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에서 다윗 성까지
하나님말씀 : 사무엘상 4:1-11
‘길가’(“하나님 말씀을 빼앗기지 말라”), 말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자’ 즉 사탄이 와서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마3:19). 말씀이 마음에 담아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예배의 자리에 몸만 와있지 말고, 마음에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다 벗어버리고, 정욕과 욕망의 죄를 회개하고,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 “오직 나의 구원자는 예수님입니다.”, 고백하며, 드리는 예배가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요4:24). 그런데 예배에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우선보다, 은혜를 받는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혹시 나의 충족의 변형이 은혜받으러 간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참된 말씀을 악한 자 사탄으로부터 빼앗기고 있는 줄 모릅니다. 우리는 예배도 그 외에 신앙생활에서 나에게 맞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맞는 것에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담기지 않는 자가 아니라 말씀이 담겨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리는 것은 말씀입니다(참고/요6:63).
‘돌밭’(“끝까지 넘어지지 않는자”)에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마13:20-21). ‘기쁨’ 은혜를 받았지만, 돌밭이기에 뿌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감정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을 뿐 신앙으로 승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마13:21). 사회생활에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할 때, 당하는 환난이나 박해에서 넘어지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넘어지는 자’를 평행본문인 누가복음에는 ‘배반’이라고 하였습니다(눅8:13).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도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었다면 믿음이 자리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에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가시떨기’(“하나님의 의와 나라의 열망”)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13:22). 씨앗보다 가시떨기 자라는 속도와 범위가 더 큰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출석해 예배에 참석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덮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하나님이 기르시지 않느냐, 그것보다 귀한 너희를 기르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6:25-30).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하늘 아버지는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물질이 절박하다면, 그 간절함으로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기를 축복합니다.
‘좋은 땅’(“백배의 결실”) ‘결실하여 백 배가 되느니라’(마13:23).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개작 각색하는 길가가 아니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좋은 땅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그대로 받으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난 후 지키면, 돌밭 같이 기쁨으로 끝나고 뿌리가 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에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듣고 지키면. 가시떨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신앙의 자람보다 더 자라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열망을 가지면. 하나님도 하나도 부족함 없이 백배를 주실 줄 믿습니다(참고/눅8:15).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마13:16). 말씀을 보고 듣는 것이 좋은 땅입니다. 적이 좋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마13:23). 2023년도 오늘 말씀의 백 배의 열매를 맺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언약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까지 옮겨지게 된 글입니다. 읽고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이스라엘은 대적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하여 4천 명이 전사를 했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중에 없기 때문이라 여기고, 실로에서 에벤에셀 법궤를 옮기자, 이스라엘 진영의 백성들은 땅이 진동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사기충천했습니다(상상4:2-5.참고/삼상4:3.참고/출13:21-22,25:21-22,25:22,26:33-34;레16:2;수3:1-17,6:4,8;삼상5:7;왕상2:26). 블레셋 군대도, ‘언약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전쟁에서 지게되었다며 크게 당황했습니다(삼상4:5-8).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의 종이 될 수 없다. 대장부가 되자’며 전의를 다지며 전승했고, 언약궤’를 믿고 싸웠던 이스라엘은 대패하여, 이전보다 7배가 넘는 3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하나님의 궤’마자 블레셋에게 강탈당했습니다(삼상4:9-10)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참고/삼상4:21-22).
하나님의 받으신 아벨의 예배를 성경은 ‘더 나은 제사’라고 하였습니다(히11:4). ‘더 나은 제사’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죽는 것입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은 죽고 하나님의 주장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 예배자입니다. 몸만 앉아있지 세상의 염려와 근심 그리고 나의 계획과 안위가 마음에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렸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 혹은 안도하려는 태도는 자칫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치 ‘법궤만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구별하여 교회에 왔으니,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2. ‘언약궤’가 ‘에벤에셀에서 에그론’까지 옮겨지게 된 글입니다. 읽고 의견을 나누세요.
승리에 도취된 블레셋은 ‘언약궤’를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진열하는 불경을 행했습니다(삼상5:1-2). 그런데 이튿날 다곤이 법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있는 것입니다(삼상5:3). 그 다음날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습니다(삼상5:4). 그뿐 아니라 ‘여호와의 손이’ 치니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동네 전체가 ‘망하게’되었습니다(삼상5:6). 법궤를 ‘가드’와 ‘에그론’으로 이동했지만, 성읍 ‘사망이 환난’을 당하고, 살아 남은 자들은 ‘독한 종기로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고 하였습니(삼상5:7-12).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비극이 찾아옵니다. 역대 국가 지도자들 가운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는 대부분 국록國祿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벌고자 한 것입니다(참고/눅3:14). 신년을 맞아 물질적인 부분을 놓고도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요. 인간의 욕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탐욕으로 채우는 것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잘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우리의 가정과 기업 그리고 교회 이것이 본문의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3. ‘언약궤’가 ‘에그론에서 기럇여림’까지 옮겨지게 된 글입니다. 읽고 의견을 나누세요.
다급해진 블레셋은 새 수레를 만들어 한 번도 멍에를 베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에다 법궤를 싣고, 그 곁에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을 담은 상자를 두어,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삼상6:3-8). 법궤를 모신 수레를 끈 두 소는 사람의 인도함 없이도 곧바로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갔습니다(삼상6:12).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지요.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이 보낸 수레는 번제의 장작으로 암소 두 마리는 번제물로 드렸습니다(삼상6:14).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 중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부정하게 법궤‘를 들여다 보았고,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고 말씀합니다(삼상6:19). 여호와의 궤를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 벧세메스는 이웃 동네인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맡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삼상6:21). 기럇여림 아비나답의 집에 ‘여호와의 궤’를 모시기로 결정하고, 아니나답은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삼상7:1).
같은 이스라엘 동네인데요. 벧세메스 사람들은 큰 화를 당하고, 기럇여림 사라들은 20년 동안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시는 큰 복을 받습니다(삼상7:2). 기럇여림은 법궤를 모심으로 민족 중심 역할을하게 됩니다. 같은 성도인데요. 화에 쓰임 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복에 쓰임 받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맡습니다. 그러나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복으로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화를 쓰임 받는 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을 통해 보았듯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절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경솔함으로 화를 받는다면, 그것은 자기 책임이지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겼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년을 맞아 맡은 일 혹은 교회에서 임명 받은 것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라고 명하신 일이 있다면 충성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4. ‘언약궤’가 ‘기럇여림에서 다윗 성’까지 옮겨지게 된 글입니다. 읽고 의견을 나누세요.
시간은 흘러 20년 지났습니다. 그 사이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모시기로 결정합니다(삼하5:7,6:1-2).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져 있던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을 이동하는 데요. 이때 다윗 왕은 이스라엘에서 무려 삼 만 명을 선출하여 대동을 합니다(삼하6:1). 행진 중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연주를 하며 축제의 장을 연출합니다(삼하6:5). 다윗은 법궤를 이동하던 중 웃사가 법궤를 함부로 손을 댔다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법궤’를 모시는 것이, 속히 진행할 일인지 두려움에 있었습니다(삼하6:5-9). 그래서 임시로 오벧에돔의 집에 모시게 되었는데 그의 집에 큰 복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삼하6:10-11). 이에 다윗은 처음에 계획한대로 이동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내딛어도 아무 일이 없음으로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삼하6:13). 그리고 다윗은 어린 아이 같이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삼하6:14). 반바지 형태의 ‘베 에봇’을 입고, 속옷이 없던 당시, 민망할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창피한 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삼하6:15).
다윗은 당시 주변국을 섬멸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대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조각목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장방형 모양의 가로 122cm, 세로 76cm, 높이 76cm 밖에 안되는 법궤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는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할 때, 너무나도 예쁜 자부, 능력있는 사위를 맏이 할 때, 사업이 형통해서 물질이 활짝 열릴 때, 가정이 모두 인가귀도 되어 함께 예배하게 될 때 얼마나 기쁘세요. 이러한 모든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기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올해에 이러한 역사가 꼭 잊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것을 다 응답받아 부족함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네 번째 가르침입니다.
5. ‘공동체와 함께하고 동행하라’에 대한 글입니다. 읽고 의견을 나누세요.
그런데 다윗과 달리, 그의 아내 미갈은 나가보지도 않고, 오히려 다윗이 아이 같이 기뻐 춤추는 것을 체통 머리 없는 짓으로 여기고 ‘심중에’ 비웃었습니다(삼하6:16). 다윗이 법궤를 모신 후 거처에 들려 가족들을 축복하자, 미갈은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삼하6:20). 다윗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기뻐 뛰논 것은 마땅한 것이고, 미갈은 나를 천시여긴 그 천함보다 더 천해지게 될 것이며, 평생 동안 자녀를 낳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삼하6:21-23).
이것은 다윗이 화를 발한 저주가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며 선지지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을 모욕한 미갈은 다윗이 모시고 온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 즉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갈은 법궤가 오기까지 자기 공로가 하나 없고, 집에서 나와 마중하고 함께 즐거워하면 되는데, 빼 꼼이 창문으로 얼굴만 내밀고는 다윗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런 미갈이 되어서는안 될 줄 압니다. 다윗이 법궤를 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함께하지 않았으니, 다윗 처럼 어린아이 같이 기뻐 뛰고 춤추는 그 감격을 체감하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교회공동체 기도제목에 함께하고 동행할 때 주시는 하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다섯 번 째 가르침입니다.
6. 다음 제목으로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① 이스라엘이 법궤만 있으면 승리하겠지라는 생각과 같이, 예배만 드리면 되지하는 안도를 버리고, 성별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② 블레셋은 법궤를 이방 신전에 놓았다가, 큰 화를 당했습니다.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갖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하옵소서.
③ 같은 이스라엘이지만 법궤를 맡은 벧세메스는 경솔함으로 화를 당했고, 기럇여림은 복을 받았습니다. 나의 직분을 충성으로 복을 받게 하옵소서.
④ 다윗은 천하를 지배한 것보다 법궤를 모신 것에 더욱 기뻐하며 애들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모든 것에 다 응답받아 부족함이 었어도, 하나님 앞에 아이 같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⑤ 다윗의 기쁨에 함께 하지 않았던 미갈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 서로의 기도 제목에 함께 동행할 때 주시는 하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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