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악행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누가복음 3:7~20 2023.01.22. 主日禮拜
“7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3:7-20)
‘언약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까지. 이스라엘은 대적 블레셋과 패전 원인을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중에 없기 때문이라 여기고, 실로에서 에벤에셀 법궤를 옮겼지만, 이전보다 4천 명보다 7배가 넘는 3만 명이 전사하는 대패했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삼상4:2-10.참고/참고/출13:21-22,25:21-22,25:22,26:33-34;레16:2;수3:1-17,6:4,8;삼상4:21-22,5:7;왕상2:26).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참고/요4:24;히11:4). 그러나 몸만 앉아 있으면서, 예배를 드린 것으로 안도한다면, ‘법궤만 승리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과 같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구별하여 교회에 왔으니,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언약궤’가 ‘에벤에셀에서 에그론’까지. 승리에 도취한 블레셋은 ‘언약궤’를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진열하는 불경을 행했습니다(삼상5:1-2). 그런데 이튿날 다곤이 법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있고, 그 다음날에는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습니다(삼상5:3-4). 그뿐 아니라 아스돗 동네는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망하게’되었습니다(삼상5:6). 법궤를 ‘가드’와 ‘에그론’으로 이동했지만, 그곳 또한 같은 고통과 ‘사망의 환난’을 받아야 했습니다(삼상5:7-12).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비극이 찾아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의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언약궤’가 ‘에그론에서 기럇여림’까지. 블레셋은 언약궤를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삼상6:3-8). 벧세메스는 블레셋이 보낸 수레는 번제의 장작으로 암소 두 마리는 번제물로 드렸습니다(삼상6:14). 그런데 어떤 자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부정하게 법궤‘를 들여다 보았고, 큰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삼상6:19). 언약궤는 기럇여림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모셔지게 되고, 큰 복을 받고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삼상6:21,7:1-2). 하나님이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벧세메스 같이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경솔하게 하지 말고, 기럇여림 같이 주어진 것에 충성하여 복을 받고, 하나님 역사의 중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세 번째 가르침입니다.
‘언약궤’가 ‘기럇여림에서 다윗 성’까지. 시간은 흘러 20년 지났습니다. 그 사이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모시기로 결정합니다(삼하5:7,6:1-2). 언약궤를 모신 다윗은 어린 아이 같이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삼하6:14). 반바지 형태의 치마인 ‘베 에봇’을 입고, 속옷이 없던 당시, 민망할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창피한 줄 모르고, 어린아이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삼하6:15). 다윗은 주변 국가를 정복한 것보다 언약궤를 모신 것에 더욱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 응답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기쁜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어린애여야 한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네 번째 가르침입니다.
‘공동체와 함께하고 동행하라’. 다윗의 아내 미갈은 나가보지도 않고, 체통 머리 없다며, 심중으로도 공개적으로도 비난했습니다(삼하6:16,20). 다윗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신 하나님께 찬양드리며, 어린아이 같이 기뻐 뛰논 것은 마땅한 것이고, 미갈은 나를 천시여긴 그 천함보다 더 천해지게 될 것이며, 평생 동안 자녀를 낳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삼하6:21-23). 이것은 다윗이 선지자로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의 모욕은 다윗이 모시고 온 언약궤, 즉 하나님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 미갈은 언약궤를 모시고 오는 동안 함께 하지 못했고, 그렇더라고 함께 기뻐하면 되는데 그것도 안 했습니다. 교회공동체 함께할 때 하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다섯 번째 가르침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우리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을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명인 요한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요1:37).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도 요한이라고 하고요. 본문의 요한은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본문에도 기록된 것처럼 세례를 베푼 사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그를 요단 강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3:3).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가 순교한 나이를 40세 전후로 보는데요.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눅3:4-6).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한 사역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칭찬을 받았던 선지자였습니다(마11:11).
이러한 세례 요한 사역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으로 임하신 신적 권위에 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2). 이 말씀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 즉 광야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3:3).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세례요한은 즉각적으로 전파한 내용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눅3:8). 이 말은 들은 많은 유대 백성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애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3:10). 이렇게 백성들의 회개, 통회 자복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세례 요한에 임한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큰 능력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통회 자복하는 백성들에게 세례 요한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회개하였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누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3:10-11). 먼저 세례 요한 앞에 달려 나온 많은 유대 백성들 무리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변은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의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옷이 없는 분들도 없을뿐더러 두 벌만 있는 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우 두 벌의 옷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니 타당한 말 같지 않습니다. 한 번은 자녀가 집을 정리하더니 큰 보따리를 거실에 내놔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안 입는 옷”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깨끗하고 멀쩡한데 옷 수거함에 버리라고 하니 아깝게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오래는 10년 넘게 입는 옷도 있는데요.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아이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요즘 대부분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하더군요. 서민들이라고 할 지라도요. 옷이 없어 못 입는 시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구두도 한 켤레로 닳아 없어질 때까지, 4계절을 싣습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계절별로 구두는 다 갖고 있고요. 등산화 운동화 등 등 용도에 따라 다 갖추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책을 많이 집필하는 편인데 저서를 출간하려면 노트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큰 아이가 대학 졸업하고 노트북 새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쓰던 것을 제가 사용을 했는데요. 그때가 2018년인가 되었을 거에요. 노트북 가진지 얼마 안되었어요. 그전에는 교회에 있는 PC로 업부와 집필을 겸해서 했습니다. 요즘은 고등학생만 되어도 노트북 다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추가로 아이패드 등등 여러 기기를 들을 갖고 있지요. 현재 이러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옷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는 것은 잘 이해가 안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당시에는 변변한 옷 한 벌 없는 이들이 상당수였습니다. 저희 어릴 때만해도 겨울에 잠바하나 입으면, 그 잠바가 뺀질뺀질해질 때까지 입었지 않습니까?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에게 옷은 살기 위해 입는 것이지, 뽐을 내기 위해 입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한 벌 이상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일반 서민들인 유대 백성들에게는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을 우리들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나누라’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즉 구원 받은 자는 나눔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섬김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전에는 없어서 못 나누었지만 요즘에는 있어도 나누지 않습니다. 그만큼 각박해지고 매일 치열하게 살다보니 없어서 못 나누는 것보다도, 있어도 나눈 다는 것을 아예 잃어버리고 삽니다. 혹시 쓰던 것을 주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을 것입니다.
성탄절 전야에 설치된 구세군 자선냄비에 익명의 시민이 1억 5천 만원의 기부액으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게 할 만하니까 하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액수를 기부할 여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정도의 기부를 할 수 있는 재물이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없어요. 아닙니다. 많습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다 1억 5천 만 원 씩 합니까? 설사 하더라도 자기 신분 밝히지 않고 익명을 기부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없어도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면 할 수 있습니다. 옷 두벌이 많습니까? 많지 않은 옷입니다. 한 열 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어렵게 어렵게 장만해서 두 벌이 되었는데, 거기서 한 벌을 없는 자에게 준 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너희가 죄 사함을 받았다면 거기에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결코 여유있지 않는 서민들에게 자신의 두 벌 옷 중 한 벌을 없는 자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나누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살림이 부족해도 정한대로 하고자 노력합니다. 또 매월 한 번씩 뜻있는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을 초청해서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다음 달이면 벌써 74차가 되었고요. 그것 말고도 2박 3일 혹은 1박 2일 세미나도 다섯 번 주최하였습니다. 이 또한 여력이 남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찾는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을 최선을 다해 섬기고자 합니다. 우리가 해외 오지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것도 선교이고요. 매월 우리 교회를 찾는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을 섬기는 것도 선교인 것입니다. 그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배우고, 힘을 얻고, 다시금 목회와 헌신에 최선을 다한다면, 너무나도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서 하고 있는 나눔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그것을 쪼개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재능과 은사가 삶을 영위하는 쉽게 돈을 버는 데에만 사용되지 말고, 하나님 영광과 사람들에게 유익으로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저 주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부족함에도 쪼개어 적은 것으로 나누는 것에서, 풍부함에서 많은 것으로 나누는 은혜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물질의 복도 많이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한 복이 임하기를 또한 축복합니다. 지금부터 부족함에도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있을 때 많음에서도 나눌 수 있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부요한 자들이 나누는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의 삶에서도 나누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재차 삼차 축복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45). 우리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정하라
두 번째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정하라’입니다. 여기서 ‘정’은 한자로 ‘정할 정’定입니다. 죄 사함의 세례 은총을 받은 자는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정함이 있어야 하나요.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눅3:12-13). 여기에서 세리는 오늘로 말하면 국세청 직원입니다.
청라국제도시역 앞에 들어선 대형 빌딩이 있는데 하나금융그룹입니다. 본사를 청라에서 유치한 것이지요. 하나금융지주를 모회사로 둔 금융그룹인데요. 1971년 한국투자금융으로 시작되어서, 1991년 외환은행으로 전환했고요. 그후로 여러 은행을 합병하면서 몸집을 키우고, 2005년부터 자회사를 거느린 금융그룹으로 출범하였습니다. 2015년 KEB하나은행으로 사명을 바꾸고 거대 금융 그룹이 되었습니다. 자회사가 10개나 되고요. 2021년 기준으로 자산 총액이 430조에 달합니다. “뭐가 뭐 벌어요.”, “돈이 돈 버는 거예요.” 돈 만지는 곳에 돈을 벌게되는 것입니다. 2천 년 유대나라의 세리는 국세청과 은행 역할을 같이 할 정도로 수입이 많았습니다. 말이 은행이지 대부 업을 세리들이 한 것이죠. 이 세리들에게 세례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정함이 있어야 됨을 알게 됩니다. 돈의 유혹에서만 아니라요. 삶 전반에 있어서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는 탐욕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를 축복합니다. 탐욕으로 얻는 것은 그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우리는 잘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과된 것 외에 거두리 말라’ 정함이 있으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15).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자기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면 욕심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부과된 것 외에 거두려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열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출20:17). 이 구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이것이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것이 아니면 욕심을 내지 말아요. 선한 동경과 선한 경쟁은 있어야 한다고 보아요. “하나님 우리 교회도 저 교회가 하는 것 아니 그 이상 아름다운 주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이런 선한 동경과 선한 경쟁은 바람직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 거둔 것을 우리가 대가 없이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힘들이지 않고 거두게 하시는 것이 있어요. 교회적으로 영적으로 말이죠. 성도님 인도나 헌금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그 뒤를 보면 절대로 그냥은 아니었어요. 가끔 저에게 “목사님 좋은 곳에 쓰세요.”라며 외부에서 보내오는 예물이 있습니다. 받을 때 참 감사하지요. 그것도 선물이니 은혜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로 비교하면 제가 그 분들에게 10을 했을 때, 최고가 10 그렇지 않으면 많아야 7-8이에요. 제가 그 분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하거나, 가르침을 통해 봉사하거나, 다른 이들 모르게 헌신으로 쌓았을 때, 시간이 지난 후, 제가 그분들에게 받게 되는 것이지요.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한 것을 심으세요.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6-7).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자기 것 아닌 것에 미련 두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영적 육적 모두 말입니다. 예수님은 전도하러 보낸 제자들에게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10:9-10). 우리 예수님은 정함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꼭 필요한 이외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감당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족하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 두 번째는 정하라인데요. 이것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 세 번째 족하라와 연결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세 번째는 족하라입니다. 여기서 ‘족’은 만족할 때 ‘족’입니다.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4). 2천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군대는 치안까지 책임지고 있었고요. 유대 백성들의 송사에까지 관여 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군, 검찰, 경찰을 독점하고 재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권력이 집중되면 거기에 어마어마한 이권이 따라 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군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앞에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라’고 정할 정 ‘정하라’고 하였고요. 군인들에게는 ‘받는 급료로 족한 줄로 알라’ ‘족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과로 얻는 수입에 정함이 있을 때 족하면 만족이 있는 것이지요.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맛이 간사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는 맞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인이기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맛이 간사하다”는 말을 종종 사용하게 됩니다. 이 말이 쓰이는 경우 중 하나가 더 받을 때입니다. 좋은 것을 맛보면 계속해서 좋은 것을 맛보고 싶은 것입니다.
종교인 과세가 시작되어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그동안 사용하던 교회 비영리 번호 89를 82로 변경하는 것입니다. 89도 비영리인데요. 이것은 일반 복지 단체도 겸하는 것이기에. 교회는 종교단체 번호인 82로 변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용하던 89번호는 행정적 폐업으로 처리했고요. 신규로 82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문제가 되는 것이 교회 명의 통장이었습니다. 개척 때부터 우체국과 거래를 해오고 있는데요. 제가 집이 서울에 있을 때, 교회 통장을 서울 우체국에서 발급받은 통장이 3개가 됩니다. 왜 이렇게 통장이 많나 구요. 재정이 너무 많아서 이것 저것 관리할 게 많아서 그래요. 그런데 비영리 번호가 바뀌었으니 통장을 다시 다 발급받아야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기존에 사용하던 것을 다 폐기해야되고, 여러 번거러움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발급받았던 서울 우체국에 얘기를 했더니, 서류를 이래 이래 준비해서 갖고 오면, 기존 통장에 고객번호만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라우체국에 갖더니 이곳에서는 그런 업무를 처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2시간 가까이 소요가 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도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우체국 앞 편의점에서 주스와 파이를 사러 갔어요. 그런데 창구에서 처음 일을 진행하는 직원이 생각이 들더군요. 그 분도 처음하는 일이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일 처리하면서 상급 부서에 전화만 다섯 통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한 개씩 더 사들고는 업무가 끝난 다음에 수고했다고 드렸더니,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연신 인사를 하면서요. 그 후로 우체국에 볼일이 있어 제가 갈 때, 창구에서 그 직원을 만나면, 저에게 어떻게 하겠어요. 예! 더욱 친절하게 해줍니다. 주스 한 병 파이 하나가 뭐 대단하다고요.
여러분 혹시 어떤 일을 하고서 받기로 한 급료보다. 일 이 만원 더 받은 경험계세요. 그때 기분이 어떠세요. 좋지 않아요? 나중에 그곳에서 일을 다시 하게 되면 열심히 하게 되겠지요. 이렇게 사람 입맛이 간사하다 그 말이에요. 받은 급료보다 더 받으면 아니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대접받으면 좋은 것이 사람이에요. 이렇게 작은 것에서 그러한데 그 단위가 크게 되면, 더욱이 조금만 편법을 쓰면 큰 차익을 거둘 수 있는데, 받는 급료에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더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합당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급료에 족할 줄 안다는 것은 감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눅9:58.참고/마8:20). 자신의 쉴 곳조차 없으심에도 아버지 하나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의 삶도 수용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족함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죄 사함의 세례를 통해 회개하면 이상 세 가지 ‘나누라’, ‘정하라’, ‘족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누라’ 섬기라는 것이고요. ‘정하라’ 욕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요. ‘족하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한 자
악에 악을 더한 자
그러나 이렇게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무리들과 세리들과 군병들과 달리 끝까지 회개를 거부한 자가 있었습니다.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3:19-20). 여기 말씀에 보면 헤롯이 등장하는데요. 이 자는 예수님 탄생 때 죽이려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이 집안은 대대로 로마황제와 결탁하여 이스라엘을 지배했는데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눅3:1). 당시 로마의 황제는 디베료TiberiusTiberius Caesar Augustus,로마제국 제2대 황제,BC42-AD37였고요. 그는 이스라엘을 네 등분해서 분봉 왕들을 통해 간접 통치했습니다. 유대지역은 총독 빌라도 본디오, 갈릴리 지역은 헤롯, 이두래 곧 에돔 지역은 헤롯의 동생인 빌립, 아빌레네 곧 두로와 시돈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은 루사니아가 지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중 헤롯과 빌립은 이복 형제사이로 헤롯대왕의 아들들입니다. 빌립은 하스몬 왕조 후손으로 왕족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를 얻게 되는데요. 헤로디아는 빌립과 이혼하고 시숙인 헤롯과 결혼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불의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고 직언 하였습니다(마14:4).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가 그 말씀입니다(눅3:19). 이렇게 헤롯이 악행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눅3:18).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 ‘좋은 소식’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3:3). 그런데 세례 요한으로부터 좋은 소식인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은 이들이 있었는가하면, 헤롯과 같이 악행한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똑같이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요. 하나는 회개하고 다른 하나는 악행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헤롯은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고 하였습니다(눅3:20). 헤롯은 제수를 아내로 들이는 악행만이 아니라, 이러한 부정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처음에는 죽이려 했습니다(마3:5). 분봉 왕이라는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이 세례 요한을 따름으로 백성들이 동요가 일어날까 봐 두려워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옥에 가두어 자신을 비난하는 세례 요한의 입을 봉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헤롯은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엄연한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악행에 더해 이를 비판하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악을 더 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실 때,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은총을 축복합니다. 헤롯과 같이 악에 악을 더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에 유혹에 예외는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헤롯과 같이 악에 악을 더하는 자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헤롯과 같이 권력을 갖고 있거나 가졌던 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후손들이 손쉽게 입신양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으로 그들의 불의한 치부恥部가 들어났습니다. 여러분 이때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던가요. 아니면 끝까지 부인하고 납득할 수 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던가요. 후자가 대부분이죠. 오늘 본문의 헤롯과 다를 바가 없죠. 이를 본 많은 ‘흙수저’ 서민들은 그들을 보면 비판을 넘어 분노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재물과 신분을 얻는 데에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보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고 있는 ‘흙수저’ 서민들 있지 않습니까? 이 ‘흙수저’ 서민들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흙수저’ 서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역시나 다를 바 없이 물질을 쌓고 가문을 유력하게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엡2:3). 여기서 ‘전에는’ 예수 믿기 이전이라는 뜻이고요. 세상 사람들 본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본성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합니다. 즉 내가 권력이 없기에 내 육체의 욕심을 따라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할 뿐이지, 나에게 권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 육체 욕심을 따라 재산을 쌓고, 자녀들이 대대로 잘먹고 잘살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지금 불의를 드러나는 자들을 비난하지만,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해서 못할 뿐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이 될까요? 좀 유치한 질문이지만요. 수백억 수천억으로 떵떵거리며 10년 사는 것과, 성경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가정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것을 선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잠17:1). 쉽게 결정하기 힘들죠. 어쩌면 권력으로 치부한 자들을 비판하는 한 면에는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 없지 않은지도 모르는 부끄러운 내면이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흙수저인 내게 권력이 찾아와 재물의 부요와 신분 상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비리가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부정을 자백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하든 덮을 때까지 덮어보려고 하겠습니다. 이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없겠지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악에 악을 더한 헤롯은 어느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요. 나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경제 용어로 말하면 이노베이션Innovation입니다. 내 안을 다 바꾸어야 합니다. 내 안의 더러운 인간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을 다 들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좋은 소식’,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받은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전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을 하남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장차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늘에 앉게 될 신분입니다. 이러한 영광된 신분이 보장된 저와 여러분이기에 이노베이션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수를 아내로 삼는 악행을 범하고 이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 악에 악을 더하는 자의 유혹과 전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수준이 같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악의 트리플 크라운
헤롯이 이렇게 악에 악을 더했는데요. 그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는 어떠했을까요? 또 헤로디아가 전 남편 빌립과 사이에서 낳은 살로메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헤롯의 생일날이 되었습니다. 헤롯은 고관대작들을 불러 연석宴席를 베풀었습니다. 잔치자리의 흥이 무르익는 가운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새 아빠인 헤롯을 아주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연회를 배설한 헤롯이 술이 거하게 체했는지, 자신의 생일에 춤으로 분위기를 띠운 딸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마14:7). 아직 어린 살로메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이 말을 전했습니다(참고/마14:1-12;막6:14-29;눅 9:7-9).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헤롯 만큼이나 수치스러워 했습니다. 평소에도 세례 요한을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딸 살로메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달라고 헤롯에게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은 근심하였지만, 왕으로써 맹세한 것과 연회에 동석해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 위신 상 세례 요한을 참수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스토리는 악에 악을 더한 헤롯은 자신 뿐 아니라, 그 아내와 여식마저 악에 악에 악을 더하는 악의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악의 삼관왕을 가진 집안이 됩니다. 가족 안에서 한 구성원이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다른 가족 구성원이 끊지 못하고 참여하게 되면, 이렇게 악에 악에 악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역사 가운데 보았습니다. 끝내는 그 가문 때문에 최고의 권력자가 권좌에서 축출되지 않았습니까?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잠14:22).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을 도모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였습니다(롬12:17). 설사 내가 악한 공격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선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지향하고 행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헤롯 가문은 죄 사함의 세례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 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분문은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은 자들과 대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여 ‘나누라’, ‘정하라’, ‘족하라’ 세 가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누라’ 섬기라는 것이고요. ‘정하라’ 욕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요. ‘족하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롯과 그의 가족에게는 없었던 것이지요. ‘죄 사함의 세례’,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듣고도 말입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8-9).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자는 즉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은 헤롯 집안은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지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악에 악을 더하고 그 악에 아내와 딸도 또 악을 더한 헤롯 가문은 나중에 로마황제로부터 갈리아로 추방당해 그 곳에서 쓸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리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칭찬을 받았던 선지자였습니다(마11:11;눅7:28).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눅3:2.참고/눅3:4-10).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눅3:3). 이 귀하디 귀한 복음을 능력의 사람에게 듣고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은 이들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악에 악을 더한 악행자가 있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좋은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이들은 먼저 두 벌 옷을 옷 없는 자들에게 나눠는 섬김을 가졌습니다(눅3:11). 이 말씀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같이 서민들도 옷이 남아돌아가는 시대가 아닙니다. 한 옷을 갖고 1년 내내 입어야 하는 예수님 당시의 때입니다. 그들이 어렵게 어렵게 해서 두 벌을 옷을 갔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벌을 나눈다는 것은 수십 벌의 옷을 갖고 있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씀은 곧 부족함에도 나누어야 함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많다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나눔을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이니까요? 바라기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물질의 복을 주셔서 부유한 가운데 나눌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유롭지 못할 때부터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음 가운데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하는 세례를 통해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첫 번째는 나누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45). 우리 예수님은 나눔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통해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두 번째는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라’고 하십니다(눅3:13). 이것은 ‘정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은 정할 정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고 하십니다(참고/출20:16-17). 이것이 부과된 것 외에 거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아비전교회 공동체 가족 여러분 자기 것 아닌 것에 미련 두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영적 육적 모두 말입니다.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통해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 두 번째는 정하라인데요. 예수님은 전도하러 보낸 제자들에게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10:9-10). 우리 예수님은 정함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감당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 세 번째 ‘족하라’와 연결됩니다.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눅3:13). 만족할 때 족 ‘족하라’입니다. 우체국 직원 예를 들어 드렸죠. 주스 한병 파이 하나에도 그렇게 고마워하는게 사람이에요. 그런 인간의 심리는 더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해요. 그것이 합당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급료에 족할 줄 안다는 것은 감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눅9:58.참고/마8:20). 자신의 쉴 곳조차 없으심에도 아버지 하나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의 삶도 수용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족함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죄 사함의 세례를 통해 회개하면, ‘나누라’, ‘정하라’, ‘족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누라’ 섬기라는 것이고요. ‘정하라’ 욕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요. ‘족하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좋은 소식’을 듣고도 회개를 거부한 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헤롯과 그의 가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악을 행하고도, 이를 비난하는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어 악에 악을 더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 남편과 이혼하고 시숙과 재혼한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는 기회를 엿보다가 세례 요한을 참수토록 하였습니다(마14:1-12;막6:14-29;눅9:7-9). 이러한 죄에 딸까지 가담하게 했습니다. 가장이 악에 악을 더하고 그 가족이 그 악을 끊지 않자 악에 악에 악을 더하는 가문이 된 것이지요. 이 집안 훗날 유배지로 추방되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의 가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론
다시 한 번 상기합시다. 죄 사함의 세례를 통해 회개하면 ‘나누라’, ‘정하라’, ‘족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누라’ 섬기라는 것이고요. ‘정하라’ 욕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고요. ‘족하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본을 보이신 말씀입니다. 이 저와 여러분은 장차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게 될 신분입니다. 세상과 같아서는 안되는 이유이죠. 우리는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복 주시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첫 번째, ‘나누라’입니다. 나눔을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입니다. 부유함에도 여유롭지 못함에도 섬기어, 받는 분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두 번재 ‘정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이외에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 것을 탐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따라 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세 번째 ‘족하라’입니다. 월급 이상을 받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합당한 방법이 아닌 것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받은 급료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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