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③ 2023년 기쁜 일, 감사한 일, 행복한 일에도, 슬픔과 장벽과 고난에도, 갈보리 십자가를 묵상하고, 무조건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채우고 흘러넘쳐, 서로 사랑으로 교회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승리하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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